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YS 역사바로잡기에 참여한 전두환 국보위 출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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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 역사바로잡기에 참여한 전두환 국보위 출신들
5공화국 창건의 밑그림을 그려준 「국보위」출신 인사들은 그들의 참여동기야 어떻든 이후 탄탄한 출세가도를 달렸다. 김영삼정부의 12 · 12 및 5 · 18 심판과정에서도 「국보위」 출신 인사들이 참여하고 있다.
권영석(연합통신 사회부 기자)
무소불위의 절대권력을 휘두르며 부귀영화를 누렸던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대통령을 비롯해 신군부 주역들은 95년 겨을을 유난히 춥게 맞이했다.
한때 일국을 호령했던 이들 전직 대통령이 하루 아침에 「반란군 수괴」가 돼 철창에 갇히리라고는 최근까지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검찰은 95년 7월 법률적으로 신군부를 「보호해주는」 결정을 내림으로써 사건을 종결시키려고 했다. 즉 5 · 18광주항쟁 책임자들에 대한 고소 ·고발 사건에 대해서 『성공한 내란에 의해 새로운 헌정질서가 창출되면 사법심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며 「공소권 없음」 처분을 내렸었다
신군부 주역들에 대한 검찰의 이같은 결정은 광주민주화운동 피해자들은 물론 대다수 국민들에게 커다란 실망감과 분노를 안겨주었다. 이때도 검찰은 『법률가라면 누구든지 이같은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당시 '공소권 없음'결정의 주역으로 서울지검 수사팀을 지휘했던 최영광 서울지검장이 80년 신군부 권력의 핵심이 었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출신이란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최씨는 지난 80년 대검 검찰연구관 시절 뛰어난 기획능력 등을 인정받아 국보위 법사위 위원으로 발탁됐었다
최씨는 국보위가 폐지된 후에도 능력을 인정받아 5공화국 당시 청와대 파견근무를 하기도 했다. 이후 법무부 검찰1과장과 검찰국장,서을 남부지청 및 대구지검 차장,서울지검 1차장을 거쳐 94년 9월 서울지검장에 부임함으로써 5 · I8학살 책임자 고소 ·고발사건을 지휘하게 됐다 현재 법무연수원장인 그는 5 · 19 고소 고발 사건 수사관계자 13명과 함께 5. 18 관련 피해자들로부터 직무유기 혐의로 고소를 당한 상태.
검찰의 5. 18불기소 처분에 대한 헌법소원을 관결하려 했던 헌법재판소 주심 재판관 중에도 국보위 위원출신이 있다. 5.18고소 ·고발자들은 검찰의 판결에 불복해 헌법 재판소에 헌법소원을 낸 바 있으나,5 · 18 특별법」 문제와 관련해 소를 취하 함으로써 결론이 나지 않았다
원래 이 사건에 대한 헌법재판소 주심 재판관은 정경식 김문희 이재화씨 세사람이었다. 이중 정재판관은 79년 서울지검 공안부 검사시절 합등수사본부에 파견나가 정승화 당시 육군참모총장을 조사했다. 그는 또 서울지검 특수2부장 신분으로 국보위에 참가 사회정화위원으로 활동했다
한때 검찰내에서 TK 인맥을 대표하기도 했던 정씨는 그후 대검 공안부장,청주지검장, 대구지검장, 대구고검 장 등 ·검찰내 요직을 두루 거쳤다.
이같은 그의 이력 때문에 5.18 변호인단은 정재판관에 대해 재판관기피신청을 제출한 바 있다. 변호인단은 정재판관이 80년에 국보위 등신군부의 정권창출기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신군부를 단좌하는 5. 18 헌법소원 사건에서 공정한 심리를 기대할 수 없다고 이유를 댔다 그러나 변호인단은 기피신청을 낸 지 하루만인 지난 11월23일 이를 철회했다 이는 그 다음날은 11월24일 김대통령의 5. 18특별법 제정지시와 연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영삼 대통령은 갑자기 5. 18 특별법 제정 방침을 발표하여 국민들을 온통 놀라움과 환영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김 대통령의 방침에 따라 검찰은 이전의 태도를 180도 바구었다.검찰은 12.12와 5.18이 더 이상 '성공한 내란'이 아니라면서 새롭게 12.12 및 5.18특별수사본부를 설치했다.
12.12,5.18 특별수사팀도 국보위 출신
현재 특별수사본부를 이끌어가고 있는 검찰인사는 최환 서울지검장과 수사본부장인 이종찬 서울지검 3차장검사 및 김상희 검사. 그런데 최환 서울지검장이 국보위와 관련이 있다.
그는 지난 80년 국보위 내무위원과 입법회의 내무위 전문위원으로 참여한 전력이 있어 수사본부장 자리를 이종찬차장에게 넘겼다는 후문이다. 원래 검찰의 「재수사」는 그 자체가 중요한 의미가 있으므로,지검장이 수사본부장을 맡기로 했다가 바꿨다는 설명이다.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사시 6회에 합격한 최지검증은 대전지검 검사로 재직중이던 80년 8월 국보위에 발탁됐다 새로운 정권을 창출하기 위한 주도 업무가 끝난 뒤에 발탁된 것. 이후 그는 대검 형사과장과 공안과장, 서울지검 공안부장, 1차장 검사를 역임했다. 공안분야 최고의 자리인 대검 공안부장과 검찰국장도 거쳤다.
더욱 재미있는 사실도 있다 신군부의 정권찬탈기에 국보위에 참여한 인물들이 청와대에선 김영삼 대통령의 「역사 바로잡기」를 보좌하고 있다는 점이다. 국보위출신으로 청와대에 몸담고 있는 인물은 한승주 대통령 비서실장과 한이헌 경제수석 비서관 이들은 모두 김영삼정부의 핵심인사로 거론되는 인물이다.
