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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자료실

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5.18특별법 안된다.- 5.18과 김대중의 후광

본문

요즘 '5·18특별법을 제정하라'는여론에 밀려 시끄럽던중에 전직 대통령 노태우씨의 비리까지 터져 나와 나라안이 온통 소용돌이 치고 있다. 김대중씨는 중요 현안이 생길 때마다 늘 그랬듯이 이번에도 예외없이 사건의 중심에 들어가 있다. 기자는 5 · 18을 전후하여 깁대중씨와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던 함윤식씨를 찾았다. 그는 1987년 6월 김대중씨의 전모를 밝힌 베스트셀러 '동교동 24시' 로 유명하다.

5.18특별법 안된다.

5.18과 김대중의 후광

이명인(본지기자)

5월 11일 정읍에서 선동연설

-김대중씨는 80년 5월 11일 전북 정음에서 열린 동학제에 참석하여 광주사태를 선동하는 연설을 한 것으로 아는데 이날의 연설내용과 분위기를 말씀해 주십시오.

▲지금으로서는 잘 기억나는 것은 없으나 대략 '동학혁명이 처음부터 폭력주의가 아니라 상소를 하고 주의주장을 건의하였으나 관철되지 않아 봉기한 것으로 오늘날의 민주주의와 마찬가지' 이며 . '박정권 18년간 가장 큰 과오는 신라통일 이후 지방색을 다시 불러일으킨 것' 이라고 하는 등 선동적이고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연설을 했습니다

김대중씨는 그날'시간관계상 현지인사들과 따로 회합한 사실은 없으나 연설이 끝나고 청중들이 귀경하는 김 대중씨의 차량행렬 따라 시위와 구호를 외치는 등 분위기는 한껏 고조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5 · 18전 학생대표 등 만난 김대중씨

-80년 계엄사 발표에 따르면 김대중씨는 정동년씨에게 광주사태를 일으키도록 지시하고 거사자금으로 5백만원을 주었다고 했는데 김대중씨는 그후 이 사실을 부인하고 88년 13대 국회 개원 직후 대표 연설에서 '정동년씨와는 처음부터 전혀 모르는 사이이고 미국 갔다와서 처음 만났다'고 하여 그와의 관련설을 전면 부인했는데요.

그리나 당시 군 검찰관으로 재판에 관여했던 정기용 변호사는 88년 11월의 국회 청문회에서 김씨가 체포된 후 모든 사실으 순순히 시인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정선생'이라 부르며 "정선생. 날 살려만 줘요. 난 죽지만 않으면 언제든지 재기할 수 있소. 만일 그렇게만 된다면 정선생의 은혜는 꼭 갚겠소 "하며 통사정을 했다고 하는데 - .

▲그 얘기는 저도 후문으로만 들었습니다. 80년 재판은 김대중씨와 다른 피고인들이 분리되어 받았기 때문에 저도 김대중씨의 재판광경을 직접 보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제 기억으로는 정동년씨는 분명히 5 · 18이 나기 전 동교동을 두 번 다려갔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정씨와의 만남은 늘 그렇듯이 방안에서 두 사람만 있는 가운데 이루어졌기 때문에 무슨 말들이 오고 갔는지, 또 거사자금이 전달되었는지는 제가 직접 보지 못했기 때문에 뭐라 말할 수는 없습니다 또 정동년씨 뿐만 아니라 전남대와 조선대의 학생대표 10여명이 5. 18 직전 두 차례에 걸쳐 동교등을 다녀간 사실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상식적으로 5백만원을 줬다고 해서 그런 어마어마한 사태를 인위적으로 일으킬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80년 당시 김상현, 조연하씨등 측근 참모들과 많은 사람들이 너무 강경일변도로 나가면 군부가 개입할 빌미를 줄 수 있으니 당분간은 조용히 있는게 좋겠다' 고 했으나 김대중씨는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양심이 아니다'고 이를 일축해버리고 장외 투쟁으로만 치달았습니다.

김대중 과격노선 군개입 불러

김대중씨는 80년 3월 26일의 YMCA연설을 시작으로 하여 한신대, 동국대 등에서 선동적인 연설로 일관하여 집회가 끝나고 나면 데모로 연결되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여기에는 김씨 측에서 동원한 청중들이 단단히 한 몫을 한 것은 물론입니다. 이들은 연설도중 군데군데에서 '옳소' 와 박수를 연발하며 분위기를 잡고 청중들을 흥분시켰습니다.

