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5 .18수감자가 전두환 수감을 보며
본문
5 .18수감자가 전두환 수감을 보며
단식은 국민 기만의 쇼, 역사 앞에 솔직한 얼굴 보여라
백몽구(월간 샘터 편집부장)
이글의 서두를 쓰는 지금은 신정연휴다. 곳곳에서 새해를 맞아 소망을 기원하는 민초들의 경건한 기도소리가 은은한 가운데 거리는 휴일을 만끽하려는 인파들로 북적거리고 있다. 뉴스에서는 남부 지방에 눈이 내려 길이 끊어졌다는 소식을 매시간 전하고, 스키장으로 향하는 인파로 고속도로가 북적거린다는 소식을 듣고 있자면, 눈은 장애가 된다기보다는 사람들에게 좋은 반려가되고 있다는 느낌마저 든다. 요 근래에는 환경 오염에 따른 이상 기후마저 한몫을 거들어, 한강이 얼었다는 소식이 들려온 적이 없으니 이제 겨울은 한걸음 우리들의 기억에서 멀어져 있다는 느낌마저 든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들의 좁은 시야가 가져다준 오판인지도 모른다. 보온 설계가 잘 된 아파트에서 살면서 남는 시간을 얼마나 재미있고 짜릿하게 보낼까 걱정이 많은 이들에게는 겨울이 곧 낭만의 계절로 통할지 모르지만 우리 사회 곳곳에는 아직 겨울을 혹독하게 치러내고 있는 곳들이 적지 않다.
그 대표적인 예가 교도소가 아닐까 한다. 아마도 지구 온난화 현상의 폐해(?)를 마지막까지 피해가는 곳이 있다면 교도소일 것이다. 그만큼 우리 교도소는 아직도 춥고, 사람의 체온이 그리운 곳이다. 겨울에 접어들어 젊은이들로 북적거리는 곳이면, 으레 모두들 첫눈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설레게 마련이다. 첫눈이 내리면 만날 약속을 하고, 마음에 자리한 사람에게 줄 선물을 고르는 손길들로 백화점은 붐비게 된다.
그러나 교도소에 첫눈 소식은 이내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11월 들어서 살갗에 소름이 돋기 시작하면 수감자들 사이에서는 긴 .겨울을 위한 채비 걱정이 태산이다. 요사이 같으면 짐승 우리에도 거의 깔지 않는 짚으로 된 매트리스를 깔고, 퍼런 멍 같은 물이 든 솜이불을 지급받는다. 그리고 듬성듬성 솜이 누벼진 옷을 지급받아 입게 되지만, 겨울의 발톱은 법무부의 엉성한 행정을 비웃기라도 하듯 수인들의 겨을 밤을 추위로 하얗게 깨어 있게 한다.
체온이 그리운 0.7평 독방
아무리 솜으로 감싼다 해도 낡은 사동 곳곳의 틈새로 쏟아져 들어오는 황소바람을 막을 재주가 없는 데다, 난방 시설이라야 때로는 수백명이 살아가는 사동 하나에 구공탄 난로 하나만이 덜렁 놓여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른바 잡범들이 수용된 사동의 경우에는 여럿이어서 서로 몸을 밀착하여 체온으로 추위를 몰아내 기도 하지만, 주로 정치범들이 수용된 독방의 경우에는 차가운 벽 말고는 체온을 나눌 데가 없어 더욱 견디기 힘든 겨울밤이 된다.
게다가 옥문을 따고 자유롭게 운동을 할 수 있는 시간이라야 하루에 겨우 30여분 밖에 주어지지 않는 현실이니, 겨울을 나고 난 수인들의 몸은 심한 손상을 겪을 수밖에 없다. 동상 따위로 시달리는 정도의 외형적 변화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고, 이른바 속병이라고 하여 모든 조건의 '부조화에 따른 씻을 수 없는 질환이 안에서 깊이 곪게 되는 것이다.
