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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자료실

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파주의 집단 암매장 의혹과 광주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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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의 집단 암매장 의혹과 광주학살



광주직할시 북구 망월동 광주 시립 묘지와 경기도 파주군 광탄면 용미3리 서울 시립 묘지.

낯선 한반도 이 남의 두 지명이 강한 불행 의 예측으로 전국민의 가슴속에 자리잡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5월 피의 역사를 머나먼 땅 밑으로 숨기려는 검은 무리들에 의하여 무등산 달빛을 타고 넘어 호남 평야를 가로지르고 북으로 향하다가 이곳 경기도 노고산 기슭에까지 실려 왔기 때문일까?

망월동 5·18묘역에 있는 가로 20cm의 검은 대리석 묘비가 차라리 부러운 광주에서의 주검들이 기에 낯선 땅밑, 망자(亡者)의 침묵을 거부하고 "80년 5월 광주에서의 대 학살"을 연상케 하는 매스컴 의 순간 뉴스로 우리 앞에 나타났기 때문일까?

『경기도 파주에서 520여구의 무더기 유골 발굴』이라는 저녁 TV뉴스 보도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파주로 달려간 5·18민중 항쟁 행방 불 명자 가족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그것은 "내 자식의 뼈가 어찌 하여 천리 길 이곳까지 왔을까?"하는 슬픔과 함께 경상도 밀양에서 뉴스를 듣고 곧바로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왔던 장광인씨(39세)의 말처럼 "노태우도 이젠 끝장 났습니다"하는 분노의 마음을 가졌으리라는 짐작은 그리 어렵지가 않다.

80년 5월 광주 민중 항쟁 과정에서 집을 나간 자식들의 뒷모습을 그리며 지난 9년 동안 하고 많은 밤을 지세 워 온 행방불명 자 가족들의 통한의 오열이 새어 나오는 가운데 지난3월 13일 경기도 파주에서 발굴된 무더기 유골은 매장 장소와 매장된 형태들로 보아 5월의 시신들이 아닌가 하는 강한 의혹을 던져 주고 있다.

특히 광주 학살 이후 소문으로만 떠돌았던 암매장 사체가 주남마을과 부엉산에서 발굴됨으로서 무성했던 소문이 사실로 입증되고 있는 가운데 이번에 발굴된 520여구의 무더기 유골들은 노태우 정권이 제시한 행려 병자와 무 연고자 유골이라는 자료마저 신빙성이 없어 5·18과의 관련 가능성이 더욱 강하게 대두되고 있다.

시립 묘지의 이장 현장 책임자 유인근씨 (59세)에 따르면 서울 시립장 묘 사업소가 무연고 묘지 이장을 위해 용미리 100-5구 지역에 대한 발굴 작업을 하던 준 3월13일에 370여구, 14일에는 152구 등 모두 520여구의 유골이 무더기로 발굴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서울 시립장 묘 사업소장 차병식씨(57세)는 "이번에 유골이 발견된 현장은 시청 구청 등의 확인 후 적법한 매장 절차를 밟아 매장하거나 다른 지역에서 무연고 유골로 이장된 유골을 함께 매장해 왔던 곳" 으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측의 이러 한 입장에도 불구하고 지켜본 5월 관련 당사자들과 않은 관계자들은 정상적 매장에 의한 유골은 분명 아니며 행려병자나 유골이 라고 인정하기에는 많은 의문점 과 의혹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보다 더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조사가 진행되어 5 ·18과의 관련 여부를 밝혀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이에 대하여 지금까지 드러난 의혹을 현장 중심으로 밝혀 보고자 한다.

▲의혹1, 암매장 장소에서 발견된 유류품은 봄옷이 대부분이었다.

"이 옷이 아버님 옷이 틀림없다. 집을 나가실 때 이 바지를 입었고 속에는 이 잠옷도 입고 있었다" 고 유류품을 들고 울어 버린 김점례(39세 광주시 풍향동)씨는 80년 5월 18일 광주 공원에 놀러 가신다고 나간 후 행 불이 된 시아버지(박갑용 67세)의 마지막 모습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며 옷가지를 살펴보면서 슬픔을 참지 못했다.

