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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5.18기념재단의 출범과 행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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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기념재단의 출범과 행보

갈등과 반목을 딛고 하나되어

윤강옥

교육 도시오, 풍류와 멋이 있는 예향이며, 인정과 화목이 넘치는 곳이요, 무등산의 정기가 도시를 감싸고 있는 고장 광주, 이곳은 오랜 기간 짓눌러 왔던 정치적인 탄압에도 미소로 답할 수 있는 여유가 철철 넘치는 빛고을이다. 그러나 지역 민들은 이보다 더 감격스런 표현으로 광주를 말하기도 한다. 처절했던 동족상잔이었던 6.25전쟁 이후 민족의 최대 비극이라 일컬어지는 '80년 5월의 죽음과 상처만 지울 수 있다면, 더없이 밝고 포근한 어머니의 품속 같은 곳이라고,

진상규명을 역사에 맡기자는 현정부

이른바 문민정부가 출범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5.18의 해결에 대해 상당한 기대를 가졌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는 '93년 5월 특별 담화를 통해서5.18을 '민주화의 한 봉우리'라고 규정해 5.18에 대한 '정치적 복권'을 실현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역사에 맡기겠다는 불합리한 이중성을 드러냄으로써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너무도 가볍게 저버리고 말았다.

그후 항쟁 15주기가 얼마 남지 않은 지금까지 사회 각계각층에서 5.18의 진정한 해결을 촉구하는 주장을 꾸준히 제기해 왔다. 그러나 현정부의 입장은 '93년 담화에서 한 발짝도 진전되지 못했다. 현정부는 광주 민중 항쟁을 정치적으로 복권시키되 어디까지나 '적법 지사'라는 테두리는 못 벗어나게 가두어 두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부담 없는 수사적 표현과 물질적 보상으로 문민정부의 차별성을 부각시켜 국민의 지지를 획득하면서도 현실적으로는 정치적 분쟁의 가능성을 철저히 차단하겠다는 교활한 정치 책략 적 차원에서 광주 민중 항쟁을 다루고 있다. 이에 광주 시민들이 실망을 넘어서 치욕과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광주 시민들은 이제 현정부에 더 이상 기대를 갖지 않는다. '적어도 5.18에 관한 김영삼 정부도 5,6공의 군사 정권과 다를 바가 없다' '5.18의 해결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원점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의견이 광주 시민들 사이에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한편 오늘날 대다수의 국민들이 이제는 항쟁에 대해 식상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국민들은 그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악몽에서 멀리 벗어나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해자와 피해자간의 화해를 원하고 있다.

그러나 화해에는 최소한의 선행요건이 갖춰져야 한다. 그것은 바로 가해자가 누구인가가 밝혀지고 그 가해자가 나타나서 자신의 잘못에 대해 용서를 빌 때 가능한 것이다. 현실은 이러한 건전한 상식을 비웃고 있다. 피해자가 화해를 하려 해도 가해자가 무대 뒤에 숨어서 나타나지 않고 있으니 어떻게 화해를 할 수 있단 말인가.

5.18고소. 고발 사건이 진행되고 있는 요즘 언론을 통해 알려지고 있는 조사 대상자들의 진술 내용을 보더라도 그들은 용서를 청할 의사가 전혀 없음을 알 수 있다. 아니 그 학살 만행을 구국의 결단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당시의 정치권력을 움켜쥐었던 전두환과 노태우를 고소, 고발한 한 사람으로서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검찰의 수사도 요식 행위에 그치고 말 것이라는 의혹을 품게 만들고 있다.

우리의 요구는 너무도 간단하다. 5.18의 올바른 역사적 자리매김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철저한 진상규명을 해야 한다.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 군인들이 무차별 발포했는데도 발포 명령자는 찾아내지 못했고, 수백 명의 양민들이 학살당했는데도 발포 책임자의 얼굴은 아직도 드러나지 않고 있다. 바로 이러한 모순들을 제대로 규명하지 못한다면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5.18을 해결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이대로는 안 된다. 훗날의 역사에 맡기자는 현정부의 앵무새 같은 말은 안 된다. 설득력이 없다. 역사가 필히 단죄하는 것은 사필귀정이다. 그러나 사필귀정이라는 말로는 5월의 원한에 찬 무수한 눈빛을 감당할 수도 없거니와 그들을 달랠 수도 없다. 일단 법률 적으로 명확하게 학살 진상을 밝혀야 한다. 용서한다고 해서 잘못을 덮어두고 넘어갈 수는 없다. 발포 책임자가 밝혀져 자기 행위에 대해 사죄하고 납득할 만한 조치를 한다면 우리는 용서하고 화해할 마음의 준비가 돼 있다. 사법적 처리를 요구하는 것은 반드시 당사자에 대한 형사 처벌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이를 계기로 전국민이 새롭게 화합하고 화해하는 계기를 마련하자는 뜻이다

5.18기념재단 출범

이런 상황 속에서 '5.18기념 재단'이 출범했다는 것은 커다란 의미가 있다고 본다. '5.18기념 재단'은 5월 정신의 부활이요, 참으로 안팎으로 모진 시련들에 굴하지 않고 정성을 쏟은 결과이기 때문이다. 엄청난 사실을 보고 직접 참여하면서 죽음의 갈림길에 섰던 5.18피해자들이 진실 하나로 이룩한 것이 있다면 바로 '5.18기념 재단' 출범인 것이다. 진상마저 규명되지 않았는데 5월 관련자들이 원칙 없는 보상이라는 이름 앞에 추해 질 수도 있는 마음을 되돌아보며 일궈 낸 자성의 결정체가 바로 기념 재단이다. 사실 기념 재단의 설립은 시급한 일이었다. 죽음을 넘어 살아온, 아니 이 역사에 우뚝 솟을 항쟁 정신의 맥을 지키려면 무언가 결집된 구성 체가 필요했다.

