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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자료실

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5월의 꿈 5월의 분노.송기숙(월간예향, 1990. 5)

본문

□광주민중항쟁 10주년 특집□

수습위원으로 참가했다가 오히려 고문등 갖은 시련을 겪었던 한 지성의 증언

수기 ‘나와 5·18’300매 전재

5월의 꿈 5월의 분노

宋基淑<전남대교수·소설가>

1935년 전남 장흥에서 남. 전남대 국어국문과 동대학원 수료(1964)목포교대(1965∼73)를 거쳐 73년부터 전남대 재직. ‘교육지표’사건(1978)으로 투옥, 광주항쟁때(1980)재차 투옥되어 10년구형에 5년형을 받고 복역중 이듬해 4월 3일 형집행 면제처분으로 출소. 소설로는 장편 ‘녹두장군’을 집필중이며 ‘자랏골의 비가’, ‘백의민족’등 다수 있음. 현재 현대사사료연구소(1988. 5. 23개소)소장으로 광주항쟁관련자료 수집과 편찬 작업중.

광주민중항쟁 10주기를 맞아 당시 항쟁에 수습위원으로 참여했던 전남대 송기숙교수의 자필수기(원고 3백매)를 싣는다. 송교수는 학생수습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재야인사들과 항쟁의 전면에 나서기도 했고 나중에는 수사과정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그는 이런 사실들을 자기반성과 더불어 낱낱이 기록하고 있다. 한 양심적인 교수의 진솔한 자기 진술을 통해 광주항쟁의 과정에서 겪게 되는 갈등과 인간적 고뇌, 그리고 당국에 의한 항쟁 전체의 조작과정을 적나라하게 살펴볼 수 있다. <편집자 주>

□5백인 중의 한사람으로

나는 그동안 항쟁 참여의 수기를 써보라는 청탁을 여러군데서 받았으나 일체 쓰지 않았다. 나는 항쟁에는 직접 참여하지 않고 구경만 했으며 징역을 살았으나 그것은 수습에 관계되어 징역을 살았을 뿐인데, 그런 방식의 참여나마 내가 겪은 곤욕도 꽤나 충격적인 것이어서 그런 글을 썼을 때 항쟁에 직접 참여한 사람들을 제치고 나의 그런 참여가 상당한 비중으로 부각이 될 것 같아서였다. 목숨을 걸고 직접 싸운 사람보다 주변에 있었던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건 더 부각이 된다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내가 간여하고 있는 ‘한국 현대사 사료연구소’에서 중요참여자 5백명의 구술을 받아 채록하는 일을 하는 과정에서 나도 5백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증언을 하게 되었다. 이 글은 거기에 했던 증언을 조금 손본 것이다. 지금은 광주 항쟁의 내막이 신문 잡지 단행본 그리고 청문회 등을 통해서 알려질 만큼 알려졌고, 5백명의 증언을 실은 자료집도 이 잡지의 발간과 비슷한 시기에 발간될 것이므로 그 사료집 내용의 하나를 소개한다는 뜻을 겸해서 내 증언을 여기 전재하기로 했다. 항쟁의 주변에서 시민들의 증언을 안타깝게 바라보며 수습에 임했던 사람도 이 정도로 험한 곤욕을 치렀다는 사실은 광주 항쟁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될 법도 하다. 거기에 증언한 5백인의 증언은 모두가 자기가 겪은 일만을 자기가 본 각도에서 증언한 것이며, 이글도 어디까지나 겪은 일을 내 중심으로 이야기 한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광주항쟁 전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겪은 일만을 증언한 것이므로 내가 직접 참여하지 않은 일은 중요한 사건도 빠져 있다.나는 이 증언 이전에 광주 항쟁을 주제로 연작 장편소설을 구상하여 그 제 1부를 ‘창작과 비평’에 발표한 적이 있다. 이것은 내 이야기를 쓴 것이 아니므로 위의 경우와는 처음부터 다른 것인데, 지금 그 소설은 쓰다가 중단을 했다. 당시의 현장에 대한 인상이 지나치게 강렬해서 그런지 소설로 써놓고 보니 내 스스로도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아서였다. 전쟁소설은 전쟁이 끝난지 10년 정도가 지나야 나온다는데 그것은 실제 체험했던 충격적인 사건 하나하나에 대한 인상이 정리되려면 그만한 시간이 걸린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광주항쟁에 대해서는 아득하고 막막하기만 하다.4월 말에 발간될 예정인 앞의 ‘5월 광주항쟁 사료집’은 2만 5천장, 5백페이지 짜리 책 10권 정도의 방대한 분량인데, 나는 그 간행사에서 이렇게 썼다.“우리 연구소가 광주 민중항쟁 자료 수집을 제 1차 사업으로 계획하고 특히 참여자들의 증언 채록에 역점을 둔 것은 항쟁 당시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고결한 항쟁정신과 그 순수한 정열을 생생하게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자는 뜻에서이다. 따라서 그들의 증언은 단순한 역사의 자료로서만이 아니라 그 자체가 살아있는 교훈으로서의 의미가 더 클 수도 있다. 총칼앞에 기꺼이 목숨을 내던지고 싸운 모습은 그 하나하나가 꽃처럼 아름답고 그만큼 소중한 것이다. 단순한 사료로서는 한 사건에 대한 5백명의 증언은 너무 많을지도 모르지만 한 송이 한 송이의 꽃으로서는 모두가 그만큼 아름답고 소중했기 때문에 조사원들은 지칠 줄 모르고 그들을 찾아서 증언을 듣고 기록을 했다.”

□80년 민주화의 봄

1980년 봄, 나는 ‘교육지표 사건’으로 파면이 된 채 복직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였다. ‘교육지표 사건’이란 1978년 전남대학교 교수 11명이 교육 민주화 선언인 ‘우리의 교육지표’란 성명서를 발표하고 모두가 파면되거나 해임되어 학교에서 쫓겨난 사건이다. 나를 제외한 10명의 교수들은 신학기에 모두 복직이 되었으나, 나는 파면에 대한 복권이 안되어 복직이 늦어지고 있었다. 강의는 하고 있었으나 시간 강사 자격이었다. 학교 당국에서는 복직을 시켜주지 못한 것이 미안해서 나에게 외래교수라는 어설픈 호칭을 쓰기도 했었는데, 그 뒤 수사를 받을 때는 나도 이런 호칭을 써서 내 신분을 교수와 같은 급으로 표현하기도 했었다.나는 당시 신분상으로 이런 애매한 상태였으나 학생들이나 교수들의 민주화에 대한 열기가 대단하여 내가 나서지 않더라도 그런 일에 앞장설 사람들이 많았으므로 밀린 공부와 글을 쓰기 위해서 교수들의 평의회 활동 등 학원 민주화 운동에는 직접 참여하지 않고 비공식적인 논의에 응해 주는 정도로 관망하는 편이었다.학기초부터 어용교수 퇴진문제가 학생운동의 제 1차적인 쟁점으로 부상되어 어용교수 백서가 나오는 등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어용교수로 지목된 교수들이 순순히 물러날 태도를 보이지 않아 학생운동은 과격해지기 시작했으며 그 문제에 걸려 학생운동이 답보상태에 있었다. 나는 이점을 비판하며 그 교수들을 달리 처리할 제도적인 장치가 없으므로 학생들의 주장은 단지 경고적인 의미 이상의 효과를 거둘 수 없을 것이라며 거기에서 손을 떼라고 했었다. 일부 학생들은 나의 의견에 반발을 하기도 했으나 당사자들이 과거를 참회하고 자진해서 퇴진하지 않는 한 어찌 할 방법이 없었다. 그것은 그 뒤 그들이 계속 버티자 더 손을 쓰지 못해 내가 한 말이 사실로 드러나기도 했다.그 문제에 얽매어 있던 학생들은 초조해지기 시작, 학생회 구성과 함께 운동의 방향을 계엄령 해제 등 정치적 차원으로 돌리기 시작했다. 교내문제에 얽매어 있던 학생들이 5월에 접어들면서 보다 높은 차원의 정치적 구호를 외치며 가두시위를 시도했다. 산발적인 가두시위를 시도하던 학생들이 5월 14일 교문에서 전투경찰과 충돌하여 그 저지선을 돌파하고 시내 진출에 성공했다. 학생들은 산발적으로 나가 도청 앞 분수대를 점령했다. 약 8천명의 학생들이 집결했으며, 거기에서 정부에 대한 성토가 벌어졌다. ‘민주화성회’로 명명한 제 1차 대집회였다. 나는 법과대학 앞에서 구경을 하고 있다가 학생들이 교문을 돌파한 직후 몇몇 교수들과 함께 시내로 나왔다. 학생들은 분수대를 중심으로 빙 둘러 앉고 교수들은 그 안쪽 분수대 밑의 물막이 낮은 둑위에 둥그렇게 둘러앉았다. 교수들의 수는 2백명쯤 되었다. 학생들이 앉은 바깥으로는 시민들이 둘러섰다.

