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망월 묘역 폐쇄 공작의 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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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월 묘역 폐쇄 공작의 진상
민주화성지 망월동묘역을 떠난 5.18영령들
91년 3월 29일 오전 11시, 광주 신양 파크 호텔에서는 83년 망월동 5.18묘역 폐쇄 공작과 관련해 한때 국민적 심판대에 올랐던 광주 지역 개발 의회의 91년도 정기 총회가 열렸다.
이날 총회에는 이효계 광주 직할 시장 김동환 전라 남도 부지사 등 시도 단위 각급 기관장과 협의회 관계자 등이 대거 참석함으로써 외견상으로는 적어도 이 단체의 위상을 짐작케 하는 데 충분했다. 그런데 광주 시민들, 특히 5.18유가족들은 " 이 단체가 단순한 민간 관변 단체의 성격을 벗어나 지난 83년 역사의 현장인 망월 묘역에 묻힌 5월 영령들의 시신을 돈 몇 푼으로 흥정하여 묘지 이장을 획책하는 범죄적 행위를 저질렀다."는 인식과 함께 강한 경계심을 갖고 있다. 특히 80년대 벽두에 시작된 광주 민중 항쟁이 일어난 지 벌써 11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5.18유가족들을 중심으로 광주 전남 지역 개발 협의회(이하 지개협)의 설립 배경과 이 단체가 주도한 망월 묘역의 폐쇄 공작에 대한 규명 작업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광주직할시 북구 운정동 산46번지. 광주 시립 공원 묘지의 한 모통이에 자리잡고 있는 제 3묘역에는 5.18영령들이 잠들어 있다. 제 3묘역은 당시 야산 9백 50여 평에 급조한 곳으로 80년 5월 27일 새벽까지 계엄군에 의해 숨진 시신 중 1백 26구가 5월29일 시청 청소차에 실려와 묻힌 곳이다. 이처럼 한 맺힌 주검이 묻힌 망월동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언제부터인가 이 나라 민주의 성지로 떠오르고 있다.
이제 망월은 행정구역상 남녘 광주의 한 지방을 뜻하는 단순한 고유명사에 머물지 않고 보통명사로서의 망월, 민주와 자유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의 영원한 망월로 자리매김되고 있다. 그런데 이 광주시립공원묘지 제 3묘역에 묻힌 5.18희생자묘 상당수가 제각기 다른 지역으로 분산, 이장된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정확히 83년 3월 4일 묘지 번호 117에 위치한 고 민병열의 묘가 이장된 것을 비롯, 그해 고 이성귀. 박인천 심동선. 기남용. 박장권 . 선종철. 윤성호 . 김승후. 김현규. 이재술. 유영선 . 김만부의 묘 등 13구가 제각기 다른 지역으로 분산 이장되었다. 또 이듬해인 84년 1월 6일 묘지 번호 25에 위치한 고 김경환의 묘가 이장돼간 것을 비롯 그해에 고 염행렬. 김평용. 서호빈 . 김함옥. 정학근. 채이병. 김호중. 고영자. 오정순. 김윤수 . 안병태 . 기정선의묘 등 13구가 , 그리고 86년에 1구(신원 미확인)가 이장되는 등 모두 27구의 5.18희생자 묘가 망월묘역을 떠났다.
그후 그 빈자리에 80년 당시, 5월 광주민중항쟁을 주도한 혐의로 수배 검거되어 옥중 단식 투쟁을 하던 중 82년 10월 12일 광주교도소에서 숨진 전남대 총학생회장 고 박관현을 비롯, 6월항쟁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숨진 연세대 경영학과 2학년 고 이한열의 묘가 안장되었다. 이와함께 양영진 . 조성만. 이내창. 이철규. 표정두. 최덕수. 신영일. 기종도 등의 묘도 이곳에 있다.
이로써 제 3묘역에는 80년 당시 묻힌 희생자 묘 1백26기 가운데 분산 이장해 간 27기의 묘를 제외한 99기와, 당시 희생되었으나 다른 곳에 묻혔다가 이곳으로 이장해 온 13기, 부상 후에 숨진 희생자 묘 5기와 행방 불명자 가묘 3기, 그리고 80년 이후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숨진 민주 열사의 묘 15기 등 모두 1백35기의 묘가 안장되어 있다. 이같이 1백 35기의 묘가 비좁게 들어선 제 3묘역에는 현재로선 더 이상 자리잡을 틈이 없는 실정이다.
