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원천적으로 합법을 가장한 또 하나의 범죄행위/5·18군사재판과 변호인들.이재의(월간예향, 1990. 5)
본문
광주민중항쟁 10주년 특집 가려졌던 광주·전남 근현대사의 현장에서 엮는 대하기획
증언 ‘원천적으로 합법을 가장한 또 하나의 범죄행위’
5·18군사재판과 변호인들
이재의 <광주일보 월간국기자>
“5·18광주사태에 대한 재판은 ‘재판’이 아니라 차라리 ‘개판’이라고 부르는 편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그런 재판을 할 바에야 차라리 혁명적 상황이라고 까놓고 얘기하면서
재판이라는 요식행위를 거치지 않았어야죠. 그 재판에 본의아니게 관여한 재판관들이 그후
두고두고 느끼는 양심의 가책은 영원히 벗을 수 없는 짐이 되고 말았습니다. 나 역시 법조
인의 한사람으로 분노를 넘어 한동안 심한 자괴감에 빠진 적도 있으니까요.”
1980년 당시 5·18재판에서 주도적으로 변론을 맡았던 유현석(64·柳鉉錫·서울제일합동
법률사무소)변호사가 당시를 회고하면서 하는 말이다.
금년 5월은 광주항쟁 10주년이다. 지난 10년을 거쳐 오는 동안 광주항쟁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이미 정당성을 획득했다. 정부측의 태도로 ‘폭동’에서 ‘민주화운동’으로까지 변
화되었다.
이러한 현상적인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에 따르는 구체적인 후속조처는 아직 요원하다. 10
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아픈 역사의 구석구석을 샅샅이 조명해 보아야 한다. 우리에게 잘못
된 점이 있었다면 고치고 부족한 점이 있었다면 채워넣자는 생각에서 그렇다. 그런 점에서
5·18재판과 재판에 참여한 변호사들의 당시 행적도 되짚어 보아야할 시점이다.
유변호사에 따르면 5·18재판은 눈가리고 아옹하는 식으로 재판절차만 갖췄을 따름이지
원천적으로 ‘합법을 가장한 또 하나의 범죄행위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유변호사는 그
렇게 주장하는데 대하여 나름대로 이런 몇가지 근거를 제시한다.
“판결의 결과인 내란죄의 성립여부는 그만두더라도 재판의 기본 절차가 전혀 지키지지
않은 상태에서 진행됐지요. 그 단적인 예가 변호인의 피고인에 대한 접견이 공식적으로는
완전히 금지되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변호인에게 군검찰관이나 합동수사본부에서 작
성한 진술조서 등 변론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최소한의 서류마저도 검토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채 단지 공소장에 기초에서 변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재판이 아니라 개판’
이런 사실은 헌법(제11조 4항 신체의 자유와 피고인의 권리)에 명시된 최소한의 권리, 즉
‘누구든지 강포·구금을 당한 때는 즉시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는 권리조
항에 정면으로 위배된다는 것이다. 최근에도 서경원의원 방북사건으로 재판과정을 둘러싸고
논란이 일었던 사항이다. 그때 재판과정에 광주지역 변호사로 비교적 열성적으로 변론해 눈
길을 끌었던 이덕수(56·李德水)변호사나 강신영(58·姜信英)변호사도 똑같은 지적을 한다.
“변론을 하기 위해서는 사건내용을 사전에 파악해야 하는 건 필수적입니다. 그러기 위해
피고인 접견과 수사기록 열람은 절대 필요사항인데 그때는 그게 어려웠죠. 겨우 비공식적인
방법으로 피고인과 1∼2회의 면담을 할 수 있었을 뿐입니다.”
변호사의 당연한 권리사항인 피고인 접견마저도 허용되지 않는 상황. 그것이 80년 5·18
재판 당시의 살벌했던 분위기를 극명하게 함축하고 있다. 5·18재판은 1980년 10월초 시작
돼 한달도 채 안되는 10월 25일 광주항쟁관련 피고인 2백55명에 대한 선고공판이 열렸다.
유변호사에 따르면 재판과정상에 군법회의 당국의 탈법성은 비단 이런 사항에만 머물지
않는다.
“홍남순피고인(변호사)에 대한 사실심리과정에서 확인된 일입니다. 재판장이 홍 피고인에
게 수사과정에서 작성된 진술조서를 인정할 수 있느냐고 묻더군요. 홍 피고인은 합동수사반
의 조서는 고문 등 강압에 의한 자백이므로 인정할 수 없고 군검찰관이 작성한 조서만 인정
할 수 있다고 말했어요.”
홍 피고는 보안대에서 강압에 의해 날조된 허위사실을 기재한 것과는 달리 그때 군검찰관
의 조서는 자신이 진술한 바를 비교적 그대로 인정해 작성되었다는 것이다. 이때 만년필로
기록된 조서에 홍남순씨 자신의 직접 무인과 간인을 찍어 놓았기 때문에 군검찰조서의 진실
성을 인정한다는 말이다. 변호인석에서 이 말을 듣고 있던 유변호사는 아무래도 이상해서
군검찰측에 그 서류의 열람을 요청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군검찰측에서 확인한 홍 피
고인에 대한 조서는 만년필로 작성된 원본이 아니라 타이프라이터로 재작성된 사본이었다.
거기에다 교묘히 간인과 피고인의 무인까지 찍혀있었다.
“이건 범죄행위입니다. 본인의 날인까지 찍힌 검찰의 진술조서를 위조한 행위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죠. 나는 재판부에 이점을 강력히 항의했으나 마이동풍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계엄이 해제된 상태서 치뤄진 대법재판에서까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대법원에서는 아예 기록까지도 보여주지 않으려고 별의별 핑계를 댔다. 대법원 담당직원
들을 상대로 강력한 법적대응조치를 취하겠다고 항의하자 그때서야 비로소 기록을 내놓더란
다.
변호사에게도 통보않은 재판일
김기옥(75·金基玉·전북 군산)변호사는 이런 일도 있었다고 증언한다.
“형사소송법에는 적어도 재판기일 5일전에는 담당변호사에게 재판날짜를 특별우편으로
송달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아마 1980년 10월 20일에 열린 재판이라고 생각돼요. 송달은 커
녕 재판날짜마저 전혀 모르고 있다가 피고인 가족을 통해 우연히 이틀전에 전해듣고 부랴부
랴 군사법정엘 찾아가 변론한 적도 있습니다.”
그런 일은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심지어 김기옥변호사는 홍남순피고인을 위한 변호인 선
임계를 군법회의에 우편으로 접수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재판당일 법정에 나가보니 선임
계가 접수마저 안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 자리서 강하게 항의하니까 그때서야 접수시켜 준
적도 있었다.
그만큼 그때 상황은 비정상적이었다. 유현석변호사는 그때 재판정의 분위기를 이렇게 전
한다.
“재판이 다음날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그날 오후에야 서울서 새마을호를 타고 부랴부랴
광주로 내려갔습니다. 밤 9시 20분에 송정리역에 도착하더군요. 광주 가서 공소장을 처음 접
했습니다. 밤새워 대강 훑어보고 다음날 아침 상무대 군사법정엘 들어섰죠. 콘센트건물로 된
법정에는 재판장이 별 하나짜리 군인이고 나머지 심판관 대령, 중령, 그리고 검찰관 소령 한
명, 법무사라고 대위계급의 군인이 앉아 있더군요. 피고인석엔 총으로 무장한 헌병들 사이에
끼어 피고인들이 수갑에 묶인 채 법정을 가득 채웠어요.”
그야말로 말 한마디 삐끗 잘못하면 신변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살풍경한 분위기였
다. 재판이 시작되자 피고인석에 앉아있던 홍남순변호사가 일어나 재판에 대한 이의를 제기
했다.
“재판장님. 저는 변호인과 면담 한번 갖지 못한 상태에서 지금 이 자리에 서게 됐습니다.
변호인 면담시간을 위해 공판기일을 연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피고인 면담도 허용치 않아
홍 피고인의 지적은 형사소송법상 정당한 주장이었다. 여기에 변호인석에 있던 유현석 변
호사가 거들고 나섰다.
“그렇습니다. 나도 변호인으로서 내가 맡은 피고인들에 대한 면담기회를 전혀 갖지 못했
습니다. 마땅히 오늘 공판은 연기되어야 합니다.”
이런 주장에 대해 재판장은 오히려 억지소리를 했다.
“변호인은 이 사건이 기소된 지 언제인데 이제와서 면담요청을 합니까. 그런 이유로 공
판기일을 연기할 수는 없습니다.”
“재판장님. 형사소송법에는 누구든 인신을 구속하면 즉각 피의사실 요지와 구속장소를
가족 혹은 변호인에게 통지해야 합니다. 그런데 당신들은 구속장소는 커녕 재판기일마저도
통지하지 않았습니다. 이건 위법입니다.”
