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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법적처리 어떻게 진행돼 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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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적처리 어떻게 진행돼 왔나?

지휘관 35명 고소 '공소시효'가 관건

이재의 (광주일보 기자)

지금까지 광주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은 '정치적'인데 집중돼 왔다. 적어도 지난해 5월 5·18진상규명과 광주항쟁정신계승 국민위원회(공동대표 이창복)와 5· 18민중항쟁연합이 광주책임자 35명을 내란죄로 고소하기 전까지만 해도 '법(法)'보다는 '정치'에 무게중심이 실렸었다. 그러나 올 5월 정국의 최대쟁점은 광주문제의 '법적인 해결' 이 될 게 분명하다.

일반적으로 광주문제처첨 거대한 정치적 사건은 최종단계에서 요식 행위로 법적인 처리절차가 등장하게 마련이다. 즉, 문제를 어느수준에서 마무리지을 것인가 하는 정치적 판단(혹은 합의)이 선 다음 그 후속절차로 법적 처리 수순을 밟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번 광주문제의 법적 처리는 그와 정반대다. 법적 처리절차를 통해 광주문제 해결에 대한 정치적인 판단(수위)을 가늠할수 밖에 없게 돼 있다.법적 판단이 곧 정치적 판판을 그대로 반영한다. 광주문제 책임자로 지목된 35인에 대한 이번 검찰과 사법당국의 태도가 사법적인 차원을 넘어 정치적인 것이 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오항동'의 책임자 고소가 최초

그동안에도 광주문제 해결을 법적인 차원에서 도색하려는 시도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단지 진상규명, 책임자처리, 명예회복, 손해배상, 기념사업 등 광주문제 해결의 핵심적 과제가 표류하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그런 상황에서 법적인 절차는 요식행위 이상 실질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뿐이다.

광주문제를 법적인 차원에서는 2가지 측면으로 나눌 수 있다. 그 한 측면은 사건의 진상을 규명해서 책임자에 대한 형사상 책임을 묻는 법적 절차다. 다른 측면은 피해자에 대한 명예회복, 손해배상, 기념사업 등 보상에 따른 법적 절차다. 논리적으로는 책임을 규명하는 절차가 앞서고 보상은 그 뒤에 따라야 할 후속 조처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 현실은 그 반대다. 보상에 관한 법적인 조처는 꽤 진행됐음에도 불구하고 형사상 책임을 규명하는 측면은 답보상태나 다름없다.

진상규명 측면에서 광주관련 혐의자에 대한 형사상 책임을 묻는 법적 시도는 1988년 10월 6공하에서 5·18광주민중항쟁동지회(이하 '오항동')가 전두환·노태우 등 군 고위지휘관 9명에 대해 광주지방검찰청에 고소한 것이 최초다. 당시 이 고소사건은 광주에서 서울지검으로 이첩돼 80년도에 피해를 입은 국회의원, 해직기자단 등이 고소한 사건과 함께 병합돼 5공비리 차원에서 다뤄졌으나 1심과 2심에서 무혐의 처리됐다. 그러자 오항동은 즉각 재항고했지만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은 채 1993년까지 끌다 무혐의로 처리돼 버렸다.

1988년 11월 17일 '여소야대' 정국에서 시작된 국회 광주청문회는 5공청문회와 더불어 광주문제 해결의 전환점이 될 것으르 기대됐다. 실제로 그해 11월26일 노태우 당시 대통령은 특별담화를 통해 5· 18치유를 위한 특별법을 제정하겠다는 뜻을 밝히 기도 했다. 물론 이때 노 대통령이 언급한 특별법은 진상규명에 관한 것이 아니라 피해보상에 한정된 내용을 뜻했다. 그러자 이에 반발한 5·18관련 단체들은 노대통령이 특별담화를 발표한 바로 그날 '광주의거 방해관련자 처벌법'을 제시하면서 진상규명으로 방향을 몰아갔다.

이듬해인 !989년 2월 24일 국최 광주청문회가 갑자기 중단됐다.청문회에서 광주문제의 진실이 상당부분 밝혀지자 위기의식을 느낀 집권세력 내부 관련자들로부터 강한 반발에 직면한 것이다. 그로부터 광주청문회가 표류하기 시작했고 광주둔제 해결은 국회를 떠나 다시 가두시위의 단골 메뉴가 됐다..