신군부가 실세로 떠올랐던 80년 당시 서울대 교수로 있으면서 국보위 재무위원에 발탁된 한 비서실장은 연세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영국 요크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딴 후 연대 출신으로는 드물게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로 채용됐다. 그는 88년까지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로 있으면서 미국 하버드대와 일본 동경대 등 세계 유명대학에서 객원교수로 강의한 실력파였다.
13대 총선때 민정당 공천으로 고향인 춘천에서 금배지를 단 그는 상공부장관을 역임한 후 김영삼정부에 들어와서도 주미대사를 거쳐 94년 12월부터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일하고 있다.
또 당시 경제기획원 정책조정과장으로 있던 한이헌 경제수석은 국보위 운영위 전문위원을 지냈다 한수석은 81년 다시 경제기획원으로 돌아가 예산심의관을,5공 말기에는 대통령 경제비서관을 거쳐 기획원 경제기획국장이라는 요직을 맡았다. 6공 들어와서는 민자당 전문위원으로 파견됐다가 김영삼 대표의 「경제 가정교사」를
했는데, 공정거래위원장과 기획원 차관을 지낸 뒤 현재는 문민정부의 경제정책에 큰 입김을 불어넣고 있다.
국보위에 참여했다는 사실만으로 이들을 비난하기는 어렵다. 대개의 경우 이들의 발탁은 능력을 높이 산 신 군부측에 의해 일방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의 삼엄한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이들의 참여는 본인의 의사와 관계가 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 다만 참여의 동기야 어떻든 5공화국 이후 이들이 탄탄한 출세가도를 달린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국가보위비 상대 책위원회」는 80년 전국 비상계험 하에서 행정과 사법 업무를 조정 .통제하던 초헌법적 기구로 신군부 정권찬탈의 전초기지였다. 국보위 설치령과 조직구성, 상임위원 및 분과위원 인선 등 실무작업은 권정달 당시 보안사정보처장의 주도하에 추진됐다. 권처장은 비상계엄 전국확대와 함께 비상기구를 설치해 기존의 정치활동을 규제할 필요가 있다는 방안을 80년 5월10일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에게 보고했다. 그리고 5월17일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결정하기 위해 모인 전군주요지휘관회의 석상에서 국보위 설치가 함께 결정됐다
권력탄찰의 전초기지, 국보위
그러나 최규하 대통령은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는 받아들였지만, 청와대를 무력화시키려는 국보위 설치안은 반대했다. 전두환사령관은 5월20일 다시 국보위 설치안을 건의, 마침내 최대통령으로부터 현행법규 범위 안에서 연구해보라는 허락을 받아냈다 권정달 처장은 새로 취임한 박충훈 국무총리서리를 찾아가 국보위 설치안을 보고하는 등 본격적인 작업에 나섰다
박 총리서리는 최대통령에게 「헌법을 고치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고 보고했지만,최대통령은 『총리가 보안사측에 얘기해보라』는 불쾌한 답변을 들어야 했다. 결국 우여곡절끝에 국보위 설치법안은 신군부의 양보로 비상기구가 아닌 대통령 자문 ·보좌기구 형태로 수정돼 5월27일 국무회의에서 의결됐다.
국보위가 공식 발족한 것은 광주민주화운동을 진압한 직후인 90년 5월31일. 당시 정부대변인 이광균 문화공보부장관은 내각과 계엄군 당국간의 긴밀한 협조체제를 위해 대통령 자문 보좌기관인 국보위를 설치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국보위는 사실상 내각을 통제하는 초헌법적 기구로 위상을 굳혀 나갔다.신군부는 국보위를 통해 .~「합법적으로」 권력을 행사하면서 권력찬탈의 기반을 다져나갔던 것이다.
80년 6월5일 최대통령은 전두환 위원장을 비롯한 임명직 위원 16명과 13개 분과 위원장 및 사무처장 등 당연직 위원 14명등 30명을 국보위 상임위원으로 임명했다.각 분과위의 상위기관이자 실무적인 총괄기능을 가진 상임위에는 18명의 현역 장군과 12명의 정부 각부처 고급공무원들이 포진돼 있었다. 이때부터 명목상으로나마 청와대에 쏠려 있었던 권력의 추는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을 중심으로하는 신군부쪽으로 기울었다.
국보위는 출범과 함께 구시대의 유물인 각종 비리와 부패를 뿌리뽑겠다면서 각 분야에서 일대 숙정 작업에 착수했다 국보위의 숙정조치가 각 분과별로 잇따라 발표됐으며, 특히 사회정화위원회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사회정화위는 권력형 부정부패를 일소한다는 목표 아래 사회의 지탄을 받거나 해바라기성 고급 공무원들에 대한 숙정을 전담했다.
모든 국가 업무는 국보위를 중심으로 운영됐으며, 상임위는 국정집행의 핵심기구이자 제5공화국 권력 엘리트들의 요람이 되었다. 과도기 비상기구였던 국보위는 국가보위 입법회의가 업무를 개시한 80년 10월27일까지 1백50여일 동안 제5공화국 창건의 기초를 다져나갔다.
국보위에서 활동했던 관계자들 대부분은 5긍 이후 눈부신 출세가도를 달리면서 사회 각계 각층에서 권력엘리트로 자리잡았다.
서슬퍼런 개혁을 담당했던 신군부 주역들은 군복을 벗고 그들의 손에 의해 골격이 갖춰진 5, 6 공화국에 참여해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또 관료나 학자 출신 일부는 국보위 활동후 본연의 업무로 돌아갔으나,5,6공 집권기간중 승진을 거듭했다
「5 · 18 특별법」 반대한 국보위출신 의원들
그러나 문민정부 집권 중반기에 터진 비자금정국이 결국 12 · 12 및 5 18 관련자들에 대한 과거청산 정국으로까지 이어지면서 역사가 다시 쓰여지고 있다. 국가전복음모를 분쇄하고 나라를 보호하기 위한「애국적 행동」이 불과 16년만에 정권찬탈을 위한 불법 군사반란으로 재평가받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신군부 쿠데타 주역은 물론 이들에게 5공 창건의 밑그림을 그려준 국보위 협조자들에 대한 역사적 심판도 이미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고 말았다. 12-12및 5.18사건 재수사에 착수한 검찰에 줄줄이 소환되거나 구속된 신군부 관련자들의 대다수가 국보위 출신들이다
먼저 그 모습은 정치권에처 극명하게 찾아볼 수 있다. 국회사무처는 지난 12월7일 신한국당이 제출한 「헌정질서 파괴범죄의 공소시효에 관한 특례법안」에 동참, 서명한 소속의원 1백11면의 명단을 공개한 바 있다 이 명단에 의하면 역으로 신한국당 현역의원으로서 과거 국보위 출신 인사들의 면면들 읽어볼 수 있다.
