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전민련창립 - 광주 민중 항쟁 바탕 9년 각고 전국적 대중 조직으로 출범
본문
전민련창립
광주 민중 항쟁 바탕 9년 각고 전국적 대중 조직으로 출범
- 창립 의의와 전망-
Ⅰ.민주 변혁 지평의 확대
1989년 1월 21일 '전국 민족 민주 운동 연합'이 창립되었다. '전민련'의 창립은 창립의 배경, 과정에서부터 '전. 민. 련'이라는 명칭의 확정에 이르기까지 현대 한국 민주 변혁의 역사에서 획기적인 정치적 의의를 갖는 것이다.
그것은 첫째, 민족. 민주 운동의 발전이 전국적 수준의 조직 활동으로까지 확장되었다는 점이다. 그간 민족. 민주 운동은 지역적 분산성과 불균등성에 의해 민주 변혁 실천의 한계를 누차 겪어 왔다. 민주 변혁의 역사에서 지역적 고립 . 분산에 의한 좌절과 패배의 최근 경험은 광주 민중 항쟁일 것이다. 그러므로 광주 민중 항쟁의 패배를 딛고 일어선 민족. 민주 운동이 8년여만에 전국적 수준의 대중 조직 활동을 전개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은 짧게는 80년의 패배에 대한 극복의 직접적인 한 표현이요, 길게는 한국 전쟁 후 최초의 전국적 대중 정치 조직의 결성이라는 정치사적 의미를 부여받는 것이다.
둘째, 민족. 민주 운동의 발전이 전국적 연합 수준의 조직 활동으로까지 확장되었다는 점이다. 대중 활동의 수준이 연합에 이르렀다는 사실은 이제 민족. 민주 운동이 단순한 문제 제기 집단이나 즉자적 자기 선언의 단계를 뛰어넘어 민주 변혁의 주체로서 자신을 대자 적으로 정립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또한 사회 제부문 대중 활동의 수준이 자신만의 협소한 운동틀을 뛰어넘어 한국 사회의 총체적인 민주 변혁을 자신들의 당면한 정치적 과제로 주체적으로 인식하였음을 의미한다. '전민련'은 비록 그 내용이 '연합'의 형식을 완전히 채우고 있지 못한 때일지라도, 각 부문, 각 지역의 분산적 운동을 통일적으로 수행하는 민주 변혁의 참다운 출발로서의 의미를 갖는 것이며,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한국 민주 변혁 사상 획기적인 정치적 의의를 갖는 것이다.
물론 지역적 분산과 부문간 불 균등성을 전국적 차원에서 그리고 연합의 차원에서 통일한다는 것이 지리적 통합이나 조직 형식적 통합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보다 핵심적인 것은 '전민련'으로의 통일에 있어 민족. 민주 운동의 통일이라는 운동적 합 법칙성이 관철된 데에 있다. 운동의 발전은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로 부분에서 전체로의 경로를 밟는 것이 일반적이다. '전민련으로의 발전에 있어 '운동의 합 법칙성의 관철'이라는 문제의식 또한 운동 발전의 보편적 법칙의 한국적 구체화라는 문제 인식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이제 '전민련'결성의 배경과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이상의 문제의식을 보다 심화시켜 보자. 그리하여 '전민련'의 창립이 갖는 역사적 의의가 민주 변혁 지평의 확대라는 정치사적 의미 규정으로까지 확대되어야 하는 실천적 합의를 공유하는 것으로 논의를 모아 보자.
Ⅱ. '전민련'창립 과정
ⅰ)'전민련'결성의 배경
민족. 민주 운동이 학생운동의 선도적 실천에 의해 주도되던 시기로부터 기층 대중 운동의 고양에 의한 대중적 정치 실천의 시기로 이행한 시점은 대략 '84-85년으로 말해진다. 이기간 중에 대우 자동차 파업, 구로 동맹 파업 등 노동운동의 고양과 민청련, 민통련 등을 통한 공개 정치 운동의 활성화는 수입 개방 반대 투쟁을 중심으로 하는 농민 대중의 정치적 진출과 더불어 민주 변혁 운동의 전개 양상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이 기간 중에 착실히 성장한 민족. 민주 운동은 '87-88'년의 시기에 민족. 민주 운동이 당면했던 과제는 군부 독재 정권의 종식과 민주 정부의 수립이라는 정치적 과제와 더불어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기층 노동 대중의 정치적 진출을 조직하고, 그들을 정치 세력 화하여 민주 변혁의 대 자적 주체로 정립하는 실천적 과제로 집약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87-88'년의 민족. 민주 운동은 두 가지 당면의 과제 그 어느 것도 성공적으로 수행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그 직접적 원인이 어디에 있었든 당면 과제 수행에 실패한 민족. 민주 진영이 지난 시기 운동의 실패에 대한 자기비판을 진행시키는 과정에서 민족 민주 운동의 통일이라는 과제가 당면의 정치적 현안이라는 사실을 공유하게 되었던 것으로부터 '전민련'결성에 대한 모색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전민련'결성이 지난 시기 활동에 대한 반성이라는 소극적 동인만으로 추동 되었던 것은 아니다. 더 넓게 보면 거기에는 이미 언급했듯이 '84-86'년 이래의 기층 대중 운동의 고양과 대중적 정치 진출로 집약되는 민족 . 민주 운동의 발전이라는 보다 적극적인 추도력이 내재되어 있다. 물론 이 시기 기층 노동 대중의 정치적 역량이 '전민련'과 같은 형식을 채울 만큼의 내용을 확보했던 것은 아니지만, 대중의 정치적 진출과 잠재력은 이미 상당 정도로 기존 공개 정치 기구의 틀로서는 온전하게 담대할 수 없을 만큼 진일보한 수준의 것이었다. 그러한 '내용과 형식의 상대적 불일치'는 '87-88'년 국민운동본부의 결성과 쇠퇴로서 현상되었다. 더욱이 '87년 7-9월 노동자 대 투쟁 '88년 4. 26 국회의원 총선거를 경과하면서 급속히 성장한 기층 대중의 민주 변혁의 열망과 의지 그리고 그들의 정치적 역량은 보다 높은 수준, 보다 포괄적인 차원의 정치적 조직화를 요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동시에 보다 높은 수준의 지도와 보다 포괄적인 통일의 조직화를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전민련'결성의 보다 직접적이고 적극적인 동인은 바로 이와 같은 대중운동의 발전이었으며, 그런 의미에서 '전민련 '결성은 대중운동의 합법칙적 발전의 현상 형태인 것이다.
ⅱ)'전민련'결성 과정
'전민련'결성은 대체로 3단계의 논의 발전 과정을 경과한다. 그것은 1) '87년 하반기부터 '88년 7월 사이의 민중 운동 연합(민운연) 논의 시기와 2)88년 7월부터 9월 사이의 상설 공동 투쟁체 논의 시기 그리고 3)88년 9월 이후의 전국 민족 민주 운동 협의회(전민협)논의시기로 구별된다.
