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공수부대의 광주 사태
본문
공수부대의 광주 사태.
제 1부 공수부대의 생리
왜 쏘았니, 왜 찔렀니
학생 운동권 노래인 「5월」의 가사에는 「왜 쏘았니/ 왜 찔렀니 / 트럭에 실려 어디 갔니」란 대목이 있다. 이 물음에 대답해야 할 쪽은 광주 사태에 투입되었던 제 3, 7, 11 공수 여단의 장병들이었다. 그들은 지난 8년간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국방부와 계엄사의 무미건 조한 발표문 이외에 공수부대의 견해를 표현한 글은 몇 안 되었다.
광주 사태에 대한 정보는 시민들을 폭도라고 표현한 정보는 시민들을 폭도라고 표현한 정부 쪽의 것이 선행하더니 1985년을 기점으로 하여 광주 시민쪽에서 쏟아져 나온 인쇄물과 비디오가 정부 쪽 정보를 압도하였다. 지난 5월의 언론도 전폭적으로 광주시민쪽에 서서 광주 사태를 조명하였다.
국회에서 구성될 광주사태 진상조사 특위는 군, 특히 공수부대쪽을 겨냥하게 될 것이다. 시민쪽 이야기느 알려질 만큼 알려졌으니 이제는 군대가 답할 차례가 된 것이다. 특위가 마련한 도마 위에 올라설 쪽은 공수부대인 것이다. 정부 . 여당에서는 오래 전부터 이런 조사에 대비해 왔다.
당시의 작전일지 등을 정리하고, 사망자 부검 소견서 등을 챙기고, 국방부 차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대책위원회를 가동시켜 대응논리를 다듬는 등 다가올 일전에 대비하고 있다. 이 일전은 총과 몽둥이, 그리고 칼로써 진행된 광주사태처럼 피비린내가 나는 것은 아니고, 말로써 하는 것이지만, 역사적 평가에 있어서는 실전보다도 더 중요한 의미를 던질 것이다.
광주 사태는 기자 개인으로도 잊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순전히 직업적 호기심을 갖고서 광주 사태의 현장에 뛰어들었던 기자는 이 출장이 꼬투리가 되어 잠시 기자임을 중단해야 하였다. 지난 85년 7월 호 월간 조선에 광주 사태 특집을 싣기 위해 다시 광주로 내려가 그 5년 전의 상황을 재현하려고 노력한 적도 있었다. 광주 사태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두면서 기자는 한가지 아쉬움과 부족함을 느끼고 있었다.
취재하기 쉽다고 해서 너무 시민 이야기만 소개하다가 보니 진상의 한쪽만, 즉 「광주시민의 광주사태」를 주로 보여주게 되었다. 그동안 월간조선에 실린 10여건의 기사들도 모두 광주시민쪽의 시각에서 쓰여진 것이었다. 어떤 사물의 진상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입체적으로 살펴야 한다. 광주사태의 다른 한 면, 「공수부대의 광주사태」에 대한 취재 없이는 이 대사건의 윤곽을 그릴 수가 없는 것이다.
기자가 국회 특위의 구성과 시점을 맞추어 「공수부대의 광주 사태」를 취재하기로 한 것은 지난 취재 활동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되었다. 지난 한 달간 기자는 공수 3, 7, 11여단 ,31사단, 20사단 등 5개 관련 부대 (부대 명은 이미 공개돼 버려 그대로 쓰기로 한다. 지휘관들의 이름도 마찬가지)에서 광주 사태에 참여하였던 23명의 현. 전직 군인들을 만났다.
공수여단장, 계엄분소장, 참모장, 대대장, 지대장, 운전병, 하사관, 부상자 등등 …. 연 3백 시간에 걸친 이들과의 인터뷰를 통해서 그들이 「인식하고 있는 광주사태」를 여기에 소개하려고 한다. 그들이 말한 광주사태는 「사실로서의 광주사태」가 아니라 그들이「인식하고 있는 광주사태」이다. 객관적 사실과 어긋나는 부분도 많지만 군인들이 광주사태를 어떻게 인식했느냐는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여기 소개할 공수 부대원들의 증언에 대해 기자는 찬동하지 않는 부분도 많지만, 시민측 증언과의 형평을 위해서, 또 광주 사태의 진상을 밝히는 기초 자료서 가능한 한 수정없이 소개하기로 하였다.
피해와 가해의 관계로 엮인 사람들 사이에서는 객관적 자세라는 것이 불가능하다. 군인이나 시민이나 자신들에게 불리한 것은 감추고 유리한 것만 강조하는 방향으로 증언하려고 하는 점에선 같다. 지금은 그런 문제점 있는 자료라도 많이 수집하는 일이 중요한 단계인 것 같다.
시민의 논리 대 군인의 논리
군인들을 취재하면서 기자는 묘한 단절감을 느낀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뭔가 주파수가 맞지 않아 대화가 잘 통하지 않는 듯한 느낌, 심하게 말하면 통역이 필요할 정도로 상대방의 뜻을 이해할 수 없다는 답답함, 그런 것들이 있었다. 취재를 끝낼 무렵에야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기자는 민간인의 논리로써, 군인은 군대의 논리로써 광주사태를 설명하고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려고 하기 때문에 말은 통하나 뜻이 잘 통하지 않는 것이었다.
전남 고흥이 고향인 한 11여단 사병 출신은 『군복을 입고 있을 때는 우리가 과격한 행동을 했다는 자각이 없었으나 제대한 뒤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런 자각이 새삼 들더라』 고 했다.
광주 사태를 군복을 입은 쪽에서 보느냐, 벗은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생각이 이렇게 달라지는 것이다.
군인들은 계염령 하의 시위는 불법이니 이들 「군대식」으로 진압한 것은 당연하다고 했다. 군대식 진압이란 목표를 수단 방법 안 가리고 달성한다는 것이다.
『진압이면 진압이지 과잉 진압이 따로 있느냐. 고지를 공격할 때 소총으로 점령하든 박격포로 하든 목표 달성이란 결과는 같은 것이다』
『군대의 작전은 비록 그것이 자국민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 해도 기본적으로 상대를 적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잘못되었다면 군대를 동원한 고위층, 그런 군대를 불러들인 국민 쪽이다.』
『우리가 무얼 잘못 했느냐』고 대어드는 사람들도 많았고 기자가 지난 6월호 「한국의 군부」에서 쓴 광주 사태의 기본 성격에 대해 흥분하는 장교들도 있었다. 국회 특회의 진상 조사는 결국은 양쪽 논리의 공방전이 될 것이다. 정부의 한 고위층 인사는 『정치에서는 일단 공방전이 되면 크게 걱정 할 것이 없다』면서 느긋한 자세를 보였다. 공방전을 통해서 많은 자료가 드러날 것이고 노출된 정보를 근거로 하여 국민들이 나름대로의 판단을 내릴 것이고 이런 낱낱의 평가들이 하나의 흐름을 형성할 때 비로서 역사적 평가로 굳어질 것이다.
광주 사태에서 있었던 공수부대의 행동 논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공수부대란 특수한 조직의 생태에 대한 약간의 역사적 분석이 선행되어야 할 것 같아 공수부대의 과거 행적에서부터 기사의 실마리를 풀어 나가기로 하였다.
집권자가 써먹기 좋은 부대
한국 육군에 공수 단이 창설된 것은 1960년이었다. 그해 6월 전두환. 최세창. 장기오 차지철 등 네 대위는 미국 포트배닝의 특수 전 교육 기관에서 6개월 동안 늪지. 산안. 생존 훈련등 이른바 「레인저 트레이닝 코스」를 거쳤다. 이 과정을 마친 네 명은 다시 낙하 훈련을 받고 귀국하여 공수단 창설 요원이 되었다.
공수단이 한국의 현대사에 처음 등장하는 무대는 5.16이다. 1961년 5월 15일 밤 박정희 소장은 쿠데타 지휘 본부인 6관구 사령부에 갔으나 부대 동원이 제대로 되지 않자 김포의 공수단 사령부로 갔다. 단장인 박치옥 대령을 구슬러 병력을 동원하도록 하였다.
박치옥 대령의 출동 지연에 갑갑증을 느끼고 있었던 차지철 대위 등은 그때 무기고를 때려 부수고 있었다. 이 장면을 박 소장이 목격하였다. 고 박정희 대통령이 차지철을 끝까지 신임하여 무덤까지 동행하게 된 것도 절대 절명의 위기 속에서 보인 차씨의 충성심을 박 대통령이 평생 잊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강 다리를 넘어 서울로 들어오는 데 앞장을 선 것은 김윤환 준장이 지휘한 해병 여단이었다. 김 준장은 평소에 『해병대가 반란군의 선두에 서면 누가 정권을 잡든지 해병대를 없애 버리려 할 것이다』고 생각하여 공수단의 뒤를 따르려고 했으나 이날 공수단의 출동이 늦어지는 바람에 해병대가 선두, 공수단이 그 뒤를 따르게 되었다.
김씨의 걱정대로 해병대는 그 뒤 해군으로 편입되었고 , 공수단은 확장 일로를 걷게 되었다.
1969년 특전 사령부가 창설되었다. 제 1공수 여단을 모체로 하여 여단이 잇따라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특전사의 모체인 공수 1여단은 엘리트 의식도 강하다. 전두환, 박희도 장군이 1여단장 출신이며, 노태우 준장은 9여단을 , 정호용 장군은 나중에 광주 사태에 최초로 투입되었던 7여단을 창설한 사람이다.
공수 1여단은 1976년 8월에 한반도를 전쟁 일보 직전까지 몰아넣었던 도끼 만행 사건 때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때의 여단장 박희도씨(전 육군 참모총장)는 최근 펴낸「돌아오지 않는 다리에 서다」란 회고록에서 비화를 공개했다. 그때 한미연합사에서는 문제의 미루나무를 자르기로 하고 병력 1백 10명을 보냈는데, 64명은 1여단에서 유엔군 사령관은 비 무장 상태로 들어가 절단 작업을 하도록 지시했으나 박 여단장은 박 대통령의 특명에 따라 무장한 64명을 보내 북한측이 설치한 도로 차단 시설물 등을 철거했다. 특공조는 북한측 경비병이 돌아오지 않는 다리의 중앙선을 넘을 때는 발포해도 좋다는 명령까지 받고 있었다. 기습적인 미루나무 절단 작업을 보고 우왕좌왕하던 북한 군인들은 돌아가버렸다. 이순간이 한반도가 6.25이후 전쟁에 가장 가까이 다가갔던 순간이 라고 박희도씨는 말하고 있다.
역대 육군참모총장 가운데서는 공수부대에 대해서 못마땅한 시각을 갖고 있었던 이들도 있었다. 1979년 초 무장 공비가 내륙 깊숙이 침투했다가 공수○여단 관할 지역을 지나 북으로 돌아간 사건이 있었는데, 이로 해서 이세호 총장은 특전사를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고 한다.
미8군에서도 박정희 대통령이 공수 단 병력을 증강시키는 데 대하여 의구심을 갖고 대했다. 그들은 한국군이 독자적인 작전 능력을 갖는 것을 경계했을 것이다. 정계지 육군참모총장은 정병주 특전 사령관에게 『위컴 사령관에게 공수부대의 증강 필요성을 납득시켜야겠는데 자료를 제시해 달라』고 한 적도 있다고 한다. 유신 시대부터 특전사의 3대 임무는①비정 규정②대 비정규전 ③충정 작전이다. 충정 작전이란 폭동 진압을 뜻한다. 특전사의 모토는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라」와 「사나이가 한번 죽지 두 번 죽나」이다.
정병주 전 특전 사령관은 공수부대가 폭동 진압 부대나 쿠데타 부대로 이용된 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공수부대는 집권자로서는 아주 써먹기 좋은 부대이다. 기동성이 있고 경량 화돼 있어 간편한 부대이다. 전투력은 또 일당백이 아닌가. 더구나 일선 부대를 빼낼 때처럼 미군과의 절차 문제 등에 대해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친위 의식 강조되고 국민을 경시
공수부대는 특수부대로서 여러 가지 특별 대우를 받기도 하였다. 차지철 경호 실장이 특전사 안에 지어 준 특전 회관은 군 시설로서는 호화로운 편이다. 12.12사태 뒤에는 전두환 노태우씨 부부 등 권력층의 핵심들이 이곳에서 파티를 열기도 했다.
특전사 출신의 두 대통령, 두 참모총장, 다섯 경호 실장에다가 대통령 경호원도 많고, 국군의 날에는 가장 화려한 각광을 받는 것이 특전 용사들의 무술 시범과 공중 묘기였다.
5.16과 12.12사태를 통해서 두 번의 군사 정권을 창출하는 데 앞장섰던 특전사의 장병들은 그런 이력을 자랑하고 친위 부대 의식과 우월감에 차 있더라는 것이 광주 사태 직전에 이 부대에 근무했던 한 장교의 이야기다.
군사 정권 시절에 군이 정치의 영향을 많이 받을 때는 장교들도 계급보다 권력과 얼마나 가까운가에 따라서 그 영향력이 달라졌다. 이런 점에서 특전사는 지난 4개 반세기 동안 집권층과 그야말로 특수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정병주 전 특전 사령관도 『부하 중에는 정치에 너무 민감하게 행동하는 이들이 있어 통솔에 신경이 쓰였다』고 말했다.
한 야전군 장성은 이런 말을 했다.
『우리처럼 휴전선의 일정한 지역을 맡으면 이곳이 뚫렸을 때 국가가 위태롭게 된다는 생각이 저절로 난다. 땅에 대한 애착심이 생기고 그곳이 애국심으로 승화되는 것을 구체적으로 경험하고 있다. 공수부대처럼 어떤 지역도 맡지 않고, 서울 근교에 있으면서 수도권의 정치 동향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부대의 성격의 프로페셔널해질 때 과연 국토와 국민에 대한 애정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
집권자를 향한 충성심이 강조되고 대 국민 관계가 소흘히 되는 조직은 「국민의 군대」로서는 한계가 있다는 얘기였다. 한때 군에서는 보안사, 특전사, 수경사를 3사라 하여 권력 핵심부와 가까운 인물들이 거치는 필수 코스로 보기도 하였다. 5공화국이 들어선 뒤로는 특전사 인맥의 전개가 다른 2사를 압도했다.
전두환, 노태우 두 현. 전직 대통령과 국방 장관을 거쳐 13대 민정당 의원이 된 정호용씨는 준장 시절)(1970년대 후반)에 동시에 1, 7, 9공수 여단장을 지냈던 이들이다.
차지철, 정동호, 장세동, 안현태씨 등 전. 현직 대통령 경호 실장 다섯명이 공수부대 출신이다. 정동호씨는 전두환 공수 1여단장 밑에서 부 여단장, 장세동씨는 정호용 특전 사령관 밑에서 작전 참모를 하다가 3여단장과 사단장을 거친 뒤 경호 실장이 되었었다. 안현태씨는 전두환 여단장, 이현우씨도 노태우 여단장의 직속 부하였다. 정호용, 박희도 두전 육군 참모총장도 공수 여단장 출신이다.
이밖에도 안 모군 단장 , 정 모군 단장, 안 모 사령관 , 참모 차장, 심모 중장, 육본의 이모 핵심 참모 부장 등 현직 군 수뇌부의 많은 사람들이 공수단 출신이다. 최세창 합참의장과 장기오 전 총무처장관은 공수단 창설 요원 중의 한 사람이었다.
프로 집단
공수부대는 일반 군부대와는 구별되는 특이한 성격을 갖고 있다. 최소 단위인 팀(지대, 중대라고도 함)은 전문 화돼 있다. 작전. 정보 기능 , 화기 전문, 폭약 전문, 의무, 통신 등등. 의무 전문은 침술을 배워 비상시에 응급 처치를 하도록 훈련받고 있다. 호남 지방에 주둔하고 있는 모 여단에서는 대민 봉사 사업의 일환으로서 주민들에게 침술 치료를 해주고 있다.
공수부대는 계급 구조가 매우 높은 부대이다. 분 대규모인 1개 지대(팀)는 두 명의 장교와 하사관 및 병으로 구성되는데, 지 대장은 대위다. 이 대위는 일반 부대의 대위 같은 대우를 받지 못하고 훈련 때는 직접 텐트 치고 호를 파는 등 사병들과 같이 생활해야 한다.
