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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12.12 "김재규에 협력한 정승화 수사는 당연" //5.18 "경찰력 한계에 …

본문

12.12  "김재규에 협력한 정승화 수사는 당연"

5.18 "경찰력 한계에 봉착,군 개입 정당"



                                                            김덕한 (월간조선 기자)



전두환 전 대통령 측이 지난 95년 6월,검찰에 5 · 18관련 소명서를 제출하면서 82년 발간된 「계엄사」를 첨부한 것은 주목되는 사실이다. 이 자료에는 12.12와 5· 18을 바라보는 신 군부측의 시각이 명확히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계엄사」는 당시 계엄사 참모장 나동원 소장 등 13명의 편집위원이 「계엄상황 일지」 「일일 주요보고」「주요조치문」, 합수본부 및 신문 자료 등을 토대로 계엄 종료 직후부터 집필에 착수, 82년 발간한 것이다. 총 6백25페이지에 이르는 이 책에는  10·26과 12.12, 5 ·17, 5· 18등 주요사건들과 당시 국내외 정세에 관련한 각종 자료와 분석이 망라되어 있다. 또한 「삼청 교육대」의 설치 근거가 되는 「삼청계획」 사업 내용 등 계엄하에서 시행된 구체적인 활동과 활동내용의 보고서가 첨부되어 있다.
  물론 대부분의 자료와 해석은 일방적으로 합수부측의 입장을 옹호하는 방향으로 제시되고 기술되었다. 먼저 12 · 12에 대해서는 당시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이 김재규가 대통령 시해 사건의 주범인 것을 알고도 기회주의적인 야심으로 김재규에게 협력하였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 그들 주장의 핵심이다.
  10 · 26 당시의 정황을 자세히 제시하여 정승화가 김재규에  부화뇌동하였다고 주장하고 또한 정승화가 김재규의 거사를 충분히 도을 수 있을 만큼 교분이 두터운 사이였다는 점을 여러 가지 근거를 들어 추론하며 참모총장 연행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그러나 연행과정의 탈법성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고 「정승화총장이 연행에 순순히 응하지 않고 저항하였으며 정병우 특전사령관, 장태완 수경사령관,하소곤 육본작전참모부장 등 일부장성들이 그를 옹호하며 맞서게 되어 유혈충돌의 일대 비극이 벌어질 뻔하였다」고 기술, 합수부에 맞선 장군들을 오히려 정당한 수사권을 위협한 세력으로 규정하는 시각을 보였다. 또한 「그날 밤은 합수본부장을 중심으로 국난극복의 주역을 담당했던 장병들에게는 길고 긴 겨 울밤이었으나 어둠의 장막은 사라지고 아침이 되자, 이미 밝은 태양이 치솟고 있었다」는 신파적인 표현까지 사용하며 합수본부장의 「화려한 등장」을 미화하고 있다.
  5 · 17계엄확대 조치에 대해서는 「경찰이 3월 개학 이후 5월16일까지 학생 및 근로자들의 소요 진압에 시달리고 피로와 부상으로 소요진압 능력이 한계점에 도달 하였고 현실 불만세력이 부화뇌동하여 합세할 경우 소요진압을 위해서는 수많은 병력이 필요할 것」이라고 전제하여 군대 개입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경찰력이 지쳐있었다는 옹색한 명분을 내세웠다. 또 군이 개입하더라도 제한된 병력으로 안정을 시키기 위해서는 고교생들과 불량배들이 가담하기 전, 그리고 전국 대학의 본격 시위가 있기 전에 조치를 취하여야 하며 따라서 「학생들이 전열정비를 위해 소강상태에 있는 5월17일 주말을 통하여 조치를 시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5 · 17에 대해서는 「절차의 합법성」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5· 17조치의 불가피성을 인식한 주영복 국방장관과 이희성계엄사령관이 총리와 대통령에게 건의를 하였고 국무회의를 거쳐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광주민주화 운동의 진압작전에 대해서는 작전 회의 내용과 작전 명령과 사망자수와 원인까지 밝혀 진압작전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다.
  「계엄사」에 게재된 12 · 12와 5 · 17, 5.18 관련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12 · 12사건」