이 특별법 제안에 서명을 거부했거나 12 ·12. 및 5 · 18사건 관계로 검찰에 소환됐던 현역의원은 정호용 허화평 허삼수 금진호 이춘구 엽적무 안무혁 김한규 의원 등이다.
먼저 국보위 임명직 위원으로 뽑힌 정호용 의원은 한때 차기 대권을 꿈꾸기도 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자신이 몸담고 있는 당에서 자신을 포함한 신군부를 단죄하려는 특별법 제정 결정과 전두환씨 구속을 계기로 탈당 결심을 굳히고 시기선택만을 고려하고 있는 상태다. 정의원은 「정치에 환멸을느껴」 스스로 정계를 은퇴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주변의 전망이다.
또 5,6공의 「원죄」를 단죄하려는 김대통령 등 여권 핵심부에 대해 「좌익세력」 음모를 주장하면서 맞대응한 허화평의원은 국보위위원은 아니었지만, 당시 국보위상임위원장인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비서실장 출신이다 허의원은 만약 당 지도부가 자신을 강제로 쫓아낸다면 무소속으로 총선에 출마해서 5공 정통성과 치적을 내걸어 지역 유권자들의 심판을 받으려 할 것으로 보인다.
국보위 인사처장으로 사회정화위 간사까지 맡았던 허삼수의원도 신한국당에서 공천을 받기가 어려운 상태다 그는 국보위 폐쇄 직후 전두환대통령의 사정수석비서관을 거쳐 미국 스탠퍼드대 객원교수로 활동하다 87년 민정당 국책평가위원이 돼 본격적으로 정치에 참여했다
노태우씨와 동서지간인 금진호의원은 서울대 법대 출신으로 총무처에 들어가 80년 상공부 기회관리실장으로 재직 당시 노씨의 천거로 국보위 상공위원장으로 발탁됐다 금의원은 80년 곧바로 국무총리 비서실장, 81년 상공부차관을 거쳐 83년부터 3년 가까이 상공장관으로 출세가도를 달렸다. 그러나 5.6공 시절 재계를 주무르던 그도 지난 12월 노씨 비자금 사건과 관련, 비자금을 알선 중재한 혐의로 검찰에의해 불구속 기소됐다.
80년 당시 서슬퍼런 국보위 사회정화위원장 출신인 이춘구의원은 문민정부 들어서도 국회부의장과 민자당 대표위원을 역임하다 지금은 뒷자리로 물러나 있다. 81년 준장으로 예편한 이의원은 민정당 전국구 의원으로 11대 국회에 등원한 이후 12,13,14대 총선에서 내리 지역구 의원으로 당선했다
육사 14기 출신인 안무혁의원은 육사교수와 건설공병단장을 역임하고 80년 국보위 건설위원으로 참여한 인물이다. 81년 준장으로 예편한 안의원은 국세청장, 안기부장을 지냈고. 14대 국회에서 민자당 전국구 의원이 됐다
김한규의원은 72년 미캘리포니아주립대를 졸업하고 재미한미기독실업인 회장을 지내다 국보위 문공위 전문위원으로 발탁 됐다. 김의원은 흘트아동복지회장에 이어 장애자올림픽조직위 부위원장으로 있으면서 13대 국회에 진출했다. 95년에 총재 비서실장을 맡는 등 재선의원으로 활동하고있다.
이밖에 특별법 서명거부와 관계없이 집권여당에 몸담고 있는 국보위 출신으로는 차수명의원,정동우 박판제씨를 들 수 있다 차수명의원은 상공부 기계공업국장을 지내다 국보위 상공자원위원으로 차출됐다. 그는 이후 상공부 차관보를 역임한 후 84년 변호사 개업으로 잠시 공직에서 물러났다가 85년 특허청장으로 복귀했다 88
년에는 다시 민정당 울산남지구당 위원장을 맡아 정계에 진출했다.
현재 신한국당 국책자문위원으로 있는 정동우씨도 노동부에 근무하다 국보위 보사위원으로 발탁됐고, 이후 노동부 차관을 지냈다. 또 박판제 국책자문위원은 재무부 국고국장 시절 국보위 재무위원으로 들어간 이후 대통령 사정비서관과 조달청 차장 환경 청장 등을 엮임 했다.
국보위출신 상당수는 칩거상태
국보위 상임위원 출신으로 5,6공 치하에서 적지 않은 대우를 받아왔던 인물들 중 상당수는 이제 민간인 신분으로 칩거하고 있는 상태다 먼저 육사 11기 출신의 육군 소장으로 국보위 운영위원장과 입법회의 운영위원장을 지낸 이기백씨는 현재 특별한 직책이 없이 지내고 있다 그는 국보위 폐쇄 이후 다시 현역에 복귀 , 군단장 · 육참차장 ·군사령관에 이어 합참의장을 거쳐 85년 육군대장으로 예편하는 등 군인으로서는 최고의 길을 달렸다. 또 83년 10월9일 전두환 대통령의 버마방문에 수행 , 아웅산묘지 폭발사건으로 중상을 입었으나 재기해 국방장관에 취임한 입지전적인 이력도 있다.
국보위 법사위원장을 지낸 김영균씨는 86년 변호사를 개업한 이래 현업에 종사하고 있다. 그는 육사 11기 출신으로 서울대법대에 학사 편입, 62년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한 후 육군 법무 업무에 종사하다가 77년 준장으로 예편. 동방생명 감사로 지내다 민간인출신으로 국보위에 참여한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다. 국보위 해체후 81년부터 86년까지 법제처장을 지냈다.
