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5.18 특별법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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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특별법 안된다.
다시 생각해보는 5.18 광주문제
이주천(원광대 사학과 교수)
80년 5월18일 광주는 유혈의 시작이었다 5 ·18광주의 비극의 원인이 무엇인가는 보는 관점과 이해관계에 따라 극단적으로 상반되지만 일반적으로 보아 12 · 12이후 군권을 장악한 신군부와 그것에 반대한 광주시민의 유혈대립이라는 데 대체로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결국 신군부와 광즉·시민의 대규모 충돌은 2백여명의 사망자와 1천여명의 부상자를 남긴 채 한국현대사에 잊혀질 수 없는 상흔을 그리고 말았다. 5 18은 가뜩이나 오랜 유신독재정권하의 깊어진 정치에 대한 국민적 불신감만 더욱 깊게 만들었다. 5 · 18은 또한 5공 군부정권의 탄생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5공청산은 88올림픽 이후 6공의 정치적 부담이 되었으나 13대 국회에서 전씨를 백담사로 유배하는 과정에서 노씨와 3김씨의 정치적 타협으로 정리가 되는 듯했다.
검찰 국민설득 실패
5 18의 상처는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각종 개혁조치로서도 결코 잊혀지는 사안은 아니었다. 5 · 18피해자들의 고소가 있었다. 1년 이상의 조사를 단행한 검찰은 지난 7월 기자회견에서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 "는 논리를 강조하면서 '기소권 없음 이라는 결정을 내렸고, 검찰의 발표에 실망한 학생들과 국민들의 분노는 요원의 불길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이것은 검찰의 주장이 국민들을 설득하는데 완전히 실패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만약 법률전문가들과 사전에 깊이 상의했으면, 이렇게 서툴게 처리하지
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청와대에는 정치전공과 학생운동권출신들은
많으나 법률을 전공한 인물이 드물다는 점과 청와대내의 대책회의나
심각한 토론은 결국 검찰의 수사결과를 청와대와 사전에 상의했다는
비밀누설의 소지가 다분히 있으므로 극소수의 측근들에게 전달되었을 뿐
깊은 토론든 하지 못했을 것이다.
재야변호사들은 검찰이 주장한 "공소권이 없다"는 것은 기소권의 남용으로 사법부를 정면으로 모욕한 처사라고 반발했다.이어 법과대학교 교수들은 이런 검찰의 태도는 '힘이 곧 정의'라는 이론을 하나의 법리로 인정하자는 제안과 다를 바가 없다고 반박하면서 민주사회의 법체제에 대해 모욕하는 처사라고 검찰의 주장을 정면으로 비판했다.국민들의 반응은 여론조사의 결과 과반수 이상이 5·18책임자들이 처벌되기를 요구하는 방향으로 나타났다.사실 5.18기소에 대한 모범답안은 검찰은 법대로 판단하여 기소하고 법원이 유질판결을 내리면 그때 가서 대통령이 정치 사회적 혼란을 고려해 특별사면 등의 조치를 취하는 것이 5.18의 모범 답안이었을 것이다.한국검찰은 미국의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닉슨대통령이 탄핵일보 직전까지 가서. 결국 사임했고, 대법원의 유죄판결을 받았으나. 포드대통령이 사면해 준 역사적 전례를 고려했어야 한다.
유죄판결후 특별사면이 '모범답안'
대학가에서 5 · I8서명작업에 들어 가는데 기폭제를 한 것이 고려대학교 교수들의 서명작업이다. 이것은 다른 대학에 번져 캠퍼스에 불길처럼 번지기 시작했고 학생운동권은 고기가 물을 만난 것처럼 맹렬한 활동을 전개했다. 대학가의 서명작업은 5 · 18책임자의 처벌과 그에 관한 특별법의 제정으로 압축되었다
이체 전국에선 서명작어이 진행되어 1만5천명이 서명했으며. 국민학교 교사까지 서명에 가담하였다.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자 교육부 박영식장관은 전국 총학장회의에서 5.18에 관한 교수들의 자제를 요청했고, 이로 인한 학사행정의 파행성을 경고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10월16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소속 1백여명은 '5. 18관련자 기소촉구대회'를 갖고 검찰청까지 가두시위를 벌였다. 또 이날 오전 한국대학총연합회 (한총련)소속 13명은 여의도 민자당사를 난입하여 농성을 벌이다가 경찰에 연행되었다
그러면 커다란 의문은 과연 검·찰은 어떻게 해서 그런 결정을 내렸으며 진정으로 이런 결정의 후유증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가 하는 점이다. 고소장을 접수한 검찰은 마지못해 수사를 단행했으나 5 · 18은 워낙 민감한 정치적 사안이라 1년이상에. 걸쳐 조사를 진행하였다.
검찰은 조사결과 신군부의 정권장악에 대한 시나리오를 발견하는 개가를 올렸고, 나아가 정승화 전육군참모총장의 연행시 전두환장군이 최대통령으로부터 사전재가를 받지 못했다고 결론지었다. 검찰은 결국 전두환측의 불법적 연행의 증거를 발견했고, 이것이 발단이 되어 12 · l2가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5 · 18은 신군부의 집권의도를 거부하는 광주시민들과 신군부의 무력충돌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반란죄가 성립되는 것이다.
검찰이 스스로 기소권을 포기한 중대한 정치적 이유는 청와대의 "어른"을 실망시켜드리지 않는 것이었을 것이고, 한국검찰에게 있어서 "어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것이 국민들의 여론을 존중하면서 법의 정의를 구현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다. 한국검찰과 사법부가 아직도 개혁의 도마위에 오르지 않은 것은 김영삼정권의 또하나의 미스테리이자 한국적 불행이다.
좌우간 사태를 유추해 보건데, 검찰은 사전에 조율을 통해 청와대와 의견조정을 하지 않았을리가 없다. 만약 검찰이 5 · 18주동자들을 내란죄와 양민학살 등의 죄목으로 유죄로 기소하여 대법원에 송치한다면 대법원은 전,노전직 대통령들을 재판정에 출두시켜야 한다. 그러면 여러가지로 어려운 정치적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집권층의 지나친 낙관이 사태 악화시켜
무엇보다 전, 노 두 전직대통령의 강한 현정권에 대한 불만이 김영삼대통령에게 대단한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무엇보다 88올림픽 이후 .5공청산을 둘러싸고 벌어진 여야의 정치적 타협에 관한 시비가 다시 여론의 도마위에 올려질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전. 노씨 측은 검찰의 기소에는 5.18피해자측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몰고가는 것이라는 불쾌감을 나타내고
이들은 10 ·26 이후 정승화육군참모총장의 기회주의적 태도를 수사하려는 과정에서 총격전이 발생하여 12 · 12 가 발생했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또 특히 전씨측은 5 · 18의 배경에 대해 재야세력과 무분별한 정권욕에 사로잡힌 야당지도자들의 불법장외투쟁과 선동정치가 집권층에 불안감을 조성하고 국가안보에 민감했던 군부를 자극했다는 주장을 한다.
그런데 김영삼정권은 탄생부터 태생적으로 6공시절에 3당통합의 덕분으로 정권을 재창출하게 되는 태생적 한계로 인해 전, 노 두 전직 대통령을 처벌하기 어려운 진퇴양난에 봉착하게 되는 것이다.
한국 검찰의 오랜 전통으로 보아 권력의 눈치를 먼저 살피는 것이 그들로서는 당연한 충성이었을 것이다. 여기에 청와대의 구체적 주문이 있었느냐 하는 점에 대해서는 증거가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검찰이 기자회견 전에 청와대에 그 내용에 대해 당연히 보고했을 것이고, 김 대통령과 청와대비서실에서는 여론의 반발을 예상했지만 검찰선에서 막아야 한다는 정치적 판단을 했을 것이다. 집권층은 사태를 지나치게 낙관했던 것이다.