특히 YWCA집회에서 김대중씨는 미국대통령 토마스제퍼슨이 한 민주주의는 그 나라 국민들의 피를 먹고 자

란다'는 말을 인용하여 과격하고 선동적인 분위기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 때의 연설내용은 '민족혼과 더불어' 라는 소책자로 출간되기도 했습니다. 분명한 것은 5 · 18이 누군가의 각본에 의해 일어난 건지는 모르겠으나 5 18이 일어나도록 상황을 몰고 간 사람은 김대중씨라는 사실입니다. 최근에 전두환씨도 검찰에 제출한 답변서에서 밝혔지만 저는 그 때 김대중씨의 과격한 노선이 없었다면 군이 개입할 명분은 없었다고 확신합니다.

-김대중씨는 80년 5월을 민중운동의 결정적 시기로 보고 조성우, 심재권, 장기표, 이현배씨 등 학생운동 출

신자들에게 매달 20만원씩의 활동비를 지급하고 구체적인 임무를 부여한 후 그 결행시기를 5월 중순경으로 결정한 뒤 정부전복 후 과도내각 역할을 맡게될 '한국민주제도연구소' 를 구성한 후 소장에 이문영, 이사장에는 예춘호씨를 임명하고 일부인사들로부터는 서둘러 전문위원 취임승낙서를 받기도 했습니다.

5월 19일까지 시한부 '선전포고'

5월 12일에는 북악파크호텔에서 한승헌, 이문영, 이해동, 예춘호, 서남동, 문익환, 심재권, 계훈제, 김종완,이현배, 장기표씨 등이 참석한 가운데 전략회의까지 마친 후 최규하 대통령 정부에게 비상계엄의 즉각해제, 신현확 국무총리의 퇴진. 정부 개헌심의위원회의 즉각해체 등을 요구하고 5월19일까지 확답을 하지 않으면 실력행사에 들어가겠다고 하는 등 공공연히 선전포고까지 한 걸로 되어 있는데요.

▲10만여명의 학생들이 모여 학생데모의 절정을 이루었던 5월 15일의 서을역앞 집회 때 동교동은 크게 고무되어있었고 김대중씨의 비서들은 모두 다 서울역으로 달려 나가 동교동에는 단 1명의 비서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이들을 통해 현장의 상황은 속속 동교동으로 보고되었습니다. 동교동에는 저만 남아 쉴새없이 걸려오는 이들의 전화를 받기에 바빴습니다.

-88년에 서울대 교수로 있던 노재봉씨가 "광주사태는 김대중씨의 외곽을 때리는 노련한 기술"이라고 말하여

큰 파문을 일으킨 적이 있는데 과연 노씨가 말한 김대중씨의 노련한 기술' 이란 무엇을 염두에 두고 한 말 같습니까.

▲글쎄 저도 노재봉씨 생각은 잘 모르겠지만 아마 김대중씨가 근본적으로 의회민주주의자라기보다는 민중혁명에 의한 집권을 지향하는 그의 정치노선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김대중씨는 그 때 전국적인 민중봉기가 일어나면 군부 타도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김대중씨의 과격한 정치노선은 80년 3월 26일 YWCA에서 행한 연설전문을 기록한 '민족혼과 더불어' 라는 소 책자에 자세히 나타나 있습니다. "

-이번에는 최근에 정치권과 재야 운동권에서 재기되고 있는 5 · 18특별법 제정문제에 관해서 질문을 드릴까 합니다 공소시효 논란으로 검찰이 기소를 거부하자 특별법을 제정해서라도 꼭 기소를 해야한다는 일부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金大中 설칠 명분 없애야 한다.

▲특별법 제정에 대해서 만큼은 저도 구태여 그것이 부당하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5 17의 장본인인 전두환,

노태우씨는 어떤 형태로든 당연히 처벌을 받았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국민화합 차원에서 뒤에 가서 특별사면을 시키는 것은 별개로 하더라도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공소시효문제로 그냥 넘어가지 말고 일단 처벌을 했으면 지금처럼 여론이 들끓고 김대중씨가 설쳐댈 수 있는 명분도 없었을 것 아닙니까.

그 점에 대해서는 저도 아쉽게 생각합니다. 김대중씨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는 몰라도 이 문제만큼은 꼭 무슨 거래 때문만은 아닐 겁니다.

