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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자료실

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오전 . 오후 국선 변호사 바 검찰관은 '예, 아니오 만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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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 오후 국선 변호사 바 검찰관은 '예, 아니오 만 말

5.18재판 이렇게 진행

"우선 후배들에게 미안한 감을 금치 못합니다. 제가 수괴로 만들어진 이상 수괴의 역할이 너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번 광주 사태에 길가는 시민들을 붙잡아 정말 수괴가 있었느냐고 물어 보십시오. 아마도 광주 사태에 두목, 즉 수괴가 있었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간 너무도 당했습니다. 수사 받은 3개월간은 살이 부르 터 찢어지고 뼈가 부러지며 온갖 심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고문에 못 이겨 거의 정신병자가 되다시피 했습니다. 그 많은 정신병자들이 영창 안에서 악을 쓰면 담당 헌병은 발로 짓이기고 마구 때려 혼절케 했습니다."

1980년 12월17일 계엄 고등 군법 회의가 진행 중인 광주 상무대 전투 교육 사령부 재판정. 내란 수괴 혐의로 1심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바 있는 정동년씨(당시 37세)의 최후 진술 한 대목이다.

최후진술이 진행되어 갈수록 법정 안의 분위기는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드는 듯했다. 포승줄로 팔뚝과 몸통이 꽁꽁 묶이고 손목에는 수갑이 채워진 채였다. 피고인이 마주보고 있는 정면 재판석에는 재판관 5명이 나란히 앉아 있다. 그 중 맨 가운데 앉아 있는 재판장이 양어깨 위에는 계급을 표시하는 별 하나씩이 반짝거린다. 재판장 좌측으로 영관급 심판관 2명, 우측으로 군법 재판의 법 절차를 돕는 법무사 2명이 각각 배석해 있다. 그들 앞으로 왼쪽 편에 역시 군 정복을 입은 검찰관이 오른쪽 민간인 복장의 변호사와 마주하고 있다. 일반 법정과 마찬가지로 검찰관과 변호사 중간쯤에는 속기를 하는 군인이 앉아 있다. 재판장 바로 뒤 나무 벽면 위쪽에는 진실과 형평, 그리고 죄 형 법정 주의를 상징하는 규형 잡힌 저울, 법전 따위가 새겨진 마크가 눈에 뛴다.

교실 한 칸 보다 약간 넓은 법정에는 양쪽 벽면으로 사람 키보다 높게 창문이 두 세 개 있고, 방청객이 드나드는 뒷문과 피고인들이 입정하는 앞문이 왼쪽에 붙어 있다. 피고인 20-30여명이 계급장과 허리띠가 없는 군복을 입고 피고인 석에 다닥다닥 붙어 서너 줄로 비좁게 앉아 있다. 뒤쪽으로 약 2m쯤 사이를 두고 방청객 30-40여명이 입추의 여지없이 빽빽이 들어 차 있다. 마치 법정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피고인의 가족들은 재판장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며 웅성거린다. 재판 진행 중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계호를 담당한 헌병들이 M16소총을 겨드랑이에 낀 채 맨 앞줄 주요 피고인들 사이사이에 끼어 앉았다.

방청객 향해 최후진술

살벌한 법정 분위기가 최후진술이 차례차례 진행될수록 흔들리기 시작했다. 백발이 허연 홍남순 변호사 , 김성룡 신부, 조철현 신부, 명노근 교수, 송기숙 교수 등도 수갑을 찬 채 피고인들 속에 섞여 있다.

차례로 최후진술이 이어지면서 방청석에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정상용씨(당시 31세 . 현 국회 의원)의 1시간 가량에 걸친 최후 진술은 마침내 법정을 울음바다로 만들어 버렸다. 수사 과정의 혹독한 고문으로 몸은 비록 병들어 비쩍 말랐지만 그의 패기는 전혀 사그라들지 않았음을 역력히 보여주었다. 그의 당당한 태도는 모두를 감동케 했다.

"우리 시대 민주주의 발전은 역사적으로 투쟁해 온 민중들의 자유 의식의 성장을 의미합니다. 나는 그런 민주화 운동의 자유 의식의 성장을 의미합니다. 나는 그런 민주화 운동의 일환으로 광주 항쟁에 참여했습니다. 지금은 비록 어둡고 참담한 감옥에 우리의 몸이 갇혀 있으나 자유의 종이 한없이 울리는 민주 세상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우리는 승리할 것입니다. 진리와 정의는 반드시 승리합니다. 여러분 우리 확신을 갖고 이 어려움을 이겨 나갑시다."