변호인의 논리적인 반격에 재판장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휴정을 선포했다. 잠시후 헌병
한명이 유변호사에게 다가와 저쪽 합의실로 가자고 했다. 합의실은 군법회의 재판부가 사용
하는 법정과 칸막이로 나눠져 뒤편에 있는 사무실이다. 그곳엔 재판장과 검찰관, 법무부장
(중령)이 무언가 심각하게 상의하고 있었다. 유변호사가 들어서자 법무부장이 아는 체를 하
면서 인사를 청했다.
“제가 유변호사 아드님과 동창입니다. 아버님, 왜 법정에서 우릴 곤란하게 그러십니까.
저에게 부탁했더라면 면회를 시켜드렸을 텐데요.”
“변호사가 법정에서 활동해야지 그럼 집에다 찾아다니며 뒷구멍으로 변론해야 합니까?
좌우지간 피고인들이 수감되어 있는 구속장소를 먼저 알려주세요.”
이렇게 해서 첫 공판이 이틀뒤로 연기되고 유변호사는 자신이 변호인선임계를 낸 피고인
들을 전부 만나볼 수 있었다.
아무튼 이런저런 상황으로 미루어 보자 그때 재판의 분위기가 매우 엄혹했다는 건 불을
보듯 뻔하다. 80년 5·18직후 전반적인 사회분위기가 살얼음판을 걷는 듯 했던 상황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랬기 때문에 당시 5·18재판에 참여한 변호사들은 각별한 용기가 요구되
었다.
강신영 변호사는 이렇게 말한다.
“변호사가 어떤 사건이건 변론을 맡아 소신껏 임무를 수행하는 건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때는 그럴 수 없는 공포분위기가 팽배해 있던 상황이었어요. 제 자신도 5·18재판의 변론
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군정보기관의 사찰을 받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었죠. 물론 확
인할 수는 없었지만.”
사선 변호인수 피고인 전체의 2%
이런 엄혹한 상황은 5·18재판에 참여한 사선변호인 숫자나 실제 재판과정에서 몇몇을 제
외하고 대부분의 변호인들이 보여준 극히 소극적인 태도에서도 잘 드러난다. 다른 시국사건
재판과 달리 5·18재판은 피고인중 불과 7∼8명 안팎의 변호사, 신부, 교수 등 재야인사만
사선변호사가 선임됐을 뿐이다. 이때 군법회의에 정식기소된 4백4명(국방부 발표 1985. 6. 7)
이라는 엄청난 피고인 숫자에 비하면 기껏해야 사선변호인의 비율은 피고인 전체의 2%에도
못미치는 숫자다. 나머지 3백90여명에 달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군법회의 재판부에서 선임
한 국선변호인들의 형식적인 변론만 있었을 뿐이다.
“원래 군법회의는 ‘필요적 변론’입니다. 반드시 변호인이 입회해야 재판을 할 수 있습
니다. 때문에 사선변호인이 없을 때는 재판부에서 변호사자격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법률에
소양이 있는 장교를 선정할 수 있도록 돼 있어요.”
군법회의법 제62조 ‘국선변호인 선임에 관한 사항’에 따른 강제규정이다.
1980년 당시 광주변호사회 부회장을 맡고 있던 강신영변호사는 그때 어떠한 과정을 거쳐
군법회의에 광주변호사회 소속 변호사들이 국선변호인으로 선임됐는가를 이야기한다.
“그 당시 광주변호사회 회장은 이기홍(57·李基洪)변호사였고 내가 부회장이었죠. 그런데
이 지역에서 인권변론에 앞장섰던 홍남순변호사랑 이기홍변호사가 함께 구속되는 사태가 발
생하자 변호사회의 공식적인 직책을 맡고 있는 제가 나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몇분 변호사
들과 상의한 결과 아무리 어렵더라도 최소한 두분에 대한 변론은 우리가 해야 할 것 아니냐
고 뜻을 모았어요.”
그렇게 해서 1980년 6월 중순쯤 두세차례 모임을 가진 다음 구속된 2명의 동료 변호사를
위해 광주변호사회 소속 변호사를 중심으로 자진해서 사선변호인선임계를 제출하자는 회람
을 돌렸다.
“이제와서 생각하면 부끄러운 이야기입니다만 그때 상황에서는 그런 움직임마저도 여간
신경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더구나 변호사란 직업이 개인중심의 자유업이다 보니
누가 누구에게 강요해서 어떤 일을 추진할 수도 없는 일이죠. 어려운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나아가 많은 몇분을 제외하곤 광주지역에 거주하는 분들은 대개 공동으로 선임계를 내는데
동의했습니다.”
21명 공동으로 선임계 제출
그때 광주변호사회 회원은 모두 44명. 이 가운데 목포지역에 사무실을 둔 5명, 순천 9녕,
장흥 3명을 제외한 27명이 광주에 사무실을 두고 있었다.
이때 공동으로 변호인 선임계를 낸 사람은 광주에 사무실을 둔 27명 중 강신영변호사를
비롯한 20명과 전주변호사회 소속 심난섭(沈欄燮)변호사를 포함해 21명이다. 사무소가 광주
인 변호사 가운데 홍남순, 이기홍 변호사는 구속된 상태였기에 광주에서는 이들 2명을 제외
한 5명이 선임계를 내지 않았다. 심난섭변호사는 이때 변호사업개업지제한으로 사무소를 전
북 정읍에다 두고 있었으나 실제 활동지역은 광주였기 때문에 광주변호사와 함께 선임계를
제출했던 것.
한편 광주변호사회 소속이지만 목포·순천·장흥지역에 사무소를 둔 변호사들은 선임계를
내지 않았다.
이때 변호인 선임계를 낸 변호사들은 다음과 같다.
강신영(姜信英), 고재량(高在亮), 권진욱(權晋郁), 김경현(金京鉉), 김동주(金東柱), 김득룡
(金得龍), 김용근(金龍根), 김용채(金鏞彩), 김호현(金浩鉉), 문행두(文幸斗), 선미봉(宣美峰),
이경량(李京良), 이금원(李錦原), 이덕수(李德水), 이선재(李善宰), 조희채(曺喜彩), 최봉수(崔
峰秀), 추진수(秋鎭洙), 신인수(申寅秀), 유원종(柳元鍾), 심난섭(沈欄燮)(이상 21명).
“광주변소사회 소속 21명(심난섭 포함)의 변호사가 홍남순, 이기홍 두 피고인에 대한 사
선변호인 선임계를 제출하자 군법회의에서 우리에게 새로운 요청을 해왔습니다. 피고인이
워낙 많고 사건 자체가 내란죄로 기소된 상태라 나머지 사람들에 대해서도 변호인이 필요하
므로 기왕에 선임계를 낸 사람들을 중심으로 국선변론을 맡아달라는 거였어요.”
그렇게 해서 나머지 사람들에 대해서는 재판부에서 선임한 국선변호인 자격으로 변론을
맡게 된 것이다. 물론 국선변호인은 이 사람들만으로는 모자라 군에서도 장교 일부가 참여
했다.
군산·서울 등지에서도 변호인 참여
이때 광주지역을 벗어난 외지에서 정읍의 심난섭변호사를 제외하고도 3명의 변호사가 자
진해서 군법회의에 변호인 선임계를 제출하였다. 군산에서 활동을 벌인 김기옥(75·金基玉)
변호사, 서울의 유석현변호사(현 대한변협 인권위원장)와 노병문변호사(작고)가 그들이다.
김변호사는 홍남순변호사와 평소 각별한 사이였기에 ‘동료의 입장’에서 홍피고인에 대한
변론에 나섰다. 이와 반면 유현석변호사는 70년대부터 이돈명 변호사(현 조선대 총장)와 더
불어 재야인권변호사로 민청학련사건(1974), 남민전사건(1979) 등과 80년대 들어서도 부산미
문화원방화사건(1983), 5·3인천사건(1986) 등을 맡았고, 최근에도 임수경·문신부 방북사건
(1989) 등 굵직굵직한 시국사건을 도맡아 왔다. 특히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 회장직(1981∼
1985)도 역임할 만큼 천주교 기반이 넓다. 그런 연유로 유변호사는 80년 당시 천주교 광주
교구 윤공희대주교의 부탁을 받고 김성룡신부, 조철현신부 그리고 오병문교수(현 전남대 총
장)의 변론을 서게 되었다.
“처음에는 윤대주교님으로 세분의 변론을 요청 받았습니다. 그러나 막상 재판과정에 서
보니 동료인 홍남순변호사를 빠트릴 수 없더군요. 또한 내란 수괴로 지목되어 재판전체의
핵심적 위치에 있던 정동년씨(당시 전남대복적생)의 변론도 함께 맡게 됐어요.”
