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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한승원감사원장/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재심필요하다.박성원(신동아, 1998. 6)

본문

인터뷰 韓勝憲 감사원장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 재심 필요하다”

박성원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한승헌(韓勝憲)감사원장은 80년 「김대중내란음모사건」에 연루돼 구속기소된 뒤 계엄법 위반혐의로 1심에서 4년형을 선고받은 바 있다. 30여년간 군사통치 과정에서 숱한 시국사건 변호를 맡았던 한감사원장은 이 사건을 포함해 여러 차례 구속되거나 연행돼 수난을 당하기도 한 시국사건의 산 증인.한승헌 감사원장은 인터뷰에서 인권변호사 출신답게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의 법적 문제점과 그 정치적 성격 등에 관해 조목조목 입장을 밝혔다. 그는 재심을 통해 무죄판결을 받아야 한다는 당위성을 강조하면서도 관련법 개정 등 구체적 「조치」에 대해서는 조심스런 태도를 잃지 않았다. 최고 사정기관의 수장이 돼 있는 그이지만 법률가로서의 신중함이 짙게 배어 있는 인상이었다.인터뷰는 지난 4월 4일과 4월 11일 두차례에 걸쳐 삼청동 감사원장 접견실에서 이루어졌다.

정권찬탈 위해 꾸며낸 조작극

-80년 당시 김대중내란음모사건에 연루돼서 곤욕을 치르셨는데, 오늘 이 사건을 바라보는 감이 남다르실 것 같습니다. 사건의 본질이랄까 성격을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저는 당시 그 사건 피고인 가운데 유일한 법조인으로 재판정에 섰습니다. 그 사건은 한마디로 12·12군사반란 세력이 계엄통치를 반대하는 민주화 세력을 말살하기 위해 꾸며낸 조작극이었습니다. 재판극을 통해 우리들을 제거하고 자신들의 정권찬탈 계획을 완성시키려고 한 것입니다. 그 후의 결과나 역사를 보더라도 분명히 그렇습니다』-정권찬탈을 위한 조작극이었다고 하셨는데, 비록 사건이 신군부의 정권장악기도에서 비롯된 것이라 해도 공소장이라든지 판결로 인정된 범죄사실이 전부 무죄라고 곧바로 얘기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조작된 사건인 이상 사실이 아닌 내용이 공소사실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무죄가 될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공소사실이 허위로 만들어졌다는 것이죠. 우리를 재판한 비상군법회의 설치 자체부터 위법이었습니다. 비상계엄선포 요건이 결여된 상태에서 계엄령이 선포됐고, 그 계엄령에 따라 군법회의가 설치됐거든요.

그리고 이른바 공소사실이라는 것도 전혀 사실과 다르거나 일부 사실이라 해도 그 사실에 대한 법률적인 평가가 잘못 됐다는 거죠. 예를 들면 저의 경우는 당시 김대중선생 집에서 문인들과 함께 얘기를 나눈 것을 가지고 계엄법상의 불법집회 혐의로 기소되어 유죄가 선고됐어요. 설사 당시 계엄령의 효력을 그대로 인정한다고 치더라도, 식사를 하면서 시국에 관한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주고받은 것까지 계엄법 위반이란 것은 잘못된 거죠. 그런 것을 계엄법상의 불법집회로 본 것은 명백한 오판인 겁니다』-계엄령선포의 요건 자체가 갖추어지지 않았고 공소사실에 대한 평가나 공소사실 자체가 잘못된 것이었다 해도 최종심은 대법원에서 이루어진 것 아닙니까? 대법원은 1·2심을 맡았던 군사법원과 달리 어쨌든 법률적 양식을 가진, 최고의 법률가들로 구성된 기관인데 거기서 판단 자체를 완전히 잘못했다고 주장할 수 있느냐는 반론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만….『우리나라 대법원은 법률상 최고법원이지만 정치적인 사건에서 오판을 한 예가 비일비재합니다. 이 사건 당시는 온 나라가 이른바 신군부세력의 강력한 지배하에 있던 시기였으므로 사법부도 재판의 독립성을 살려서 재판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법형식 면에서는 대법원 판결에서 유죄가 확정됐다고 하더라도 판결의 실질적 정당성은 그와 별개라고 봅니다. 소위 김대중내란음모사건뿐만 아니라 여러 사건에서 사법부의 오판은 실제로 있었고, 특히 정치적인 사건에서 오류가 있었다는 것은 대법관으로 있던 분들까지도 나중에 자인한 사실입니다』실제 한감사원장의 지적대로 사법부가 시국사건 재심에서 스스로의 확정판결을 뒤집은 예는 심심치 않게 나타나고 있다. 지난 4월 17일 서울지법에서는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고교생시위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실형을 선고받고 해직됐던 전 전주 완산여상 교사 이상호(李相浩·47·국민회의 교육특위부위원장)씨가 계엄법위반 재심청구사건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일이 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이씨가 학생들을 선동해 정치적 목적의 시위를 벌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통한 신군부세력의 내란행위에 반대한 「헌정질서 수호」차원의 저항』이라고 무죄선고 이유를 밝혔다. 이에 앞서 지난해 7월 부산지법도 신종권(辛鍾權·45·부산 내성중 교사)씨 등 2명에 대한 계엄법위반 재심사건에서 무죄를 선고한 바 있다.