1)'민운연'시기 논의의 기본적인 문제 인식은 '87년 7-9월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 폭발적으로 진출하는 '노동 대중의 정치 세력화'호부터 출발한 것이었다. 이는 직접적으로는 6월 민주 항쟁을 지도했던 국민운동본부가 기층 노동 대중의 투쟁에 대해 어떠한 수준의 지도는 물론 연대, 지원조차도 효과적으로 수행하지 못한 정치적 한계를 지적하면서 더 나아가 그 동안 공개 정치 기구의 통일적 틀로서 역할 해 온 민통련의 정치적 한계까지도 일정 정도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현실적 실천 경험으로부터 제기된 것이었다. 그러나 '민운연' 논의 출발의 애초의 실천적 선도성은 대통령 선거의 패배 과정에서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그리하여 '민운연' 건설이라는 정치적 과제에 대한 선도적 문제 인식은 입장을 달리하는 제 부문간의 논쟁을 매개하면서 , 새로운 국면으로 발전되었는바 그것이 상설 공투체 논의이다.
2)상설 공투체 논의는 민운연 논의의 비생산적 논쟁을 실천적으로 극복하기 위한 과도적 제안으로부터 출발되었다. '88년 6월초 전국 노동 운동 단체 협의회(노운협)가 발족되면서 노운협은 7-9월 노동자 대 투쟁의 성과를 조직적으로 담보해 내어야 하는 노동운동의 책임 있는 조직으로서 민족. 민주 운동의 통일이라는 대의에 어떤 형태로든 복무하여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 기왕의 민운연 논의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상설 공투체를 제안하게 되었다. 그것은 당시의 민운연 논의가 민중 운동 연합이라는 형식에 걸 맞는 내용을 확보하고 있지 못하다는 판단에 근거하여 당면 시기의 수준에 맞는 조직의 건설과 더불어 공동의 실천을 통해 보다 높은 조직으로의 발전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곧 공동실천을 통해 분산성을 극복하고 협소한 틀 내에서의 논의를 대중적 실천을 통해 공유, 검증함으로써 보다 튼튼한 전국적 대중 조직을 건설하여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3)전민협 논의는 일단 위에서 정리한 상설 공투체 논의의 강화 . 발전의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다. 즉 전민협 이라는 통합 운동체는 조직적 통일성을 덜 강조했던 상설공투체에 비해 조직 운동의 장기적 전망을 갖는 형태의 보다 강화된 조직이라고 정리된다. 그러나 상설 공투체의 강화. 발전으로서의 전민협 논의는 단순한 양적 발전, 수사적 강조의 차원을 넘어서는 질적 비약의 정치적 의미를 내재화하고 있었다.
강화. 발전의 동력은 다음의 두 가지 주. 객관적 조건의 변화로부터 촉발된 것이었다. 객관적으로는 여소 야대 정국의 정치적 한계가 분명해지면서 민족. 민주 운동의 전개 과정 역시 통일 운동, 민중 생존권 운동, 5공 비리, 광주 문제 등의 민주화 운동 등으로 분산 . 나열되어 부분적으로 제도된 정치적 부터 침윤 당하거나 문제 해결의 주도권을 비록 일시적으로나마 넘겨주게 되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이르러 민족. 민주 진영 내부로부터 이와 같은 낭비와 분산 성을 조직적 재정비를 통해 시급히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문제의식이 공유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조건의 변화는 주체적 인식의 전환으로부터 주어졌다. 대통령 선거 이후 만연된 패배주의와 분열 상이 비록 분산적으로 진행되기는 했지만 '88년 전 시기를 통해 수행한 제반 정치적 실천을 통해 부분적으로 극복되기 시작하였으며 노동자. 농민 등 기층 노동 대중의 대중 정치 투쟁과 대중적 정치 진출은 '88년 하반기에 이르러 괄목 할 만한 성과를 이루어 내었던 것이다. 노동자 농민의 10월11일 대중 집회와 대중적 정치 진출은 40년대 전평. 전농 이후 최대 규모와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을 만큼 전진적인 것이었다. 그리하여 현 시기의 실천 과제를 통일적으로 수행하고 이를 조직적 전망으로 발전시킬 전민협이 필요하다는 인식의 공유뿐만 아니라. 기층 노동 대중과 광범한 민중 세력이 이러한 전민협의 논의와 건설에 책임있게 나설 수 있다는 주체 역량에 대한 인식과 그 인식의 실천적 확인, 공유가 대중 정치 투쟁의 과정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상설 공투체로 부터 전민협 으로의 강화 발전을 가능케 했던 동력이 이와 같은 민족. 민주 운동의 발전에 의해 합법칙적으로 촉발된 것이었다는 사실로부터 전민협 논의가 상설 공투체 논의로부터의 질적 비약이었다는 사실은 확인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질적 비약은 전민협논의가 전민련으로 구체화되면서 그 본래의 정치적 의미를 전면적으로 관철한다. 그러므로 '전민련'을 낮은 수준의 통일 전선 체로 규정할 수 있다면 이 규정을 가능케 하는 직접적 근거는 곧 상설 공투체로 부터 전민협으로의 강화. 발전 과정에 내재되어 있는 정치적 의미로부터 찾아질 수 있는 것이다.
Ⅲ'전민련' 창립의 정치적 의의
'전민련'의 창립이 민족 민주 운동의 전국적 연합 조직으로서 갖는 정치적 의의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객관적으로 언급하였다. 그러나 '전민련'의 창립은 창립의 시점에서 갖는 현 시기의 정치적 의의를 전제로 하면서 보다 폭 넓은 실천적 의의를 갖는 것이다. 그것은 민족 민주 운동의 지도 성과 전략 성의 문제로 요약될 수 있다.
ⅰ)'지도 성'의 문제
민주 변혁의 과정에 있어 지도의 문제는 일차적으로 민족 민주 운동의 총괄적 지도를 감당할 조직의 문제로 집약된다. 그러나 총괄적 지도는 또한 민주 변혁에 동참하는 기층 대중 과의 실천적 결합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지도 성'의 문제는 우선적으로 민주 변혁의 과정에서 기층 노동 대중의 지도 성이 어떻게 집단적으로 관철되며, 어떻게 조직적으로 담보되는 가라는 문제로 집약되는 것이다.
'지도 성'에 대한 이상이 문제의식에 입각해 볼 때 한국전쟁 후 최근에 이르기까지 기층 노동 대중의 '지도 성'의 조직적 담보를 현실적인 실현 태도로서 본격적으로 모색한 최초의 실천으로서 '전민련'을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전민련'이 국민운동본부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그러나 '전민련'이 '지도'에 대한 본격적 모색을 시도했다는 사실이 곧 '지도'원칙의 전면적 실현으로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당위와 현실만큼의 차이를 원칙과 그것의 구체적 관철 수준에서 드러내고 있다. 즉 현 단계 기층 대중 운동의 발전 수준을 반영하고, 또한 한국 사회 민주 변혁의 특수한 주체적 조건을 고려한 결과 '전민련'은 부문 운동과 지역 운동의 균형적 배분 위에 민족 민주 운동의 상징적 지도층을 포괄하여 구성되었다.