공수 부대의 기간 조직은 하사관이다. 이들은 거의가 5년 이상의 장기 복무 의무자들이다. 이런 하사관들은 고된 훈련을 통해서 사고의 단순화 , 행동의 자동화를 강요받는다. 이들을 이끌고 있는 장교 집단은 엘리트 의식과 정치에 대한 민감한 관심을 갖고 있어 일반 부대와는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공수부대의 평소 훈련은 ①낙하 준비 훈련② 태권도③사격 훈련이다. 육군의 사격 대회에서는 으레 공수부대가 상위를 독점하다시피 한다. 공수부대는 1년 중 약 4개월 동안 낙하 훈련과 천리 행군으로 해서 부대를 떠나 산야를 누빈다. 천리 행군이란 글자 그대로 산 속의 천리는 도보로써 주파하면서 갖가지 비정규전 훈련을 받는 것을 말한다. 악전고투의 훈련과 생사를 넘나드는 낙하를 경험하면서 생사를 넘나드는 낙하를 경험하면서 공수 부대 원들은 혈연보다도 더 끈적끈적한 인간관계를 갖게 된다.
이런 단결심은 외부에 대해서는 배타적 증오감으로 표출될 수도 있다. 특히 동료가 피해를 당했을 때는 아들이 얻어맞는 것을 본 부모의 반응처럼 조건 반사적으로 나온다. 더구나 이들은 평소의 훈련을 통해서 비상 상황 아래서는 조건 반사적인 기만한 행동을 하도록 끊임없이 단련되고 있다.
조건 반사적 행동의 폭력 사고
공수 부대 원들의 훈련 낙하 고도는 약 4백m착지 할 때까지는 약 57초가 걸린다. 착지 충격은 3층에서 뛰어내릴 때와 같다.
낙하할 때 공수 부대 원들은 50kg이 넘는 군장을 지게 된다. 소총을 메고, 2개의 낙하산과 비상식량, 실탄 등을 앞뒤로 메어야 한다. 원래는 한 팀이 1인당 1초 간격으로 뛰어내리도록 돼 있으나 실제로는 4초 사이에 10여명이 허공으로 빨려 나가듯 우르르 뛰어 내린다고 한다. 55회의 낙하 경험을 가진 소령 출신 나영조씨(33)는 『첫 점프는 꼭 지옥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꿈꾸듯 뛰어내렸으니 공포감을 느낄 여유도 없었다. 처음에는 그냥 조건 반사적 으로 뛰어내리다가 보니 한 열 번쯤 점프를 한 뒤로부터 비로서 무섬증을 느끼게 되는 것이었다』고 했다.
허공에 몸을 내던진 군인은 『일만, 이만, 삼만, 사만 …』을 세고 위를 쳐다본다. 점프 4초 뒤 낙하산이 펴지는 것을 확인하는 절차다. 펴져 있지 않으면 가슴 앞에 달려 있는 예비 낙하산을 잡아당긴다. 4백 m를 낙하산 없이 떨어지면 8초가 걸리므로 낙하산이 펴지지 않은 것을 확인한 뒤, 예비 낙하산을 펴는 행동에는 4초의 여유밖에 없다.
낙하할 때는 땅을 보지 않도록 돼 있다. 땅 바닥을 보면 미리 생각하고 행동을 준비하기 때문에 다칠 염려가 있다는 것이다. 즉, 접지 하자마자 자동적으로 몸놀림이 이뤄질 수 있도록 돼야 다치지 않으며 이런 행동이 가능하도록 반복 훈련을 시키는 것이다.
적의 후방에서 게릴라전을 하도록 돼 있는 공수 부 대원은 그 행동이 자동화, 본능 화, 조건반사 화 되도록 관리된다. 이런 특질을 가진 그들이 과격한 시위대와 부딪쳤을 때 어떤 행동을 즉각적으로 보일 것인가? 그 답이 부마. 광주 사태 였다.
특전사에서는 공수 대원들이 민간이나 다른 군부 대원을 상대로 사고를 내어도 자체적으로는 처벌을 하지 않으려 하고 감싸주는 분위기라고 한 법무 장교는 말했다. 『특수부대는 사기가 가장 중요한데 상관이 부하들 감싸주지 않으면 통솔이 안 된다』는 것이다. 공수부대의 사고는 주로 폭력을 수반한 것이 많다고 한다. 한 법무부서 제대병은 네 가지 사례를 들었다.
공수부대의 이런 폭력 성향에 대해 정병주 전 특전 사령관은 『부하들에게 그 점에 대하여 주의를 많이 주었다. 전쟁이 터지면 적진에 침투 , 민간인들의 협조를 받아 전투를 수행해야 하는데 민심을 얻으려면 너무 난폭하게 대해서는 안된다고 타일러 왔었다』고 했다. 한 공수 부대 출신 장성은 『공수부대는 광주에서 처음에는 마치 적진에서 적을 상대하듯 작전을 편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했다.
부마사태 때 공수 단 투입
1979년 10월 17일 밤 9시를 넘은 시각이었다. 총장 공관에 있던 정 화 육군참모총장은 청와대로 빨리 들어오라는 전갈을 받았다. 그날 노태우 국방 장관은 한미 국방 장관 회담에 참석하러 서울에 온 미국 국방 장관 브라운을 접대하고 있었으므로 정 총장이 불려 간 것이었다. 대통령 집무실에는 박 대통령, 김전규 정보 부장, 김규원 비서실장, 차지철 경호 실장, 법무 담당 특보가 앉아 있었다. 대통령은 정 총장에게 앉으라고 하더니 김전규 정보 부장에게 부산 상황을 그에게 설명해 줄 것을 지시했다. 설명이 끝나자 박 대통령은 침착하게 말했다.
『정 장군, 현행법에는 육군참모총장이 치안 유지를 경찰이 할 수 없다고 감지했을 때 직접 계엄 선포를 한 뒤 추인을 받을 수 있게 돼 있소. 지금 각의를 소집하자니 시간이 너무 늦을 것 같아 그러니 정 총장이 부산 지역에 계엄을 선포한 뒤 추인을 요청해주지오』
대통령은 지역 계엄 사령관으로는 누가 적당하냐고 물었다. 정 총장은 신직수 군수 사령관을 추천했다. 차 실장이 전화로 박 사령관을 불러내더니 정 장군에게 전화기를 건네주었다. 전 총장이 박 사령관에 계엄 선포 사실을 알리고 병력 배치를 지시하려고 하는데, 대통령이 갑자기 『정 장군, 잠깐 기다려요』라고 했다. 박 대통령은 시계를 보더니 『11시에 국무회의를 할 수 있겠는데… 정 장군 계엄 준비만 해 두시오!』라고 말했다.
박 사령관은 부산에는 실 병력이 충분하지 않다고 정 총장에게 말했다. 박 대통령은 어느 부대를 신속히 투입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정 총장은 가장 신속하게 투입할 수 있는 부대는 공수 여단이라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차 실장 ! 1개 여단을 동원해!』라고 했다. 깜짝 놀란 정 총장은 『각하! 공수 단은 실장이 명령할 수 없습니다.』고 했다. 대통령은 『그런가?』라면서 씩 웃었다.
정승화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날 밤 1개 여단이 부산으로 공수되었습니다 며칠 뒤 공수 단이 부산에서 일반 시민들에게 과격한 행동을 했다는 보고를 받고, 즉각 시정하라고 지시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공수부대를 동원한 것은 신속한 투입을 생각해서 취한 조치였는데, 나중 광주 사태 때도 그런 일이 있었더군요. 특수부대를 시위 진압에 동원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진압 봉의 공포
부마사태 때 부산에 투입되었던 공수 3여단(이하 기사에 나오는 부대명과 지휘관 이름은 군 당국이 이미 공개했고, 군 당국의 지원 하에 출판된 책 등에도 나온 것들이다) 의 나영조 당시 대위는 이렇게 말했다.
『79년 10월 18일 새벽 김해공항에 내리니까 자칫하면 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송 부대장이 부하들에게 지시하는 것을 들었는데, 시위대를 만나면 차를 구할 생각은 하지 말고 우선 달아나라고 하지 않는가. 파출소가 불탄 것을 보고, 국민들이 이럴 수가 있는가, 생각했다. 우리보고 과잉 진압했다고 한는데, 우리는 그때 몸은 지치고, 신경은 날카 로와져 있었다. 구덕운동장에 텐트를 치고 , 3일간 특전 식량으로 식사를 하면서, 하루에 8-9시간씩 거리에 나가 부동자세로 서 있으니 악이 받칠 수밖에 없었다』
부마사태에서 공수부대가 한 역할은 과장된 면이 많다. 1979년 10월 18일 0시를 기해서 부산에 비상 계엄령이 내려지자 공수 제 3여단이 평화시 규모로는 사상 최대의 야간 공수 작전 끝에 부산에 도착했고, 이 병력은 18일 저녁 8시쯤에 딱 한번 시위대와 부딪쳤다. 부산시 중구 남포동에서 3백 명의 시위대가 거리로 나서자 공수부대 1개 대대는 순식간에 이들을 박살내 버렸다. 그 뒤로 공수부대가 한 일은 시위 진압이 아니라 주로 행인들의 구타였다.
부산 동래구 동상 동에 사는 신희철씨(회사원 . 당시 37세)는 18일 밤 8시 50분쯤 서구 충무 동 상륙 다방 앞에서 공수부대 군인들에게 끌려가 개머리판으로 얻어맞아 머리를 크게 다쳤다. 뇌 좌상과 뇌 경막 손상을 당한 그는 뇌수술까지 받았다.
부산진구 당감 동에 사는 금은방 종업원인 전병진씨(당시 32세)는 계엄령 첫날인 10월 18일 밤 9시 30분쯤 서면 태화 극장 앞 택시 타는 곳에서 택시를 먼저 잡으려고 찻길로 조금 나가 서 있었다. 앞당겨진 통행금지 시간이 30분밖에 남지 않아 시민들은 서로 먼저 타려고 법석을 떨고 있었다. 이때 공수부대 한 소대 병력이 찻길을 따라 남쪽으로 행진해 오고 있었다. 그들은 앞에 걸리는 사람들을 청소하듯 해 버렸다.
술에 조금 취해 있었던 전씨는 미처 피할 틈도 없이 당했다.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몇 대나 맞았는지 구둣발로 얼마나 채였는지 알 수 없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정차한 택시 꽁무니에서 몸을 피하고 있었다. 공수부대 군인 네 명이 다시 그를 끌어내 발길질과 개머리판으로 녹초를 만들었다. 그는 쓰러졌다. 군인들이 다 지나갔을 때 그는 벌떡 일어났다. 얼굴에서 피가 쏟아지고 있었다. 갑자기 머리가 핑 돌았다. 지하도를 건너서 한독 병원을 찾았다. 진단을 해보니 앞니 다섯 개가 부러졌고 오른쪽 귀 위의 머리뼈에 분쇄 골절이 생겼음이 드러났다.
칠성 음료 주식 회사에 다니는 최홍일씨(25)는 그날 밤 8시쯤 동료 직원 네 명과 함께 영도다리를 걸어서 시청 쪽으로 오고 있었다. 사람들이 밀리자 공수부대 군인들은 길을 막고 인도에서 줄을 서서 차례로 걸어가라고 했다. 시민들은 시키는 대로 줄을 서서 시청을 지나 버스 정류소 쪽으로 갔다. 상공회의소 앞 육교 밑에서 그들은 군인들이 보내 주어서 왔다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그들은 길바닥에 끓어 앉혀졌다. 군인들은 개머리판과 진압 봉으로 머리 . 어깨부터 때리기 시작했다. 최홍일은 얼른 안경을 벗어 호주머니에 넣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얼굴을 숙이는 것과 거의 동시에 군인의 무릎이 그의 안경 낀 얼굴을 강타했다. 왼쪽 안경알이 깨어지면서 유리 조각이 눈 밑에 박혔다. 비명을 질렀지만 진압봉 세례는 사정없이 그의 머리와 허리에 쏟아져 내렸다.
공수 부대식의 사회관이 문제
부산 시민들을 마구 패는 공수부대 군인들에 대해 다방의 주방장 김석만군(당시 18)은 순진하게 그 불만을 표헌 했다. 포항 출신인 이 소년은 1979년 10월 20일 밤 8시 50분쯤 서면의 부산 진 세무서 앞길에서 공수부대 군인 옆으로 지나가다가 아무 까닭도 없이 불려 가 얻어맞았다. 김 군은 서면 로터리의 동국 빌딩 앞길을 지날 때 이번엔 민간인 두명이 군인들에게 얻어맞는 것을 보았다. 이 두 민간인은 택시를 서로 먼저 타려고 다투다가 군인들에게 붙들 려가 폭행을 당했다. 김석만 군은 화가 치밀었다.
동국 빌딩 계단을 쫓아 올라가 5층 옥상에 있던 음료수 공병 3개를 집어 길바닥으로 던졌다. 김군은 누구를 겨냥하여 던진 것이 아니라 화를 풀려고 아무 데나 던진 것이었다. 공병 깨지는 소리를 듣고 공수부대 소령이 즉시 근처의 경비 부대 40명 병력을 집결시켰다. 그리고는 이 「불순 건물」안으로 쳐들어갔다. 이 5층 건물 안엔 사무실이 많이 있었다. 한 사무실 안에선 여섯 명의 아가씨들이 계엄군 위문 바자회 준비를 하고 있었다. 군인들은 이런저런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사무실 안에 있던 24명의 서민들을 모두 지하실로 몰아넣고 무릎을 끓리고 두 손을 머리 뒤로 붙이게 했다. 이 젊은 소령은 부산 진 경찰서 수사 과장과 형사계 형사들을 호출했다. 이 소령은 아버지뻘 되는 서동백 수사 과장을 이끌고 건물 내부를 샅샅이 뒤졌다. 플라스크, 비커, 약품 병 따위 실험 기구가 많은 공해 대책 회사 사무실이 하나 있었다. 소령은 여기서 흥분하고 말았다.
『사제 폭탄을 만드는 비밀 공장을 드디어 발견했다』고 기고 만장에 하였다. 30년 동안 경찰관 생활을 하면서 온갖 풍상을 다 겪은 서 과장은 『이 장교가 돌았구나』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소령은 「비밀 폭탄 공장」을 샅샅이 수색케 했다. 자신의 추리를 뒷받침할 아무 단서도 발견하지 못하자 지하실로 몰아넣은 민간인들을 족쳤다. 김석만군은 자기 때문에 수많은 민간인들이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다 못 견뎌 『내가 했다』고 나섰다.
소령은 부산 진서 상황실에 있던 여단 임시 지휘 본부로 달려가 이 사실을 여단장에게 보고했다. 여단장은 소령의 흥분된 보고를 차분히 듣더니 싱긋 웃으며 『그것은 경찰에 넘겨 조사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이 소령의 경우가 그렇듯 공수부대 군인들은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특수 부대적인 단순 사고 방식으로 확대해석하고 거기에 맞추어 자신들의 행동도 과잉 반응으로 몰아가는 특징이 있다.
정병주 당시 특전 사령관은 『3여단을 부산으로 보낸 뒤 마산에서 시위가 터져 1,5여단을 추가로 투입하였다. 5여단은 마산에 위수령이 내려진 직후 들어갔는데 장기오 여단장이 아주 현명하게 대처하였다. 진입할 때 전군이 착검 하고 트럭에 타 시내를 질주하는 위력 시위를 벌여 기를 죽여 놓은 다음 시위가 사라진 뒤에는 새마을 청소 운동에 투입, 선무 활동을 벌였다.』고 했다. 특전사에선 부마사태의 진압을 성공적으로 평가했고 이런 자신감이 광주 사태에서 강경 진압으로 나서는 동기를 부여했던 것 같다. 광주 사태 때 3여단 장병들은 『우리는 부마사태를 진압했던 부대다』고 시민들에게 겁을 주기도 했었다.
왜 특전 사령관을 쐈니?
12.12사태의 주역도 공수부대였다. 전두환 합수 본부장 측의 승리를 결정 지은 것은 박희도 준장이 지휘하는 공수 1여단이 육군본부와 국방부를 점령하고, 최세창 준장의 제 3여단이 이웃한 특전사로 들이닥쳐 정병주 특전 사령관을 총격으로 체포한 일이었다. 수도권에 배치되었던 3개 공수 여단이 전 장군 편에 섰고 , 1개 여단만이 육본 측에 섰으나 이마저도 정규 육사 출신 장교단의 작용에 의하여 육본 측 명령에 따르지 않게 된 것이 전 장군의 승리를 보장하였다. 정 특전 사령관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유혈극은 특전사의 생리를 연구하는 사례이기도 하다. 이 총격전 속에서 부상당한 당시 3여단 소속 나영조씨(33. 식당업)를 만나 얘기를 들어보았다.