급조된 전남지역개발협의회
그런데 광주 망월동 묘역의 이장엔 지개협이 깊숙이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개협은 82년 12월 15일 전남도청 회의실에서 창립 총회를 갖고 광주직할시 서구 구동 9의 1 전남체육회관 3층에 사무국을 개설한 뒤 같은해 12월 30일 내무부장관 제 82-2호로 사단법인 설립허가를 얻고 ,다음날 법원 등기 제 170호로 사단법인 등기를 내, 단체 등록에 대한 모든 절차를 마쳤다. 이어 사무국 개설 4개월 만인 83년 4월 17일 금남로 3가 1-11의 광주은행빌딩으로 이전했다가 다시 90년 12월28일 서구 월산4동 986-2에 위치한 지원회관 2층으로 이전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한편 지개협은 발기 취지문을 통해 "우리 전남은 …… 소득이 낮고 산업은 취약성을 면치 못해 한탄 스럽게 여겨 오던 차에 다행히도 제 5공화국 수립 이후 국토의 균형 있는 개발이라는 차원에서 대통령 각하께서는 3천4백40억 원이라는 막대한 예산을 지원해 주셨고, ……여천공단과 광양 제철 단지의 건설이 추진되는 등 미래를 밝게 하는 개발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터에 도민의 화합과 단결의 구심체로서 지역개발의 기틀을 마련할 목적으로 각종 사업을 민간 차원에서 추진하려는 취지 하에서 도내 유지 14인에 의해 발기한다"고 밝혔다.
이때 발기인으로는 고광표(대창운수 . 대창석유 회장), 권진욱(변호사), 김종길(여수상의 회장), 김종태 (광주일보 사장), 김형수(한국화가), 마삼열(언론 중재위원), 박건흥(전 군수), 박용훈(남일피혁 사장), 박정구(광주고속 사장), 박준채 (전 조선대 대학 원장), 박진동(전 광주일보 부사장), 임광행(보해양조 회장), 임선호(임피부과의원 원장), 허진득(광주 기독교 병원장)씨 등이 참여했다. 이에 따라 초대 회장에는 고광표씨, 부회장에는 임선호. 김종태. 박정구. 임광행. 김종길씨 등 다섯명을 선임하고 사무국장에는 박건홍씨를 임명하는 한편 곧바로 각계 대표 2백 여명을 회원으로, 유지급 인사 50여명을 고문으로 위촉하는 기동성을 보였다.
그리고 지개협은 주요사업으로 △장학금 지급 및 인재 발굴 육성 △문화재 보존 발굴 및 전통문화 예술 진흥 △지방체육 진흥 △지역 적성산업 유치 △관광 . 부존자원의 보존 개발 △서민자활 대책 등 복지증진△준법정신 앙양과 법률상담△의식개혁운동의 추진△지역 안정 및 화합을 위한 지원△지역개발 사업의 건의 및 기타 필요한 사업등 크게 10여가지 사업계획을 세웠다. 또 이같은 사업을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장학분과 위원회 및 문예, 체육, 복지 , 자원개발, 법률상담, 홍보 등 7개 분과위원회를 설치했다.
이처럼 사업 계획과 조직 인선까지 마친 지개협은 이듬해인 83년 2월1일 광주 신양 파크 호텔에서 모임을 갖고 첫해인 83년에 15억원, 84년에 20억원, 85년에 25억 원을 마련하는 등, 3년 동안 모두 60억 원의 기금 조성, 계획을 세우고, 이를 모두 상공인들로부터 성금 형식으로 거두기로 확정했다.
이에 따라 호남지역을 성장기반으로 하고 있는 금호그룹이 5억 5천만원을 낸 것을 비롯, 포항제철 5억원, 삼성 그룹 3억원, 조선내화 3억원 등의 순으로 광주. 전남지역 상공인 23명과 재경 전남지역 출신 기업인 18명, 타시도 상공인 23명등 1백33명이 성금을 냈다. 이밖에 13개 기관가 단체가 적게는 1백만원에서부터 1천만원까지 성금을 내는 등 모두 44억 6천6백만원의 기금조성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더 이상의 성금 조성이 어려워지자 지난 86년도에 기금 조성 목표액을 50억 원으로 하향 조정했으며, 연도별 조성 실적으로는 83년에 18억 7천 만원, 84년 16억 5천 만원 85년 2억 7천 만원, 86년 9억6천 만원 그리고88년 2억 5천 만원과 89년 3억원 등이다.