그러므로 기층 대중의 집단적 지도 성이라는 원칙에 대한 공유가 이후의 대중 실천 과정에서 계속적으로 확대되어지면서 '지도 성'의 문제는 '전민련'으로의 '내용과 형식의 통일'의 차원에서 구체적으로 관철되어져야 할 것이다.
ⅱ)'전략 성'의 문제
민주 변혁 과정에 있어 '전략 성'의 문제는 변혁 주체의 대 자적 정립의 문제와 그것의 조직화 문제로 집약된다. 통일 전선 적 조직이 전략적 성격을 갖는 것은 이러한 문제 의식에 근거할 때만 가능한 것이다.
민주 변혁 주체의 대자적 정립이란 일반 민주주의적 변혁 전망을 확고하게 가지면서 이를 정치적 실천 속에서 대중적으로 공유한 민족 민주 진영의 정치 세력화가 이루어졌을 때 비로서 완성된다. '전민련'은 비록 매우 낮은 수준이기는 하지만 이상의 선언적 규정을 충족시키는 정치 세력화의 최초의 가시화로서의 정치적 의미를 갖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민련'의 현 수준이 '전략 성'의 낮은 수준, 또는 맹아 적 수준이라고 규정된다면, 결국 민족 민주 운동의 '전략 성'에 대한 실천적 모색은 '전민련'의 낮은 수준, 맹아적 수준의 '전략서'을 어떻게 빠른 시간 내에 그리고 충실하게 높은 수준의 '전략 성'으로 제고시킬 것 인가로 모아지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이러한 모색은 '전민련'이라는 형식의 강화만으로 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대중적 실천과 그것의 조직적 담보, 그리고 실천을 매개로 한 조직의 강화를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바로 이점에서 '전민련'은 '지도 성'과 '전략 성'을 조직적으로 통일시켜야 하는 결점으로서의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ⅲ)'전민련'발전을 위한 과제
'전민련'을 낮은 수준의 통일 전선적 조직으로 규정한다면, 발전을 위한 당면의 과제는 보다 높은 수준으로의 내용과 형식의 발전으로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언급했듯이 '지도 성'과 '전략 성'의 통일적 강화로서 집약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 단계 민족 민주 운동의 발전 수준에서 '지도 성'과 '전략 성'의 통일적 강화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원칙의 확고한 견지 위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그것은 첫째, 입장과 논리의 차이를 극복, 통일하는 것은 소모적 논쟁으로서가 아니라 대중적 실천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점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전민련'의 민주적 운영 원칙을 전면 화하여 공동의 논의 구조를 명확히 한속에서 공동 실천을 통하여 통일의 수준을 높여 나아가야 한다는 점이다. 둘째, 사소한 실천 상의 차이를 과도화 하지 말고 '전민련'의 강화를 위하여 모든 노력을 경주하여야 한다는 점이다. 차이를 무분별하게 해소하는 것은 오히려 올바른 통일을 저해하는 것으로 귀결될 것이지만, 차이의 수준을 실제 이상으로 확대하는 것 역시 '전민련'의 발전, 강화를 저해하게 될 것은 명확하다.
이상의 원칙은 과제 수행을 위한 원칙일 뿐 과제 자체는 아니다. 그러나 '전민련'의 과제가 '전민련'이 현 단계 민족 민주 운동의 통일적 지도부로서의 형식과 내용을 확보하는 것이며, 또한 그를 통해 민족 민주 운동을 한 단계 더 진전시키면서, 그 과정에서 자신의 위상을 보다 높은 수준의 통일 전선 적 조직으로 정비하는 것이 라면, 결국 '과제'는 '전략 성'과 '지도 성'을 '원칙'에 입각하여 통일적으로 강화시키는 것으로 다시 한번 규정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지만 가장 정확한 결론으로 될 수밖에 없다.
ⅳ현 정세와 '전민련'의 전망
'전민련'의 결성 자체가 상징적으로 드러내 주고 있듯이 현재의 정치 상황은 매우 유동적이다. 군부 독재 정권의 말기적 탄압과 무분별한 폭력이 난무하던 '86년과 '87년 전반기로부터 불과 1년 반 정도의 시점에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정치적 제반 상황은 적어도 현상적으로는 많은 가시적 변화들을 보여주고 있다. 이 가시적 변화를 집약하며 그것은 첫째 폭력적 지배력의 부분적 이완을 포함하는 통치 방식의 변용과 둘째, 의회정치의 상대적 활성화로 특징 지워질 수 있는 지배 세력 및 제도권 정치 세력의 변화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변화는 지배 권력이나 제도권 정치 세력의 주관적 의지나 자발적 자기 변신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었다. 1년 반이라는 시간이 이상의 가시적 변화를 강요하고 창출할 수 있었던 것은 거의 전적으로 국민 대중의 민주화 의지와 열망에 의한 것이었다. 비록 6.29라는 미봉적 후퇴를 용인하고 , 7-9월 노동자 대 투쟁을 노동 대중만의 투쟁으로 일관하게끔 방관하기는 했지만, 87년 6월과 7,8,9월의 국민 대중의 민주화 운동은 '86년의 역사적 반동을 분쇄하고' '87년 4.13정치 쿠데타 기도를 저지할 수 있는 유일한 정치력이었던 것이다.
사회적 역관계의 수준과 그 교착 상태는 아무런 매개 없이 정치 역학으로 역동적일수록 그리고 그 정치 변동의 속도와 폭이 빠르고 넓을수록 더욱 그러하다. 최근의 그러한 정치 역학의 매개는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총 선거였는바, 양대 선거를 거치면서 '정치'는 국민 대중의 것으로부터 또 다시 제도권 정치 세력에로 회귀하게 되었다. 바로 이점으로부터 통치 방식의 부분적 변용과 의회정치의 활성화라는 현 정세의 특징이 현상 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비록 왜곡되고 왜소화되긴 하였지만 정치 상황의 역동성을 추동 하는 기본 동력은 여전히 기층 노동 대중을 중심으로 하는 국민 대중의 민주 변혁 운동이다. 그것은 여소 야 대 정국을 창출 해낸 힘의 원천이었을 뿐만 아니라, 소위 청문회 정국을 정치 폭로와 국민적 정치 훈련의 장으로 전환시킨 힘의 근원이었다. 바로 이점에 주목할 때 우리는 현 정세의 성격을 지배 세력과 피지배 민중간의 불안정한 교착 국면으로 규정지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불안정한 교착 국면으로 규정지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불안정한 교착 국면을 일방으로는 모든 정치 현안을 제도권 정치로 수렴하여 보수간의 연합에 의해 수세적 정국을 돌파하려는 지배 권력과, 이에 대항하여 민주 변혁의 지평을 확대하고 민족적이고 민주적인 통일국가를 형성하려는 민족 민주 세력, 그리고 본질적으로는 보수간의 연합을 지향하지만 현상적 정치에 있어 상당한 동요를 보수 야당들 간의 , 주도권을 획득하기 위한 격렬한 운동의 국면으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정치 정세 속에서 '전민련'이 결성되었다. 그러므로 '전민련'의 결성은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민주 변혁 사상 차지하는 정치적 의의와 동시에 긴급한 현재적 정치성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즉 그것은 민족. 민주 세력으로서는 불안정한 고착 국면을 주동적으로 돌파하여 민족. 민주 운동의 대의를 확실히 세우면서 국민 대중의 민주 변혁의 열망을 보다 광범하게 조직함으로써 현 정세를 민족 변혁의 열망을 보다 광범하게 조직함으로써 현 정세를 민족 민주 세력의 공세 기로 전환 시킬 수 있는 조직적 결절점으로서의 의미를 갖는 반면에 ,지배 권력으로서는 민족. 민주 세력의 자체 정비에 근거한 보다 진전된 변혁 실천에 대한 수세적 대응을 본격화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다른 한편으로 보수 야당들로서는 '전민련'의 결성은 그 자체로서 그 동안 자신들의 모호한 정치적 입지에 의해 잠정적으로 확보하고 있었던 지지 기반의 동요라는 부정적 측면과 더불어 지배 권력에 대한 정치 공세의 강화를 위한 명분의 획득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배 권력과 보수 야당들에게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전민련'이 민중의 정치 세력화의 구체적 실현태라는 사실이다. 이는 정치권력의 획득 유지를 지고의 목표로 하고 있는 이들 제도권 정치 세력에게 있어 분명한 도전이며, 이 도전에 대한 공동 대응의 필요성은 더욱 절박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것은 지배 권력에 대해서는 초조감을 자아내게 될 것이며, 이러한 상황은 결국 보수 연합에 대한 제도권 정치 세력들의 현실적 고민과 모색을 촉발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복합 국면 속에서 이상의 현실 정치적 의미를 갖는 '전민련'은 현 정세에 조응하는 올바른 실천 방향을 어떻게 잡아 나가야 할 것인가?
