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2015-05-20
임을 위한 행진곡
본문
<임을 위한 행진곡>
정유하(전남대학교 518연구소 연구원)
1. <임을 위한 행진곡>의 창작배경
<임을 위한 행진곡>은 1982년 봄에 제작된 노래굿 “넋풀이”의 마지막 곡이다. 1980년 5월 27일 새벽, 도청에서 계엄군의 총에 산화했던 윤상원과 후배 박기순의 실제 있었던 영혼결혼식(1982년 2월)을 음악극으로 만든 것이다.
신랑 윤상원은 전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출신으로 서울 주택은행 봉천동 지점에서 근무하다 고향 광주로 내려와 공장취업, 신협근무, 들불야학 강학 등 사회운동을 전개하던 중 5‧18을 맞게 되었다. 항쟁 초반에는 사태를 조망하다 마비된 언론을 대신하여 들불야학의 강학과 학생들과 함께 <투사회보>를 제작하여 배포했고 5월 26일 구성된 ‘광주시민투쟁위원회’대변인이 되어 기자회견을 갖기도 했다. 그러다 1980년 5월 27일 새벽 도청에서 계엄군의 총탄에 목숨을 잃었다. 신부 박기순은 전남대 역사교육학과 학생으로 1978년 있었던 ‘민주교육지표선언’지지시위에 연루되어 무기정학을 당하자 광천 공단의 공원들을 위한 들불야학의 창설에 전념하고 ‘동신강건사’라는 공장에 취업하였다. 1978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를 들불야학의 학생들과 함께 지내고 다음날 교실의 난방용 땔감을 구하러 야산을 돌아다니다 밤 11시에 오랜만에 들린 오빠의 집에서 연탄가스 중독으로 목숨을 잃었다. 박기순은 윤상원을 설득하여 들불야학에 참여하게 했던 당사자이기도 하다. 이 두 사람의 영혼결혼식이 1982년 2월 20일 광주 망월동에서 거행되었다.
1982년 당시, 광주에서 살고 있었던 소설가 황석영의 집은 문화운동가들의 사랑방이었다. 대학가요제 수상의 경력을 가지고 있던 김종률과 문화운동가 전용호는 1982년 3월 어느날 운암동에 있던 황석영씨의 사랑방에 모여 1982년 2월에 있었던 윤상원과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을 언급하면서 ‘두 사람의 영혼을 기리고 살아남은 자들의 의지를 결집하자’는 의도로 노래극의 창작을 도모했다.
창작노래극의 전체적인 틀과 가사는 황석영이 맡았고 김종률은 작곡을 담당했다. 전영호는 노래극의 공연팀을 구성하는 것이었다. 영혼결혼식 당시 주례사 대신 낭송되었던 문병란 시인의 시 「부활의 시」를 주제로 하여 ‘5월 항쟁 희생자들의 부활을 상징화하였다. 여기 포함된 노래로는 1. 서곡- 젊은 넋의 노래, 2. 무등산 자장가, 3. 회상, 4. 에루아 에루얼싸, 5. 무당 초혼굿 마당, 6. 부활의 노래(문병란 시), 7. 못 오시나, 8. 격려가, 9. 님을 위한 행진곡(백기완 시, 황석영 발췌·재구성)이 있다.
이 노래굿의 제작은 운암동의 황석영 자택 2층으로 기타, 장구, 북, 꽹과리, 징, 빌려온 소니 녹음기가 동원되었고 황석영, 김종률, 전용호, 오정묵(노래), 임영희(노래), 임희숙, 윤만식, 김은경, 무명의 음교과 여학생, 이훈우, 김선출(꽹과리) 등이 모여 공연에 임했다.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담요로 거실 유리창을 모두 막고 저녁에 연습에 들어간 후 녹음은 새벽 2시쯤에 진행되어 3시 반경에 완성되었다.
“넋풀이” 테이프는 1982년 기독청년협의회(EYC) 명의로 2천개가 제작되어 전국으로 배포되었다. 1983년에는 전국 YWCA 전국대회에서 광주 YWCA 회원들이 놀이패 ‘신명’의 윤만식의 연출로 공연하여 큰 호응을 얻기도 했다. 1983년 입대 후 첫 휴가를 나왔던 김종률은 서울의 거리를 걷다가 자신이 작곡한 <님을 위한 행진곡>을 처음으로 들었다고 한다. 지금은 <임을 위한 행진곡>으로 알려져 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의 가사는 본래 백기완의 “묏비나리”라는 시로 그가 1979년 YMCA 위장 결혼식 사건 주모자로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하며 지내던 서울 서대문교도소에서 1980년 겨울에 지었다고 한다. 백기완도 1983년 2월 대구에서 열린 ‘기독교예장 청년대회’에 참석했을 때 처음으로 이 노래를 들었다고 한다.
