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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자료실

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광주 항쟁 진상 규명 특별법 제정하라

본문

광주 항쟁 진상 규명 특별법 제정하라

유남영

광주에 있는 5월 단체 관계자들은 지난 2월14일 「5·18 위령탑 건립 및 기념 사업 추진 위원회」 주최로 대토론회를 갖고 광주 문제 해결을 위한 15개 사항을 결정하였다. 이 사항 중에는 소위「광주 사태」에 관한 용어를 「5·18 민중 항쟁」으로 정리할 것이 포함되었다. 이 결정에 따라 광주 시의회 5·18 광주 문제 특위는 4월6일 간담회를 갖고 5월18일을 「5·18 민중 항쟁 기념일」로 지정하는 시 조례를 제정하기로 결의하였다.

한편 김영삼 대통령은 4월1일 「동아 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광주 문제에서 아직 해결되지 아니한 것은 모두 풀어야 한다. 새 정부는 광주 시민들의 의견을 충분히 참작하여 좋은 방향으로 매듭짓도록 노력하겠다 』고 「광주 문제」관한 해결 의지를 밝혔다. 김 대통령은 이러한 의견을 밝히기 전인 3월18일 광주시와 전남 도청을 방문한 후 광주시 망월동에

있는 5·18묘역을 참배하고자 했으나 「민주주의 민족통일 광주 전남 연합」은 진상 규명에 대한 의지 표현이 없는 상태에서는 대통령의 5·15묘역 방문을 반대한다는 취지의 반대 성명을 냈고, 이에 따라 남총련 소속 대학생들이 대통령의 묘역 참배를 저지하기 위해 5·18묘역을 점거하여 버렸다. 김영삼 대통령의 5·18묘역 참배 계획은 무산됐고 남총련은 여론의 비난의 표적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태는 소위 「광주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여야 하는가 하는 시각 차이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광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첫째로 5.18민주항쟁이 어떠한 법적 성격을 갖는가, 둘째로 5.18민중항쟁이 진압된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13년 동안 5.18민중항쟁의 해결을 위해서 어떠한 수준의 조치들이 취해져 왔는가, 셋째로 앞으로는 어떠한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인가 하는 세가지 관점이 깊이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5.18은 국민의 저항권 행사

5.18민중 항쟁은 이를 법적으로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따라 해결책이 달라지게 된다. 이러한 차원은 5.18민중 항쟁에 대한 해결책의 제시가 단순히 사상자에 대한 인도적 배려에 기초하거나 지역 감정의 해소를 위한 정치 현실적 요청에 따른 것이라는 사실적 차원과 확연히 구분된다. 이것은 또한 5.18민중 항쟁이 법적으로는 어찌 됐건 우리 사회의 민주화에 기여하는 바가 많았다거나 민주주의의 확립을 위한 투쟁으로서 역사적 정치적 혁명적 정당성이 있다는 차원의 문제와도 다르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광주 문제」의 진정한 해결을 위해서는「민주적 기본 질서」를 핵심으로 하는 1980년 5월 당시의 헌법 체제와 관련해서 5.18민중 항쟁 그 자체를 규범적으로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하는 규범적 정당성의 차원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된다.

유신헌법은 헌법 제 53조에 의하여 보장된 대통령 긴급조치권에 의해서 그 기능이 정지되었다가 10.26사태 후에 긴급조치가 모두 해제되어 평상적인 헌법 상태로 복귀하였다고 볼 수 있다. 10·26사태 이후의 상태를 헌법이 없는 무 헌법의 상태라고 평가할 수도 있겠지 만, 10·26사태를 전후한 우리 나라의 정치 상황은 새로운 형태의 정치체제를 형성하기 위한 과정 이었다기 보다는 당시 헌법에 의해 이념적으로 선언된 민주적 기본 질서를 현실적으로 실천하기 위한 개혁의 과정이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신헌법이 긴급조치를 통해서 형해 화시킨 민주적 기본 질서라는 헌법의 근본 규범만은 10·26사태 전후의 정치 상황을 구속할 수 있는 우리 나라 정치체제의 최고 규범으로 여전히 유효하였다고 본다. 헌법 학계의 통설에 다르면 ①국민 주권의 선언, ②기본적 인권의 보장, ③권력의 분립, ④법치주의, ⑤복수정당제 등이 이러한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의 내용을 이루고 있다.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라는 헌법 원리에 따르면, 입헌주의 적 헌법 질서를 침해하거나 파괴하려고 하는 국가기관 또는 공권력의 담당자에 대하여 다른 법적 구제 수단이 더 이상 없을 경우, 주권자로서의 국민이 헌법적 질서를 유지하고 회복하기 위하여 최후의 비상수단으로서 국가 기관이나 공권력의 담당자에 대항하여 저항할 수 있는 저항권이 인정된다.