이처럼 현장에서 발견된 유류품은 봄에 입눈 얇은 옷이 대부분이었는데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유류품 중에서 나일론등 화학섬유로 만들어진 옷은 거의 완전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었고 주로 봄이나 초가을에 입는 얇은 긴소매 T셔츠 종류와 바지등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는 바로 매장된 시신들이 봄이나 가을에 죽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부측에 서 주장하는 행려 병자나 무 연고자의 사체라면 결코 이러 한 유류품이 대다수를 차지할 수 없다.

상식 적으로 행려 병자가 가장 고통받는 계절은 1년중 겨울이며 따라서 객사가 다른 계절보다 많다고 할 때 행려병자의 유류품이 라면 응당 두꺼운 겨울옷이 상대적으로 많아야 한다. 80년 광주에서의 대학살은 분명 봄이었다.

▲ 의혹2,유골에서 나온 치아는 대부분 젋은이의 치아였다.

이번에 발굴된 파주 유골의 치아는 젊은이가 가질 수 있는 튼튼한 이빨이 많았다. 행려 병자나 무 연고자의 유골이라면 어떻게 튼튼한 젊은이의 치아가 대다수를 차지할 수 있겠는가?

사체의 주인공을 확인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에서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쉬운 같은 치아의 상태를 검사하는 일이다. 인간을 포함한 포유류에 있어 이빨만큼 세월의 흐름에 오래 견디는 것은 없다.

살 부분은 말할 것도 없고 뼈도 쉽사리 박테리아의 침식으로 상하게 된다. 그러나 이빨은 생체의 어떤 부분보다도 견고하여 거의 온전한 상태로 보존된다.

금번 파주에서 발굴된 520여구 유골에서도 대부분의 뼈는 심하게 부식되었지만 두개골에 뭍은 치아만은 거의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이 치아들이 대부분 젊은이가 가질 수 있는 튼튼한 이빨임을 확인한 관계자들은 5·18때 희생된 사체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강하게 표시했다. 왜냐하면 행려 병자나 무 연고자의 유골이라면 그들이 늙어서도 튼튼한 이빨을 가진채 죽었거나 아니면 이곳에 묻힌 주인공들은 주로 젊은 행려 병자였다는 것을 반증하기 때문이다. 젊은이가 행려병자가 되어 떠돌아다니다가 이처럼 한꺼번에 묻힌 경우를 상상할 수 있겠는가?

▲의혹3, 무더기 유골은 극히 비정상적으로 매장된채 발굴되었다.

520여구 유골은 대부분 구덩이 한 곳에 2∼10여구 사체가 남 · 여 구분 없이 매장된 채 발굴되었다. 사체가 누운 형태도 서로 포개지고 겹쳐 있었다. 무엇이 그렇게 급하고 무엇에 쫓겨서 이처럼 비정상적으로 묻어야 했는가? 그것도 구덩이 깊이는 불과 50cm도 안되었다.

지난1월11일 광주 근교 주남마을에서 발굴된 유골 역시 2구의 사체가 동일 장소에서 발굴되었고 매장된 형태나 매장 방법으로 보아 5 · 18과의 관련 가능성을 제시해 주었고, 이번에 발굴된 파주에서의 무더기 유골 역시 정상적인 절차에 의한 매장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비록 행려병자의 죽음일지라도 장례 의식을 중히 여기는 우리의 풍습과 잠재된 의식은 죽은 자에 대한 어떠한 형태의 결례를 허용하지 않는다. 단, 전쟁 중일 때는 집단 학살과 집단 암매장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사체들이 묻혔을 70년대 이후 한반도에서 전쟁은 없었고 단지 공수 부대에 의한 광주 양민의 집단 학살이 80년 5월에 있었을 뿐이다.