위로금 내세운 묘지 이장 공장의 경위
그런데 지개협은 이같은 재정적인 기틀에도 불구하고 표면적으로 내세운 설립목적과 주요사업 계획과는 달리 이미 설립초부터 5.18전담기구로 변신해 있었다. 지개협은 설립과 동시에 제 1차 사업으로 망월동 묘역에 안장 되어 있는 5.18희생자들의 묘를 제각기 다른 지역으로 분산 이장시키기위한, 이른바 5.18묘역 폐쇄공작에 착수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80년 5월 광주에서 일어났던 학살의 진상을 은폐하고, 항쟁의 참뜻을 희석시키기 위한 5공정권의 치밀하고 단계적인 구도 아래 지개협이 그 대리자 역할을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지개협은 83년 2월부터 모든 5.18유가족과 부상자들의 가정 방문을 실시해, 개인별 생활 실태 조사에 나섰는데, 유가족 박순례씨(58)에 따르면 이때 조사 요원들은 "현재 기금이 마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성금이 걷히는 대로 생활이 가장 어려운 가족부터 위로금을 지급하기 위해 생활 정도를 조사하게 된 것" 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같은 약속에도 불구하고. 그해 3월부터 지급되기 시작한 위로금은 생계에 위협을 받고 있는 유족부터 지급된 것이 아니라, 전혀 엉뚱한 사람에게 지급되어 분명 분열 음모가 숨겨져 있을 것이라는 추측을 낳게 했다.
아니나 다를까 위로금을 지급받은 일부 유족들은 망월동 5.18묘역에 안장되어 있는 희생자들의 묘를 다른 지역으로 이장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지개협은 묘를 이장해가는 유족들에게만 위로금 1천만원, 묘 이장비 50만원을 지급했다.
이에 따라 유족들은 지개협 사무실을 찾아가 묘 이장을 전제로 한 위로금은 절대 받을 수없다며 항의도 하고 농성도 벌였으나, 지개협은 뒷전에서 일부 유가족들을 상대로 한 묘 이장 공작을 계속 진행했다.
유가족 김길자 (51)는 "특히 지방에 거주하고 있는 유가족들에겐 관내 군수와 경찰서장, 면장 심지어 마을 이장과 새마을 지도자까지 동원되어 위로금 지급을 내 세워 집요하게 묘 이장을 회유했다"고 밝히고 있다.
유가족 구선악씨(50)도 "당시 유족들은 뒤 늦게야 지개협이 개인별 생활 실태 조사 자료를 바탕으로 유족간 분열 공작을 세우고, 회유 대상을 선정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후 전 회장과 박봉임씨(49)등을 중심으로 한 유족들은 안되겠다 싶어 지개협 고광표 회장 자택까지 찾아가 대문 앞에서 매일 같이 "묘지 이장 책동 즉각 중지" 등의 구호를 외치며 항의 농성을 벌였다. 이때마다 경찰은 이들을 연행했고 연행할 때마다 경찰서나 기동대 보호 실 또는 경찰 차에 10여 시간씩 감금했다가 풀어 주거나 광주에서 20-30km떨어진 시외에 분산해서 내려놓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이때부터 유족들은 부상자동지회 등 5.18관련 단체들과 함께 '5.18묘역의 폐쇄공작'에 대한 진상을 알리는 성명서 등의 유인물을 시민들에게 돌리면서 범시민적 연대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이처럼 5.18유가족뿐만 아니라 광주. 전남 지역의 재야 민주 세력, 그리고 광주 시민들의 저항이 거세 지자 지개협은 84년 9월 22일 묘지 번호 80에 위치한 고 김정선의 묘를 다른 지역으로 이장한 것을 마지막으로 2년여 동안 희생자 묘 1백26기 가운데 26기만을 분산 이장한 채, 묘이장 공작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개협은 5.18치유 차원에서 모든 유족과 부상자들에게 위로금을 지급하겠다는 당초의 약속 때문에 진퇴양난에 빠지자 유족들이 매월 한 차례씩 갖는 "월례회 모임을 해체할 경우 위로금을 지급하겠다" 새로운 제안을 내놓았다.