만약 법률전문가들과 사전에 깊이 상의했으면, 이렇게 서툴게 처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청와대에는 정치전공과 학생운동권출신들은 많으나 법률을 전공한 인물이 드물다는 점과 청와대내의 대책회의나 심각한 토론은 결국 검찰의 수사결과를 청와대와 사전에 상의했다는 비밀누설의 소지가 다분히 있으므로 극소수의 측근들에게 전달되었을 뿐 깊은 토론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검찰의 의도는 통치 권자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검찰선에서 최소한의 비난을 감수하면서 사태를 종결시키려 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검찰의 과잉충성이 오히려 문제를 악화시킨 것이다. 검찰 수뇌부의 기소권포기의 결정은 내부에서 소장파 젊은 검사들의 거센 반발을 샀을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법률의 전문가이기 때문에 서툰 기소권포기로 어떤 결과가 올 것인가를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닐 것이다.
이런 와중에서 10월 초 노태우 전대통령은 경북고 동창회에 참석하여 5.18에 관한 망언으로 물의를 빚었다.
그는 5 · 18의 유혈참극은 중국의 문화대혁명과 비교하여 아무것도 아니라는 식의 태도를 보이면서 , 국가원수로서 행한 자신의 공로도 인정해 줄 것을 요구하고, 국가원로로서 대접을 받지 못하는 점에 대해 동창들에게 울분을 토했다고 한다.
다음날 한겨레신문의 1단기사에 노씨의 발언이 보도되고 저녁 방송에 나감으로써, 전국 대학에서 대학생들은 학내 집회에서 노씨의 발언을 규탄하는 대회를 가졌다. 노씨는 결국 여론의 압력에 못이겨 "사과성명"을 발표하였다 노씨의 발언을 분석해 보면 그의 역사지식에 대한 무지를 보면서 국가 최고통치자로서는 자질부족의 인물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첫째, 그는 중국의 문화대혁명과 한국의 5 · 18이 어떤 역사적 환경속에서 처리되었나는 모르는 것 같다. 중국의 경우, 문화대혁명은 중국사회주의 건설에 공헌한 당의 원로들을 제거하는 데 있어, 젊은 세대를 선동하여 몰아내었고, 수십만의 무지한 민중들을 주자파, 반동으로 몰아 처형했던 것이다. 그래서 복권한 등소평정권은 그때 문화대혁명을 주동한 총책임자였던 강청 등 4인방 세력들을 체포하여 법정에서 무기형을 선고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전 노씨의 경우 10 · 26에서 5 · 18에 이르는 과정에서 정치원로는 더욱 아니었고 대통령을 할 자격도 인정받은 상태는 아니었다. 오히려 두사람은 부정축재자나, 내란선동혐의 등으로 정치계의 원로를 강제 퇴진시키는 등으로 정계와 군의 위계질서를 무너뜨리고 무리하게 교대로 집권했었다는 과욕을 까맣게 잊었던 것이다
둘째, 5 · 18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 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6공정권은 한국현대사에서 태어나지 않았어야 하는 정권이었다는 데 양심의 가책이 없다는 점이다
만약 87년에 야당의 양 김씨들이 분열하지 않았다면 6공의 성립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의 광주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미봉책에 불과했다. 그는 재임시 특별법 등을 통해 광주문제를 해결하도록 노력했었다 그러나 이것은 국가공권력과 국민의 세금으로 만든 예산을 통한 선심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나 과연 현재 퇴임 후 그가 정기척으로 등산과 골프를 하면서 건강관리에 몰두하고 있다는 보도를 접하지만, 광주의 상처를 아물게 하기 위해 자신의 사재를 털어서 어떤 봉사활동을 해왔다는 지적이 국회에서도 거론되지 않는 것을 보면 광주시민들의 분노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5.18이슈 숨겨진 동기 정착히 파악해야
최근에 터진 노씨의 비자금액수를 보면서 국민의 분노를 상상하고 남는다 노씨는 10웜 i7일에 대국민사과문을 통해 5천여억원의 통치자금을 긁어모아 쓰다 남은 비자금이 1천7백억원에 이른다고 고백했다.
만약 그가 이 남은 비자금을 퇴임할 때 한국민주주의 발전과 5 · 18광주를 위해 써 달라고 고백성사했다면 오늘의 개인적 불명예와 불행은 없었을 것이다.
하기야 6공시절 노씨의 대통령재임 시절에 보인 KAL기 사건을 처리한 불공정한 태도에서 노씨의 이명에 대한 경시태도를 주목했어야 했다. 백여명의 무고한 인명을 앗아간 KAL기 폭파범 북한공작원인 쓸러리스트 김현
희를 법정 판결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감윽소 생활에 적응하기도 전에.살인의 대가가 얼마나 처참한 것인지를 채 반성하기도 전에 자살의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미인이며 아직도 처녀라는 동정심에서 , 또 북한에 대한 선전에 활용한다는 오도된 명분속에 오열하는 유가족들의 거센 항변도 물리치면서 6공정부왁 사법부는 그녀를 너무도 일찍 방면하였다.
방면 ·후 그녀는 국가의 포상을 받아 가면서 호의호식하였지만 사망한 가족들을 위해 별다른 사회봉사활동을 하지 않고 있다고 언론에서 지적된 적이 있었다
그녀의 비행기폭파가 한국의 보수중산층을 놀라게 하여 87년 대통령선거에서 노태우 후보가 양김씨를 누르 고 대통령에 당선되는 데 결과적으로 일등공신이 되었다고 해도 최소한 법치국가로서의 체통과 위엄을 지켰어야 했다
한 두명을 살인해도 최소한 무기징역인데 그녀는 하물며 백여명의 목숨을 뺏아간 살인범이 아니었던가? 그렇다고 해서 김영삼 정부가 6공시절의 대법원판사들을 대폭 물갈이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생리적으로 권력의 눈치에 기생하는 대법원판사들이 .5 · 18광주문제를 검사가 기소했다고 해서 소신있게 원칙을 세우면서 국민들과 광주시민들이 요구하는 '포청천'식 시원한 판결이 나을 것을 기대하는 것도 김현희 사건의 처리에서 알 수 있듯이 무리라고 볼 수 있다.
최근 5 · 18의 이슈화에서 정확하게 파악해야하는 것은 왜 이것이 다시 거세게 한국사회에 불려나오는 가에 대한 숨겨진 동기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일이다. 여기에는 한편으로는 과거의 청산을 주장하는 순수한 민족주의적 열정과 또 한편으로는 이것을 기회로 하여 사회운동의 주도권을 다시 확보하려는 재야세력의 계산된 전략적 의도가 한데 어우러져 있어서 국민들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고 있다.
한국현대사에서 남북체제를 비교해 볼 때, 한국의 지식인들이 북쪽의 공산 체제와 비교하여 가장 열등감을 느끼는 점은 북한 김일성정권은 해방 이후 일제잔재를 청산했는데. 남한의 이승만정권은 이것을 하지 못했다는 점인데 아직도 강의실에서, 저서에서, 방송인터뷰에서 지속적으로 남한의 체제를 비판해 왔다. 북한의 김일성은 자신의 독재정권의 강화를 위해 과거를 열심히 청산했지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거나. 애국적 동기에 친일적 요소를 청산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김일성독재정권은 봉건제도와 자본주의기반을 동시에 근본적으로 뿌리뽑고 조선공산당 중심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체제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일단의 숙청작업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점이 너무도 오랫동안 간과되고 있다 그 청산작업도 소련군의 강제적 추진력으로 가능했던 것이지 자신의 독자적 힘으로 달성한 것이 아니다. 김일성의 과거청산은 자주적으로, 또 자발적으로 달성된 것이 아니라 소련군이라는 외세의 힘을 업고 철저한 인권유린 속에 자행되었다
그러나 남한의 이승만정권이 좌익의 폭동에 시달리면서 공산당의 숙청과 반공을 최대의 국가목표로 삼았던 것은 해방이후 국가안보가 현실적 문제로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반공노선은 6 · 25전쟁 이후 더욱 강화되었고 이런 국가의 시책은 당연한 것이었다. 물론 이런 과정에서 불행하게도 미국의 '매카시선풍'처럼 '마녀사냥'식의 인권유린과 정적에 대한 탄압이 존재함으로써 장기집권에 악용된 측면도 있었다.