지금은 세상이 많이 바뀌어 국민들도 그렇게 어리석지가 않습니다. 설사 자신이 뭔가 거래를 하고 싶어도 현실적으로 쉽지가 않을 겁니다

고정간첩과도 만난 김대중

-김대중씨는 해방 후 좌익활동을 한 사실이 있다고 알려져 있고 본인도 스스로 밝힌 적이 있습니다. 가까이서 지켜본 김대중씨의 사상적 성향을 판단해 보신적이 있으신지요

▲사실 그때는 특별히 신경을 쓰지않아 잘 몰랐지만 지금와서 어렴풋이 생각해 보면 대강은 알 것 같습니다. 김대중씨 말로는 자신은 해방후 呂運亨씨 산하의 건국준비위원회에 가입하면서 정치활동을 시작했는데 혈기왕성한 청년시절에 아무것도 모르고 그길만이 애국하는 길이라 믿고 뛰어들었는데 나중에 보니 그게 아닌 것 같아 2년만에 탈퇴했다고 했습니다.

정계입문을 좌익단체에서 시작한 것입니다. 그 후로도 김씨의 정치행적에서 사상적으로 냄새가 좀 나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이건 제가 모 중진화가로부터 직접 들은 얘긴데, 김대중씨는 67년 6 · 8선거 때 임자도에서 고정간첩으로 활동하던 정태묵과 만난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 중진화가는 현재도 살아계신분인데 그 분은 원래 정태묵의 동생 정태일과 절친한 친구여서 선거기간 중에 정태묵의 집에서 머문 적이 있는데 그 때 그 집에서 김대중씨가 정태묵과 두어 차례 만나는 걸 보고 들었다고 합니다.

정태묵과 김대중씨는 목포상고 선후배 관계였습니다. 물론 무슨 말들이 오고 갔는지. 자금을 받았는지는 모르지만 만났던 것 만큼은 분명하다고 합니다.

그 후 정태묵은 임자도를 거점으로하여 활동하는 고정간첩임이 드러나 체포되어 처형당했는데 북한을 10여차례나 왕래한 사실이 있다고 합니다:'

사상적으로 문제있는 건 확실

일설에는 그 당시를 중앙정보부도 김대중씨가 간첩 정태묵과 만났다는 걸 알았으나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뒷

날을 위한 포석으로 이를 덮어두는 바람에 그냥 넘어갔다는 말도 있는데 - .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저는 잘 모르기 때문에 뭐라 말할 수 없습니다. 김대중씨는 그후로도 고려연방제 등을 주장하는 등 북한을 찬양. 고무하는 발언을 여러차례 했고. 특히 89년의 서경원의원 간첩사건에 이르러서는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

간첩 서경원이 김일성으로부터 받아온 돈 중에 1만불을 김대중씨가 받았다느니 안 받았다느니 말들이 많았지만 그 당시 서경원이 북한에 다녀온 사실을 그의 주위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상황에서 당총재인 김대중씨가 과연 몰랐을까 하는 점을 생각하면 석연찮은 점이 있어요.

서경원이가 과연 북에 가기 전에 김대중씨와 일언반구 상의도 없이 갔을까, 또 김일성을 만나고 와서도 보고한 번 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은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요,

그 전에 한민통 활동과 관련해서도 한민통은 분명히 조총련 계열 인사들이 만든 단체입니다. 이런 단체에서 그를 의장으로까지 추대했다는 것은 보통 문제가 아니지요. 물론 본인은 거부했다고 하지만 그거야 그 뒤에 상황이 급변하니까 그랬을거고 여하간 이러저러한 일들로 봤을 때 사상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임은 확실합니다. "

그러면 이렇게 사상적으로 문제가 있는 분이 만약 집권을 하게 된다면 국가경영에 어떠한 차질이 있으리라고 생각해 보신 적은 있으십니까

▲국가적으로 엄청난 혼란이 있을 겁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그런데 그 때 서경 원으로부터 1만불 받은 혐의가 있어 경찰에서 밤샘조사까지 받았지만 기소는 되지 않았거든요. 오히려 당시 평민당에서는 노태우 정권에 대해 공안정국을 조성한다면서 역공을 가하기 까지 했는데

정치적 흥정에 좌우된 국가공권력

▲글쎄 그게 참 문제가 있는 겁니다.돈을 받았든 안받았든 간에 법적으로는 끝까지 시비를 따져 봐야 하는데 그러지를 못했으니 국가 공권력이 정치적 흥정에 의해 그런식으로 좌지우지 돼도 되는 건지 참.

