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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日人사진기자의 現場목격기 風 間 公 一 (報道寫眞家) 1949년에 태어나 보도사진가(프리랜서)로 활동하고 있는 일본인 風間公一은 광주사태를 사진 취재하기 위해 현지에 내려갔다. 그는 광주에 도착 후, 5월 20일 오후 7시경부터 군대·경찰기동대와 시민과의 대치, 다음날의 총격을 목도하고, 일단 서울로 탈출한 후, 다시 광주로 내려와 진압군에 의해 진압되기까지의 과정을 담담한 필치로 묘사하고 있다. ―편집자주 어둠과 함께 사태 돌변해 5월 20일(화) 서울에서부터 만원이 되어 출발한 야간열차가 광주역에 도착한 시각은 새벽 5…

  • 光州사태 관계자들의 證言 이 증언은 광주사태를 직접 겪은 관계자들의 체험담을 본지 취재기자들이 정리한 것이다. 月刊朝鮮특별취재반 證言者 宋基淑(당시 수습위원) 金鍾培(당시 학생투위 위원장) 李梁賢(당시 학생투위 기획위원) 南東成(당시 전투경찰관) 曺喆鉉(신부) ■宋基淑(50, 전남대교수, 당시 수습위) 계엄군이 확산되고 계엄군이 학교에 진주하고 난후 5월18일에 벌어진 상황을 나는 직접 체험하지 못했다. 5월19일은 통근버스가 정상 운행되어 9시경 학교에 출근했다. 물론 교수와 학교직원들만 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

  • ●民和委증언·공수대원 手記·국방부발표·NCC보고서·光州側문서 등을 총동원한 「진상규명」을 위한 질문서 爭点! 무엇이 「光州」의 眞相인가 尹 在 杰(東亞日報出版局次長署理) 民和委, 光州시태 본격 거론 지난해 연말 대통령선거를 전후해서부터 80년 5월의 「광주사태」에 관한 논의가 사회 각계각층에서 분분하게 이뤄지고 있다. 특히 盧泰愚대통령 직접 지시에 의해 만들어진 민주화합추진위원회(약칭 民和委)에서 나오고 있는 관련당사자들의 증언들은 국민들에게 이 사태의 심각성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고 있다. 이 증언과 논의를 통해 국민들…

  • 입체특집 光州사태를 再審한다. 民和委에서 털어놓는 증언록 ‘진상조사후 명예 회복을’ 金成洙 ‘사태수습에 최선 다했지만’ 蘇俊烈 ‘民和委에 무엇 기대하랴’ 田桂良 ‘간첩누명에 拷問까지’ 全玉珠 5·18 光州사태 계엄군 手記 ‘다같은 피해자, 참회의 마음을’ 金永哲 5·18 光州사태 시민군 手記 錦南路 10일, 스님이 겪은 煉獄 李光榮 입체특집/光州사태를 再審한다. 지난 1월 11일 구성된 民主和合推進委員會는 당초 ‘들러리’가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을상당부분 불식시키면서 그동안 왕성한 활동을 보여왔다. 또한 …

  • 「光州」주역 36人의 증언 내가 겪은 80년 5월의 光州 「光州」를 어떻게 풀까. 80년 5월, 세계를 진동시킨 그 엄청난 사건은 「義擧」일까, 「抗爭」일까…. 6共和國의 출범을 가로막고 있는 이 難題를 풀기 위해서는 우선 眞相부터 알아야 할 것이다. 이에 月刊朝鮮은 당시 이른바 「市民軍」의 대표, 수습위원, 총을 들고 싸웠던 학생, 전투경찰관, 간호원, 시민등 36명으로부터 생생한 증언을 채록했다.이 증언은 85년 5월 월간조선 특별취재반이 광주에 특파돼 취재한 것으로, 증언자들의 나이와 직책등은 당시의 것이다. 月刊朝鮮 특…

  • 民和委의 「光州청문회」 정부측과 광주사태 당사자들의 생생한 현장증언. 8년만에 광주사태를 정식논의한 民和委는 「광주사태에 대한 정부 사과」, 광주사태의 성격을 「광주학생-시민투쟁」으로 재규정해 주도록 정부에 건의했다.韓 東 潤 연합통신 정치부 기자 8년만의 역사적 재평가 작업 국민 모두에게 「어두운 기억」일 수밖에 없는 광주사태가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광주 사람들에게는 통곡의 진원이었고 운동권에게는 투쟁 이데올로기의 출발점이었으며 제5공화국의 집권세력에게도 끊임없이 제기된 정통성 시비의 업보였던 80년 5월의 대사건이 금기의 …

  • 5·18증언-우리는이렇게 싸웠다-5월 27일, 그 마지막 새벽까지 총을 들고 싸웠던 항쟁참가자의 증언! 죽은 자가 산 자에게 말한다 정적을 가르는 총성이 울렸다 새벽 3시 30분! 도청 주변 사방에서 정적을 가르는 총성이 울렸다. 가두방송을 듣고 뛰쳐 나온 젊은이들이 계엄군의 포위망에 걸렸다. 어둠속에서 도청주위를 맴돌다 수백명이 체포, 사살되었다.도청 상황실에서는 자폭하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한 청년이 눈물을 주먹으로 씻으며 말했다. “고등학생들은 먼저 총을 버리고 투항해라. 여기야 사살되거나 다행히 살아 남아도 잡혀 죽겠…

  • 광주민중항쟁 10주년 특집 가려졌던 광주·전남 근현대사의 현장에서 엮는 대하기획 증언 ‘원천적으로 합법을 가장한 또 하나의 범죄행위’ 5·18군사재판과 변호인들 이재의 “5·18광주사태에 대한 재판은 ‘재판’이 아니라 차라리 ‘개판’이라고 부르는 편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그런 재판을 할 바에야 차라리 혁명적 상황이라고 까놓고 얘기하면서 재판이라는 요식행위를 거치지 않았어야죠. 그 재판에 본의아니게 관여한 재판관들이 그후 두고두고 느끼는 양심의 가책은 영원히 벗을 수 없는 짐이 되고 말았습니다. 나 역시 …

  • 5·18당시 발포거부 전남도경국장의 광주비망록 80년 광주의 학살은 그곳에서 끝나지 않았다. 신군부의 발포명령을 거부하다 동빙고로 끌려가 고문당하고 자진 사표를 써야했던 5·18당시 전남도경국장 안병하씨. 그는 5공의 폭압 속에 말 못할 ‘광주의 한’을 끌어안은 채 신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지난해 광주로 완전 이주한 그의 부인이 그의 광주사랑을 잇고 있어 화제다. 이재의 (광주일보 예향 기자) ‘5·18 피해자’된 전남도경국장 지난 93년 7월 중순 이색적인 한 사람이 5·18광주민주화운동 피해자로 신고서를 접수시…

  • 인터뷰 5·18 검찰수사에 대한 5共측 李亮雨변호사의 입장 5共 탄생은 국가보위 세력과 民主化세력간의 갈등의 결과 全斗煥 前대통령의 법률고문인 李亮雨변호사는 「검찰의 5·18수사결과는 법률판단을 회 피한 정치적 결정」이라고 비난했다. 또 新軍部집권과정에서 國憲문란 목적의 폭동이 존재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란」이 아니라고 해석했다. 李변호사는 80년 봄에 新軍部라는 세력 은 존재하지 않았고, 집권 시나리오도 없었다고 주장한다. 질문 : 趙 甲 濟 月刊朝鮮부장 정리 : 金 容 三 月刊祖先기자 全斗煥 前대통령측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