전직 대통령 전두환씨가 그의 고향에서 한밤중의 컴컴한 새벽에 압송되어 수감되는 장면을 보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삼천리를 발 아래 둔 듯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그가 싸늘한 철창에 갇히는 것을 보면서 세상은 참 많이 달라졌구나 하는 감회마저 들었다.
하지만 그가 수감되기 전날 연희동 골목길에서 발표한 성명을 들으면서 아직 우리가 되찾아야 할 것들이 더 많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굳어 졌음은 웬일일까. 그는 이른바 5공 문제의 청산은 13대 국회에서 여야지도자들의 합의로 종결된 사안이 라고 못박았고, 자신은 어디까지나 좌파 세력의 음해로 인한 희생양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자신을 비롯한 5공 세력은 무죄이며, 그같은 사실의 규명을 통해 광주 문제가 원만히 해결되기 바란다고 하였다.
그가 현정권과 국민을 향해 폭탄선언을 하고 교도소 안으로 사라져 가던 다음날 저녁, 불면으로 파리해진 그의 주름진 얼굴을 보며 일말의 연민도 들었지만 우리에게는 아직 청산해야 할 불행한 역사가 적지 않음을 뼈저리게 실감할 수 있었다.
수감 직전의 성멸 발표에 뒤이어, 검찰 조사에 일체 묵비권을 행사함은 물론 단식을 단행한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참으로 인간적인 비애마저 들었다.
우선 그같은 도도함과 뻔뻔스러운 여유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어떤 이들은 전씨와 그 주변인물들의 일사불란한 행동들을 보면서 집단 정신병에 걸린 사람들이라고까지 했다.
그같은 견해에 전적으로 동감하지는 않지만,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자신이 쳐놓은 덫에 스스로 걸렸다는 점이다. 그가 12·12쿠데타 이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누누이 강조한 것은 '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응분의 처벌을 받는다'는 법치주의였다. 그가 권력을 장악하고 많은 사람들을 잡아들이면서 주장한 법치주의는 일단 만들어진 모든 법에는 복종하여야 한다는 것과 함께 법의 집행자들에게는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논리였다.
그의 논리대로 하면 당국에서 일단 그의 혐의를 물어서 인신을 구속하려 하는 바에야 당당히 조사에 응함은 물론, 모든 것은 재판을 통해 밝혀지도록 해야 하는 게 금과옥조여야 챘을 것이다. 그의 말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주는 검찰은 성실한 법의 집행자였다. 그런데 정권이 바뀌어 새로운 지도체제로 움직여가는 검찰을 대통령의 하수인일뿐이라고 매도한다면 과연 법은 누구를 위해 있단말인가.
결국 그는 이 나라의 법체계를 개인 및 몇몇 집단의 이익을 지켜주는 사규(私規)로 여겨왔고, 그 법을 집행하는 관료 조직을 사조직으로 여겨왔다는 외에 무슨 다른 말이 있을 수 있겠는가, 아마도 그가 사조직으로 여기던 이들에게 역으로 당하는 운명이 되었으니 참으로 얄궂다고 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얼마 전 남산 안기부 청사가 새로운 부지로 옮겨가고 난 뒤에 공개된 것을 신문지상을 통해 들여다 본 일이 있다. 필자 자신도 유신 말기에 그곳에서 필화와 관련하여 혹독한 조사를 받은 적 이 있지만, 주로 시국 사건과 관련된 인사들이 그곳에서 당한 고초는 지금 필설로 옮기는 것이 어렵다. 며칠이고 잠 안재우기, 일체의 면회가 허용되지 않는 가운데서 공포와 고문 들을 통해 수많은 신국 사건들의 전모( ?)가 만들어졌고 우리들은 단죄되어야 했다.
만천하에 큰소리를 치민서 안양교도소로 사라지는 전두환씨는 자신의 권좌를 유지하기 위해 급조된 대형 시국 사범들이 수사기관에서 당한 일들의 한 모서리라도 알고 있었을까.