그런데 그 해 그 직전에 중간평가 때문에 나라가 왜 시끄러웠거든요. 중간평가를 해야 된다 말아야 된다 떠들다가 결국은 안하고 그냥 넘어갔는데 우습게도 정부보다도 김대중씨와 평민당이 더 앞에 나서서 중간평가자체를 위헌이라고 반대했거든요.

당내 율사출신의원까지 동원해가면서 말이예요. 김대중씨가 기소가 되지 않았던 것은 그러한 정치적인 밀월관계도 고려가 됐을 겁니다

그런데 그 때 중간평가란 건 위헌 여부를 따지기 전에 노태우씨가 대선기간 중 국민들에게 직접 공약한 사항아닙니까.

▲그러게요. 대통령이 공약한 것을 김대중씨가 더 앞장서서 기자회견까지 가지면서 반대의견을 밝히고 해서 그런 식으로 얼렁뚱땅 넘어간 것은 도덕적으로도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결과적으로 중간평가가 유야무야 돼버린데는 김대중씨가 일등공신이 된 셈이지요. 그걸로 해서 여당측으로부터 엄청난 자금을 받았다는 말도 있었어요.

-그러면 그 때 김대중씨의 불기소처분은 법적으로 무지여서라기보다는 그러한 정치적 거래의 산물이란 말씀 입니까

▲당연히 그렇지요 다시 말하지만 야당 총재인 김대중씨가 소속의원이 김일성이를 만나고 왔는데도 갈 때도

몰랐다, 올 때도 몰랐다. 돈을 받은 것 같은데도 안 받았다고 오리발을 내밀면 그보다 더 아리송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이건 중요한 일입니다. 언젠가는 꼭 밝혀내야 할 일이에요. 언론의 책임도 큽니다.

-최근에 김대중씨가 지난 92년 대선당시 노태우씨로부터 20억원을 받았다고 자진해서 밝혔는데요.

20억만 받았다, 누가 믿나?

▲저를 포함해서 4천만 국민중 누구도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어디 액수가 20억 뿐이겠습니까. 그리고 여러 사람이 지적하고 있는데 그 사람이 그것을 밝힌 타이밍을 한번 따져 봐야 합니다. 그 사람은 북경방문 도중에 노태우씨가 비자금과 관련한 기자회견을 갖는다는 얘기를 듣고 거기서 노태우씨가 비자금을 준 사람들을 폭로할 줄 알고 미리 부랴부랴 기자회견을 갖고 20억을 받았다고 실토했습니다.

그건 국내에 있는 노태우씨에게 액수를 20억으로 낮추자고 암시를 준 것이라고 봐요.

-그렇지만 노태우씨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함구해 버렸는데 그렇다면 김대중씨쪽에서 보면 오히려 손해를

본것 아닙니까.

▲그렇지요. 차라리 안한 것 보다도 못하게 돼버렸지요. 아마 지금쯤은 땅이라도 치고 싶을 겁니다 그리고 하나 더 발언내용만 가지고 따져 봅시다

처음에 김대중씨가 돈을 받은 사실을 박지원 대변인은 "절대 그런 사실 이 없다'고 부인했는데 김대중씨는 나중에 가서야 20억원을 받아 당비로 썼다고 했습니다.

당 관계자들이 모두 몰랐다고 했는데 당비로 썼다면 적어도 관계된 사람들만은 돈 받은 사실을 알고 있었어야할 게 아닙니까.

아무도 몰랐다면 결국 혼자서 다 썼다는 얘기가 되잖습니까. 이것만 보더라도 김대중씨의 말이 얼마나 거짓인가는 충분히 증명이 되고도 남습니다.

-그런데 김대중씨는 자기가 노태우씨에게 돈 받은 것은 노태우씨가 그 때 민자당을 탈당했기 때문에 큰 문제가 안된다는 식으로 말했다는데 - .

▲말장난 하지 말라고 해. 그 돈이 어떤 돈이오. 김대중씨가 어떤 사람입니까. 전라도의 대표적인 인물이고 민주화의 화신인 양 되어 있는 김대중씨가 어떻게 5 · 18의 장본인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인 노태우씨한테 돈을 받을수 있나 이거 있을 수 있는 얘기요?