유변호사는 당시 서울에서 자신이 맡은 다른 사건에 대한 업무를 처리하고 5·18재판이
열릴 때면 광주에 꼭 내려가야 하기 때문에 무척 힘들었다고 말한다. 그런 가운데서도 안타
까웠던 일은 수많은 피고인 가족들이 자신에게 몰려와 눈물을 흘리며 변론을 부탁할 때 전
부 다 들어줄 수 없는 사정이었다고 한다.
“제가 서울에서 일을 마치고 밤중에 광주가톨릭회관에 도착하면 구속자가족들이 몇 십명
씩 미리 와서 기다리곤 했습니다. 그때 제 실정으로는 도저히 그들을 감당할 수 없었죠. 밤
새워 재판부로부터 송달된 주요 피고에 대한 서류를 검토하고 변론을 준비해야 했으니까요.
가족들은 통금시간이 넘어도 집에 가지 않고 같이 날을 새우곤 했습니다. 그럴때면 나는 가
족들에게 어쩔수 없는 사정을 말하며 광주에 계시는 변호사들께 부탁해보라고 권유했습니
다.”
그러나 가족들은 한사코 유변호사에게만 변론을 해달라고 조르곤 했다.
“그때 이덕수 변호사나 몇몇 분을 제외한 대부분의 광주변호사들이 너무 소극적이지 않
았나 생각됩니다. 가족들이 제게 와서 하는 말은 한결같이 몇몇 변호사를 찾아가 변론을 의
뢰했지만 아예 자리를 피해버리거나 혹은 변론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면서 거절했다더군
요.”
당시 변호사들의 이런 소극적인 태도는 ‘변호사는 기본적 인권을 옹호하고 사회정의의
실현을 사명으로 한다’고 규정된 변호사윤리강령 맨 첫조항 취지에도 어긋난다는 지적이
다.
가족들 변호사 찾아 헤매
수괴로 몰렸던 정동년씨의 부인 이명자씨는 그때 상황을 이렇게 증언하다.
“당시만해도 평범한 가정주부에 불과했던 저로서는 제 남편이 광주사태 수괴로 몰려 사
형이 떨어지자 청천벽력이었습니다. 그때는 오직 남편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유일한 희망은 돈이 얼마나 들더라도 변호사를 선임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누가 누
군지도 몰랐기에 이사람 저사람 찾아다녀봤지만 변론이 별다른 효과가 없을 거라며 대개 거
절하더군요. 그땐 정말 그렇게 야속할 수가 없었어요. 그러나 마침 남편 친구분은 도움으로
김용근변호사님이 변론을 맡아주었습니다.”
그때 김용근변호사가 변론을 허락하자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그때는 그랬다. 가족들
에게나 피고인 모두에게 변호인이 선임됐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커다란 힘이 됐다고 한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김용근변호사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정동년이란 사람을 전혀 몰랐는데 내가 아는 사람이 찾아와 그 사람 변호를 서달라고
부탁하더군요. 오죽했으면 나에게 까지 찾아왔겠느냐 싶어 승낙했지요.”
그때 광주변호사로서는 가장 적극적으로 변론을 한 것으로 알려진 이덕수변호사는 이렇게
회고한다.
“저는 80년 이전에도 그리고 이후에도 굳이 인권변론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5·18재판에 남보다 조금 더 열심히 뛰었던건 제 나름대로 변호사라는 직업인으로서 윤리적
차원의 문제였습니다. 내가 어떤 불이익을 당하더라도 이번 사건만큼은 억울한 희생자가 없
어야겠다는 일종의 의무감 같은 것이 작용했어요.”
이 변호사 자신 역시 광주항쟁기간 동안 쭉 지켜보았지만 혼란된 사태를 수습하자고 나선
사람들을 오히려 내란죄나 빨갱이로 몰아가는 정부의 처사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름대로 광주시민의 정당함에 대한 확신과 변호사로서 직업윤리 차원에서 발벗고 나섰다는
얘기다.
법조계 내외서 자성과 비판의 소리
그러나 당시 이덕수변호사와 같은 사람은 흔치 않았다. 군법회의에 변호인선임계는 제출
했으나 막상 재판정에 나가 실제로 변론을 했던 변호사들이 기껏해야 7∼8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나머지 대부분의 변호사들이 ‘다른 사건 때문에 바쁘다느니’, 혹은 ‘몸이 아프다느
니’하는 핑계를 대며 단 한번도 법정엘 나가지 않은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그때 군산에서
까지 와서 변론을 했던 김기옥변호사는 이런 모습을 지켜보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변호사라는 직업이 아무리 자유업이고 자신의 판단에 따라 사건을 맡을 수도 있고 안
맡을 수도 있으나 솔직한 심정으로 그때 광주변호사분들이 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듭디다.”
이러한 비난과 지성이 섞인 비판의 목소리는 그후 법조계 내부에서 뿐 아니라 광주항쟁관
련자 등 여기저기서 제기되어 왔다. 특히 그때 단체로 낸 변호인 선임계마저도 내지 않았던
사람들은 ‘그럴수 있느냐’고 한동안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그때 그럴 수밖에 없었던
사정에 대해 죄근 지모변호사는 이렇게 밝힌다.
“그때 나는 기독구호위원회 일을 맡아보면서 홍남순·이기홍변호사 등과 함께 인권운동
을 했었죠. 그런데 광주사태로 그분들이 구속되자 나에게도 수사의 손길이 뻗칠 것 같은 우
려가 들었습니다. 신변에 위협을 느끼자 그해 7월 미국으로 피신했었죠. 나중에 상황이 풀려
그해 12월에 다시 돌아오긴 했지만 그때 생각으로는 영원히 못돌아올줄 알았어요.”
인권변호사 5·18전 대부분 연행돼
이런 일도 있었다. 전남대 이모교수는 동료교수 한사람과 함께 신모변호사(현 국회의원)를
찾아가 구속된 교수와 학생들의 변론을 부탁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때 이교수는 5·18예비검
속으로 검거되어 수감되었다가 그해 6월말쯤 함께 연행된 다른 동료교수들 보다 먼저 풀려
난 상태였다. 이런 일로 인해 신변호사도 한동안 여러사람의 입에 오르내렸다. 신변호사는
당시 변론을 거절했던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그런일이 있었죠. 하지만 그때 나는 그해 3월에 개업한 상태라 매우 바빴습니다. 더구나
변호사개업지제한 때문에 사무실을 전북 정읍에다 두고 있으면서 오전에는 그쪽 일을 보고
오후에는 광주에서 사건을 처리하곤 했어요. 그때 광주변호사회에서 군법회의 재판부의 요
청으로 전부 국선변론을 한 것으로 압니다. 나는 당시 전주변호사회 소속이었습니다. 또한
그때 상황에서는 누가 변론을 하든지 판결에 거의 영향을 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괜히 돈들여 사선 변호사를 선임해 보았자 별 효과도 없을텐데 굳이 그럴 필요있겠느냐는
생각 때문에 거절한 겁니다.”
그런 생각 때문에 이교수 외에도 여러 사람이 변론을 부탁해 왔지만 모두 그냥 되돌려 보
냈다고 그는 말한다. 그러나 그는 계엄이 해제된 다음에 박석무씨(현 국회의원·당시 대동
고교사)의 항소심재판이 민간법정으로 이관되었을 때는 자청해서 변론했다고 덧붙인다.
광주지역변호사들은 그렇다 하더라도 전국적으로 인권변론에 앞장섰던 변호사들은 이렇게
엄청난 사건에 왜 거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까?
유현석변호사는 그때 상황을 이렇게 말한다.
“5·18직전이었죠. 정확히 말하자면 80년 5월 15일 서울에서는 지식인 1백34명이 시국선
언문을 채택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이틀 뒤 5월 17일을 기해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면
서 여기에 서명한 사람들이 모두 연행돼 갔어요.”
이 사건으로 변호사 가운데 연행된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
박세경, 이돈명, 홍성우, 황인철, 이돈희, 이범렬, 강대헌, 박일제, 안명기, 김동정, 정춘용,
조승형, 김제형, 조준희, 이세중, 나석호 등 17명이었다. 당시 주도적으로 인권변론을 하던
변호사들이 거의 다 연행되어버린 셈이다. 이들은 그후 대개 풀려나긴 했으나 거의 변호사
업자격정지라는 족쇄가 채워진 상태였다.
“나는 선언문채택에 서명하기전에 이돈명변호사와 서로 상의를 했죠. 앞으로 시국이 어
떻게 바꿜지 모르니까 둘 가운데 한 사람은 서명에 참여하지 않고 암아 유사시에 변호업무
를 수행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딱 일이 벌어지고 말더군요.”
유변호사의 말이다.