제 외무부 기획관리실장에서 국보위 외무위원장으초 발탁된 노재원씨는 국보위 해체후 외교관으로서 화려한 가도를 달렸다.그는 외무부 차관 주캐나다 대사에 이어 김영삼정부가 들어선 93년에는 초대 주중국대사를 지내다 공직생활을 마감했다.
육군소장으로 국보위 냅무위원장을 역임한 이광雀씨는 81년 군에 복귀 , 83넌 중장으로 예편했다.이후 정계에 진출 13대 민자당 의원과 국회사무총장까지 지내기도 했으나 현재는 칩거하고 있는 상태다.
한미연합사 참모부장 시절 국보위 재무위원장을 치낸 심용희씨는 81년 전역후 정부투자기관인 대한재보험 사장과 국민연금관리공단 이사장을 지내다 세인의 관심권에서 사라졌다.
국보위 문공위원장을 지낸 오현복씨는 국보위 해체후 군에 복귀 , 군단장과 육참차장 · 군사령관 합참의장을 역임했고 88년에는 국방장관까지 올랐다. 93년 서을마사회장을 끝으로 공직에서 물러났다.
농수산부 차관보에서 국보위 농수산위원장으로 파견됐던 박종문씨는 농수산부장관을 지내다가 12대 국회에 민정당 전국구 의원으로 등원했었다. 해군본부 비서실장(해군 준장)으로 국보위 보사위원장을지낸 조영길씨는 81년 해군소장으로 예편했다. 그후 교통안전진흥공단 이사장을 거쳐 국무총리 비서실장, 관광공사 사장을 거쳐 93년 민자당 국책자문위원까지 맡았다.
육군 준장으로 국보위 교통체신위원장을 지 낸 이우재씨는 81년 예편, 11대에 전국구로 등원했다가 한국전기통신공사가 창설되면서 초대 사장으로 임명됐다. 주로 육군의 통신업무에 종사했던 이씨는 90년 체신부장관과 국민사격연맹 부회장을 끝으로 공직생활을 마감했다.
건설부 기획관리실장에서 국보위 건설위원장으로 참여한 이규호씨는 국보위 해체후 건설부 차관, 내무차관을 거쳐 건설부 장관까지 역임했다. 공무원 교육원 부원장에서 국보위 행정사무를 총괄하는 사무처장으로 발탁된 鄭寬溶씨는 이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사무처장, 청와대 사정수석 비서관. 총무처장관, 닉문부장관 등으로 재직하다가 농수산물유통공사 이사장을 끝으로 공직에서 물러났다
분과위원들은 현역에서 활동중
한편 당시 국보위 상임위 소속 실무 담당자들로서 각 부처의 실무책임을 맡았던 분과위원들은 공직에서 물러난후 사회 일선에서 다양하게 활동하고 있다.
국보위 운영위원이었던 안영화씨는 81년 대령으로 예편, 11대 국회운영위 전문위원 등을 거쳐 l2대 민정당 전국구로 금배지를 달았다. 안씨는 이후 89년 극동전선 부회장을 시작으로 재계에 진출, 신한피혁 사장을 거쳐 현재 신북산업 회장으로 경영활동을 하고 있다
80년 총무처 행정관리국 심의관 시절 국보위 운영위원으로 들어간 정문화씨는 이후 총무처 기획관리실장과 차관까지 승진했다. 현재는 한국지방행정연구원장으로 재직중.
국방부 검찰부장에서 국보위 법사위원으로 전역한 김용균씨는 이후 비슷한 성격의 국회 문공위 전문위원으로 남았다 국회사무처 행정차장을 거쳐 체육부 차관, 헌법재판소 사무차장까지 지낸 후 현재는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역시 현재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는 이종남씨는 법사위원으로 활동하다가 현업에 복귀한 후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 서울지검장을 거쳐 검찰총장,법무장관을 지내는 등 화려한 이력을 갖고있다.
검사 출신의 현홍주 당시 국보위 내무위원은 이후 국가안전기획부 제1차장으로 지내다가 l2대 국회에 민정당 전국구의원으로 등원했다 다시 법제처장을 거쳐 93년까지 주미대사를 지내다가 현재는 변호사로 촬동하고 있다 식
경찰 출신으로 국보위 내무위원이 되었던 김상기씨는 6공 정부에 들어서는 경북지사에 임명됐으나 부정과 관련, 구속되기도 했다. 지난 62년 행정고시에 합격 , 주로 세무공무원으로 있었던 趙寬行씨는 현재 한국보증보험 사장으로 재직중이다.
당시 최규하 대통령 밑에서 각료로 있었던 이유로 국보위 당연직 위원이 됐던 인물들은 최근 12 · 12사태 재수사에 따른 외부 노출을 회피한 채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박충훈 국무총리 서리 (이하 당시 직 책) ,김원기 부총리, 박동진 외무부장관(이하당시 직책) , 김종환 내무부장관, 오탁근 법무부장판, 주영복 국방부장관 이규호 문교부장관, 이팡표 문화공보부장관, 최광수 대통령비서실장 등 최규하대통령 밑에서 일했던 각료들은 내각에서 물러난 이후 최고 권력자로부터 일정한 「보상」을 받은 바 있다
당시 신군부 주도하에 국보위에 참여했던 사람들중에는 자발적으로 가담한 사람도 있었고, 신군부에 의해 일방적으로 발탁됐던 경우도 있다. 특히 당시 공무원으로 재직했던 인물들은 대부분 신군부가 지목해 차출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에 대해 당시 현직공무원에서 국보위에 발탁됐다가 이후 차관까지 지낸 H씨는 '각 부처별로 한명씩 공무원들이 차출돼 일을 했다 대부분 부처 내에서 유능하다는 평을 듣던 인물들이었다'고 말했다. H씨는 그들이 유능했기 때문에 국보위 해체 후 계속적으로 그능력을 인정받았다는 점도 분명히 있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5공화국 창건의 밑그림을 그려준 「국보위」출신 인사들은 그들의 참여동기야 어떻든 이후 탄탄한 출세가도를 달렸다. 김영삼정부의 12 · 12 및 5 · 18 심판과정에서도 「국보위」 출신 인사들이 참여하고 있다.