정상용씨는 피고인 석에서 휙 뒤로 돌아서서 방청객과 가족들을 쳐다보면서 연설조로 최후 진술을 했다. 당황한 헌병들이 그를 제지했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결국 헌병들도 방청객을 향한 그의 최후 전술을 막지 못했다. 그의 최후 진술은 자신을 심판하는 재판관들의 마음까지도 움직였다. 끝내 재판관들마저도 눈물을 훔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로부터 2-3일 후 선거 공판이 같은 법정에서 열렸다. 주요 피고인들에 대한 형량이 1심과 거의 차이가 안 났다. 방청하던 가족들이 분노가 폭발했다. 그때까지 살벌한 분위기에 짓눌리고 또 행여나 감형이 될까 하는 한 가닥 실날같은 희망에 숨죽이고 있던 가족들이 마침내 참지 못하고 뛰쳐나온 것. 선고를 마치고 퇴장 할 려는 재판관에게 홍남순 변호사의 아들 홍기섭씨가 의자를 집어던지며 버럭 소리쳤다. "이놈들부터 죽여야 한다. 이재판은 조작극이다. " 가족들의 분노는 봇물처럼 거친 항의의 고함으로 변했다. 헌병들의 총을 들이댄 협박에도 불구하고 법정은 난장판이 되다시피 했다. 피고인들은 애국가를 소리 높여 부르기 시작했다. 한 떼의 가족들이 뒷문으로 소리 높여 부르기 시작했다. 한 떼의 가족들이 뒷문으로 빠져나가려는 재판장 일행을 뒤쫓아 우루루 재판장이 뒷문으로 몰려갔다. 30여분간 헌병들과 격렬한 실랑이를 벌였다. 결국 증원된 군인들은 가족들을 완력으로 차에 실어 비오는 거리 여기저기에 뿔뿔이 흩어 놓았다.

"처음에는 숨소리도 크게 못 냈어요. 입만 뻥긋해도 죽는 줄 알았 었죠. 그러나 설마 했던 고법 선고가 사형으로 떨어지자 눈앞이 캄캄해지고 아무 것도 안보입디다. 나도 몰래 악이 받쳐 총을 들고 있는 헌병에게 달려들어 뺨을 후려갈겼죠. 7개월 난 애기 까지 한꺼번에 질척거리는 흙탕물에 내동댕이쳐지고…. 군용차에 실려 낯선 골목에 버려졌을 때, 어둠에 싸여 비를 맞으며 집으로 걸어서 돌아올 때 정말 처절했어요. "

정동년씨의 부인 이명자씨가 당시를 회고하는 말이다.

1985년 6월 7일 당시 윤성민 국방부 장관은 국회 국방 위원회에서 광주 항쟁 관련 검거 자에 대한 처리 결과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총 검거자 2천 5백22명, 훈방 1천9백6명, 군법회의 회부 6백 16명, 불기소 2백12명, 기소 4백4명. 그후 전원 특별사면으로 석방.

광주 항쟁 재판에 관한 신문 보도는 당시 꽁꽁 묶어 있던 언론 상황을 반영하듯 계엄사에서 발표한 1심 선고 결과와 대 법 판결 내용, 후속 조치로 취해진 특별사면에 관한 몇 차례의 기사만 발표대로 간단히 실려 있을 뿐이다. 언제부터 재판이 시작됐는지, 며칟날 재판이 있었는지, 고법 선고 일과 내용은 무엇인지 전혀 눈에 띄지 않는다.

1980년 7월3일 계엄사는 수사를 일단락 짓고 '광주 사태와 관련 연행된 사람 가운데 3일 현재 1천1백46명을 1차로 훈방 한데 이어 곧 6백79명의 경미한 혐의자를 추가로 훈방할 예정이며, 죄질이 무거운 3백 75명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조사를 진행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이 발표 대로라면 연행자 총수는 2천 2백 명으로 윤 국방 장관이 밝힌 총 검거 자수 2천 5백22명과는 3백22명이나 차이가 난다. 또한 1980년 10월 25일 전남북 계엄 보통 군법회의 선고 공판 결과는 그때까지 광주 항쟁 관련 피고인 총수를 '2백55명'으로 밝히고 있어 그 이후로 추가 기소됐다는 보도는 발견되지 않는다. 윤 국방 장관의 기소 인원 4백4명과도 무려 1백49명이나 다르다. 수백 명이 무작위로 살상 당했던 직후의 상황이었고 아직까지도 한번도 공개적이고 신뢰할 만한 본격적인 조사와 진실 규명 활동이 실시된 적이 없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런 숫자의 차이는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대법원 확정 3일만에 특별사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신빙성이 있어 보이는 자료는 80년 10월 25일 오전 10시 전투 병과 교육 사령부 대법정에서 열린 전남 북 계엄 보통 군법 회의 재판 결과와 81년 4월 2일자로 보도된 동년 3월31일 대법원의 최종 확정 판결인 듯 하다. 왜냐면 후자의 경우 재판이래 처음으로 피고인 명단과 형량이 전부 발표됐기 때문이다.

80년 10월 25일 오전 10시 광주 항쟁 관련 피고인 2백 55명에 대한 계엄 보통 군법 회의 선고 공판이 전투 병과 교육 사령부 대법정에서 열렸다. 이날 재판에서 정동년씨(당시 37. 전남대 복적 생)는 내란 수괴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김종배씨(당시 26. 조선대 생. 학생 수습 위원장. 5월 2일 7일 도청 체포), 박남선씨(당시26. 운전사. 시민군 상황 실장. 5.27일 도청 체포)는 내란죄 및 계엄법 위반 죄를, 배용주씨(당시34. 운전사. 5월20일 밤 시위 도중 경찰을 사망케 했다는 혐의), 박노정씨(당시28. 인쇄업)는 살인 및 소요, 계엄법 위반 죄 등으로 각각 사형 선고를 받았다. 또한 시민 수습 대책 위원장 홍남순씨(당시65. 변호사)와 정상용씨(당시30. 회사원. 학생 수습위 외무부 위원장) , 허규정씨(당시27. 조선대 생. 학생 수습 위 내무부 위원장), 윤석류씨(당시20. 가구공. 시민군 기동 타격 대장)등 7명은 내란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또 김상윤씨(당시31. 전남대 복적생. 녹두 서점 경영) 피고 인등 1백 63명에 대해서는 징역 5-20년, 나머지 피고인 80명에 대해서는 선고 유예와 집행유예가 각기 선고됐다.