그리고 김대증씨가 말하기를 자기는 노태우씨 돈이 부정축재한 돈인줄 몰랐다고 하는데 현직 대통령이 돈이 어디서 나서 20억씩이나 모은단 말이오.분명히 말하지만 김대중씨는 더 이상 국민을 우롱하지 말기 바랄니다.

만나도 아는 척 안하는 金大中씨

-김대중씨와 결별하고 나서 다시 만난 적은 없습니까

▲아마 87년이었을 겁니다. 그 때 여의도백화점 1211호에 제 사무실이 있었는데 갓 출범한 평민당이 그 건물 의 5,6층으로 들어 왔어요.

하루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있는데 어떤 청년이 헐레벌떡 달려와서 '같이 올라가자'며 엘리베이터를 붙들고 뒤를 쳐다보고 있었어요. 나는 누군가 싶어 앞을 쳐다보니 김대중씨가 나타나는 거예요.

그 순간 김대중씨와 눈을 마주쳤는데 이 사람이 나를 보더니 얼굴이 백짓장처럼 하얗게 변하는거야. 그러더니 아무말 없이 돌아서서 잠자코 있어요.김대중씨는 문 입구에 서고 나는 벽에 등을 기대고 서서 한참동안 그의 뒷모습만 보고 있었어요.

그 순간 그와 함께 한 십여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갔어요. 온갖 상념이 다 떠오르더구만. 싸우고 이별은 했지만 내 인생의 황금기를 그 사람에게 아낌없이 다 바쳐가며 충성을 다했는데. 그래도 '오랜만이구먼. 잘 있었나' 하는 말 한마디라도 해줘야 되는 것 아닙니까.

참으로 야속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갑자기 죽이고 싶도록 미운 생각이 들더군요. 지금도 내 사무실이여기 있고 국민회의 사무실이 바로 코 앞에 있는데 참 그 사람하고 악연은 악연이가 봐요.

-여기 국민회의가 들어오고 나서 회장님이 사무실을 옮길 예정이라는 신문보도가 나간 적이 있는데요.

▲글쎄 어떻게 해서 그런 보도가 나갔는지 나도 잘 모르겠어도. 내가 여기 들어온 지 2년이 다 됐는데 갑자기 국민회의가 들어온 것만 해도 나로서는 신경이 쓰이는데 뚱딴지같이 모 일간지에 그런 보도가 나간거야.

그래서 내가 그 기사를 쓴 기자를 불러다가 항의를 했어요, 나하고는 한 번 만나보지도 않고 어떻게 그런 식으로 기사를 쓸 수 있느냐고 따졌지, 물론 누군가의 주문이 있었겠지만·.

호남인들도 변하고 있다

-지난 92년 14대 총선 때 목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신 적이 있지도.그 때 표는 많이 받으셨습니까

▲표야 뭐 크게 많이 받지는 못했 고 ‥‥‥ 내가 사실 김대중씨 텃밭에서 당선되려고 출마했겠습니까 사실은 '동교동 24시'가 전라도 일대로는 책이 단 한부도 배부가 되지 않았어요, 아예 들어 가지도 못했어도.

그런 곳에서 내가 출마한 것은 김대중씨를 하느님처럼 떠받들고 있는 호남 사람들에게 그의 실상을 정착히 알려 모두들 환상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했던 거야. 그래서 나는 세 차례의 합동유세와 한 차례의 개인유세를 통해 그 사람에 관해서 있는 그대로를 정확히 알리기 위해 최대한 애를 썼어요. 지금이야 그 사람에 대해서 알려질 만큼 알려져 있지만 아직도 그 사람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무지몽매한 호남인들에게 진실을 알리고자 한 것이지요.

선거유세에서 나는 김대중씨의 정치행로를 절대로 기대하지 말라 그 사람은 분명 민주주의보다는 사리사욕에 빠져 있는 사람이다. 더 이상 그를 믿고 두고두고 후회할 선택은 하지 않는게 좋다' 고 열변을 토했습니다..