현 정세가 불안정한 고착 국면이라는 규정에는 이미 언급되었듯이 정세의 성격이 매우 유동적이라는 점이 기본 특징으로 될 수밖에 없다. 더구나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중성을 그 본질로 하기 때문에 더욱 유동적이다. 첫째는 정치 역학의 추이가 제 계급, 계층 정치 세력들의 주체적 실천에 의해 결정될 것이라는 점이며, 둘째는 그러나 아직까지 그 추이의 방향이 확정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러한 시기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정치 역학의 핵심 고리는 제반 정치적 실천이 중첩, 교차하는 현실 운동의 통일적 매개물의 포착에 있을 수 밖에 없다.
'전민련'이 창립 선언에서 무엇보다 먼저 민족 . 민주 운동의 분파 성이나 분절 성을 극복하는 통일과 대동단결을 내세운 것은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에 근거한 것으로써 전적으로 정당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 올바른 실천 통일의 고리에 전체 민중의 결집된 역량을 총집결할 때만 정세의 추이는 민주 변혁의 올바른 방향성을 획득하면서 나아갈 수 있게 될 것이다.
현 정세가 불안정한 고착 국면이라는 규정에는 또한 다음과 같은 중요한 정치 지형 상의 특징에 대한 지적을 포함하고 있다. 그것은 어느 일방의 압도적 우세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각 정치 세력들의 운동 양상은 불가피하게 산발적이며, 항상 적일 뿐만 아니라, 그 운동 실현의 장 역시 매우 다양한 수준으로 외화 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현시기에 있어 운동 실현 장의 다양성은 곧 공개적 합법적 정치 공간의 확대를 포함하는 것으로써 구체화된다. 이 합법적 정치 공간은 상대적으로 많은 저급한 민족 민주 부문 운동의 발전에 적극적인 조건으로 작용할 것이지만 이는 또한 민주 변혁 실천의 장을 전사회적으로 확장하는 정치적 의미를 갖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러한 국면에서 이전과는 다른 제반 실천 양식이 모색되는 것은 논리적 귀결이다.
이러한 점은 일정하게는 '전민련' 자체의 출현과 운동으로 외화 되기도 하지만, 또한 의회 전술과 합법적 정당 운동의 형식으로 구체화되기도 할 것이다. 물론, '전민련'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전민련'과 합법적 정당 활동은 분명히 위상의 차이와 성격의 차별성을 갖는 것이지만, 그러나 동시에 이 두 형식의 존재 근거가 공개 정치 공간의 최소한의 제도적 확보라는 사실에서는 전적으로 동일한 것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통일적 이해의 문제는 매우 핵심적인 사업 영역으로 상정될 수밖에 없게 된다.
'전민련'과 합법적 정당 활동은 공히 현 정세에서 공개 정치 공간의 활용 문제가 그들의 핵심적인 활동 내용으로 상정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공개 정치 공간은 기본적으로 정치 훈련과 대중적 학습의 장으로 상정되어야 한다. 이미 학습과 정치 훈련이 정치에 대한 지속적인 폭로와 올바른 방향성을 담보한 집단적 지도에 의해 이루어져야 하는 것임은 확인된 바 있다. 그것은 결국 즉자적 이익 집단으로 될 수도 있는 기층 노동 대중 및 중간 제 계층에 대한 올바른 정치 교육의 문제로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정치적 과제는 민주 변혁의 대 자적 주체로 자신을 정립하고 있는 기층 노동 대중이 '지도 성'과 '전략 성'의 현실적 통일에 대한 정치의식을 실천적으로 체 화시킬 때만 비로소 완결된 것이다.
한편 올바른 정치 훈련의 문제와 더불어 '전민련'은 '전민련'의 이름에 철저히 복무하는 제 계급, 계층의 통일적 조직화를 지속적으로 사고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비록 출발 단계에서는 부분적 결합, 통합의 차원에서 시작될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전민련'의 자기 운동 과정에서 민족 민주 운동의 전체적 통일로서의 완성을 보게 된 것이다.
현 정세와 관련하여 '전민련'의 위상은 결국 다음과 같이 선언적으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전민련'은 불안정한 고착 국면을 주동적으로 돌파한 민족. 민주 진영의 통일적 지도부이다. 그러므로 '전민련'의 당면 과제는 무엇보다도 먼저 올바른 통일의 매개를 제반 실천 속에서 파악 해내고 , 이를 통해 보다 높은 대동단결과 단일의 대오를 정비하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전민련'을 공개 정치 공간에서 자신을 실현하는 대중적 정치 실천 제로 자신을 세워야 한다. 이는 '전민련'이 민중의 정치 세력화를 즉자적 수준으로부터 대 자적 수준으로 고양시킬 임무를 부여받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임무가 끊임없는 정치적 실천 속에서 올바른 정치 훈련을 경험하고 지도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해진 것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상의 과제와 임무에 대한 개괄적 논의와 관련하여 전민련이 부문 운동과 지역 운동의 대표성으로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지적해 두어야 할 것이다. 이는 곧 현 단계 민족. 민주 운동의 지도 성이 이 각각의 집단적 대표성에 의해서만 온전히 담보될 수 있는 수준임을 드러내는 것이지만, 또한 동시에 이 공동의 대표성이 항 후 실천의 올바른 수행과 민주적 결집을 통해 보다 높은 차원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다는 운동 적 법칙성을 선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운동법칙에 충실하게 복무하는 과정 자체가 현 정세를 주동적으로 추동 하는 것일 수밖에 없음은 역사적 요청이자 현실적 당위인 것이다.
