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발굴취재① 5·18희생자 유가족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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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취재① 5·18희생자 유가족을 찾아서
28세에 남편 잃고 12년째 홀로 사는 손창순씨의 한 맺힌 절규
"여보 , 여섯 살 주영이가 이제 당신만큼 자랐어요."
지금이라도 불쑥 남편이 방문을 열고 들어올 것만 같아
"민주화를 위해 십자가를 진 남편의 죽음이 폭도였다는 누명을 벗고 정당한 평가를 받았으면 하는 바람이 내 죽기 전의 소망이며 아빠 없이 훌륭하게 잘 자라 주는 아이들에게 떳떳한 엄마의 모습을 보여 주는게 남은 생애 동안 제가 할 일이죠."
광주직할시 서구 봉선동에 살고 있는 손창순씨(40)
80년 5월. 당시 스물 여덟 살의 나이에 남편을 잃고 지금껏 수절하며 남편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 한 많은 세월을 눈물로 보낸 지도 어언 12년.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그렇게 한순간 세상을 저버릴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아무 잘못도 없이 그 아까운 청춘을 저머릴 줄을 ."
손씨는 말을 잇지 못한다. 이미 12년의 세월이 흘러갔건만 남편(양인섭 당시33세)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불쑥 남편이 방문을 열고 들어올 것만 같아요. 잠시 외출하고 돌아오는 것처럼"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이미 오래 전에 남편을 보냈지만 결혼6년 동안의 그 애틋하게 살아온 생활이 한 순간이라도 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 누구보다도 인정 많고 자상했던 남편.
아빠가 보고 싶어요.
아빠는 왜 집에 오지 않죠
"그날은 80년 5월 21일 이었죠. 시내에서 당구장을 운영하던 우리 부부는 점심 식사를 마치고 잠시 외출을 했었죠. 갑자기 우리 부부 앞에서 학생 하나가 뒤통수를 얻어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거예요. 남편은 그 모습을 보자마자 곧바로 도청 앞 시민의 대열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이게 손씨가 남편을 본 마지막 순간이었다. 그리고 남편은 그날 밤 돌아오지 않았으니,
"그날 밤을 뜬눈으로 지새고 그 다음날 (22일) 남편을 찾아 나섰습니다. 도청 안으로, 상무대로 시체가 놓여 있는 곳은 샅샅이 둘러보았죠 다행이도 남편은 없었지요."
그러나 그 무슨 운명인지 23일날 친척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도청 앞 벽보에 쓰여져 있는 인상 착의가 남편임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정신을 반쯤 앓고 달려가 확인을 한 결과 분명 내 남편 양인섭씨가 분명했어요. 그 자리에서 저는 정신을 잃었습니다. 깨어나 보니 아찔하기만 했어요. 이제 난 어떻게 살아야 하나. 내 아들 주영(당시 6세), 세영(당시 2세)을 애비 없는 자식으로 키운 다는게 절망적이었지요."
하지만 살아 있는 목숨은 어떻게든 살아 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 당시엔 함께 죽을 것만 같았지만 방긋 방긋 웃어대는 아이들을 볼 땐, 더욱더 강하게 흔들림 없이, 훌륭하게 아이들을 길러야겠다는 다짐을 하곤 했죠, 그것만이 명예롭게 죽은 남편에게 보답하는 길이라 여기며"
그러나 아버지 없는 자식을 젊은 나이에 혼자 키우는데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당시 6세된 주영이는 자주 아빠를 찾곤 했다.
"아빠가 보고 싶어요. 아빠 왜 집에 오지 않는 거죠."
죽음 이라는게 뭔지도 모르는 주영인 잠에서 깨어나기가 무섭게 아빠를 찾기 일쑤였고, 그럴적 마다 달래야 하는 손씨의 심정은 미어지는 것 만 같았다. 아빠의 죽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 망월동 5·18묘역에 안장된 아빠의 사진을 보여주며 아빠가 여기 누워 계시다 라고 몇 번을 얘기해 주었건만 주영인 막내가 내였다고. 그러나 무엇보다도 어려운건 우리 세 식구의 생계였어요. 남편만 의지하며 살아 왔던 터라 앞으로 살아가기가 막막해지더군요. 그렇다고 특별히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고."
손씨는 이때부터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만 했다. 남아 있는 자식들을 위해서, 혹은 이미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 앞에 떳떳해지고 싶어서 라도 이를 악물고 생활을 해 나가야 했다.
하지만 산다는게 어디 쉬운 일인가. 이제 젖먹이인 세영이를 데리고 장사를 한다는게 손씨에겐 감당하기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처음엔 주위에서 도와주어 그럭저럭 생활을 해 나갔지만 시간이 흘러 한해 두 해 저물다 보니 친척들의 관심도 무관해지더군요. 어떤 분은 재혼하라는 유혹도 끊임없이 해 오고."