좌익에게 5 · 18은 하나의 수단
그러나 한국민주주의가 한꺼번에 서구식 민주주의로 발전할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마치 역사의 갑작스런 비약을 기대하는 것처럼 용이한 일이 아니다. 조선시대 봉건사회에서 근대사회로 이행되는 과정에서 일제의 36년의 잔혹한 장기간의 식민통치는 한국인의 전통적 미덕과 민주시민으로서의 정치교육의 가능성마저도 그 뿌리를 철저히 뽑아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외세가 넘겨준 해방과 3.8선의 분단, 그리고 좌우익의 투쟁으로 인한 사회혼란. 통한의 6 · 25전쟁 등 격동의 해방전후의 시대를 이제 여유를 가지고 그 시대의 상황에서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한국지식인들은 이번 5 · 18검찰불기소처분을 일제의 청산불발에 못지않는 '역사청산'의 과제로 부각시키고 있다 이들은 광복 후 친일파에 대한 처리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한국현대사가 얼마나 왜곡되었는가를 지적하고 제동포에 총부리를 겨눈 학살자들의 주역을 차례로 국가원수에 앉힌 부끄러운 역사를 후손에게 물려줄 수는 없다는 것이다
민주교수협의회는 8월24일 5 18특별법 촉구서명운동을 전개하였고 9월30일에는 전국의 서명교수들의 명단이 공개되고 정식으로 '5 · 18내란 주동자 구속 ·기소 및 특별법제정을 촉구하는 전국대학 서명교수 모임'을 발족시켰다
또 한편으로 5 · 18 이슈는 꺼져가는 학생운동권과 좌익세력에게는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생명수였다 지난번 상반기 내내 벌였던 각종 단발성 시위와 8 ·.15 방북투쟁이 대중적 호응을 받는데 실패했고, 갈수록 좌익운동권의 세력약화와 대중적 관심의 감소로 인해 대학내의 주도권 장악을 걱정하던 차에 검찰의 '기소권포기'라는 발표는 그들에게는 희생의 단비요, 사막의 오아시스였다 분명한 것은 좌익운동권에게는 5 · 18은 하나의 수단이요 결코 목적이 아니다
이 것은 세력확대의 기회이고 이것을 이용하여 운동세력을 강고히 하고 학내에서 주도권을 장악하여, 사회민주운동세력과 연대하여 사회변혁운동의 하나의 수단으로 줄기차게 활용하자는 것이다.
그러면 좌익운동권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소위 남한사회에서 '민중이 역사의 주인' 이 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고 이 목표가 달성될 때까지 가열차고 끊임없는 투쟁을 전개하는 것이다.
또 현재 진행되는 보수주의 논쟁에서 보수파를 바라보는 국민의 우호적 시각을 최소한 중입화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한 것이다. 그리고 단기적으로 5. 18문제를 내년 봄 총선까지 몰고가서 민자당의 패배로 연결시켜, 정국의 불안정을 유발시키고 그럼에 따라 현 정권의 정치적 양보를 얻어내겠다는 전략이다
YS, 비자금문제로 정국주도권 확보
따라서 우리 정치권이 5 · 18을 제대로 청산하지 않는 것이 그들의 생존과 투쟁의 대중성을 확보하는 데에 오히려 도움이 된다는 역설이 성립되는 것이다
이들이 언제 북한공산정권의 열악한 인권에 대한 시위를 하거나 대자보를 통해 문제를 제기한 적이 있었던가? 김일성도 동독의 실권자 호네커와의 회담에서 남한의 좌익운동권이 한번도 북한체제를 비판한 적이 없었음을 자랑삼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미 제국주의자들이 남한을 ,30년이상 지배하고 있지만 오늘날 남한의 학생들은 우리를 지지하고 있습니다.남한의 학생들은 오늘날까지 단 한번도 우리를 반대하는 시위를 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를 반대하는 시위를 조직하는 데 실패한 것입니다 반대로 남한의 학생들은 괴뢰정부를 반대하는 시위를 하고 있습니다 (월간조선 95년10월호 p.100)」
5· 18문제는 정계의 '뜨거운 감자'로 정파를 떠나 여야 모두에게 부담스런 사안임에 틀림없다. 이 문제에서 가장 곤혹스런 입장에 처한 쪽이 김영삼대통령과 민자당이다.
현집권당은 처음에는 사태의 변화를 관망했으나 수세적 차원은 결국 내년 선거에 큰 타격을 입는다고 표계산을 하고부터 적극적으로 검찰의 입장을 지지하는 쪽으로 강경선회하였다.
또 민자당은 6공 때 3김씨와 5 · 6공세력과의 정치적 타협을 상기시키고 있다. 특히 김대중씨의 발언, 죄를 확인하되 처벌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물고 늘어지는 전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김대통령이 개인적으로 상당한 정치적 부담을 안고 있다 검찰의 입장을 지지하자니 국민여론이 당혹스럽고,검찰의 입장을 반대하자니 검찰내부의 반발은 물론 89년의 정치적 타협을 '금과옥조' 로 여기는 전, 노씨 측으로부터의 어떤 반발을 받을지 전혀 예측할 수 없다.
자칫하면 그 자신의 정권을 언론사에 7공이 아닌 '문민정부'니 '김영삼정권' 이라고 불러달라고 함으로써 5. 6공과 차별화하려 했던 그의 트레이드 상표 '개혁' 대통령의 이미지는 자칫하면 위선적 정략가의 이미지로 추락할 수도 있는 것이다.
DJ, 대선전략에 타격
그런데 5 18로 인해 곤경에 처한 김대통령은 노씨의 비자금문제로 전국의 현안이 옮겨가자, 일단여론의 직접 화살을 피하면서 정국의 주도권을 다시 확보할 수 있는 기회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다 그것은 노씨의 비자금문제를 슬기롭게 해결한단면, 정국주도권의 탈환은 물론 정계개편을 추진할 힘을 얻을 수도 있다.
5 · 18문제 재발로 인해 가장 당황스런 진퇴양난의 입장에 처한 또 한 사람은 김대중 국민회의총재이다. 이미 국민회의측은 자체적으로 5 18관련 특별법안을 국회에 제출해 놓고 있다.그러나 그는 인미 아태재단이사장 시절 5 · 6공의 구여권세력을 포섭하였고, 국민회의 창당과정에서도 집권을 위해서 보수세력과 현정권에 소외된 구여권세력의 끌어안기가 시급함을 인식하여 좌우 양날개를 띄우는 집권전략을 수립하였다
이것이 소위 그의 "플러스 알파" 선거전략이다. 즉호남의 고전표에 10%만 더 유동표를 확보하면 대선에 승리할 수 있다는 그 나름대로의 치밀한 정치적 계산이다.
그 첫 시험대로 김대중 총재(당시 이사장)가 스카웃한 조순씨가 서울시장에 당선되었고. 민자당의 6 · 27참패를 연출하였으나 5· 18문제로 딜레마에 빠졌다.