『나의 팀은 그날 5분 대기 중이었다. 대대장인 박종규 중령이 나에게 특전 사령관을 모시고 오라고 지시했다. 총을 쏘라든지, 납치하라든지 하는 지시는 없었다. 대위인 내가 이 명령의 배경을 알 수도 , 물을 수도 없었다. 나는 권총을 ,부하들은 M16소총을 들고 특전 사령 관실로 들이닥쳤다. 나와 부하 네 명은 안으로 잠궈진 사령관 집무실 문을 열려고 「문열라」고 소리치며, 손잡이를 비틀고, 두드리고, 차기도 했다. 안에서는 아무 대답도 없었고 그 안에 비서실장 김오랑 소령이 있는 줄은 더더구나 알 수 없었다.』
안에서 사격이 있었다. 박종규 중령은 오른손, 나는 문손잡이를 잡고 있던 손과 척추, 김모 대위는 배, 신현수 상사는 목에 총을 맞았다. 총을 맞은 부위의 높낮이가 다른 것으로 봐 안에서 두 사람이 각각 총을 쏜 것이 틀림없다. 우리는 쓰러졌고 , 바깥 복도에서 기다리던 내 부하들이 닫혀진 문을 향해 즉각 집중사격을 했던 것 같다. 왜 발포 명령 없이 부하들이 사령관을 향해 사격을 했느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직속 상관 상관 네 명이 총을 맞아 쓰러지는 것을 보고도 가만히 있을 공수 부대원은 없다. 우리는 비정규전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다. 「적 발견!」「사격 개시!」「사격 중지!」식의 명령에 따라 총을 쏘도록 배우지 않았다. 피아의 분간이 어려운 긴박한 상황에서 눈짓 하나로써 즉각 사격을 할 수 있도록 , 즉 조건 반사 적인 행동을 하도록 끊임없는 단련을 받아온 군인들이다. 더구나 한 팀은 혈육과도 같은 인간관계로 엮이어 있다. 동료가 다치면 눈이 확 뒤집어지게 돼 있다. 박종규 중대장이 이웃에 살고, 육사 후배인 김오랑 소령을 보고 사살했다는 이야기는 와전된 것이다. 부하들이 뒷문으로 돌아 들어가 보니 김소령과 정병주 사령관이 쓰러져 있더라고 했다.』
명령의 정당성 따질 겨를 없어
박종규 중령은 12.12사태 뒤 그리스 주재 한국 대사관의 무관으로 오랫동안 근무했었다. 박 중령이 이 사건으로 고민을 많이 했고, 그 괴로움을 잊기 위해 해외 근무를 자원 햇었 다고 한다.
나 소령은 자신의 행동이 12.12사태의 전개 과정에서 어떤 좌표에 있었는지 당시로선 전혀 몰랐다고 했다.
『일개 팀장이 정치적 상황을 어떻게 알 수 있나. 군인이 명령을 정치적으로 판단해서 행동할 수도 없고, 그렇게 한다면 군도, 나라도 망하는 것이다. 전두환 비리가 폭도 되면서 우리까지 같은 눈으로 보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다. 공수부대가 정치에 휘말리는 일도, 우리처럼 정치의 희생자가 되는 일도 다시는 없었으면 한다』
당시 정 특전 사령관의 참모였던 김 모씨는 『그때는 피아 구별이 안되었다. 똑같은 특전사 복장을 한 3여단 특공 조가 밀어닥쳤을 때 어느 누가 사령관을 납치하러 온 부대로 알았겠는가. 특전사에서는 가상적이 특전 사외 부에 있는 줄 알았지 내부의 3여단이 그렇게 할 줄은 몰랐다. 알았다면 충돌이 있었을 것이다』고 했다. 그러나 당시 작전 처장 신석식 대령등 정규 육사 출신으로서 전두환 장군과 가까웠던 참모들은 3여단 병력이 들이닥치기 전에 미리 연락을 받고 피해 버렸다. 적법한 명령과 지휘 체계가 어디 있는지 잘 알고 있었을 이들 장교들의 행동은 특전사가 과연 진정으로 국가에 즉 적법한 명령에 충성할 수 있는 부대인가에 대한 의문을 남겼다.
특전사의 법무 참모를 지낸 한 변호사는 『말단 부하들은 명령을 자의로 해석하거나 질문할 수가 없다. 그들에게 그런 것을 요구해서도 안 된다. 명령의 정당성 여부는 군 수뇌부의 책임에 속할 뿐이다』고 했다. 12.12때 육군본부. 국방부를 점령했던 공수 1여단에서 사병으로 근무했던 정모씨(모 방송국 프로듀서)는 『그때 우리 부대가 행주대교를 넘기에 대 간첩 작전을 하러 가는 줄로만 생각했다. 육군본부를 점령 하고서도 우리가 누구 편에 서 있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고 했다.
군대 조직의 특수성 때문에 대부분의 장병들은 긴박한 상황 속에서 내려지는 명령의 정당성을 판단할 여유도, 정보도 가질 수 없다는 증거다.
광주 사태의 예고편
계엄 확대 조치는 1980년 5월 18일 0시를 기해 발표되었으나 군 병력이 시위 진압 작전에 나선 것은 17일 오후부터였다. 이날 서울 영등포역 광장에서 시위가 있을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경찰은 전경들을 버스에 태운 채 역 앞 광장에 세워 두었다. 이 버스에 타고 있었던 김모 상경(33. 현재 기자)은 이렇게 말한다.
『갑자기 공수 부대원이 트럭을 타고 나타나더니 한 장교가 핸드 마이크를 잡고 경고를 했다.「즉시 해산하라, 1분 이내로 해산하지 않으면 강제로 해산시키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때 광장에는 시위 군중은 없었고 행인들만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1분이 지나자 그 대위는 「해치워!」라고 명령했다. 수십 명의 공수 부대원들은 진압봉을 휘두르면서 군중 속으로 돌진하더니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두들겨 패는 것이었다. 어느 노인이 대어들자 5-6명의 군인들이 그 노인에게 몽둥이질을 했다. 이건 진압이 아니고 집단 폭행이었다. 진압봉으로 머리를 안 때리도록 교육을 받는다고 하지만, 그때는 가려서 때리는 것 같지 않았다. 기술적으로 상처가 안 나도록 때리는 것도 아니었다. 30초만에 영등포 역전은 무인지경으로 변해 버렸다. 이것을 입벌리고 지켜보던 우리는 소름이 끼쳤다. 며칠 뒤 광주 사태 이야기를 듣고 나는 광주 시민들이 들고 일어 난 것이 충분히 이해되었다.』
김씨의 증언은 계속된다.
『그해 여름에 불량배 단속과 삼청 교육이 있었다. 나는 서울 미아 동의 파출소에 배속되었다. 공수 부대원과 함께 경찰의 안내를 받아 교육 대상자를 잡아오는 일을 했다. 진짜 불량배는 거의 달아나고 열심히 생업에 종사하고 있는 전과자들이 주로 잡혔다. 경찰관들에게 책임량(검거 대상 입원)이 할당 되 있어 무리를 해서라도 머리 수를 채우려고 했다. 파출소로 연행된 사람이 항의하면 그때부터 공수 부대원들의 무지막지한 구타가 시작되는 것이었다. 군화로 짓이기고 얼굴을 걷어차고 몽둥이질을 하고…바닥에 유혈이 낭자하고, 바깥에서는 가족들이 살려 달라고 애원하고… 나는 저들이 과연 동족인가, 하고 의심을 해보았다. 광주 사태가 끝난 뒤 전경들이 특전 사령부로 초대되어 그들의 진압 훈련을 구경한 적이 있었다. 그들의 훈련을 구경한 적이 있었다. 그들의 박력 있는 공세적 진압에 감탄하면서도 과연 저렇게 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경들은 방어적 진압에 주력하는 편인데 공수 부대원들은 적극적 강 공에 의존하고 있었다. 정호용 사령관은 우리들에게 훈시를 했는데 광주 사태의 진압을 자랑하는 내용이었다. 공수부대의 활약으로 제 5공화국의 탄생이 가능했다는 뉘앙스의 이야기를 했다』
제 2부 광주 사태의 초동 진압
광주 전사자 23명
「38420, 1980년 5월 24일 광주에서 전사, 육군하사 이영권의 묘」「육군 상사 정관철의 묘」「육군 상사 박억순의 묘」「육군 중사 최갑규의 묘」「육군 병장 이상수의 묘」「육군 일병 최필양의 묘」「육군 병장 변광열의 묘」, 김용식 , 김경손, 권석원, 이관영, 차정환, 김지호, 김인태, 권용문, 손광식, 권성찬, 김명철, 강용래, 이종규, 이병택, 변상진, 최연안.
국립묘지 제 29, 30묘역의 묘비명들에 쓰여진 이름들이다. 이들 23명의 전사 일자를 보면 1980년 5월20일 에 1명 , 21일에 3명, 22일에 3명, 23일에 1명, 24일에 11명, 25일에 1명, 27일에 2명, 28일에 1명이다.
20일의 사망자 육군 상사 정관철은 제3여단 16대대 소속으로서 20일밤 10시 10분쯤 전남대학교 앞에서 시위대가 몰고 돌진해 온 차량에 깔려 죽었다. 공수 11여단 이상수 병장 등 21일과 22일의 사망자 6명은 3개 공수 여단 병력이 광주 시내를 철수할 때 무장 시위대의 발포에 걸려 죽은 이들이다.
공수 11여단의 차정환 소령 등 24일과 25일의 사망자 12명은 11공수 여단과 광주 보병 학교 교도 대, 제 31사단과 광주 기갑 학교 하사관 생도를 사이에서 벌여졌던 두 차례의 오인 사격에 의한 피살자들이다. 20사단 소속 병장 이종규 등 27일과 28일의 사망자 3명은 계엄군이 광주를 탈환하는 과정에서 시민 군에 의해 사살된 이들이다.
23명의 사망자들을 그렇게 분류 해보면 광주 사태의 진행 과정이 하나의 윤곽으로 드러난다. 23명의 소속 부대는 공수부대 18명, 31사단 3명, 보병 학교 1명, 20사단 1명이다. 이 숫자로도 광주 사태의 주역은 무장 시위대와 공수부대였고 , 다른 부대는 조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국군은 죽어서 말한다」고 하는데, 이 29, 30묘역에 묻힌 군인들 23명은 이데올로기를 같이하는 휴전선 남쪽의 시민들에 의해, 그리고 피아를 구별하지 못했던 동료 군인들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는 면에서 1980년대에 한국이 겪었던 내부 갈등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1988년 5월 29일 (일요일)오전 10시, 눈부시게 화창한 늦봄, 화사하고 신선한 공기 속에 잠들어 있는 국립묘지 29묘역의 광주사태 전사자 묘비명 앞에 30대 청년 다섯 명이 모였다. 김동철, , , ,이명주(31) , 배동환씨(33) , 단 출신인 이씨는 5월 27일 새벽에 광주로 진입했다가 시민 군과의 교전에서 피격돼 팔에 부상을 입었다. 나머지 네 사람은 공수 11여단 출신들. 김동환, 씨는 5월 24일에 보병 학교 교도 대의 오인 사격으로, 김 철 씨는 5월 21일에 광주 시내에서 철수할 때 시민 군의 총격을 받고 가슴과 팔에 중상을 입었던 이들이다. 결혼한 지 몇 달 안 된다는 씨는 아내를 데리고 나타났다. 이들은 동료들의 묘비들을 둘러보면서 『올해는 더욱 쓸쓸한 것 같다』고 했다. 이들의 감희를 뒷받침하듯 정오까지 기다려도 더 나타나는 사람이 없고, 해마다 한번씩 열리는 추모회는 다섯 명의 참석자로 그야말로 조촐하게 끝이 나고 말았다.
광주 사태 전사자들을 국가유공자처럼 대우하여 추모 행사도 규모 있게 했던 적도 있었다고 한다. 1980-82년쯤까지는 특전사나 육군 본부 측에서도 신경을 써 주고 참배 객들도 많았다. 그 뒤로 차츰 시들해지더니 요 몇 년간은 군에서 화환 하나 보내 오는 적이 없고 모이는 사람들도 수백 명에서 수십명 수준으로 줄어들더니 올해에는 한자리수가 돼 버렸다는 것이다.
그 11일 전 5월 18일 광주 망월 동 묘지를 참배했었던 수만 인파와 비교할 때 광주 사태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는 것을 이 국립묘지가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한때 서로의 가슴을 향해 총을 겨누었던 사람들은 죽은 뒤에도 망월 동과 동작 동으로 갈려 누워 있고, 산 사람들은 화합을 부르짖으며 그 깊은 골을 메워 보려고 애쓰고 있으나 양쪽의 생각은 아직도 상대방의 주파수조차 찾지 못하고 있다.
이날 국립묘지에 나온 진압군 측 부상자들은 『요즈음은 우리가 죄인이 된 것 같다』 면서 『우리나 광주 사람들이나 똑같은 정치의 피해자가 아니겠는가』라고도 말했다.
부상자에게 돌아간 이세호 땅
광주 사태에서 부상당한 군인들의 숫자는 확실히 공개된 것은 없으나 1백여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후유증이 남아 원호 대상자가 된 사람은 40여 명이다.
이들 중 장교들은 전역할 때 약 1천 1백 만원, 사병. 하사관들은 6백만- 8백 만원의 위로금을 받았다.
이들 가운데 서울 거주자와 월남전 전상자 및 12.12사태 때 다친 공수 부대원 등 34명은 지난 81년 5월에 서울 송파구 문정 동에 있던 땅 3천 평을 정부 고시 가격으로 불하 받았다. 조창구씨(11여단 63대대장으로 부상)외 33명이 균등하게 분할하기로 하고 공동매입한 이 땅은 5.17 뒤 부정 축재한 재산으로 찍혀 국가에 환수된 전 육군 참모총장 이세호씨의 소유였다. 1인당 98평을 약 4백20만원씩에 샀는데 광주 사태 부상자들 등 28명은 지난해 토지 구획 정리가 끝나 1인당 22평으로 줄어든 이 땅을 1인당 약 3천 7백 만원씩에 팔았다. 세금과 최초 투자액을 제하고 1인당 약 2천 4백 만원씩의 순이익을 보았다고 한다.
부상자들 가운데는 씨처럼 일찍 퇴원하는 바람에 땅을 못 받은 이들이 더러 있다고 한다.
광주 사태 부상자와는 별도로 12.12사태 때의 부상자들도 있다. 특전 사령관을 연행하다가 일어난 총격전에서 사령관 비서실장 김오랑 소령(피살)이 쏜 총을 허리에 맞아 하반신 불수가 된 총을 허리에 맞아 하반신 불수가 된 공수 3여단의 나영조(소령 예편), 12.12사태 때 국방부를 유혈 점령하는 과정에서 수경사 병력으로부터 총격을 당해 머리를 다쳐 반신불수가 된 배정선씨 (상사)등 두 사람에게는 정부가 문정동의 땅 이외에 서울 가락동 농수산물 시장 내의 축협 공판장 구내식당 운영권을 주었다.
5공화국 비리 폭로에 바쁜 언론사에 가끔 광주 사태와 12.12사태 부상자들에게 국가가 특혜를 주었으니 폭로 해 달라는 제보가 들어오고 있다. 취재를 시작하여 하반신을 못쓰는 어느 부상자를 만났더니 『제발 전두환 비리와 같이 취급하지 말아 달라. 우리의 희생을 딛고 출세하여 이 나라를 말아먹은 이들 때문에 견디기 어려운 눈총을 받는 것이 서럽다. 우리 기질에는 도저히 사회생활을 못하겠다. 병신의 몸으로도 할 수만 있다면 다시 군복을 입고 싶다』고 내뱉듯 말했다.
1980년대와 5공화국의 그늘인 12.12사태와 광주 사태의 뒤안길에서 침몰해 간 것은 민중 뿐만은 아니었다는 얘기다.
7여단의 투입 배경
1980년 5월에 광주의 육군 전투 교육 사령부 참모장으로 있었던 장사복씨(예비역 준장. 현재 중앙 고속 관리 본부장)는 이렇게 말했다.
『1980년 5월 16일에 국방부에서 전군 지휘관 회의가 열렸고, 여기에 윤흥정 사령관이 참석하였다. 이 회의에서 공수 7여단을 조선대와 전남대에 주둔하게 한다는 방침이 결정되었다. 학생들을 등교시키지 못하게 하는 것이 이 여단의 임무였다. 이리 근방에 있던 7여단의 2개 대대는 17일밤 11시쯤 두 대학에 도착하였다. 2개 대대는 그 즉시 정웅 31사단장의 작전 통제하에 들게 되었다.』
이날의 전국 지휘관 회의는 사실상 5공화국의 탄생을 선언한 회의였다. 주영복 국방 장관의 주재로 열린 이 회의에서 5.17계엄 확대 조치와 함께 국가 보위 비상 대책 위원회의 설치를 제안한 것은 정호용 특전 사령관이었다고 한다.