권영석(연합통신 사회부 기자)
무소불위의 절대권력을 휘두르며 부귀영화를 누렸던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대통령을 비롯해 신군부 주역들은 95년 겨을을 유난히 춥게 맞이했다.
한때 일국을 호령했던 이들 전직 대통령이 하루 아침에 「반란군 수괴」가 돼 철창에 갇히리라고는 최근까지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검찰은 95년 7월 법률적으로 신군부를 「보호해주는」 결정을 내림으로써 사건을 종결시키려고 했다. 즉 5 · 18광주항쟁 책임자들에 대한 고소 ·고발 사건에 대해서 『성공한 내란에 의해 새로운 헌정질서가 창출되면 사법심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며 「공소권 없음」 처분을 내렸었다
신군부 주역들에 대한 검찰의 이같은 결정은 광주민주화운동 피해자들은 물론 대다수 국민들에게 커다란 실망감과 분노를 안겨주었다. 이때도 검찰은 『법률가라면 누구든지 이같은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당시 '공소권 없음'결정의 주역으로 서울지검 수사팀을 지휘했던 최영광 서울지검장이 80년 신군부 권력의 핵심이 었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출신이란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최씨는 지난 80년 대검 검찰연구관 시절 뛰어난 기획능력 등을 인정받아 국보위 법사위 위원으로 발탁됐었다
최씨는 국보위가 폐지된 후에도 능력을 인정받아 5공화국 당시 청와대 파견근무를 하기도 했다. 이후 법무부 검찰1과장과 검찰국장,서을 남부지청 및 대구지검 차장,서울지검 1차장을 거쳐 94년 9월 서울지검장에 부임함으로써 5 · I8학살 책임자 고소 ·고발사건을 지휘하게 됐다 현재 법무연수원장인 그는 5 · 19 고소 고발 사건 수사관계자 13명과 함께 5. 18 관련 피해자들로부터 직무유기 혐의로 고소를 당한 상태.
검찰의 5. 18불기소 처분에 대한 헌법소원을 관결하려 했던 헌법재판소 주심 재판관 중에도 국보위 위원출신이 있다. 5.18고소 ·고발자들은 검찰의 판결에 불복해 헌법 재판소에 헌법소원을 낸 바 있으나,5 · 18 특별법」 문제와 관련해 소를 취하 함으로써 결론이 나지 않았다
원래 이 사건에 대한 헌법재판소 주심 재판관은 정경식 김문희 이재화씨 세사람이었다. 이중 정재판관은 79년 서울지검 공안부 검사시절 합등수사본부에 파견나가 정승화 당시 육군참모총장을 조사했다. 그는 또 서울지검 특수2부장 신분으로 국보위에 참가 사회정화위원으로 활동했다
한때 검찰내에서 TK 인맥을 대표하기도 했던 정씨는 그후 대검 공안부장,청주지검장, 대구지검장, 대구고검 장 등 ·검찰내 요직을 두루 거쳤다.
이같은 그의 이력 때문에 5.18 변호인단은 정재판관에 대해 재판관기피신청을 제출한 바 있다. 변호인단은 정재판관이 80년에 국보위 등신군부의 정권창출기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신군부를 단좌하는 5. 18 헌법소원 사건에서 공정한 심리를 기대할 수 없다고 이유를 댔다 그러나 변호인단은 기피신청을 낸 지 하루만인 지난 11월23일 이를 철회했다 이는 그 다음날은 11월24일 김대통령의 5. 18특별법 제정지시와 연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영삼 대통령은 갑자기 5. 18 특별법 제정 방침을 발표하여 국민들을 온통 놀라움과 환영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김 대통령의 방침에 따라 검찰은 이전의 태도를 180도 바구었다.검찰은 12.12와 5.18이 더 이상 '성공한 내란'이 아니라면서 새롭게 12.12 및 5.18특별수사본부를 설치했다.
12.12,5.18 특별수사팀도 국보위 출신
현재 특별수사본부를 이끌어가고 있는 검찰인사는 최환 서울지검장과 수사본부장인 이종찬 서울지검 3차장검사 및 김상희 검사. 그런데 최환 서울지검장이 국보위와 관련이 있다.
그는 지난 80년 국보위 내무위원과 입법회의 내무위 전문위원으로 참여한 전력이 있어 수사본부장 자리를 이종찬차장에게 넘겼다는 후문이다. 원래 검찰의 「재수사」는 그 자체가 중요한 의미가 있으므로,지검장이 수사본부장을 맡기로 했다가 바꿨다는 설명이다.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사시 6회에 합격한 최지검증은 대전지검 검사로 재직중이던 80년 8월 국보위에 발탁됐다 새로운 정권을 창출하기 위한 주도 업무가 끝난 뒤에 발탁된 것. 이후 그는 대검 형사과장과 공안과장, 서울지검 공안부장, 1차장 검사를 역임했다. 공안분야 최고의 자리인 대검 공안부장과 검찰국장도 거쳤다.
더욱 재미있는 사실도 있다 신군부의 정권찬탈기에 국보위에 참여한 인물들이 청와대에선 김영삼 대통령의 「역사 바로잡기」를 보좌하고 있다는 점이다. 국보위출신으로 청와대에 몸담고 있는 인물은 한승주 대통령 비서실장과 한이헌 경제수석 비서관 이들은 모두 김영삼정부의 핵심인사로 거론되는 인물이다.
신군부가 실세로 떠올랐던 80년 당시 서울대 교수로 있으면서 국보위 재무위원에 발탁된 한 비서실장은 연세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영국 요크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딴 후 연대 출신으로는 드물게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로 채용됐다. 그는 88년까지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로 있으면서 미국 하버드대와 일본 동경대 등 세계 유명대학에서 객원교수로 강의한 실력파였다.