만약 그가 5. !8문제에 검찰의 입장에 묵시적으로 찬성하면 자신의 근거지인 광주시민과 학생운동권세력으
로부터 심한 비판을 받게 되고, 검찰의 입장에 적극적으로 반대한다면 현정권과 정치적 마찰은 물론,5.6공 세력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켜 구여권을 흡수하는 스카웃전선에 막대한 차질을 가져오게 됨은 물론 이미 4선에 도전장을 낸 그의 "플러스 알파' 대선전략에 상당한 타격을 예상할 수 있다.
민주당은 5· 18책임자에 대한 사법처리를 적극적으로 주장하지만 분당이후. 당내분의 수습이 발등의 불이라 효과적인 대여공세를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박계동의원의 노씨 비자금폭로로 정국의 주도권을 확보하면서 5.18보다 비자금문제에 매달려 정국의 주도권을 계속 유지하여 그동안의 당세약화를 만회하려는 움직임이다
자민련은 5 · IS문제에 대한 지나친 공세는 국민회의에 정국의 주도권을 넘겨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여 야당의 공조체제에 큰 미련을 두고 있지는 않다. 5 · 18의 이슈는 보수세력을 바탕으로한 자당이 큰 이득이 될 것이 없다는 판단하에 유연한 태도를 보이면서, 5 · 18문제의 확대를 크게 원치 않았다
JP, 5 18확대 불원
그러나 지나친 미온책이 내년 봄 국회의원선거에서 20, 30대의 지지를 얻지 못할까봐 그것이 걱정되어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김종필 총재는 측근들의 조언을 받아들여 자신의 선명성도 부각하기 위해
5 · 18 처리에 대해 보다 강경한 태도로 선회하고 있다. 그러나 김종필총재는 노씨와의 정치적 거래에 의혹을 받으면서 갑자기 행보가 불안해졌다.
전두환, 노태우씨는 5 18의 재등장에 대해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이미 지나간 일인데 이 문
제가 다시 불거져 나온 이유에 대해 집권층에 의혹과 불신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이미 해결된 사안을 다시 걸고 넘어진다고 현 정권의 무책에 분노하고 있다
전씨는 백담사에 갔다왔다는 면죄부의 심리와 노씨는 김영삼 개인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노씨의 비자금이 폭로됨으로써 공동대응의 한 축이 와해되었고,j · 6공세력중심의 신당창당과 세력구축도 어렵게 되었다
그러면 마땅한 5 · 18해법은 무엇인가? 법률전문가인 이회창 전 국무총리도 이 물음에 답하기를 "자신도 현 정부가 어떻게 처리 할 지 모르겠다"고 세미나에서 솔직히 토로하면서 야당이 주장하는 특별법제정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님을 간접적으로 시사했다. 그만큼 5 18의 해법은 정치적, 법적 차원에서 그리 쉽지 않다. 그 이유는 (1)정치적으로 이미 89년 노씨와 양 김씨 등이 12월l5일 청와대에서 장시간의 심야회담에서 5공 청산문제를 종결하기로 전격적으로 합의했기 때문이다.
특별법제정 간단한 문제아니다
5 · 18광주문제와 5공비리에 대한 책임으로 전두환 전대통령이 국회에 나와 서면 질의에 대해 1회 녹화답변하고, 정호용의원이 일체의 책임을 지고 의원직을 사퇴하는 등의 몇가지 추가조건이 종결의 조건이었다.
결국 전씨는 자원해서 백담사로 유배를 떠났다. (2)법적차원에서. '특별법' 의 제정이 문제를 일거에 해결해 줄것 같지만 그리 간단하지 않다. 왜냐하면 당장 소급 입법 금지의 헌법정신에 위배되어 위헌소송이 제기되기 때문이다. 특별법을 만들자면 먼저 헌법을 개정하여 입법의 근거를 마련해서 헌법위반의 소지를 없애야 한다.
결국 5 18을 해결할 유일한 정치 세력인 3김씨들이 이미 노씨와 청와대에서 합의했으므로 국민들에게 별로 할 말이 있을 수 없다. 첫단추가 잘못 꿰어진 것이다 다만 이제 남은 일은 헌법재판소의 최종판결을 지켜보아야한다 5· 18이 처음부터 여야 정치가들의 정략적 이용물로 전락되었고, 이제 또다시 여론에 관계없이 정국주도권의 확보라는 카드로 재양되는 점을 경계해야한다
그런데 정치권은 5. 18문제는 이제 뒷전이고 노씨의 '비자금문제' 로 전국이 가마 속처럼 들끓고 있다 5공청산에 합의한 3김씨들은 노씨의 비자금에 관한 국민적 의혹을 불식하기 위한 '고해성사'를 해서 국민의 이해를 구해야 하고. 검찰은 이번 노씨의 남은 비자금을 철저히 파헤쳐서한 점의 의혹도 없이 진실을 밝혀내어 노씨에 대해 사법처리하는 것이 어쩌면 5· 18불기소처분에서 땅에 떨어진 검찰의 명예와 위신을 회복하는 길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5. I8문제의 해결은 불가능한가? 노씨의 비자금파동은 5 · I8 해법에 대한 도움을 주지 않는 별개의 사안인가? 대답은 그와 정반대이다 노씨의 비자금파동은 5. 19광주문제와 3당통합의 정치적 타협과 연결고리를 가진다. 만약 노씨의 비가금정국을 현집권층이 슬기롭게 처리한다던 5. I8에 대한 해법을 저절로 처리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다. "
미증유의 위기에 정치인 대오각성해야
필자가 이 시점에서 제안하고 싶은것은 ( 1)노씨의 남은 비자금을 전액몰수하여 그 중 일부를 10. 26 이후와 5 · 18에 이르기까지 연계되어 고통을 받는 사상자와 그 유가족들을 위해 건전하게 사용하고, (2)전직국가원수라는 예우조항을 노씨의 경우 완전히 박탈하고 노씨를 반드시 사법처리해야한다
그렇게 된다면, 간접적인 의미에서 ,5 · 18의 해결에 대한 하나의 진전이 된다고 생각된다. 물론 (1)의 조항에 해당되는 피해자들은 5 · 18의 광주시민과 학생들에만 국한할 것이 아니라 10. 26부터 ,5. · 18에 이르는 과정에서 희생한 군 경찰 등 기타 공무원조직에서 일하다가 당한 많은 사상자도 포함시 켜야 한다.
이들은 상사의 명령에' 따라 자신의 업무를 수행하려 했으므로 정상이 참작되어야 한다. 그 때 이들의 정치적 입장이 어느쪽에 있었든간에, 과연 정부가 지금까지 정당한 보상을 해 주었는지를 다시 한번 확인해서 억울한 피해자가 없도록 선처해야한다.
최근 언론에서 필리핀 마르코스 대통령이 축재한 재산을 몰수하여 그의 재임시절에 좌익으로 몰려 고통받은 사람들에 대한 보상에 사용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현재 정국은 5 · 18과 연이어 터진 노씨의 비자금문제로 정국은 한치도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혼란의 정국으로 빠져들고 있다.이것은 정치의 '블랙흘'현상으로 10 · 26 이후 한국정치의 최대의 위기이다 자칫하면 정치권 전반의 共減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기성정치체제의 붕괴는 한편으로는 신진정치세대의 부상을 기대하는 믿음의 기회로 부상될 수도 있지만 아직도 정치적으로 경험과 훈련이 부족한 신진세대를 바라보는 국민적 불안은 정치적 위기로 연결되고 있고, 또 지금까지 사회전반의 구석구석에 침투한 좌익세력의 발호에 더없이 좋은 명분과 풍부한 영양가를 제공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사회적 위기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미증유의 정치적.사회적 위기를 맞이하여 여야할 것 없이 기성 정치인들의 뼈를 깎는 대오각성과 아울러 또한 국민들의 이성적이고도 냉정한 분별력이 어느 때보다 절실히 요청된다고 하겠다.