광주 민중 항쟁 바탕 9년 각고 전국적 대중 조직으로 출범
- 창립 의의와 전망-
Ⅰ.민주 변혁 지평의 확대
1989년 1월 21일 '전국 민족 민주 운동 연합'이 창립되었다. '전민련'의 창립은 창립의 배경, 과정에서부터 '전. 민. 련'이라는 명칭의 확정에 이르기까지 현대 한국 민주 변혁의 역사에서 획기적인 정치적 의의를 갖는 것이다.
그것은 첫째, 민족. 민주 운동의 발전이 전국적 수준의 조직 활동으로까지 확장되었다는 점이다. 그간 민족. 민주 운동은 지역적 분산성과 불균등성에 의해 민주 변혁 실천의 한계를 누차 겪어 왔다. 민주 변혁의 역사에서 지역적 고립 . 분산에 의한 좌절과 패배의 최근 경험은 광주 민중 항쟁일 것이다. 그러므로 광주 민중 항쟁의 패배를 딛고 일어선 민족. 민주 운동이 8년여만에 전국적 수준의 대중 조직 활동을 전개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은 짧게는 80년의 패배에 대한 극복의 직접적인 한 표현이요, 길게는 한국 전쟁 후 최초의 전국적 대중 정치 조직의 결성이라는 정치사적 의미를 부여받는 것이다.
둘째, 민족. 민주 운동의 발전이 전국적 연합 수준의 조직 활동으로까지 확장되었다는 점이다. 대중 활동의 수준이 연합에 이르렀다는 사실은 이제 민족. 민주 운동이 단순한 문제 제기 집단이나 즉자적 자기 선언의 단계를 뛰어넘어 민주 변혁의 주체로서 자신을 대자 적으로 정립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또한 사회 제부문 대중 활동의 수준이 자신만의 협소한 운동틀을 뛰어넘어 한국 사회의 총체적인 민주 변혁을 자신들의 당면한 정치적 과제로 주체적으로 인식하였음을 의미한다. '전민련'은 비록 그 내용이 '연합'의 형식을 완전히 채우고 있지 못한 때일지라도, 각 부문, 각 지역의 분산적 운동을 통일적으로 수행하는 민주 변혁의 참다운 출발로서의 의미를 갖는 것이며,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한국 민주 변혁 사상 획기적인 정치적 의의를 갖는 것이다.
물론 지역적 분산과 부문간 불 균등성을 전국적 차원에서 그리고 연합의 차원에서 통일한다는 것이 지리적 통합이나 조직 형식적 통합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보다 핵심적인 것은 '전민련'으로의 통일에 있어 민족. 민주 운동의 통일이라는 운동적 합 법칙성이 관철된 데에 있다. 운동의 발전은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로 부분에서 전체로의 경로를 밟는 것이 일반적이다. '전민련으로의 발전에 있어 '운동의 합 법칙성의 관철'이라는 문제의식 또한 운동 발전의 보편적 법칙의 한국적 구체화라는 문제 인식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이제 '전민련'결성의 배경과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이상의 문제의식을 보다 심화시켜 보자. 그리하여 '전민련'의 창립이 갖는 역사적 의의가 민주 변혁 지평의 확대라는 정치사적 의미 규정으로까지 확대되어야 하는 실천적 합의를 공유하는 것으로 논의를 모아 보자.
Ⅱ. '전민련'창립 과정
ⅰ)'전민련'결성의 배경
민족. 민주 운동이 학생운동의 선도적 실천에 의해 주도되던 시기로부터 기층 대중 운동의 고양에 의한 대중적 정치 실천의 시기로 이행한 시점은 대략 '84-85년으로 말해진다. 이기간 중에 대우 자동차 파업, 구로 동맹 파업 등 노동운동의 고양과 민청련, 민통련 등을 통한 공개 정치 운동의 활성화는 수입 개방 반대 투쟁을 중심으로 하는 농민 대중의 정치적 진출과 더불어 민주 변혁 운동의 전개 양상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이 기간 중에 착실히 성장한 민족. 민주 운동은 '87-88'년의 시기에 민족. 민주 운동이 당면했던 과제는 군부 독재 정권의 종식과 민주 정부의 수립이라는 정치적 과제와 더불어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기층 노동 대중의 정치적 진출을 조직하고, 그들을 정치 세력 화하여 민주 변혁의 대 자적 주체로 정립하는 실천적 과제로 집약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87-88'년의 민족. 민주 운동은 두 가지 당면의 과제 그 어느 것도 성공적으로 수행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그 직접적 원인이 어디에 있었든 당면 과제 수행에 실패한 민족. 민주 진영이 지난 시기 운동의 실패에 대한 자기비판을 진행시키는 과정에서 민족 민주 운동의 통일이라는 과제가 당면의 정치적 현안이라는 사실을 공유하게 되었던 것으로부터 '전민련'결성에 대한 모색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전민련'결성이 지난 시기 활동에 대한 반성이라는 소극적 동인만으로 추동 되었던 것은 아니다. 더 넓게 보면 거기에는 이미 언급했듯이 '84-86'년 이래의 기층 대중 운동의 고양과 대중적 정치 진출로 집약되는 민족 . 민주 운동의 발전이라는 보다 적극적인 추도력이 내재되어 있다. 물론 이 시기 기층 노동 대중의 정치적 역량이 '전민련'과 같은 형식을 채울 만큼의 내용을 확보했던 것은 아니지만, 대중의 정치적 진출과 잠재력은 이미 상당 정도로 기존 공개 정치 기구의 틀로서는 온전하게 담대할 수 없을 만큼 진일보한 수준의 것이었다. 그러한 '내용과 형식의 상대적 불일치'는 '87-88'년 국민운동본부의 결성과 쇠퇴로서 현상되었다. 더욱이 '87년 7-9월 노동자 대 투쟁 '88년 4. 26 국회의원 총선거를 경과하면서 급속히 성장한 기층 대중의 민주 변혁의 열망과 의지 그리고 그들의 정치적 역량은 보다 높은 수준, 보다 포괄적인 차원의 정치적 조직화를 요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동시에 보다 높은 수준의 지도와 보다 포괄적인 통일의 조직화를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전민련'결성의 보다 직접적이고 적극적인 동인은 바로 이와 같은 대중운동의 발전이었으며, 그런 의미에서 '전민련 '결성은 대중운동의 합법칙적 발전의 현상 형태인 것이다.
ⅱ)'전민련'결성 과정
'전민련'결성은 대체로 3단계의 논의 발전 과정을 경과한다. 그것은 1) '87년 하반기부터 '88년 7월 사이의 민중 운동 연합(민운연) 논의 시기와 2)88년 7월부터 9월 사이의 상설 공동 투쟁체 논의 시기 그리고 3)88년 9월 이후의 전국 민족 민주 운동 협의회(전민협)논의시기로 구별된다.