당시 공수 7여단장은 육사 13기 출신인 신우식 준장이었다. 신씨는 예비역 소장인데, 지난 6월 초순 기자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2개 대대를 31사단에 배속시키고는 지휘 계통 선상에서 빠지게 되었다. 31사단장이 직접 우리 여단의 대대장을 지휘하게 되었다. 과잉 진압 운운하는데 군인은 명령대로 하는 존재이고, 그때의 시위가 불법 행동이었음을 모르고 하는 이야기다』
7여단은 4개 대대로 구성되었다. 이날 밤 31대대는 전주의 전북대학교로 제 32대대는 대전의 충남대학교로 진주했다. 공수부대의 주요 대학 점거는 광주에서만 있었던 일이 아니었다. 5월 18일 새벽 서울에서는 11여단이 동국 대학에 , 1여단이 연세 대학에 진주했던 것이다. 특전사의 한 장교는 『그때는 일선에서 부대를 뺄 수 없었으므로 지역을 맡지 않고 있는 공수부대를 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후방 사단의 병력이야 얼마 되지 않았다』고 했다.
바둑판. 배구공 갖고 가
광주에 투입됐던 공수 7여단 35대대장 김일옥 중령은 대구 사람, 33대대장 권성만 중령은 전주 사람이었다. 35대대 3중대장 박 병 수 대위는 전북 김제 사람이었다. 지금은 부평에서 한의사로 일하고 있는 박씨 (33세)는 『5월 17일 저녁에 트럭으로 여단 본부를 떠났는데, 대학에 진주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바둑판과 배구공을 가지고 갔다. 대학에 진주한다는 것을 놀러 가는 일 정도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박씨는 또 『우리 부대는 주둔지가 전북이라서 그런지 전라도 출신이 가장 많았다』고 했다.
『실탄은 개인별로 가져가지 않았으며, 소나무로 만든 진압 봉을 하나씩 들고 갔다』는 것이다.
시위 진압 기구는 진압봉과 사과탄이 전부였고, 방석모. 방패. 최루탄 발사 기는 없었다고 한다. 「특전사의 작전일지」는 5월 18일의 상황을 이런 요지로 기록하고 있다.
「18일 새벽에 전남대, 조선 대학에 진주한 계엄군은 학교에 남아 있던 40여명의 학생들을 연행했다. 오전 9시쯤 전남대학교에 들어가려던 학생들이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광주시 중심부 금남로로 이동, 계속 시위를 벌였다. 정오 무렵 33대대는 가톨릭 센터로 출동, 시위대를 해산시키고 1백 3명을 포고령 위반 혐의로 체포했다. 33.35대대는 다시 충장로와 금남로로 진출 시위자 2백 83명을 체포했다. 시위대는 블록과 음료수 병을 던지며 대항하였다」
군 측에선 전남대생의 투석을 광주 사태의 시발로 삼아 그 뒤의 진압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전개해 왔다. 이희성 당시 계엄사령관은 최근의 민화위 증언에서『전국 31개 대학과 1백 36개 보안 목표에 계엄군을 배치시켰다. 이 조치로 학생 시위는 중지되고 평정을 되찾았다. 단 하나의 예외가 전남 대학이었고 이로써 광주 사태가 시작되었다』고 했다.
당시 11여단의 대대장이었던 한 대령은 『조 기자는 「한국의 군부」란 기사에서 우리 군이 4.19때 시위 군중에게 발포하지 않음으로써 국민의 군대임을 보여주었고 부마 광주사태 때는 그러지 못했다고 썼던데 저는 견해가 다릅니다. 4.19때 시위 군중은 계엄군에게 돌을 던지지 않고 환영을 했는데 광주에서는 학생 쪽에서 먼저 돌을 던졌지 않습니까』라고 했다.
광주 시민 측에선 반역사적이며 사실상의 쿠데타인 5.17조치를 광주 사태의 시발로 보고 이에 저항한 전남대생의 시위를 정당한 것으로 평가하기 때문에 발상의 출발점부터가 다른 것이다. 군 쪽에서는 실정법을 시민 측에선 역사성과 도덕성을 판단 기준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7여단의 박병수씨는 『학생 편에서 돌을 던지니까 우리도 강하게 나간 것이다. 시위대가 군인이 나타났는데도 흩어지지 않으니 기분이 상하더라. 특히 동료가 돌을 맞아 다치니 부하들이 흥분하더라. 최근에 광주 사태 비디오를 보니까 우리가 너무 심하게 한 면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했다.
그러나 시민 측에서 본 7여단 진압 상황은 사뭇 달랐다. 당시 ㄷ 일보의 광주 주재 기자는 이렇게 증언했다.
『18일 오후 4시쯤 나는 광남 로터리 부근에 있는 고층 빌딩의 광고탑에 올라가 밑에서 벌어지는 데모 장면을 사진 촬영하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시내에선 데모대와 경찰이 충돌했을 뿐 군인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 시간, 저쪽 시 외곽 방면에서 군인들이 탄 트럭 수십 대가 달려오고 있었다. 로터리 앞에서 전원 하차하더니 대오를 정비했다. 그걸 보고 시위 학생들은 벌써 달아나 버리고 길가에는 구경 나온 시민들뿐이었다. 시민들 속에서는 군인들을 환영한다는 뜻에서 멋모르고 박수 치는 사람도 있었다.
공수부대 병력은 횡대로 늘어섰다. 장교인 듯한 사람이 핸드 마이크로 경고 방송인가를 하더니 그대로 시민들을 향해 돌격 명령을 내렸다. 군인들은 몽둥이로 무차별 구타를 시작했다. 수십 명의 시민들이 광고탑이 세워진 건물의 옥상으로 피신해 올라오는 것을 나는 광고탑 꼭대기에서 내려다볼 수 있었다.
얼마 안 있어 공수 부대원들이 뒤따라 올라왔다. 나는 「이제 죽었구나」고 생각했다. 군인들이 꼭대기에 있는 나를 발견하면 당장 요절을 낼 것 같았다.
나는 「하느님, 이번만 저를 살려주시면 성당에 열심히 나가겠습니다」하고 기도했다. 탑 아래 옥상에서는 무지막지한 몽둥이질이 벌어지고 있었다. 군인들은 야구 방망이 같은 몽둥이로 머리, 어깨 등 가리지 않고 두들겼다. 몽둥이가 머리를 칠 때 피가 분수처럼 튀어오르는 게 보였다.
군인들은 시민들을 끌고 내려갔다. 그들은 나를 발견하지는 못했다. 한참 있다가 광고탑에서 내려왔다. 계단은 온통 피 칠갑이었다. 양동이로 핏물을 부어 놓은 것처럼 아래 계단에까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바깥에 나가니 윗몸이 발가벗겨진 청년들이 「원산 폭격」을 하고 있었다. 군인들은 청년을 붙들면 웃옷을 찢어 머리를 덮어씌우고는 머리를 땅에 박게 하였다가 트럭에 던져 넣듯이 하여 어디론가 실어 가 버리는 것이었다』
27명이 타박상 자상 . 두부 손상
이 기자가 목격한 상황과 5월 17일 오후 영등포 역전 광장에서 벌어졌던 상황은 비슷하여 공수부대의 무차별적 진압 행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 훈련 때는 진압 봉으로 머리를 때리지 말라고 교육을 시키기는 하지만 실제 상황에서는 시위자와 행인, 남녀노소, 신체 부위를 가리지 않는 무차별적 구타로 변질하기가 일쑤였다. 더구나 시위대가 투석 등으로 저항하고, 동료가 다치는 것을 보았을 때 이들이 어떤 행동을 보였 을지는 쉽게 추정할 수 있겠다.
당시 전교사 참모장 장사복 씨는『경찰에 의한 시위 진압과 군의 진압, 그것도 계엄령 하에서 이루어진 군에 의한 진압을 같이 봐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시위 진압 교육을 할 때 보여주는 미군의 필름이 있었다. 계엄령 하에서의 진압 법을 가리킨 것이다. 이 영화에 따르면 시위자를 일단 붙들면 끊어 앉혀 놓고서, 반항하면 진압 봉으로 목 밑에 있는 쇄골을 때려 부러뜨려 행동을 세약 하며, 그래도 달아나면 사살한다는 식이다. 광주 사태 진압은 영화보다도 휠씬 온건하게 한 것이다』고 주장했다.
계엄사가 광주 사태를 진압한 뒤인 1980년 6월 5일에 발표한 민간인 사망자 통계에 따르면 총 1백 48명(뒤에 1백 60명으로 늘어남)중 총상 1백 18명, 타박상 15명, 두부손상 5명, 교통사고 3명, 자상 7명으로 나타나 있다. 소준열 당시 전남 북 계엄 분 소장은 88년 1월의 민화위 증언에서 『검시 결과 , 군인이 사용한 M16 총탄으로 죽은 시민은 45명뿐이었다』고 말했었다. 나머지 총상 사망자는 카빈 등으로서 시민끼리의 오인 사격에 의한 것이라는 얘기였다. 이 증언의 정확성은 일단 젖혀 두고라도 계엄사 통계에 나타난 타박상 15, 두부 손상 5, 자상7명 등 모두 27명의 사인은 거의가 몽둥이로 때리고 대검으로 찌른 결과임을 보여주고 있다.
당시 전교사에 근무했던 한 고위 장성도 기자 앞에서 이 통계에 대해서는 수긍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20명이 맞아 죽었다 」「7명이 찔려 죽었다」는 이 원시 사외 적 공포가 정글도 아닌 대도시의 대낮에 그것도 증인 환시리에 연출되었다는 것이 광주 사태가 확대 일로로 치달은 기폭제였던 것이다. 27명을 사살하는 것보다 27명을 찌르고 때려죽이는 것이 시민들의 동물적인 분노심을 더 자극하는 법이다. 광주 사태의 한 원인은 총구가 아니고 몽둥이와 대검이었다. 공수부대의 야수성은 시민들의 심성 속에 잠들어 있던 또 다른 야수성을 폭발시키는 뇌관이 되었고 , 그 뒤의 사태는 삼정과 감정의 대결, 증오와 증오의 대결로 치닫게 되었다. 7여단이 쓴 진압 봉은 전주의 목공소에서 만든 소나무 몽둥이었고 ,11여단의 진압 봉은 물푸레나무로서 길이가 70cm나 되고 아무리 세계 쳐도 부러지지 않을 정도였다. 이것으로 머리를 때리면 뇌 손상으로 충분히 사망할 수도 있다.
11여단에 출동 명령
18일 새벽에 동국 대학에 진주했던 공수 11여단장 최웅 준장은 18일 밤 정호용 특전 사령관의 방문을 받았다. 정 사령관은 『광주 사태가 심상치 않다.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 사람의 씨를 말리려고 왔다는 등 유언비어가 난무하고 있다. 서울 사람인 당신이 좀 내려가 주어야 겠어』라고 했다고 한다. 그날 밤 11여단의 1개 대대는 비행기편으로, 2개 대대는 청량리역에서 출발한 열차 편으로 광주로 내려갔다. 최 당시 여단장은 『전두환 보안 사령관으로부터, 최대한 자제하여 꼬투리를 잡히지 않도록 하라는 충고를 받고 내려 갔다』고 했다.
광주에 증강 투입된 11여단 3개 대대 병력 약 1천 명은 19일 새벽에 조선대학교 교정에 집결했다. 그들은 텐트를 치고 군장을 푼 뒤 오전 10시에 30여대의 트럭에 타고 광주 시내로 「위력 시위」를 나갔다. 위력 시위란 무장한 군인을 태운 트럭이 헤드라이트를 켠 채 클랙션을 울리면서 중앙선을 질주하는 것이다. 시위 예상 자의 기를 꺽어 놓겠다는 계산에서 하는 시위 예방책이다. 공수 부대원들은 진압 때는 대검을 소총에 꽂지 않지만 위력 시위 때는 착검 한다. 11여단의 위력 시위 때는 착검 한다. 11여단의 위력 시위 때는 착검 한다. 11여단의 위력 시위 대열이 충장 로에 이르렀을 때 2백여 명의 학생들이 돌과 화염병을 던졌다고 특전사 작전일지는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11여단의 공수 부대원들을 자극했다. 군인에게 , 그것도 위엄이 대단하다고 스스로 믿고 있던 공수부대에게 민간인이 도전했다는 데 대한 감정이 그 뒤 11여단의 행동에도 크게 영향을 끼친 심리적 동기가 되었다.
당시 11여단 63대대 소속의 김동철 병장은 『돌을 맞고 흥분하지 않을 군인이 어디 있겠는가. 계엄군에 돌 던지고 공공건물을 불태우는 사람은 폭도들뿐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럴 때 김일성이 쳐들어오면 어찌나 , 하는 생각이 들더라 우리 졸병들이야 명령 이외에 무엇을 아는가. 눈앞에 전개된 상황만 보고 판단하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어쨌든 그때는 시위자들을 증오하게 되었다. 대검으로 찔러라, 머리를 때려 라는 지시는 없었고 그렇게 하지 말라는 지시는 많았지만, 일단 맞붙으면 자제도 되지 않고 , 폭동 진압 훈련을 받은 대로는 되지 않더라』고 했다.
양대인 당시 전교사 참모장은 『공수부대가 위력 시위 도중 시위대의 습격을 받았다는 보고를 받고 놀랐다. 군중들이 그들에게 둘러싸인 계엄군 장갑차의 잠망경을 부수고 해치를 열려고 해서 안에 있던 소대장이 위협사격을 했다는 보고를 받은 기억도 난다. 18일 7여단에 이어 19일엔 11여단, 20일엔 3여단, 21일엔 20사단 병력을 잇따라 불러 내리게 된 것도 당초에 이런 사태를 예기하지 못해 병력의 축차 투입이라는 나쁜 진압책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했다.
당시 11여단의 대대장이었던 한 대령은 『우리는 시위 진압용이라고는 진압 봉하나 밖에 없었다. 방석복, 방패도 없었다. 안면을 보호하는 방석망 조차 없었다. 할 수 없이 현지에서 철사를 구입하여 손으로 만들어 철모에 매달았다. 하도 엉성하여 작은 돌을 맞아도 찌그러지면서 얼굴을 때리는 한심한 상황이었다』고 했다.
그는 또 『한 중대의 반 이상이 부상을 당해 진압에 나설 수 없는 상황이 되기도 했다』고 주장했다.
11여단 참모장이었던 양대인씨는 『공수 부대원이 돌을 맞고 쓰러지는 장면은 왜 사진이나 비디오에 안 나오느냐』고 불만을 표시했다. 당시 11여단의 대대장 출신의 현역 대령은 『과잉 진압이란 표현에는 불만이다. 이희성씨가 그런 표현을 썼다고 하는데 그분이 언제 현장에 나와 본 적이 있나. 대대장 위만 돼도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 나는 흥분된 양쪽이 부딪쳐서 스파크 현상을 일으킨 것이 광주 사태의 본질이라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11여단의 부 지역 대장 씨(40. 회사원)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곳에서 부상당해 한쪽 다리를 못쓰고 있다. 광주시민이나 우리나 같은 피해자다. 차라리 진상 조사가 철저히 됐으면 좋겠다. 너무 군인들만 몰아 붙이는데, 나는 내 부하가 시위대의 APC장갑차 돌진에 의해 치어 죽는 것은 목격했었다. 우리는 광주로 갈 때 어떤 상황인지 전혀 이야기를 듣지 못했고, 어떤 선입견 없이 진압에 임했다. 공공건물을 불태우고, 군인에게 돌을 던지고, 동료가 다치니까, 아무리 부하들 말려도 강경 진압이 되지 않을 수가 없더라 . 진압 봉 하나밖에 없는데 그런 식으로 진압하지 않으면 우리가 돌에 맞아 죽을 판인데 … 우리 부대에는 전라도 사람들이 많은데 그들이 지리에 밝아 더 열심히 진압에 나섰다.』
11여단 소속 사병이었던 씨는 『조선대학교 CP에서 광주가 고향인 한 동료가 집으로 전화를 걸었더니, 가족이 믿지 않는 것이었다. 전라도 출신이 진압군으로 내려왔을 리가 없다고 하는 것이었다. 우리 여단의 김모 소령은 전라도 사람이었다. 지역 대장으로서 진압 일선에서 악전고투했는데, 동생이 시민 측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하더라』고 했다.
실탄은 지급 않아
당시 11여단 참모장 양대인 중령은 조선대학교의 여단 사령부에서 시위 현장에 나가 있는 세 대대장들과 무선으로 연락을 하고 있었다.
