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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광주 문제 해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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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문제 해결사』

전남 지역 개발 협의회의 정체 (국민 신문, 1988.5)

80년 5월을 총칼을 짓밟고 등장한 전두환 정권은 자신의 죄과를 은폐하기에 급급한 한편, 5.18피해자나 피해자 단체를 중심으로 분열 내지 회유하기 위해 집요한 공작을 펴 나갔다. 의료 보험증 발급을 미끼로 회원들을 이간시키는가 하면 단체 회장을 금전 혹은 사업 알선 등으로 어용화 시켜 나갔다. 관제 유족 회 박찬봉씨나 관제 부상회 박옥재씨가 대표적인 경우이다.

이렇듯 전두환 정권은 5.18피해자들을 회유하는 과정에서 「전남 지역 개발 협의회」라는 민간단체를 급조, 기관의 조종 하에 주된 역할을 담담케 한다. 임원진은 초대 회장 신태호(전남 상공회의소 회장), 2대 회장에 고광표(대창 석유 사장), 현재는 이훈동씨(조선 내화 사장)가 회장직을 맡고 있다.

발기 취지문에 전남 지역 개발 협의회의 의도나 성격이 명확히 드러나고 있다. "우리 전남은……소득이 낮고 산업은 취약성을 면치 못하고"있다면서 "다행 이도 제 5공화국 수립 이후 국토의 균형 있는 개발이라는 차원에서 대통령 각하께서는 전남 개발을 촉진하기 위해 3,440억 원이라는 막대한 예산을 지원해 주셨고……대단위 제철 공장을 건설하는 등 바야흐로 전남 개발의 새로운 장이 열리고 있다"고 기염을 토한다. 이어 외부적 지원에만 의지하지 않고 "도민의 화합과 단결의 구심체로서 민간 차원에 있어 전남 발전의 중추적 역할을 다당할 가칭「전남 지역 개발 협의회」를 발기하게 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들의 의도는 명백하다. 전두환 일당에 의해 살육 당한 광주 시민을 위로하기는커녕 전정권의 피묻은 손으로 전남을 개발하겠다는 것이다. 그것도 먹을 것이나 던져주면 모든 것이 끝난 다는 경제 주의적 발상이다. 그들의 발상이 기관에 조종에 의한 것이든, 아니든 반민족적 작태로 응징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이것은 표면적인 설립 취지에 불과하다. 실상은 전남 지역 기업인, 전남 출신 타도 기업인 (나중에는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 등 타도 권 출신 기업인도 성금을 내놓았다)들로부터 강제성 금을 거둬 위로금을 명목으로 유족들을 이간. 회유하는데 그 본래 목적이 있었다. 5.18 2주기 추모 제를 방해하기 위해 '전남 도민 단합 대회'라는 관제 대회를 같은 날 18일 무등 경기장에서 치르기 위해 전남 지역 개발 협의회가 급조되었다는 점에서도 그 본래의 도를 읽을 수 있다.

또한 공식 창립 이전 (82년 10월경)에 유족 회, 관제 유족, 부상자 회와의 연석 회의에서 '도민 화합을 위해 5.18유족 부상자에 대한 생계비를 보조해 상처와 고통을 덜어 주어야 한다' 고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아직 기금이 마련되지 않아 도내 기업인, 전남 출신 타도 기업인 등으로부터 성금이 모여지면 지급하겠다'고 약속했다.

83년 2월부터 위로금이 지급되었다. 사망자에겐 1천 만원, 부상자에겐 등급에 따라 1천 만원에서 4백 만원까지 주어졌다. 그러나 이것도 이간책의 하나로 선별적으로 한 달에 2-4명씩 지급되었다 . 그런데 사망자의 경우 망월동 묘지에서 딴곳으로 이장한다는 전제조건이 붙어 있었다. 협의 회측은 유족들을 개별적으로 만나 이장해야 위로금을 받을 수 있고 이장비 50만원도 추가 지급한다면서 회유 . 협박했다. 특히 지방 거주 유족들에겐 경찰서장, 군수, 면장, 심지어 이장, 새마을 지도자까지 동원하고 관제 유족을 앞세워 생활에 쪼들리고 의식이 약한 유족들에게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이런 과정에서 83년 4월 묘5기가 이장되는 등 84년 4월까지 총 26기가 이장되었다. 한편 이장을 끝까지 거부했던 유족들에게는 위로금이 지급되지 않았다. 이때부터 전남 지역 개발 협의회 회장(초대 신태호씨, 2대 고광표씨)을 대상으로 힘겨운 투쟁을 벌여 나간다. 그러나 협의 회측은 경찰을 동원해 유족들을 연행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84년 11월 더 이상 위로금을 주지 않을 이유가 없자 마지못해 위로금을 지급하게 되었다.

전남 지역 개발 협의회는 그의 기관지「전남 개발」85년 겨울호에서 창립 이후 3년간의 활동을 정리하면서 "본 협의회가 발족한 이후 가장 보람있고 큰 비중을 둔 사업 중의 하나를 꼽는다면 광주 사태로 인해 부상을 입은 부상자와 사망자 가족에게 생활비를 지원해온 것"이라고 자화자찬한다. 또한 "이와 관련하여 취업을 희망해 온 50여명에게 일자리를 마련해 주었다"고 공치사 또한 아끼지 않는다. 정말 기가 막힐 정도로 철면피 한이 아닐 수 없다. 취업 알선도 실제에 있어 관제 유족을 대상으로 한 것이고 대개 청소부와 어린이 대공원 매표원 등 취업다운 취업은 하나도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한 발상은 지금도 계속된다. 민화위 활동이 진행 중인 금년 2월15일 3대회장 이훈동씨는 88년을 "우리 지역으로서는 5.18광주 사태가 원만히 해결되는 기쁨과 서해안 개발의 희망찬 시대를 맞이하는 것"이라고 포부(?)를 밝힌 것에서 쉽게 엿볼 수 있다.

전남 지역 개발 협의회는 5.18피해자 생활비 지급 외에도 각종 사업을 벌여 왔다. 장학 사업, 문예 진흥 사업으로 국악 경연 대회와 무등 미술대전, 체육 사업으로 육상 경기 대회 , 자원 개발 사업, 법률 상담, 복지 사업, 안보 강연을 비롯한 홍보 사업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업들은 여기서 논외로 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협의회의 본래 목적과 무관한 사업이고 진정한 전남 발전을 기약할 수 없는 표피적인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들은 전남 발전을 위한 자발적인 노력보다는 전정권의 입장과 맥을 같이 하면서 대변. 홍보하는 성격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쨌든 5월 문제에 관한 한 전남 지역 개발 협의회는 광주의 아픔, 민족의 아픔에 최소한 동참하기보다는 이를 기화로 진정권의 피의 대가(?)로 떼어준 예산과 전남 기업인들의 호주머니를 턴 기금으로 5.18피해자들을 이간. 우롱하여 아픔을 배가 시켜 온 죄과는 민족의 양심 앞에 마땅히 단죄 받아야 한다. 그리고 차제에 자진 해산하여 죄과를 반성하는 동시에 전남 발전에 진정으로, 본질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순수 민간 단체로 개편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