이른바 한국에 베리야로 알려진 전기 고문의 귀재 이근안이 행한 비인간적 고문의 실태는 널리 알려졌다. 나라를 빼앗긴 일제치하에서도 유례가 없는 혹독한 고문으로 김근태 씨 등 민주인사들이 용공인사로 변조된 예를 보면 권력이 일개인의 수중에 떨어졌을 때 얼마나 심각한 폐해를 낳는가를 말해준다.
전두환 정권은 출범 초기에 통금 해제하고, 오랫동안 악명 높게 이 땅의 민주화를 짓눌러오던 반공법을 폐지한 바 있다. 하지만 통금 해제에 따라 자유가 늘어난 징조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이 이른바 경찰국가로 그의 권좌를 지켜 왔으며, 반공법 대신 더욱 을가미가 넓어진 국가보안법을 만들어 민주화 운동을 가혹하게 탄압해왔다. 5공 당시 밀실에서 고문과 변조로 조작된 간첩단 사건으로 신음하고 있는 이들이 아직도 적지 않은 것은 만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다. 얼마 전에는 이근안 일당의 고문으로 조작된 간첩단 사건이 대법원에서 무죄로 선고된 예들도 우리는 보아왔다.
보름단식에 얻은 햇볕 한뼘
광주민중항쟁 조사 때마다 전두환 일당들이 한결같이 자위의 수단으로 무력을 사용하고, 시민군들의 공격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발포했다는 주장과 관련하여서도 그 무자비한 비인간성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있지 않은가. 이른바 거대한 공룡 앞의 어린애 였다고나 할 시민군을 무자비하게 진압한 것도 문제이지만, 아무런 무기도 없이 일상생활을 하고 있던 무고한 시민들을 향해 무차별 발포한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그의 주도로 저질러진 80년대 사회정화 작업 과정에서 억울하게 해직되어, 심지어는 억울함을 호소할 데가 없어 목숨을 끊은 이들마저 본 적이 있다. 필자 자신도 광주 항쟁이 무자비하게 저문 다음 내 란죄 들의 죄목을 뒤집어쓰고 수감생활을 하면서, 그야말로 배고파서 단 몇푼의 물건을 훔쳤다는 죄목으로 갇힌 어린 등료 수인이 청송 보호감호소로 눈물을 흘리며 가는 것을 목격했다.
그런데도 수많은 양민들을 학샅하고. 서민들이 몇대에 걸쳐서 모아도 불가능한 돈을 뇌물로 챙긴 그는 스팀도 갖추어졌을 뿐더러 접견실마저 응접실 수준으로 만들어진 곳에서 살고 있다. 그의 손아귀에 휘말려 혹독한 시절을 보낸 이들치고 그런 곳을 감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전두환씨가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기에 앞서. 일신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이들을 생각하면, 이른바 현실의 법에 앞서서 스스로 뉘우치는 모습을 먼저 보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두환씨는 알려진 대로 안양교도소에 수감되자마자 단식을 시작했다. 한때는 최고 통수권자이던 사람이 일개 서민으로 들아가 음식을 끊는다는 소식 앞에 일말의 측은함이나마 느껴지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기회에 그동안 5공 등의 철권 통치 아래서 시국사범들이 치러낸 단식의 일단면만 귀뜸하고자 한다.
다 아는 대로 유신과 5공 치하에서는 정권 유지를 위하여 대규도로 정치범들이 양산되어 수감되었고, 그만큼 교정당국의 탄압도 강도가 대단하였다.
유신 말기에 광주 교도소에 수감되어서의 일이다. 당시 광주교도소에는 '특사'라 하여 정치범들만 모아서 수감한 사동이 있었다. 여기에는 이른바 인혁당 사건으로 당시 십수년째 수감 생활을 해오고 있는 이들을 비롯, 6·25당시 인민공화국 검찰관으로 활약하다간 체포되어 30년째 수감생활을 하느라 잇몸이 다 뭉개져서 말이 헛나옴은 물른 여러 번의 전향 공작에서 살아남느라 한쪽 다리를 심하게 절고 있는 장기수도 있었다. 여 기에 우리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수감된 젊은이들이 가세하여 있었다.