13대 총선때 민정당 공천으로 고향인 춘천에서 금배지를 단 그는 상공부장관을 역임한 후 김영삼정부에 들어와서도 주미대사를 거쳐 94년 12월부터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일하고 있다.
또 당시 경제기획원 정책조정과장으로 있던 한이헌 경제수석은 국보위 운영위 전문위원을 지냈다 한수석은 81년 다시 경제기획원으로 돌아가 예산심의관을,5공 말기에는 대통령 경제비서관을 거쳐 기획원 경제기획국장이라는 요직을 맡았다. 6공 들어와서는 민자당 전문위원으로 파견됐다가 김영삼 대표의 「경제 가정교사」를
했는데, 공정거래위원장과 기획원 차관을 지낸 뒤 현재는 문민정부의 경제정책에 큰 입김을 불어넣고 있다.
국보위에 참여했다는 사실만으로 이들을 비난하기는 어렵다. 대개의 경우 이들의 발탁은 능력을 높이 산 신 군부측에 의해 일방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의 삼엄한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이들의 참여는 본인의 의사와 관계가 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 다만 참여의 동기야 어떻든 5공화국 이후 이들이 탄탄한 출세가도를 달린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국가보위비 상대 책위원회」는 80년 전국 비상계험 하에서 행정과 사법 업무를 조정 .통제하던 초헌법적 기구로 신군부 정권찬탈의 전초기지였다. 국보위 설치령과 조직구성, 상임위원 및 분과위원 인선 등 실무작업은 권정달 당시 보안사정보처장의 주도하에 추진됐다. 권처장은 비상계엄 전국확대와 함께 비상기구를 설치해 기존의 정치활동을 규제할 필요가 있다는 방안을 80년 5월10일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에게 보고했다. 그리고 5월17일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결정하기 위해 모인 전군주요지휘관회의 석상에서 국보위 설치가 함께 결정됐다
권력탄찰의 전초기지, 국보위
그러나 최규하 대통령은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는 받아들였지만, 청와대를 무력화시키려는 국보위 설치안은 반대했다. 전두환사령관은 5월20일 다시 국보위 설치안을 건의, 마침내 최대통령으로부터 현행법규 범위 안에서 연구해보라는 허락을 받아냈다 권정달 처장은 새로 취임한 박충훈 국무총리서리를 찾아가 국보위 설치안을 보고하는 등 본격적인 작업에 나섰다
박 총리서리는 최대통령에게 「헌법을 고치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고 보고했지만,최대통령은 『총리가 보안사측에 얘기해보라』는 불쾌한 답변을 들어야 했다. 결국 우여곡절끝에 국보위 설치법안은 신군부의 양보로 비상기구가 아닌 대통령 자문 ·보좌기구 형태로 수정돼 5월27일 국무회의에서 의결됐다.
국보위가 공식 발족한 것은 광주민주화운동을 진압한 직후인 90년 5월31일. 당시 정부대변인 이광균 문화공보부장관은 내각과 계엄군 당국간의 긴밀한 협조체제를 위해 대통령 자문 보좌기관인 국보위를 설치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국보위는 사실상 내각을 통제하는 초헌법적 기구로 위상을 굳혀 나갔다.신군부는 국보위를 통해 .~「합법적으로」 권력을 행사하면서 권력찬탈의 기반을 다져나갔던 것이다.
80년 6월5일 최대통령은 전두환 위원장을 비롯한 임명직 위원 16명과 13개 분과 위원장 및 사무처장 등 당연직 위원 14명등 30명을 국보위 상임위원으로 임명했다.각 분과위의 상위기관이자 실무적인 총괄기능을 가진 상임위에는 18명의 현역 장군과 12명의 정부 각부처 고급공무원들이 포진돼 있었다. 이때부터 명목상으로나마 청와대에 쏠려 있었던 권력의 추는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을 중심으로하는 신군부쪽으로 기울었다.
국보위는 출범과 함께 구시대의 유물인 각종 비리와 부패를 뿌리뽑겠다면서 각 분야에서 일대 숙정 작업에 착수했다 국보위의 숙정조치가 각 분과별로 잇따라 발표됐으며, 특히 사회정화위원회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사회정화위는 권력형 부정부패를 일소한다는 목표 아래 사회의 지탄을 받거나 해바라기성 고급 공무원들에 대한 숙정을 전담했다.
모든 국가 업무는 국보위를 중심으로 운영됐으며, 상임위는 국정집행의 핵심기구이자 제5공화국 권력 엘리트들의 요람이 되었다. 과도기 비상기구였던 국보위는 국가보위 입법회의가 업무를 개시한 80년 10월27일까지 1백50여일 동안 제5공화국 창건의 기초를 다져나갔다.
국보위에서 활동했던 관계자들 대부분은 5긍 이후 눈부신 출세가도를 달리면서 사회 각계 각층에서 권력엘리트로 자리잡았다.
서슬퍼런 개혁을 담당했던 신군부 주역들은 군복을 벗고 그들의 손에 의해 골격이 갖춰진 5, 6 공화국에 참여해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또 관료나 학자 출신 일부는 국보위 활동후 본연의 업무로 돌아갔으나,5,6공 집권기간중 승진을 거듭했다
「5 · 18 특별법」 반대한 국보위출신 의원들
그러나 문민정부 집권 중반기에 터진 비자금정국이 결국 12 · 12 및 5 18 관련자들에 대한 과거청산 정국으로까지 이어지면서 역사가 다시 쓰여지고 있다. 국가전복음모를 분쇄하고 나라를 보호하기 위한「애국적 행동」이 불과 16년만에 정권찬탈을 위한 불법 군사반란으로 재평가받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신군부 쿠데타 주역은 물론 이들에게 5공 창건의 밑그림을 그려준 국보위 협조자들에 대한 역사적 심판도 이미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고 말았다. 12-12및 5.18사건 재수사에 착수한 검찰에 줄줄이 소환되거나 구속된 신군부 관련자들의 대다수가 국보위 출신들이다
먼저 그 모습은 정치권에처 극명하게 찾아볼 수 있다. 국회사무처는 지난 12월7일 신한국당이 제출한 「헌정질서 파괴범죄의 공소시효에 관한 특례법안」에 동참, 서명한 소속의원 1백11면의 명단을 공개한 바 있다 이 명단에 의하면 역으로 신한국당 현역의원으로서 과거 국보위 출신 인사들의 면면들 읽어볼 수 있다.