『상부에서는 절대로 시
제 1부 공수부대의 생리
왜 쏘았니, 왜 찔렀니
학생 운동권 노래인 「5월」의 가사에는 「왜 쏘았니/ 왜 찔렀니 / 트럭에 실려 어디 갔니」란 대목이 있다. 이 물음에 대답해야 할 쪽은 광주 사태에 투입되었던 제 3, 7, 11 공수 여단의 장병들이었다. 그들은 지난 8년간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국방부와 계엄사의 무미건 조한 발표문 이외에 공수부대의 견해를 표현한 글은 몇 안 되었다.
광주 사태에 대한 정보는 시민들을 폭도라고 표현한 정보는 시민들을 폭도라고 표현한 정부 쪽의 것이 선행하더니 1985년을 기점으로 하여 광주 시민쪽에서 쏟아져 나온 인쇄물과 비디오가 정부 쪽 정보를 압도하였다. 지난 5월의 언론도 전폭적으로 광주시민쪽에 서서 광주 사태를 조명하였다.
국회에서 구성될 광주사태 진상조사 특위는 군, 특히 공수부대쪽을 겨냥하게 될 것이다. 시민쪽 이야기느 알려질 만큼 알려졌으니 이제는 군대가 답할 차례가 된 것이다. 특위가 마련한 도마 위에 올라설 쪽은 공수부대인 것이다. 정부 . 여당에서는 오래 전부터 이런 조사에 대비해 왔다.
당시의 작전일지 등을 정리하고, 사망자 부검 소견서 등을 챙기고, 국방부 차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대책위원회를 가동시켜 대응논리를 다듬는 등 다가올 일전에 대비하고 있다. 이 일전은 총과 몽둥이, 그리고 칼로써 진행된 광주사태처럼 피비린내가 나는 것은 아니고, 말로써 하는 것이지만, 역사적 평가에 있어서는 실전보다도 더 중요한 의미를 던질 것이다.
광주 사태는 기자 개인으로도 잊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순전히 직업적 호기심을 갖고서 광주 사태의 현장에 뛰어들었던 기자는 이 출장이 꼬투리가 되어 잠시 기자임을 중단해야 하였다. 지난 85년 7월 호 월간 조선에 광주 사태 특집을 싣기 위해 다시 광주로 내려가 그 5년 전의 상황을 재현하려고 노력한 적도 있었다. 광주 사태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두면서 기자는 한가지 아쉬움과 부족함을 느끼고 있었다.
취재하기 쉽다고 해서 너무 시민 이야기만 소개하다가 보니 진상의 한쪽만, 즉 「광주시민의 광주사태」를 주로 보여주게 되었다. 그동안 월간조선에 실린 10여건의 기사들도 모두 광주시민쪽의 시각에서 쓰여진 것이었다. 어떤 사물의 진상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입체적으로 살펴야 한다. 광주사태의 다른 한 면, 「공수부대의 광주사태」에 대한 취재 없이는 이 대사건의 윤곽을 그릴 수가 없는 것이다.
기자가 국회 특위의 구성과 시점을 맞추어 「공수부대의 광주 사태」를 취재하기로 한 것은 지난 취재 활동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되었다. 지난 한 달간 기자는 공수 3, 7, 11여단 ,31사단, 20사단 등 5개 관련 부대 (부대 명은 이미 공개돼 버려 그대로 쓰기로 한다. 지휘관들의 이름도 마찬가지)에서 광주 사태에 참여하였던 23명의 현. 전직 군인들을 만났다.
공수여단장, 계엄분소장, 참모장, 대대장, 지대장, 운전병, 하사관, 부상자 등등 …. 연 3백 시간에 걸친 이들과의 인터뷰를 통해서 그들이 「인식하고 있는 광주사태」를 여기에 소개하려고 한다. 그들이 말한 광주사태는 「사실로서의 광주사태」가 아니라 그들이「인식하고 있는 광주사태」이다. 객관적 사실과 어긋나는 부분도 많지만 군인들이 광주사태를 어떻게 인식했느냐는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여기 소개할 공수 부대원들의 증언에 대해 기자는 찬동하지 않는 부분도 많지만, 시민측 증언과의 형평을 위해서, 또 광주 사태의 진상을 밝히는 기초 자료서 가능한 한 수정없이 소개하기로 하였다.
피해와 가해의 관계로 엮인 사람들 사이에서는 객관적 자세라는 것이 불가능하다. 군인이나 시민이나 자신들에게 불리한 것은 감추고 유리한 것만 강조하는 방향으로 증언하려고 하는 점에선 같다. 지금은 그런 문제점 있는 자료라도 많이 수집하는 일이 중요한 단계인 것 같다.
시민의 논리 대 군인의 논리
군인들을 취재하면서 기자는 묘한 단절감을 느낀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뭔가 주파수가 맞지 않아 대화가 잘 통하지 않는 듯한 느낌, 심하게 말하면 통역이 필요할 정도로 상대방의 뜻을 이해할 수 없다는 답답함, 그런 것들이 있었다. 취재를 끝낼 무렵에야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기자는 민간인의 논리로써, 군인은 군대의 논리로써 광주사태를 설명하고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려고 하기 때문에 말은 통하나 뜻이 잘 통하지 않는 것이었다.
전남 고흥이 고향인 한 11여단 사병 출신은 『군복을 입고 있을 때는 우리가 과격한 행동을 했다는 자각이 없었으나 제대한 뒤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런 자각이 새삼 들더라』 고 했다.
광주 사태를 군복을 입은 쪽에서 보느냐, 벗은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생각이 이렇게 달라지는 것이다.
군인들은 계염령 하의 시위는 불법이니 이들 「군대식」으로 진압한 것은 당연하다고 했다. 군대식 진압이란 목표를 수단 방법 안 가리고 달성한다는 것이다.
『진압이면 진압이지 과잉 진압이 따로 있느냐. 고지를 공격할 때 소총으로 점령하든 박격포로 하든 목표 달성이란 결과는 같은 것이다』
『군대의 작전은 비록 그것이 자국민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 해도 기본적으로 상대를 적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잘못되었다면 군대를 동원한 고위층, 그런 군대를 불러들인 국민 쪽이다.』
『우리가 무얼 잘못 했느냐』고 대어드는 사람들도 많았고 기자가 지난 6월호 「한국의 군부」에서 쓴 광주 사태의 기본 성격에 대해 흥분하는 장교들도 있었다. 국회 특회의 진상 조사는 결국은 양쪽 논리의 공방전이 될 것이다. 정부의 한 고위층 인사는 『정치에서는 일단 공방전이 되면 크게 걱정 할 것이 없다』면서 느긋한 자세를 보였다. 공방전을 통해서 많은 자료가 드러날 것이고 노출된 정보를 근거로 하여 국민들이 나름대로의 판단을 내릴 것이고 이런 낱낱의 평가들이 하나의 흐름을 형성할 때 비로서 역사적 평가로 굳어질 것이다.
광주 사태에서 있었던 공수부대의 행동 논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공수부대란 특수한 조직의 생태에 대한 약간의 역사적 분석이 선행되어야 할 것 같아 공수부대의 과거 행적에서부터 기사의 실마리를 풀어 나가기로 하였다.
집권자가 써먹기 좋은 부대
한국 육군에 공수 단이 창설된 것은 1960년이었다. 그해 6월 전두환. 최세창. 장기오 차지철 등 네 대위는 미국 포트배닝의 특수 전 교육 기관에서 6개월 동안 늪지. 산안. 생존 훈련등 이른바 「레인저 트레이닝 코스」를 거쳤다. 이 과정을 마친 네 명은 다시 낙하 훈련을 받고 귀국하여 공수단 창설 요원이 되었다.
공수단이 한국의 현대사에 처음 등장하는 무대는 5.16이다. 1961년 5월 15일 밤 박정희 소장은 쿠데타 지휘 본부인 6관구 사령부에 갔으나 부대 동원이 제대로 되지 않자 김포의 공수단 사령부로 갔다. 단장인 박치옥 대령을 구슬러 병력을 동원하도록 하였다.
박치옥 대령의 출동 지연에 갑갑증을 느끼고 있었던 차지철 대위 등은 그때 무기고를 때려 부수고 있었다. 이 장면을 박 소장이 목격하였다. 고 박정희 대통령이 차지철을 끝까지 신임하여 무덤까지 동행하게 된 것도 절대 절명의 위기 속에서 보인 차씨의 충성심을 박 대통령이 평생 잊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강 다리를 넘어 서울로 들어오는 데 앞장을 선 것은 김윤환 준장이 지휘한 해병 여단이었다. 김 준장은 평소에 『해병대가 반란군의 선두에 서면 누가 정권을 잡든지 해병대를 없애 버리려 할 것이다』고 생각하여 공수단의 뒤를 따르려고 했으나 이날 공수단의 출동이 늦어지는 바람에 해병대가 선두, 공수단이 그 뒤를 따르게 되었다.
김씨의 걱정대로 해병대는 그 뒤 해군으로 편입되었고 , 공수단은 확장 일로를 걷게 되었다.
1969년 특전 사령부가 창설되었다. 제 1공수 여단을 모체로 하여 여단이 잇따라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특전사의 모체인 공수 1여단은 엘리트 의식도 강하다. 전두환, 박희도 장군이 1여단장 출신이며, 노태우 준장은 9여단을 , 정호용 장군은 나중에 광주 사태에 최초로 투입되었던 7여단을 창설한 사람이다.
공수 1여단은 1976년 8월에 한반도를 전쟁 일보 직전까지 몰아넣었던 도끼 만행 사건 때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때의 여단장 박희도씨(전 육군 참모총장)는 최근 펴낸「돌아오지 않는 다리에 서다」란 회고록에서 비화를 공개했다. 그때 한미연합사에서는 문제의 미루나무를 자르기로 하고 병력 1백 10명을 보냈는데, 64명은 1여단에서 유엔군 사령관은 비 무장 상태로 들어가 절단 작업을 하도록 지시했으나 박 여단장은 박 대통령의 특명에 따라 무장한 64명을 보내 북한측이 설치한 도로 차단 시설물 등을 철거했다. 특공조는 북한측 경비병이 돌아오지 않는 다리의 중앙선을 넘을 때는 발포해도 좋다는 명령까지 받고 있었다. 기습적인 미루나무 절단 작업을 보고 우왕좌왕하던 북한 군인들은 돌아가버렸다. 이순간이 한반도가 6.25이후 전쟁에 가장 가까이 다가갔던 순간이 라고 박희도씨는 말하고 있다.
역대 육군참모총장 가운데서는 공수부대에 대해서 못마땅한 시각을 갖고 있었던 이들도 있었다. 1979년 초 무장 공비가 내륙 깊숙이 침투했다가 공수○여단 관할 지역을 지나 북으로 돌아간 사건이 있었는데, 이로 해서 이세호 총장은 특전사를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고 한다.
미8군에서도 박정희 대통령이 공수 단 병력을 증강시키는 데 대하여 의구심을 갖고 대했다. 그들은 한국군이 독자적인 작전 능력을 갖는 것을 경계했을 것이다. 정계지 육군참모총장은 정병주 특전 사령관에게 『위컴 사령관에게 공수부대의 증강 필요성을 납득시켜야겠는데 자료를 제시해 달라』고 한 적도 있다고 한다. 유신 시대부터 특전사의 3대 임무는①비정 규정②대 비정규전 ③충정 작전이다. 충정 작전이란 폭동 진압을 뜻한다. 특전사의 모토는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라」와 「사나이가 한번 죽지 두 번 죽나」이다.
정병주 전 특전 사령관은 공수부대가 폭동 진압 부대나 쿠데타 부대로 이용된 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공수부대는 집권자로서는 아주 써먹기 좋은 부대이다. 기동성이 있고 경량 화돼 있어 간편한 부대이다. 전투력은 또 일당백이 아닌가. 더구나 일선 부대를 빼낼 때처럼 미군과의 절차 문제 등에 대해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친위 의식 강조되고 국민을 경시
공수부대는 특수부대로서 여러 가지 특별 대우를 받기도 하였다. 차지철 경호 실장이 특전사 안에 지어 준 특전 회관은 군 시설로서는 호화로운 편이다. 12.12사태 뒤에는 전두환 노태우씨 부부 등 권력층의 핵심들이 이곳에서 파티를 열기도 했다.
특전사 출신의 두 대통령, 두 참모총장, 다섯 경호 실장에다가 대통령 경호원도 많고, 국군의 날에는 가장 화려한 각광을 받는 것이 특전 용사들의 무술 시범과 공중 묘기였다.
5.16과 12.12사태를 통해서 두 번의 군사 정권을 창출하는 데 앞장섰던 특전사의 장병들은 그런 이력을 자랑하고 친위 부대 의식과 우월감에 차 있더라는 것이 광주 사태 직전에 이 부대에 근무했던 한 장교의 이야기다.
군사 정권 시절에 군이 정치의 영향을 많이 받을 때는 장교들도 계급보다 권력과 얼마나 가까운가에 따라서 그 영향력이 달라졌다. 이런 점에서 특전사는 지난 4개 반세기 동안 집권층과 그야말로 특수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정병주 전 특전 사령관도 『부하 중에는 정치에 너무 민감하게 행동하는 이들이 있어 통솔에 신경이 쓰였다』고 말했다.
한 야전군 장성은 이런 말을 했다.
『우리처럼 휴전선의 일정한 지역을 맡으면 이곳이 뚫렸을 때 국가가 위태롭게 된다는 생각이 저절로 난다. 땅에 대한 애착심이 생기고 그곳이 애국심으로 승화되는 것을 구체적으로 경험하고 있다. 공수부대처럼 어떤 지역도 맡지 않고, 서울 근교에 있으면서 수도권의 정치 동향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부대의 성격의 프로페셔널해질 때 과연 국토와 국민에 대한 애정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
집권자를 향한 충성심이 강조되고 대 국민 관계가 소흘히 되는 조직은 「국민의 군대」로서는 한계가 있다는 얘기였다. 한때 군에서는 보안사, 특전사, 수경사를 3사라 하여 권력 핵심부와 가까운 인물들이 거치는 필수 코스로 보기도 하였다. 5공화국이 들어선 뒤로는 특전사 인맥의 전개가 다른 2사를 압도했다.
전두환, 노태우 두 현. 전직 대통령과 국방 장관을 거쳐 13대 민정당 의원이 된 정호용씨는 준장 시절)(1970년대 후반)에 동시에 1, 7, 9공수 여단장을 지냈던 이들이다.
차지철, 정동호, 장세동, 안현태씨 등 전. 현직 대통령 경호 실장 다섯명이 공수부대 출신이다. 정동호씨는 전두환 공수 1여단장 밑에서 부 여단장, 장세동씨는 정호용 특전 사령관 밑에서 작전 참모를 하다가 3여단장과 사단장을 거친 뒤 경호 실장이 되었었다. 안현태씨는 전두환 여단장, 이현우씨도 노태우 여단장의 직속 부하였다. 정호용, 박희도 두전 육군 참모총장도 공수 여단장 출신이다.
이밖에도 안 모군 단장 , 정 모군 단장, 안 모 사령관 , 참모 차장, 심모 중장, 육본의 이모 핵심 참모 부장 등 현직 군 수뇌부의 많은 사람들이 공수단 출신이다. 최세창 합참의장과 장기오 전 총무처장관은 공수단 창설 요원 중의 한 사람이었다.
프로 집단
공수부대는 일반 군부대와는 구별되는 특이한 성격을 갖고 있다. 최소 단위인 팀(지대, 중대라고도 함)은 전문 화돼 있다. 작전. 정보 기능 , 화기 전문, 폭약 전문, 의무, 통신 등등. 의무 전문은 침술을 배워 비상시에 응급 처치를 하도록 훈련받고 있다. 호남 지방에 주둔하고 있는 모 여단에서는 대민 봉사 사업의 일환으로서 주민들에게 침술 치료를 해주고 있다.
공수부대는 계급 구조가 매우 높은 부대이다. 분 대규모인 1개 지대(팀)는 두 명의 장교와 하사관 및 병으로 구성되는데, 지 대장은 대위다. 이 대위는 일반 부대의 대위 같은 대우를 받지 못하고 훈련 때는 직접 텐트 치고 호를 파는 등 사병들과 같이 생활해야 한다.