출범 계획 단계에서 서로간의 이견도 있었고 보이지 않는 갈등도 있었지만, 5월이라는 큰 명제 앞에 그 어느 것도 이유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을 보여준 감동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이 기념재단에 참여하는 우리 서로 모두 남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점이다. 항쟁의 피해자들 모두에게는 죽음보다 더한 아픔과 통곡과 분노와 원한의 눈빛이 남아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을 모아 항쟁과정 중에서 보여주었던 대동정신을 계승하기로 한 것이다.

이 기년 재단에서는 5.18기념 사업만이 아니라 장학 사업, 5월 정신 계승 사업, 관련자들의 후생 복지 사업 , 출판, 홍보 사업 그리고 광주의 정신 문화 사업을 발전시키는데 온 정성을 다해 나갈 것이다. 이 사업들은 5.18관련자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기금 모금으로 펼쳐진다. 이처럼 항쟁의 피해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시민들의 정성이 담긴 기금으로 재단을 운영하기로 결정한 데는 걸실 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현재 관 주도로 추진하고 있는 기념 사업과 앞으로 계속 이어질 후속 사업등이 졸속으로 진행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것이다.

당장 시급한 일은 5.18관련 유물 보존 이다. 당시 계엄군의 총격에 시민들이 쓰러졌던 금남로, 충장로는 물론 마지막까지 항쟁의 깃발을 내리지 않았던 도청도 보존해야 한다. 그리고 항쟁이 끝나고 수 천명의 젊은 동지들이 끌려가서 인간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고문을 당했던 상무대, 군 헌병소 영창이나 법정, 또는 관련 시설물들까지 항쟁의 의미를 되새기는 장소로 남아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건물들이 있던 상무대를 광주시가 일반 건축 회사에 분양 해 버렸다는 사실은 관 주도의 굴절된 기념 사업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예이다.

반목과 갈등의 14년

이 재단 설립 논의가 시작된 것은 지난 몇 년 전부터다. 그러다가 93년 2월 '5.18민주 항쟁 동지회'(이하 오항동)가 광주 문제의 양비론적 시각은 부당하다고 전제하고 책임자 처벌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헌법 소원을 제기하는 기자 회견을 열면서 구체화됐다. 그후 오향동을 중심으로 재단 설립을 위한 물밑 작업이 진행돼 '93년 발기인 대회를 열었다. 그러나 오향동과 더불어 광주 5.18광주 민주 민중 항쟁 연합' (이하 오민련)의 참여 문제 등 현안이 속출하면서 재단 출범 자체가 불투명해지는 상황을 맞기도 했었다. 서로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된 상태에서 재단 출범 직전까지 어려움을 겪어야 했던 것이다.

이런 갈등은 항쟁이 끝난 '80년 이후부터 내재되어 있었다. 학살의 주역이었던 전두환 정권은 단체 결성 자체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탄압 일변도 정책으로 일관했다. 그리고 5.18피해자들도 이 탄압정책에 휘말려 피해자들이 함께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탄압정책에 대항하는 항쟁에 몰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노태우가 정권을 잡고서도 광주의 항쟁 단체들은 그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노태우 정권은 탄압 일변도에서 회유정책으로 전환했다. 그래서 일부분이기는 하지만 유가족이나 부상자들에게 보상을 하기도 했다. 이 회유정책은 대동 정신을 계승하는 데 또 하나의 걸림돌로 작용했다. 경제적, 정신적으로 말할 수 없이 어려움을 겪었던 피해자들 사이에 이해관계라는 변수가 발생한 것이다. 이처럼 항쟁 주역들의 분열된 모습은 시민 대중들로부터 심한 지탄을 받게 되었다.

그로 인해 관련 단체들이 내부 반성을 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바로 '5.18기념 재단'이 출범하게 된 것이다. 이 내부의 깊은 성찰은 기념 재단 창립 선언문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구속자, 부상자, 유가족들이 5월을 더럽히고 가신 임들을 욕되게 하고 광주를 부끄럽게 하고 시민들을 분노케 한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80년 5월의 정신과 자세로 되돌아갈 것을 다짐하며 가신 임들과 7천만 겨레 앞에 옷깃을 여미고 섰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5.18기념 재단' 출범은 5월 관련 단체들이 지금까지 잃었던 신뢰를 다시 회복하고자 하는 몸부림이고, 5월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고자 하는 염원이라 할 수 있다.

5월 광주의 삶은 이제부터다 . 군사 정권에 항거하여 목숨을 던질 수 있었던 투쟁기를 제 1장 1막으로 본다면, 많은 관련 단체들의 난립과 단체간의 갈등, 보상의 기로, 군사 정권의 회유, 분열 등을 제 2장 2막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지금은 5월의 모든 정신과 관련 기념 사업이 완숙 단계로 접어들고 있기 때문에 완전한 3장 3막을 엮어 가기 위해 총매진 해야 할 때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5월 광주는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절대적인 사명으로 이끌고 가야 할 역사적 과업이요. 미래를 밝혀 줄 횃불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5월의 이름으로 절대 굴함 없이 의연하고 당당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