  10 · 26 사태로 인하여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계엄사령관에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임명되었으며, 각군 수뇌들은 일치단결하여 국가보위 임무를 완수하겠다고 결의했지만, 국민들은 군 단결의 구심점이 되어야 할 계엄사령관 자신이 시해사건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라는 의혹으로 군 단결에 금이 가고, 그리하여 예기치 않는 사태가 발생하지 않을까 하여 불안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정총장은 대통령 시해사건 현장에 가까이 있었고, 범인인 김재규가 체포될 때까지 그와 행동을 같이 했으며, 그와는 가까운 사이였을 뿐만 아니라, 사건 처리 과정에서 지지 부진했던 점 등 의혹을 살만한 점들이 많았다.
  그리하여 1979년 12월12일을 기하여 합수본부장은 대통령에게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연행조사할 것을 건의하게 되었다.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에서는 10- 26·사태 직후 정총장에 대한 혐의사실을 인지하고 즉각 조사에 착수하지 않았던 것은, 10·26 사건으로 인하여 국민의 충격이 너무나 크고 국가안정이 위태로운 시점에서 정승화 총장까지 연행조사할 경우 국가 최후의 보루인 군부의 동요는 물론 또 그렇게 되었을 때 북괴의 도발 가능성이 농후하고 국가의 존망마저 위태롭게 된다고 판단하여 부득이 정국이 안정될 때까지 조사시기를 미루어 왔다.
  12 · 12사건 이후 밝혀진 바에 의하면,정승화는 대통령 시해 직후 김재규의 거사가 성공할 것으로 보고 그에 동조하는 행동을 취했고, 후에 김재규의 거사가 도저히 성공할 수 없다고 판단하자, 그는 마침내 태도를 돌변하여 보안사령관의 김재규 체포 건의에 동의하였다.
  정승화는 처음부터 김재규가 범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10월26일 밤 그는 사건 현장에서 불과 50m밖에 떨어지지 않은 가까운 거리에 있었으므로 총성이 나는 것을 듣고, 동석했던 김정섭에게 『저건 총성이 아니오』하고 묻기까지 하였으며, 극히 상식적인 사고의 소유자라도 총성의 거리 감각이 있을진대, 태연히 과일을 들고 있었고, 총성이 난 직후 김재규가 피묻은 와이셔츠 차림에 당황한 표정으로 뛰어나오면서 『총장 큰일 났습니다』라고 말했다는 사실에서도 대통령의 신변에 어떤 사고가 일어났으며, 그 범인은 김재규라는 심증을 굳힐 수 있었다.
  또한 그는 육군본부로 가는 도중 김재규가 대통령 유고를 말했을 때에도 그 범인이 김재규임을 알았으며, 육본 벙커에 돌아온 후, 경호실장이 장악하게 되어 있는 수도경비사령부가 개입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함으로써 경호실장 차지철의 소행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고, 따라서 김재규가 범인이라는 심증을 더욱 굳힐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승화는 김재규를 체포하지 않았고,오히려 김재규의 뜻대로 병력을 출동시키는 데 동조하였다. 그는 곧 1개 사단과 공수여단의 출동을 지시하고, 제1 및 제3군사령관에게 비상태세를 발령함과 동시에 김재규에게 병력출동에 관한 조치사항을 설명하면서 『계엄부대가 출동하게 되면 어디를 먼저 점거해야 합
니까 ?」라고 묻고, 김재규의 지시대로 계엄병력을 출동시켰다.
  정승화가 이처럼 김재규의 범행을 은폐하고 그에게 동조하는 태도를 취한 것은 그에게 기회주의적인 야심이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재규가 엄청난 반역을 저지를 수 있었던 것은 필시 ,거대한 배후 세력이 관련되어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기회주의적인 처신만이 자신의 공리를 위해 현명한 처사라고 생각하였다.
정승화와 김재규는 개인적으로 1962년부터 교분이 두터운 사이였다. 1974년까지 같은 시기에 사단장으로 근무하여 수시 접촉하였을 뿐만 아니라, 재경 경북출신 장성모임, 3군단장 인계인수 등의 인연으로 친교가 두터워져 서로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되었다. 1979년 1월 김재규의 적극적인 천거로 참모총장직에 오르자마자 김재규를 방문, 총장 천거에 대한 감사 인사를 하였고, 특히 1979년 10월에는 김재규가 자기 동조자로 이용할 의도에서 환심을 사기 위해 제공하는 거액의 돈을 받은 사실도 있었다. 사고 직전에 이러한 사실이 있었다면, 신속히 김재규의 또 다른 사전 음모내용을 색출키 위해서도 스스로 고지하였어야 함에도 오히려 끝내 숨기다
가 그가 연행된 후에 조사과정에서 비로소 실토하였다.
  이러한 혐의 점들이 사실인지의 여부를 가려내어 국민들의 의혹을 풀며, 10· 26사태의 진상을 사실 그대로 규명하고, 김재규의 대역죄를 바로 재판하며, 군의 단결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정승화를 연행 조사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I979년 12월12일 19시경 총장공관에 있는 정승화를 연행코자 할 때, 그는 이에 순순히 응하지 않았고, 오히려 공관 경비병들에게 발포를 명했으며, 또한 당시 특전사령관 정병주 소장,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소장, 육본 작전참모부장 하소곤 소장 등을 포함한 일부 장성들이 그를 옹호하며 맞서게 됨으로써, 유혈 충돌의 일대 비극이 벌어질 뻔하였다.
  그날 밤은 합수본부장을 중심으로 국난극복의 주역을 담당했던 장병들에게는 길고 긴 겨을 밤이었으나, 어둠의 장막은 사라지고 아침이 되자, 이미 밝은 태양이 치솟고 있었다.
  노재현 국방부 장관은 12월13일 상오,대통령 시해 사건에 관련된 혐의로 정승화와 이에 관련된 일부 장성을 구속 조사중에 있으며, 육군 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에는 이희성 대장이 임명되었다고 발표하였다(국방부장판 담화문 내용 : 부록 참조).
  결국 정승화는 국방부 계엄 보통군법회의에서 1980년 3월13일 징역 10년이 선고되었고, 3월18일 관할관 확인시 징역 7년으로 감형되었으며, 항소를 포기함으로써 3월25일 징역 7년형이 확정되었으나 6월12일 형집행정지 결정으로 석방되었다.