필자가 특사에 수감되었을 당시에는 유신 맡기로 독재정권의 발톱이 날카로울 대로 날카로워진 상황이었다. 우리 정치범들에게 허용된 운동 시간이라야 겨우 하루에 30분밖에 안되었고, 읽을 수 있는 책들도 크게 제한이 되어 있어서 원만한 시사문제를 다룬 책들은 반입 자체가 금지되어 있었다.
(8억인과 대화)를 집 필한 이영희 선생이 수감되어 있었는데, 저자인 그마저도 (전환 시대의 논리)등 자신의 저서를 읽을 수 없는 아이러니컬한 상황이었다.
단식은 그때 시국 관련 수감자들이 취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무기였다. 한 선배는 들려주었다. "처음에는 각 방마다 햇빛 한쪽 들지 않도록 창을 다 막아버렸지. 운동이라곤 0.7평의 독방에서 진종일 갇혀 물구나무 서기를 하는 것밖에 없었지.무수히 쏟아지는 구타를 감내하면서. 보름 단식에 겨을 판자쪽 하나를 떼어 햇볕을 한뼘 얻어내고,다시 보름 단식에 운동 씨간을 5분 얻어내고 하는 식으로 여기까지 온 거야. 지금은 그래도 천당이라구, "
도든 것이 무력한 시국 사범들에게 있어 단식은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최후의 수단이었다. 5-18 이후 더욱 죄어든 상황 속에서 박관현 같은 아는 수감자들에제 가해지는 군사 독재의 무자비함에 온몸으로 항거하여 단식 투쟁을 계속하다가 운명을 달리하기도 했다.
전두환씨도 이를 두고 나도 역시 '최후의 수단으로 단식을 하고 있노라'고 강변할지도 모른다.하지만 이 기회를 빌혀 분명히 해들게 있다. 적어도 우리들의 경우에는 한 사람이 단식을 해도 우리들 같은 사동에 있는 시국 사범들 뿐딴 아니라 교도소에 수감된 이들 모두가 걱정해주었을 뿐더러 ,비록 동참은 못하지만 마음 속으로 하나가 되어 주었다는 사실이다.
결국 단식은 단순히 목숨을 걸고 벌이는 도박이 아니라, 수많은 억을한 옥살이를 하는 이들을 대신해 선택한 고귀한 희생 이다.
한 나라의 대통령을 지낸 사람으로, 전씨가 모든 이들이 등을 돌린 상황에서 벌였던 단식은 다시 한번 돌아볼 여지가 많다. 적어도 목숨을 담보로 거는 사람이라면 그 자신부터 우선 깨끗해야 할 것이다. 과연 자신이 때묻지 않는 사람이라고 강변할 자신이 있는 것일까.
전씨가 일체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는 동안에 검찰이 밝혀낸 전씨의 부정 은닉 재산만도 무려 1천억원이 넘고 있다고'한다. 그야말로 '밑구녕이 찢어질 만큼'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일생 돌안 월급쟁이로만 시종일관해온 그가 어떻게 그만한 재산을 모을 수 있었을까.
단식은 속을 말끔히 비워내는 일이다. 일반인들의 경우에는 보름 정도만 단식을 해도 군살이 빠짐은 물론, 숙변이 다 제거되어 그야말로 청명한 경지에 이른다고 한다. 무려 23여일에 걸친 단식 끝에 그가 한 말이라고는 끝까지 5골의 정통성을 지켜가겠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비우기는 커녕 전씨는 우리 국민 전체를 기만하면서, 그의 검은 얼굴을 가린 베일을 더욱 어둡게 했을 뿐이다.
지금이라도 하루 빨리 두 얼굴을 거두어 , 민족과 역사 앞에서 솔직 한 얼굴을 보여주기 바랄 뿐이다.결국 모든 일은 사필귀정으로 역사가 밝혀줄 것이지만, 우선 그 자신이 모든 것을 숨김없이 털어놓고 민족 앞에 참회할 것을 권하는 바이다. 그간 자신의 삶이 걸어온 자취를 무조건 거부하려 들기보다는 진인사 대천명의 정신으로 법에 앞서 역사의 심판을 겸허하게 기다려야 할 것이다.