1)'민운연'시기 논의의 기본적인 문제 인식은 '87년 7-9월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 폭발적으로 진출하는 '노동 대중의 정치 세력화'호부터 출발한 것이었다. 이는 직접적으로는 6월 민주 항쟁을 지도했던 국민운동본부가 기층 노동 대중의 투쟁에 대해 어떠한 수준의 지도는 물론 연대, 지원조차도 효과적으로 수행하지 못한 정치적 한계를 지적하면서 더 나아가 그 동안 공개 정치 기구의 통일적 틀로서 역할 해 온 민통련의 정치적 한계까지도 일정 정도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현실적 실천 경험으로부터 제기된 것이었다. 그러나 '민운연' 논의 출발의 애초의 실천적 선도성은 대통령 선거의 패배 과정에서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그리하여 '민운연' 건설이라는 정치적 과제에 대한 선도적 문제 인식은 입장을 달리하는 제 부문간의 논쟁을 매개하면서 , 새로운 국면으로 발전되었는바 그것이 상설 공투체 논의이다.
2)상설 공투체 논의는 민운연 논의의 비생산적 논쟁을 실천적으로 극복하기 위한 과도적 제안으로부터 출발되었다. '88년 6월초 전국 노동 운동 단체 협의회(노운협)가 발족되면서 노운협은 7-9월 노동자 대 투쟁의 성과를 조직적으로 담보해 내어야 하는 노동운동의 책임 있는 조직으로서 민족. 민주 운동의 통일이라는 대의에 어떤 형태로든 복무하여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 기왕의 민운연 논의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상설 공투체를 제안하게 되었다. 그것은 당시의 민운연 논의가 민중 운동 연합이라는 형식에 걸 맞는 내용을 확보하고 있지 못하다는 판단에 근거하여 당면 시기의 수준에 맞는 조직의 건설과 더불어 공동의 실천을 통해 보다 높은 조직으로의 발전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곧 공동실천을 통해 분산성을 극복하고 협소한 틀 내에서의 논의를 대중적 실천을 통해 공유, 검증함으로써 보다 튼튼한 전국적 대중 조직을 건설하여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3)전민협 논의는 일단 위에서 정리한 상설 공투체 논의의 강화 . 발전의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다. 즉 전민협 이라는 통합 운동체는 조직적 통일성을 덜 강조했던 상설공투체에 비해 조직 운동의 장기적 전망을 갖는 형태의 보다 강화된 조직이라고 정리된다. 그러나 상설 공투체의 강화. 발전으로서의 전민협 논의는 단순한 양적 발전, 수사적 강조의 차원을 넘어서는 질적 비약의 정치적 의미를 내재화하고 있었다.
강화. 발전의 동력은 다음의 두 가지 주. 객관적 조건의 변화로부터 촉발된 것이었다. 객관적으로는 여소 야대 정국의 정치적 한계가 분명해지면서 민족. 민주 운동의 전개 과정 역시 통일 운동, 민중 생존권 운동, 5공 비리, 광주 문제 등의 민주화 운동 등으로 분산 . 나열되어 부분적으로 제도된 정치적 부터 침윤 당하거나 문제 해결의 주도권을 비록 일시적으로나마 넘겨주게 되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이르러 민족. 민주 진영 내부로부터 이와 같은 낭비와 분산 성을 조직적 재정비를 통해 시급히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문제의식이 공유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조건의 변화는 주체적 인식의 전환으로부터 주어졌다. 대통령 선거 이후 만연된 패배주의와 분열 상이 비록 분산적으로 진행되기는 했지만 '88년 전 시기를 통해 수행한 제반 정치적 실천을 통해 부분적으로 극복되기 시작하였으며 노동자. 농민 등 기층 노동 대중의 대중 정치 투쟁과 대중적 정치 진출은 '88년 하반기에 이르러 괄목 할 만한 성과를 이루어 내었던 것이다. 노동자 농민의 10월11일 대중 집회와 대중적 정치 진출은 40년대 전평. 전농 이후 최대 규모와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을 만큼 전진적인 것이었다. 그리하여 현 시기의 실천 과제를 통일적으로 수행하고 이를 조직적 전망으로 발전시킬 전민협이 필요하다는 인식의 공유뿐만 아니라. 기층 노동 대중과 광범한 민중 세력이 이러한 전민협의 논의와 건설에 책임있게 나설 수 있다는 주체 역량에 대한 인식과 그 인식의 실천적 확인, 공유가 대중 정치 투쟁의 과정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상설 공투체로 부터 전민협 으로의 강화 발전을 가능케 했던 동력이 이와 같은 민족. 민주 운동의 발전에 의해 합법칙적으로 촉발된 것이었다는 사실로부터 전민협 논의가 상설 공투체 논의로부터의 질적 비약이었다는 사실은 확인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질적 비약은 전민협논의가 전민련으로 구체화되면서 그 본래의 정치적 의미를 전면적으로 관철한다. 그러므로 '전민련'을 낮은 수준의 통일 전선 체로 규정할 수 있다면 이 규정을 가능케 하는 직접적 근거는 곧 상설 공투체로 부터 전민협으로의 강화. 발전 과정에 내재되어 있는 정치적 의미로부터 찾아질 수 있는 것이다.
Ⅲ'전민련' 창립의 정치적 의의
'전민련'의 창립이 민족 민주 운동의 전국적 연합 조직으로서 갖는 정치적 의의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객관적으로 언급하였다. 그러나 '전민련'의 창립은 창립의 시점에서 갖는 현 시기의 정치적 의의를 전제로 하면서 보다 폭 넓은 실천적 의의를 갖는 것이다. 그것은 민족 민주 운동의 지도 성과 전략 성의 문제로 요약될 수 있다.
ⅰ)'지도 성'의 문제
민주 변혁의 과정에 있어 지도의 문제는 일차적으로 민족 민주 운동의 총괄적 지도를 감당할 조직의 문제로 집약된다. 그러나 총괄적 지도는 또한 민주 변혁에 동참하는 기층 대중 과의 실천적 결합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지도 성'의 문제는 우선적으로 민주 변혁의 과정에서 기층 노동 대중의 지도 성이 어떻게 집단적으로 관철되며, 어떻게 조직적으로 담보되는 가라는 문제로 집약되는 것이다.
'지도 성'에 대한 이상이 문제의식에 입각해 볼 때 한국전쟁 후 최근에 이르기까지 기층 노동 대중의 '지도 성'의 조직적 담보를 현실적인 실현 태도로서 본격적으로 모색한 최초의 실천으로서 '전민련'을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전민련'이 국민운동본부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그러나 '전민련'이 '지도'에 대한 본격적 모색을 시도했다는 사실이 곧 '지도'원칙의 전면적 실현으로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당위와 현실만큼의 차이를 원칙과 그것의 구체적 관철 수준에서 드러내고 있다. 즉 현 단계 기층 대중 운동의 발전 수준을 반영하고, 또한 한국 사회 민주 변혁의 특수한 주체적 조건을 고려한 결과 '전민련'은 부문 운동과 지역 운동의 균형적 배분 위에 민족 민주 운동의 상징적 지도층을 포괄하여 구성되었다.
그러므로 기층 대중의 집단적 지도 성이라는 원칙에 대한 공유가 이후의 대중 실천 과정에서 계속적으로 확대되어지면서 '지도 성'의 문제는 '전민련'으로의 '내용과 형식의 통일'의 차원에서 구체적으로 관철되어져야 할 것이다.