이 특별법 제안에 서명을 거부했거나 12 ·12. 및 5 · 18사건 관계로 검찰에 소환됐던 현역의원은 정호용 허화평 허삼수 금진호 이춘구 엽적무 안무혁 김한규 의원 등이다.
먼저 국보위 임명직 위원으로 뽑힌 정호용 의원은 한때 차기 대권을 꿈꾸기도 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자신이 몸담고 있는 당에서 자신을 포함한 신군부를 단죄하려는 특별법 제정 결정과 전두환씨 구속을 계기로 탈당 결심을 굳히고 시기선택만을 고려하고 있는 상태다. 정의원은 「정치에 환멸을느껴」 스스로 정계를 은퇴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주변의 전망이다.
또 5,6공의 「원죄」를 단죄하려는 김대통령 등 여권 핵심부에 대해 「좌익세력」 음모를 주장하면서 맞대응한 허화평의원은 국보위위원은 아니었지만, 당시 국보위상임위원장인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비서실장 출신이다 허의원은 만약 당 지도부가 자신을 강제로 쫓아낸다면 무소속으로 총선에 출마해서 5공 정통성과 치적을 내걸어 지역 유권자들의 심판을 받으려 할 것으로 보인다.
국보위 인사처장으로 사회정화위 간사까지 맡았던 허삼수의원도 신한국당에서 공천을 받기가 어려운 상태다 그는 국보위 폐쇄 직후 전두환대통령의 사정수석비서관을 거쳐 미국 스탠퍼드대 객원교수로 활동하다 87년 민정당 국책평가위원이 돼 본격적으로 정치에 참여했다
노태우씨와 동서지간인 금진호의원은 서울대 법대 출신으로 총무처에 들어가 80년 상공부 기회관리실장으로 재직 당시 노씨의 천거로 국보위 상공위원장으로 발탁됐다 금의원은 80년 곧바로 국무총리 비서실장, 81년 상공부차관을 거쳐 83년부터 3년 가까이 상공장관으로 출세가도를 달렸다. 그러나 5.6공 시절 재계를 주무르던 그도 지난 12월 노씨 비자금 사건과 관련, 비자금을 알선 중재한 혐의로 검찰에의해 불구속 기소됐다.
80년 당시 서슬퍼런 국보위 사회정화위원장 출신인 이춘구의원은 문민정부 들어서도 국회부의장과 민자당 대표위원을 역임하다 지금은 뒷자리로 물러나 있다. 81년 준장으로 예편한 이의원은 민정당 전국구 의원으로 11대 국회에 등원한 이후 12,13,14대 총선에서 내리 지역구 의원으로 당선했다
육사 14기 출신인 안무혁의원은 육사교수와 건설공병단장을 역임하고 80년 국보위 건설위원으로 참여한 인물이다. 81년 준장으로 예편한 안의원은 국세청장, 안기부장을 지냈고. 14대 국회에서 민자당 전국구 의원이 됐다
김한규의원은 72년 미캘리포니아주립대를 졸업하고 재미한미기독실업인 회장을 지내다 국보위 문공위 전문위원으로 발탁 됐다. 김의원은 흘트아동복지회장에 이어 장애자올림픽조직위 부위원장으로 있으면서 13대 국회에 진출했다. 95년에 총재 비서실장을 맡는 등 재선의원으로 활동하고있다.
이밖에 특별법 서명거부와 관계없이 집권여당에 몸담고 있는 국보위 출신으로는 차수명의원,정동우 박판제씨를 들 수 있다 차수명의원은 상공부 기계공업국장을 지내다 국보위 상공자원위원으로 차출됐다. 그는 이후 상공부 차관보를 역임한 후 84년 변호사 개업으로 잠시 공직에서 물러났다가 85년 특허청장으로 복귀했다 88
년에는 다시 민정당 울산남지구당 위원장을 맡아 정계에 진출했다.
현재 신한국당 국책자문위원으로 있는 정동우씨도 노동부에 근무하다 국보위 보사위원으로 발탁됐고, 이후 노동부 차관을 지냈다. 또 박판제 국책자문위원은 재무부 국고국장 시절 국보위 재무위원으로 들어간 이후 대통령 사정비서관과 조달청 차장 환경 청장 등을 엮임 했다.
국보위출신 상당수는 칩거상태
국보위 상임위원 출신으로 5,6공 치하에서 적지 않은 대우를 받아왔던 인물들 중 상당수는 이제 민간인 신분으로 칩거하고 있는 상태다 먼저 육사 11기 출신의 육군 소장으로 국보위 운영위원장과 입법회의 운영위원장을 지낸 이기백씨는 현재 특별한 직책이 없이 지내고 있다 그는 국보위 폐쇄 이후 다시 현역에 복귀 , 군단장 · 육참차장 ·군사령관에 이어 합참의장을 거쳐 85년 육군대장으로 예편하는 등 군인으로서는 최고의 길을 달렸다. 또 83년 10월9일 전두환 대통령의 버마방문에 수행 , 아웅산묘지 폭발사건으로 중상을 입었으나 재기해 국방장관에 취임한 입지전적인 이력도 있다.
국보위 법사위원장을 지낸 김영균씨는 86년 변호사를 개업한 이래 현업에 종사하고 있다. 그는 육사 11기 출신으로 서울대법대에 학사 편입, 62년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한 후 육군 법무 업무에 종사하다가 77년 준장으로 예편. 동방생명 감사로 지내다 민간인출신으로 국보위에 참여한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다. 국보위 해체후 81년부터 86년까지 법제처장을 지냈다.