다시 생각해보는 5.18 광주문제
이주천(원광대 사학과 교수)
80년 5월18일 광주는 유혈의 시작이었다 5 ·18광주의 비극의 원인이 무엇인가는 보는 관점과 이해관계에 따라 극단적으로 상반되지만 일반적으로 보아 12 · 12이후 군권을 장악한 신군부와 그것에 반대한 광주시민의 유혈대립이라는 데 대체로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결국 신군부와 광즉·시민의 대규모 충돌은 2백여명의 사망자와 1천여명의 부상자를 남긴 채 한국현대사에 잊혀질 수 없는 상흔을 그리고 말았다. 5 18은 가뜩이나 오랜 유신독재정권하의 깊어진 정치에 대한 국민적 불신감만 더욱 깊게 만들었다. 5 · 18은 또한 5공 군부정권의 탄생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5공청산은 88올림픽 이후 6공의 정치적 부담이 되었으나 13대 국회에서 전씨를 백담사로 유배하는 과정에서 노씨와 3김씨의 정치적 타협으로 정리가 되는 듯했다.
검찰 국민설득 실패
5 18의 상처는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각종 개혁조치로서도 결코 잊혀지는 사안은 아니었다. 5 · 18피해자들의 고소가 있었다. 1년 이상의 조사를 단행한 검찰은 지난 7월 기자회견에서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 "는 논리를 강조하면서 '기소권 없음 이라는 결정을 내렸고, 검찰의 발표에 실망한 학생들과 국민들의 분노는 요원의 불길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이것은 검찰의 주장이 국민들을 설득하는데 완전히 실패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만약 법률전문가들과 사전에 깊이 상의했으면, 이렇게 서툴게 처리하지
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청와대에는 정치전공과 학생운동권출신들은
많으나 법률을 전공한 인물이 드물다는 점과 청와대내의 대책회의나
심각한 토론은 결국 검찰의 수사결과를 청와대와 사전에 상의했다는
비밀누설의 소지가 다분히 있으므로 극소수의 측근들에게 전달되었을 뿐
깊은 토론든 하지 못했을 것이다.
재야변호사들은 검찰이 주장한 "공소권이 없다"는 것은 기소권의 남용으로 사법부를 정면으로 모욕한 처사라고 반발했다.이어 법과대학교 교수들은 이런 검찰의 태도는 '힘이 곧 정의'라는 이론을 하나의 법리로 인정하자는 제안과 다를 바가 없다고 반박하면서 민주사회의 법체제에 대해 모욕하는 처사라고 검찰의 주장을 정면으로 비판했다.국민들의 반응은 여론조사의 결과 과반수 이상이 5·18책임자들이 처벌되기를 요구하는 방향으로 나타났다.사실 5.18기소에 대한 모범답안은 검찰은 법대로 판단하여 기소하고 법원이 유질판결을 내리면 그때 가서 대통령이 정치 사회적 혼란을 고려해 특별사면 등의 조치를 취하는 것이 5.18의 모범 답안이었을 것이다.한국검찰은 미국의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닉슨대통령이 탄핵일보 직전까지 가서. 결국 사임했고, 대법원의 유죄판결을 받았으나. 포드대통령이 사면해 준 역사적 전례를 고려했어야 한다.
유죄판결후 특별사면이 '모범답안'
대학가에서 5 · I8서명작업에 들어 가는데 기폭제를 한 것이 고려대학교 교수들의 서명작업이다. 이것은 다른 대학에 번져 캠퍼스에 불길처럼 번지기 시작했고 학생운동권은 고기가 물을 만난 것처럼 맹렬한 활동을 전개했다. 대학가의 서명작업은 5 · 18책임자의 처벌과 그에 관한 특별법의 제정으로 압축되었다
이체 전국에선 서명작어이 진행되어 1만5천명이 서명했으며. 국민학교 교사까지 서명에 가담하였다.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자 교육부 박영식장관은 전국 총학장회의에서 5.18에 관한 교수들의 자제를 요청했고, 이로 인한 학사행정의 파행성을 경고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10월16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소속 1백여명은 '5. 18관련자 기소촉구대회'를 갖고 검찰청까지 가두시위를 벌였다. 또 이날 오전 한국대학총연합회 (한총련)소속 13명은 여의도 민자당사를 난입하여 농성을 벌이다가 경찰에 연행되었다
그러면 커다란 의문은 과연 검·찰은 어떻게 해서 그런 결정을 내렸으며 진정으로 이런 결정의 후유증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가 하는 점이다. 고소장을 접수한 검찰은 마지못해 수사를 단행했으나 5 · 18은 워낙 민감한 정치적 사안이라 1년이상에. 걸쳐 조사를 진행하였다.
검찰은 조사결과 신군부의 정권장악에 대한 시나리오를 발견하는 개가를 올렸고, 나아가 정승화 전육군참모총장의 연행시 전두환장군이 최대통령으로부터 사전재가를 받지 못했다고 결론지었다. 검찰은 결국 전두환측의 불법적 연행의 증거를 발견했고, 이것이 발단이 되어 12 · l2가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5 · 18은 신군부의 집권의도를 거부하는 광주시민들과 신군부의 무력충돌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반란죄가 성립되는 것이다.
검찰이 스스로 기소권을 포기한 중대한 정치적 이유는 청와대의 "어른"을 실망시켜드리지 않는 것이었을 것이고, 한국검찰에게 있어서 "어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것이 국민들의 여론을 존중하면서 법의 정의를 구현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다. 한국검찰과 사법부가 아직도 개혁의 도마위에 오르지 않은 것은 김영삼정권의 또하나의 미스테리이자 한국적 불행이다.
좌우간 사태를 유추해 보건데, 검찰은 사전에 조율을 통해 청와대와 의견조정을 하지 않았을리가 없다. 만약 검찰이 5 · 18주동자들을 내란죄와 양민학살 등의 죄목으로 유죄로 기소하여 대법원에 송치한다면 대법원은 전,노전직 대통령들을 재판정에 출두시켜야 한다. 그러면 여러가지로 어려운 정치적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집권층의 지나친 낙관이 사태 악화시켜
무엇보다 전, 노 두 전직대통령의 강한 현정권에 대한 불만이 김영삼대통령에게 대단한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무엇보다 88올림픽 이후 .5공청산을 둘러싸고 벌어진 여야의 정치적 타협에 관한 시비가 다시 여론의 도마위에 올려질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전. 노씨 측은 검찰의 기소에는 5.18피해자측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몰고가는 것이라는 불쾌감을 나타내고
이들은 10 ·26 이후 정승화육군참모총장의 기회주의적 태도를 수사하려는 과정에서 총격전이 발생하여 12 · 12 가 발생했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또 특히 전씨측은 5 · 18의 배경에 대해 재야세력과 무분별한 정권욕에 사로잡힌 야당지도자들의 불법장외투쟁과 선동정치가 집권층에 불안감을 조성하고 국가안보에 민감했던 군부를 자극했다는 주장을 한다.
그런데 김영삼정권은 탄생부터 태생적으로 6공시절에 3당통합의 덕분으로 정권을 재창출하게 되는 태생적 한계로 인해 전, 노 두 전직 대통령을 처벌하기 어려운 진퇴양난에 봉착하게 되는 것이다.
한국 검찰의 오랜 전통으로 보아 권력의 눈치를 먼저 살피는 것이 그들로서는 당연한 충성이었을 것이다. 여기에 청와대의 구체적 주문이 있었느냐 하는 점에 대해서는 증거가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검찰이 기자회견 전에 청와대에 그 내용에 대해 당연히 보고했을 것이고, 김 대통령과 청와대비서실에서는 여론의 반발을 예상했지만 검찰선에서 막아야 한다는 정치적 판단을 했을 것이다. 집권층은 사태를 지나치게 낙관했던 것이다.