81년 3월 31일 대법원 형사부는 피고인들의 상고를 모두 기각하고 고등 군법 회의 선고대로 피고인 83명에 대해 계엄법 위반, 내란 중요 임무 종사, 살인 등의 죄목으로 원심 형량을 확정 시켰다. 이에 따라 정동년, 배용주, 박노정씨 등 3명이 고법 원심 형량대로 사형이 확정됐고 , 김종배, 정상용, 박남선, 윤석루씨 등 7명 무기징역, 홍남순, 허규정, 김상윤씨 등 3명 징역15년 . 이재호, 김성용씨등 2명 징역12년, 한상석씨 등 4명 징역10명, 명노근씨 등 3명 징역 7년의 실형이 각각 확정됐다. 이들 전체 형량을 살펴보면 사형 3명, 무기 7명, 선고 유예와 형 집행 면제 2명을 제외한 나머지 71명의 징역 기간은 모두 합해 3백50년에 이른다.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된 3일만이 81년 4월 3일 정부는 관련자 83명 전원에 대해 특별감형 특별사면 또는 복권 조치를 취했다. 이때 사형 선고를 받은 정동년씨 등 3명은 무기로, 무기징역이 확정된 박남선씨 등 7명은 징역 20년, 15년 이하의 징역형을 선고받은 홍남순씨 등 13명은 형기의 절반씩이 각각 감형됐다. 이에 따라 잔여 형기가 5년 미만인 전춘심씨 등 58명은 형집 행 면제 혹은 언도의 효력 상실 등의 조치가 취해져 그날로 석방됐다. 나머지 사람들은 82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특별 사면 조치로 정동년씨를 포함한 12명이 형 집행 정지로 석방됨으로써 전원 풀려나게 됐다.

계엄 보통 군법 회의 피고인들이 너무 많아 재판부를 두 팀으로 나눠 진행했다. 제 1부는 재판장 원호연 육군 준장, 심판관 임종순 대령, 조석구 중령, 권태극 중령 , 법무사 박동수 소령, 그리고 2부는 재판장 임헌표 준장, 심판관 노서봉 대령 , 우인봉 중령, 박준균 중령, 법무사 안수일 소령 등이 재판을 맡았다.

"혹독한 고문으로 전부 조작했다"

계엄사는 많은 수의 인원을 빠른 시간 내에 재판하기 위해 이미 있었던 대법정 외에 별도로 하나의 재판정을 더 짓기도 했다.

명노근 전남대 교수는 '5.18재판은 전부 허위 조직'이라고 잘라 말했다. 항쟁 당시 교수 신분으로 주위 사람들의 권유에 의해 사태 수습에 참여했던 그는 희생을 줄이기 위해 '총기를 회수하자'고 적극 주장했었다. 그러나 혹독한 고문에 의해 그의 공소장에는 '요구 조건이 관철될 때까지 무력으로 대항하자고 결의했다' 고 기록돼 있다.

내란 수괴로 사형까지 언도 받았던 정동년 씨의 경우야말로 '이 재판이 얼마나 조작되었나'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정동년씨는 복적 생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자신이 수괴가 됐다고 한다.

"그들은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이라는 완전한 허위 사실을 만들었죠. 제가 김대중씨로부터 자전 지시를 받아 학생 지도부인 박관현 전남대 총 학생회장을 통해 학생 시위를 선동했다는 각본인데… 이제 당시의 재판도 무효화시켜야 할 것입니다."

내란 수괴는 수괴로서 국가 변란을 목적으로 한 구체적인 행동의 뒷받침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때까지 김대중씨를 직접 만나 본 적도 없었을 뿐 아니라 나는 5월18일 항쟁 발생 이전에 이미 체포됐어요 . 현장에 없었던 사람을 내란 수괴로 몰아 극형을 선고 할 수도 있는 겁니까"

5.18이전까지 녹두 서점을 경영하면서 복적 생으로 학생운동에 깊이 관여했던 김상윤 씨는 정동년 씨가 어떻게 해서 내란 수괴로 조작되었는가를 자신이 받았던 수사에서 충분히 알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

"처음 한동안은 수사 방향이 좌익 활동과 관련된 부분에 집중됐죠. 그때 느낌으로는 녹두 서점을 중심으로 청년. 학생. 혁신 계 인사들을 한데 묶어 광주 항쟁을 빨강 색으로 도색 하려는 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죠. 그러나 아무리 조사 해봐도 그럴 만한 증거를 잡을 수 없게 되자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과 연결시킨 것 같아요. "그렇게 수사 방향이 결정되자 광주와 김대중을 연결시킬 구체적인 인물이 필요했다는 것.

"내란 수괴 감을 찾기 위한 저들의 의도는 너무 노골적이어서 조잡하기조차 했어요."

김대중씨와 연결될 만한 인물로 여러 사람이 '수괴'의 대상으로 떠올랐고 그들은 예외 없이 김대중씨와의 관계를 캐기 위한 고문에 시달려야 했다고 한다. 홍남순 변호사, 이기홍 변호사, 명노근 교수, 송기숙 교수 등이 그들이다. 명노근 교수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말한다.