2. <임을 위한 행진곡>의 의의와 가는 길
이 노래는 1980년대 5·18민주화운동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해 노력하던 5월운동기간 동안 동력을 제공해주었던 노래이다. 일반적인 행진곡이 밝은 장조로 작곡된 반면 이 곡은 라단조로 작곡되었다. 과거와 미래를 묶어 결단을 촉구하는 가사의 비장함을 낮은 음역에서 시작해 높은 음역으로 상승하는 선율이 극대화 시키고 있다. 오랫동안 탄압 속에서 비공식적으로 열렸던 추모제와 기념식에서 사람들은 애국가를 대신해서 민중의례가로서 <임을 위한 행진곡>으로 부르면서 투쟁의 의지를 불러일으켰고 마침내 5월운동은 승리로 자리매김 되었다.
1997년 5·18민주화운동이 국가기념일로 승격된 후에는 고 김대중 대통령이나 노무현대통령이 기념식에서 제창하곤 했다. 하지만 2009년부터는 국가보훈처에서 5·18기념식 공식 식순에<임을 위한 행진곡>을 배제하여 논란가운데 있다. 5·18민주화운동 당사자들은 끊임없이 이 노래의 제창을 요구하고 있다.
2015년 5·18기념행사위원회에서는 <임을 위한 행진곡>제창금지에 항의하여 국가보훈처의 지원금 1억 2천여 만원을 거부했고 국가의 공식기념식에 불참하고 5·18당사자들과 행사위원회 관계자들이 모여 기념식을 구 도청 앞 5·18민주광장에서 거행했다. 이 자리에서는 <임을 위한 행진곡>의 제작진들과 광주를 방문한 일본 일어서라 합창단이 함께 이 노래를 단상에 올라 이 노래를 선창했다.
국가보훈처의 5·18 공식기념곡을 공모하자는 제안과 광주시민들의 <임을 위한 행진곡>을 5·18공식기념곡으로 제정하자는 제안은 계속 부딪치면서 새로운 운동으로 불타오르고 있다.
음원: 2008년 발매 소니비엠지뮤직
정유하(전남대학교 518연구소 연구원)
1. <임을 위한 행진곡>의 창작배경
<임을 위한 행진곡>은 1982년 봄에 제작된 노래굿 “넋풀이”의 마지막 곡이다. 1980년 5월 27일 새벽, 도청에서 계엄군의 총에 산화했던 윤상원과 후배 박기순의 실제 있었던 영혼결혼식(1982년 2월)을 음악극으로 만든 것이다.
신랑 윤상원은 전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출신으로 서울 주택은행 봉천동 지점에서 근무하다 고향 광주로 내려와 공장취업, 신협근무, 들불야학 강학 등 사회운동을 전개하던 중 5‧18을 맞게 되었다. 항쟁 초반에는 사태를 조망하다 마비된 언론을 대신하여 들불야학의 강학과 학생들과 함께 <투사회보>를 제작하여 배포했고 5월 26일 구성된 ‘광주시민투쟁위원회’대변인이 되어 기자회견을 갖기도 했다. 그러다 1980년 5월 27일 새벽 도청에서 계엄군의 총탄에 목숨을 잃었다. 신부 박기순은 전남대 역사교육학과 학생으로 1978년 있었던 ‘민주교육지표선언’지지시위에 연루되어 무기정학을 당하자 광천 공단의 공원들을 위한 들불야학의 창설에 전념하고 ‘동신강건사’라는 공장에 취업하였다. 1978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를 들불야학의 학생들과 함께 지내고 다음날 교실의 난방용 땔감을 구하러 야산을 돌아다니다 밤 11시에 오랜만에 들린 오빠의 집에서 연탄가스 중독으로 목숨을 잃었다. 박기순은 윤상원을 설득하여 들불야학에 참여하게 했던 당사자이기도 하다. 이 두 사람의 영혼결혼식이 1982년 2월 20일 광주 망월동에서 거행되었다.
1982년 당시, 광주에서 살고 있었던 소설가 황석영의 집은 문화운동가들의 사랑방이었다. 대학가요제 수상의 경력을 가지고 있던 김종률과 문화운동가 전용호는 1982년 3월 어느날 운암동에 있던 황석영씨의 사랑방에 모여 1982년 2월에 있었던 윤상원과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을 언급하면서 ‘두 사람의 영혼을 기리고 살아남은 자들의 의지를 결집하자’는 의도로 노래극의 창작을 도모했다.