ⅱ)'전략 성'의 문제
민주 변혁 과정에 있어 '전략 성'의 문제는 변혁 주체의 대 자적 정립의 문제와 그것의 조직화 문제로 집약된다. 통일 전선 적 조직이 전략적 성격을 갖는 것은 이러한 문제 의식에 근거할 때만 가능한 것이다.
민주 변혁 주체의 대자적 정립이란 일반 민주주의적 변혁 전망을 확고하게 가지면서 이를 정치적 실천 속에서 대중적으로 공유한 민족 민주 진영의 정치 세력화가 이루어졌을 때 비로서 완성된다. '전민련'은 비록 매우 낮은 수준이기는 하지만 이상의 선언적 규정을 충족시키는 정치 세력화의 최초의 가시화로서의 정치적 의미를 갖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민련'의 현 수준이 '전략 성'의 낮은 수준, 또는 맹아 적 수준이라고 규정된다면, 결국 민족 민주 운동의 '전략 성'에 대한 실천적 모색은 '전민련'의 낮은 수준, 맹아적 수준의 '전략서'을 어떻게 빠른 시간 내에 그리고 충실하게 높은 수준의 '전략 성'으로 제고시킬 것 인가로 모아지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이러한 모색은 '전민련'이라는 형식의 강화만으로 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대중적 실천과 그것의 조직적 담보, 그리고 실천을 매개로 한 조직의 강화를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바로 이점에서 '전민련'은 '지도 성'과 '전략 성'을 조직적으로 통일시켜야 하는 결점으로서의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ⅲ)'전민련'발전을 위한 과제
'전민련'을 낮은 수준의 통일 전선적 조직으로 규정한다면, 발전을 위한 당면의 과제는 보다 높은 수준으로의 내용과 형식의 발전으로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언급했듯이 '지도 성'과 '전략 성'의 통일적 강화로서 집약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 단계 민족 민주 운동의 발전 수준에서 '지도 성'과 '전략 성'의 통일적 강화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원칙의 확고한 견지 위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그것은 첫째, 입장과 논리의 차이를 극복, 통일하는 것은 소모적 논쟁으로서가 아니라 대중적 실천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점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전민련'의 민주적 운영 원칙을 전면 화하여 공동의 논의 구조를 명확히 한속에서 공동 실천을 통하여 통일의 수준을 높여 나아가야 한다는 점이다. 둘째, 사소한 실천 상의 차이를 과도화 하지 말고 '전민련'의 강화를 위하여 모든 노력을 경주하여야 한다는 점이다. 차이를 무분별하게 해소하는 것은 오히려 올바른 통일을 저해하는 것으로 귀결될 것이지만, 차이의 수준을 실제 이상으로 확대하는 것 역시 '전민련'의 발전, 강화를 저해하게 될 것은 명확하다.
이상의 원칙은 과제 수행을 위한 원칙일 뿐 과제 자체는 아니다. 그러나 '전민련'의 과제가 '전민련'이 현 단계 민족 민주 운동의 통일적 지도부로서의 형식과 내용을 확보하는 것이며, 또한 그를 통해 민족 민주 운동을 한 단계 더 진전시키면서, 그 과정에서 자신의 위상을 보다 높은 수준의 통일 전선 적 조직으로 정비하는 것이 라면, 결국 '과제'는 '전략 성'과 '지도 성'을 '원칙'에 입각하여 통일적으로 강화시키는 것으로 다시 한번 규정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지만 가장 정확한 결론으로 될 수밖에 없다.
ⅳ현 정세와 '전민련'의 전망
'전민련'의 결성 자체가 상징적으로 드러내 주고 있듯이 현재의 정치 상황은 매우 유동적이다. 군부 독재 정권의 말기적 탄압과 무분별한 폭력이 난무하던 '86년과 '87년 전반기로부터 불과 1년 반 정도의 시점에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정치적 제반 상황은 적어도 현상적으로는 많은 가시적 변화들을 보여주고 있다. 이 가시적 변화를 집약하며 그것은 첫째 폭력적 지배력의 부분적 이완을 포함하는 통치 방식의 변용과 둘째, 의회정치의 상대적 활성화로 특징 지워질 수 있는 지배 세력 및 제도권 정치 세력의 변화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변화는 지배 권력이나 제도권 정치 세력의 주관적 의지나 자발적 자기 변신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었다. 1년 반이라는 시간이 이상의 가시적 변화를 강요하고 창출할 수 있었던 것은 거의 전적으로 국민 대중의 민주화 의지와 열망에 의한 것이었다. 비록 6.29라는 미봉적 후퇴를 용인하고 , 7-9월 노동자 대 투쟁을 노동 대중만의 투쟁으로 일관하게끔 방관하기는 했지만, 87년 6월과 7,8,9월의 국민 대중의 민주화 운동은 '86년의 역사적 반동을 분쇄하고' '87년 4.13정치 쿠데타 기도를 저지할 수 있는 유일한 정치력이었던 것이다.
사회적 역관계의 수준과 그 교착 상태는 아무런 매개 없이 정치 역학으로 역동적일수록 그리고 그 정치 변동의 속도와 폭이 빠르고 넓을수록 더욱 그러하다. 최근의 그러한 정치 역학의 매개는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총 선거였는바, 양대 선거를 거치면서 '정치'는 국민 대중의 것으로부터 또 다시 제도권 정치 세력에로 회귀하게 되었다. 바로 이점으로부터 통치 방식의 부분적 변용과 의회정치의 활성화라는 현 정세의 특징이 현상 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비록 왜곡되고 왜소화되긴 하였지만 정치 상황의 역동성을 추동 하는 기본 동력은 여전히 기층 노동 대중을 중심으로 하는 국민 대중의 민주 변혁 운동이다. 그것은 여소 야 대 정국을 창출 해낸 힘의 원천이었을 뿐만 아니라, 소위 청문회 정국을 정치 폭로와 국민적 정치 훈련의 장으로 전환시킨 힘의 근원이었다. 바로 이점에 주목할 때 우리는 현 정세의 성격을 지배 세력과 피지배 민중간의 불안정한 교착 국면으로 규정지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불안정한 교착 국면으로 규정지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불안정한 교착 국면을 일방으로는 모든 정치 현안을 제도권 정치로 수렴하여 보수간의 연합에 의해 수세적 정국을 돌파하려는 지배 권력과, 이에 대항하여 민주 변혁의 지평을 확대하고 민족적이고 민주적인 통일국가를 형성하려는 민족 민주 세력, 그리고 본질적으로는 보수간의 연합을 지향하지만 현상적 정치에 있어 상당한 동요를 보수 야당들 간의 , 주도권을 획득하기 위한 격렬한 운동의 국면으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정치 정세 속에서 '전민련'이 결성되었다. 그러므로 '전민련'의 결성은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민주 변혁 사상 차지하는 정치적 의의와 동시에 긴급한 현재적 정치성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즉 그것은 민족. 민주 세력으로서는 불안정한 고착 국면을 주동적으로 돌파하여 민족. 민주 운동의 대의를 확실히 세우면서 국민 대중의 민주 변혁의 열망을 보다 광범하게 조직함으로써 현 정세를 민족 변혁의 열망을 보다 광범하게 조직함으로써 현 정세를 민족 민주 세력의 공세 기로 전환 시킬 수 있는 조직적 결절점으로서의 의미를 갖는 반면에 ,지배 권력으로서는 민족. 민주 세력의 자체 정비에 근거한 보다 진전된 변혁 실천에 대한 수세적 대응을 본격화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다른 한편으로 보수 야당들로서는 '전민련'의 결성은 그 자체로서 그 동안 자신들의 모호한 정치적 입지에 의해 잠정적으로 확보하고 있었던 지지 기반의 동요라는 부정적 측면과 더불어 지배 권력에 대한 정치 공세의 강화를 위한 명분의 획득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배 권력과 보수 야당들에게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전민련'이 민중의 정치 세력화의 구체적 실현태라는 사실이다. 이는 정치권력의 획득 유지를 지고의 목표로 하고 있는 이들 제도권 정치 세력에게 있어 분명한 도전이며, 이 도전에 대한 공동 대응의 필요성은 더욱 절박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것은 지배 권력에 대해서는 초조감을 자아내게 될 것이며, 이러한 상황은 결국 보수 연합에 대한 제도권 정치 세력들의 현실적 고민과 모색을 촉발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복합 국면 속에서 이상의 현실 정치적 의미를 갖는 '전민련'은 현 정세에 조응하는 올바른 실천 방향을 어떻게 잡아 나가야 할 것인가?