‘내란죄 성립’싸고 공방
5·18재판 당시 법정에서 변호인들이 했던 변론의 요지는 대개 내란죄의 구성요건을 둘러
싼 법리(法理)해석에서의 오인(誤認)과 공소사실이 피고인들의 실제 행위와 다르다는 사실
(事實)오인문제를 밝히는데 집중됐다.
강신영 변호사는 당시 변론내용을 이렇게 요약한다.
첫째, 유신헌법 자체가 기본적으로 잘못된 법률이고 그걸 빨리 고치라는 요구가 아무리
방법이 거칠더라도 내란죄가 될 수 없다.
둘째, 치안부재로 국가기관에 질서를 호소할 수 없는 상황에서 수습을 위해 나선 사람들
이 내란범이 될 수 없다. 오히려 피고인들의 공로를 치하해야 할 일이다.
이덕수변호사는 내란죄 적용의 부당성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내란죄란 체제 자체를 전복시킬 목적으로 조직적인 폭동을 벌일 때 적용할 수 있습니
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때까지 내란죄를 적용해 본 적이 한번도 없었어요.”
일제때 3·1운동 같은 거대한 국민운동도 일본인들은 내란죄로 다스리지 않았다. 단지 치
안유지법차원에서 다뤘을 뿐이다. 또한 일본에서는 수상을 저격한 사례도 있으나 이때도 역
시 정치체제의 전복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내각의 구성원 퇴진을 목적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헌법의 기본질서를 파괴한 것으로 볼 수 없다. 따라서 5·18광주사태는 우리 헌법에
서 규정하는 자유민주주의체제에 대한 전복을 목표로 한 대중운동이 아니라 집권자의 독재
를 거부한 운동이라는 주장이다.
사실오인 부분에 대해서는 주로 내란죄의 수괴나 주요임무봉사자로 기소된 정동년씨와 홍
남순씨 등 주로 수습대책위원회들과 도청팀, 재야팀의 실제 행위사실이 공소사실과 다른점
을 밝혀내는 내용이다.
“국회청문회등을 통해 지금은 이미 허위사실이었던 점이 밝혀습니다만 정동년씨와 김대
중씨 사이에 건네줬다는 5백만원의 알리바이가 검찰측의 공소장 안에서도 서로 앞뒤가 안맞
아요. 더구나 내란수괴범이 5월 17일 연행됐는데 5·18사태는 그 후에 일어났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정동년씨가 상무대 영창에서 그 기간동안 밖에 나가 지휘를 했어야 내란죄가 성립
되는 거 아닙니까?”
만약 그렇지 않고 정동년씨가 영창에 구금되어 있는 상태에서 사태가 발생했다면 이건 검
찰의 주장대로 모든 걸 인정해도 ‘예비음모죄’이상은 안된다는 것이다.
그런 억지논리는 무수히 많았다.
조철현신부는 수습위에 참가해 총기회수를 위해 직접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설득했다. 그
런데도 수습위에 참가해 사태를 악화시키기 위해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선동한 걸로 돼 있
다. 이런 사실을 변호인이 군에서 작성한 작전일지를 제시하며 반론을 펴자 검찰은 이렇게
억지주장을 폈다.
‘수습위 참여는 선동위한 것’
“그까짓 경찰의 낡은 무기를 1천여정쯤 회수한 것이 뭐가 그리 중요한가. 계엄군의 현대
화된 무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오히려 계엄군이 진입하면 효과적으로 대항하기 위해
무기를 한곳에 모았던 것이다.”
유변호사는 하도 기가 막혀 그때 수습위에 직접 참가했던 정시채 당시 전라남도부지사를
증인으로 채택했다. 마침 정부지사는 5·18직후 조신부가 연행된지도 모르고 사태당시 조신
부가 수습을 위해 기울였던 노력을 높이 칭찬하면서 감사장을 주어야 한다고 상부에 보고했
던 적이 있었다. 이런 사실은 상부로부터 받아들여져 정부지사가 조신부를 표창하기 위해
천주교측에 소재를 확인하던 과정에서 알려졌다. 유변호사는 정부지사를 증인으로 채택, 그
점을 캐물었다. 그러나 정부지사는 기억이 잘 안난다며 우물쭈물 답변을 회피했다. 유변호사
는 몇번씩 직접 신문과 반대신문을 통해 결국 그 사실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
다.
“그런 명백한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죄판결이 나더라구요. 더구나 변호사들이 절
대 부족한 판이니 다른 피고인들에게는 신경 쓸 겨를도 없었어요. 계란으로 바위치기란 생
각이 들더군요.”
판결을 앞두고 마지막엔 숫제 재판관의 양심에 호소하는 방식으로 변론을 해보기도 했다.
“재판장님, 민간재판이든 군사재판이든 사람의 유무죄를 심판하는 재판관에게는 세가지
요소가 요구됩니다. 지식과 양심과 용기가 그것입니다.”
그런데 지식이나 양심면에서는 민간인이든 군인이든 별 차이가 없다. 큰 차이는 바로
‘용기’다. 군인의 생명은 용기가 아닌가. 이제 이번 재판의 진실을 충분히 깨달았을 줄 믿
는다. 이제 필요한 건 군인정신에 투철한 재판장의 진정한 용기다. 당신의 용기있는 판결은
청사에 길이 빛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간절한 인간적 호소도 당시 상황에서는 한갖 헛 메아리에 불과했다. 재판
결과는 미리 짜여진 각본대로였다.
“사실 ‘용기’는 재판관에게만 요구되어질 성질이 아니었지요. 오히려 변호사들에게 더
필요한 말이었는지도 몰라요. 변호사라는 사회적 직분과 기본적 인권을 옹호해야 한다는 직
업윤리에 입각했을 때 우리의 노력은 너무 보잘 것 없는 것이었어요. 특히 이런 저런 이유
로 그런 상황에서 변론에 소극적인 분들을 볼 때는 같은 직업인으로서 무척 안타깝기 조차
했어요.”
‘5·18재판은 원천적 무효’
그때 변론에 적극 참여했던 변호사들일수록 한결같이 자신을 포함한 변호사들 모두가 효
과적이고 충분한 변론활동을 벌이지 못했음을 아쉬워 한다. 또한 대부분의 변호사들이 적극
참여하지 못했던 원인 가운데 하나였던 ‘개인적인 불이익을 그후에라도 받은 적이 있느
냐’는 질문에는 결코 그런 사실이 없다고 한다.
최근 국회에서는 ‘광주보상법’제정을 둘러싸고 다양한 견해가 제출되고 있다. 당시 변
호인으로 참여했던 변호사들은 예외없이 5·18재판은 원천적으로 무효임을 강조한다. 연행
과정에서부터 수사, 재판, 석방에 이르기까지 어느것 하나 적법한 법절차에 따른 것이 없다
는 주장이다. 단지 있다면 대국민설득과 자신들의 범죄를 합리화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재판
자체를 형식적인 틀에 짜맞췄을 뿐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5·18재판은 재심을 하여 다시 시
시비비를 가린다거나 해서는 안되고 원천적으로 무효화시키는 특별법이 제정되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아직도 5·18구속자들이 법적으로는 범죄전과자 취급을 받고 있다는 지적이다.
강신영변호사는 구체적인 예를 들어 그점을 상기시킨다.
“얼마전 대한변협에서 수여하는 인권옹호상 수상자로 홍남순변호사가 추천된 적이 있었
는데 수상이 취소 되었어요. 나중에 알아보니 5·18재판때 받은 실형이 ‘형면제’만 되어
있지 ‘실효’가 안되어 있어 법적으로 전과기록으로 남아있기 때문이었죠.”
유현석 변호사는 재심절차를 밟는 방식으로 형무효가 선언되어서는 안된다는 근거를 이렇
게 말한다.
“원래 형사소송법상 재심은 범죄에 대한 새로운 증거가 나타났을 때 겁니다. 잘못 판결
했다는 사실만으로는 재심의 사유가 안됩니다. 그런데 광주사람들의 명예회복차원에서 거론
되는 이 문제가 새로운 증거 때문에 제기된 건 아니죠. 원천적으로 죄가 없는 사람들을 어
거지로 죄인으로 만들었으니 그것이 판명된 이상 당연히 특별법을 제정해 무효로 해줘야
죠.”
금년은 광주항쟁이 일어난지 10주년이다. 재판이 진행되던 해는 ‘폭동’으로 불리우다
이젠 ‘광주민주화운동’이라고 규정되고 있다. 이런 상황변화에도 불구하고 명예회복 등
실제로 변화된 건 거의 없다는 게 중론이다. 더구나 현재 계류중인 법안에도 구속자들에 대
한 피해보상은 아직 적극 거론되지 않는 상태다. 그런 까닭에 대해 위인백씨(44, 5·18구속
자)는 이렇게 말한다.