  5 · 17의 불가피성

  정치적 혼란, 노사분규의 격렬화, 일부 언론 및 종교계의 무분별, 사회기강 문란 그리고 학원소요의 격화 등으로 인하여 국민들은 북괴가 곧 쳐들어 올지도 모르겠다는 위기의식에 사로잡혀 사회불안이 극도에 달하게 되었고, 국민경제는 파탄지경에 이르게 됨으로써, 대다수 안정을 바라는 국민들은 정부의 강경대책을 희구하게 되었으며, 계엄군에 의한 강력한 제재와 시급한 사회 안녕질서의 회복을 갈망하게 되었다.
  따라서 정부는 5월17일 24시를 기하여 비상계엄을 확대 조치하였다.  4월30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20분까지의 장시간에 걸친 계엄지휘관 회의에서 「학원 및 노조의 난동사태가 법치주의 원칙과 민주적 기본 질서를 부정하는 것이므로 사회 혼란의 활성행위는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엄단되어야 한다』고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비상계엄하에서 학원소요가 진정되기보다는 오히려 학생들의 요구조건이 학내문제를 벗어난 대정부 투쟁의 현실 정치문제를 들고 나왔으며, 심지어는 5월22일까지의 시한부 요구·사항이 관철되지 않으면 군과의 충돌도 불사하고 대대적인 가두시위를 벌이겠다고 선언하며 소요가 더욱 과열 난동화되어 갔다.
  또한 이러한 학생들의 소요사태에 고교생, 근로자, 불량배, 불순분자와 불만계층이 가세하여 가두로 진출한다면 사회적 혼란이 극도에 달하여 국가의 안보와 국민의 생존권에 대한 위협이 긴박하게 되었다.
  그런데, 경찰은 3월 개학 이후 5월16일까지 2개월 반 동안 학생 및 근로자의 소요진압에 시달리고 피로와 부상으로 소요진압 능력이 한계점에 도달하였으며, 대학,전문대, 고교생과 근로자 및 불량배 등 현실 불만세력이 부화뇌동하여 합세할 경우, 소요진압을 위해서는 수많은 병력이 소요될 것이었다.
  이를 충족시키기 위해 전력 전투 병력을 전용한다면 북괴의 남침 저지를 위한 국방력의 약화가 불가피하게 되며, 후방 사단병력을 투입할 때에는 간첩의 후방침투를 용이하게 할 우려가 있어 소요진압에는 제한된 병력만을 투입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제한된 병력으로 안정을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고교생이 본격적으로 시위에 가담하기 전에 전국 대학만의 일제 시위가 있기 이전에, 그리고 근로자와 불량배 등 부화뇌동 분자들이 가세하기 이전에 조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요가 과열 중에 있을 때에 군을 투입한다던 학생과 군인.공히 많은 희생자가 발생할 것이기 때문에, 학생들이 전열정비를 위해 소강상태에 있는 5월17일 주말을 기하여 병력을 투입함으로써 희생자발생을 방지할 수 있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5 · 17조치를 단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주영복 국방부 장관과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5월17일 하오 전군 지휘관의 비상계엄 확대 결의를 신현확 국무총리와 대통령에게 건의하였다.
  당시 최규하 대통령은 중동순방 일정을 앞당겨 급거 귀국하여 시극수습에 관한 국방부 장관의 건의를 신총리와 신중히 검토한 뒤 국무회의에 회부토록 지시함으로써 21시30분 중앙청에서 국무회의가 개최되었고, 지 역계엄을 전국계엄으로 전환키로 의결하였으며, 최규하 대통령은 이날 24시를 기하여 전국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하였다.