그해 5월 정국은 진상규명, 책임자처벌, 명예회복등을 위한 특별법을 제정하라는 함성으로 전국이 뒤덮였다. 결국 89년 12월 31일 광주학살의 책임자로 지목된 전두환씨가 국회에 섰다. 그러나 전씨는 광주관련 책임 사실을 전면 부인하면서 오히려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발언으로 팍문을 일으켰다. 그러는 와중에 '3당합당'으로 '여소야대' 정국이 '여대야소'로 바뀌자 국회 광주청둔회는 그 기능을 다하지도 못한 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광주의거 방해 관련자 처벌법 '도 제시

사실상 이때부터 김영삼 정권이 들어설 때까지 진상규명과 관련 광주문제 법적 해결을 시도하려는 움직임은 거의 없었다. 여대야소라는 인위적인 정치지형 변화는 광주문제 진상규명 자체를 미궁에 빠져들게 했던 것이 다.

1992년 김영삼 정권의 탄생은 그간 잠복기를 거쳤던 광주 진상규명이 다시 터져나오는 계기가 됐다.문민정부를 표방하면서 상대적으로 군사정권과의 차별성을 부각시킬 수 밖에 없던 김영삼 정권은 어떤 형태로든 최대의 국정 현안인 '광주문제'를 해결해야할 입장에 놓여 있었다.광주문제의 완전한 진상규명에 대한 국민들의 요구도 강렬했다.청와대쪽도 광주 현지와 상의해 은밀하게 5월문제 대표들의 '대통령면담'을 주선했다.'대통령면담'이라는 형식을 통해 정치적으로 광주문제 해결의 수위를 조절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취임 초기인 1993년 3월 l7일 김대통령의 망월동 5.18 묘역 참배가 '3당 합당' 을 비난하는 일부 광주지역 학생과 주민에 의해 좌절되면서부터 문제가 꼬이기 시작했다. 결국 온 국민의 관심속에 예정됐던 대통령 면담은 청와대측의 거부로 취소되고 말았다. 그대신 김영삼 대통령이 특별담화 형식을 빌려 1993년 5월 13일 일방적으로 5월문제 해결방안을 밝혔다. 특별담화는 피해자 명예회복과 기념사업 등에 대해 많은 비중을 뒀으며, 가장 관심을 모았던 진상규명은 '훗날 역사의 평가에 맡기자'고 '선 보상 후진상규명' 원칙을 명백히 했다.

국민 고소·고발운동 1만여명 참가

광준문제 해결에 대한 김영삼 대통령의 방침이 밝혀지자 5월 관련 단체들은 즉각 반발했다. 5월 관련 단체는 그해 6꿜 유남영 변호사가 '기초했고, 이미 11만명의 서명까지 받아놓은 '5·18민중항쟁의 진상규명 등에 관한 법률안'을 특별법으로 제정해 즐 것을 국회에 청원했다. 이 법률안은 지금까지 정부측이나 야당이 마련한 광주관련 특별법이 대부분 '보상'에 한정된 데 반해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검사제 도입과 공소시효 진행정지, 보상이 아닌 배상개념 들을 골자로 한 것이다.

이 법안은 원래 대통령과 광주시민대표의 면담이 성사되면 그 자리에서 직접 제시할 계획이었으나 무산되자 청원형식을 취했다. 이 법안 역시 유야무야 되고 말았다. 하지만 향후 정치상황의 변동에 따를 광주문제 해결에 대한 5월관련단체의 입장을 담은 법를안이라는 점에서 새롭게 제기될 가능성을 남겨두고 있다.

그로부터 1년이 흐른 1994년 i월,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1980년 5월에 발생한 5·18의 형사소송법상 공소시효가 1년 후면 만료되는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공소시효 만료 이전에 아무런 법적 조처를 취하지 않고 이 문제를 방치해 둔 채 1995년 5월을 넘긴다면 실정법의 테두리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할 기회를 영영 상실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이런 위기의식이 관련단체를 비롯해 국민들 사이에 광범위한 공감대를 형성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5.18진상규명과 광주항쟁신계숭 국민위원회'(공동대표 이창복)와 '5·18민증항쟁 연합'(상임의장 정동년) 등 피해자 3백21명이 전두환씨를 비롯 광주사태 진압부대 지휘관 35명을 내란죄와 내란목적살인죄 등으로 서을 지방검찰청에 고소했다. 또한 이 고소를 계기로 전국민 고발운동이 광범위하게 전개됐다. 전국적으로 약 1만여명 이 동일한 사건에 대한 고발장을 제출함으로써 우리 사법사상 최대규모의 국민 고발사태가 벌어졌다.