이로 인해 당분간이라도 월례회를 갖지 말자는 측과 어떤 경우에도 그럴 수 없다는 측의 주장이 맞서는 갈등이 있었으나, 유족회는 그같은 내부적인 갈등을 지혜롭게 극복, 결코 월례회 모임을 해체할 수 없다는 데 의견을 모았고 그 월례회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묘 이장과 위로금을 놓고 일부 유족들이 이탈, 양분되기도 했다. 지개협은 유족들의 월례회 모임 해체에도 실패하자, 어쩔 수 없이 같은 해 11월을 기해, 그때까지 묘지 이장을 전제로 한 위로금 수령을 거부 해왔던 유족들에게도 위로금 1천 만원씩을 일괄 지급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부상자들에게도 부상 등급에 따라 1천 만원에서 4백 만원까지의 위로금이 지급되었다.
설립 초부터 90년 12월말까지 8년간의 지원 현황은 연인원 1천5백91명에게 26억 6천 8백90 십 만원이 지원되었으며, 항목별로는 △생계비 지원 3백5명, 23억7천5백60만원△묘지 이장비 지원27명, 1천3백10만원△치료비 지원 36명, 1천2백82만원 △제2차 생계비 17명, 1억3천16만원△명절 위문 등 1천2백1명, 1억2천1백47만원 △기타 5명, 1천1백75만원 등이다. 그러나 지개협은 이 위로금을 모든 5.18유족과 부상자에게 지급했던 것은 아니다. 80년 당시 국방부가 공식 발표한 5.18관련 사망자 1백91명, 부상자 8백52명 가운데에서도 정부의 기준에 의해 무연고, 비협조 또는 폭도로 분류된 유가족 40여명과 부상자 7백 여명은 지원 대상에서조차 제외시켰다.
망월 묘역 폐쇄 공작의 진상 밝혀져야
지개협은 올해도 남해안 해상 식물 자원의 생태학적 연구 지원 등 16건의 사업 계획을 세우고 2억5천6백 만원의 사업비를 책정, 집행하고 있다. 그같은 지역개발 사업에도 불구하고 5월 단체들은 "지개협의 사업은 사실 매년 그 명부을 유지하는 선에서 행해졌고 사업비 또한 8년동안 연평균 2억5천 만원에 불과하다. 그 반증으로 연간 사업비는 당초 지개협이 거두어들였던 성금 1백 억원이나 현재 남아 있는 50역원의 규모에 비해 너무 빈약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다음으로 , 지개협은 과연 자생 단체이며 지개협이 행한 망월 묘역의 묘 이장 공작은 독자적인 판단에서 이루어진 것일까. 단정적으로 그렇게 믿는 사람은 없다.
광주의 참극을 정권 찬탈의 발판으로 삼은 5공 정권은 출범 이후 통치권자의 입장에서 볼 때 광주문제는 스스로 풀 수 없는 최대 걸림돌이요. 정통성에 도전하는 '반란의 집단'으로 보였을 것이다.
또 광주. 전남 지역의 정보기관이나 전라남도 등의 일선 행정기관 차원이 아닌, 최소한 통치권자의 핵심부나 그 주변에서 치밀하게 구상하고, 그 계획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지개협을 급조한 것으로 보는 이가 많다.
또 지개협이 거두어들인 성금에 대해서도 지역 민들은 "정부가 전액 출자하거나 서울권 대기업으로부터 조성한 것이 아니고 피해 당사자 격인 광주. 전남 지역 상공인들에게 성금 할당, 거의 반강제적으로 거두어들여 위로금을 지급함으로써 결국 우리 호주머니에서 나온 돈을 우리가 나누어 쓴데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그런데 어떤 식으로든 지개협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칼날 시퍼런 5공 당시, 기업체를 가진 사람 치고 어느 누가 감히 통치권력의 지시에 거역하거나 비위를 거스를 수 있었겠는가"하고 그들이 안고 있는 현실적 고민을 털어놓기도 한다.
물론 유족 회나 5월 단체들은 아직 지개협에 대한 부정적 시각으로 일관하고 있다. 더욱이 지개협의 설립 과정과 정보기관의 개입 여부, 망월 묘역 폐쇄 공작 등의 진상 규명은 올바른 역사의 기록을 위해서도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이제 지개협은 설립 초에 내세웠던 사업들뿐만 아니라, 5.18관련 사업을 실천에 옮기는 분명한 의지를 보임으로써 시민적 공감대와 신뢰를 회복해야 할 것이다 . 그리고 어용과 관제 시비에서 탈피해 순수한 민간 기구로 거듭나기 위해서 지개협은 과거 5공 정권의 대리자로서, 망월 묘역에 묻힌 5.18희생자 묘를 분산 이장시켰던 시행착오에 대한 뉘우침부터 있어야 할 것이다.