단식은 국민 기만의 쇼, 역사 앞에 솔직한 얼굴 보여라
백몽구(월간 샘터 편집부장)
이글의 서두를 쓰는 지금은 신정연휴다. 곳곳에서 새해를 맞아 소망을 기원하는 민초들의 경건한 기도소리가 은은한 가운데 거리는 휴일을 만끽하려는 인파들로 북적거리고 있다. 뉴스에서는 남부 지방에 눈이 내려 길이 끊어졌다는 소식을 매시간 전하고, 스키장으로 향하는 인파로 고속도로가 북적거린다는 소식을 듣고 있자면, 눈은 장애가 된다기보다는 사람들에게 좋은 반려가되고 있다는 느낌마저 든다. 요 근래에는 환경 오염에 따른 이상 기후마저 한몫을 거들어, 한강이 얼었다는 소식이 들려온 적이 없으니 이제 겨울은 한걸음 우리들의 기억에서 멀어져 있다는 느낌마저 든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들의 좁은 시야가 가져다준 오판인지도 모른다. 보온 설계가 잘 된 아파트에서 살면서 남는 시간을 얼마나 재미있고 짜릿하게 보낼까 걱정이 많은 이들에게는 겨울이 곧 낭만의 계절로 통할지 모르지만 우리 사회 곳곳에는 아직 겨울을 혹독하게 치러내고 있는 곳들이 적지 않다.
그 대표적인 예가 교도소가 아닐까 한다. 아마도 지구 온난화 현상의 폐해(?)를 마지막까지 피해가는 곳이 있다면 교도소일 것이다. 그만큼 우리 교도소는 아직도 춥고, 사람의 체온이 그리운 곳이다. 겨울에 접어들어 젊은이들로 북적거리는 곳이면, 으레 모두들 첫눈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설레게 마련이다. 첫눈이 내리면 만날 약속을 하고, 마음에 자리한 사람에게 줄 선물을 고르는 손길들로 백화점은 붐비게 된다.
그러나 교도소에 첫눈 소식은 이내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11월 들어서 살갗에 소름이 돋기 시작하면 수감자들 사이에서는 긴 .겨울을 위한 채비 걱정이 태산이다. 요사이 같으면 짐승 우리에도 거의 깔지 않는 짚으로 된 매트리스를 깔고, 퍼런 멍 같은 물이 든 솜이불을 지급받는다. 그리고 듬성듬성 솜이 누벼진 옷을 지급받아 입게 되지만, 겨울의 발톱은 법무부의 엉성한 행정을 비웃기라도 하듯 수인들의 겨을 밤을 추위로 하얗게 깨어 있게 한다.
체온이 그리운 0.7평 독방
아무리 솜으로 감싼다 해도 낡은 사동 곳곳의 틈새로 쏟아져 들어오는 황소바람을 막을 재주가 없는 데다, 난방 시설이라야 때로는 수백명이 살아가는 사동 하나에 구공탄 난로 하나만이 덜렁 놓여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른바 잡범들이 수용된 사동의 경우에는 여럿이어서 서로 몸을 밀착하여 체온으로 추위를 몰아내 기도 하지만, 주로 정치범들이 수용된 독방의 경우에는 차가운 벽 말고는 체온을 나눌 데가 없어 더욱 견디기 힘든 겨울밤이 된다.
게다가 옥문을 따고 자유롭게 운동을 할 수 있는 시간이라야 하루에 겨우 30여분 밖에 주어지지 않는 현실이니, 겨울을 나고 난 수인들의 몸은 심한 손상을 겪을 수밖에 없다. 동상 따위로 시달리는 정도의 외형적 변화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고, 이른바 속병이라고 하여 모든 조건의 '부조화에 따른 씻을 수 없는 질환이 안에서 깊이 곪게 되는 것이다.
전직 대통령 전두환씨가 그의 고향에서 한밤중의 컴컴한 새벽에 압송되어 수감되는 장면을 보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삼천리를 발 아래 둔 듯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그가 싸늘한 철창에 갇히는 것을 보면서 세상은 참 많이 달라졌구나 하는 감회마저 들었다.