"처음 얼마 동안 보안대 지하실에서 김대중씨와 만난 사실을 자백하라고 모진 고문을 당했어요. 그러나 아무리 김대중씨를 만났다고 말하고 싶어도 만난 적이 없는 사실을 어떻게 합니까."

한번은 하도 고통 스럽 길래 김씨를 만난 적이 있다고 허위 자백하자 '만나서 뭘 했느냐' 돈을 얼마나 받아 어떻게 썼느냐'고 따지는데 결국 그 알리바이를 댈 수 없어 자신은 '수괴 감에서 밀린 모양'이라고 말한다.

'수괴' 찾기 위해 갖가지 고문

재야 인사들 가운데서 '수괴 찾기'에 실패한 수사진은 청년들 중에서 '수괴 감'을 고르기 시작했다. 김상윤씨가 첫 번째 대상으로 떠올랐으나 그 역시 동교동에 가 본적도 없을 뿐 아니라 김대중씨를 만난 사실조차 없었다. 윤한봉씨(당시 현대 문화 연구소. 현재 미국에 망명 중), 박석무씨(현 국회의원)등이 적합한 인물로 거론되면서 현상 지명 수배가 붙기도 했으나 이들은 아직 잡히지 않은 상황이었다. 마침 전남대 복적 생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을 뿐 아니라 동교동을 한번 방문한 적이 있었던 정동년씨가 수사관들의 안테나에 포착됐던 것이다. 정동년씨는 자신이 김대중씨를 만났다는 부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김대중 총재를 당시에 제가 찾아간 것은 사실입니다. 80년 4월 12일 이었습니다. 그러나 만난 일도 자금을 받은 일도 없었어요."

그는 박관현 씨와 얘기를 나눈 끝에 김대중 총재를 초청, 광주에서 강연할 수 있도록 요청하기 위해 동교동을 찾았다. 김옥두 비서를 만났다. 시기적으로 어렵다는 답변을 들었다. 김대중씨를 만났다. 시기적으로 어렵다는 답변을 들었다. 김대중씨를 만나기 위해 20분 정도 기다리다 그냥 방명록에 서명만 한 채 내려왔다. 수사관들은 이 방명록을 내놓으면서 자금 수수를 다그쳤던 것. 혹독한 고문에 그는 끝내 항복하고 말았다.

"너희들 요구 조건이 뭐냐. 각본을 달라 . 많이 받았느니 적게 받았느니 해서 두들겨 패지 말고 액수까지 가르쳐 달라."

'돈 받은 놈이 각본 내놓아라' 한다 해서 또 두들겨 맞았다. 2백 만원에서 1천 만원까지 오르락내리락 하다가 결국 5백만원 받은 걸로 낙착(?)됐다. 이 사건의 조작 과정에서 그는 부러진 군용 스푼을 시멘트 바닥에 갈아 자신의 동맥을 끊어 죽어 버릴 려고 했다. 너무 심한 고문과 그의 허위 자백으로 주위 사람이 당할 피해를 우려해서였다. 자살은 미수에 그쳐 병원에서 한달 이상 입원했었다.

송선태씨(34. 당시 전남대 학생회 기획 위원. 정상용 의원 보좌관)는 광주 항쟁 재판이 철저하게 조작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허문도씨가 청문회에서 밝혔듯이 12.12군부 쿠데타 세력으로서는 80년 5월이 '혁명적 상황'이라고 본 것이지요. 그들은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주도 면밀한 일련의 프로그램을 준비 했는데 그것은 12.12라는 미완성의 쿠데타를 준비했는데 그것은 12.12라는 미완성의 쿠데타를 완성시키기 위한 과정이었습니다."

송씨가 말하는 그 프로그램 내용은 이렇다. 쿠데타 세력은 2개의 축을 중심으로 한 복안을 추진했다. 한편으로는 유신 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방안으로 부정 축재자를 처벌한다는 것과 다른 한편으로는 김대중을 중심으로 한 재야 세력을 '한민통'과 연계시켜 내란죄로 몰아 좌우 양쪽을 모두 제거해 나간다는 복안이다. 이 프로그램을 실천해 가는 과정에서 예기치 않게 광주 항쟁이 대규모화되자 당황한 그들은 자신들의 사전 계획과 일치시키기 위한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에다 '광주 사태'를 끼워 맞췄다.

"피고인 진술 원천적으로 의미 없다"

이것은 연행 자 들에 대한 수사 과정을 보아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고들 말한다. 김상윤씨의 경우 처음에는 계엄법 위반 관계를 조사하다. 광주 항쟁이 진압된 직후부터 한동안은 좌익 활동 여부를 마지막엔 결국 김대중씨와의 관계를 집중 조사 당했다. 이건 몇몇 특정인만이 아니라 재야 인사, 학생, 도청 지도부 대부분이 경험했던 수사 내용이기도 하다. 이런 내용으로 미뤄 보아 그들이 광주 항쟁을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과 연계시킨 실질적인 조작 과정을 재판 과정을 통해 완성되었다고 광주 항쟁 관련자들은 단정하고 있다.

송선태씨에 의하면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실제로 재판 과정에서 피고인들의 진술은 원천적으로 의미가 없었다고 말한다.