그러나 이러한 저항권은 국민 주권과 법질서를 유지 또는 재건한다는 보수적 소극적 의미의 헌법 보장 수단으로써만 인정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5·18 민중 항쟁은 전형적인 의미에서의 저항권 행사라는 것을 알수 있다. 10·26사태 이후 소위 「신 군부 집단」이 헌법과 법률에 규정된 국군 통수 절차를 밟지 아니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12·12 쿠데타」를 일으킴으로써 정상적인 정치 발전을 가로막은 결과 『군대는 휴전선으로」라는 구호 아래 1980년 5월 전국적인 시위가 벌어졌다. 이러한 시위와 5·18 민중 항쟁은 신군부에 의한 헌법 파괴 행위, 즉 반란 행위에 대응하는 것이었다.

1979년 12월12일에 일어났던 신 군부의 병력 동원 행위는 「작당하여 병기를 휴대하고 반란을 한」 행위로써 「수괴는 사형에 처하고, 모의에 참여하거나, 지휘하거나 기타 중요한 임무에 종사하는 자는 사형, 무기 또는 7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도록」되어 있는 군형법 제5조 1,2호에 위배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이러한 반란 행위는 군형법 제5조에 규정되어 있는 바와 같이 군인이 「작당하여 병기를 휴대하고 반란」하면 그 자체로서 성립하는 것으로서, 반드시 국가를 배반하고 타국에 이롭게 하기 위해서 반역하는 경우에 한하여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비록 김재규 정승화씨 등이 박정희씨의 암살에 관련되어 그를 제거하고 국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군사력이 동원되었다고 하더라도 반란 행위가 성립됨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그렇다면 1980년 5월18일 전후의 전국 일원의 시위를 시발로 한5·18 민중 항쟁은 무력으로 무장한 신 군부 집단의 반란 행위에 대하여 주권자인 국민이 민주적 기본 질서를 수호하기 위하여 항거한 저항권의 행사였다고 볼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5 · 18민중 항쟁은 규범적 정당성을 갖는다. 혹자는 신 군부 집단의 행위가 사후에 대통령 선거 등의 여러

가지 선거에 의해서 합법화되었다고 주장할지 모르나 형사상의 범죄는 사후에 추인 되지 않는 것이다.

이처럼 5·18 민중 항쟁이 민주적 기본 질서를 방어하기 위한 저항권의 행사 였음 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5·18 민중 항쟁에 관해서는 양시론과 양비론이 맞서고 있다.

양시론은 12· 12사태를 통해 군 형법상의 반란 행위를 한 신 군부 집단도 옳고 저항권 행사를 한 광주 시민도 옳다는 견해이다. 그러나 양시론이 타당하다면, 5·18항쟁 관련자 및 광주 시민에 대해서 명예회복을 해주어야 하고 적극적으로 기념 사업도 해야 할뿐 만 아니라, 형사적으로 기소되어 내란죄 등의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에 대해서는 재심 절차를 취

하여 무죄 선고를 해야 할 것이다. 5·18민중 항쟁을 「광주 민주화 운동」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국정 감사 및 조사에 관한 법률」의 부칙과 「광주 민주화 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은 이 양시론의 입장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비해 양비론은 신 군부 집단뿐만 아니라 광주 시민도 잘못했다는 견해이다. 그렇다면 광주 시민은 그 「잘못된 행위」에 대해서 지금까지 충분한 「죄과」를 치뤘기 때문에 신 군부 집단에 대해서도 똑 같은 책임을 추궁하는 절차가 취해져야 한다. 아울러 피해자에 대해서는 보상이 아닌 국가배상법에 따른 손해 배상을 해야 한다.

광주 항쟁 관련자 일부는 이미 내란죄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광주 항쟁 자체가 저항권의 행사였다면 내란죄는 성립하지 않게 된다.

형법상 내란은 「국토을 참절 하거나 국헌을 문란할 목적으로 폭동 하는 것」으로 정의되고 있다(형법 제87조). 여기에서「 국헌을 문란할 목적」이라 함은 「①헌법 또는 법률에 정한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 헌법 또는 법률의 기능을 소멸시키는 것, ②헌법에 의하여 설치된 국가 기관을 강압에 의해서 전복 또는 그 권한 행사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형법 제91조), 또 국토를 참절 한다 함은 대한민국 영토상에 의한 불법 지배 행위를 말한다.