만약 법률전문가들과 사전에 깊이 상의했으면, 이렇게 서툴게 처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청와대에는 정치전공과 학생운동권출신들은 많으나 법률을 전공한 인물이 드물다는 점과 청와대내의 대책회의나 심각한 토론은 결국 검찰의 수사결과를 청와대와 사전에 상의했다는 비밀누설의 소지가 다분히 있으므로 극소수의 측근들에게 전달되었을 뿐 깊은 토론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검찰의 의도는 통치 권자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검찰선에서 최소한의 비난을 감수하면서 사태를 종결시키려 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검찰의 과잉충성이 오히려 문제를 악화시킨 것이다. 검찰 수뇌부의 기소권포기의 결정은 내부에서 소장파 젊은 검사들의 거센 반발을 샀을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법률의 전문가이기 때문에 서툰 기소권포기로 어떤 결과가 올 것인가를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닐 것이다.
이런 와중에서 10월 초 노태우 전대통령은 경북고 동창회에 참석하여 5.18에 관한 망언으로 물의를 빚었다.
그는 5 · 18의 유혈참극은 중국의 문화대혁명과 비교하여 아무것도 아니라는 식의 태도를 보이면서 , 국가원수로서 행한 자신의 공로도 인정해 줄 것을 요구하고, 국가원로로서 대접을 받지 못하는 점에 대해 동창들에게 울분을 토했다고 한다.
다음날 한겨레신문의 1단기사에 노씨의 발언이 보도되고 저녁 방송에 나감으로써, 전국 대학에서 대학생들은 학내 집회에서 노씨의 발언을 규탄하는 대회를 가졌다. 노씨는 결국 여론의 압력에 못이겨 "사과성명"을 발표하였다 노씨의 발언을 분석해 보면 그의 역사지식에 대한 무지를 보면서 국가 최고통치자로서는 자질부족의 인물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첫째, 그는 중국의 문화대혁명과 한국의 5 · 18이 어떤 역사적 환경속에서 처리되었나는 모르는 것 같다. 중국의 경우, 문화대혁명은 중국사회주의 건설에 공헌한 당의 원로들을 제거하는 데 있어, 젊은 세대를 선동하여 몰아내었고, 수십만의 무지한 민중들을 주자파, 반동으로 몰아 처형했던 것이다. 그래서 복권한 등소평정권은 그때 문화대혁명을 주동한 총책임자였던 강청 등 4인방 세력들을 체포하여 법정에서 무기형을 선고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전 노씨의 경우 10 · 26에서 5 · 18에 이르는 과정에서 정치원로는 더욱 아니었고 대통령을 할 자격도 인정받은 상태는 아니었다. 오히려 두사람은 부정축재자나, 내란선동혐의 등으로 정치계의 원로를 강제 퇴진시키는 등으로 정계와 군의 위계질서를 무너뜨리고 무리하게 교대로 집권했었다는 과욕을 까맣게 잊었던 것이다
둘째, 5 · 18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 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6공정권은 한국현대사에서 태어나지 않았어야 하는 정권이었다는 데 양심의 가책이 없다는 점이다
만약 87년에 야당의 양 김씨들이 분열하지 않았다면 6공의 성립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의 광주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미봉책에 불과했다. 그는 재임시 특별법 등을 통해 광주문제를 해결하도록 노력했었다 그러나 이것은 국가공권력과 국민의 세금으로 만든 예산을 통한 선심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나 과연 현재 퇴임 후 그가 정기척으로 등산과 골프를 하면서 건강관리에 몰두하고 있다는 보도를 접하지만, 광주의 상처를 아물게 하기 위해 자신의 사재를 털어서 어떤 봉사활동을 해왔다는 지적이 국회에서도 거론되지 않는 것을 보면 광주시민들의 분노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5.18이슈 숨겨진 동기 정착히 파악해야
최근에 터진 노씨의 비자금액수를 보면서 국민의 분노를 상상하고 남는다 노씨는 10웜 i7일에 대국민사과문을 통해 5천여억원의 통치자금을 긁어모아 쓰다 남은 비자금이 1천7백억원에 이른다고 고백했다.
만약 그가 이 남은 비자금을 퇴임할 때 한국민주주의 발전과 5 · 18광주를 위해 써 달라고 고백성사했다면 오늘의 개인적 불명예와 불행은 없었을 것이다.
하기야 6공시절 노씨의 대통령재임 시절에 보인 KAL기 사건을 처리한 불공정한 태도에서 노씨의 이명에 대한 경시태도를 주목했어야 했다. 백여명의 무고한 인명을 앗아간 KAL기 폭파범 북한공작원인 쓸러리스트 김현
희를 법정 판결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감윽소 생활에 적응하기도 전에.살인의 대가가 얼마나 처참한 것인지를 채 반성하기도 전에 자살의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미인이며 아직도 처녀라는 동정심에서 , 또 북한에 대한 선전에 활용한다는 오도된 명분속에 오열하는 유가족들의 거센 항변도 물리치면서 6공정부왁 사법부는 그녀를 너무도 일찍 방면하였다.
방면 ·후 그녀는 국가의 포상을 받아 가면서 호의호식하였지만 사망한 가족들을 위해 별다른 사회봉사활동을 하지 않고 있다고 언론에서 지적된 적이 있었다
그녀의 비행기폭파가 한국의 보수중산층을 놀라게 하여 87년 대통령선거에서 노태우 후보가 양김씨를 누르 고 대통령에 당선되는 데 결과적으로 일등공신이 되었다고 해도 최소한 법치국가로서의 체통과 위엄을 지켰어야 했다
한 두명을 살인해도 최소한 무기징역인데 그녀는 하물며 백여명의 목숨을 뺏아간 살인범이 아니었던가? 그렇다고 해서 김영삼 정부가 6공시절의 대법원판사들을 대폭 물갈이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생리적으로 권력의 눈치에 기생하는 대법원판사들이 .5 · 18광주문제를 검사가 기소했다고 해서 소신있게 원칙을 세우면서 국민들과 광주시민들이 요구하는 '포청천'식 시원한 판결이 나을 것을 기대하는 것도 김현희 사건의 처리에서 알 수 있듯이 무리라고 볼 수 있다.
최근 5 · 18의 이슈화에서 정확하게 파악해야하는 것은 왜 이것이 다시 거세게 한국사회에 불려나오는 가에 대한 숨겨진 동기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일이다. 여기에는 한편으로는 과거의 청산을 주장하는 순수한 민족주의적 열정과 또 한편으로는 이것을 기회로 하여 사회운동의 주도권을 다시 확보하려는 재야세력의 계산된 전략적 의도가 한데 어우러져 있어서 국민들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고 있다.
한국현대사에서 남북체제를 비교해 볼 때, 한국의 지식인들이 북쪽의 공산 체제와 비교하여 가장 열등감을 느끼는 점은 북한 김일성정권은 해방 이후 일제잔재를 청산했는데. 남한의 이승만정권은 이것을 하지 못했다는 점인데 아직도 강의실에서, 저서에서, 방송인터뷰에서 지속적으로 남한의 체제를 비판해 왔다. 북한의 김일성은 자신의 독재정권의 강화를 위해 과거를 열심히 청산했지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거나. 애국적 동기에 친일적 요소를 청산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김일성독재정권은 봉건제도와 자본주의기반을 동시에 근본적으로 뿌리뽑고 조선공산당 중심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체제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일단의 숙청작업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점이 너무도 오랫동안 간과되고 있다 그 청산작업도 소련군의 강제적 추진력으로 가능했던 것이지 자신의 독자적 힘으로 달성한 것이 아니다. 김일성의 과거청산은 자주적으로, 또 자발적으로 달성된 것이 아니라 소련군이라는 외세의 힘을 업고 철저한 인권유린 속에 자행되었다
그러나 남한의 이승만정권이 좌익의 폭동에 시달리면서 공산당의 숙청과 반공을 최대의 국가목표로 삼았던 것은 해방이후 국가안보가 현실적 문제로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반공노선은 6 · 25전쟁 이후 더욱 강화되었고 이런 국가의 시책은 당연한 것이었다. 물론 이런 과정에서 불행하게도 미국의 '매카시선풍'처럼 '마녀사냥'식의 인권유린과 정적에 대한 탄압이 존재함으로써 장기집권에 악용된 측면도 있었다.