“아직도 광주항쟁의 역사적으로 정당한 평가를 못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양시론적인 차
원에서 정부도 옳고 광주시민도 옳다는 식이예요. 그러니 애매한 상태일 수밖에 없는거죠.”
증언 ‘원천적으로 합법을 가장한 또 하나의 범죄행위’
5·18군사재판과 변호인들
이재의 <광주일보 월간국기자>
“5·18광주사태에 대한 재판은 ‘재판’이 아니라 차라리 ‘개판’이라고 부르는 편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그런 재판을 할 바에야 차라리 혁명적 상황이라고 까놓고 얘기하면서
재판이라는 요식행위를 거치지 않았어야죠. 그 재판에 본의아니게 관여한 재판관들이 그후
두고두고 느끼는 양심의 가책은 영원히 벗을 수 없는 짐이 되고 말았습니다. 나 역시 법조
인의 한사람으로 분노를 넘어 한동안 심한 자괴감에 빠진 적도 있으니까요.”
1980년 당시 5·18재판에서 주도적으로 변론을 맡았던 유현석(64·柳鉉錫·서울제일합동
법률사무소)변호사가 당시를 회고하면서 하는 말이다.
금년 5월은 광주항쟁 10주년이다. 지난 10년을 거쳐 오는 동안 광주항쟁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이미 정당성을 획득했다. 정부측의 태도로 ‘폭동’에서 ‘민주화운동’으로까지 변
화되었다.
이러한 현상적인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에 따르는 구체적인 후속조처는 아직 요원하다. 10
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아픈 역사의 구석구석을 샅샅이 조명해 보아야 한다. 우리에게 잘못
된 점이 있었다면 고치고 부족한 점이 있었다면 채워넣자는 생각에서 그렇다. 그런 점에서
5·18재판과 재판에 참여한 변호사들의 당시 행적도 되짚어 보아야할 시점이다.
유변호사에 따르면 5·18재판은 눈가리고 아옹하는 식으로 재판절차만 갖췄을 따름이지
원천적으로 ‘합법을 가장한 또 하나의 범죄행위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유변호사는 그
렇게 주장하는데 대하여 나름대로 이런 몇가지 근거를 제시한다.
“판결의 결과인 내란죄의 성립여부는 그만두더라도 재판의 기본 절차가 전혀 지키지지
않은 상태에서 진행됐지요. 그 단적인 예가 변호인의 피고인에 대한 접견이 공식적으로는
완전히 금지되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변호인에게 군검찰관이나 합동수사본부에서 작
성한 진술조서 등 변론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최소한의 서류마저도 검토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채 단지 공소장에 기초에서 변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재판이 아니라 개판’
이런 사실은 헌법(제11조 4항 신체의 자유와 피고인의 권리)에 명시된 최소한의 권리, 즉
‘누구든지 강포·구금을 당한 때는 즉시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는 권리조
항에 정면으로 위배된다는 것이다. 최근에도 서경원의원 방북사건으로 재판과정을 둘러싸고
논란이 일었던 사항이다. 그때 재판과정에 광주지역 변호사로 비교적 열성적으로 변론해 눈
길을 끌었던 이덕수(56·李德水)변호사나 강신영(58·姜信英)변호사도 똑같은 지적을 한다.
“변론을 하기 위해서는 사건내용을 사전에 파악해야 하는 건 필수적입니다. 그러기 위해
피고인 접견과 수사기록 열람은 절대 필요사항인데 그때는 그게 어려웠죠. 겨우 비공식적인
방법으로 피고인과 1∼2회의 면담을 할 수 있었을 뿐입니다.”
변호사의 당연한 권리사항인 피고인 접견마저도 허용되지 않는 상황. 그것이 80년 5·18
재판 당시의 살벌했던 분위기를 극명하게 함축하고 있다. 5·18재판은 1980년 10월초 시작
돼 한달도 채 안되는 10월 25일 광주항쟁관련 피고인 2백55명에 대한 선고공판이 열렸다.
유변호사에 따르면 재판과정상에 군법회의 당국의 탈법성은 비단 이런 사항에만 머물지
않는다.
“홍남순피고인(변호사)에 대한 사실심리과정에서 확인된 일입니다. 재판장이 홍 피고인에
게 수사과정에서 작성된 진술조서를 인정할 수 있느냐고 묻더군요. 홍 피고인은 합동수사반
의 조서는 고문 등 강압에 의한 자백이므로 인정할 수 없고 군검찰관이 작성한 조서만 인정
할 수 있다고 말했어요.”
홍 피고는 보안대에서 강압에 의해 날조된 허위사실을 기재한 것과는 달리 그때 군검찰관
의 조서는 자신이 진술한 바를 비교적 그대로 인정해 작성되었다는 것이다. 이때 만년필로
기록된 조서에 홍남순씨 자신의 직접 무인과 간인을 찍어 놓았기 때문에 군검찰조서의 진실
성을 인정한다는 말이다. 변호인석에서 이 말을 듣고 있던 유변호사는 아무래도 이상해서
군검찰측에 그 서류의 열람을 요청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군검찰측에서 확인한 홍 피
고인에 대한 조서는 만년필로 작성된 원본이 아니라 타이프라이터로 재작성된 사본이었다.
거기에다 교묘히 간인과 피고인의 무인까지 찍혀있었다.
“이건 범죄행위입니다. 본인의 날인까지 찍힌 검찰의 진술조서를 위조한 행위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죠. 나는 재판부에 이점을 강력히 항의했으나 마이동풍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계엄이 해제된 상태서 치뤄진 대법재판에서까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대법원에서는 아예 기록까지도 보여주지 않으려고 별의별 핑계를 댔다. 대법원 담당직원
들을 상대로 강력한 법적대응조치를 취하겠다고 항의하자 그때서야 비로소 기록을 내놓더란
다.
변호사에게도 통보않은 재판일
김기옥(75·金基玉·전북 군산)변호사는 이런 일도 있었다고 증언한다.
“형사소송법에는 적어도 재판기일 5일전에는 담당변호사에게 재판날짜를 특별우편으로
송달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아마 1980년 10월 20일에 열린 재판이라고 생각돼요. 송달은 커
녕 재판날짜마저 전혀 모르고 있다가 피고인 가족을 통해 우연히 이틀전에 전해듣고 부랴부
랴 군사법정엘 찾아가 변론한 적도 있습니다.”
그런 일은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심지어 김기옥변호사는 홍남순피고인을 위한 변호인 선
임계를 군법회의에 우편으로 접수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재판당일 법정에 나가보니 선임
계가 접수마저 안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 자리서 강하게 항의하니까 그때서야 접수시켜 준
적도 있었다.
그만큼 그때 상황은 비정상적이었다. 유현석변호사는 그때 재판정의 분위기를 이렇게 전
한다.
“재판이 다음날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그날 오후에야 서울서 새마을호를 타고 부랴부랴
광주로 내려갔습니다. 밤 9시 20분에 송정리역에 도착하더군요. 광주 가서 공소장을 처음 접
했습니다. 밤새워 대강 훑어보고 다음날 아침 상무대 군사법정엘 들어섰죠. 콘센트건물로 된
법정에는 재판장이 별 하나짜리 군인이고 나머지 심판관 대령, 중령, 그리고 검찰관 소령 한
명, 법무사라고 대위계급의 군인이 앉아 있더군요. 피고인석엔 총으로 무장한 헌병들 사이에
끼어 피고인들이 수갑에 묶인 채 법정을 가득 채웠어요.”
그야말로 말 한마디 삐끗 잘못하면 신변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살풍경한 분위기였
다. 재판이 시작되자 피고인석에 앉아있던 홍남순변호사가 일어나 재판에 대한 이의를 제기
했다.
“재판장님. 저는 변호인과 면담 한번 갖지 못한 상태에서 지금 이 자리에 서게 됐습니다.
변호인 면담시간을 위해 공판기일을 연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피고인 면담도 허용치 않아
홍 피고인의 지적은 형사소송법상 정당한 주장이었다. 여기에 변호인석에 있던 유현석 변
호사가 거들고 나섰다.
“그렇습니다. 나도 변호인으로서 내가 맡은 피고인들에 대한 면담기회를 전혀 갖지 못했
습니다. 마땅히 오늘 공판은 연기되어야 합니다.”
이런 주장에 대해 재판장은 오히려 억지소리를 했다.
“변호인은 이 사건이 기소된 지 언제인데 이제와서 면담요청을 합니까. 그런 이유로 공
판기일을 연기할 수는 없습니다.”
“재판장님. 형사소송법에는 누구든 인신을 구속하면 즉각 피의사실 요지와 구속장소를
가족 혹은 변호인에게 통지해야 합니다. 그런데 당신들은 구속장소는 커녕 재판기일마저도
통지하지 않았습니다. 이건 위법입니다.”