공소사실 비약·각색됐다

-재판 및 수사과정에서 특히 문제가 있었다면 어떤 점을 꼽으시겠습니까?『공소사실을 보면 재야세력이 국민 각계각층을 망라해서 전국적인 민주화운동, 계엄철폐운동의 일환으로 집회·시위를 하려한 것을 두고 「내란음모」라고 본 것입니다. 공소장에 보면 내란음모라는 그 죄목만 빼놓으면 실제 있었던 이야기가 적혀 있는 대목도 상당 부분 있습니다. 다만 「정부를 전복하고 누구를 대통령으로」운운하는 내용은 조작입니다. 우리가 언제 어디서 무엇에 대한 논의를 했다는 내용을 비약시켜서 「정권 타도」니 「국헌문란」이니 하는 쪽으로 각색을 해나간 게 문제입니다. 김대중선생에 대한 국가보안법 위반혐의 부분에서는 심지어 전향간첩까지 증인으로 내세워 붉은 색칠을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그 사건으로 인해 김대통령이 사형선고를 받았고 다른 사람들도 중형에 처해졌어요. 대부분이 구형대로 선고되었습니다』한감사원장은 자신이 74년 맡았던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사건과 민청학련 사건에서 검찰의 구형대로 판결이 나온 것을 꼬집어 「정찰제 판결」이라고 이름붙인 바있다. 그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대해서도 역시 『정찰제 판결이었다』고 말했다.

-김대중 대통령에 대해 「한민통」의장으로서 반국가단체 수괴죄가 적용된 것을 놓고 당시 논란이 많았습니다. 이 대목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한민통이 과연 반국가단체냐 하는 논의는 일단 접어놓고라도 재일 한민통이 결성될 당시 김대중선생은 일본에 있지도 않았습니다. 한국 정보기관원에 납치되어 서울로 끌려온 뒤였으니까요. 또한 자기가 한민통 의장을 수락한 사실이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김대중씨가 일본 체류중에 한 일체의 행위를 한국 내에서 문제삼지 않기로」한 한·일간 합의에도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그처럼 허무맹랑한 사실을 토대로 반국가단체 수괴혐의를 인정했다는 것은 명백한 오류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국내에서는 물론이고 일본이나 미국·유럽에서까지 비판여론이 비등했어요. 민간에서뿐만 아니라 미국 정부나 일본 정부도 김대중선생에 대한 사형집행을 반대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사형집행을 저지시킨 것도 미국이 아니었습니까. 만일 반국가단체의 수괴에 해당되는 사람이었다면 미국이 정부차원에서 사형집행을 저지했을 리가 없죠』