민주화성지 망월동묘역을 떠난 5.18영령들
91년 3월 29일 오전 11시, 광주 신양 파크 호텔에서는 83년 망월동 5.18묘역 폐쇄 공작과 관련해 한때 국민적 심판대에 올랐던 광주 지역 개발 의회의 91년도 정기 총회가 열렸다.
이날 총회에는 이효계 광주 직할 시장 김동환 전라 남도 부지사 등 시도 단위 각급 기관장과 협의회 관계자 등이 대거 참석함으로써 외견상으로는 적어도 이 단체의 위상을 짐작케 하는 데 충분했다. 그런데 광주 시민들, 특히 5.18유가족들은 " 이 단체가 단순한 민간 관변 단체의 성격을 벗어나 지난 83년 역사의 현장인 망월 묘역에 묻힌 5월 영령들의 시신을 돈 몇 푼으로 흥정하여 묘지 이장을 획책하는 범죄적 행위를 저질렀다."는 인식과 함께 강한 경계심을 갖고 있다. 특히 80년대 벽두에 시작된 광주 민중 항쟁이 일어난 지 벌써 11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5.18유가족들을 중심으로 광주 전남 지역 개발 협의회(이하 지개협)의 설립 배경과 이 단체가 주도한 망월 묘역의 폐쇄 공작에 대한 규명 작업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광주직할시 북구 운정동 산46번지. 광주 시립 공원 묘지의 한 모통이에 자리잡고 있는 제 3묘역에는 5.18영령들이 잠들어 있다. 제 3묘역은 당시 야산 9백 50여 평에 급조한 곳으로 80년 5월 27일 새벽까지 계엄군에 의해 숨진 시신 중 1백 26구가 5월29일 시청 청소차에 실려와 묻힌 곳이다. 이처럼 한 맺힌 주검이 묻힌 망월동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언제부터인가 이 나라 민주의 성지로 떠오르고 있다.
이제 망월은 행정구역상 남녘 광주의 한 지방을 뜻하는 단순한 고유명사에 머물지 않고 보통명사로서의 망월, 민주와 자유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의 영원한 망월로 자리매김되고 있다. 그런데 이 광주시립공원묘지 제 3묘역에 묻힌 5.18희생자묘 상당수가 제각기 다른 지역으로 분산, 이장된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정확히 83년 3월 4일 묘지 번호 117에 위치한 고 민병열의 묘가 이장된 것을 비롯, 그해 고 이성귀. 박인천 심동선. 기남용. 박장권 . 선종철. 윤성호 . 김승후. 김현규. 이재술. 유영선 . 김만부의 묘 등 13구가 제각기 다른 지역으로 분산 이장되었다. 또 이듬해인 84년 1월 6일 묘지 번호 25에 위치한 고 김경환의 묘가 이장돼간 것을 비롯 그해에 고 염행렬. 김평용. 서호빈 . 김함옥. 정학근. 채이병. 김호중. 고영자. 오정순. 김윤수 . 안병태 . 기정선의묘 등 13구가 , 그리고 86년에 1구(신원 미확인)가 이장되는 등 모두 27구의 5.18희생자 묘가 망월묘역을 떠났다.
그후 그 빈자리에 80년 당시, 5월 광주민중항쟁을 주도한 혐의로 수배 검거되어 옥중 단식 투쟁을 하던 중 82년 10월 12일 광주교도소에서 숨진 전남대 총학생회장 고 박관현을 비롯, 6월항쟁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숨진 연세대 경영학과 2학년 고 이한열의 묘가 안장되었다. 이와함께 양영진 . 조성만. 이내창. 이철규. 표정두. 최덕수. 신영일. 기종도 등의 묘도 이곳에 있다.
이로써 제 3묘역에는 80년 당시 묻힌 희생자 묘 1백26기 가운데 분산 이장해 간 27기의 묘를 제외한 99기와, 당시 희생되었으나 다른 곳에 묻혔다가 이곳으로 이장해 온 13기, 부상 후에 숨진 희생자 묘 5기와 행방 불명자 가묘 3기, 그리고 80년 이후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숨진 민주 열사의 묘 15기 등 모두 1백35기의 묘가 안장되어 있다. 이같이 1백 35기의 묘가 비좁게 들어선 제 3묘역에는 현재로선 더 이상 자리잡을 틈이 없는 실정이다.