공수 부대의 기간 조직은 하사관이다. 이들은 거의가 5년 이상의 장기 복무 의무자들이다. 이런 하사관들은 고된 훈련을 통해서 사고의 단순화 , 행동의 자동화를 강요받는다. 이들을 이끌고 있는 장교 집단은 엘리트 의식과 정치에 대한 민감한 관심을 갖고 있어 일반 부대와는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공수부대의 평소 훈련은 ①낙하 준비 훈련② 태권도③사격 훈련이다. 육군의 사격 대회에서는 으레 공수부대가 상위를 독점하다시피 한다. 공수부대는 1년 중 약 4개월 동안 낙하 훈련과 천리 행군으로 해서 부대를 떠나 산야를 누빈다. 천리 행군이란 글자 그대로 산 속의 천리는 도보로써 주파하면서 갖가지 비정규전 훈련을 받는 것을 말한다. 악전고투의 훈련과 생사를 넘나드는 낙하를 경험하면서 생사를 넘나드는 낙하를 경험하면서 공수 부대 원들은 혈연보다도 더 끈적끈적한 인간관계를 갖게 된다.
이런 단결심은 외부에 대해서는 배타적 증오감으로 표출될 수도 있다. 특히 동료가 피해를 당했을 때는 아들이 얻어맞는 것을 본 부모의 반응처럼 조건 반사적으로 나온다. 더구나 이들은 평소의 훈련을 통해서 비상 상황 아래서는 조건 반사적인 기만한 행동을 하도록 끊임없이 단련되고 있다.
조건 반사적 행동의 폭력 사고
공수 부대 원들의 훈련 낙하 고도는 약 4백m착지 할 때까지는 약 57초가 걸린다. 착지 충격은 3층에서 뛰어내릴 때와 같다.
낙하할 때 공수 부대 원들은 50kg이 넘는 군장을 지게 된다. 소총을 메고, 2개의 낙하산과 비상식량, 실탄 등을 앞뒤로 메어야 한다. 원래는 한 팀이 1인당 1초 간격으로 뛰어내리도록 돼 있으나 실제로는 4초 사이에 10여명이 허공으로 빨려 나가듯 우르르 뛰어 내린다고 한다. 55회의 낙하 경험을 가진 소령 출신 나영조씨(33)는 『첫 점프는 꼭 지옥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꿈꾸듯 뛰어내렸으니 공포감을 느낄 여유도 없었다. 처음에는 그냥 조건 반사적 으로 뛰어내리다가 보니 한 열 번쯤 점프를 한 뒤로부터 비로서 무섬증을 느끼게 되는 것이었다』고 했다.
허공에 몸을 내던진 군인은 『일만, 이만, 삼만, 사만 …』을 세고 위를 쳐다본다. 점프 4초 뒤 낙하산이 펴지는 것을 확인하는 절차다. 펴져 있지 않으면 가슴 앞에 달려 있는 예비 낙하산을 잡아당긴다. 4백 m를 낙하산 없이 떨어지면 8초가 걸리므로 낙하산이 펴지지 않은 것을 확인한 뒤, 예비 낙하산을 펴는 행동에는 4초의 여유밖에 없다.
낙하할 때는 땅을 보지 않도록 돼 있다. 땅 바닥을 보면 미리 생각하고 행동을 준비하기 때문에 다칠 염려가 있다는 것이다. 즉, 접지 하자마자 자동적으로 몸놀림이 이뤄질 수 있도록 돼야 다치지 않으며 이런 행동이 가능하도록 반복 훈련을 시키는 것이다.
적의 후방에서 게릴라전을 하도록 돼 있는 공수 부 대원은 그 행동이 자동화, 본능 화, 조건반사 화 되도록 관리된다. 이런 특질을 가진 그들이 과격한 시위대와 부딪쳤을 때 어떤 행동을 즉각적으로 보일 것인가? 그 답이 부마. 광주 사태 였다.
특전사에서는 공수 대원들이 민간이나 다른 군부 대원을 상대로 사고를 내어도 자체적으로는 처벌을 하지 않으려 하고 감싸주는 분위기라고 한 법무 장교는 말했다. 『특수부대는 사기가 가장 중요한데 상관이 부하들 감싸주지 않으면 통솔이 안 된다』는 것이다. 공수부대의 사고는 주로 폭력을 수반한 것이 많다고 한다. 한 법무부서 제대병은 네 가지 사례를 들었다.
공수부대의 이런 폭력 성향에 대해 정병주 전 특전 사령관은 『부하들에게 그 점에 대하여 주의를 많이 주었다. 전쟁이 터지면 적진에 침투 , 민간인들의 협조를 받아 전투를 수행해야 하는데 민심을 얻으려면 너무 난폭하게 대해서는 안된다고 타일러 왔었다』고 했다. 한 공수 부대 출신 장성은 『공수부대는 광주에서 처음에는 마치 적진에서 적을 상대하듯 작전을 편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했다.
부마사태 때 공수 단 투입
1979년 10월 17일 밤 9시를 넘은 시각이었다. 총장 공관에 있던 정 화 육군참모총장은 청와대로 빨리 들어오라는 전갈을 받았다. 그날 노태우 국방 장관은 한미 국방 장관 회담에 참석하러 서울에 온 미국 국방 장관 브라운을 접대하고 있었으므로 정 총장이 불려 간 것이었다. 대통령 집무실에는 박 대통령, 김전규 정보 부장, 김규원 비서실장, 차지철 경호 실장, 법무 담당 특보가 앉아 있었다. 대통령은 정 총장에게 앉으라고 하더니 김전규 정보 부장에게 부산 상황을 그에게 설명해 줄 것을 지시했다. 설명이 끝나자 박 대통령은 침착하게 말했다.
『정 장군, 현행법에는 육군참모총장이 치안 유지를 경찰이 할 수 없다고 감지했을 때 직접 계엄 선포를 한 뒤 추인을 받을 수 있게 돼 있소. 지금 각의를 소집하자니 시간이 너무 늦을 것 같아 그러니 정 총장이 부산 지역에 계엄을 선포한 뒤 추인을 요청해주지오』
대통령은 지역 계엄 사령관으로는 누가 적당하냐고 물었다. 정 총장은 신직수 군수 사령관을 추천했다. 차 실장이 전화로 박 사령관을 불러내더니 정 장군에게 전화기를 건네주었다. 전 총장이 박 사령관에 계엄 선포 사실을 알리고 병력 배치를 지시하려고 하는데, 대통령이 갑자기 『정 장군, 잠깐 기다려요』라고 했다. 박 대통령은 시계를 보더니 『11시에 국무회의를 할 수 있겠는데… 정 장군 계엄 준비만 해 두시오!』라고 말했다.
박 사령관은 부산에는 실 병력이 충분하지 않다고 정 총장에게 말했다. 박 대통령은 어느 부대를 신속히 투입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정 총장은 가장 신속하게 투입할 수 있는 부대는 공수 여단이라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차 실장 ! 1개 여단을 동원해!』라고 했다. 깜짝 놀란 정 총장은 『각하! 공수 단은 실장이 명령할 수 없습니다.』고 했다. 대통령은 『그런가?』라면서 씩 웃었다.
정승화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날 밤 1개 여단이 부산으로 공수되었습니다 며칠 뒤 공수 단이 부산에서 일반 시민들에게 과격한 행동을 했다는 보고를 받고, 즉각 시정하라고 지시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공수부대를 동원한 것은 신속한 투입을 생각해서 취한 조치였는데, 나중 광주 사태 때도 그런 일이 있었더군요. 특수부대를 시위 진압에 동원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진압 봉의 공포
부마사태 때 부산에 투입되었던 공수 3여단(이하 기사에 나오는 부대명과 지휘관 이름은 군 당국이 이미 공개했고, 군 당국의 지원 하에 출판된 책 등에도 나온 것들이다) 의 나영조 당시 대위는 이렇게 말했다.
『79년 10월 18일 새벽 김해공항에 내리니까 자칫하면 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송 부대장이 부하들에게 지시하는 것을 들었는데, 시위대를 만나면 차를 구할 생각은 하지 말고 우선 달아나라고 하지 않는가. 파출소가 불탄 것을 보고, 국민들이 이럴 수가 있는가, 생각했다. 우리보고 과잉 진압했다고 한는데, 우리는 그때 몸은 지치고, 신경은 날카 로와져 있었다. 구덕운동장에 텐트를 치고 , 3일간 특전 식량으로 식사를 하면서, 하루에 8-9시간씩 거리에 나가 부동자세로 서 있으니 악이 받칠 수밖에 없었다』
부마사태에서 공수부대가 한 역할은 과장된 면이 많다. 1979년 10월 18일 0시를 기해서 부산에 비상 계엄령이 내려지자 공수 제 3여단이 평화시 규모로는 사상 최대의 야간 공수 작전 끝에 부산에 도착했고, 이 병력은 18일 저녁 8시쯤에 딱 한번 시위대와 부딪쳤다. 부산시 중구 남포동에서 3백 명의 시위대가 거리로 나서자 공수부대 1개 대대는 순식간에 이들을 박살내 버렸다. 그 뒤로 공수부대가 한 일은 시위 진압이 아니라 주로 행인들의 구타였다.
부산 동래구 동상 동에 사는 신희철씨(회사원 . 당시 37세)는 18일 밤 8시 50분쯤 서구 충무 동 상륙 다방 앞에서 공수부대 군인들에게 끌려가 개머리판으로 얻어맞아 머리를 크게 다쳤다. 뇌 좌상과 뇌 경막 손상을 당한 그는 뇌수술까지 받았다.
부산진구 당감 동에 사는 금은방 종업원인 전병진씨(당시 32세)는 계엄령 첫날인 10월 18일 밤 9시 30분쯤 서면 태화 극장 앞 택시 타는 곳에서 택시를 먼저 잡으려고 찻길로 조금 나가 서 있었다. 앞당겨진 통행금지 시간이 30분밖에 남지 않아 시민들은 서로 먼저 타려고 법석을 떨고 있었다. 이때 공수부대 한 소대 병력이 찻길을 따라 남쪽으로 행진해 오고 있었다. 그들은 앞에 걸리는 사람들을 청소하듯 해 버렸다.
술에 조금 취해 있었던 전씨는 미처 피할 틈도 없이 당했다.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몇 대나 맞았는지 구둣발로 얼마나 채였는지 알 수 없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정차한 택시 꽁무니에서 몸을 피하고 있었다. 공수부대 군인 네 명이 다시 그를 끌어내 발길질과 개머리판으로 녹초를 만들었다. 그는 쓰러졌다. 군인들이 다 지나갔을 때 그는 벌떡 일어났다. 얼굴에서 피가 쏟아지고 있었다. 갑자기 머리가 핑 돌았다. 지하도를 건너서 한독 병원을 찾았다. 진단을 해보니 앞니 다섯 개가 부러졌고 오른쪽 귀 위의 머리뼈에 분쇄 골절이 생겼음이 드러났다.
칠성 음료 주식 회사에 다니는 최홍일씨(25)는 그날 밤 8시쯤 동료 직원 네 명과 함께 영도다리를 걸어서 시청 쪽으로 오고 있었다. 사람들이 밀리자 공수부대 군인들은 길을 막고 인도에서 줄을 서서 차례로 걸어가라고 했다. 시민들은 시키는 대로 줄을 서서 시청을 지나 버스 정류소 쪽으로 갔다. 상공회의소 앞 육교 밑에서 그들은 군인들이 보내 주어서 왔다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그들은 길바닥에 끓어 앉혀졌다. 군인들은 개머리판과 진압 봉으로 머리 . 어깨부터 때리기 시작했다. 최홍일은 얼른 안경을 벗어 호주머니에 넣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얼굴을 숙이는 것과 거의 동시에 군인의 무릎이 그의 안경 낀 얼굴을 강타했다. 왼쪽 안경알이 깨어지면서 유리 조각이 눈 밑에 박혔다. 비명을 질렀지만 진압봉 세례는 사정없이 그의 머리와 허리에 쏟아져 내렸다.
공수 부대식의 사회관이 문제
부산 시민들을 마구 패는 공수부대 군인들에 대해 다방의 주방장 김석만군(당시 18)은 순진하게 그 불만을 표헌 했다. 포항 출신인 이 소년은 1979년 10월 20일 밤 8시 50분쯤 서면의 부산 진 세무서 앞길에서 공수부대 군인 옆으로 지나가다가 아무 까닭도 없이 불려 가 얻어맞았다. 김 군은 서면 로터리의 동국 빌딩 앞길을 지날 때 이번엔 민간인 두명이 군인들에게 얻어맞는 것을 보았다. 이 두 민간인은 택시를 서로 먼저 타려고 다투다가 군인들에게 붙들 려가 폭행을 당했다. 김석만 군은 화가 치밀었다.
동국 빌딩 계단을 쫓아 올라가 5층 옥상에 있던 음료수 공병 3개를 집어 길바닥으로 던졌다. 김군은 누구를 겨냥하여 던진 것이 아니라 화를 풀려고 아무 데나 던진 것이었다. 공병 깨지는 소리를 듣고 공수부대 소령이 즉시 근처의 경비 부대 40명 병력을 집결시켰다. 그리고는 이 「불순 건물」안으로 쳐들어갔다. 이 5층 건물 안엔 사무실이 많이 있었다. 한 사무실 안에선 여섯 명의 아가씨들이 계엄군 위문 바자회 준비를 하고 있었다. 군인들은 이런저런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사무실 안에 있던 24명의 서민들을 모두 지하실로 몰아넣고 무릎을 끓리고 두 손을 머리 뒤로 붙이게 했다. 이 젊은 소령은 부산 진 경찰서 수사 과장과 형사계 형사들을 호출했다. 이 소령은 아버지뻘 되는 서동백 수사 과장을 이끌고 건물 내부를 샅샅이 뒤졌다. 플라스크, 비커, 약품 병 따위 실험 기구가 많은 공해 대책 회사 사무실이 하나 있었다. 소령은 여기서 흥분하고 말았다.
『사제 폭탄을 만드는 비밀 공장을 드디어 발견했다』고 기고 만장에 하였다. 30년 동안 경찰관 생활을 하면서 온갖 풍상을 다 겪은 서 과장은 『이 장교가 돌았구나』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소령은 「비밀 폭탄 공장」을 샅샅이 수색케 했다. 자신의 추리를 뒷받침할 아무 단서도 발견하지 못하자 지하실로 몰아넣은 민간인들을 족쳤다. 김석만군은 자기 때문에 수많은 민간인들이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다 못 견뎌 『내가 했다』고 나섰다.
소령은 부산 진서 상황실에 있던 여단 임시 지휘 본부로 달려가 이 사실을 여단장에게 보고했다. 여단장은 소령의 흥분된 보고를 차분히 듣더니 싱긋 웃으며 『그것은 경찰에 넘겨 조사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이 소령의 경우가 그렇듯 공수부대 군인들은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특수 부대적인 단순 사고 방식으로 확대해석하고 거기에 맞추어 자신들의 행동도 과잉 반응으로 몰아가는 특징이 있다.
정병주 당시 특전 사령관은 『3여단을 부산으로 보낸 뒤 마산에서 시위가 터져 1,5여단을 추가로 투입하였다. 5여단은 마산에 위수령이 내려진 직후 들어갔는데 장기오 여단장이 아주 현명하게 대처하였다. 진입할 때 전군이 착검 하고 트럭에 타 시내를 질주하는 위력 시위를 벌여 기를 죽여 놓은 다음 시위가 사라진 뒤에는 새마을 청소 운동에 투입, 선무 활동을 벌였다.』고 했다. 특전사에선 부마사태의 진압을 성공적으로 평가했고 이런 자신감이 광주 사태에서 강경 진압으로 나서는 동기를 부여했던 것 같다. 광주 사태 때 3여단 장병들은 『우리는 부마사태를 진압했던 부대다』고 시민들에게 겁을 주기도 했었다.
왜 특전 사령관을 쐈니?
12.12사태의 주역도 공수부대였다. 전두환 합수 본부장 측의 승리를 결정 지은 것은 박희도 준장이 지휘하는 공수 1여단이 육군본부와 국방부를 점령하고, 최세창 준장의 제 3여단이 이웃한 특전사로 들이닥쳐 정병주 특전 사령관을 총격으로 체포한 일이었다. 수도권에 배치되었던 3개 공수 여단이 전 장군 편에 섰고 , 1개 여단만이 육본 측에 섰으나 이마저도 정규 육사 출신 장교단의 작용에 의하여 육본 측 명령에 따르지 않게 된 것이 전 장군의 승리를 보장하였다. 정 특전 사령관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유혈극은 특전사의 생리를 연구하는 사례이기도 하다. 이 총격전 속에서 부상당한 당시 3여단 소속 나영조씨(33. 식당업)를 만나 얘기를 들어보았다.