변호인의 논리적인 반격에 재판장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휴정을 선포했다. 잠시후 헌병
한명이 유변호사에게 다가와 저쪽 합의실로 가자고 했다. 합의실은 군법회의 재판부가 사용
하는 법정과 칸막이로 나눠져 뒤편에 있는 사무실이다. 그곳엔 재판장과 검찰관, 법무부장
(중령)이 무언가 심각하게 상의하고 있었다. 유변호사가 들어서자 법무부장이 아는 체를 하
면서 인사를 청했다.
“제가 유변호사 아드님과 동창입니다. 아버님, 왜 법정에서 우릴 곤란하게 그러십니까.
저에게 부탁했더라면 면회를 시켜드렸을 텐데요.”
“변호사가 법정에서 활동해야지 그럼 집에다 찾아다니며 뒷구멍으로 변론해야 합니까?
좌우지간 피고인들이 수감되어 있는 구속장소를 먼저 알려주세요.”
이렇게 해서 첫 공판이 이틀뒤로 연기되고 유변호사는 자신이 변호인선임계를 낸 피고인
들을 전부 만나볼 수 있었다.
아무튼 이런저런 상황으로 미루어 보자 그때 재판의 분위기가 매우 엄혹했다는 건 불을
보듯 뻔하다. 80년 5·18직후 전반적인 사회분위기가 살얼음판을 걷는 듯 했던 상황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랬기 때문에 당시 5·18재판에 참여한 변호사들은 각별한 용기가 요구되
었다.
강신영 변호사는 이렇게 말한다.
“변호사가 어떤 사건이건 변론을 맡아 소신껏 임무를 수행하는 건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때는 그럴 수 없는 공포분위기가 팽배해 있던 상황이었어요. 제 자신도 5·18재판의 변론
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군정보기관의 사찰을 받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었죠. 물론 확
인할 수는 없었지만.”
사선 변호인수 피고인 전체의 2%
이런 엄혹한 상황은 5·18재판에 참여한 사선변호인 숫자나 실제 재판과정에서 몇몇을 제
외하고 대부분의 변호인들이 보여준 극히 소극적인 태도에서도 잘 드러난다. 다른 시국사건
재판과 달리 5·18재판은 피고인중 불과 7∼8명 안팎의 변호사, 신부, 교수 등 재야인사만
사선변호사가 선임됐을 뿐이다. 이때 군법회의에 정식기소된 4백4명(국방부 발표 1985. 6. 7)
이라는 엄청난 피고인 숫자에 비하면 기껏해야 사선변호인의 비율은 피고인 전체의 2%에도
못미치는 숫자다. 나머지 3백90여명에 달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군법회의 재판부에서 선임
한 국선변호인들의 형식적인 변론만 있었을 뿐이다.
“원래 군법회의는 ‘필요적 변론’입니다. 반드시 변호인이 입회해야 재판을 할 수 있습
니다. 때문에 사선변호인이 없을 때는 재판부에서 변호사자격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법률에
소양이 있는 장교를 선정할 수 있도록 돼 있어요.”
군법회의법 제62조 ‘국선변호인 선임에 관한 사항’에 따른 강제규정이다.
1980년 당시 광주변호사회 부회장을 맡고 있던 강신영변호사는 그때 어떠한 과정을 거쳐
군법회의에 광주변호사회 소속 변호사들이 국선변호인으로 선임됐는가를 이야기한다.
“그 당시 광주변호사회 회장은 이기홍(57·李基洪)변호사였고 내가 부회장이었죠. 그런데
이 지역에서 인권변론에 앞장섰던 홍남순변호사랑 이기홍변호사가 함께 구속되는 사태가 발
생하자 변호사회의 공식적인 직책을 맡고 있는 제가 나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몇분 변호사
들과 상의한 결과 아무리 어렵더라도 최소한 두분에 대한 변론은 우리가 해야 할 것 아니냐
고 뜻을 모았어요.”
그렇게 해서 1980년 6월 중순쯤 두세차례 모임을 가진 다음 구속된 2명의 동료 변호사를
위해 광주변호사회 소속 변호사를 중심으로 자진해서 사선변호인선임계를 제출하자는 회람
을 돌렸다.
“이제와서 생각하면 부끄러운 이야기입니다만 그때 상황에서는 그런 움직임마저도 여간
신경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더구나 변호사란 직업이 개인중심의 자유업이다 보니
누가 누구에게 강요해서 어떤 일을 추진할 수도 없는 일이죠. 어려운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나아가 많은 몇분을 제외하곤 광주지역에 거주하는 분들은 대개 공동으로 선임계를 내는데
동의했습니다.”
21명 공동으로 선임계 제출
그때 광주변호사회 회원은 모두 44명. 이 가운데 목포지역에 사무실을 둔 5명, 순천 9녕,
장흥 3명을 제외한 27명이 광주에 사무실을 두고 있었다.
이때 공동으로 변호인 선임계를 낸 사람은 광주에 사무실을 둔 27명 중 강신영변호사를
비롯한 20명과 전주변호사회 소속 심난섭(沈欄燮)변호사를 포함해 21명이다. 사무소가 광주
인 변호사 가운데 홍남순, 이기홍 변호사는 구속된 상태였기에 광주에서는 이들 2명을 제외
한 5명이 선임계를 내지 않았다. 심난섭변호사는 이때 변호사업개업지제한으로 사무소를 전
북 정읍에다 두고 있었으나 실제 활동지역은 광주였기 때문에 광주변호사와 함께 선임계를
제출했던 것.
한편 광주변호사회 소속이지만 목포·순천·장흥지역에 사무소를 둔 변호사들은 선임계를
내지 않았다.
이때 변호인 선임계를 낸 변호사들은 다음과 같다.
강신영(姜信英), 고재량(高在亮), 권진욱(權晋郁), 김경현(金京鉉), 김동주(金東柱), 김득룡
(金得龍), 김용근(金龍根), 김용채(金鏞彩), 김호현(金浩鉉), 문행두(文幸斗), 선미봉(宣美峰),
이경량(李京良), 이금원(李錦原), 이덕수(李德水), 이선재(李善宰), 조희채(曺喜彩), 최봉수(崔
峰秀), 추진수(秋鎭洙), 신인수(申寅秀), 유원종(柳元鍾), 심난섭(沈欄燮)(이상 21명).
“광주변소사회 소속 21명(심난섭 포함)의 변호사가 홍남순, 이기홍 두 피고인에 대한 사
선변호인 선임계를 제출하자 군법회의에서 우리에게 새로운 요청을 해왔습니다. 피고인이
워낙 많고 사건 자체가 내란죄로 기소된 상태라 나머지 사람들에 대해서도 변호인이 필요하
므로 기왕에 선임계를 낸 사람들을 중심으로 국선변론을 맡아달라는 거였어요.”
그렇게 해서 나머지 사람들에 대해서는 재판부에서 선임한 국선변호인 자격으로 변론을
맡게 된 것이다. 물론 국선변호인은 이 사람들만으로는 모자라 군에서도 장교 일부가 참여
했다.
군산·서울 등지에서도 변호인 참여
이때 광주지역을 벗어난 외지에서 정읍의 심난섭변호사를 제외하고도 3명의 변호사가 자
진해서 군법회의에 변호인 선임계를 제출하였다. 군산에서 활동을 벌인 김기옥(75·金基玉)
변호사, 서울의 유석현변호사(현 대한변협 인권위원장)와 노병문변호사(작고)가 그들이다.
김변호사는 홍남순변호사와 평소 각별한 사이였기에 ‘동료의 입장’에서 홍피고인에 대한
변론에 나섰다. 이와 반면 유현석변호사는 70년대부터 이돈명 변호사(현 조선대 총장)와 더
불어 재야인권변호사로 민청학련사건(1974), 남민전사건(1979) 등과 80년대 들어서도 부산미
문화원방화사건(1983), 5·3인천사건(1986) 등을 맡았고, 최근에도 임수경·문신부 방북사건
(1989) 등 굵직굵직한 시국사건을 도맡아 왔다. 특히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 회장직(1981∼
1985)도 역임할 만큼 천주교 기반이 넓다. 그런 연유로 유변호사는 80년 당시 천주교 광주
교구 윤공희대주교의 부탁을 받고 김성룡신부, 조철현신부 그리고 오병문교수(현 전남대 총
장)의 변론을 서게 되었다.
“처음에는 윤대주교님으로 세분의 변론을 요청 받았습니다. 그러나 막상 재판과정에 서
보니 동료인 홍남순변호사를 빠트릴 수 없더군요. 또한 내란 수괴로 지목되어 재판전체의
핵심적 위치에 있던 정동년씨(당시 전남대복적생)의 변론도 함께 맡게 됐어요.”