경찰은 저지를 포기한 채 저만큼 서서 학생들을 지켜 보고 있었다. 저지를 포기한 경찰의 모습은 여간 초라하게 보이지 않았다.분수대 위가 연설대가 되어 학생회 간부들이 정부를 성토하고 앞으로 투쟁을 결의하는 연설을 했다. 오후 4시쯤 비가 오기 시작했다. 빗줄기가 차츰 굵어지자 여자교수 몇 사람이 비를 피해 물이 말라있는 분수대 밑으로 들어갔으나 따라 들어가는 교수들이 없었다. 그리 들어갔던 여자교수들은 다른 교수들이 그대로 비를 맞고 앉아 있자 민망스러운 듯 그들도 다시 나와 모두 같이 비를 맞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교수와 학생의 금남로 시위

어두워질 무렵 학생들은 학교로 들어갈 준비를 했다. 학생처에는 학생들이 열을 지어 금남로를 행진해 갈 것이니 교수들은 학생들 옆으로 서서 시민들의 합세를 했다. 그러나 일부교수들은 그럴 것이 아니라 교수들이 학생들의 열에 앞장서서 가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러기로 했다. 어디서 구해 왔는지 대형 태극기가 대열의 맨 앞에 섰다. 6명의 여학생들이 전후좌우에서 그 태극기의 깃을 잡고 앞장을 서고 그 바로 뒤에 2백여명의 교수들이 따랐다. 그뒤에 학생들은 8열로 서서 금남로를 누비며 구호를 외치거나 노래를 부르며 행진했다. 빗줄기는 점점 굵어져 금남로를 반쯤 행진했을 때는 이미 내의까지 몽땅 젖어버렸다. 연도에는 수많은 시민들이 비를 맞으며 몰려서서 행렬을 구경하고 있었다.행렬을 구경하는 시민들의 얼굴은 모두 겁에 질려있었다. 아직도 계엄령이 내려져 있는 상황인 데다 앞으로 정국이 추이를 전혀 예측할 수 없는 판인데 교수들이 학생과 합세하여 시위를 벌이고 있으니 저래도 괜찮을까 어리둥절한 모양이었다.

나는 교수 대열의 중간쯤에 서가면서 시민들의 반응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시위 행렬이 금남로를 행진해 가는 사이 우리 행렬을 향해 박수를 치는 사람은 꼭 세사람 뿐이었다. 한일은행 건너편 2층 다방에서 어떤 아가씨가 박수를 쳤고, 조금 더 오니 40대의 한 사람이 쳤으며, 그 얼마 뒤 또 한사람이 군중속에서 박수를 쳤다. 그때 시민들은 그만큼 겁을 먹고 어리둥절했던 것이다.학교까지의 3킬로미터를 행진해 오는 동안 비는 계속 퍼부어 행렬은 빗속을 뚫고 온 셈이었다. 학교에 당도하자 날이 어두웠는데 옷은 말할 것도 없고 신에 물이 차서 모두 신발을 벗어 물을 쏜 지경이었다. 그러나 교수들은 모두 흡족한 표정이었다. 본부 현관에 웅성거리며 통근차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사이, 모두 뭔가 한몫해낸 것같이 들뜬 기분들이었다.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담배를 나누어 피우는 모습들은 여간 인상적이지 않았다.

당시 전남대학교에서는 ‘교육지표사건’으로 해직되었다가 복직된 교수들이 있었기 때문에 당시의 치열한 민주화 분위기속에서는 학생들의 관심은 이 교수들에게 쏠릴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일반 교수들은 그만큼 부담을 느끼고 있었는데, 비를 쫄딱 맞으며 학생들과 한덩어리가 되어 시위를 했으니 모두가 민주화운동에 그만큼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크게 한몫 한 결과가 되었으므로 그렇게 기분들이 좋았던 것이다.시민들 눈에 교수들이 학생들과 한 덩어리가 되어 시위를 한 것으로 비친 이 사건은 광주시민들의 시국판단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고, 이 사건은 그 뒤 많은 시민들이 5·18항쟁에 적극 참여하는 견인효과를 가져왔다는 생각이다.다음에 홍남순 변호사한테 들으니 그 행렬이 지나가고 나자 홍변호사 댁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세상이 앞으로 어떻게 되느냐고 묻더라는 것이다. 정계의 앞날에 대한 시야가 캄캄한 판국에 교수들까지 나섰으니 엄청난 변화가 예상은 되는데, 그 추이를 확실하게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답답하게 그렇게 몰려들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때의 교수가 앞장 선 시위행렬은 4·19를 마무리지은 교수단 시위만큼 시민들 눈에는 큰 사건으로 비쳤던 것이다.

□횃불시위, 민주화의 대축제

5월 15일. 이날도 전날과 똑같이 학생들이 분수대 주변에 모여 ‘민주화성회’라는 명칭의 시국성토대회를 열었다. 전날은 교문에서 경찰의 저지를 뚫고 나왔으나 이날은 경찰이 이미 저지를 포기하고 있었다. 학생들이 힘으로 밀어붙여 민주화의 광장을 학교 운동장에서 시가지까지 확장한 셈이었다.이날은 조선대학교 학생들과 일부 전문대 학생들, 그리고 고등학교 학생들까지 합세하여 숫자는 전날의 배가 넘은 것 같았다. 시위가 광주 전체 학생들에게로 확산된 것이다. 시민들도 어제보다 휠씬 많은 수가 참여했고 호응도 보다 적극적이었다. 경찰은 이날도 역시 광장 한쪽에 초라하게 서서 군중들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교수들은 어제와는 달리 분수대 주변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뿔뿔이 흩어져 성토대회를 구경했다. 교수들은 어제 비를 맞으며 시위행렬에 참여했던 다음이라 한결 느긋한 기분이었으며 어제 일로 많은 시민들의 격려를 받기도 했다.5월 16일. 횃불 시위를 하는 날이었다. 교수들이나 경찰당국은 긴장했다. 만약 경찰과 충돌을 하게 되면 그 횃불이 바로 공격무기가 될 것 같아 염려스러웠고, 그렇게까지 발전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잘못하여 화재가 나지 않을까 염려되기도 했다.

그러나 시위 계획을 듣고 나니 어느 정도 안심이 되었다. 학생들이 전부 횃불을 드는 것이 아니라 7열의 행열 중 가운데 행열만 3, 4미터 간격으로 횃불을 들고 행진을 한다는 것이었다.도청 앞 분수대 주변의 광장 한쪽에서 철사에 솜뭉치를 매달아 자루를 박은 홰와 기름 등 시위를 준비하고 있는 사이 학생들은 학생회에서 나누어 준 빵을 먹고 있었다. 저쪽에서 그 광경을 보고 있는 전경들의 모습이 한층 초라하게 느껴졌다. 학생들만 먹고 있는 것이 너무 야박한 것 같아 나는 교수들에게 돈을 좀 걷어주자는 제의를 했다. 우유라도 하나씩 먹게 하자는 것이었다. 삽시간에 돈이 9만 얼마가 걷혔다. 그걸 학생처장에게 넘겼더니 나머지를 채워 10만원을 그들에게 넘겼다고 했다. 나중에 내가 수사를 받을 때 이돈의 출처 때문에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날이 어두워지자 횃불이 밝혀지기 시작했다. 학생지도부는 횃불 관리에 대한 주의를 두 번, 세 번 철저하게 했으며 교수들에게도 협조를 요청했다.횃불 행렬은 크게 전남대학교와 조선대학교 두 행렬이 있었다. 이 두 행렬이 따로 길을 잡아 광주 중요거리를 누빌 계획이었다. 석유를 묻힌 홰에 하나 하나 불이 붙기 시작했다. 천여 개가 넘는 횃불이 밤 하늘을 밝혔다. 횃불행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노래를 부르며 행진을 했다. 횃불은 아득히 금남로를 뻗어 나갔다. 장관이었다. 경찰의 저지가 없었으므로 학생들은 그만큼 기분이 안정되어 있었고, 사흘간의 집회를 마무리짓는 축제였기 때문에 한결 느긋한 기분들이었다.