하지만 그가 수감되기 전날 연희동 골목길에서 발표한 성명을 들으면서 아직 우리가 되찾아야 할 것들이 더 많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굳어 졌음은 웬일일까. 그는 이른바 5공 문제의 청산은 13대 국회에서 여야지도자들의 합의로 종결된 사안이 라고 못박았고, 자신은 어디까지나 좌파 세력의 음해로 인한 희생양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자신을 비롯한 5공 세력은 무죄이며, 그같은 사실의 규명을 통해 광주 문제가 원만히 해결되기 바란다고 하였다.
그가 현정권과 국민을 향해 폭탄선언을 하고 교도소 안으로 사라져 가던 다음날 저녁, 불면으로 파리해진 그의 주름진 얼굴을 보며 일말의 연민도 들었지만 우리에게는 아직 청산해야 할 불행한 역사가 적지 않음을 뼈저리게 실감할 수 있었다.
수감 직전의 성멸 발표에 뒤이어, 검찰 조사에 일체 묵비권을 행사함은 물론 단식을 단행한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참으로 인간적인 비애마저 들었다.
우선 그같은 도도함과 뻔뻔스러운 여유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어떤 이들은 전씨와 그 주변인물들의 일사불란한 행동들을 보면서 집단 정신병에 걸린 사람들이라고까지 했다.
그같은 견해에 전적으로 동감하지는 않지만,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자신이 쳐놓은 덫에 스스로 걸렸다는 점이다. 그가 12·12쿠데타 이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누누이 강조한 것은 '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응분의 처벌을 받는다'는 법치주의였다. 그가 권력을 장악하고 많은 사람들을 잡아들이면서 주장한 법치주의는 일단 만들어진 모든 법에는 복종하여야 한다는 것과 함께 법의 집행자들에게는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논리였다.
그의 논리대로 하면 당국에서 일단 그의 혐의를 물어서 인신을 구속하려 하는 바에야 당당히 조사에 응함은 물론, 모든 것은 재판을 통해 밝혀지도록 해야 하는 게 금과옥조여야 챘을 것이다. 그의 말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주는 검찰은 성실한 법의 집행자였다. 그런데 정권이 바뀌어 새로운 지도체제로 움직여가는 검찰을 대통령의 하수인일뿐이라고 매도한다면 과연 법은 누구를 위해 있단말인가.
결국 그는 이 나라의 법체계를 개인 및 몇몇 집단의 이익을 지켜주는 사규(私規)로 여겨왔고, 그 법을 집행하는 관료 조직을 사조직으로 여겨왔다는 외에 무슨 다른 말이 있을 수 있겠는가, 아마도 그가 사조직으로 여기던 이들에게 역으로 당하는 운명이 되었으니 참으로 얄궂다고 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얼마 전 남산 안기부 청사가 새로운 부지로 옮겨가고 난 뒤에 공개된 것을 신문지상을 통해 들여다 본 일이 있다. 필자 자신도 유신 말기에 그곳에서 필화와 관련하여 혹독한 조사를 받은 적 이 있지만, 주로 시국 사건과 관련된 인사들이 그곳에서 당한 고초는 지금 필설로 옮기는 것이 어렵다. 며칠이고 잠 안재우기, 일체의 면회가 허용되지 않는 가운데서 공포와 고문 들을 통해 수많은 신국 사건들의 전모( ?)가 만들어졌고 우리들은 단죄되어야 했다.
만천하에 큰소리를 치민서 안양교도소로 사라지는 전두환씨는 자신의 권좌를 유지하기 위해 급조된 대형 시국 사범들이 수사기관에서 당한 일들의 한 모서리라도 알고 있었을까.
이른바 한국에 베리야로 알려진 전기 고문의 귀재 이근안이 행한 비인간적 고문의 실태는 널리 알려졌다. 나라를 빼앗긴 일제치하에서도 유례가 없는 혹독한 고문으로 김근태 씨 등 민주인사들이 용공인사로 변조된 예를 보면 권력이 일개인의 수중에 떨어졌을 때 얼마나 심각한 폐해를 낳는가를 말해준다.