조치내용

  비상계엄 확대에 따른 계엄포고 제10호를 발표함으로써 모든 정치활동과 정치목적의 옥내외 집회 및 시위금지, 옥내외 일반집회 신고, 전문대학 포함 모든 대학 휴교, 유언비어의 날조·유포 금지 재강조, 특히 전· 현직 국가원수를 모독, 비방하는 행위 및 북괴와 동일한 주장 및 용어를 사용 선동하는 행위 일체 금지 등의 특별조치를 단행하였다.
  동시에 5월18일 새벽 3시를 기하여 전국 31개 주요대학과 1백36개 보안목표에 계엄군 2만5천여명을 배치시키고, 소요주동 및 문제학생을 일제히 검거하였다.
  한편, 국민의 지탄대상이 되어온 권력형 부조리 혐의자 김종필, 이후락, 박종규, 김치열, 김진만, 오원철, 김종락, 장동운, 이세호 등과 소요 배후 혐의자 김대중, 예춘호, 문익환, 김동길, 인명진, 고은태, 이영희 등 26명을 연행 조사하는 전격조치를 단행하였다.
  또한 계엄포고 제13호(80.8.4)쉐 의거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위협하고 공공의 안녕질서를 위태롭게 하는 폭력사범(강도, 절도, 치기배 포함), 공갈 및 ·사기사범(서민 착취범 포함), 사회풍토 문란사범(밀수, 마약, 상습 도박자 포함) 등 고질적인 각종 불량배를 일제히 검거 순화토록 함으로써 밝고 정의로운 사회 구현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 사회 정화의 일대 쾌거는 일명 국보위 삼청계획 5호사업으로써 5.17조치의 일환이요, 그 후속조치라 할 수 있다.

충정작전명령 (요지 )

상황
5월18일부터 시작된 광주일원의 소요사태는 23일 이후 소강상태를 이루어 약간 회복징후가 보였으나, 난동자들은 주요 도로변에 탈취한 기관총을 배치하고, 각종 장애물을 구축하는 등 공포분위기를 조성, 양민을 협박하며 장기전을 획책하고 있다.
  · 계엄군은 광주지역의 격심한 난동사태에 대처하여 양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난동사태를 하루 속히 진압하기 위하여 선무작전과 봉쇄작전을 실시하여 대부분의 시민들이 이성을 되찾도록 최선의 노력을 경주함으로써 이에 호응 조속한 질서회복을 염원하고 있다.
  · 난동사태가 지속됨에 따라 광주시의 서민층은 생필품 및 의약품의 고갈로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으며, 환자가 증가되고 있어, 이와 같은 상황이 계속되면 집단범죄의 발생이 우려된다.
  ·지역 내 난동자 구성이 대부분 흉악범 및 불량배로 되어 있어 계엄군의 선무공작 활동이 단시일 내 발효될 수 없으며,시민 자치능력에 의한 사태수습 및 치안회복의 가능성은 기대키 곤란하다.
  · 치안 공백상태의 장기화는 불순분자 또는 북괴 무장공비의 침투 가능성이 증대될 수 있다.
  · 난동 6일째부터는 선량한 시민의 흥분기세가 점차 진정됨으로써 용공분자와 난동자, 그리고 시민이 분리되어 진압작전을 실시할 여건이 조성되어가고 있다.