솜뭉치에 붙어 훨훨 타는 횃불을 어둡고 괴로웠던 유신의 땅에 민주화의 새벽을 밝히는 성스러운 불빛이었다. 그 횃불 하나하나는 모두가 하나의 생명으로 펄펄 살아 이 땅에 펼쳐질 찬란한 민주화를 춤추는 환희였고, 압제와 수탈을 거부하는 굳건한 의지를 하늘 높이 소리치는 함성이었으며, 간악무도한 독재의 사슬을 불태우는 활화산이었다. 기나긴 횃불행렬은 젊은이들의 우렁찬 노랫 소리에 맞춰 너울너울 춤을 추며 광주의 거리를 장강대하처럼 굽이굽이 누비고 있었다. 거리마다 쏟아져 나온 시민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했고 터질 듯한 감격과 지지를 고함으로 내질렀다. 학생과 시민이 한덩어리로 어우러지는 가슴벅찬 공감의 한마당 드라마였다.

횃불행진은 정말 질서정연했고 그 모양은 하나의 예술을 방불케 하는 장관이었다. 운동과 예술의 아름다운 결합이었다.교수들은 학생들의 치밀한 준비와 일사불란한 행사진행에 감탄을 했다. 신학기 시작때부터 학생회가 탄생할 때까지의 각종 행사 계획과 진행이며, 학교와의 일정한 협력관계 등 본부 보직교수들도 이구동성으로 학생들의 성숙성에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교수들은 만일의 사고에 대처하려고 횃불행렬의 뒤를 따라 다녔다. 그러나 한 건의 사고도 없이 행진은 끝이 났다. 학생들은 이 횃불시위로 사흘간에 걸친 민주화 성회의 대단원을 장식한 것이다.사흘간의 민주화 성회를 이런 축제로 마무리 지은 학생들의 발상을 놀라운 것이었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이 한마당 횃불의 축제로 학교 운동장에서만 목메이게 외치던 학생들의 민주화에 대한 의지와 확신을 광주 전 시민들의 가슴속에 못을 박듯 확실하게 각인을 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며칠 뒤 공수단의 만행에 전 시민이 분노하여 그 무자비한 공수단에 대항, 죽음을 무릎쓴 항쟁을 한 것은 이런 데서 형성된 학생과 시민의 일체감이 정신적 바탕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광주는 광주 학생운동 사건의 역사를 지닌 곳이므로 학생에 대한 시민들의 애정과 신뢰가 유다른 곳이기도 하다.

학생들의 이것으로 3일간의 ‘민주화성회’를 마치고 정부의 태도변화를 지켜보기로 하고 헤어졌다. 교수들은 한숨 돌리며 기분좋게 술을 마시거나 안심하고 집으로 돌아갔다.전두환 일당은 학생들의 이 평화롭고 슬기로운 민주화 운동을 시국을 어지럽히는 난동으로 몰아 이들을 짓밟은 바로 그 하나의 사실만으로 역사에서 길이길이 응징되어야 할 것이다.

□5월 18일, 반역의 어두운 아침

17일 밤, 친구들과 늦게까지 시국의 추이 등을 환담하다가 12시 통금시간에 쫓겨 중흥동 전남대 후문 근처에 있던 집으로 바삐 돌아왔다.막 들어오자 전화벨이 울렸다. 넥타이를 풀다가 고리만 뽑아놓고 그대로 목에 걸친 채 전화를 받았다. 당시 복학생 대표이던 김상윤군의 부인이었다. 김상윤군은 윤한봉군과 함께 전남대학교 학생운동의 두 기둥으로 윤군은 밖에서 운동을 계속하겠다며 복학을 하지 않았고, 김군은 복학을 하여 전남대학교의 학생운동을 실질적으로 지도하고 있었다. 그들은 둘 다 1974년 그 악명높은 민청학련 사건의 주모자급으로 무기 징역 등 중형을 선고받았다가 형 집행정지 상태로 학생운동을 하고 있었다.“금방 애 아버지가 잡혀갔어요.”앞도 뒤도 없이 다급하게 흘러나온 소리였다.“뭐요?”“보안대에서 나온 것 같은데요, 금방 잡아갔어요. 선생님도 빨리 피하세요.”풀던 넥타이를 다시 매다가 손을 멈췄다. 잡아갈테면 잡아가라로 나는 그대로 소파에 털썩 주저 앉아 버렸다. 일종의 절망적인 적개심이랄까. 결국 이자들이 이렇게까지 험하게 나오는가? 나는 절망적인 심정으로 멍청하게 앉아 있었다. 학생들의 즐거운 노랫 소리에 얹혀 너울너울 춤을 추던 그 평화롭고 아름답던 횃불 행진이 눈앞에 아른거리고 있었다.

금방 그자들이 들이닥칠것만 같았으나 피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런 때는 죄가 있든 없든 우선 피하고 보는 것이 지혜라는 사실을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한밤중에 얼른 피할만한 데도 마땅치 않았고, 특별하게 한 일도 없는데 피한다면 되레 그게 무슨 큰 죄나 있는 것으로 보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여기 저기 전화를 걸어보니 제주도를 제외했던 부분 계엄령이 전국 계엄령으로 확대 선포되었다는 것이며 사태가 심상찮으니 잠시 피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들이었다. 피하지 않기로 작정했던 다음이라 나는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그날 밤 나를 잡으러 오지는 않았다. 아침에 들어보니 전남대학교와 조선대학교에 공수단이 진주했다는 것이다.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절감할 수 있었다. 나중에 들으니 그날 밤 검거 대상자는 복학생과 학생회 간부들로 계엄령 확대조치를 하면서 그 발효 시각인 0시에 그들을 검거하려고 검거대상자들의 집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일제히 검거한 것 같았다. 김상윤 정동년 등 복학생과 학생회 간부들이 많이 잡혀갔다는 것이었다.여기 저기서 전화가 걸려 왔다. 공수단들이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구타하며 무차별 검거를 한다는 것이었다. 전남대학교에서는 어젯밤 진주하자 마자 학교에 있는 학생들을 모조리 검거했다는 것이다. 실험실에서 실험을 하다가 자는 학생들까지 무차별 검거를 했으며 지금 교문에서는 도서관에 가는 학생들까지 무작정 잡아 옷을 벗겨 머리를 땅에 박게 하고 무지막지하게 구타를 한다는 것이었다. 여학생까지 옷을 벗겨 때리는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잔인한 짓을 한다는 것이다.

나는 집을 나가 전남대학교 후문쪽으로 가보았더니 그게 사실이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학교가는 학생들을 교문에서 잡아 몇 마디 묻다가 곤봉으로 배를 찌르면 그 자리에 픽 쓰러졌다. 담 안쪽에는 팬티만 걸친 학생들이 줄줄이 머리를 땅에 박고 엎드려 있었다. 그날은 일요일이었으므로 학교에 나가는 대부분의 학생들은 도서관으로 공부하러 가는 학생들이었다. 담안을 기웃거려 보았으나 여학생들은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여학생까지 어쨌다는 것은 과장된 소리였으나 그때 공수단들의 잔인성은 그런 소리가 나올 법 하게 무자비했던 것이 사실이다.집을 나가 명노근 교수 등과 만나 우선 상황파악부터 했다. 공수단은 시내 진출은 하지 않고 있었으며 학교에서만 그렇게 학생들을 닥달하고 있는 것 같았다. 복학생들과 학생회 간부들을 검거한 것으로 미루어 우리 복직교수들도 검거를 할 것 같으니 조심을 하자고 했다. 그날 공수단들의 만행은 널리 알려진 바와 같다. 나하고 명교수는 그날 저녁은 화정동 친구 집에서 피신을 했다.