『나의 팀은 그날 5분 대기 중이었다. 대대장인 박종규 중령이 나에게 특전 사령관을 모시고 오라고 지시했다. 총을 쏘라든지, 납치하라든지 하는 지시는 없었다. 대위인 내가 이 명령의 배경을 알 수도 , 물을 수도 없었다. 나는 권총을 ,부하들은 M16소총을 들고 특전 사령 관실로 들이닥쳤다. 나와 부하 네 명은 안으로 잠궈진 사령관 집무실 문을 열려고 「문열라」고 소리치며, 손잡이를 비틀고, 두드리고, 차기도 했다. 안에서는 아무 대답도 없었고 그 안에 비서실장 김오랑 소령이 있는 줄은 더더구나 알 수 없었다.』
안에서 사격이 있었다. 박종규 중령은 오른손, 나는 문손잡이를 잡고 있던 손과 척추, 김모 대위는 배, 신현수 상사는 목에 총을 맞았다. 총을 맞은 부위의 높낮이가 다른 것으로 봐 안에서 두 사람이 각각 총을 쏜 것이 틀림없다. 우리는 쓰러졌고 , 바깥 복도에서 기다리던 내 부하들이 닫혀진 문을 향해 즉각 집중사격을 했던 것 같다. 왜 발포 명령 없이 부하들이 사령관을 향해 사격을 했느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직속 상관 상관 네 명이 총을 맞아 쓰러지는 것을 보고도 가만히 있을 공수 부대원은 없다. 우리는 비정규전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다. 「적 발견!」「사격 개시!」「사격 중지!」식의 명령에 따라 총을 쏘도록 배우지 않았다. 피아의 분간이 어려운 긴박한 상황에서 눈짓 하나로써 즉각 사격을 할 수 있도록 , 즉 조건 반사 적인 행동을 하도록 끊임없는 단련을 받아온 군인들이다. 더구나 한 팀은 혈육과도 같은 인간관계로 엮이어 있다. 동료가 다치면 눈이 확 뒤집어지게 돼 있다. 박종규 중대장이 이웃에 살고, 육사 후배인 김오랑 소령을 보고 사살했다는 이야기는 와전된 것이다. 부하들이 뒷문으로 돌아 들어가 보니 김소령과 정병주 사령관이 쓰러져 있더라고 했다.』
명령의 정당성 따질 겨를 없어
박종규 중령은 12.12사태 뒤 그리스 주재 한국 대사관의 무관으로 오랫동안 근무했었다. 박 중령이 이 사건으로 고민을 많이 했고, 그 괴로움을 잊기 위해 해외 근무를 자원 햇었 다고 한다.
나 소령은 자신의 행동이 12.12사태의 전개 과정에서 어떤 좌표에 있었는지 당시로선 전혀 몰랐다고 했다.
『일개 팀장이 정치적 상황을 어떻게 알 수 있나. 군인이 명령을 정치적으로 판단해서 행동할 수도 없고, 그렇게 한다면 군도, 나라도 망하는 것이다. 전두환 비리가 폭도 되면서 우리까지 같은 눈으로 보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다. 공수부대가 정치에 휘말리는 일도, 우리처럼 정치의 희생자가 되는 일도 다시는 없었으면 한다』
당시 정 특전 사령관의 참모였던 김 모씨는 『그때는 피아 구별이 안되었다. 똑같은 특전사 복장을 한 3여단 특공 조가 밀어닥쳤을 때 어느 누가 사령관을 납치하러 온 부대로 알았겠는가. 특전사에서는 가상적이 특전 사외 부에 있는 줄 알았지 내부의 3여단이 그렇게 할 줄은 몰랐다. 알았다면 충돌이 있었을 것이다』고 했다. 그러나 당시 작전 처장 신석식 대령등 정규 육사 출신으로서 전두환 장군과 가까웠던 참모들은 3여단 병력이 들이닥치기 전에 미리 연락을 받고 피해 버렸다. 적법한 명령과 지휘 체계가 어디 있는지 잘 알고 있었을 이들 장교들의 행동은 특전사가 과연 진정으로 국가에 즉 적법한 명령에 충성할 수 있는 부대인가에 대한 의문을 남겼다.
특전사의 법무 참모를 지낸 한 변호사는 『말단 부하들은 명령을 자의로 해석하거나 질문할 수가 없다. 그들에게 그런 것을 요구해서도 안 된다. 명령의 정당성 여부는 군 수뇌부의 책임에 속할 뿐이다』고 했다. 12.12때 육군본부. 국방부를 점령했던 공수 1여단에서 사병으로 근무했던 정모씨(모 방송국 프로듀서)는 『그때 우리 부대가 행주대교를 넘기에 대 간첩 작전을 하러 가는 줄로만 생각했다. 육군본부를 점령 하고서도 우리가 누구 편에 서 있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고 했다.
군대 조직의 특수성 때문에 대부분의 장병들은 긴박한 상황 속에서 내려지는 명령의 정당성을 판단할 여유도, 정보도 가질 수 없다는 증거다.
광주 사태의 예고편
계엄 확대 조치는 1980년 5월 18일 0시를 기해 발표되었으나 군 병력이 시위 진압 작전에 나선 것은 17일 오후부터였다. 이날 서울 영등포역 광장에서 시위가 있을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경찰은 전경들을 버스에 태운 채 역 앞 광장에 세워 두었다. 이 버스에 타고 있었던 김모 상경(33. 현재 기자)은 이렇게 말한다.
『갑자기 공수 부대원이 트럭을 타고 나타나더니 한 장교가 핸드 마이크를 잡고 경고를 했다.「즉시 해산하라, 1분 이내로 해산하지 않으면 강제로 해산시키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때 광장에는 시위 군중은 없었고 행인들만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1분이 지나자 그 대위는 「해치워!」라고 명령했다. 수십 명의 공수 부대원들은 진압봉을 휘두르면서 군중 속으로 돌진하더니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두들겨 패는 것이었다. 어느 노인이 대어들자 5-6명의 군인들이 그 노인에게 몽둥이질을 했다. 이건 진압이 아니고 집단 폭행이었다. 진압봉으로 머리를 안 때리도록 교육을 받는다고 하지만, 그때는 가려서 때리는 것 같지 않았다. 기술적으로 상처가 안 나도록 때리는 것도 아니었다. 30초만에 영등포 역전은 무인지경으로 변해 버렸다. 이것을 입벌리고 지켜보던 우리는 소름이 끼쳤다. 며칠 뒤 광주 사태 이야기를 듣고 나는 광주 시민들이 들고 일어 난 것이 충분히 이해되었다.』
김씨의 증언은 계속된다.
『그해 여름에 불량배 단속과 삼청 교육이 있었다. 나는 서울 미아 동의 파출소에 배속되었다. 공수 부대원과 함께 경찰의 안내를 받아 교육 대상자를 잡아오는 일을 했다. 진짜 불량배는 거의 달아나고 열심히 생업에 종사하고 있는 전과자들이 주로 잡혔다. 경찰관들에게 책임량(검거 대상 입원)이 할당 되 있어 무리를 해서라도 머리 수를 채우려고 했다. 파출소로 연행된 사람이 항의하면 그때부터 공수 부대원들의 무지막지한 구타가 시작되는 것이었다. 군화로 짓이기고 얼굴을 걷어차고 몽둥이질을 하고…바닥에 유혈이 낭자하고, 바깥에서는 가족들이 살려 달라고 애원하고… 나는 저들이 과연 동족인가, 하고 의심을 해보았다. 광주 사태가 끝난 뒤 전경들이 특전 사령부로 초대되어 그들의 진압 훈련을 구경한 적이 있었다. 그들의 훈련을 구경한 적이 있었다. 그들의 박력 있는 공세적 진압에 감탄하면서도 과연 저렇게 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경들은 방어적 진압에 주력하는 편인데 공수 부대원들은 적극적 강 공에 의존하고 있었다. 정호용 사령관은 우리들에게 훈시를 했는데 광주 사태의 진압을 자랑하는 내용이었다. 공수부대의 활약으로 제 5공화국의 탄생이 가능했다는 뉘앙스의 이야기를 했다』
제 2부 광주 사태의 초동 진압
광주 전사자 23명
「38420, 1980년 5월 24일 광주에서 전사, 육군하사 이영권의 묘」「육군 상사 정관철의 묘」「육군 상사 박억순의 묘」「육군 중사 최갑규의 묘」「육군 병장 이상수의 묘」「육군 일병 최필양의 묘」「육군 병장 변광열의 묘」, 김용식 , 김경손, 권석원, 이관영, 차정환, 김지호, 김인태, 권용문, 손광식, 권성찬, 김명철, 강용래, 이종규, 이병택, 변상진, 최연안.
국립묘지 제 29, 30묘역의 묘비명들에 쓰여진 이름들이다. 이들 23명의 전사 일자를 보면 1980년 5월20일 에 1명 , 21일에 3명, 22일에 3명, 23일에 1명, 24일에 11명, 25일에 1명, 27일에 2명, 28일에 1명이다.
20일의 사망자 육군 상사 정관철은 제3여단 16대대 소속으로서 20일밤 10시 10분쯤 전남대학교 앞에서 시위대가 몰고 돌진해 온 차량에 깔려 죽었다. 공수 11여단 이상수 병장 등 21일과 22일의 사망자 6명은 3개 공수 여단 병력이 광주 시내를 철수할 때 무장 시위대의 발포에 걸려 죽은 이들이다.
공수 11여단의 차정환 소령 등 24일과 25일의 사망자 12명은 11공수 여단과 광주 보병 학교 교도 대, 제 31사단과 광주 기갑 학교 하사관 생도를 사이에서 벌여졌던 두 차례의 오인 사격에 의한 피살자들이다. 20사단 소속 병장 이종규 등 27일과 28일의 사망자 3명은 계엄군이 광주를 탈환하는 과정에서 시민 군에 의해 사살된 이들이다.
23명의 사망자들을 그렇게 분류 해보면 광주 사태의 진행 과정이 하나의 윤곽으로 드러난다. 23명의 소속 부대는 공수부대 18명, 31사단 3명, 보병 학교 1명, 20사단 1명이다. 이 숫자로도 광주 사태의 주역은 무장 시위대와 공수부대였고 , 다른 부대는 조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국군은 죽어서 말한다」고 하는데, 이 29, 30묘역에 묻힌 군인들 23명은 이데올로기를 같이하는 휴전선 남쪽의 시민들에 의해, 그리고 피아를 구별하지 못했던 동료 군인들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는 면에서 1980년대에 한국이 겪었던 내부 갈등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1988년 5월 29일 (일요일)오전 10시, 눈부시게 화창한 늦봄, 화사하고 신선한 공기 속에 잠들어 있는 국립묘지 29묘역의 광주사태 전사자 묘비명 앞에 30대 청년 다섯 명이 모였다. 김동철, , , ,이명주(31) , 배동환씨(33) , 단 출신인 이씨는 5월 27일 새벽에 광주로 진입했다가 시민 군과의 교전에서 피격돼 팔에 부상을 입었다. 나머지 네 사람은 공수 11여단 출신들. 김동환, 씨는 5월 24일에 보병 학교 교도 대의 오인 사격으로, 김 철 씨는 5월 21일에 광주 시내에서 철수할 때 시민 군의 총격을 받고 가슴과 팔에 중상을 입었던 이들이다. 결혼한 지 몇 달 안 된다는 씨는 아내를 데리고 나타났다. 이들은 동료들의 묘비들을 둘러보면서 『올해는 더욱 쓸쓸한 것 같다』고 했다. 이들의 감희를 뒷받침하듯 정오까지 기다려도 더 나타나는 사람이 없고, 해마다 한번씩 열리는 추모회는 다섯 명의 참석자로 그야말로 조촐하게 끝이 나고 말았다.
광주 사태 전사자들을 국가유공자처럼 대우하여 추모 행사도 규모 있게 했던 적도 있었다고 한다. 1980-82년쯤까지는 특전사나 육군 본부 측에서도 신경을 써 주고 참배 객들도 많았다. 그 뒤로 차츰 시들해지더니 요 몇 년간은 군에서 화환 하나 보내 오는 적이 없고 모이는 사람들도 수백 명에서 수십명 수준으로 줄어들더니 올해에는 한자리수가 돼 버렸다는 것이다.
그 11일 전 5월 18일 광주 망월 동 묘지를 참배했었던 수만 인파와 비교할 때 광주 사태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는 것을 이 국립묘지가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한때 서로의 가슴을 향해 총을 겨누었던 사람들은 죽은 뒤에도 망월 동과 동작 동으로 갈려 누워 있고, 산 사람들은 화합을 부르짖으며 그 깊은 골을 메워 보려고 애쓰고 있으나 양쪽의 생각은 아직도 상대방의 주파수조차 찾지 못하고 있다.
이날 국립묘지에 나온 진압군 측 부상자들은 『요즈음은 우리가 죄인이 된 것 같다』 면서 『우리나 광주 사람들이나 똑같은 정치의 피해자가 아니겠는가』라고도 말했다.
부상자에게 돌아간 이세호 땅
광주 사태에서 부상당한 군인들의 숫자는 확실히 공개된 것은 없으나 1백여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후유증이 남아 원호 대상자가 된 사람은 40여 명이다.
이들 중 장교들은 전역할 때 약 1천 1백 만원, 사병. 하사관들은 6백만- 8백 만원의 위로금을 받았다.
이들 가운데 서울 거주자와 월남전 전상자 및 12.12사태 때 다친 공수 부대원 등 34명은 지난 81년 5월에 서울 송파구 문정 동에 있던 땅 3천 평을 정부 고시 가격으로 불하 받았다. 조창구씨(11여단 63대대장으로 부상)외 33명이 균등하게 분할하기로 하고 공동매입한 이 땅은 5.17 뒤 부정 축재한 재산으로 찍혀 국가에 환수된 전 육군 참모총장 이세호씨의 소유였다. 1인당 98평을 약 4백20만원씩에 샀는데 광주 사태 부상자들 등 28명은 지난해 토지 구획 정리가 끝나 1인당 22평으로 줄어든 이 땅을 1인당 약 3천 7백 만원씩에 팔았다. 세금과 최초 투자액을 제하고 1인당 약 2천 4백 만원씩의 순이익을 보았다고 한다.
부상자들 가운데는 씨처럼 일찍 퇴원하는 바람에 땅을 못 받은 이들이 더러 있다고 한다.
광주 사태 부상자와는 별도로 12.12사태 때의 부상자들도 있다. 특전 사령관을 연행하다가 일어난 총격전에서 사령관 비서실장 김오랑 소령(피살)이 쏜 총을 허리에 맞아 하반신 불수가 된 총을 허리에 맞아 하반신 불수가 된 공수 3여단의 나영조(소령 예편), 12.12사태 때 국방부를 유혈 점령하는 과정에서 수경사 병력으로부터 총격을 당해 머리를 다쳐 반신불수가 된 배정선씨 (상사)등 두 사람에게는 정부가 문정동의 땅 이외에 서울 가락동 농수산물 시장 내의 축협 공판장 구내식당 운영권을 주었다.
5공화국 비리 폭로에 바쁜 언론사에 가끔 광주 사태와 12.12사태 부상자들에게 국가가 특혜를 주었으니 폭로 해 달라는 제보가 들어오고 있다. 취재를 시작하여 하반신을 못쓰는 어느 부상자를 만났더니 『제발 전두환 비리와 같이 취급하지 말아 달라. 우리의 희생을 딛고 출세하여 이 나라를 말아먹은 이들 때문에 견디기 어려운 눈총을 받는 것이 서럽다. 우리 기질에는 도저히 사회생활을 못하겠다. 병신의 몸으로도 할 수만 있다면 다시 군복을 입고 싶다』고 내뱉듯 말했다.
1980년대와 5공화국의 그늘인 12.12사태와 광주 사태의 뒤안길에서 침몰해 간 것은 민중 뿐만은 아니었다는 얘기다.
7여단의 투입 배경
1980년 5월에 광주의 육군 전투 교육 사령부 참모장으로 있었던 장사복씨(예비역 준장. 현재 중앙 고속 관리 본부장)는 이렇게 말했다.
『1980년 5월 16일에 국방부에서 전군 지휘관 회의가 열렸고, 여기에 윤흥정 사령관이 참석하였다. 이 회의에서 공수 7여단을 조선대와 전남대에 주둔하게 한다는 방침이 결정되었다. 학생들을 등교시키지 못하게 하는 것이 이 여단의 임무였다. 이리 근방에 있던 7여단의 2개 대대는 17일밤 11시쯤 두 대학에 도착하였다. 2개 대대는 그 즉시 정웅 31사단장의 작전 통제하에 들게 되었다.』
이날의 전국 지휘관 회의는 사실상 5공화국의 탄생을 선언한 회의였다. 주영복 국방 장관의 주재로 열린 이 회의에서 5.17계엄 확대 조치와 함께 국가 보위 비상 대책 위원회의 설치를 제안한 것은 정호용 특전 사령관이었다고 한다.