급조된 전남지역개발협의회
그런데 광주 망월동 묘역의 이장엔 지개협이 깊숙이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개협은 82년 12월 15일 전남도청 회의실에서 창립 총회를 갖고 광주직할시 서구 구동 9의 1 전남체육회관 3층에 사무국을 개설한 뒤 같은해 12월 30일 내무부장관 제 82-2호로 사단법인 설립허가를 얻고 ,다음날 법원 등기 제 170호로 사단법인 등기를 내, 단체 등록에 대한 모든 절차를 마쳤다. 이어 사무국 개설 4개월 만인 83년 4월 17일 금남로 3가 1-11의 광주은행빌딩으로 이전했다가 다시 90년 12월28일 서구 월산4동 986-2에 위치한 지원회관 2층으로 이전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한편 지개협은 발기 취지문을 통해 "우리 전남은 …… 소득이 낮고 산업은 취약성을 면치 못해 한탄 스럽게 여겨 오던 차에 다행히도 제 5공화국 수립 이후 국토의 균형 있는 개발이라는 차원에서 대통령 각하께서는 3천4백40억 원이라는 막대한 예산을 지원해 주셨고, ……여천공단과 광양 제철 단지의 건설이 추진되는 등 미래를 밝게 하는 개발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터에 도민의 화합과 단결의 구심체로서 지역개발의 기틀을 마련할 목적으로 각종 사업을 민간 차원에서 추진하려는 취지 하에서 도내 유지 14인에 의해 발기한다"고 밝혔다.
이때 발기인으로는 고광표(대창운수 . 대창석유 회장), 권진욱(변호사), 김종길(여수상의 회장), 김종태 (광주일보 사장), 김형수(한국화가), 마삼열(언론 중재위원), 박건흥(전 군수), 박용훈(남일피혁 사장), 박정구(광주고속 사장), 박준채 (전 조선대 대학 원장), 박진동(전 광주일보 부사장), 임광행(보해양조 회장), 임선호(임피부과의원 원장), 허진득(광주 기독교 병원장)씨 등이 참여했다. 이에 따라 초대 회장에는 고광표씨, 부회장에는 임선호. 김종태. 박정구. 임광행. 김종길씨 등 다섯명을 선임하고 사무국장에는 박건홍씨를 임명하는 한편 곧바로 각계 대표 2백 여명을 회원으로, 유지급 인사 50여명을 고문으로 위촉하는 기동성을 보였다.
그리고 지개협은 주요사업으로 △장학금 지급 및 인재 발굴 육성 △문화재 보존 발굴 및 전통문화 예술 진흥 △지방체육 진흥 △지역 적성산업 유치 △관광 . 부존자원의 보존 개발 △서민자활 대책 등 복지증진△준법정신 앙양과 법률상담△의식개혁운동의 추진△지역 안정 및 화합을 위한 지원△지역개발 사업의 건의 및 기타 필요한 사업등 크게 10여가지 사업계획을 세웠다. 또 이같은 사업을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장학분과 위원회 및 문예, 체육, 복지 , 자원개발, 법률상담, 홍보 등 7개 분과위원회를 설치했다.
이처럼 사업 계획과 조직 인선까지 마친 지개협은 이듬해인 83년 2월1일 광주 신양 파크 호텔에서 모임을 갖고 첫해인 83년에 15억원, 84년에 20억원, 85년에 25억 원을 마련하는 등, 3년 동안 모두 60억 원의 기금 조성, 계획을 세우고, 이를 모두 상공인들로부터 성금 형식으로 거두기로 확정했다.
이에 따라 호남지역을 성장기반으로 하고 있는 금호그룹이 5억 5천만원을 낸 것을 비롯, 포항제철 5억원, 삼성 그룹 3억원, 조선내화 3억원 등의 순으로 광주. 전남지역 상공인 23명과 재경 전남지역 출신 기업인 18명, 타시도 상공인 23명등 1백33명이 성금을 냈다. 이밖에 13개 기관가 단체가 적게는 1백만원에서부터 1천만원까지 성금을 내는 등 모두 44억 6천6백만원의 기금조성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더 이상의 성금 조성이 어려워지자 지난 86년도에 기금 조성 목표액을 50억 원으로 하향 조정했으며, 연도별 조성 실적으로는 83년에 18억 7천 만원, 84년 16억 5천 만원 85년 2억 7천 만원, 86년 9억6천 만원 그리고88년 2억 5천 만원과 89년 3억원 등이다.