□5월 19일, 공수단 장교의 얼굴

19일, 아침 우리들은 통근버스를 타고 학교에 출근을 했다. 출근이라기보다 걸어서는 교문을 통과할 수 없었으므로 통근버스로 교문을 통과한 셈이었다. 교문옆 담밑에는 오늘도 잡혀온 학생들이 머리를 땅에 박은 채 구타를 당하는 당하는 모습이 차창으로 보였다. 어제 법대 어느 젊은 교수는 학교에 나오다가 공수단과 시비가 붙어 얻어맞았다는 등 흉흉한 소문뿐이었다.학교 운동장에는 군용텐트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들의 본부는 학교 본부 건물 3층에 있다는 것이어서 올라가보니 본부가 거기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전남대 주둔군의 책임자로 보이던 중령 한 사람이 몹시 상기된 얼굴로 서성거리고 있었다. 말로만 듣던 무시무시한 공수단, 그 가운데서도 그 지휘자를 만난 것이다. 구릿빛으로 검게 탄 얼굴에는 턱에 수염이 조잡하게 길어 있었다. 마치 금방 전쟁을 하다가 온 것 같은 인상이었다. 그들은 여기 진주하기 전에 한달 동안이나 시위진압 특수훈련을 받았었다는 소문이 얼마뒤에 퍼졌었는데 그 소리를 들으니 그때 그 중령의 모습이 생각났다.

지금은 다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러니까 전두환 일당은 학생시위가 격화되자 계엄령 확대조치를 한 것이 아나고 그들은 이미 적어도 한달 전부터 그런 계획을 꾸며 놓고 그동안 그만큼 치밀한 준비를 했던 것이 분명했다.그 중령이 먼저 우리들에게 무어라 말을 걸었던 것 같으나 무슨 말을 했던지는 기억에 없다. 우리들은 그의 상기된 표정에 질려 거센 항의는 하지 못했고, 다만 교문에 붙잡혀 머리를 박고 있는 학생들을 의식하고 몇마디 했다.“어제는 일요일이었으니 그런날 학교에 나오는 학생들은 대개 취직시험을 준비하는 학생들일 것입니다. 시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학생들이지요. 전날 학교에서 잤던 학생들도 대부분 그런 학생들이고, 더구나 계엄령이 확대 선포되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오늘 같은날 책가방을 들도 학교에 나오는 학생들이라면 그런 학생들도 성향이 뻔하지 않습니까?”그 당시 살벌했던 정황에서는 이 정도의 말을 하는 것도 여간 으시시한 일이 아니었다. 그는 우리말을 건성으로 시인하는 것 같았다.그는 전남대학교에 주둔했던 책입자로 나중에 광주청문회에 나와 진압 당사자의 입장에서 증언을 했던 권송만 대령이다. 그때 명찰을 보고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청문회에 나와 당당하게 증언하는 태도를 보니 감개가 착잡했다. 당시 진압군들은 10여년간 어디서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을까 우리 나름대로 궁금했던 터라 그 얼굴을 텔리비젼 화면에서 보는 감개도 착잡했고, 또 그 당당한 태도는 그때 그들이 한 일을 그 당사자들이 지금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를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어 더욱 착잡한 기분이었다. 그의 증언 태도는 본인의 독자적인 태도가 아닌 것은 분명하므로 바로 그의 증언 태도는 광주항쟁에 대한 이 정권의 태도와 시각을 가장 극명하게 반영하는 것이라 보아야 한다. 민주화운동이 어떻고 하지만 그것은 가식에 불과한 소리고 바로 그 사람들을 통해서 내보이고 있는 것이 이 정권의 가장 진솔한 태도일 것이다.

□곤봉 한방에 개구리처럼

동료 교수들은 나와 명교수 등 해직되었던 교수들이 학교에 나온 것을 보고 불안해 하는 눈치들이었다. 피해 있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충고를 해주기도 했다. 우리도 그럴 생각이었으나 무고한 학생들이 학교 울안에서까지 당하고 있는 것을 방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총장을 만나려 했으나 당시 민준식 총장은 며칠 전부터 몸이 안 좋아 집에 누워 있다는 것이었다. 의논을 한 끝에 총장댁을 방문하자고 했다. 명노근, 김동원, 이홍길, 나, 그리고 3, 4명의 교수가 더 동행했던 것 같다.우리는 총장에게 몸이 좀 불편하더라도 학교에 나가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할 것이라고 했다. 공수단들이 아무리 무자비하다 하더라도 국가기관의 권위에는 약한 것이 군인이므로 국립대학교의 총장이 자리를 지키고 있으면서 그들에게 말을 하면 적어도 학교안에서 학생들을 그렇게 무자비하게 패는 짓은 못할 게 아니냐고 했다. 총장은 몸이 불편하지만 나가겠다고 약속했다.

우리는 총장 집을 나와 일부는 다른 데로 가고 명교수와 나 등 일부는 시내로 나와 점심을 먹은 다음 당시 공사를 하고 있던 중앙로 근처로 나갔다. 시위대가 엄청나게 불어나 밀치락 달치락 하고 있었다. 우리들은 그 무렵 전남매일 신문 기자한테서 우리에게도 검거령이 내렸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어디서 금방 누가 나와 우리를 덮쳐갈 것 같은 강박감에 젖어 있었다.이 무렵 거리에는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 사람들 죽이러 왔다는 소리를 공공연하게 한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실제로 무등맨션 아파트에서 그런 소리를 했다는 것이다. 공수단 중에서 어느 경상도 군인이 “이 새끼들, 다 죽이겠다”는 정도의 소리를 했던 모양인데, 경상도 사투리는 억양이 원체 유별나기 때문에 지역감정에 얽혀 그런 소문으로 번졌던 것 같다.

우리는 화니백화점 옥상으로 올라가 거기 몰려있는 군중들 틈에 끼어 금남로에서 벌어지고 있는 시위광경을 구경하고 있었다. 우리들이 옥상에 올라갔을 때는 공수단과 대치하고 있던 시위대가 공수단의 공격에 중앙교회 쪽으로 우 물러가고 있었다. 거리가 순식간에 텅 비어버렸다.그때였다. 현재의 현대예식장 쪽에서 말끔하게 정장을 한 젊은이 하나가 금남로쪽으로 오고 있었다. 공수단 두 사람이 그쪽으로 갔다. 그 젊은이는 도망치지 않고 그대로 우뚝 서 있었다. 자기는 옷차림을 보더라도 시위를 하지 않은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으므로 그들도 보면 알 게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건 오산이었다. 공수단 한 사람이 곤봉으로 그 젊은이 머리을 정면에서 정통으로 내리쳤다.“오매.”우리 곁에 섰던 사람들 입에서 동시에 비명이 터졌다. 그 곤봉 한 대에 그 젊은이는 나무토막처럼 앞으로 픽 쓰러지고 말았다. 공수단들은 그대로 중앙교회 쪽으로 가버렸다. 우리들은 모두 거기 서서 그 쓰러진 젊은이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 젊은이가 조금 움직이는 것 같더니 양쪽으로 벌리고 있던 손이 파르르 떨었다. 개구장들이 회초리로 개구리를 치면 네 발을 파르르 떨다 죽는 것하고 똑같은 형상이었다. 개구리가 죽는 모습을 연상하며 나는 그 젊은이도 숨이 멎었구나 했다. 그런 경험이 없는 사람들도 그 떠는 모습으로 그 젊은이는 죽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 손 떠는 것이 누구에게나 마지막 단말마의 고통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그런데 얼마 뒤 그 젊은이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옥상의 군중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 젊은이는 조금 더 움직이더니 이내 일어났다. 마치 죽은 송장이 그렇게 일어서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지경이었다. 그는 양쪽을 두리번거리며 이내 제대로 일어섰다. 하얀 와이셔츠는 피가 벌갰다. 그 젊은이는 비칠거리며 저쪽으로 사라졌다. 우리들은 안도의 숨을 쉬었다. 사람의 목숨이란 정말 질긴 것이구나 싶었다.