따라서 내란죄가 성립되려면 ①폭동이라는 객관적 요건과 ②국토 참절, 국헌 문란의 목적인 주관적 요건이 필요하다. 그러나 5·18 민중 항쟁은 내란죄의 주관적 요건이 구비되어 있지 않았다.

진상규명 없는 모순된 보상

지난 10년간 5·18 민중 항쟁에 대한 유혈 진압의 해결을 위한 4원칙으로 광주 시민들이 일관되게 주장한 사항은 ①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②사상자 등에 대한 피해 배상, ③항쟁 관련자 등에 대한 재심 등을 포함한 명예회복, ④정신 계승을 위한 기념 사업 등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5·18에 대한 법률적 해결 조치로서 취해진 사항은 ①항쟁 관련자들에 대한 특별사면과 복권, ②「광주 민주화 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의 제정과 그에 따른 보상금의 지급, ③ 「5·18 광주 민주화운동 진상 조사 특별위원회」에 의한 청문회의 개최 등 세 가지 사항이다.

6공화국 헌법은 종전에 폐지되었던 국정감사 제도를 부활해 놓고 있는데, 그 국정감사 및 조사에 대한 세부적인 절차를 규정하고 있는 법률이 「국정감사 및 조사에 관한 법률」(1988. 8. 25. 법률 제4011호)이다. 이 법률은 부칙 조항에서 「5·18 광주 민주화운동 진상 조사 특별위원회」를 국회 법 상의 특별위원회로 규정하였으며 이 부칙 조항에 따라 소위「광주 청문회」가 개최되었다.

또 위 법률에 따르면 국회가 조사 및 감사를 위한 특별위원회를 설치하였을 경우 감사 또는 조사를 마친 때에는 위원회는 지체없이 그 감사 또는 조사 보고서를 작성하여 의장에게 제출하여야 하고 의장은 이를 지체없이 본회의에 보고하여야 한다 (위 법률 제15조). 그리고 국회는 본회의의 의결로서 감사 또는 조사 결과를 처리해야 하며, 감사 또는 조사 결과 정부 또는 해당 기관의 시정을 필요로 하는 사유가 있을 때 국회는 그 시정을 요구하고, 정부 또는 해당 기관에서 처리함이 타당하다고 인정되는 사항은 정부 또는 해당 기관에 이송하여야 하며, 정부 또는 해당 기관은 그 결과를 국회에 보고하여야 한다(위 법률 제16조) .

그러나 현재까지 「5· 18 광주 민주화 운동 진상 조사 특별 위원회」는 아무런 조사

보고서도 내놓지 못한 상태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5·18유혈 진압 관련자에 대한 처벌 등에 대하여는 아무런 조치도 취한 바 없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위 특별 위원회의 청문회 활동은 야당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광주 문제의 사법적 해결을 위한 수준에는 도저히 미치지 못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보상」받지 못한 항쟁 관련 수감자

물론 사상자 등에 대한 피해 배상은「광주민주화운동 보상 등에 관한 법률」(1990. 8. 6. 법률 제4011호)이 제정되어 피해자 2천2백27명에게 1천4백27억4천2백 만원이 지급되었다. 그러나 이 법에 의한 보상금의 지급은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있다.

첫째로, 이 법은 피해자에 대하여 「배상」이 아니라 「보상」을 하고 있다. 보상이란 국가 공권력의 적법한 행사에 따라 각 개인이 입은 「특별한 희생」을 금전으로 손실을 보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법은 5·18항쟁에 대한 유혈 진압 그 자체가 적법하였으며, 다만 그 과정에서 우발적, 부수적으로 민간인이 다치거나 죽었다는 논리에 입각하고 있다. 즉 이

법은 위에서 본 양시론에 입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둘째로, 5·18관련자 중 형사적으로 기소되어 수감된 사람은 이 법의 적용 대상인 「관련자」(「1980. 5. 18을 전후한 광주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된 자 또는 상이를 입은 자」 :위법 제1조)에서 제외시킨 후 동법 시행령 제12조 1항「소정의 별표3」(신체 장애 등급과 노동력 상실률)의 제14등급 상이자(외모에 흉터가 남아 있는 남자 및 여자」)로 취급하여 보상금을 지급하고 있다.