전두환 정권은 출범 초기에 통금 해제하고, 오랫동안 악명 높게 이 땅의 민주화를 짓눌러오던 반공법을 폐지한 바 있다. 하지만 통금 해제에 따라 자유가 늘어난 징조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이 이른바 경찰국가로 그의 권좌를 지켜 왔으며, 반공법 대신 더욱 을가미가 넓어진 국가보안법을 만들어 민주화 운동을 가혹하게 탄압해왔다. 5공 당시 밀실에서 고문과 변조로 조작된 간첩단 사건으로 신음하고 있는 이들이 아직도 적지 않은 것은 만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다. 얼마 전에는 이근안 일당의 고문으로 조작된 간첩단 사건이 대법원에서 무죄로 선고된 예들도 우리는 보아왔다.
보름단식에 얻은 햇볕 한뼘
광주민중항쟁 조사 때마다 전두환 일당들이 한결같이 자위의 수단으로 무력을 사용하고, 시민군들의 공격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발포했다는 주장과 관련하여서도 그 무자비한 비인간성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있지 않은가. 이른바 거대한 공룡 앞의 어린애 였다고나 할 시민군을 무자비하게 진압한 것도 문제이지만, 아무런 무기도 없이 일상생활을 하고 있던 무고한 시민들을 향해 무차별 발포한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그의 주도로 저질러진 80년대 사회정화 작업 과정에서 억울하게 해직되어, 심지어는 억울함을 호소할 데가 없어 목숨을 끊은 이들마저 본 적이 있다. 필자 자신도 광주 항쟁이 무자비하게 저문 다음 내 란죄 들의 죄목을 뒤집어쓰고 수감생활을 하면서, 그야말로 배고파서 단 몇푼의 물건을 훔쳤다는 죄목으로 갇힌 어린 등료 수인이 청송 보호감호소로 눈물을 흘리며 가는 것을 목격했다.
그런데도 수많은 양민들을 학샅하고. 서민들이 몇대에 걸쳐서 모아도 불가능한 돈을 뇌물로 챙긴 그는 스팀도 갖추어졌을 뿐더러 접견실마저 응접실 수준으로 만들어진 곳에서 살고 있다. 그의 손아귀에 휘말려 혹독한 시절을 보낸 이들치고 그런 곳을 감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전두환씨가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기에 앞서. 일신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이들을 생각하면, 이른바 현실의 법에 앞서서 스스로 뉘우치는 모습을 먼저 보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두환씨는 알려진 대로 안양교도소에 수감되자마자 단식을 시작했다. 한때는 최고 통수권자이던 사람이 일개 서민으로 들아가 음식을 끊는다는 소식 앞에 일말의 측은함이나마 느껴지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기회에 그동안 5공 등의 철권 통치 아래서 시국사범들이 치러낸 단식의 일단면만 귀뜸하고자 한다.
다 아는 대로 유신과 5공 치하에서는 정권 유지를 위하여 대규도로 정치범들이 양산되어 수감되었고, 그만큼 교정당국의 탄압도 강도가 대단하였다.
유신 말기에 광주 교도소에 수감되어서의 일이다. 당시 광주교도소에는 '특사'라 하여 정치범들만 모아서 수감한 사동이 있었다. 여기에는 이른바 인혁당 사건으로 당시 십수년째 수감 생활을 해오고 있는 이들을 비롯, 6·25당시 인민공화국 검찰관으로 활약하다간 체포되어 30년째 수감생활을 하느라 잇몸이 다 뭉개져서 말이 헛나옴은 물른 여러 번의 전향 공작에서 살아남느라 한쪽 다리를 심하게 절고 있는 장기수도 있었다. 여 기에 우리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수감된 젊은이들이 가세하여 있었다.