□“그 사람은 공수단이 아니다”

다시 금남로가 시위군중으로 차기 시작했다. 엄청난 군중이었다. 어디로 숨었던지 하나도 보이지 않던 군중들이 삽시간에 몰려 나온 것이다. 우리들은 거리로 내려갔다. 시위군중들이 가톨릭 센터 건물 안으로 우 몰려 들어가고 있었다. 공수단 몇 명이 시위군중들한테 쫓기다가 그 건물로 들어갔기 때문에 그들을 잡으러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들이 어느층까지 쫓아 올라가고 있는가를 밖에서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한 층 한 층 올라 갈때마다 방안을 뒤지고 나서 밖에다 수색상황을 알려주기라도 하듯 문을 열어 제치고 뭐라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제풀에 화가 나서 실없이 유리창을 박살내기도 했기 때문이다. 7층 건물의 반쯤 올라갔을 무렵이었다. 도청쪽에서 최루탄 쏘는 소리와 함께 거리의 군중들이 중앙 교회쪽으로 우르르 도망쳐 왔다. 나와 노희관 교수는 지금 광주은행 본점을 돌아 가톨릭센터 건물 뒤쪽으로 도망쳤다.

거기서 우리는 희한한 광경을 구경했다. 가톨릭센터 건물 맨 위층에 군인 한사람이 창틀에 올라서서 엉덩이를 한참뒤로 허공에 뺀 채 두손으로 창문틀을 붙잡고 있었다. 안에서 죽이겠다고 얼러대자 그렇게 피하고 있는 자세가 분명했다. 밑에서는 죽이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는 총을 등에 다 엇질러 메었는데 총이 M16이 아니고 칼빈이었으며 군복도 공수단 군복이 아니고 보통 군복이었다.“저 사람은 공수단이 아니다.”누군가 소리를 지르자 밑에 있던 사람들이 이번에는 죽이지 말라고 한꺼번에 소리를 질렀다.“공수단이 아니다. 죽이지 말아라.”밑에서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으나 그 소리가 8층까지 들릴 리는 없었다.

그런데 좀만에 그 군인은 창틀에서 안으로 내려갔다. 밑에서 지르는 소리를 듣고 살려준 것이 아니고 그 안에서도 공수단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살려준 것 같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거기 있는 기독교 방송국을 경비하던 31사단 군인이라고 했다.그 군인이 사라진 바로 뒤였다. 경찰서쪽에서 군중들이 우 몰려왔다. 공수단들이 쫓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들은 정신없이 도망쳤다. 나는 바로 중앙로를 무질려 거기 반쯤 닫히고 있는 어느 상점 셔터문 밑으로 들어갔다. 내가 막 들어오고 나자 주인이 셔터문을 양쪽에서 칵 내리밟았다. 동작이 느린 노교수가 내 뒤를 따라들어오다 허리가 셔터문에 납작하게 깔려 꼼짝을 못했다. 나는 소리를 지르며 셔터문을 올려 그를 구해주었다. 하도 다급하던 판이라 야박하다고 나무랄 수도 없었다.

그 사이 가톨릭센터에서는 무서운 살육이 벌어지고 있었다. 가톨릭센터에 자기 동료들이 갇힌 것을 안 공수단들은 결사적으로 거리의 시위군중을 물리친 다음, 바로 조금전 시위대들이 그랬던 것처럼 밑에서부터 시위대들을 작살을 내면서 올라갔던 것이다. 그때의 처참한 상황은 여러 사람들이 증언한 바와 같다. 뿔뿔이 흩어져 거리를 헤매던 우리들은 오후 늦게 다시 만나 사동 사직아파트 노희관 교수댁에서 같이 잤다. 명노근, 김동원, 안진오 교수 등 8명이었다. 그 아파트에서는 시내가 내려다보였는데, 초저녁에는 시위함성이 들리더니 나중에는 들리지 않았고 역 쪽에서 화염이 하나 솟아 올랐다. 뒤에 들으니 경상도 넘버의 화물트럭이었다고 했다.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리들은 내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의논했다. 공수단의 그 무자비한 진압으로 보아 시위는 더 확대될 것 같지 않다.

그러면 우리들 검거에 혈안이 될 것이다. 광주를 빠져나가 서울로 피했다가 잠잠해진 뒤에 돌아오자. 이런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내일 서울로 피하기로 한 것이다. 여기저기 차를 가지고 있는 친구들에게 연락, 내일 아침 일찍 우리를 시외로 빼내달라고 부탁했다. 세 사람에게 부탁했는데 아무도 거절하는 사람이 없었다. 8명의 교수 가운데는 굳이 피해야 할만한 이유가 없는 사람도 있었으나, 모두 피해의식을 느끼고 있었고 또 우리들 몇 사람을 보호할 겸 같이 동행해 준다는 뜻도 있었다.지금 생각한면 그때 피신했던 것은 너무 성급한 일이었지만, 전혀 앞을 예측할 수가 없었으므로 그때는 시위가 더 없을 것이라는 판단밖에 할 수가 없었다.

□5월 20일, 검거의 강박

20일 아침 8시께 약속한 사람들이 모두 차를 가지고 왔다. 8명이 3대에 분승, 비아 쪽으로 샛길을 타고 광주를 빠져나갔다. 정읍에서 점심을 먹고 기차를 탔다. 광주 형편이 어쩔지 몰라 우선 대전쯤에서 하룻밤을 새기로 하고 광고 출신인 충남대 교수 김병욱씨 댁으로 갔다.거기서 노희관 교수댁으로 전화를 걸어보았더니 그 부인께서 흥분한 목소리로 그날의 처참했던 광경들을 이야기했다. 우리는 침통한 기분이었으나 기왕 나선 길이니 그대로 서울로 가기로 했다.

21일 서울에 도착, 8명이 모두 중구청 곁에 있는 어느 여관에 방을 잡았다. 거기는 우리가 해직 때 우리를 끔찍이 돌봐주던 김아무개 사장의 사무실이 있는 곳이었다. 서울가면 늘 거기 들러 김사장의 신세를 졌기 때문에 이번에도 거기를 찾아갔더니 김사장이 그 여관으로 안내를 했던 것이다.여기저기 몇 군데 연락할 데 연락을 하고 나서 나는 책상을 하나 빌려 그 앞에 앉았다. 광주의 상황을 소상하게 써서 서울에 뿌릴 생각이었다. 오후 5시던가 7시던가, 뉴스시간이 되어 텔리비젼을 틀어봤다. 어마어마한 소리가 터져나왔다. 정부의 강경 진압방침이 방송이 되고 있었는데, 아나운서가 직접 말을 했던지는 기억에 희미하나 광주를 초토화시킨다는 내용의 보도였다. 이미 광주와는 전화선도 끊어져버린 전화가 불통이었으므로 광주소식이 깜깜해 더 답답했다. 여기 저기 다시 전화를 걸어보니 광주 사람들은 지금 다 죽어가는 것 같다는 소리들이었다.“이 판에 우리가 여기 이러고 있으면 어떻게 되는거지요?”나는 쓰던 글을 멈추고 다시 광주로 돌아가자고 제의했다.“지금 광주 사람들이 다 죽어가는 모양인데, 우리가 이렇게 도망쳐서 이불 쓰고 잠을 자고 그렇게 살아 남는다면 산다 한들 그게 어떻게 제대로 사람 사는 꼴이겠소. 내려갑시다. 내려 가서 죽더라도 모두 같이 죽읍시다. 우리가 피신을 하기로 했던 것은 시위가 잦아질 것으로 생각하고, 그렇게 되면 우리들 검거에 혈안이 될 것 같아 그것을 잠시 피하자는 것이었지 사태가 이토록 험하게 진전이 될 줄은 몰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태가 이 지경이 되고보니 우리는 비겁한 도망자가 되고 말았습니다.”나는 글 쓰던 종이를 구기며 격앙된 목소리로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 자리에는 같이 왔던 사람들이 다 있지는 않았다. 누구를 만나러 간 사람들이 셋인가 되고 다섯 사람이던가 그 정도만 남아 있었다. 모두 이의가 없었다. 다시 내려가겠다고 김사장에게 전화를 했더니 그가 달려왔다. 내려가기로 한 경위를 설명하자 괜찮겠느냐고 염려를 할 뿐 우리들의 결의가 굳은 것을 느끼며 말리려 하지는 않았다.거기있던 사람들 가운데 미리 약속을 해둔 사람들은 다음날 오기로 하고 명노근 교수와 김동원 교수, 그리고 나 세사람만 먼저 내려가기로 했다. 그런데 이미 고속버스도 끊어졌다는 것이다. 그럼 기차로 가자며 서울역을 향했다. 김사장은 자기 차로 서울역에까지 우리를 바래다 주었다.