좌익에게 5 · 18은 하나의 수단
그러나 한국민주주의가 한꺼번에 서구식 민주주의로 발전할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마치 역사의 갑작스런 비약을 기대하는 것처럼 용이한 일이 아니다. 조선시대 봉건사회에서 근대사회로 이행되는 과정에서 일제의 36년의 잔혹한 장기간의 식민통치는 한국인의 전통적 미덕과 민주시민으로서의 정치교육의 가능성마저도 그 뿌리를 철저히 뽑아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외세가 넘겨준 해방과 3.8선의 분단, 그리고 좌우익의 투쟁으로 인한 사회혼란. 통한의 6 · 25전쟁 등 격동의 해방전후의 시대를 이제 여유를 가지고 그 시대의 상황에서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한국지식인들은 이번 5 · 18검찰불기소처분을 일제의 청산불발에 못지않는 '역사청산'의 과제로 부각시키고 있다 이들은 광복 후 친일파에 대한 처리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한국현대사가 얼마나 왜곡되었는가를 지적하고 제동포에 총부리를 겨눈 학살자들의 주역을 차례로 국가원수에 앉힌 부끄러운 역사를 후손에게 물려줄 수는 없다는 것이다
민주교수협의회는 8월24일 5 18특별법 촉구서명운동을 전개하였고 9월30일에는 전국의 서명교수들의 명단이 공개되고 정식으로 '5 · 18내란 주동자 구속 ·기소 및 특별법제정을 촉구하는 전국대학 서명교수 모임'을 발족시켰다
또 한편으로 5 · 18 이슈는 꺼져가는 학생운동권과 좌익세력에게는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생명수였다 지난번 상반기 내내 벌였던 각종 단발성 시위와 8 ·.15 방북투쟁이 대중적 호응을 받는데 실패했고, 갈수록 좌익운동권의 세력약화와 대중적 관심의 감소로 인해 대학내의 주도권 장악을 걱정하던 차에 검찰의 '기소권포기'라는 발표는 그들에게는 희생의 단비요, 사막의 오아시스였다 분명한 것은 좌익운동권에게는 5 · 18은 하나의 수단이요 결코 목적이 아니다
이 것은 세력확대의 기회이고 이것을 이용하여 운동세력을 강고히 하고 학내에서 주도권을 장악하여, 사회민주운동세력과 연대하여 사회변혁운동의 하나의 수단으로 줄기차게 활용하자는 것이다.
그러면 좌익운동권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소위 남한사회에서 '민중이 역사의 주인' 이 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고 이 목표가 달성될 때까지 가열차고 끊임없는 투쟁을 전개하는 것이다.
또 현재 진행되는 보수주의 논쟁에서 보수파를 바라보는 국민의 우호적 시각을 최소한 중입화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한 것이다. 그리고 단기적으로 5. 18문제를 내년 봄 총선까지 몰고가서 민자당의 패배로 연결시켜, 정국의 불안정을 유발시키고 그럼에 따라 현 정권의 정치적 양보를 얻어내겠다는 전략이다
YS, 비자금문제로 정국주도권 확보
따라서 우리 정치권이 5 · 18을 제대로 청산하지 않는 것이 그들의 생존과 투쟁의 대중성을 확보하는 데에 오히려 도움이 된다는 역설이 성립되는 것이다
이들이 언제 북한공산정권의 열악한 인권에 대한 시위를 하거나 대자보를 통해 문제를 제기한 적이 있었던가? 김일성도 동독의 실권자 호네커와의 회담에서 남한의 좌익운동권이 한번도 북한체제를 비판한 적이 없었음을 자랑삼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미 제국주의자들이 남한을 ,30년이상 지배하고 있지만 오늘날 남한의 학생들은 우리를 지지하고 있습니다.남한의 학생들은 오늘날까지 단 한번도 우리를 반대하는 시위를 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를 반대하는 시위를 조직하는 데 실패한 것입니다 반대로 남한의 학생들은 괴뢰정부를 반대하는 시위를 하고 있습니다 (월간조선 95년10월호 p.100)」
5· 18문제는 정계의 '뜨거운 감자'로 정파를 떠나 여야 모두에게 부담스런 사안임에 틀림없다. 이 문제에서 가장 곤혹스런 입장에 처한 쪽이 김영삼대통령과 민자당이다.
현집권당은 처음에는 사태의 변화를 관망했으나 수세적 차원은 결국 내년 선거에 큰 타격을 입는다고 표계산을 하고부터 적극적으로 검찰의 입장을 지지하는 쪽으로 강경선회하였다.
또 민자당은 6공 때 3김씨와 5 · 6공세력과의 정치적 타협을 상기시키고 있다. 특히 김대중씨의 발언, 죄를 확인하되 처벌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물고 늘어지는 전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김대통령이 개인적으로 상당한 정치적 부담을 안고 있다 검찰의 입장을 지지하자니 국민여론이 당혹스럽고,검찰의 입장을 반대하자니 검찰내부의 반발은 물론 89년의 정치적 타협을 '금과옥조' 로 여기는 전, 노씨 측으로부터의 어떤 반발을 받을지 전혀 예측할 수 없다.
자칫하면 그 자신의 정권을 언론사에 7공이 아닌 '문민정부'니 '김영삼정권' 이라고 불러달라고 함으로써 5. 6공과 차별화하려 했던 그의 트레이드 상표 '개혁' 대통령의 이미지는 자칫하면 위선적 정략가의 이미지로 추락할 수도 있는 것이다.
DJ, 대선전략에 타격
그런데 5 18로 인해 곤경에 처한 김대통령은 노씨의 비자금문제로 전국의 현안이 옮겨가자, 일단여론의 직접 화살을 피하면서 정국의 주도권을 다시 확보할 수 있는 기회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다 그것은 노씨의 비자금문제를 슬기롭게 해결한단면, 정국주도권의 탈환은 물론 정계개편을 추진할 힘을 얻을 수도 있다.
5 · 18문제 재발로 인해 가장 당황스런 진퇴양난의 입장에 처한 또 한 사람은 김대중 국민회의총재이다. 이미 국민회의측은 자체적으로 5 18관련 특별법안을 국회에 제출해 놓고 있다.그러나 그는 인미 아태재단이사장 시절 5 · 6공의 구여권세력을 포섭하였고, 국민회의 창당과정에서도 집권을 위해서 보수세력과 현정권에 소외된 구여권세력의 끌어안기가 시급함을 인식하여 좌우 양날개를 띄우는 집권전략을 수립하였다
이것이 소위 그의 "플러스 알파" 선거전략이다. 즉호남의 고전표에 10%만 더 유동표를 확보하면 대선에 승리할 수 있다는 그 나름대로의 치밀한 정치적 계산이다.
그 첫 시험대로 김대중 총재(당시 이사장)가 스카웃한 조순씨가 서울시장에 당선되었고. 민자당의 6 · 27참패를 연출하였으나 5· 18문제로 딜레마에 빠졌다.