그러나 구속자의 경우, 5·18에 대한 유혈 진압 그 자체가 정당한 것이라면, 무죄 선고를 받기 전에는 사상자와 달리 보상금을 지급해야 할 하등의 논리적 이유가 없게 된다. 즉 구속자를 「관련자」에서 제외시킨 까닭은 5·18에 대한 유혈 진압이 전반적으로 정당하였으며 관련자들에 대한 사상 행위는 진압 업무 도중 우발적으로 발생한 것임에 반해서, 구속자 들은 조직적으로 대규모 시위와 총기 난동 및 내란 행위를 함으로써 범법 행위를 한 사람들이라는 논리에 입각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속자를 상이자로 취급하여 보상금을 지급하는 것은 위 보상법의 취지가 무엇인가를 알게 한다. 더구나 이 보상법은

3당 합당 이후 민자당이 국회에서 날치기로 통과시킨 법이다.

한편 항쟁 관련자들에 대한 명예회복과 관련되어 논의 되어온 사항으로는 ①5·18 민중 항쟁으로 집중적인 피해를 본 광주 시민에 대한 집단 배상, ②형의 선고를 받은 사람에 대한 재심 및 무죄 선고이다.

광주 시민에 대한 집단 배상을 위해서는 상무대 부지의 무상양여 문제가 논의되고 있으며, 형의 선고를 받은 항쟁 관련자는 이미 가석방이나 특별사면 및 복권을 받았다. 그러나 특별사면이란 형의 선고의 효력을 그대로 둔채 단지형의 집행을 면제하는 것이다(사면법 제5조 1항 2호). 그렇기 때문에 명예회복의 차원에서 이들에게도 형사 재심 절차를 취하여 다시 재판을 받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형사소송법에 의하면 재심 청구는 일정한 사유가 있을 때에만 할 수 있다(형사 소송법 제420조). 그러나 5·18과 관련하여 재심 청구를 할 수 있는 조문으로는 『유죄의 선고를 받은 자에 대하여 무죄 또는 면소를, 형의 선고를 받은 자에 대하여 형의 면제 또는 원 판결이 인정한 죄보다 경한 죄를 인정 할 만한 명백한 증거가 새로 발견될 때』라는 조문(형사소송법 제420조 6호)을 들 수 있다. 여기에서 「증거가 새로 발견될 때」라고 함은 확정된 원 판결의 소송 절차에서 발견되지 못 하였거나 발견되었다 하더라도 제출 또는 조사가 불가능하였던 증거를 새로 발견하거나 증거의 제출 또는 조사가 가능하게 된 경우를 의미한다.

따라서 위와 같은 재심 청구를 할 수 있는 「새로운 증거」란 결국 5·18항쟁을 유혈 진압한 신 군부의 행위가 군 형법상의 반란 행위나 내란 행위에 해당하고 5·18항쟁이 헌법을 수호하기 위한 저항권의 행사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이를 입증하는 증거는 결국 지난 광주 청문회의 조사 기록이나 신 군부 집단의 반란죄 및 내란죄 혐의를 수 사한 수사 및 공판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상태에서는 항쟁 관련자들이 재심을 청구하여 법원이 이를 심리한다고 하더라도 무죄 판결을 받기는 어렵게 돼 있다는 문제가 있다.

마지막으로 「정신 계승을 위한 기념사업」 부분을 보자.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 제21조는 정부는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사업이 추진되는 경우 그 비용의 일부를 지원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민간 차원의 기념 사업 이외에는 이루어진 것이 하나도 없다. 심지어 광주시 차원의 기념 사업을 추진할 수 있는 민 · 관 협동 위원회 구성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위헌론과 「혐의 없음」

위와 같이 5·18항쟁의 해결을 위하여 지금까지 5공과 6공 정부가 취해 온 조치와는 별도로 항쟁 관련자들 스스로 현행법의 테두리 내에서 취한 자구적 조치로는 ①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의 제1조(명칭), 제5조(보상금)에 대한 헌법 소원 심판 청구 ②5·18 광주 민중 항쟁 동지 회 측의 전두환 노태우씨 등에 대한 형사 고소 두 가지가 있다.

5 · 18 광주 민중 항쟁 동지 회(회장 위인백)는 금년 2월9일 보상법의 입법적 부작위

그 자체가 위헌이라고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은 취지로 헌법 소원 심판 청구를 하였다.