유변호사는 당시 서울에서 자신이 맡은 다른 사건에 대한 업무를 처리하고 5·18재판이
열릴 때면 광주에 꼭 내려가야 하기 때문에 무척 힘들었다고 말한다. 그런 가운데서도 안타
까웠던 일은 수많은 피고인 가족들이 자신에게 몰려와 눈물을 흘리며 변론을 부탁할 때 전
부 다 들어줄 수 없는 사정이었다고 한다.
“제가 서울에서 일을 마치고 밤중에 광주가톨릭회관에 도착하면 구속자가족들이 몇 십명
씩 미리 와서 기다리곤 했습니다. 그때 제 실정으로는 도저히 그들을 감당할 수 없었죠. 밤
새워 재판부로부터 송달된 주요 피고에 대한 서류를 검토하고 변론을 준비해야 했으니까요.
가족들은 통금시간이 넘어도 집에 가지 않고 같이 날을 새우곤 했습니다. 그럴때면 나는 가
족들에게 어쩔수 없는 사정을 말하며 광주에 계시는 변호사들께 부탁해보라고 권유했습니
다.”
그러나 가족들은 한사코 유변호사에게만 변론을 해달라고 조르곤 했다.
“그때 이덕수 변호사나 몇몇 분을 제외한 대부분의 광주변호사들이 너무 소극적이지 않
았나 생각됩니다. 가족들이 제게 와서 하는 말은 한결같이 몇몇 변호사를 찾아가 변론을 의
뢰했지만 아예 자리를 피해버리거나 혹은 변론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면서 거절했다더군
요.”
당시 변호사들의 이런 소극적인 태도는 ‘변호사는 기본적 인권을 옹호하고 사회정의의
실현을 사명으로 한다’고 규정된 변호사윤리강령 맨 첫조항 취지에도 어긋난다는 지적이
다.
가족들 변호사 찾아 헤매
수괴로 몰렸던 정동년씨의 부인 이명자씨는 그때 상황을 이렇게 증언하다.
“당시만해도 평범한 가정주부에 불과했던 저로서는 제 남편이 광주사태 수괴로 몰려 사
형이 떨어지자 청천벽력이었습니다. 그때는 오직 남편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유일한 희망은 돈이 얼마나 들더라도 변호사를 선임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누가 누
군지도 몰랐기에 이사람 저사람 찾아다녀봤지만 변론이 별다른 효과가 없을 거라며 대개 거
절하더군요. 그땐 정말 그렇게 야속할 수가 없었어요. 그러나 마침 남편 친구분은 도움으로
김용근변호사님이 변론을 맡아주었습니다.”
그때 김용근변호사가 변론을 허락하자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그때는 그랬다. 가족들
에게나 피고인 모두에게 변호인이 선임됐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커다란 힘이 됐다고 한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김용근변호사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정동년이란 사람을 전혀 몰랐는데 내가 아는 사람이 찾아와 그 사람 변호를 서달라고
부탁하더군요. 오죽했으면 나에게 까지 찾아왔겠느냐 싶어 승낙했지요.”
그때 광주변호사로서는 가장 적극적으로 변론을 한 것으로 알려진 이덕수변호사는 이렇게
회고한다.
“저는 80년 이전에도 그리고 이후에도 굳이 인권변론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5·18재판에 남보다 조금 더 열심히 뛰었던건 제 나름대로 변호사라는 직업인으로서 윤리적
차원의 문제였습니다. 내가 어떤 불이익을 당하더라도 이번 사건만큼은 억울한 희생자가 없
어야겠다는 일종의 의무감 같은 것이 작용했어요.”
이 변호사 자신 역시 광주항쟁기간 동안 쭉 지켜보았지만 혼란된 사태를 수습하자고 나선
사람들을 오히려 내란죄나 빨갱이로 몰아가는 정부의 처사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름대로 광주시민의 정당함에 대한 확신과 변호사로서 직업윤리 차원에서 발벗고 나섰다는
얘기다.
법조계 내외서 자성과 비판의 소리
그러나 당시 이덕수변호사와 같은 사람은 흔치 않았다. 군법회의에 변호인선임계는 제출
했으나 막상 재판정에 나가 실제로 변론을 했던 변호사들이 기껏해야 7∼8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나머지 대부분의 변호사들이 ‘다른 사건 때문에 바쁘다느니’, 혹은 ‘몸이 아프다느
니’하는 핑계를 대며 단 한번도 법정엘 나가지 않은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그때 군산에서
까지 와서 변론을 했던 김기옥변호사는 이런 모습을 지켜보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변호사라는 직업이 아무리 자유업이고 자신의 판단에 따라 사건을 맡을 수도 있고 안
맡을 수도 있으나 솔직한 심정으로 그때 광주변호사분들이 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듭디다.”
이러한 비난과 지성이 섞인 비판의 목소리는 그후 법조계 내부에서 뿐 아니라 광주항쟁관
련자 등 여기저기서 제기되어 왔다. 특히 그때 단체로 낸 변호인 선임계마저도 내지 않았던
사람들은 ‘그럴수 있느냐’고 한동안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그때 그럴 수밖에 없었던
사정에 대해 죄근 지모변호사는 이렇게 밝힌다.
“그때 나는 기독구호위원회 일을 맡아보면서 홍남순·이기홍변호사 등과 함께 인권운동
을 했었죠. 그런데 광주사태로 그분들이 구속되자 나에게도 수사의 손길이 뻗칠 것 같은 우
려가 들었습니다. 신변에 위협을 느끼자 그해 7월 미국으로 피신했었죠. 나중에 상황이 풀려
그해 12월에 다시 돌아오긴 했지만 그때 생각으로는 영원히 못돌아올줄 알았어요.”
인권변호사 5·18전 대부분 연행돼
이런 일도 있었다. 전남대 이모교수는 동료교수 한사람과 함께 신모변호사(현 국회의원)를
찾아가 구속된 교수와 학생들의 변론을 부탁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때 이교수는 5·18예비검
속으로 검거되어 수감되었다가 그해 6월말쯤 함께 연행된 다른 동료교수들 보다 먼저 풀려
난 상태였다. 이런 일로 인해 신변호사도 한동안 여러사람의 입에 오르내렸다. 신변호사는
당시 변론을 거절했던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그런일이 있었죠. 하지만 그때 나는 그해 3월에 개업한 상태라 매우 바빴습니다. 더구나
변호사개업지제한 때문에 사무실을 전북 정읍에다 두고 있으면서 오전에는 그쪽 일을 보고
오후에는 광주에서 사건을 처리하곤 했어요. 그때 광주변호사회에서 군법회의 재판부의 요
청으로 전부 국선변론을 한 것으로 압니다. 나는 당시 전주변호사회 소속이었습니다. 또한
그때 상황에서는 누가 변론을 하든지 판결에 거의 영향을 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괜히 돈들여 사선 변호사를 선임해 보았자 별 효과도 없을텐데 굳이 그럴 필요있겠느냐는
생각 때문에 거절한 겁니다.”
그런 생각 때문에 이교수 외에도 여러 사람이 변론을 부탁해 왔지만 모두 그냥 되돌려 보
냈다고 그는 말한다. 그러나 그는 계엄이 해제된 다음에 박석무씨(현 국회의원·당시 대동
고교사)의 항소심재판이 민간법정으로 이관되었을 때는 자청해서 변론했다고 덧붙인다.
광주지역변호사들은 그렇다 하더라도 전국적으로 인권변론에 앞장섰던 변호사들은 이렇게
엄청난 사건에 왜 거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까?
유현석변호사는 그때 상황을 이렇게 말한다.
“5·18직전이었죠. 정확히 말하자면 80년 5월 15일 서울에서는 지식인 1백34명이 시국선
언문을 채택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이틀 뒤 5월 17일을 기해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면
서 여기에 서명한 사람들이 모두 연행돼 갔어요.”
이 사건으로 변호사 가운데 연행된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
박세경, 이돈명, 홍성우, 황인철, 이돈희, 이범렬, 강대헌, 박일제, 안명기, 김동정, 정춘용,
조승형, 김제형, 조준희, 이세중, 나석호 등 17명이었다. 당시 주도적으로 인권변론을 하던
변호사들이 거의 다 연행되어버린 셈이다. 이들은 그후 대개 풀려나긴 했으나 거의 변호사
업자격정지라는 족쇄가 채워진 상태였다.
“나는 선언문채택에 서명하기전에 이돈명변호사와 서로 상의를 했죠. 앞으로 시국이 어
떻게 바꿜지 모르니까 둘 가운데 한 사람은 서명에 참여하지 않고 암아 유사시에 변호업무
를 수행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딱 일이 벌어지고 말더군요.”
유변호사의 말이다.
‘내란죄 성립’싸고 공방
5·18재판 당시 법정에서 변호인들이 했던 변론의 요지는 대개 내란죄의 구성요건을 둘러
싼 법리(法理)해석에서의 오인(誤認)과 공소사실이 피고인들의 실제 행위와 다르다는 사실
(事實)오인문제를 밝히는데 집중됐다.