만약 그가 5. !8문제에 검찰의 입장에 묵시적으로 찬성하면 자신의 근거지인 광주시민과 학생운동권세력으
로부터 심한 비판을 받게 되고, 검찰의 입장에 적극적으로 반대한다면 현정권과 정치적 마찰은 물론,5.6공 세력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켜 구여권을 흡수하는 스카웃전선에 막대한 차질을 가져오게 됨은 물론 이미 4선에 도전장을 낸 그의 "플러스 알파' 대선전략에 상당한 타격을 예상할 수 있다.
민주당은 5· 18책임자에 대한 사법처리를 적극적으로 주장하지만 분당이후. 당내분의 수습이 발등의 불이라 효과적인 대여공세를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박계동의원의 노씨 비자금폭로로 정국의 주도권을 확보하면서 5.18보다 비자금문제에 매달려 정국의 주도권을 계속 유지하여 그동안의 당세약화를 만회하려는 움직임이다
자민련은 5 · IS문제에 대한 지나친 공세는 국민회의에 정국의 주도권을 넘겨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여 야당의 공조체제에 큰 미련을 두고 있지는 않다. 5 · 18의 이슈는 보수세력을 바탕으로한 자당이 큰 이득이 될 것이 없다는 판단하에 유연한 태도를 보이면서, 5 · 18문제의 확대를 크게 원치 않았다
JP, 5 18확대 불원
그러나 지나친 미온책이 내년 봄 국회의원선거에서 20, 30대의 지지를 얻지 못할까봐 그것이 걱정되어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김종필 총재는 측근들의 조언을 받아들여 자신의 선명성도 부각하기 위해
5 · 18 처리에 대해 보다 강경한 태도로 선회하고 있다. 그러나 김종필총재는 노씨와의 정치적 거래에 의혹을 받으면서 갑자기 행보가 불안해졌다.
전두환, 노태우씨는 5 18의 재등장에 대해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이미 지나간 일인데 이 문
제가 다시 불거져 나온 이유에 대해 집권층에 의혹과 불신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이미 해결된 사안을 다시 걸고 넘어진다고 현 정권의 무책에 분노하고 있다
전씨는 백담사에 갔다왔다는 면죄부의 심리와 노씨는 김영삼 개인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노씨의 비자금이 폭로됨으로써 공동대응의 한 축이 와해되었고,j · 6공세력중심의 신당창당과 세력구축도 어렵게 되었다
그러면 마땅한 5 · 18해법은 무엇인가? 법률전문가인 이회창 전 국무총리도 이 물음에 답하기를 "자신도 현 정부가 어떻게 처리 할 지 모르겠다"고 세미나에서 솔직히 토로하면서 야당이 주장하는 특별법제정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님을 간접적으로 시사했다. 그만큼 5 18의 해법은 정치적, 법적 차원에서 그리 쉽지 않다. 그 이유는 (1)정치적으로 이미 89년 노씨와 양 김씨 등이 12월l5일 청와대에서 장시간의 심야회담에서 5공 청산문제를 종결하기로 전격적으로 합의했기 때문이다.
특별법제정 간단한 문제아니다
5 · 18광주문제와 5공비리에 대한 책임으로 전두환 전대통령이 국회에 나와 서면 질의에 대해 1회 녹화답변하고, 정호용의원이 일체의 책임을 지고 의원직을 사퇴하는 등의 몇가지 추가조건이 종결의 조건이었다.
결국 전씨는 자원해서 백담사로 유배를 떠났다. (2)법적차원에서. '특별법' 의 제정이 문제를 일거에 해결해 줄것 같지만 그리 간단하지 않다. 왜냐하면 당장 소급 입법 금지의 헌법정신에 위배되어 위헌소송이 제기되기 때문이다. 특별법을 만들자면 먼저 헌법을 개정하여 입법의 근거를 마련해서 헌법위반의 소지를 없애야 한다.
결국 5 18을 해결할 유일한 정치 세력인 3김씨들이 이미 노씨와 청와대에서 합의했으므로 국민들에게 별로 할 말이 있을 수 없다. 첫단추가 잘못 꿰어진 것이다 다만 이제 남은 일은 헌법재판소의 최종판결을 지켜보아야한다 5· 18이 처음부터 여야 정치가들의 정략적 이용물로 전락되었고, 이제 또다시 여론에 관계없이 정국주도권의 확보라는 카드로 재양되는 점을 경계해야한다
그런데 정치권은 5. 18문제는 이제 뒷전이고 노씨의 '비자금문제' 로 전국이 가마 속처럼 들끓고 있다 5공청산에 합의한 3김씨들은 노씨의 비자금에 관한 국민적 의혹을 불식하기 위한 '고해성사'를 해서 국민의 이해를 구해야 하고. 검찰은 이번 노씨의 남은 비자금을 철저히 파헤쳐서한 점의 의혹도 없이 진실을 밝혀내어 노씨에 대해 사법처리하는 것이 어쩌면 5· 18불기소처분에서 땅에 떨어진 검찰의 명예와 위신을 회복하는 길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5. I8문제의 해결은 불가능한가? 노씨의 비자금파동은 5 · I8 해법에 대한 도움을 주지 않는 별개의 사안인가? 대답은 그와 정반대이다 노씨의 비자금파동은 5. 19광주문제와 3당통합의 정치적 타협과 연결고리를 가진다. 만약 노씨의 비가금정국을 현집권층이 슬기롭게 처리한다던 5. I8에 대한 해법을 저절로 처리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다. "
미증유의 위기에 정치인 대오각성해야
필자가 이 시점에서 제안하고 싶은것은 ( 1)노씨의 남은 비자금을 전액몰수하여 그 중 일부를 10. 26 이후와 5 · 18에 이르기까지 연계되어 고통을 받는 사상자와 그 유가족들을 위해 건전하게 사용하고, (2)전직국가원수라는 예우조항을 노씨의 경우 완전히 박탈하고 노씨를 반드시 사법처리해야한다
그렇게 된다면, 간접적인 의미에서 ,5 · 18의 해결에 대한 하나의 진전이 된다고 생각된다. 물론 (1)의 조항에 해당되는 피해자들은 5 · 18의 광주시민과 학생들에만 국한할 것이 아니라 10. 26부터 ,5. · 18에 이르는 과정에서 희생한 군 경찰 등 기타 공무원조직에서 일하다가 당한 많은 사상자도 포함시 켜야 한다.
이들은 상사의 명령에' 따라 자신의 업무를 수행하려 했으므로 정상이 참작되어야 한다. 그 때 이들의 정치적 입장이 어느쪽에 있었든간에, 과연 정부가 지금까지 정당한 보상을 해 주었는지를 다시 한번 확인해서 억울한 피해자가 없도록 선처해야한다.
최근 언론에서 필리핀 마르코스 대통령이 축재한 재산을 몰수하여 그의 재임시절에 좌익으로 몰려 고통받은 사람들에 대한 보상에 사용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현재 정국은 5 · 18과 연이어 터진 노씨의 비자금문제로 정국은 한치도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혼란의 정국으로 빠져들고 있다.이것은 정치의 '블랙흘'현상으로 10 · 26 이후 한국정치의 최대의 위기이다 자칫하면 정치권 전반의 共減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기성정치체제의 붕괴는 한편으로는 신진정치세대의 부상을 기대하는 믿음의 기회로 부상될 수도 있지만 아직도 정치적으로 경험과 훈련이 부족한 신진세대를 바라보는 국민적 불안은 정치적 위기로 연결되고 있고, 또 지금까지 사회전반의 구석구석에 침투한 좌익세력의 발호에 더없이 좋은 명분과 풍부한 영양가를 제공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사회적 위기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미증유의 정치적.사회적 위기를 맞이하여 여야할 것 없이 기성 정치인들의 뼈를 깎는 대오각성과 아울러 또한 국민들의 이성적이고도 냉정한 분별력이 어느 때보다 절실히 요청된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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