①위 보상법의 명칭에 대하여-1980년 5월17일을 전후한 계엄군의 행위는 헌법 제29조 소정의 「공무원의 직무상의 불법행위」에 해당하는데, 유독 5·18 민중 항쟁에 관해서만 「보상」을 한다는 취지의 입법을 하는 것은 헌법 제29조 제1항, 제11조 제1항(평등권)에 위배되어 위헌이다.

②위 보상법 제5조에 대하여-위 보상법은 5·18민중 항쟁과 관련하여 행방 불명 되거나 사망한 자 및 상이를 입은 자에 대하여만 보상을 하고 있을 뿐 「구속자」에 대하여는 어떠한 보상 조치도 하지 않고 있는데, 이러한 입법은 헌법 제11조(평등권) 등에 위배되어 위헌이다.

이 헌법 소원 심판 청구 사건은 우선 자연인이 아닌 법인이나 그에 유사한 비법 인사 단이 어느 정도의 범위 내에서 헌법상 규정되어 있는 기본적 인권을 향유할 수 있는 주체가 되는가, 입법의 부작위가 어느 정도 범위 내에서 헌법 소원의 대상이 되는 「국가권력의 불 행사」가될 수 있는가 하는 사항이 쟁점이 될 것이다. 헌법재판소에서는 1993년 3월9일 이 사건(93 헌마 33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 위헌 확인)을 재판부의 심판에 회부하는 결정을 내렸다.

한편 5 · 18광주 민중 항쟁 동지 회 는 1988년 10월18일 당시 회장 윤강옥이 고소인이 되어 전두환(5·18 당시 보안 사령관) 노태우(수도 경비 사령관) 정호용(공수 특전 사령관) 박준병(제20사단장) 신우식(공수 특전단 제7여단장) 최웅(공수 특전 단 제11여단장) 최세창(공수 특전 단 제3여단장: 윤흥정 (전남북 계엄 분 소장) 소준열(전남북 계엄 분 소장) 등 9명을 형법 제87조(내란죄), 제88조(내란 목적 살인), 제90조(내란 예비 음모, 선전 선동), 군형법 제5조(반란죄), 제30조 (군무 이탈), 제44조(항명), 제52조(상관에 대한 폭행 치사 상) 위반으로 고소하였다.

그러나 서울 지방 검찰청은 고소한 지 4년이 지난1992년 12월26일 위 고소 사건에 대하여 전부 「혐의 없음」 결정을 내렸다. 고소인은 서울 고등검찰청에 항고하였으나 서울 고등검찰청은 금년 2월23일 고소인 측의 항고를 기각하는 결정을 다시 내렸다.

이 「혐의 없음」결정은 피 고소인 등에 대한 조사 없이 광주 청문회의 기록 등을 근거 자료로 하여 내려졌다. 그 취지는 다음과 같다.

①1979년 12월12일 자의 군 병력 이동은 『수도권 일부 군 병력이 청와대 부근을 포위하여 움직임을 보임에 따라 안보상 필요한 조치를 취한 후 제한된 규모의 예비 병력을 동원하여 사태를 수습한 것으로, 동 사건은 박 대통령 시해 사건의 수사 도중에 발생한 우발적인 사건이었을 뿐』이라고 하는 피 고소인들의 변명이 일부 증언자들의 증언과 부합하며, 달리

고소 사실을 인정 할 만한 증거가 없다.

②1980년 5월18일 전후의 소위 「광주 사태」는 『시위 현장에서의 일부 군인과 학생들간의 감정적인 충돌과 악성 유언비어가 원인이 되어 발생한 것이며, 국헌을 문란할 목적으로 일부러 비상계엄을 확대하고 시민을 살상한 것은 아니다』라고 하는 피 고소인들의 변명이 일부 증언자들의 증언에 부합하며, 달리 피고 소 사실을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다.

그러나 위와 같은 결정은 피 고소인에 대한 직접 심문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내려졌으며, 검찰은 고소인들의 고소 내용을「단순한 추측」「막연한 주장」이라고만 설시할 뿐 적극적인 진상규명 의사없이 기존에 발표된 피 고소인들의 변명 자료만을 근거로 형식적인 결정을 내린데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검찰의 이러한 결정은 노태우 전 대통령의 재임 기간 동안 사건을 형식적으로 마무리를 하기 위하여 내려진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새 정부에게 5·18의 진상 규명을 촉구한다는 차원에서라도 다시 형사 고소를 할 수도 있다고 본다.