위로금 내세운 묘지 이장 공장의 경위
그런데 지개협은 이같은 재정적인 기틀에도 불구하고 표면적으로 내세운 설립목적과 주요사업 계획과는 달리 이미 설립초부터 5.18전담기구로 변신해 있었다. 지개협은 설립과 동시에 제 1차 사업으로 망월동 묘역에 안장 되어 있는 5.18희생자들의 묘를 제각기 다른 지역으로 분산 이장시키기위한, 이른바 5.18묘역 폐쇄공작에 착수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80년 5월 광주에서 일어났던 학살의 진상을 은폐하고, 항쟁의 참뜻을 희석시키기 위한 5공정권의 치밀하고 단계적인 구도 아래 지개협이 그 대리자 역할을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지개협은 83년 2월부터 모든 5.18유가족과 부상자들의 가정 방문을 실시해, 개인별 생활 실태 조사에 나섰는데, 유가족 박순례씨(58)에 따르면 이때 조사 요원들은 "현재 기금이 마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성금이 걷히는 대로 생활이 가장 어려운 가족부터 위로금을 지급하기 위해 생활 정도를 조사하게 된 것" 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같은 약속에도 불구하고. 그해 3월부터 지급되기 시작한 위로금은 생계에 위협을 받고 있는 유족부터 지급된 것이 아니라, 전혀 엉뚱한 사람에게 지급되어 분명 분열 음모가 숨겨져 있을 것이라는 추측을 낳게 했다.
아니나 다를까 위로금을 지급받은 일부 유족들은 망월동 5.18묘역에 안장되어 있는 희생자들의 묘를 다른 지역으로 이장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지개협은 묘를 이장해가는 유족들에게만 위로금 1천만원, 묘 이장비 50만원을 지급했다.
이에 따라 유족들은 지개협 사무실을 찾아가 묘 이장을 전제로 한 위로금은 절대 받을 수없다며 항의도 하고 농성도 벌였으나, 지개협은 뒷전에서 일부 유가족들을 상대로 한 묘 이장 공작을 계속 진행했다.
유가족 김길자 (51)는 "특히 지방에 거주하고 있는 유가족들에겐 관내 군수와 경찰서장, 면장 심지어 마을 이장과 새마을 지도자까지 동원되어 위로금 지급을 내 세워 집요하게 묘 이장을 회유했다"고 밝히고 있다.
유가족 구선악씨(50)도 "당시 유족들은 뒤 늦게야 지개협이 개인별 생활 실태 조사 자료를 바탕으로 유족간 분열 공작을 세우고, 회유 대상을 선정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후 전 회장과 박봉임씨(49)등을 중심으로 한 유족들은 안되겠다 싶어 지개협 고광표 회장 자택까지 찾아가 대문 앞에서 매일 같이 "묘지 이장 책동 즉각 중지" 등의 구호를 외치며 항의 농성을 벌였다. 이때마다 경찰은 이들을 연행했고 연행할 때마다 경찰서나 기동대 보호 실 또는 경찰 차에 10여 시간씩 감금했다가 풀어 주거나 광주에서 20-30km떨어진 시외에 분산해서 내려놓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이때부터 유족들은 부상자동지회 등 5.18관련 단체들과 함께 '5.18묘역의 폐쇄공작'에 대한 진상을 알리는 성명서 등의 유인물을 시민들에게 돌리면서 범시민적 연대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이처럼 5.18유가족뿐만 아니라 광주. 전남 지역의 재야 민주 세력, 그리고 광주 시민들의 저항이 거세 지자 지개협은 84년 9월 22일 묘지 번호 80에 위치한 고 김정선의 묘를 다른 지역으로 이장한 것을 마지막으로 2년여 동안 희생자 묘 1백26기 가운데 26기만을 분산 이장한 채, 묘이장 공작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개협은 5.18치유 차원에서 모든 유족과 부상자들에게 위로금을 지급하겠다는 당초의 약속 때문에 진퇴양난에 빠지자 유족들이 매월 한 차례씩 갖는 "월례회 모임을 해체할 경우 위로금을 지급하겠다" 새로운 제안을 내놓았다.