-지금 사건관련자들에 대해서 사면·복권은 이루어진 상태지만, 사면·복권이 됐다고 해서 유죄라고 한 사법적 사실 자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그렇습니다. 사면·복권은 당초의 판결효력이 상실되는 거고, 거기에 따라서 권리가 회복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판결을 받은 일이 있다는 기록이 지워지는 건 아니고, 다만 그 판결의 효력이 소멸되는 것입니다』

재심관련 법개정 논의 아직 살아있다

-그래서 사건 관련자 가운데 『재심을 해서 기록 자체가 잘못됐다는 것을 판결로 인정받자』는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많고 실제 그런 움직임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감사원장께서는 대법원에서 확정됐던 이 사건에 대해 재심청구가 가능하다고 보십니까?『형사소송법상 확정판결에 대한 재심 사유로는 몇 개의 항목이 나열돼 있지만 실제 재심의 요건은 매우 제한돼 있습니다. 한번 유죄확정이 되고 나면 그것이 설령 오판이었다 하더라도 재심을 통해서 무죄판결을 얻어낸다는 것은, 정말 낙타가 바늘귀를 뚫고 나가는 것만큼 어려운 일입니다. 이 사건도 그렇습니다. 우리 당사자들이 전에 재심에 대해 논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현행법상의 제한과 재심에 따르는 여러 가지 고려사항들이 있어서 실제로 재심청구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 후 5·18광주민주화운동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돼 특별재심 사유에 대한 규정이 있기는 하지만 그나마 그 법률조항도 너무 미비하고 허술해서 그 법을 믿고 재심을 내기에는 미흡하다고 본 것입니다』95년 12월 19일 국회에서 통과된 「5·18민주화운동에 관한 특별법」제4조는 5·18민주화운동과 관련한 특별재심 규정을 다음과 같이 두고 있다.「5·18민주화운동과 관련된 행위 또는 제2조(12·12, 5·17 등 헌정질서 파괴행위)의 범행을 저지하거나 반대한 행위로 유죄의 확정판결을 선고받은 자는 형사소송법 제420조 및 군사법원법 제469조의 규정에 불구하고 재심을 청구할 수 있다」(①항)특별법 제4조는 또한 「①항의 재심청구인이 사면을 받았거나 형이 실효된 경우에 재심관할법원은 형사소송법 제326조 내지 제328조 및 군사법원법 제381조 내지 제383조의 규정에도 불구하고 종국적 실체판결을 하여야 한다」고 규정(④항)하고 있다.이 규정대로라면 이른바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을 포함,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해 유죄의 확정판결을 받은 사람들은 일반적인 형사소송법상의 재심보다 폭넓게 재심청구가 가능하다(일방적인 형사소송법상의 재심사유는 ▲원판결의 증거물이 위조·변조된 것이 증명됐을 때 ▲원판결의 증언·감정 등이 허위인 것이 증명됐을 때 ▲무고로 인해 유죄선고를 받았음이 증명됐을 때 등 7가지로 한정돼 있다). 따라서 재심청구가 비교적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으리라는 것이 법제정 당시 일방적 관측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특별법에 따른 재심청구가 쉽지 않다는 것이 당사자들의 하소연이다. 특히 일부 피해자들 사이에는 만에 하나 재심재판에서 다시 유죄판결을 받아버리면 기왕에 사면복권됨으로써 사실상 회복해놓았던 명예를 다시 잃어버리는 사태가 발생할 지도 모른다고 우려하는 이들도 있는 실정이다.-그렇다면 관련법 개정 등 어떤 해결책을 강구하고 있습니까?『5·18광주민주화운동에 관한 특별법을 보완, 개정해서 실질적으로 그 법을 통해 재심을 청구하고 「무죄」가 실현될 수 있도록 하자는 논의도 있었습니다. 그런 움직임은 지금도 살아 있습니다. 그런데 1997년 7월 22일 대법원에서 「유죄확정후 사면이 된 사건은 판결의 효력이 상실되기 때문에 재심의 대상이 없어진 것」이며 따라서 재심청구는 불가능하다는 취지의 판결이 났어요. 요컨대 유죄가 확정된 사건에 대해 특별사면을 받은 경우에는 재심청구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사면을 받았기 때문에 재심청구를 하기 어려운 상태가 된 것입니다. 법률적으로 그런 장애가 있어요』