"짜여진 각본대로 진행된 재판에서 아무리 사실과 다르다고 부인하고 증인을 들이대 봐야 말짱 헛일이었습니다."

재판도 다분히 형식적이었다. 사실 심리 과정에서 검찰관은 자신이 묻는 말에 "예, 아니면 아니오"라고만 답변하라고 했다. 자세히 말할 기회는 변호사 반대 심문과 최후진술 때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변호사는 대부분 국선 변호사가 선임돼 피고인들의 공소 사실조차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김상윤 씨는 항소 이유서 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사설 변호인이 국선 으로 바뀌었다가 그 국선이 오전. 오후로 또 바뀌었다가 , 재판이 느슨해지면 다시 사선이 등장했다가 하는 류의 술수가 난무하는 재판 진행 과정은 한국 재판 사나 세계 재판 사상 실로 놀라운 이변으로 기록되어야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변호사들도 당시 살벌한 분위기 때문에 선뜻 변론을 맡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나중에 야당 국회의원으로 출마했던 모 변호사는 전남대 이모 교수로부터 변론 위촉을 받았으나 신변상의 이유로 단호히 거절해 버렸다. 그후 그 변호사가 국회의원에 출마하자 변론을 부탁했던 이 교수는 그 후보의 낙선 운동을 벌였다고 한다. 어느 변호사는 그때 일부러 해외 여행을 떠나 버렸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반면 이덕수 변호사를 비롯한 천주 교정의 평화 위원회에서 위촉한 유현석 변호사는 적극 변론을 펴기도 했다. 국선 으로나온 어떤 변호사는 피고인을 변론하기 보다 오히려 검사처럼 힐책하는 태도를 보여 방청인으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했다.

증인 심문도 일방적이었다. 피고인이 신청한 증인은 대부분 기각되거나 만약 채택되더라도 '증인에게 압력을 넣어 증언을 거부하거나 허위 증언을 하게 만든 경우가 허다했다'는 것 . 정동년 씨의 경우 공소 사실 가운데 제일 중요한 김대중씨를 만나러 서울에 간 날짜(5월5일)가 허위라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당시에 자신이 학원 강사로 근무했던 학원의 당일 업무일지를 증거로 신청했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김상윤씨의 증인으로 나온 박모 교수도 허위 증언만 해 오히려 피고인을 궁지로 빠뜨렸다고 김씨는 주장했다.

또한 이런 일도 있었다. 재야 인사를 중심으로 한 수습 대책 위원회가 내란을 획책했다는 혐의로 기소되자 피고인들은 정부측 인사가 함께 참여한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수습 위에 같이 참여했었던 당시 전남도 부지사 정시채씨를 증인으로 채택했다. 정시채 증인에 대한 심문은 당연히 피고인들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진행돼야 함에도 불구하고 피고인들을 퇴장시킨 후 대신 헌병들을 법정에 가득 밀어 넣고 비밀리에 진행시켜 버렸다.

'몇 명 빼곤 최후진술 기회도 안 줘'

피고인의 절대적인 권리에 속하는 최후진술 때에도 몇 사람을 빼곤 제대로 발언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고 말한다.

재판이 '형식을 갖추기 위한 조작극에 불과하다'는 인식이 피고인들 사이에 보편화되자 항소를 아예 안 해 버리거나 항소를 할지라도 별 볼일 없다는 생각에서 항소 이유서 작성도 대부분 포기해 버렸다. 결국 김상윤씨와 정해직씨 두 사람만이 항소 이유 서를 대표로 작성했다.

이양현씨(당시31세. 학생 수습 위 기획 위원)는 당시 재판을 이렇게 말한다.

"광주 항쟁에 대한 재판은 광주를 한번 더 죽이는 과정이었습니다. 말하자면 항쟁 기간 중에 죽은 광주 시민들에 대한 법적인 차원의 확인 사살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들은 광주를 완전히 죽여 버리기 위해 요식 절차를 밞았던 것인데 허위 사실을 '사실화' 시키는 과정이 모두 혹독한 고문을 통해 가능했던 것입니다."

상무대 영창에 있으면서 받은 조사 과정은 살인적 고문으로 일관됐다고 당시 피해자들은 말한다. 5월27일 새벽 도청에서 '포로'가 된 이양현씨는 '극렬분자'로 분류돼 포승에 묶인 채 군화 발로 무수히 걷어 채이며 상무대로 실려 갔다. 그는 정신이 혼미해질 때까지 발바닥을 두들겨 맞았다. 머리와 팔뚝, 다리의 실탄 파편이 박힌 부위에서 계속 피가 멎지 않았지만 치료할 엄두도 못 냈다. 2-3일 후에야 자신의 갈비뼈가 3개나 부러진 것을 알았다.

노동운동에 관련이 있었던 그는 처음에 빨갱이라고 치부되어졌다. 그는 상무대 안에 있는 '고문 실'에서 끔찍한 경험을 했다. 사면 벽을 흰 폐인트로 칠해 놓은 조그만 방이었다. 천장의 네 귀통 이에는 1백 와트 백열등이 이었고 가운데쯤 형광등이 걸려 있었다. 형광등 주위 친정에는 3개의 구멍이 뚫려 있었다. 며칠간 두들겨 맞은 이씨는 깜빡 의식이 왔다갔다하는 졸음에 시달리고 있었다.