▲ 의흑4.정부에서 행려병자나 무연고 묘라는 주장은 그들이 만든 법에도 맞지 않는다

정부는 70년대에 묻힌 무 연고자와 행려병자의 유골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무더기 유골이 발굴된 서울 시립 묘지 관리 소측에 서는 이 유골들이 70년대 초에 무 연고자 유골과 행려병자의 사체를 집단으로 매장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매장 및 묘지 등에 관한 관리 법』에 의하면 ①무연고 유골의 안치 기간은 10년으로 한다. ②도지사는 제①항의 규정에 의한 안치 기간이 경과한 유골에 대하여는 이를 땅에 묻어 처지 할 수 있다. 이 경우 그 처리는 위생적으로 하여야 하며 심도는 1미터 이상이어야 한다(제5조의 2(무연고 유골의 처리에 관한 법))

이와 같이 법규정 에 따르자면 이 번에 발굴된 유골은 80년 초에 이미 다른 장소로 안치되었어야 하며 유골이 묻힌 깊이도 1m이상이어야 함에도 겨우 50센티도 안된 서둘러 매장된 유골들이었다. 법을 어기면서까지 매장된 유골의 주인공들은 과연 누구일까?

▲의혹5, 관리소 측이 제시한 무 연고자의 묘지 표지가 실제 발굴된 장소는 상당한 거리 상의 차이가 있었다.

묘지 관리소 측에서 제출한 도표에 의하면 100-5구다 지역에는 무 연고자의 매장 지역 이 표시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로 520여구 유골이 발굴된 장소는 도표와는 상당한 거리에 있는 시립 묘지 경계 부분인 소도로 옆이 었다. (그림 참조)

▲의흑6, 80년초 파주 근처에 집단 암매장 소문이 떠돌았다.

당시 시립 묘지가 있는 경기도 파주 인근에는 헬기로 많은 시체를 싣고 와 시립 묘지에 묻었다는 소문이 인근 주민들에 의하여 떠돌았다.

소문은 글자 그대로 소문 일수도 있고 확인되지 않고 있는 사실일 수도 있다. 지난날 광주에서의 참혹한 학살의 현장을 직접 목격하진 못한 일부 국민들에게 그 사실은 소문이었고 전해들은 말뿐이었다. 그러나 9년이 지난 지금 광주 양민 학살은 소문이 아니라 사실일 따름이다.

따라서 80년초 광주 학살은 소문으로밖에 들을 수 없었던 파주에서, 구체적인 운송 수단까지 거론되어 퍼졌던 소문은 사실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 수 밖에 없다.

이상과 같은 의혹을 현장에서 직감하면서도 부모·형제의 뼈 일수도 있다는 슬픔 속에 유골들을 한데에 드러내 놓고 파주를 떠나야 했던 5·18행방 불 명자 가족들의 마음은 차라리 분노로 숨이 막히는 듯 보였다.

80년 5월 어린 아들을 잃고 가정 파탄에 까지 이른 이귀복씨 (52세, 행불 가족회 부회 장)는 "다른 유골보다도 유난히 작은 유골이 보이 길래 행여 내 자식의 유골이 아닌가 하여 망연 자실 했습니다.

그런데도 광주시청 에서는 거짓말로 신고했다고 하는데‥‥ 결국 노태 우를 처단하는 길밖에 광주의 한을 풀 방법은 없습니다"라고 주먹을 불끈 쥐면서 『5.18노래』를 시작했다. 노래가 아니라 목에 힘줄이 불끈 튀어나오도록 고성을 지른 악이었다.

파주에서 무더기 유골 발굴 소식이 매스컴의 반짝 뉴스로 알려진지 1달! 이 엄청난 의혹이 망각으로 혹은 은폐로 또다시 땅 밑으로 묻혀 버리지나 않을까?

애써 무시하려는 이 땅의 정 치 인이나 또 다른 무리들을 보면서 조국의 하늘 아래 공존할 수 없는 분명한 명제가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광주 시민을 학살한 학살 자와 그 학살 자에 의하여 죽임을 당한 광주 시민은 부엉 산이나 주남마을의 유골이 그리고 이 파주의 무더기 유골이 말을 해주듯 결코 『화해』라는 말장난으로, 『공존』이라는 언어로는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은 단순한『의혹의 밝힘』이 아니라 역사의 진실과 민족의 참삶을 위한 지난한 투쟁의 길이 여야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