현 정세가 불안정한 고착 국면이라는 규정에는 이미 언급되었듯이 정세의 성격이 매우 유동적이라는 점이 기본 특징으로 될 수밖에 없다. 더구나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중성을 그 본질로 하기 때문에 더욱 유동적이다. 첫째는 정치 역학의 추이가 제 계급, 계층 정치 세력들의 주체적 실천에 의해 결정될 것이라는 점이며, 둘째는 그러나 아직까지 그 추이의 방향이 확정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러한 시기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정치 역학의 핵심 고리는 제반 정치적 실천이 중첩, 교차하는 현실 운동의 통일적 매개물의 포착에 있을 수 밖에 없다.
'전민련'이 창립 선언에서 무엇보다 먼저 민족 . 민주 운동의 분파 성이나 분절 성을 극복하는 통일과 대동단결을 내세운 것은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에 근거한 것으로써 전적으로 정당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 올바른 실천 통일의 고리에 전체 민중의 결집된 역량을 총집결할 때만 정세의 추이는 민주 변혁의 올바른 방향성을 획득하면서 나아갈 수 있게 될 것이다.
현 정세가 불안정한 고착 국면이라는 규정에는 또한 다음과 같은 중요한 정치 지형 상의 특징에 대한 지적을 포함하고 있다. 그것은 어느 일방의 압도적 우세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각 정치 세력들의 운동 양상은 불가피하게 산발적이며, 항상 적일 뿐만 아니라, 그 운동 실현의 장 역시 매우 다양한 수준으로 외화 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현시기에 있어 운동 실현 장의 다양성은 곧 공개적 합법적 정치 공간의 확대를 포함하는 것으로써 구체화된다. 이 합법적 정치 공간은 상대적으로 많은 저급한 민족 민주 부문 운동의 발전에 적극적인 조건으로 작용할 것이지만 이는 또한 민주 변혁 실천의 장을 전사회적으로 확장하는 정치적 의미를 갖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러한 국면에서 이전과는 다른 제반 실천 양식이 모색되는 것은 논리적 귀결이다.
이러한 점은 일정하게는 '전민련' 자체의 출현과 운동으로 외화 되기도 하지만, 또한 의회 전술과 합법적 정당 운동의 형식으로 구체화되기도 할 것이다. 물론, '전민련'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전민련'과 합법적 정당 활동은 분명히 위상의 차이와 성격의 차별성을 갖는 것이지만, 그러나 동시에 이 두 형식의 존재 근거가 공개 정치 공간의 최소한의 제도적 확보라는 사실에서는 전적으로 동일한 것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통일적 이해의 문제는 매우 핵심적인 사업 영역으로 상정될 수밖에 없게 된다.
'전민련'과 합법적 정당 활동은 공히 현 정세에서 공개 정치 공간의 활용 문제가 그들의 핵심적인 활동 내용으로 상정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공개 정치 공간은 기본적으로 정치 훈련과 대중적 학습의 장으로 상정되어야 한다. 이미 학습과 정치 훈련이 정치에 대한 지속적인 폭로와 올바른 방향성을 담보한 집단적 지도에 의해 이루어져야 하는 것임은 확인된 바 있다. 그것은 결국 즉자적 이익 집단으로 될 수도 있는 기층 노동 대중 및 중간 제 계층에 대한 올바른 정치 교육의 문제로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정치적 과제는 민주 변혁의 대 자적 주체로 자신을 정립하고 있는 기층 노동 대중이 '지도 성'과 '전략 성'의 현실적 통일에 대한 정치의식을 실천적으로 체 화시킬 때만 비로소 완결된 것이다.
한편 올바른 정치 훈련의 문제와 더불어 '전민련'은 '전민련'의 이름에 철저히 복무하는 제 계급, 계층의 통일적 조직화를 지속적으로 사고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비록 출발 단계에서는 부분적 결합, 통합의 차원에서 시작될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전민련'의 자기 운동 과정에서 민족 민주 운동의 전체적 통일로서의 완성을 보게 된 것이다.
현 정세와 관련하여 '전민련'의 위상은 결국 다음과 같이 선언적으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전민련'은 불안정한 고착 국면을 주동적으로 돌파한 민족. 민주 진영의 통일적 지도부이다. 그러므로 '전민련'의 당면 과제는 무엇보다도 먼저 올바른 통일의 매개를 제반 실천 속에서 파악 해내고 , 이를 통해 보다 높은 대동단결과 단일의 대오를 정비하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전민련'을 공개 정치 공간에서 자신을 실현하는 대중적 정치 실천 제로 자신을 세워야 한다. 이는 '전민련'이 민중의 정치 세력화를 즉자적 수준으로부터 대 자적 수준으로 고양시킬 임무를 부여받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임무가 끊임없는 정치적 실천 속에서 올바른 정치 훈련을 경험하고 지도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해진 것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상의 과제와 임무에 대한 개괄적 논의와 관련하여 전민련이 부문 운동과 지역 운동의 대표성으로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지적해 두어야 할 것이다. 이는 곧 현 단계 민족. 민주 운동의 지도 성이 이 각각의 집단적 대표성에 의해서만 온전히 담보될 수 있는 수준임을 드러내는 것이지만, 또한 동시에 이 공동의 대표성이 항 후 실천의 올바른 수행과 민주적 결집을 통해 보다 높은 차원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다는 운동 적 법칙성을 선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운동법칙에 충실하게 복무하는 과정 자체가 현 정세를 주동적으로 추동 하는 것일 수밖에 없음은 역사적 요청이자 현실적 당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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