강신영 변호사는 당시 변론내용을 이렇게 요약한다.
첫째, 유신헌법 자체가 기본적으로 잘못된 법률이고 그걸 빨리 고치라는 요구가 아무리
방법이 거칠더라도 내란죄가 될 수 없다.
둘째, 치안부재로 국가기관에 질서를 호소할 수 없는 상황에서 수습을 위해 나선 사람들
이 내란범이 될 수 없다. 오히려 피고인들의 공로를 치하해야 할 일이다.
이덕수변호사는 내란죄 적용의 부당성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내란죄란 체제 자체를 전복시킬 목적으로 조직적인 폭동을 벌일 때 적용할 수 있습니
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때까지 내란죄를 적용해 본 적이 한번도 없었어요.”
일제때 3·1운동 같은 거대한 국민운동도 일본인들은 내란죄로 다스리지 않았다. 단지 치
안유지법차원에서 다뤘을 뿐이다. 또한 일본에서는 수상을 저격한 사례도 있으나 이때도 역
시 정치체제의 전복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내각의 구성원 퇴진을 목적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헌법의 기본질서를 파괴한 것으로 볼 수 없다. 따라서 5·18광주사태는 우리 헌법에
서 규정하는 자유민주주의체제에 대한 전복을 목표로 한 대중운동이 아니라 집권자의 독재
를 거부한 운동이라는 주장이다.
사실오인 부분에 대해서는 주로 내란죄의 수괴나 주요임무봉사자로 기소된 정동년씨와 홍
남순씨 등 주로 수습대책위원회들과 도청팀, 재야팀의 실제 행위사실이 공소사실과 다른점
을 밝혀내는 내용이다.
“국회청문회등을 통해 지금은 이미 허위사실이었던 점이 밝혀습니다만 정동년씨와 김대
중씨 사이에 건네줬다는 5백만원의 알리바이가 검찰측의 공소장 안에서도 서로 앞뒤가 안맞
아요. 더구나 내란수괴범이 5월 17일 연행됐는데 5·18사태는 그 후에 일어났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정동년씨가 상무대 영창에서 그 기간동안 밖에 나가 지휘를 했어야 내란죄가 성립
되는 거 아닙니까?”
만약 그렇지 않고 정동년씨가 영창에 구금되어 있는 상태에서 사태가 발생했다면 이건 검
찰의 주장대로 모든 걸 인정해도 ‘예비음모죄’이상은 안된다는 것이다.
그런 억지논리는 무수히 많았다.
조철현신부는 수습위에 참가해 총기회수를 위해 직접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설득했다. 그
런데도 수습위에 참가해 사태를 악화시키기 위해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선동한 걸로 돼 있
다. 이런 사실을 변호인이 군에서 작성한 작전일지를 제시하며 반론을 펴자 검찰은 이렇게
억지주장을 폈다.
‘수습위 참여는 선동위한 것’
“그까짓 경찰의 낡은 무기를 1천여정쯤 회수한 것이 뭐가 그리 중요한가. 계엄군의 현대
화된 무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오히려 계엄군이 진입하면 효과적으로 대항하기 위해
무기를 한곳에 모았던 것이다.”
유변호사는 하도 기가 막혀 그때 수습위에 직접 참가했던 정시채 당시 전라남도부지사를
증인으로 채택했다. 마침 정부지사는 5·18직후 조신부가 연행된지도 모르고 사태당시 조신
부가 수습을 위해 기울였던 노력을 높이 칭찬하면서 감사장을 주어야 한다고 상부에 보고했
던 적이 있었다. 이런 사실은 상부로부터 받아들여져 정부지사가 조신부를 표창하기 위해
천주교측에 소재를 확인하던 과정에서 알려졌다. 유변호사는 정부지사를 증인으로 채택, 그
점을 캐물었다. 그러나 정부지사는 기억이 잘 안난다며 우물쭈물 답변을 회피했다. 유변호사
는 몇번씩 직접 신문과 반대신문을 통해 결국 그 사실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
다.
“그런 명백한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죄판결이 나더라구요. 더구나 변호사들이 절
대 부족한 판이니 다른 피고인들에게는 신경 쓸 겨를도 없었어요. 계란으로 바위치기란 생
각이 들더군요.”
판결을 앞두고 마지막엔 숫제 재판관의 양심에 호소하는 방식으로 변론을 해보기도 했다.
“재판장님, 민간재판이든 군사재판이든 사람의 유무죄를 심판하는 재판관에게는 세가지
요소가 요구됩니다. 지식과 양심과 용기가 그것입니다.”
그런데 지식이나 양심면에서는 민간인이든 군인이든 별 차이가 없다. 큰 차이는 바로
‘용기’다. 군인의 생명은 용기가 아닌가. 이제 이번 재판의 진실을 충분히 깨달았을 줄 믿
는다. 이제 필요한 건 군인정신에 투철한 재판장의 진정한 용기다. 당신의 용기있는 판결은
청사에 길이 빛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간절한 인간적 호소도 당시 상황에서는 한갖 헛 메아리에 불과했다. 재판
결과는 미리 짜여진 각본대로였다.
“사실 ‘용기’는 재판관에게만 요구되어질 성질이 아니었지요. 오히려 변호사들에게 더
필요한 말이었는지도 몰라요. 변호사라는 사회적 직분과 기본적 인권을 옹호해야 한다는 직
업윤리에 입각했을 때 우리의 노력은 너무 보잘 것 없는 것이었어요. 특히 이런 저런 이유
로 그런 상황에서 변론에 소극적인 분들을 볼 때는 같은 직업인으로서 무척 안타깝기 조차
했어요.”
‘5·18재판은 원천적 무효’
그때 변론에 적극 참여했던 변호사들일수록 한결같이 자신을 포함한 변호사들 모두가 효
과적이고 충분한 변론활동을 벌이지 못했음을 아쉬워 한다. 또한 대부분의 변호사들이 적극
참여하지 못했던 원인 가운데 하나였던 ‘개인적인 불이익을 그후에라도 받은 적이 있느
냐’는 질문에는 결코 그런 사실이 없다고 한다.
최근 국회에서는 ‘광주보상법’제정을 둘러싸고 다양한 견해가 제출되고 있다. 당시 변
호인으로 참여했던 변호사들은 예외없이 5·18재판은 원천적으로 무효임을 강조한다. 연행
과정에서부터 수사, 재판, 석방에 이르기까지 어느것 하나 적법한 법절차에 따른 것이 없다
는 주장이다. 단지 있다면 대국민설득과 자신들의 범죄를 합리화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재판
자체를 형식적인 틀에 짜맞췄을 뿐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5·18재판은 재심을 하여 다시 시
시비비를 가린다거나 해서는 안되고 원천적으로 무효화시키는 특별법이 제정되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아직도 5·18구속자들이 법적으로는 범죄전과자 취급을 받고 있다는 지적이다.
강신영변호사는 구체적인 예를 들어 그점을 상기시킨다.
“얼마전 대한변협에서 수여하는 인권옹호상 수상자로 홍남순변호사가 추천된 적이 있었
는데 수상이 취소 되었어요. 나중에 알아보니 5·18재판때 받은 실형이 ‘형면제’만 되어
있지 ‘실효’가 안되어 있어 법적으로 전과기록으로 남아있기 때문이었죠.”
유현석 변호사는 재심절차를 밟는 방식으로 형무효가 선언되어서는 안된다는 근거를 이렇
게 말한다.
“원래 형사소송법상 재심은 범죄에 대한 새로운 증거가 나타났을 때 겁니다. 잘못 판결
했다는 사실만으로는 재심의 사유가 안됩니다. 그런데 광주사람들의 명예회복차원에서 거론
되는 이 문제가 새로운 증거 때문에 제기된 건 아니죠. 원천적으로 죄가 없는 사람들을 어
거지로 죄인으로 만들었으니 그것이 판명된 이상 당연히 특별법을 제정해 무효로 해줘야
죠.”
금년은 광주항쟁이 일어난지 10주년이다. 재판이 진행되던 해는 ‘폭동’으로 불리우다
이젠 ‘광주민주화운동’이라고 규정되고 있다. 이런 상황변화에도 불구하고 명예회복 등
실제로 변화된 건 거의 없다는 게 중론이다. 더구나 현재 계류중인 법안에도 구속자들에 대
한 피해보상은 아직 적극 거론되지 않는 상태다. 그런 까닭에 대해 위인백씨(44, 5·18구속
자)는 이렇게 말한다.
“아직도 광주항쟁의 역사적으로 정당한 평가를 못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양시론적인 차
원에서 정부도 옳고 광주시민도 옳다는 식이예요. 그러니 애매한 상태일 수밖에 없는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