수사 요원이 방에서 나가고 없는 사이에 졸았다. 갑자기 '철렁'하며 차가운 물체가 목을 휘감았다. '으악'하고 비명을 질렀다. 뱀 같은 것이었다고 한다. 원체 지쳐 또 잠에 빠져들었다. 이번에도 차가운 물체의 촉감에 놀라 잠을 깨 보니 깃털도 나지 않은 참새 새끼였다.

위인백 씨는 보안대 지하실에서 옷을 벗긴 다음 눕혀 놓은 상태로 발바닥을 두들겨 맞았다. 생 버드나무로 만든 몽둥이로 온몸을 어찌나 심하게 맞았던지 실신해 버렸다. 눈을 뜨고 보니 국군통합병원 응급실이었다. X레이를 촬영했다. 시커멓게 변해 버린 부분은 발목뼈가 부러져 있었다. 왼쪽 창자도 꼬였다. 그런 상태에서 퉁퉁 부은 발을 쳐들고 있어야 했다. 수사관은 "여기서 너 하나쯤 죽어 없어져도 수 천명 죽은 사람들 사이에서 드러나지도 않는다. 너를 죽여 손도장만 찍어 버리면 그것으로 끝이 야."

그들이 요구하는 어떤 허위 사실도 진실이라도 말해 버릴 수밖에 없었다.

명노근 교수도 보안대 지하실에 들어서자마자 팬티만 남기고 옷을 전부 벗기웠다. 시멘트 바닥에 무릎을 꿇게 한 수사 요원은 몽둥이를 무릎에다 끼우고 몸을 뒤로 젖히게 했다. 그런 상태에서 다리 부분을 몽둥이로 때렸다. 바닥에 흩어졌던 왕모래들이 무릎에 박혔고, 순식간에 땀이 팬티를 적셨다. 며칠 밤을 재우지 않았다. 수사 요원들은 명교수 눈을 가린채 책상위에 엎드리게 한 자세에서 엉덩이 , 등 , 팔 아무 데나 마구 때렸다.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랬듯이 김대중씨와의 관계가 조사의 주요 내용이었다.

"그건 서울에서 내려온 각본에 없다"

예정된 각본에 꿰어 맞춰 혐의 사실을 조작하고 가혹행위가 심해지자 상무대 영창 안에서는 별의별 일들이 일어났다. 정동년 씨와 김영철씨(당시 32. 시민 학생 수습 위 기획 실장)의 자살 기도 사건이 발생했다. 김영철씨는 자신이 빨갱이로 몰린다고 생각하자 그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영창 안 화장실 모서리 벽에다 머리를 들이받았다. 다행히 죽지는 않았으나 그때 받은 충격으로 9년이 지난 지금도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는 상태다.

상무대 영창은 10평 남짓한 넓이로 6개의 감방이 부채꼴 모양을 이루고 있어 가운데서 헌병이 잘 감시할 수 있게 돼 있었다. 영창 안에서 기본자세는 , 허리를 쭉 펴고 두 팔을 양 무릎에 얹어 놓는 군대식 부동자세였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불러 나가 모두가 비켜보는 가운데 매타작을 당했다. 김동완씨(당시22. 노동자)는 시범 케이스로 당했다. 김씨는 양 손목에 수갑이 채워진 채 철창에 매달아 졌고, 밤새도록 곡괭이 자루로 영창 감시 헌병들에게 얻어맞아 실신했다. 김씨가 당하는 모습을 모두가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이런 혹독한 고문 과정을 통해 김대중씨로부터 정동년씨가 5백 만원의 시위 자금을 받아 전남대에는 총 학생 회장 박관현씨를 통해, 조선대는 윤한봉씨를 거쳐 조선대 복적 생 김운기씨에게 건네진 것으로 각본이 완성됐다. 김운기씨는 조사과정에서

"조선대 인의 긍지가 있지, 왜 전남대 복적 생 윤한봉에게 돈을 받은 걸로 하느냐, 어차피 받은 걸로 할 바에야 기왕이면 김대중씨에게 직접 받은 걸로 해 달라"고 요구했다. 수사관은 "그건 서울에서 내려온 각본에 없기 때문에 안 된다"고 말했다. 이 사실이 재판 과정에서 폭로돼 재판정이 웃음바다가 된 적도 있었다.

처남 . 이질녀까지 연행 심적 고문

또한 조작 과정을 거쳐 정동년 씨가 내란 수괴로 되자 자연히 학생 조직이 중요한 위치로 떠올랐다. '학원 내란'이란 신조어가 생기기도 했다.

이러한 조작을 위해 피고인 본인 뿐 아니라 가족들도 붙잡혀 간 경우가 허다했다. 홍남순 변호사는 고법 재판 최후진술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본인은 결과적으로 이 사태 수습에 나섰던 것이 죄가 되어 48일 동안 거의 잠을 재우지 않은 채 수사를 받을 수밖에 없었고 나의 처, 셋째 아들을 인질로 감금하였고 , 본인의 사무장 정관진군까지 구속, 68일만에 석방했다. 또한 큰아들, 처남, 이질녀까지 연행하여 본인에게 심적으로 고문을 가하였다. 더구나 김대중씨로 하여금 2천 만원을 받아 광주의 양 대학에 자금으로 대주어 데모를 하게끔 획책했다는 진술을 강요했던 것이다."