국민위원회가 고소한 대상 35명은 1980년 5월 광주진압에 투입됐거나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고 여겨지는 대대장급 이상 지휘관들이다. (명단 표 참조)

이들은 대부분 광주진압 이후 5공하에서 훈·포장을 받았턴 것으로 밝혀졌다. 1993년 7월 16일 총무처가 밝힌 바에 따르면 5· 18국 끝난 직후인 80년 10월부터 12월 31일까지 12· 12와 5· 18가담 군인들에게 무더기로 훈장이 수여됐다. 12·12가담자로는 태극무공훈장을 받은 전두환씨를 비롯해 노태우·차규헌중장과 우경운장세등 준장에게는 을지무공훈장, 황영시·유학성 중장은 보국훈장 국선장, 허삼수 준장은 보국훈장, 천수장·소준열 전교사사령관·김기석 부사령관·허화평 대령은 충무무공훈장 등을 받았다.

5·18 광주진압에 가담한 인사로는 정호용·박준병·최세창 등 3명이 층무무공흔장을 받은 것을 비롯해 79명 이 훈장을 받은 것으로 밝혀졌다.

1995년 5궐 공소시효가 임박하면서 국민위원회가 고소한 35명에 대한 검찰의 처리방침이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검찰로서는 어떤 식으로든 결론을 내려야 할 처지다. 고귀나 지난 2월 검찰은 일단 이에 대한 결론을 내려야할 처지다.그러나 지난 2월 검찰은 일단 이에대한 결론을 6월 지자제 선거 이후로 한다는 내부방침을 세운 것으로 알려진다. 이러한 검찰의 태도는 공소시효 만료를 둘러싸고 논란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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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고소인 명단 |

|| 이름 당시직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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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창구 11공수여단 63대대장 |

|| 전두환 '보안사령관 임수원 3공수여단 ll대대장 : |

|| 노태우 '수경사령관 김완배 " 12대대장 |

|| 정호용 특전사령관 변길남 " 13대대장 |

|| 이희성 '계엄사령관 박종규 " 15대대장 |

|| 진종채 :2군 사령관 김길수 " 16대대장 |

|| 소준열 전교사령관 이병우 20사단 60연대 1대대장 |

|| 박준병 20사단장 윤재만 " " 2대대장 |

|| 신우식 7공수여단장 김영철 " " 3대대장 |

|| 최 웅 11공수여단장 차달숙 " " 4대대장 ! |

|| 최세창 3공수여단장 정연진 " 61연패 1대대장 |

|| 정수화 20사단 60연대장 김형곤 " " 2대대장 |

|| 김동진 20사단.61연대장 박재철 " " 3대대장 |

|| 이병년 20사단.62연대장 강영욱 " " 4대대장 |

|| 권승만 7공수여단 33대대장 오성윤 " 62연대 1대대장 |

|| 김일옥 7공수여단 35대대장 이종규 " " 2대대장 |

|| 안부웅 11공수여단 61대대장 유일호 " " 3대대장 |

김인환 " " 4대대장

-------------------------------------|--------------------------------------- 일반적으로는 광주사태가 끝난 1980년 5월 27일을 기점으로 했을 때 공소시효 만료일은 1995년 5월 27일로 알해지고 있다. 그러나 검찰은 이 사건의 공소시효를 오는 8월 15일로 잠정 결론 짓고 있다. 검찰의 견해는 1980년 8월 16일 최규하 대통령 하야시점을 기준으로 본다는 것이다. 검찰의 입장은 이 문제가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으로 오는 6월 지자체 선거에서 선거쟁점으로 부각될 우려 때문인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만약 이사건의 죄명이 '내란죄'로 확정될 경우 검찰의 입장대로 공소시효 만료일을 8월 16일로 하면 또 다른 문제를 안고 있다.

'내란죄'는 대통령 재임기간에도 형사소추가 가능하므로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에 대한 공소시효는 오는 8월 15일로 완성된다. 검찰이 지방선거가 끝나자마자 수사결과를 발표한다 해도 공소시효 완성까지는 한달반 밖에 남지 않아 고소·고발인들이 항고·재항고를 거쳐 헌법소원을 내더라도 헌법 재판소는 이미 공소시효가 지나버린 상태기 때문에 더이상 심리할 필요가 없어져 버린다. 결국 이 사건은 실질적으로 공소시효완성 이라는 족쇄에 묶여 법적으로는 영원히 미제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진상규명 피해자 중심 , 보상은 정부 주도

한편 진상규명을 위한 법적인 노력이 주로 피해자 중심이고 흐지부지된 경우가 많은데 반해 보상에 관한 법적조치는 정부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시행해 대조를 보이고 있다. -

1985년 6월 국방부가 국회에 제출한 '광주사태보고서'에 따르면 5· 18직후 10일간 사망자를 파악해 유족 1백64명에게 1천4백30만원씩 위로금을 지급한 것을 시작으로 그후에도 몇차혜 입법 절차 없이 행정차원에서 위무책이 모색됐다.