그런데 이미 호남선 열차도 끊겼다는 것이다. 난감했다. 안내판을 보니 전주를 거쳐 여수로 가는 전라선은 끊기지 않아 바로 출발 5분쯤 전이었다. 우리는 부랴부랴 곡성까지 전라선 표를 끊었다.정신없이 달려나가는 우리에게 김사장은 상당히 많은 돈을 주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마치 전쟁 마당에라도 나가는 사람을 전송하는 그런 장면이었다. 김사장의 배웅을 받으며 우리가 기차에 타자마자 기차가 출발을 했다. 꼭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극적이었다. 나중에 들으니 전라선도 그것으로 끊어졌었다니 그때 오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오는데 크게 고생을 할 뻔 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때 5분이 늦어 그 기차를 타지 못했더라면 광주항쟁의 주모자들로 몰리지 않았을지도 모르므로 인생살이란 두루 모를 일이다.김사장이 준 돈으로 침대칸으로 바꿔탔으나 잠이 올 턱이 없었다. 처참한 광주거리의 장면만을 머리속에 그리며 잠을 설치다가 새벽 4시께 곡성역에 내렸다. 우리 세 사람만 내린 한산한 곡성역 앞에 택시 한 대가 불을 켜고 있었다. 그 택시도 꼭 그렇게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패잔병들의 침묵

“광주 갑시다.”“광주요?”운전사는 이 사람들이 어디서 자다 깨난 사람들이냐는 표정이었다.“압니다. 차비는 달라는 대로 줄테니 가는 데까지만 갑시다.”운전사는 좀처럼 들으려 하지 않았으나 한참 달래자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창평에서 광주호를 지나 무등산 쪽으로해서 잣고개를 넘을 참이었다.창평 샛길로 들어섰을 때였다. 길목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던 군인들이 검문을 했다. 서울서 사업하는 사람들인데, 광주에 있는 가족들 안부가 궁금해서 내려온다고 둘러댔다. 쉽게 길을 내주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31사단 군인들이었다.광주호 위의 식영정 근처 지실마을 가까이 이르자 운전사는 더는 안가겠다고 버텼다. 우리는 거기까지만 실어다준 것도 고마워 차비를 두둑이 주고 내렸다.아직 날이 새기 전이었다. 지실에 아는 사람 집이 있어 무작정 들어가 불렀다. 대답이 없었다. 모두 겁을 먹고 있을때라 깨어 있으면서도 대답을 하지 않은 것 같았다. 우리 이름을 대며 불렀더니 그때야 문이 열렸다. 대충 광주소식을 듣고 그대로 충장사(김덕령 장군 묘소)가 있는 충효리를 향해 길을 걸었다. 중간에 주막에서 라면으로 요기를 하며 광주 소식을 물었다. 자세한 소식은 몰랐으나 어마어마하다는 식으로 혀를 내두를 뿐이었다.충장사 가까이 이르자 해가 올랐다. 길에는 개미새끼 한 마리 없었다.

그런데, 어떤 아주머니가 머리에 무슨 바구니를 이고 우리를 따라오고 있었는데 열서너 살쯤 되어보이는 계집아이가 울며 어머니 치맛자락을 붙잡고 늘어졌다. 어머니는 뭐라 달랬으나 아이는 울부짖으며 듣지 않았다. 가까이서 들으니, 딸은 광주가면 죽으니까 가지 말라는 것이었고, 어머니는 이걸 팔아야 밥을 먹을게 아니냐고 달래는 것이었다. 그 바구니에 든 것은 고사리 등 산나물인 듯했다. 산나물을 뜯어 딸을 뿌리치고 길을 걸었고 딸은 징징 울며 따라가고 있었다. 비참한 시골생활의 단면을 보는 것 같았다. 딸은 한참 따라가다가 멈춰서서 울고 서 있었다. 그 광경을 보지 못한 김교수는 우리들이 그 나물을 전부 사주자고 했다.

그러나 그 아주머니는 발이 빨라 저만큼 가고 있었다.충장사 옆의 고개를 넘는 순간, 우리는 느닷없이 광경에 발을 멈추고 말았다. 앞에서 10여명의 장정이 나타난 것이다. 그 길에 사람이라고는 우리 일행과 그 산나물 장수 여자밖에 없는데 그런 느닷없는 사람들이 나타났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들은 차림새가 이상했다. 거의가 트레이닝이나 남방셔츠를 걸쳤는데 트레이닝으로 위 아래를 입은 것도 아니고 트레이닝에 잠바만 걸치기도 했다. 트레이닝에 신사복을 입기도 하는 등 차림새가 도무지 뒤죽박죽이었다. 그리고 모두 조그만한 가방을 하나씩 메고 있었다. 얼핏 무슨 막일이라도 하던 사람 같기도 했다.“광주는 지금 어떻게 됐지요?”그 사람들의 모습에 달리 이상한 점은 없어 궁금한 것부터 물었다.

그런데 우리말을 들은 척도 않고 우리 곁을 지나쳐 자기들 갈길만 가고 있었다. 꽁무니의 사람들한테 거듭 물어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들은 왜 저럴까 싶어 한참 동안 서서 그들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우리는 이상하다 생각하며 조금 가자니까 또 그런 사람들이 한패가 나타났다. 이번에는 사람수가 더 많아 20여명쯤 되어 보였다. 앞에 가던 사람들과 차림새가 똑같이 뒤죽박죽이었고 표정도 똑같이 긴장되어 있었다. 우리들은 같은 말을 또 물었다. 그들도 약속이나 한 듯이 입을 봉하고 자기들 갈 길만 가고 있었다. 도대체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들은 꼭 도깨비에 흘린 것만 같았다. 그들을 보내고 조금 가니 그런 사람들이 또 한 패가 나타났다. 우리는 똑같은 질문을 그들에게도 했다.“여기서 보성을 가려면 어떻게 가면 됩니까?”우리말에는 대답을 않고 이렇게 물어왔다. 우리는 대충 길을 가르쳐 주며 당신들은 웬 사람들이냐고 물었다.

그러나 그 말에는 대답을 않고 가버렸다. 우리들이 그 사람들 정체를 안 것은 그런 사람들을 너댓 패나 지나친 다음이었다. 그 중 한 사람이 아랫도리에 군복을 입고 있었던 것이다. 그걸 보고서야 시위진압을 위해서 지방에서 차출되었던 경찰인 모양이라는 추리를 해냈다. 그들은 잠옷으로 가지고 왔던 트레이닝복이나 민가에서 평복을 얻어 신분을 숨기고 광주를 빠져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철저하게 입을 다문 것은 자기들의 신분이 노출되면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몰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그런 태도에서 그사이 광주에서 얼마나 처참한 일이 벌어졌던가 짐작할 수 있었다. 공수단들이 너무도 끔찍하게 살상을 하는 것을 가장 자세하게 보았을 그들로서는 그들도 공수단과 한 물에 싸여 보복을 당할 것이라 생각했을 법했다.