「재심 무죄」개인차원 아니다

-내부에서는 획기적인 특별법이라도 만들자는 주장도 있는 것으로 압니다만, 특별법을 마련한다면 현재의 장벽을 뛰어 넘을 수 있습니까?『대법원 판결의 기속력까지도 배제할 수 있는 특별법을 생각한다면 그것대로 고려할 여지는 있지만, 아무리 특별법이라고 하더라도 법의 근본원리에서 너무 유리되지 않도록 신중히 할 필요가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그렇다면 재심청구의 길이 그렇게 순탄치는 않겠군요.『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와 같은 말씀은 재심의 필요성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현행법이나 대법원 판례가 장애가 된다는 뜻입니다. 재심무죄에 대한 우리의 염원은 비단 사건 당사자로서의 희망사항일 뿐만 아니라, 역사의 과오를 바로잡고 진실을 되살린다는 차원에서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보편적 명제라고 우리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방법론은 좀 더 깊이 생각할 과제라고 하겠습니다』-재심청구가 어려워서 그렇지 재심청구가 된다면 그때는 반드시 무죄가 될 것이라고 확신하십니까?『당연하죠』-현재까지의 재심청구 작업현황과 앞으로의 계획을 소개해 주시겠습니까?『재심청구를 논의하고나서 제가 서류를 작성해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후 제심청구문제는 답보상태에 빠졌습니다. 그 이유는 당시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의 당사자들이 비록 중형까지 살며 고초를 겪은 피고들이지만 각자 민주화운동이라든가 국정운영에 참여하는 인물들이었습니다. 5공, 6공, 김영삼 정부 치하에서 모두가 사회참여 내지 국정참여, 민주화운동 참여 등으로 정신없이 살아왔기 때문에 재심청구를 본격화시키기 어려운 사정이 있었습니다. 사실 피고인중에 제가 법률가이기 때문에 「문제가 제기되면 한변호사가 좀 수고를 하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만, 제 자신도 변호사로서 이런 저런 활동을 하다 보니까 이 문제에 대해 지속적인 노력을 못한 거죠. 더구나 지금은 여당의 일원이 되신 분들도 많고 그렇지 않은 분들이라 해도 사회적활동으로 매우 바쁜 형편들입니다』-그러나 공직 등 아무런 자리를 갖고 있지 못한 관련자들도 있는 상태고, 그런분들은 특히 재심판결을 통한 명예회복을 보다 강하게 희망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물론 법률상으로는 사면을 받아서 현재는 불이익이 없다고 하지만 예컨대 대학에 계시던 분들의 입장에서는 연금, 퇴직금 관계에서 불이익을 받았고 지금도 이는 바로 잡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조심스럽게 제 개인 생각을 말한다면, 그때 그런 터무니없는 유죄판결을 받고 고초를 겪은 것은 그것대로의 의미가 있으니까 굳이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아내야 할 이유가 있느냐는 생각도 듭니다. 역사에서 잘못됐던 대목은 잘못된 대목대로 남겨두는 것도 교훈이고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하지만 현실적으로 그 사건으로 인해 오늘날까지 불명예를 안고 있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역사도 의미가 있다」는 얘기는 너무 우아하게 들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감사원장께서도 최근 다른 관련자들과 함께 광주피해보상심의위원회에 보상청구를 하신 것으로 압니다만….『소위 김대중내란음모사건 관련자들이 모여서 보상청구 여부를 논의하다가 우리 못지않게 고초를 겪은 분들도 많은데 우리가 앞장서서 청구할 수 있느냐는 의견도 있고 해서 청구를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광주시의 청구 안내가 있었고, 또 주된 인물들이 청구를 안 하니까 다른 사람들도 주저하는 경향이 있어서, 그렇다면 우리도 함께 신청을 하는 것이 좋겠다는 쪽으로 의견을 모아 뒤늦게 보상청구를 한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