제 외무부 기획관리실장에서 국보위 외무위원장으초 발탁된 노재원씨는 국보위 해체후 외교관으로서 화려한 가도를 달렸다.그는 외무부 차관 주캐나다 대사에 이어 김영삼정부가 들어선 93년에는 초대 주중국대사를 지내다 공직생활을 마감했다.
육군소장으로 국보위 냅무위원장을 역임한 이광雀씨는 81년 군에 복귀 , 83넌 중장으로 예편했다.이후 정계에 진출 13대 민자당 의원과 국회사무총장까지 지내기도 했으나 현재는 칩거하고 있는 상태다.
한미연합사 참모부장 시절 국보위 재무위원장을 치낸 심용희씨는 81년 전역후 정부투자기관인 대한재보험 사장과 국민연금관리공단 이사장을 지내다 세인의 관심권에서 사라졌다.
국보위 문공위원장을 지낸 오현복씨는 국보위 해체후 군에 복귀 , 군단장과 육참차장 · 군사령관 합참의장을 역임했고 88년에는 국방장관까지 올랐다. 93년 서을마사회장을 끝으로 공직에서 물러났다.
농수산부 차관보에서 국보위 농수산위원장으로 파견됐던 박종문씨는 농수산부장관을 지내다가 12대 국회에 민정당 전국구 의원으로 등원했었다. 해군본부 비서실장(해군 준장)으로 국보위 보사위원장을지낸 조영길씨는 81년 해군소장으로 예편했다. 그후 교통안전진흥공단 이사장을 거쳐 국무총리 비서실장, 관광공사 사장을 거쳐 93년 민자당 국책자문위원까지 맡았다.
육군 준장으로 국보위 교통체신위원장을 지 낸 이우재씨는 81년 예편, 11대에 전국구로 등원했다가 한국전기통신공사가 창설되면서 초대 사장으로 임명됐다. 주로 육군의 통신업무에 종사했던 이씨는 90년 체신부장관과 국민사격연맹 부회장을 끝으로 공직생활을 마감했다.
건설부 기획관리실장에서 국보위 건설위원장으로 참여한 이규호씨는 국보위 해체후 건설부 차관, 내무차관을 거쳐 건설부 장관까지 역임했다. 공무원 교육원 부원장에서 국보위 행정사무를 총괄하는 사무처장으로 발탁된 鄭寬溶씨는 이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사무처장, 청와대 사정수석 비서관. 총무처장관, 닉문부장관 등으로 재직하다가 농수산물유통공사 이사장을 끝으로 공직에서 물러났다
분과위원들은 현역에서 활동중
한편 당시 국보위 상임위 소속 실무 담당자들로서 각 부처의 실무책임을 맡았던 분과위원들은 공직에서 물러난후 사회 일선에서 다양하게 활동하고 있다.
국보위 운영위원이었던 안영화씨는 81년 대령으로 예편, 11대 국회운영위 전문위원 등을 거쳐 l2대 민정당 전국구로 금배지를 달았다. 안씨는 이후 89년 극동전선 부회장을 시작으로 재계에 진출, 신한피혁 사장을 거쳐 현재 신북산업 회장으로 경영활동을 하고 있다
80년 총무처 행정관리국 심의관 시절 국보위 운영위원으로 들어간 정문화씨는 이후 총무처 기획관리실장과 차관까지 승진했다. 현재는 한국지방행정연구원장으로 재직중.
국방부 검찰부장에서 국보위 법사위원으로 전역한 김용균씨는 이후 비슷한 성격의 국회 문공위 전문위원으로 남았다 국회사무처 행정차장을 거쳐 체육부 차관, 헌법재판소 사무차장까지 지낸 후 현재는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역시 현재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는 이종남씨는 법사위원으로 활동하다가 현업에 복귀한 후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 서울지검장을 거쳐 검찰총장,법무장관을 지내는 등 화려한 이력을 갖고있다.
검사 출신의 현홍주 당시 국보위 내무위원은 이후 국가안전기획부 제1차장으로 지내다가 l2대 국회에 민정당 전국구의원으로 등원했다 다시 법제처장을 거쳐 93년까지 주미대사를 지내다가 현재는 변호사로 촬동하고 있다 식
경찰 출신으로 국보위 내무위원이 되었던 김상기씨는 6공 정부에 들어서는 경북지사에 임명됐으나 부정과 관련, 구속되기도 했다. 지난 62년 행정고시에 합격 , 주로 세무공무원으로 있었던 趙寬行씨는 현재 한국보증보험 사장으로 재직중이다.
당시 최규하 대통령 밑에서 각료로 있었던 이유로 국보위 당연직 위원이 됐던 인물들은 최근 12 · 12사태 재수사에 따른 외부 노출을 회피한 채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박충훈 국무총리 서리 (이하 당시 직 책) ,김원기 부총리, 박동진 외무부장관(이하당시 직책) , 김종환 내무부장관, 오탁근 법무부장판, 주영복 국방부장관 이규호 문교부장관, 이팡표 문화공보부장관, 최광수 대통령비서실장 등 최규하대통령 밑에서 일했던 각료들은 내각에서 물러난 이후 최고 권력자로부터 일정한 「보상」을 받은 바 있다
당시 신군부 주도하에 국보위에 참여했던 사람들중에는 자발적으로 가담한 사람도 있었고, 신군부에 의해 일방적으로 발탁됐던 경우도 있다. 특히 당시 공무원으로 재직했던 인물들은 대부분 신군부가 지목해 차출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에 대해 당시 현직공무원에서 국보위에 발탁됐다가 이후 차관까지 지낸 H씨는 '각 부처별로 한명씩 공무원들이 차출돼 일을 했다 대부분 부처 내에서 유능하다는 평을 듣던 인물들이었다'고 말했다. H씨는 그들이 유능했기 때문에 국보위 해체 후 계속적으로 그능력을 인정받았다는 점도 분명히 있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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