□남동성당에서 도청으로

우리들이 그들과 몇번 말을 건네는 사이 그 나물장수 아주머니는 벌써 한참 가버리고 보이지 않았다. 잣고개에 올라서서 총소리가 났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그때는 이미 공수단을 퇴치시킨 다음이었기 때문에 변두리에서 어린아이들이 장난으로 쏘아보는 총소리였다. 두암동 쪽으로 내려오자 중학교 학생들이 칼빈 소총을 작대기처럼 들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10시쯤 김교수 집에 도착하여 우리 집에 전화를 걸어 보니 우리 집에는 아무 일이 없다는 것이었으나, 도청과 YWCA에서 빨리 나와달라는 전화가 여러번 왔다는 것이다. 김교수 집에서 아침밥을 먹고 명교수와 나는 우선 사태부터 알아보자면 홍남순 변호사댁으로 갔다.우리들이 홍변호사님 댁으로 들어서자 우리가 무슨말을 하기도 전에 홍변호사님은 자리에서 훌쩍 일어서시더니 대문을 나섰다. 나중에 알고보니 홍변호사님은 우리들이 수습을 하자고 자기를 모시러 온 줄 알았었다는 것이다. 자기도 우리와 비슷한 경위로 서울로 피신을 했다가 비슷한 심정으로 다시 광주에 돌아와 미처 숨도 돌리기 전인데 도청과 남동성당에서 나와 달라는 전화가 걸려 왔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도청에 모여 있다는 사람들 이름을 들어보니 그 가운데는 신뢰가 가지 않는 사람들이 있어 뜨악해 있는 참에 우리들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우리는 남동성당으로 갔다. 거기에는 남동성당 주임신부인 김성용 신부와 조아라 장로, 이애신 YWCA총무, 이성학 장로, 이영생씨, 이기홍 변호사 등 여남은 명이 모여 있었다.우리가 도착해서 처음 논의한 일은 지금 도청에 여러사람이 모여 수습을 논의하고 있었는데, 우리도 거기 합류할 것이냐 독자적으로 수습을 논의할 것이냐는 것이었다. 도청에 모여있다는 사람들 가운데는 시민의 대표로는 신뢰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었다. 남동성당에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 유신때 민주화 투쟁을 한 경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으므로 도청에 모여 있는 사람들의 성향을 따질 수밖에 없었다. 그때 김성용 신부가, 지금 도청에는 조비오 신부가 나가 있는데 곧 돌아올 것이니 그가 오면 거기 사정을 들어보고 결정을 하자고 했다.

얼마뒤에 조신부가 왔다. 조신부는 도청의 분위기를 대충 설명한 다음 거기서 논의되고 있는 수습조건을 대강 설명했다. 수습조건을 그 정도로 내걸겠다면 합류하자고 하여 모두 도청으로 갔다. 우리들이 갔을 때는 7개항의 수습조건에 대한 논의가 결론단계에 이르러 있었다. 좀 약하기는 했으나 일단은 그런 정도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는 의견들이어서 우리들도 거기에 동의를 해주었다. 그 수습조건을 가지고 계엄사와 접촉하는 일은 거기서 논의하고 있던 사람들이 하기로 했다. 계엄사에 다녀온 다음 다시 모이기로 하고 수습위원들은 일단 헤어졌다. 그러니까 그때 수습위원들은 모두가 스스로 수습을 자임하고 나선 사람들이었으므로 자기 발로 거기 나오면 그대로 수습위원이 되었을 뿐 시민대표로서 선출되는 무슨 절차를 거치거나 누구한테 위임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남동성당에 모였던 사람들도 물론 마찬가지였는데, 그래도 거기 모인 사람들은 유신 때 민주화 투쟁의 명백한 경력이 있는 사람들로 유신치하에서 민주화를 위한 여러 가지 논의를 할 때는 항상 같이 모였던 사람들이다. 이 수습위원들이 소위 남동성당과 수습위원들로 나중에 계엄사는 항쟁 전체 책임을 이들에겐 전부 덮어 씌우려 했었다.나하고 명교수는 산수동 공무원아파트 이석연 교수집에 가서 20일과 21일 우리들이 광주에 없었던 기간 동안의 투쟁상황을 처음으로 자세하게 찾을 수가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들은 시민들이 가장 치열하게 싸우던 이틀동안 광주에 없었던 것이다.

□죽음이 보이는 선택

거기서 쉬었다가 6시쯤 명교수하고 둘이 다시 도청 앞으로 나왔다. 시민들이 분수대 주변에 모여 성토대회를 하고 있었는데 군중수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들이 그 주변에 얼굴을 나타내자 여기저기서 우리들 더러 시민군들의 본부가 없으니 학생들을 모아 본부를 만들어서 실질적인 수습의 지휘를 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 아니냐고 했다. 그들은 시민수습위원 몇 사람들의 이름을 대며 그들의 과거경력을 들추어 강력한 불신감을 드러냈다.명교수는 학생수습위원회를 결성하자는 데 즉각 찬동하고 나섰다.

그러나 나는 우리들이 앞에 나서서 그런 일을 하는데는 반대였다. 그 반대이유를 얼른 설명할 수가 없어 나는 강력한 반대 의사만 밝혔으나 명교수는 듣지 않았다. 그는 어느새 어떤 학생이 가지고 있던 휴대용 확성기를 넘겨받아 여기있는 대학생들을 전부 이리 모이라고 했다. 지칫하면 큰일날 일이라고 말렸으나 명교수는 듣지 않았다.나는 난감했다. 내가 반대를 한 이유는 이런 것이었다.

첫째는 아직까지 시민군 지도부가 없는데, 우리들이 앞장을 서서 지도부를 만들면 이 사태 전반의 책임을 우리 두 사람이 전부 뒤집어 쓸 위험이 있었다. 그 책임이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지금 공수단이 잠시 광주시 외곽으로 물러났다고 하지만 시민수습위원회의 수습이 결렬된 경우, 지금 광주시민은 사실상 6만 대군을 상대로 싸움을 하고 있는 셈이므로 광주가 다시 그들에게 탈환이 되는 것은 시간 문제며, 그때는 지금까지 그런 잔인한 살육을 했던 만큼 억지를 부려 그 책임을 광주시민에게 뒤집어 씌울 것은 뻔한 일이므로 그렇게 되면 우리 두 사람은 과거의 경력이 있겠다 그 일차적인 표적이 될 것은 너무나 명백한 일이었다. 그 조직이 순수하게 수습만 한다 하더라도 그럴 것인데, 공수단이 탈환작전을 펴면 그 조직은 자연스럽게 투쟁의 조직으로 바뀌어 항쟁의 지도부가 될 것이므로 그때는 그 책임을 얼마나 크게 물을 것인가 그것은 더 물을 필요도 없었다. 우리가 서울서 돌아올 때 광주시민과 같이 죽자고 했던 것은 이런 식으로까지 앞에 나서서 죽자는 것은 아니었다.

둘째 지금 겉으로는 드러나고 있지 않으나 부분적이고 영향력이 적은대로 지하에 지도부가 숨어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그 세력이 겉으로 드러날 수 없는 세력이라면 우리들은 도청에 들어가자마자 사살 대상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그럴 가능성은 극히 희박했지만, 죽음을 무릎쓰고 설마의 도박을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런 일까지는 없다하더라도 그때는 전투 뒤의 극도로 격앙된 분위기였으므로 여러 가지로 의견이 엇갈릴 것은 당연히 일이며 조그마한 의견 충돌로도 감정이 격발되어 총을 휘둘러댈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면 그건 개죽음이었다. 지하지도부에 대한 나의 가상이 신경과민이 아니었다는 것은 사실로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물론 이 잡듯이 수사를 했는데도 그런 조직은 없었지만, 그들의 일차적인 수사각도는 그것이었다.

셋째 이 항쟁은 처음에는 학생들이 촉발을 시켰지만, 시민들이 무장으로 항쟁을 해서 공수단을 몰아냈는데, 정작 무장 항쟁의 단계에서는 실질적인 항쟁의 주체가 아니었던 대학생들로 지도부를 결성하는 것이 옳은일일까 하는 회의였다. 학생들은 이미 19일 거의 광주를 빠져 나가버렸고 실제로 총을 들고 싸운 사람들은 밑바닥 시민들이었다. 더구나 우리 교수들은 시위군중 속에도 제대로 뛰어들지 못하고 겉으로 빙빙 돌며 구경이나 하다가 피신을 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과거 민주화운동으로 얻은 어줍잖은 명망을 업고 학생들을 모아 지도부를 결성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지금은 지도부가 없더라도 그들이 전투를 하던 과정에서 작은 단위로는 전투를 지휘했던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므로 시간이 좀 걸리고 다소 충돌이 있더라도 그 세력이 모여 지도부가 결성되는 것이 자연스러우며, 그래야만 운동의 자기 논리가 제대로 관철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내가 반대하는 데는 이 세 번째 이유가 사실상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이것은 오래오래 역사적으로 책임을 져야 할 심각한 문제이기도 했다.당장 눈앞에 죽음이 오가는 문제인데다 자칫하면 역사적으로 크게 책임을 져야 할 문제였다.