김상윤씨의 경우도 거의 전 가족이 붙잡혀 가다시피 했다. 김씨의 부인, 남동생, 여동생, 심지어는 처제까지도 연행됐다.

재판을 지켜보는 가운데 가족들도 하나 둘 뭉쳐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면회조차 할 수 없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당장 생사를 확인할 길이 없어 애태웠다. 얼마쯤 시간이 지나면서 군부대에 근무하는 군 속이나 직업 군인들을 통해 연행된 사람들의 소식이 밖으로 알려지기 시작, 일단은 '살아 있구나' 하는 안도감을 느꼈다. 가족들은 재판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누가 누군지 서로를 잘 몰랐다. 어떻게든 상무대에 근무하는 군인 가운데 아는 사람이 있으면 비공식적으로 면회가 가능하기도 했다. 이때 당시 헌병 준위로 정보 계장이었던 장지문씨(57. 광주고 졸업)는 수감자의 가족들에게 많은 도움을 준 사람이었다. 장씨는 자신이 직접 광주 항쟁을 목격한 광주 출신의 한사람으로서 '많은 안타까움을 느꼈다'고 한다. '옷 벗을 각오'를 하고 자신이 도울 수 있는데 까지 수감자와 가족들을 도왔다. 무작정 마구잡이로 두들겨 패는 부하들로부터 몽둥이를 뺏아 버린적도 있었고, 자신이 주번 사령인 날 저녁에는 가족들에게 연락해 30-40명씩 한꺼번에 자신의 사무실에서 면회시켜 주기도 했다. 가족들은 면회 갈 때마다 골병든 삭신에 좋다는 '보신탕'을 한 솥단지씩 끓여 가지고 가서 다른 수감자들도 먹을 수 있도록 했다. 정소녀씨(36. 이양현씨 부인)도 둘째 아이를 낳은지 3일 후인 80년 9월 5일 처음으로 면회가 가능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직 부기가 덜 빠진 몸을 이끌고 보신탕을 끓여 들고 남편을 만나러 갔다. 초췌해진 남편은 영창 안에서 밥이 적어 허덕 인다면서도 막상 보신탕을 거의 먹지 못하더라고 당시를 회상한다.

기저귀 속에 플래카드 숨겨 재판정에서 펄쳐

재판이 시작되는 날짜도 가족들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어렵게 군인들을 통해 날짜를 알아 재판정에 나가면 상무대 남문 들어가는 입구에서부터 금속 탐지기로 온몸을 조사한 후 들여 보냈다. 피고인 한사람에게 가족 한사람밖에 방청이 허용되지 않았다. 몇 차례 재판이 진행되면서 재판정에서 가족들이 서로를 알게 됐다. 안성례(명노근 교수 부인), 정현애 (김상윤씨 부인), 정회옥(정상요씨 부인), 이명자(정동년씨 부인), 이영자(윤강옥씨 부인), 노영숙(노준현씨 누나), 이귀님(윤영규씨 부인), 나정희(윤석루씨 어머니), 홍남순 변호사 부인 등이 중심이 됐다. 자신의 남편이나 동생, 아들의 형량은 서로 차이가 있지만 이들 남겨진 가족들은 한 마음으로 똘똘 뭉쳐졌다.

재판정에 갈 때 젖먹이 애기 기저귀 속에다 '우리 아빠를 돌려주세요'라고 쓴 플래카드를 숨겨 가지고 들어가 재판이 시작되자 확 펼쳐 들어 재판부를 당황케 한 일도 있었다. 검사의 논고가 터무니없을 때는 '이 재판은 조작이다.' '날조된 재판 집어 치우라'고 고함을 지르다 강제로 재판정 밖으로 쫒겨 나기도 했다.

가족들은 무엇보다도 매스컴에 한 줄도 보도되지 않은 재판 상황을 전국민, 전세계에 알려 여론을 일으켜 사형은 막아야 한다고 뜻을 모았다. 5.17쿠데타 세력이 광주 항쟁을 '폭동' , 항쟁에 참여한 광주 시민을 '폭도'라고 규정하는 입장이어서 자기 논리를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라도 최소한 3-4명은 극형에 처할 것이라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떠돌던 참이었다.

안성례 여사 집에 모여 매일 밤 대책을 논의했다. 우선 훈방으로 나온 사람들을 통해 밖으로 흘러나온 공소장과 옥중 서신, 최후진술 등을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널리 알리기도 했다. 최후진술은 그 자리에서 녹음을 못하게 했으므로 자신의 남편, 동생, 자식들의 진술 내용을 가자 한사람씩 맡아 재판정에서 들은 뒤 그날 밤에 안 여사 집에 모여 서로의 기억을 더듬어 작성했다. 서로 돌려 가며 읽어보고 내용을 정확히 다듬었다. 밤을 새우며 이런 일을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각계에 보내는 호소문을 작성하기도 했다. 작성된 각종 자료가 기독교, 천주교 등을 통해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 대사와 각 종교단체, 인권 단체, 청와대에까지 보내졌다. 이 자료를 들고 서울, 대구 , 수원, 부산등 전국 각지에 천주교 미사가 있는 곳마다 쫓아 다녔다. 이명자씨는 젖 먹던 간난 아이의 젖도 떼버리고 남편 정동녀 씨의 구명 운동에 매달렸다. 한번은 하도 절박한 심정에 대통령에게 보내는 혈서를 쓰기도 했다.