생계의 어려움과 주위에서의 재혼에 대한 유혹. 이로 인해 한때는 방황한 적도 있었지만 손씨에게 있어 재혼이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민주화를 외치다 죽은 남편을 폭도라는 누명을 씌어 매도하고 있는 현실에서 어떻게 남편의 숭고한 뜻을 저버리고 재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손씨는 이럴 때일수록 남편의 명예로운 죽음을 위해 혼자서라도 끝까지 투쟁해야 한다고 스스로 다짐하곤 했다.
"12년의 세월을 어떻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어린이날이 돌아오면 우리 가족은 오히려 대문 밖을 나서지도 않았습니다. 엄마, 아빠 손 붙잡고 놀러 다니는 다른 아이들의 모습을 우리 주영이 세영이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아서요. 나이를 한 살 두 살 먹어 가니깐 주영이도 엄마의 마음을 헤아려 주더군요."
허나 장사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던지 손씨는 생계를 꾸리기 위해 남편이 두고 간 재산으로 장사를 시작했건만 2년을 채 견디지 못하고 문을 닫아야 했다.
"아이들은 점점 자라 가는 데 살아갈 방법이 막막해지더군요. 그나마 있는 재산을 장사한답시고 사그리 말아먹고 말았으니, 생각다 못해 직장을 구하기로 했죠, 하지만 재주가 없는 저에게 좋은 직장이 있었겠습니까. 더구나 아이들이 둘씩이나 되는데."
그때부터 손씨는 단지 살기 위해 서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남의 집 일에서부터 빌딩 청소까지. 새벽부터 저녁 늦은 시간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육체노동을 해야 했다. 지칠 대로 지쳐 집에 돌아오면 주영이와 세영인 엄마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잠들어 있었고, 이런 모습을 바라봐 야 하는 손씨는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세월이 참 빠릅니다. 당시 여섯 살이었던 우리 주영이가 벌써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으니 이젠 남편보다 더 키가 자랐어요. 가끔 주영인「아빠가 자랑스럽다」며 저를 위로하곤 하죠."
그렇다. 하루의 일이 그렇게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주영이와 세영이가 있기에 손씨는 그나마 웃을 수 있었다. 또한 남편의 죽음이 무척이나 자랑스럽기에, 힘든 하루하루 이지만 그나마 견딜 수 있었는지 모른다.
'이제는 울지 않을 것입니다. 아이들도 훌륭하게 잘 자라 주었는데 울지 말아 야죠. 꼿꼿하게 살아가는 엄마의 모습을 자신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라도."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지만 손씨에겐 10년을 지나 12년의 세월이 흘럿 어도 남편의 대한 사랑은 변함이 없다.
오늘도 하루의 일과를 마친 손씨의 두 손엔 남편의 영정에 받쳐질 한아름의 노란 국화꽃이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28세에 남편 잃고 12년째 홀로 사는 손창순씨의 한 맺힌 절규
"여보 , 여섯 살 주영이가 이제 당신만큼 자랐어요."
지금이라도 불쑥 남편이 방문을 열고 들어올 것만 같아
"민주화를 위해 십자가를 진 남편의 죽음이 폭도였다는 누명을 벗고 정당한 평가를 받았으면 하는 바람이 내 죽기 전의 소망이며 아빠 없이 훌륭하게 잘 자라 주는 아이들에게 떳떳한 엄마의 모습을 보여 주는게 남은 생애 동안 제가 할 일이죠."
광주직할시 서구 봉선동에 살고 있는 손창순씨(40)
80년 5월. 당시 스물 여덟 살의 나이에 남편을 잃고 지금껏 수절하며 남편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 한 많은 세월을 눈물로 보낸 지도 어언 12년.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그렇게 한순간 세상을 저버릴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아무 잘못도 없이 그 아까운 청춘을 저머릴 줄을 ."
손씨는 말을 잇지 못한다. 이미 12년의 세월이 흘러갔건만 남편(양인섭 당시33세)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불쑥 남편이 방문을 열고 들어올 것만 같아요. 잠시 외출하고 돌아오는 것처럼"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이미 오래 전에 남편을 보냈지만 결혼6년 동안의 그 애틋하게 살아온 생활이 한 순간이라도 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 누구보다도 인정 많고 자상했던 남편.
아빠가 보고 싶어요.
아빠는 왜 집에 오지 않죠
"그날은 80년 5월 21일 이었죠. 시내에서 당구장을 운영하던 우리 부부는 점심 식사를 마치고 잠시 외출을 했었죠. 갑자기 우리 부부 앞에서 학생 하나가 뒤통수를 얻어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거예요. 남편은 그 모습을 보자마자 곧바로 도청 앞 시민의 대열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이게 손씨가 남편을 본 마지막 순간이었다. 그리고 남편은 그날 밤 돌아오지 않았으니,
"그날 밤을 뜬눈으로 지새고 그 다음날 (22일) 남편을 찾아 나섰습니다. 도청 안으로, 상무대로 시체가 놓여 있는 곳은 샅샅이 둘러보았죠 다행이도 남편은 없었지요."