당시 공수 7여단장은 육사 13기 출신인 신우식 준장이었다. 신씨는 예비역 소장인데, 지난 6월 초순 기자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2개 대대를 31사단에 배속시키고는 지휘 계통 선상에서 빠지게 되었다. 31사단장이 직접 우리 여단의 대대장을 지휘하게 되었다. 과잉 진압 운운하는데 군인은 명령대로 하는 존재이고, 그때의 시위가 불법 행동이었음을 모르고 하는 이야기다』
7여단은 4개 대대로 구성되었다. 이날 밤 31대대는 전주의 전북대학교로 제 32대대는 대전의 충남대학교로 진주했다. 공수부대의 주요 대학 점거는 광주에서만 있었던 일이 아니었다. 5월 18일 새벽 서울에서는 11여단이 동국 대학에 , 1여단이 연세 대학에 진주했던 것이다. 특전사의 한 장교는 『그때는 일선에서 부대를 뺄 수 없었으므로 지역을 맡지 않고 있는 공수부대를 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후방 사단의 병력이야 얼마 되지 않았다』고 했다.
바둑판. 배구공 갖고 가
광주에 투입됐던 공수 7여단 35대대장 김일옥 중령은 대구 사람, 33대대장 권성만 중령은 전주 사람이었다. 35대대 3중대장 박 병 수 대위는 전북 김제 사람이었다. 지금은 부평에서 한의사로 일하고 있는 박씨 (33세)는 『5월 17일 저녁에 트럭으로 여단 본부를 떠났는데, 대학에 진주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바둑판과 배구공을 가지고 갔다. 대학에 진주한다는 것을 놀러 가는 일 정도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박씨는 또 『우리 부대는 주둔지가 전북이라서 그런지 전라도 출신이 가장 많았다』고 했다.
『실탄은 개인별로 가져가지 않았으며, 소나무로 만든 진압 봉을 하나씩 들고 갔다』는 것이다.
시위 진압 기구는 진압봉과 사과탄이 전부였고, 방석모. 방패. 최루탄 발사 기는 없었다고 한다. 「특전사의 작전일지」는 5월 18일의 상황을 이런 요지로 기록하고 있다.
「18일 새벽에 전남대, 조선 대학에 진주한 계엄군은 학교에 남아 있던 40여명의 학생들을 연행했다. 오전 9시쯤 전남대학교에 들어가려던 학생들이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광주시 중심부 금남로로 이동, 계속 시위를 벌였다. 정오 무렵 33대대는 가톨릭 센터로 출동, 시위대를 해산시키고 1백 3명을 포고령 위반 혐의로 체포했다. 33.35대대는 다시 충장로와 금남로로 진출 시위자 2백 83명을 체포했다. 시위대는 블록과 음료수 병을 던지며 대항하였다」
군 측에선 전남대생의 투석을 광주 사태의 시발로 삼아 그 뒤의 진압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전개해 왔다. 이희성 당시 계엄사령관은 최근의 민화위 증언에서『전국 31개 대학과 1백 36개 보안 목표에 계엄군을 배치시켰다. 이 조치로 학생 시위는 중지되고 평정을 되찾았다. 단 하나의 예외가 전남 대학이었고 이로써 광주 사태가 시작되었다』고 했다.
당시 11여단의 대대장이었던 한 대령은 『조 기자는 「한국의 군부」란 기사에서 우리 군이 4.19때 시위 군중에게 발포하지 않음으로써 국민의 군대임을 보여주었고 부마 광주사태 때는 그러지 못했다고 썼던데 저는 견해가 다릅니다. 4.19때 시위 군중은 계엄군에게 돌을 던지지 않고 환영을 했는데 광주에서는 학생 쪽에서 먼저 돌을 던졌지 않습니까』라고 했다.
광주 시민 측에선 반역사적이며 사실상의 쿠데타인 5.17조치를 광주 사태의 시발로 보고 이에 저항한 전남대생의 시위를 정당한 것으로 평가하기 때문에 발상의 출발점부터가 다른 것이다. 군 쪽에서는 실정법을 시민 측에선 역사성과 도덕성을 판단 기준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7여단의 박병수씨는 『학생 편에서 돌을 던지니까 우리도 강하게 나간 것이다. 시위대가 군인이 나타났는데도 흩어지지 않으니 기분이 상하더라. 특히 동료가 돌을 맞아 다치니 부하들이 흥분하더라. 최근에 광주 사태 비디오를 보니까 우리가 너무 심하게 한 면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했다.
그러나 시민 측에서 본 7여단 진압 상황은 사뭇 달랐다. 당시 ㄷ 일보의 광주 주재 기자는 이렇게 증언했다.
『18일 오후 4시쯤 나는 광남 로터리 부근에 있는 고층 빌딩의 광고탑에 올라가 밑에서 벌어지는 데모 장면을 사진 촬영하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시내에선 데모대와 경찰이 충돌했을 뿐 군인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 시간, 저쪽 시 외곽 방면에서 군인들이 탄 트럭 수십 대가 달려오고 있었다. 로터리 앞에서 전원 하차하더니 대오를 정비했다. 그걸 보고 시위 학생들은 벌써 달아나 버리고 길가에는 구경 나온 시민들뿐이었다. 시민들 속에서는 군인들을 환영한다는 뜻에서 멋모르고 박수 치는 사람도 있었다.
공수부대 병력은 횡대로 늘어섰다. 장교인 듯한 사람이 핸드 마이크로 경고 방송인가를 하더니 그대로 시민들을 향해 돌격 명령을 내렸다. 군인들은 몽둥이로 무차별 구타를 시작했다. 수십 명의 시민들이 광고탑이 세워진 건물의 옥상으로 피신해 올라오는 것을 나는 광고탑 꼭대기에서 내려다볼 수 있었다.
얼마 안 있어 공수 부대원들이 뒤따라 올라왔다. 나는 「이제 죽었구나」고 생각했다. 군인들이 꼭대기에 있는 나를 발견하면 당장 요절을 낼 것 같았다.
나는 「하느님, 이번만 저를 살려주시면 성당에 열심히 나가겠습니다」하고 기도했다. 탑 아래 옥상에서는 무지막지한 몽둥이질이 벌어지고 있었다. 군인들은 야구 방망이 같은 몽둥이로 머리, 어깨 등 가리지 않고 두들겼다. 몽둥이가 머리를 칠 때 피가 분수처럼 튀어오르는 게 보였다.
군인들은 시민들을 끌고 내려갔다. 그들은 나를 발견하지는 못했다. 한참 있다가 광고탑에서 내려왔다. 계단은 온통 피 칠갑이었다. 양동이로 핏물을 부어 놓은 것처럼 아래 계단에까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바깥에 나가니 윗몸이 발가벗겨진 청년들이 「원산 폭격」을 하고 있었다. 군인들은 청년을 붙들면 웃옷을 찢어 머리를 덮어씌우고는 머리를 땅에 박게 하였다가 트럭에 던져 넣듯이 하여 어디론가 실어 가 버리는 것이었다』
27명이 타박상 자상 . 두부 손상
이 기자가 목격한 상황과 5월 17일 오후 영등포 역전 광장에서 벌어졌던 상황은 비슷하여 공수부대의 무차별적 진압 행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 훈련 때는 진압 봉으로 머리를 때리지 말라고 교육을 시키기는 하지만 실제 상황에서는 시위자와 행인, 남녀노소, 신체 부위를 가리지 않는 무차별적 구타로 변질하기가 일쑤였다. 더구나 시위대가 투석 등으로 저항하고, 동료가 다치는 것을 보았을 때 이들이 어떤 행동을 보였 을지는 쉽게 추정할 수 있겠다.
당시 전교사 참모장 장사복 씨는『경찰에 의한 시위 진압과 군의 진압, 그것도 계엄령 하에서 이루어진 군에 의한 진압을 같이 봐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시위 진압 교육을 할 때 보여주는 미군의 필름이 있었다. 계엄령 하에서의 진압 법을 가리킨 것이다. 이 영화에 따르면 시위자를 일단 붙들면 끊어 앉혀 놓고서, 반항하면 진압 봉으로 목 밑에 있는 쇄골을 때려 부러뜨려 행동을 세약 하며, 그래도 달아나면 사살한다는 식이다. 광주 사태 진압은 영화보다도 휠씬 온건하게 한 것이다』고 주장했다.
계엄사가 광주 사태를 진압한 뒤인 1980년 6월 5일에 발표한 민간인 사망자 통계에 따르면 총 1백 48명(뒤에 1백 60명으로 늘어남)중 총상 1백 18명, 타박상 15명, 두부손상 5명, 교통사고 3명, 자상 7명으로 나타나 있다. 소준열 당시 전남 북 계엄 분 소장은 88년 1월의 민화위 증언에서 『검시 결과 , 군인이 사용한 M16 총탄으로 죽은 시민은 45명뿐이었다』고 말했었다. 나머지 총상 사망자는 카빈 등으로서 시민끼리의 오인 사격에 의한 것이라는 얘기였다. 이 증언의 정확성은 일단 젖혀 두고라도 계엄사 통계에 나타난 타박상 15, 두부 손상 5, 자상7명 등 모두 27명의 사인은 거의가 몽둥이로 때리고 대검으로 찌른 결과임을 보여주고 있다.
당시 전교사에 근무했던 한 고위 장성도 기자 앞에서 이 통계에 대해서는 수긍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20명이 맞아 죽었다 」「7명이 찔려 죽었다」는 이 원시 사외 적 공포가 정글도 아닌 대도시의 대낮에 그것도 증인 환시리에 연출되었다는 것이 광주 사태가 확대 일로로 치달은 기폭제였던 것이다. 27명을 사살하는 것보다 27명을 찌르고 때려죽이는 것이 시민들의 동물적인 분노심을 더 자극하는 법이다. 광주 사태의 한 원인은 총구가 아니고 몽둥이와 대검이었다. 공수부대의 야수성은 시민들의 심성 속에 잠들어 있던 또 다른 야수성을 폭발시키는 뇌관이 되었고 , 그 뒤의 사태는 삼정과 감정의 대결, 증오와 증오의 대결로 치닫게 되었다. 7여단이 쓴 진압 봉은 전주의 목공소에서 만든 소나무 몽둥이었고 ,11여단의 진압 봉은 물푸레나무로서 길이가 70cm나 되고 아무리 세계 쳐도 부러지지 않을 정도였다. 이것으로 머리를 때리면 뇌 손상으로 충분히 사망할 수도 있다.
11여단에 출동 명령
18일 새벽에 동국 대학에 진주했던 공수 11여단장 최웅 준장은 18일 밤 정호용 특전 사령관의 방문을 받았다. 정 사령관은 『광주 사태가 심상치 않다.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 사람의 씨를 말리려고 왔다는 등 유언비어가 난무하고 있다. 서울 사람인 당신이 좀 내려가 주어야 겠어』라고 했다고 한다. 그날 밤 11여단의 1개 대대는 비행기편으로, 2개 대대는 청량리역에서 출발한 열차 편으로 광주로 내려갔다. 최 당시 여단장은 『전두환 보안 사령관으로부터, 최대한 자제하여 꼬투리를 잡히지 않도록 하라는 충고를 받고 내려 갔다』고 했다.
광주에 증강 투입된 11여단 3개 대대 병력 약 1천 명은 19일 새벽에 조선대학교 교정에 집결했다. 그들은 텐트를 치고 군장을 푼 뒤 오전 10시에 30여대의 트럭에 타고 광주 시내로 「위력 시위」를 나갔다. 위력 시위란 무장한 군인을 태운 트럭이 헤드라이트를 켠 채 클랙션을 울리면서 중앙선을 질주하는 것이다. 시위 예상 자의 기를 꺽어 놓겠다는 계산에서 하는 시위 예방책이다. 공수 부대원들은 진압 때는 대검을 소총에 꽂지 않지만 위력 시위 때는 착검 한다. 11여단의 위력 시위 때는 착검 한다. 11여단의 위력 시위 때는 착검 한다. 11여단의 위력 시위 대열이 충장 로에 이르렀을 때 2백여 명의 학생들이 돌과 화염병을 던졌다고 특전사 작전일지는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11여단의 공수 부대원들을 자극했다. 군인에게 , 그것도 위엄이 대단하다고 스스로 믿고 있던 공수부대에게 민간인이 도전했다는 데 대한 감정이 그 뒤 11여단의 행동에도 크게 영향을 끼친 심리적 동기가 되었다.
당시 11여단 63대대 소속의 김동철 병장은 『돌을 맞고 흥분하지 않을 군인이 어디 있겠는가. 계엄군에 돌 던지고 공공건물을 불태우는 사람은 폭도들뿐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럴 때 김일성이 쳐들어오면 어찌나 , 하는 생각이 들더라 우리 졸병들이야 명령 이외에 무엇을 아는가. 눈앞에 전개된 상황만 보고 판단하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어쨌든 그때는 시위자들을 증오하게 되었다. 대검으로 찔러라, 머리를 때려 라는 지시는 없었고 그렇게 하지 말라는 지시는 많았지만, 일단 맞붙으면 자제도 되지 않고 , 폭동 진압 훈련을 받은 대로는 되지 않더라』고 했다.
양대인 당시 전교사 참모장은 『공수부대가 위력 시위 도중 시위대의 습격을 받았다는 보고를 받고 놀랐다. 군중들이 그들에게 둘러싸인 계엄군 장갑차의 잠망경을 부수고 해치를 열려고 해서 안에 있던 소대장이 위협사격을 했다는 보고를 받은 기억도 난다. 18일 7여단에 이어 19일엔 11여단, 20일엔 3여단, 21일엔 20사단 병력을 잇따라 불러 내리게 된 것도 당초에 이런 사태를 예기하지 못해 병력의 축차 투입이라는 나쁜 진압책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했다.
당시 11여단의 대대장이었던 한 대령은 『우리는 시위 진압용이라고는 진압 봉하나 밖에 없었다. 방석복, 방패도 없었다. 안면을 보호하는 방석망 조차 없었다. 할 수 없이 현지에서 철사를 구입하여 손으로 만들어 철모에 매달았다. 하도 엉성하여 작은 돌을 맞아도 찌그러지면서 얼굴을 때리는 한심한 상황이었다』고 했다.
그는 또 『한 중대의 반 이상이 부상을 당해 진압에 나설 수 없는 상황이 되기도 했다』고 주장했다.
11여단 참모장이었던 양대인씨는 『공수 부대원이 돌을 맞고 쓰러지는 장면은 왜 사진이나 비디오에 안 나오느냐』고 불만을 표시했다. 당시 11여단의 대대장 출신의 현역 대령은 『과잉 진압이란 표현에는 불만이다. 이희성씨가 그런 표현을 썼다고 하는데 그분이 언제 현장에 나와 본 적이 있나. 대대장 위만 돼도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 나는 흥분된 양쪽이 부딪쳐서 스파크 현상을 일으킨 것이 광주 사태의 본질이라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11여단의 부 지역 대장 씨(40. 회사원)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곳에서 부상당해 한쪽 다리를 못쓰고 있다. 광주시민이나 우리나 같은 피해자다. 차라리 진상 조사가 철저히 됐으면 좋겠다. 너무 군인들만 몰아 붙이는데, 나는 내 부하가 시위대의 APC장갑차 돌진에 의해 치어 죽는 것은 목격했었다. 우리는 광주로 갈 때 어떤 상황인지 전혀 이야기를 듣지 못했고, 어떤 선입견 없이 진압에 임했다. 공공건물을 불태우고, 군인에게 돌을 던지고, 동료가 다치니까, 아무리 부하들 말려도 강경 진압이 되지 않을 수가 없더라 . 진압 봉 하나밖에 없는데 그런 식으로 진압하지 않으면 우리가 돌에 맞아 죽을 판인데 … 우리 부대에는 전라도 사람들이 많은데 그들이 지리에 밝아 더 열심히 진압에 나섰다.』
11여단 소속 사병이었던 씨는 『조선대학교 CP에서 광주가 고향인 한 동료가 집으로 전화를 걸었더니, 가족이 믿지 않는 것이었다. 전라도 출신이 진압군으로 내려왔을 리가 없다고 하는 것이었다. 우리 여단의 김모 소령은 전라도 사람이었다. 지역 대장으로서 진압 일선에서 악전고투했는데, 동생이 시민 측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하더라』고 했다.
실탄은 지급 않아
당시 11여단 참모장 양대인 중령은 조선대학교의 여단 사령부에서 시위 현장에 나가 있는 세 대대장들과 무선으로 연락을 하고 있었다.
『상부에서는 절대로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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