필자가 특사에 수감되었을 당시에는 유신 맡기로 독재정권의 발톱이 날카로울 대로 날카로워진 상황이었다. 우리 정치범들에게 허용된 운동 시간이라야 겨우 하루에 30분밖에 안되었고, 읽을 수 있는 책들도 크게 제한이 되어 있어서 원만한 시사문제를 다룬 책들은 반입 자체가 금지되어 있었다.
(8억인과 대화)를 집 필한 이영희 선생이 수감되어 있었는데, 저자인 그마저도 (전환 시대의 논리)등 자신의 저서를 읽을 수 없는 아이러니컬한 상황이었다.
단식은 그때 시국 관련 수감자들이 취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무기였다. 한 선배는 들려주었다. "처음에는 각 방마다 햇빛 한쪽 들지 않도록 창을 다 막아버렸지. 운동이라곤 0.7평의 독방에서 진종일 갇혀 물구나무 서기를 하는 것밖에 없었지.무수히 쏟아지는 구타를 감내하면서. 보름 단식에 겨을 판자쪽 하나를 떼어 햇볕을 한뼘 얻어내고,다시 보름 단식에 운동 씨간을 5분 얻어내고 하는 식으로 여기까지 온 거야. 지금은 그래도 천당이라구, "
도든 것이 무력한 시국 사범들에게 있어 단식은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최후의 수단이었다. 5-18 이후 더욱 죄어든 상황 속에서 박관현 같은 아는 수감자들에제 가해지는 군사 독재의 무자비함에 온몸으로 항거하여 단식 투쟁을 계속하다가 운명을 달리하기도 했다.
전두환씨도 이를 두고 나도 역시 '최후의 수단으로 단식을 하고 있노라'고 강변할지도 모른다.하지만 이 기회를 빌혀 분명히 해들게 있다. 적어도 우리들의 경우에는 한 사람이 단식을 해도 우리들 같은 사동에 있는 시국 사범들 뿐딴 아니라 교도소에 수감된 이들 모두가 걱정해주었을 뿐더러 ,비록 동참은 못하지만 마음 속으로 하나가 되어 주었다는 사실이다.
결국 단식은 단순히 목숨을 걸고 벌이는 도박이 아니라, 수많은 억을한 옥살이를 하는 이들을 대신해 선택한 고귀한 희생 이다.
한 나라의 대통령을 지낸 사람으로, 전씨가 모든 이들이 등을 돌린 상황에서 벌였던 단식은 다시 한번 돌아볼 여지가 많다. 적어도 목숨을 담보로 거는 사람이라면 그 자신부터 우선 깨끗해야 할 것이다. 과연 자신이 때묻지 않는 사람이라고 강변할 자신이 있는 것일까.
전씨가 일체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는 동안에 검찰이 밝혀낸 전씨의 부정 은닉 재산만도 무려 1천억원이 넘고 있다고'한다. 그야말로 '밑구녕이 찢어질 만큼'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일생 돌안 월급쟁이로만 시종일관해온 그가 어떻게 그만한 재산을 모을 수 있었을까.
단식은 속을 말끔히 비워내는 일이다. 일반인들의 경우에는 보름 정도만 단식을 해도 군살이 빠짐은 물론, 숙변이 다 제거되어 그야말로 청명한 경지에 이른다고 한다. 무려 23여일에 걸친 단식 끝에 그가 한 말이라고는 끝까지 5골의 정통성을 지켜가겠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비우기는 커녕 전씨는 우리 국민 전체를 기만하면서, 그의 검은 얼굴을 가린 베일을 더욱 어둡게 했을 뿐이다.
지금이라도 하루 빨리 두 얼굴을 거두어 , 민족과 역사 앞에서 솔직 한 얼굴을 보여주기 바랄 뿐이다.결국 모든 일은 사필귀정으로 역사가 밝혀줄 것이지만, 우선 그 자신이 모든 것을 숨김없이 털어놓고 민족 앞에 참회할 것을 권하는 바이다. 그간 자신의 삶이 걸어온 자취를 무조건 거부하려 들기보다는 진인사 대천명의 정신으로 법에 앞서 역사의 심판을 겸허하게 기다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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