그러나 벌써 명교수앞에는 학생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나는 명교수 성격으로 보아 더 말릴 재간이 없을 것 같았다. 명교수도 나같은 생각을 어렴풋이 하고 있겠지만 그는 어디서나 이래야겠다고 일단 결심이 서면 물불가리지 않고 밀고 나가는 성격이었다. 나는 그의 그런 순수성에 늘 감탄을 하고 있는 편이었지만 여기서는 그와 함께 행동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혼자 가버리려고 발길을 돌렸다.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으나 죽음길을 동행할 수는 없다는 생각으로 발길을 돌린 것이다. 몇 번 뒤를 돌아보면 노동청 앞에까지 갔다.

그런데 더는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친구를 사지에다 두고 혼자 도망친다는 자의식 때문이었다. 더구나 서울서 내려가자고 강력히 주장했던 것은 나였으므로 나는 명교수를 사지에다 몰아 넣어놓고 혼자 내빼는 꼴이었다. 만약 저러다가 명교수가 혼자 죽게 된다면 나는 어떻게 될 것이가? 심각한 고민에 빠지고 말았다. 명교수가 이때처럼 원망스런 때가 없었다. 나는 어떻게 하는가나 볼 양으로 다시 그리 가 보았다. 1백여명의 학생들이 모여있었다.“전남대학교하고 조선대학교 학생들이 따로 모여 대표로 5명씩만 뽑아주세요.”명교수의 목소리가 확성기를 타고 쟁쟁하게 울렸다. 5명씩의 대표가 뽑혔다. 이미 일은 제 길로 가고 있었다. 나는 하는 수없이 곁으로 갔다.“지금 공수단을 몰아내기는 했으나, 지도부가 없어 시민군은 갈팡질팡입니다. 이미 시민수습위원회가 결성이 되어 수습조건을 가지고 상무대에 갔습니다마는, 그들이 시민군을 통솔할 수는 없습니다. 이 일은 학생들이 촉발시켰으니 학생들이 앞장을 서서 수습을 해야 합니다. 도청으로 들어가서 학생 수습위원회를 결성합시다.”명교수는 학생 수습위원회 결성 취지를 말하고 나서 도청을 향해 앞장을 섰다. 나도 따라 나설 수밖에 없었다. 나는 마치 도살장에라도 들어가는 기분으로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가 오후 7시쯤이었다.

□“나는 고등학교 선생이여”

도청 정문에는 그때 이순신 장군이라 애칭되던 방석모를 쓴 시민군들이 총을 들고 살벌하게 지키고 서서 드나드는 사람을 통제하고 있었다. 전투경찰의 방석모를 빼앗아 쓴 것인데 철망을 뒤로 돌려썼기 때문에 그 모습이 꼭 서울 광화문통에 세워진 이순신 동상의 모습과 같이 그런 별명이 붙었던 것이다.우리들은 10명의 학생들을 데리고 그 이순신 장군들앞을 통과해서 도청으로 들어갔다. 오전에 수습위원회가 열렸던 서무과로 들어가려는 참이었다. 마침 당시 부지사이던 정시채씨가 내려오다 우리들을 보더니 의논할 것이 있다고 했다. 명교수는 정씨와 2층으로 올라갔다.나 혼자 학생들을 데리고 서무과로 들어갔다. 서무과 안은 아수라장이었다. 백여명도 더 되는 수가 우왕좌왕 난장판이었다. 한쪽에서는 앞에다 웬 사람들을 앉혀 놓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무슨 수사를 하는 것 같았다. 기관의 앞잡이 같다고 붙잡혀 온 사람들을 앉혀 놓고 수사를 한답시고 고래고래 악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수사는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라 깡깡악다구니만 쓰고 있었던 것이다. 한쪽에서는 김밥이 무더기로 쌓여 있고 여기저기서 총소리가 나기도 했다. 오발을 하거나 재미로 한 방씩 쏘아보는 총소리였다. 더 기겁을 할 일은 수류탄을 차고 다니는 꼴들이었다. 안전핀 고리를 그게 그렇게 차고 다니는 고린 줄 알고 그 고리를 줄래 줄래 꿰어 달고 다니고 있었다. 그게 뽑히는 날에는 떼죽음이 날 판이었다. 그리고 총 파지법을 모르기 때문에 대작대기 들 듯 휘젓고 다니는 데는 식은땀이 날 지경이었다.나는 수류탄을 모두 회수하고 총 파지법부터 가르쳐야겠다고 했다.

그러나 모두가 오합지졸이었으므로 누구 말을 들을 것 같지도 않았고 모이라 한다고 모일 것 같지도 않았다.회의를 하려면 우선 그 방안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정리를 해야겠기에 학생들에게 안에 있는 사람들을 정리하자고 했다.나는 수사하고 있는 쪽에 신경이 쓰여 그 쪽으로 가서 수사하는 꼴을 보니 잡혀온 사람들은 대부분 술을 마시고 헛소리를 하거나 과격한 소리를 한 사람들 같았다.“거짓말 하지 말고 지대로 대란 말이요.”“참말이란께. 나는 고등학교 선생이요.”“그람 증명서를 내보시오.”“니미, 데모 구경 나온 사람이 증명갖고 나올것이여.”“참말로 환장하것네잉. 가씨요.”거의가 이런 식이었다.사람들을 모아 무슨 이야기를 조금 해보려 하면 느닷없이 사람들이 나타나 어이없는 악다구니를 썼다.“지금 시체는 막 썩어가는디 관을 구할 생각은 않고 뭣들 하고 있냐 말이여?”눈이 벌겋게 충혈된 사람들이 총을 들이대며 악을 썼다. 그들은 도청에 이미 지도부가 형성되어 있는 줄 알고 그런 요구를 하고 있었다. 겨우 그들을 달래놓고 나면 또 느닷없는 사람이 나타나 공수단 놈들이 언제 쳐들어올지 모른는데 그 대비를 하지 않고 무얼 꾸물거리고 있느냐고 악을 쓰기도 했다.

□“수습이 뭐야, 수류탄을 칵!”

한참동안 그런 맹랑한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는데 이번에는 좀 색다른 젊은이가 나타났다. 학생수습위원회를 결성한다는 말을 듣고 정면으로 반대를 했다.“수습이 뭐야, 수류탄을 칵!”그는 수류탄을 들이대며 위협을 했다.“그럼 어쩌자는 것인가!”“학생들 저것들이 뭔데 이제 와서 저것들이 설친단 말이예요?”예상했던 소리였다. 뜨끔했다.“그럼 자네 의견을 말해보게.”“수습위원회가 아니라 전투본부를 만들어야 해요.”“그래 전투본부든 수습위원회든 조직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어. 이렇게 오합지졸로 우왕좌왕하고 있다가 공수단들이 다시 쳐들어오면 어쩌자는 것인가? 수습을 해서 질서를 잡고 있다가 군에서 우리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그때는 별 수 없이 싸우는 수밖에 없잖겠어? 그렇지 않은가?”

그러나 그는 학생들이 앞장서는 것에는 끝내 반대했다.“자네 말도 맞는데, 그럼 누가 누군지 모르는 판에 어떤 사람들이 앞에 설 것인가? 총 들고 싸웠다고 그 사람들이 앞장을 선다면 그가 누군지 모르는 판이라 총을 들었던 시민군들로부터가 우선 그들을 밎지 않을 것인데, 그러면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지도력을 발휘하지? 지금 모든 사람들이 믿을 수 있는 건 학생밖에 없잖아?”그는 내 말에 반론을 내세우지는 못했으나 납득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그는 김아무개란 젊은이로 그때는 그냥 재수생이라고 불렸었는데, 이미 그 안에서 어느 정도 실권을 행사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반대의견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산발적으로 나타나 기분 내키는대로 덤비는 통에 대처하기가 그만큼 어려웠다. 그러나 시간이 걸리더라도 반대의견이 있는 사람은 다 납득을 시킨 다음에 수습위원회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