작전지침
  본 작전의 실시는 계엄분소장인 전투병과 교육사령관 책임하에 80년 5월27일 새벽 1시 이후에 실시하되, 작전간 양민 및 계엄군의 희생을 최소화할 대책을 강구할 것.

<표 1> 광주사태 당시 사상자 수 구분


경찰
민간

사망
189
23
4
162

부상

642
117
148
377

중상
391
82
27
262

경상
251
35
121
95




결과
  광주사태로 인하여 1백89명이 사망하였고 6백42명이 경상을 입었다.  위 표에서 민간인 사망자 1백62명을 검시하여 사인을 규명한 결과 M1과 CAR소총 의한 총상이 대부분인 1백17명이었으며, 타박상이 18명, 수류탄 파편상이 12명, 자상이 11명, 화상이 4명이었다.
  그런데 CAR소총을 가진 경찰은 모두 도주해 버렸고, 계엄군은 M16소총만을 소지하고 있었으며, 총기 사용 대신 진압봉을 사용하도록 지급하였고, 최소의 자위권마저도 행사하지 않고 자중하다가 사태가 극도로 악화되어 부득이 5월22일 정오부터 자위권 발동을 승인하였으며, 이때도 공포를 쏘거나, 사전에 경고를 발하고, 3회 이상 정지명령을 내릴 것이며, 가능하면 위협발사로 해산시키되 상황이 급박해서 불가피할 때에는 생명에 지장이 없는 하퇴부를 사격토록'하였기 때문에 계엄군에 의한 사망자는 소수에 불과했다.
  오히려  M1과 CAR소총은 난동자들만이 예비군 무기고에서 탈취하여 소지하였기 때문에 총기에 의한 사망자1백17명 증 88명은 모두 난동자 자신들에 의하여 오발, 민가에 칩입하여 일가족 살해 및 금품 탈취, 강 ·온 양파 대립에 의한 총격, 그리고 군중 속에서 양민살해를 계엄군의 소행으로 오인시켜 군중들로 하여금 계엄군에 대한 적개심을 갖도록 하기 위한 의도적인 총격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다만, 교도소 습격시 8명과 계엄군의 봉쇄선을 뚫기 위하여 기습한 난동자 4명, 특정진압 작전시 최후까지 총격으로 저항한 난동자 17명은 교전 중 계엄군에 의해 사살되었다.
  타박상에 의한 사망자 18명은 탈취한 차량으로 난동을 부리다가 교통사고로 사망한 것이 판명되었으며,수류탄 파편상에의한 사망자 12명은 난동 자들이 예비군 무기고에서 탈취한 수류탄 오발사고에 기인된 것이었고, 계엄군은 수류탄을 지참하거나 사용한 일이 전혀 없었다.
  또한 자상에 의한 사망자 11명 역시 난동자들이 계엄군으로 가장, 시민들의 적개심을 불러 일으키기 위하여 그리고 민가에 침입하여 금품을 탈취하기 위하여 취한 소행이었으며, 화상에 의한 사망자 4명은 난동자들이 방화와 파괴를 자행하며 난동을 부릴'때 입은 피해였다.
따라서 계엄당국에서는 이러 한 사인을 의사, 변호사, 군수사기관, 시민대표들로 구성된 합동조사반에 의거 소상히 규명하여 유가족들로 하여금 확인토록 공시함으로써 1백36명의 사망자 유족들은 모두 난동자들에 의하여 살해되었거나 총격으로 습격 및 대항하여 부득이 사살되었음을 시인하고 인수해 갔으나 26명의 사망자에 대해서는 육족이 나타나지 않아 공원묘지에 가매장하였다.