그러나 그 무슨 운명인지 23일날 친척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도청 앞 벽보에 쓰여져 있는 인상 착의가 남편임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정신을 반쯤 앓고 달려가 확인을 한 결과 분명 내 남편 양인섭씨가 분명했어요. 그 자리에서 저는 정신을 잃었습니다. 깨어나 보니 아찔하기만 했어요. 이제 난 어떻게 살아야 하나. 내 아들 주영(당시 6세), 세영(당시 2세)을 애비 없는 자식으로 키운 다는게 절망적이었지요."
하지만 살아 있는 목숨은 어떻게든 살아 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 당시엔 함께 죽을 것만 같았지만 방긋 방긋 웃어대는 아이들을 볼 땐, 더욱더 강하게 흔들림 없이, 훌륭하게 아이들을 길러야겠다는 다짐을 하곤 했죠, 그것만이 명예롭게 죽은 남편에게 보답하는 길이라 여기며"
그러나 아버지 없는 자식을 젊은 나이에 혼자 키우는데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당시 6세된 주영이는 자주 아빠를 찾곤 했다.
"아빠가 보고 싶어요. 아빠 왜 집에 오지 않는 거죠."
죽음 이라는게 뭔지도 모르는 주영인 잠에서 깨어나기가 무섭게 아빠를 찾기 일쑤였고, 그럴적 마다 달래야 하는 손씨의 심정은 미어지는 것 만 같았다. 아빠의 죽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 망월동 5·18묘역에 안장된 아빠의 사진을 보여주며 아빠가 여기 누워 계시다 라고 몇 번을 얘기해 주었건만 주영인 막내가 내였다고. 그러나 무엇보다도 어려운건 우리 세 식구의 생계였어요. 남편만 의지하며 살아 왔던 터라 앞으로 살아가기가 막막해지더군요. 그렇다고 특별히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고."
손씨는 이때부터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만 했다. 남아 있는 자식들을 위해서, 혹은 이미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 앞에 떳떳해지고 싶어서 라도 이를 악물고 생활을 해 나가야 했다.
하지만 산다는게 어디 쉬운 일인가. 이제 젖먹이인 세영이를 데리고 장사를 한다는게 손씨에겐 감당하기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처음엔 주위에서 도와주어 그럭저럭 생활을 해 나갔지만 시간이 흘러 한해 두 해 저물다 보니 친척들의 관심도 무관해지더군요. 어떤 분은 재혼하라는 유혹도 끊임없이 해 오고."
생계의 어려움과 주위에서의 재혼에 대한 유혹. 이로 인해 한때는 방황한 적도 있었지만 손씨에게 있어 재혼이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민주화를 외치다 죽은 남편을 폭도라는 누명을 씌어 매도하고 있는 현실에서 어떻게 남편의 숭고한 뜻을 저버리고 재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손씨는 이럴 때일수록 남편의 명예로운 죽음을 위해 혼자서라도 끝까지 투쟁해야 한다고 스스로 다짐하곤 했다.
"12년의 세월을 어떻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어린이날이 돌아오면 우리 가족은 오히려 대문 밖을 나서지도 않았습니다. 엄마, 아빠 손 붙잡고 놀러 다니는 다른 아이들의 모습을 우리 주영이 세영이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아서요. 나이를 한 살 두 살 먹어 가니깐 주영이도 엄마의 마음을 헤아려 주더군요."
허나 장사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던지 손씨는 생계를 꾸리기 위해 남편이 두고 간 재산으로 장사를 시작했건만 2년을 채 견디지 못하고 문을 닫아야 했다.
"아이들은 점점 자라 가는 데 살아갈 방법이 막막해지더군요. 그나마 있는 재산을 장사한답시고 사그리 말아먹고 말았으니, 생각다 못해 직장을 구하기로 했죠, 하지만 재주가 없는 저에게 좋은 직장이 있었겠습니까. 더구나 아이들이 둘씩이나 되는데."
그때부터 손씨는 단지 살기 위해 서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남의 집 일에서부터 빌딩 청소까지. 새벽부터 저녁 늦은 시간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육체노동을 해야 했다. 지칠 대로 지쳐 집에 돌아오면 주영이와 세영인 엄마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잠들어 있었고, 이런 모습을 바라봐 야 하는 손씨는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세월이 참 빠릅니다. 당시 여섯 살이었던 우리 주영이가 벌써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으니 이젠 남편보다 더 키가 자랐어요. 가끔 주영인「아빠가 자랑스럽다」며 저를 위로하곤 하죠."
그렇다. 하루의 일이 그렇게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주영이와 세영이가 있기에 손씨는 그나마 웃을 수 있었다. 또한 남편의 죽음이 무척이나 자랑스럽기에, 힘든 하루하루 이지만 그나마 견딜 수 있었는지 모른다.
'이제는 울지 않을 것입니다. 아이들도 훌륭하게 잘 자라 주었는데 울지 말아 야죠. 꼿꼿하게 살아가는 엄마의 모습을 자신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라도."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지만 손씨에겐 10년을 지나 12년의 세월이 흘럿 어도 남편의 대한 사랑은 변함이 없다.
오늘도 하루의 일과를 마친 손씨의 두 손엔 남편의 영정에 받쳐질 한아름의 노란 국화꽃이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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