그러다 1988년 1월 2O일 6공하의 민주화합추진위원회는 광주문제 치유 대정부 건의안을 만들었는데 이게 광주보상법의 효시다. 노대통령은 그해 4월 그때까지 폭동으로 불려지던 ,5. 18을 '광주학생과 시민의 민주화를 위한 노력'으로 규정하고 이 건의안을 바탕으로 광주치유대책을 발표했다. 후속 조처로 88 년 6월 국회에 광주특위가 구성됐고, 동시에 광주와 중앙에 지원협의회를 만들어 피해자에 대한 접수를 받았다.그해 11월 17일 국회 광주특위에서 청문회가 시작되자 이에 발맞춰 10일 후인 11월 26일 노태우 대통령은 5· 18치유를 위한 특별법 제정 뜻을 밝혔다,

그러자 5. 18기념사업추진위원회에서는 89년 2월 '5·18광주민중항쟁피해자의 명예회복과 배상에 관한 법률'을 미리 제시했다. 이 법안은 이듬해 90년 1월 송기숙교수 등 교수단이 국회에 청원입법 형식으로 제출했다. 그러나 국회에서는 이 법안을 '보상'이냐 '배상' 이냐, 광주특위에서 다를 것이냐 법사위에서 다를 것이냐는 등의 문제로 난항을 거듭했다.이러는 사이 정부는 피해관련자들에게 최고 3천만원까지 성활지원급을 지급했다..

바로 그 무렵 3당합당이 이뤄지면서 광주특위가 표류하기 시작했다. 3당합당 직후인 90년 3월 8일 국회법사위에는 민자당안이 단독으로 회부됐는데 이안은 명예회복 부분이 흐지부지된 상태였다. 급기야 그해 7월 14일 국회는 여 단독으로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보상 등에 관한 법률'을 날치기 통과시켜 버렸다. 그러자 야당을 비롯해 -5월관련단체는 즉각 보상법시효 가처분신청을 하는 등 날치기로 통과된 보상빕에 대해 두효화투쟁을 전개하였다.

이천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이 법안을 기초로 90년 8월 17일부터 9월 15일까지 피해보상을 강행했다.소위 제1차 보상이다. 이때 신청자 2천6백90명중 최종적으로 2천 2백 27명에게 !천4백26억7천5백만원의 보상금이 지급됐다. 유형별로는 사망자 1백52 명, 행불자39명, 상이후사망자73명, 상이자 1천9 백명, 기타 지원금 지급자 61명 등이다. 그러나 정부의 날치기식 보상에 반발한 상당수 피해자들은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 안된 상태에서 보상은 광주를 또한번 죽이는 셈 이라며 보상을 거부했다.

그후 1993년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자 그해 4월 민주당은 '보상과 명예회복'을 위주로 한 민주당의 법를안을 만들어 5월단체 관계자들과 상의했으나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5월 관련자들은 진상규명 없는 보상은 안될 뿐 아니라 설령 이점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배상'이 아닌 '보상'은 안된다는 입장이었다.

그 직후 김영삼대통령은 5·13특별담화를 통해 명예회복, 기념사업 등과 아울러 피해자 추가보상 문제를 다시 제기했다. 그러나 새로운 특별법제정 대신 지난 노태우 정권하에서 날치기 통과된 광주보상법을 손질 하나 하지 않은 채 그대로 1차 보상때 보상금 수령을 거부한 사람과 추신고자를 대상으로 2차보상을 시행했다. 바로 이점은 피해자에 대한 손해배상도 완전히 해결된 것이 아니라 진상규명과 아울러 앞으로도 계속 남아있을 수 밖에 없는 문제다.

2차보상에서는 광주시민 모두가 입은 피해에 대해서 정부가 상무대 공원 10만평을 광주시에 무상양여하는 집단배상 방식을 취했다는 점이 특이 하다. 93년6월부터 12월까지 실시된 2차보상은 2천7백50명이 추가로 신청 했고 이중 1천8백31명에게 3백79억6천8백만원이 지급됐다. 유형 별로는 사망자 1, 행불자4,상이자 7백63, 연행·구금·수형라 1천63명 등이다.

그러나 2차보상도 역시 홍남순·조비오 등 상당수가 아직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 완전히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보상을 거부했다. 또한 '배상' 이 아닌 '보상'으로 규정한 법률적인 한계와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광주에서 일어난 사건 관련피해자라고 벌률적용범위를 지나치게 축소함으로써 실제로 그 사건의 피해자에도 불구하고 상당수가 보상 대상에서 제외돼 여전히 거지지 않는 불씨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