더구나 12·12쿠데타와 i ·18 유혈 진압을 지휘한 최고 책임자들은 현재까지 공소 시효가 만료되지 않았기 때문에 적극적인 진상 규명 의지만 있다면 1979년과 1980년 당시의 형법 군형법 등에 의해서도 수사가 가능하다(형사소송법 제 249조 1항1호에 의하면 법정형이 사형에 처하도록 되어 있는 죄의 공소시효는 15년으로 규정되어 있다. 그런데 군 형법상의 반란죄, 형법상의 내란죄의 수괴는 사형에 처할 수 있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12·12쿠데타와5·18진압 관련자들에 대한 공소시효의 최대 시한은 15년인 셈이다). 아울러 검찰의 「혐의 없음」결정과 불기소처분은 헌법 11조 (평등권)위반을 이유로 헌법재판소에 헌법 소원 심판 청구를 할수 있다고 본다.

법에 의한 해결을

위에서 본 바와 같이 현행법의 테두리 내에서 취할 수 있는 사법적 대응은 신 군부 집단에 대한 형사 고발과 집단 재심 신청 이외에는 다른 방도가 고려될 수 없는 형편이다. 그렇기 때문에 광주 문제 해결을 위한 원칙을 수용한 새로운 입법이 필요하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이 상정해 볼 수 있다.

▲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①특별 검사법을 제정하여 광주 문제를 조사할 수 있는 특별검사를 임명한다.

②아니면 광주 문제 해결을 위한 특별법에 따라 특별 조사 위원회를 설치하여 조사를 위한 포괄적 권한을 행사하게 한다.

▲ 사상자 등에 대한 배상

①위 특별법에 국가의 배상 의무를 명시하면서 현재의 「광주 민주화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지급된 보상금을 배상금으로 지급된 것으로 간주한다.

②위 보상법에 의하여 보상금 지급 신청을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보상금 지급 신청을 하지 아니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새로운 배상 절차를 마련한다.

③구속 자에 대하여는 형사 재심 절차의 결과에 따른, 즉 무죄 선고에 따른 특별한 형사 보상 청구 절차를 마련한다. 아울러 부상자 중에서 계속적인 치료가 필요한 사랑들의 치료 대책에 관해서도 규정을 두어야 한다.

④대신 위 「광주 보상 법」은 폐지한다.

▲ 명예회복

기존의 형 선고의 효력이 무효임을 선언하고 새로이 재심을 진행할 수 있는 형사 소송 절차를 마련한다.

▲ 정신 계승

①정신 계승을 위한 기념 사업에 대해서 국가가 예산을 지원하여야 할 의무를 선언한다.

②정신 계승을 위한 제반 기념 사업의 주체로서 공익법인 형태의 「5·18기념 사업 회」(가칭)를 설립한다. 「한국 자유 총 연맹 육성에 관한 법률」이나 「국가 유공자 등 단체 설립에 관한 법률」에는 공익법인 형태의 각종 단체 설립이 규정되고 일정한 의무를 부과하면서 정부의 지원이 명기되어 있는데, 이와 같은 법률을 준용하면 될 것이다.

광주 항쟁에 대한 사법적 해결이 지금 정도의 수준까지밖에 이르지 못한 가장 근본적인 까닭은 5 ·18을 유혈 진압한 그 당시의 정치 권력 구조와 역학 관계가 5 ·6 공화국의 통치 기간 동안 계속 재생산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5.18 민중 항쟁을 어떠한 수준에서 사법적으로 해결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이 항쟁을 폭도들의 폭동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주권자인 국민의 최후의 헌법 보장 수단인 저항권의 행사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에 직결되며, 이러한 인식과 평가의 문제는 단순한 논리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 권력의 역학 관계의 반영에 불과하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김영삼 정부가 5·18 민중 항쟁의 문제를 어떻게 마무리 짓는가 하는 점은 5·6공 정부와 김영삼 정부가 얼마나 본질적으로 다른가 하는 점을 나타내는 중요한 표지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전범 재판 과정에서 전범 및 인권에 관한 여러 가지 범죄는 국내법상의 공소시효에 관한 규정이 적용되지 아니한다는 이론이 개발되었다. 또 유엔총회는 1968년 11월28 일 「전쟁범죄 및 인도에 대한 죄에의 시효 불 적용에 관한 협약」을 채택하여 이 조약이 1970년 11월11일 발효되었다. 이 협약은 헌법 제6조1항이 정한 「일반적으로 승인된 국제 법규」로서 국내법과 동등한 효력을 갖는다. 그렇다면 5·18 민중 항쟁의 유혈 진압에 관한 형사책임은 결코 소멸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