<포2> 건물 · 차량 등 재산 피해 통계 구        분

공공
민간

건물(동)
244
52
192

차량(대)
882
82
800

시설물(개소)
884
867
17

유류(드럼)
3,000
 
3,000

기타장비(점)
1925
1643
282




<표3> 피탈된 무기 통계 계
카빈
M1
M16
거총
공용화기

5,008
3,646
1,235
34
42
51



* 198l,5.13 현재 회수 : 4,885정(98%)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순분자들은 계엄군에 덮어 씌우는 유언비어를 퍼뜨렸으며, 심지어는 천주교 문제신부에게 작성배포된 「어느 목격자의 증언」이라는 유인물에서 『공수별들이 여자 유방을 대검으로 도려 내었으며, 임신부의 배를 갈라 태아를 꺼냈다』는 등의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내용을 유포시킴으로써 시민들로 하여금 사실인양 믿고 흥분토록 유도하였다.
  계엄당국에서는 이와 같은 사실을 목격한 시민들은 꼭 신고해 줄 것을 당부하고 강조하였지만 한 사람도 목격했다고 신고해온 사람은 없었다.
  또한 도청, 파출소, 방송국 등 건물2백44동, 차량8백82대, 시설물8백84개소,유류 3천드럼, 기타 장비 1천9백25여점 등이 파괴 및 소실됨으로써 2백60억원 상당의 재산피해를 가져왔다. 난동자들에게 피탈된 무기는 군용이 5천8정이고, 민수용 엽총이 3백95정이었으며, 탄약은 소화기탄 28만8천6백80발을 비롯하여 수류탄 5백62발, 폭약 3천여 상자 그리고 군 차량 34대, 경찰차량50대, 아세아 자동차회사의 군납용 장갑차 2대를 비롯한 각종 차량 3백28대, 기타 민간차량 3백67대를 각각 피탈당했다.
  광주사태는 인적, 물적 손실뿐만 아니라, 온 국민이 입은 정신적 상처, 지역감정 대립 및 국민화합 저해, 외국에 미친 영향, 그리고 그 후유증으로 경기침체, 수출 및 관광객 격감 등 무형적인 피해 또한 지대하였음을 감안할 때, 광주사태야말로 일대 민족적 비극이요, 역사적 오점이었다.
  광주사태가 악화되는 동안 북괴에서 시간별로 난동상황을 소상히 방송하며 선동한 사실이라든지 남해안으로 침투한 간첩 이창용이 광주시내로 잠입하려다 실패한 후 서울로 을라와 5월23일 검거된 사실, 5월25일 광주시위군중 가운데 3명이 독침피해를 입은 사건, 불온전단 내용이 북괴주장과 일치되는 점, 시청 난동자의 조편성이 빨갱이식 조직, 탈취한 차량에 적색페인트로 시각 자극 등으로 미루어 북괴간첩이 광주사태에 편승하여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고 전국적으로 확대 시켜 정부를 전복코자 하였음이 분명하였다.
  광주사태가 수습된 후 정부와 계엄당국에서는 사후조치로 사망자에게 대해서는 1인당 장의비 30만원과 조위금 4백만원씩을 각각 지급하였고, 부상자들에게는 치료비 전액을 지급하였으며, 이재민을 구호하였고 파괴된 주택 및 시설을 복구하였으며, 각종 장비 및 물자피해에 대한 보상을 하였다.
  한편, 광주사태시 극심했던 피해에도 불구하고, 사태 당시 시내에 있었던.외국인 1백84명이 무사하였다는 점과, 42개 시중은행에서 보유한 1천5백억원과 시중 3백25개 대기업체에서 미예치 보유한 거액의 화폐가 난동 자들에 의해 탈취당하지 않았다는 것은 불행 중 다행한 일이었다.
사태발생 초기, 효과적이고도 적극적으로 수습에 임해야 할 전라남도 경찰국장 안병하 경무관이 직무를 유기하고 종적을 감춘데 대한 책임을 물어 파면조치하였으며, 광주사태 관련자 1천77명이 검거되어 훈방5백69명, 기소유예 1백47명으로,3백61명이 기소되었으나, 악질 난동주동자 83명만이 실형을 받게 되고, 나머지 2백78명은 석방되었으며, 제12대 대통형 취임에 즈음하여 추가로 60명이 사면됨으로써 거의 석방된 셈이 되었고, 나머지 23명만은 살인 등 중범자로서 의법조치가 불가피하였다.
  이렇게 정부가 최대의 관용을 베풀어줌으로써 국민화합의 계기를 마련하였고,새 역사 창조에 동참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