창작노래극의 전체적인 틀과 가사는 황석영이 맡았고 김종률은 작곡을 담당했다. 전영호는 노래극의 공연팀을 구성하는 것이었다. 영혼결혼식 당시 주례사 대신 낭송되었던 문병란 시인의 시 「부활의 시」를 주제로 하여 ‘5월 항쟁 희생자들의 부활을 상징화하였다. 여기 포함된 노래로는 1. 서곡- 젊은 넋의 노래, 2. 무등산 자장가, 3. 회상, 4. 에루아 에루얼싸, 5. 무당 초혼굿 마당, 6. 부활의 노래(문병란 시), 7. 못 오시나, 8. 격려가, 9. 님을 위한 행진곡(백기완 시, 황석영 발췌·재구성)이 있다.
이 노래굿의 제작은 운암동의 황석영 자택 2층으로 기타, 장구, 북, 꽹과리, 징, 빌려온 소니 녹음기가 동원되었고 황석영, 김종률, 전용호, 오정묵(노래), 임영희(노래), 임희숙, 윤만식, 김은경, 무명의 음교과 여학생, 이훈우, 김선출(꽹과리) 등이 모여 공연에 임했다.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담요로 거실 유리창을 모두 막고 저녁에 연습에 들어간 후 녹음은 새벽 2시쯤에 진행되어 3시 반경에 완성되었다.
“넋풀이” 테이프는 1982년 기독청년협의회(EYC) 명의로 2천개가 제작되어 전국으로 배포되었다. 1983년에는 전국 YWCA 전국대회에서 광주 YWCA 회원들이 놀이패 ‘신명’의 윤만식의 연출로 공연하여 큰 호응을 얻기도 했다. 1983년 입대 후 첫 휴가를 나왔던 김종률은 서울의 거리를 걷다가 자신이 작곡한 <님을 위한 행진곡>을 처음으로 들었다고 한다. 지금은 <임을 위한 행진곡>으로 알려져 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의 가사는 본래 백기완의 “묏비나리”라는 시로 그가 1979년 YMCA 위장 결혼식 사건 주모자로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하며 지내던 서울 서대문교도소에서 1980년 겨울에 지었다고 한다. 백기완도 1983년 2월 대구에서 열린 ‘기독교예장 청년대회’에 참석했을 때 처음으로 이 노래를 들었다고 한다.
2. <임을 위한 행진곡>의 의의와 가는 길
이 노래는 1980년대 5·18민주화운동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해 노력하던 5월운동기간 동안 동력을 제공해주었던 노래이다. 일반적인 행진곡이 밝은 장조로 작곡된 반면 이 곡은 라단조로 작곡되었다. 과거와 미래를 묶어 결단을 촉구하는 가사의 비장함을 낮은 음역에서 시작해 높은 음역으로 상승하는 선율이 극대화 시키고 있다. 오랫동안 탄압 속에서 비공식적으로 열렸던 추모제와 기념식에서 사람들은 애국가를 대신해서 민중의례가로서 <임을 위한 행진곡>으로 부르면서 투쟁의 의지를 불러일으켰고 마침내 5월운동은 승리로 자리매김 되었다.
1997년 5·18민주화운동이 국가기념일로 승격된 후에는 고 김대중 대통령이나 노무현대통령이 기념식에서 제창하곤 했다. 하지만 2009년부터는 국가보훈처에서 5·18기념식 공식 식순에<임을 위한 행진곡>을 배제하여 논란가운데 있다. 5·18민주화운동 당사자들은 끊임없이 이 노래의 제창을 요구하고 있다.
2015년 5·18기념행사위원회에서는 <임을 위한 행진곡>제창금지에 항의하여 국가보훈처의 지원금 1억 2천여 만원을 거부했고 국가의 공식기념식에 불참하고 5·18당사자들과 행사위원회 관계자들이 모여 기념식을 구 도청 앞 5·18민주광장에서 거행했다. 이 자리에서는 <임을 위한 행진곡>의 제작진들과 광주를 방문한 일본 일어서라 합창단이 함께 이 노래를 단상에 올라 이 노래를 선창했다.
국가보훈처의 5·18 공식기념곡을 공모하자는 제안과 광주시민들의 <임을 위한 행진곡>을 5·18공식기념곡으로 제정하자는 제안은 계속 부딪치면서 새로운 운동으로 불타오르고 있다.
음원: 2008년 발매 소니비엠지뮤직
첨부파일
-
nim.wma (3.7M)
408회 다운로드 | DATE : 2015-05-20 18:33:06
- 이전글2015한국정치 공동학술회의 "민주당 민주당 계승정당과 한국정치" 개최안내 15.05.28
- 다음글5.18민주화운동 제35주년 기념학술대회 개최 안내 15.05.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