이로 인해 당분간이라도 월례회를 갖지 말자는 측과 어떤 경우에도 그럴 수 없다는 측의 주장이 맞서는 갈등이 있었으나, 유족회는 그같은 내부적인 갈등을 지혜롭게 극복, 결코 월례회 모임을 해체할 수 없다는 데 의견을 모았고 그 월례회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묘 이장과 위로금을 놓고 일부 유족들이 이탈, 양분되기도 했다. 지개협은 유족들의 월례회 모임 해체에도 실패하자, 어쩔 수 없이 같은 해 11월을 기해, 그때까지 묘지 이장을 전제로 한 위로금 수령을 거부 해왔던 유족들에게도 위로금 1천 만원씩을 일괄 지급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부상자들에게도 부상 등급에 따라 1천 만원에서 4백 만원까지의 위로금이 지급되었다.
설립 초부터 90년 12월말까지 8년간의 지원 현황은 연인원 1천5백91명에게 26억 6천 8백90 십 만원이 지원되었으며, 항목별로는 △생계비 지원 3백5명, 23억7천5백60만원△묘지 이장비 지원27명, 1천3백10만원△치료비 지원 36명, 1천2백82만원 △제2차 생계비 17명, 1억3천16만원△명절 위문 등 1천2백1명, 1억2천1백47만원 △기타 5명, 1천1백75만원 등이다. 그러나 지개협은 이 위로금을 모든 5.18유족과 부상자에게 지급했던 것은 아니다. 80년 당시 국방부가 공식 발표한 5.18관련 사망자 1백91명, 부상자 8백52명 가운데에서도 정부의 기준에 의해 무연고, 비협조 또는 폭도로 분류된 유가족 40여명과 부상자 7백 여명은 지원 대상에서조차 제외시켰다.
망월 묘역 폐쇄 공작의 진상 밝혀져야
지개협은 올해도 남해안 해상 식물 자원의 생태학적 연구 지원 등 16건의 사업 계획을 세우고 2억5천6백 만원의 사업비를 책정, 집행하고 있다. 그같은 지역개발 사업에도 불구하고 5월 단체들은 "지개협의 사업은 사실 매년 그 명부을 유지하는 선에서 행해졌고 사업비 또한 8년동안 연평균 2억5천 만원에 불과하다. 그 반증으로 연간 사업비는 당초 지개협이 거두어들였던 성금 1백 억원이나 현재 남아 있는 50역원의 규모에 비해 너무 빈약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다음으로 , 지개협은 과연 자생 단체이며 지개협이 행한 망월 묘역의 묘 이장 공작은 독자적인 판단에서 이루어진 것일까. 단정적으로 그렇게 믿는 사람은 없다.
광주의 참극을 정권 찬탈의 발판으로 삼은 5공 정권은 출범 이후 통치권자의 입장에서 볼 때 광주문제는 스스로 풀 수 없는 최대 걸림돌이요. 정통성에 도전하는 '반란의 집단'으로 보였을 것이다.
또 광주. 전남 지역의 정보기관이나 전라남도 등의 일선 행정기관 차원이 아닌, 최소한 통치권자의 핵심부나 그 주변에서 치밀하게 구상하고, 그 계획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지개협을 급조한 것으로 보는 이가 많다.
또 지개협이 거두어들인 성금에 대해서도 지역 민들은 "정부가 전액 출자하거나 서울권 대기업으로부터 조성한 것이 아니고 피해 당사자 격인 광주. 전남 지역 상공인들에게 성금 할당, 거의 반강제적으로 거두어들여 위로금을 지급함으로써 결국 우리 호주머니에서 나온 돈을 우리가 나누어 쓴데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그런데 어떤 식으로든 지개협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칼날 시퍼런 5공 당시, 기업체를 가진 사람 치고 어느 누가 감히 통치권력의 지시에 거역하거나 비위를 거스를 수 있었겠는가"하고 그들이 안고 있는 현실적 고민을 털어놓기도 한다.
물론 유족 회나 5월 단체들은 아직 지개협에 대한 부정적 시각으로 일관하고 있다. 더욱이 지개협의 설립 과정과 정보기관의 개입 여부, 망월 묘역 폐쇄 공작 등의 진상 규명은 올바른 역사의 기록을 위해서도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이제 지개협은 설립 초에 내세웠던 사업들뿐만 아니라, 5.18관련 사업을 실천에 옮기는 분명한 의지를 보임으로써 시민적 공감대와 신뢰를 회복해야 할 것이다 . 그리고 어용과 관제 시비에서 탈피해 순수한 민간 기구로 거듭나기 위해서 지개협은 과거 5공 정권의 대리자로서, 망월 묘역에 묻힌 5.18희생자 묘를 분산 이장시켰던 시행착오에 대한 뉘우침부터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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