의외로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나는 선거 유세 기간 도중 단 한 차례도 야유를 받지 않았어요. 그런데 기가 막힌 건 당시 민자당이나 국민당 후보도 김대중씨에 대해 비난은 커녕 칭찬 일변도의 연설만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 때 야유를 받지 않았다는 건 저자의 의견에 동조해서라기보다는 저 사람은 그래도 김대중씨 밑에서 가장 고생을 많이 했으니까 저 정도는 말해도 괜찮다고 보는 일종의 동정심리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꼭 그런건 아니었을 겁니다 제가 그 때 막연하케나마 느낀 건 호남 사람들도 이제는 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호남 사람들이라고 해서 언제까지나 김대중씨만 보고 살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물론 그 때 당선은 민주당의 권노갑씨가 됐지만 일부신문들은 선거초반의 분위기만 보고 '목포에서 깜짝 놀랄 이변이 일어날 것이라는 식의 기사를 쓰기도 했었습니다.

동교동 비서 출신인 권노갑씨와도 참 친한 사이였는데 85년 신한민주당창당때 제게 돌아온 창당 발기인 자격을 그에게 양보한 적도 있습니다.

성격형성기부터 문제있는 사람

목포에서 출마하셨지만 원래 고향은 강원도이시죠.

▲네, 미 수복지구인데 강원도 이천군 판교면입니다. 아버지가 해방직후 목포에 정착하셔서 한독당 목포시당 위원장을 하셨죠.

- '동교동 24시'는 직접 쓰신 겁니까. 아니면 누군가가 대필해 줬나요.문필 실력이 대단하시던데 그 전에 글을 써 보신적은 있습니까.

▲허, 그거 제가 직접 쓴 겁니다 특별히 문필 실력은 없고 그냥 쉬운 문장으로만 풀어 썼으니까. 저서를 낸 적은 없지만 그 전에도 야당활동을 하면서 가끔씩 '민주대학'이나 '청년소식'등에 단편적인 글들을 기고한 적은 있습니다

-그 '동교동 24시'의 출간을 안기부에서 관여했다는 말도 있었는데 -

▲허허, 그 사람이야 원래 그런 사람 아닙니까. '동교동 24시' 가 김대중씨의 대통령 당선을 저지하기 위해 안 기부에서 출간했다고 하는데 사실 그 책은 86년 건국대 사태가 터지고 나서 집필하기 시작해서 87년 4 · 13조치 이전에 탈고를 다 끝낸 상태였어요,

그리고 건국대 사태 이후에 김대중씨는 대통령 직선제만 되면 출마하지 않겠다고 공약해 놓은 상태였고 또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4 · 13 선언에서 호헌의사를 분명히 밝혔는데 어떻게 그런 현실에서 그 사람의 대통령 출마를 예상하고 그런 책을 쓸 수가 있단 말입니까

또 지금에 와서야 김대중씨에 대해 이러꿍 저러쿵 말들을 많이 하지만 그때만 해도 그 사람에 대해 있는 그대로를 밝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 않습니까.

-김대중씨와 결별하게 된 이유에 대해 저자는 근본적으로 김대중씨는 표리부동하고 도덕성이 결핍된 정치인 이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일부에서는 저자가 85년 신민당 연수국장으로 내정돼 있다가 김흥일씨와의 불화로 다른 사람이 임명돼 버린데 대한 불만 때문이라고 보기도 하는데요.

큰 인물 못 돼, 역대정권이 키워줘

▲나는 원래 김대중씨의 철학과 신념만을 믿고 그 사람이 가는 길이 곧 민주주의로 가는 길이라 믿고 엄청난 희생을 감수해 가면서 그 사람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친 사람입니다 나는 한 번도 국회의원이 되겠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오로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없기를 다짐했던 사람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여러 차례의 감옥살이 중에도 반성문 한 장 써 본 일이 없었습니다

김대중씨는 근본적으로 성장과정의 환경 탓으로 성격형성과정에서부터 문제가 있는 사람입니다 거짓말을 밥먹듯 하는 사람 아닙니까. 사실 그 사람은 그렇게 큰 인물도 못돼요 그냥 가만히 놔 뒀으면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을 가지고 역대 정권이 오히려 그 사람을 키워준 면도 있습니다.

처음부터 링 위에 올려놓고 정면대결을 했으면 한 방에 나가 떨어질 사람을 가지고 엄청난 살인펀치의 소유자인 양 과대평가해서 가두어 놓는 바람에 가리워진 장막 뒤의 영웅으로 키워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