'내 남편 살려 주십시요'라고

"안성례 회장 댁 구속자 가족들이 둘러앉아 자리에서 혈서를 쓰려고 면도칼로 오른손 검지를 자르는데 처음엔 피가 안나 오더군요. 징그럽기도 하고.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남편이 죽게 되어 있는데 무슨 짓인들 못하겠느냐고 모진 맘먹고 칼날을 들이댔더니 새빨간 피가 솟더군요."

'세계에 알려야 한다' 밤새워 호소문 작성

김수환 추기경을 찾아가 생떼를 쓰기도 했다.

81년 3월31일 대법원 판결은 절망적이었다. 정동년 씨를 비롯 3명이 사형으로 확정됐다. 사형 수중의 한사람인 배용주씨는 그때 기분이 '덤덤하기만 하더라'고 말한다. 광주 항쟁 기간 중인 5월20일 밤 최루가스와 어둠에 묻혀 자신이 몰고 간 광주 고속이 3명의 경찰관을 노동청 앞에서 죽였다는 혐의가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자신이 사람을 죽였으리라는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다. 모든 것이 꿈만 같고, 거짓말들만 늘어놓고 있다는 느낌이었다고 한다.

정동년씨는 설마 했던 선고 결과가 막상 사형으로 확정되자 '이런 식으로 죄 없는 사람이 죽어 가기도 하는 구나' 고 생각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과거 유년 시절 제 2차 인혁당 사건의 사형수들을 떠올리기도 했다. '그때도 조작된 것으로 증거가 없으니까 대법원 판결이 있던 다음날 바로 사형을 집행해 버리지 않았던가'

가족들의 눈에도 불길이 붙었다. 대법원 판결이 끝나자 마자 20-30명의 여자들이 애기 까지 안은 채 명동성당으로 몰려갔다. 성당 안에 몰래 숨어 들어가 미사가 끝나자마자 출입문을 걸어 잠그고 신부 손에 들려 있는 마이크를 나꿔 챘다. 광주 항쟁 재판의 허구성을 폭로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격려를 받았으나 그렇다고 사태가 해결될 수는 없었다. 명동성당 지하실로 몰려들어가 농성을 시작했다. 이 상황에서 억울한 사형수들의 목숨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김수환 추기경에게 매달리는 방법뿐이라는 어떤 신부의 귀띔이 있었기 때문에 그랬다. 김수환 추기경과 윤공희 대주교가 나타났다. 그들의 옷자락을 곽 붙들고 '살려달라' 고 애원했다. 추기경 방으로 몰려들어갔다. 윤공희 대주교가 정두환 대통령을 몇 차례 만나 사면과 석방 약속을 받아 냈다. 그러나 한 두 사람은 사형을 시켜야 한다는 청와대측의 입장이 전달되었다. 가족들은 누구도 사형 당해서는 안 된다고 맞섰다. 윤대주교가 또 전 대통령을 찾아갔다. 결국 모두를 사면하겠다는 확답을 받아 냈다. 81년 4월2일 오후에야 죽음을 앞둔 3일간의 협상이라는 숨가뿐 상황이 판가름 났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4월3일 새벽 사형수들은 무기로 감형되고 대부분 절반씩 감형, 5년 이하는 모두 형 집행 면제로 석방됐다.

대통령 탄 차에 뛰어들고…

가족들의 석방 투쟁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81년 5월21일 광주 항쟁 1주기를 맞아 나머지 구속자 석방을 촉구하고 미국의 광주 학살 책임을 따지기로 했다. 광주 미 문화 원장을 만나 글라이스틴 면담을 요구하기 위해 미문화원을 점거했다. 15명의 여성들이 전국 최초로 미문화원을 하룻 동안 점거했던 사건이었으나 당시 매스컴에는 단 한줄도 보도되지 않았다. 이들은 그날 밤 12시쯤 베니어판 벽을 뚫고 들어온 경찰들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

82년 2월 전두환 대통령이 광주를 최초로 방문한다는 정보가 입수됐다. 가족들은 전남 도청앞 분수대 부근에서 대통령이 탄 차로 뛰어 들었다. 관제 동원된 수많은 사람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동원된 시민 숫자 보다 많아 보이는 경호원, 경찰 틈을 뚫고 차에 뛰어든다는 일이 얼마나 어려 웠던 지는 당시 죽을 각오를 했던 가족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다. 전 대통령은 이 사건으로 광주의 원한이 얼마나 깊고 심각한 것인지 깨달았을 것이라고 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구속자 가족 협의회를 결성했었고 그때의 활동을 바탕으로 지금은 85년 5월8일에 광주 . 전남 민주화 실천 가족 운동 협의회로 개칭하여 전국적인 민가협 조직과 활동의 궤를 같이 해 가고 있다.

'광주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고들 말한다. 지난번 광주 특위 청문회를 통해 많은 사실이 공개되기도 했다. 그러나 아직도 광주 민중 항쟁에 관한 더 많은 사실이 왜곡. 은폐돼 있다. 왜곡은 대부분 계엄 하의 군법 재판을 통해 이뤄졌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당시 군법회의에 관여했던 재판부는 아무도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이 자진해서 입을 열어 당시를 말할 수 있을 때, 그때야 비로소 광주는 진정한 역사의 재판정에서 올바른 심판을 얻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