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쟁점!무엇이 광주의 진상인가-증언, 수기.윤재걸(신동아, 1988. 3)
본문
●民和委증언·공수대원 手記·국방부발표·NCC보고서·光州側문서 등을
총동원한 「진상규명」을 위한 질문서
爭点! 무엇이 「光州」의 眞相인가
尹 在 杰(東亞日報出版局次長署理)
民和委, 光州시태 본격 거론
지난해 연말 대통령선거를 전후해서부터 80년 5월의 「광주사태」에 관한 논의가 사회 각계각층에서 분분하게 이뤄지고 있다. 특히 盧泰愚대통령 직접 지시에 의해 만들어진 민주화합추진위원회(약칭 民和委)에서 나오고 있는 관련당사자들의 증언들은 국민들에게 이 사태의 심각성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고 있다. 이 증언과 논의를 통해 국민들은 사태의 근본적인 치유책이 강구되지 않고서는 이 나라의 민주화는 결코 순탄치 않으리라는 인식을 함께 갖는 계기가 됐다.문제는 무엇이 사태의 근본적인 치유책이냐는 데 달려 있는 듯하다. 혹자는 『아픈 상처를 다시 건드려서 무엇이 득될 게 있느냐』면서 『용서와 화해만이 지금 이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인사들은 『사태의 철저한 규명이 선행돼야만 슬기로운 해결책도 나올 수 있다』면서 『무엇보다도 먼저 사태의 발생배경 및 그 전개과정, 그리고 아직까지도 미흡한 채 덮여있는 많은 의문점들(사망자숫자 등)이 백일하에 밝혀져야 할 것』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그리고 이같은 사태의 진상은 가해당사자측이 배제된 순수 민간주도의 차원에서 각게각층의 신망있는 인사들로 조사단을 구성, 지금까지 덮어둔 의문점들을 낱낱이 드러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民和委의 『광주사태』거론에 관해, 피해당사자들은 여전히 부정적인 시각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지난 8일 민화위에 출석한 田桂良씨(5·18광주의거 유족회장)의 주장이 이를 대변해주고 있다고 보겠다.『민화위는 노태우정권의 정통성과 기반을 구축하기 위한 대표적 협잡기구이다. 그간 기만적으로 광주사태해결 운운해 왔으나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 유족회는 민화위가 광주학살에 대한 원천적 치유방안을 모색할 수 없다고 본다.』첫째 민화위는 노태우씨가 대통령이 되기위해 구상한 기구로소 민정당의 한 위원회에 불과하다.
둘째 국가적 차원에서 법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임시자문기구에서 논의되는 것이므로 차기정부에서 모두 반영된다는 보장이 없다.셋째 문제의 원천적 해결은 軍에 의해서 빚어진 점을 감안, 국가적 차원에서 해결점이 모색되어야 하므로, 법적 제도적 보장을 받지 못하는 민화위는 그 기능을 다할 수 없다.넷째 민화위는 관련 피해당사자들이 제외된 구성체이므로 학살 만행을 은페하고 항쟁정신을 희석화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다섯째 근본원인에 대한 객관적 검토과정이 미흡하며 학살만행에 대한 배경의 진상은 완전히 은폐되고 있다.여섯째 미국의 개입에 대한 문제점은 설정조차 하지 않았다.한편 유족회는 학살만행에 대한 원천적이고 숨김없는 치유를 요구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첫째 민화위는 어용집단이므로 기만적인 국민우롱 작태를 중지하고 즉각 해체되어야 한다.
둘째 새 국회에서 진상조사 특별법을 제정하고 국회의원 및 피해당사자, 재야 단체대표,언론인, 법조인, 정부추천인사 및 당시 군관련 지휘관 등으로 진상조사 特委를 구성해야 한다. 또 진상규명 후 가해자 처벌을 위한 특별재판소를 설치, 가해자를 의법처단해야 한다.
셋째 폭도로 규정된 光州시민의 명예회복이 전제되어야 한다.
넷째 군 작전권을 갖고 있는 미국의 묵인, 방조, 개입에 대해 외교적 조치를 단행해야 한다.
다섯째 피해자들에 대한 정신적 물질적 보상과 보훈대상자로의 예우가 필요하다.
여섯째 일부야당이 주장하는 현 국회에서의 국정조사권 발동 등 정치적인 해결방안을 거부한다.
이같은 부정적인 시각은 사태피해자로서 지난 3일 출석 증언한 李光榮씨(35·광주사태부상자회 부회장)등에게서도 똑같이 나타났다.그러나 이번 민화위에 출석, 부분적이나마 사태를 증언한 사람들은 대부분이 사태에 직간접적으로 관련한 당사자들로서 「진상규명」이라는 측면에서 적잖은 실마리를 제공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과거와 하나도 다를 바 없는 자신들의 입장만을 고수, 어느 쪽 주장이 진실인지 더욱 아리송하게만 됐다』는 여론이 없는 것도 아니다.따라서 기자는 이번 민화위에서 거론된 사태의 쟁점을 항목별로 정리, 가해자측과 피해자측, 그리고 지금까지 나온 각종증언과 자료를 같은 공간 속에서 논의해 봄으로써 진상규명에 한발짝 다가설 수 있도록 나름의 노력을 기울여 보기로 하였다.
사태의 발단배경
지난 1월 22일에 열린 민화위전체회의에서는 「광주사태를 어떻게 볼 것인가」하는 「視角」의 문제가 여러 위원들에 의해 거론되었다. 「광주사태」가 일어난 근본적인 배경을 헤아려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인용해보기로 한다.『광주사태를 보는 시각 세가지를 소개한다. 첫째 5공화국의 집권자들이 자신들의 집권을위해 사태를 조작했다는 「사전조작설」이고 둘째 김대중씨가 민주적 절차로는 정권획득이 어려웠기 때문에 내란을 음모했고 그에 동조한 사람들이 사태를 일으켰다는 「김대중 내란음모설」이고 셋째 계엄군의 시위를 과잉진압해 일어났다는 「과잉진압설」이다…』朴모씨가 언급한 이같은 사태발생배경은 지금까지 피해당사자들을 비롯한 재야민주운동권에서 되풀이해 주장해온 내용으로서, 이를 더 부연하자면 ▲12·12군부군테타 주역들이 「국가권력을 탈취하기 위해 자행한 고의유발설」▲「金大中씨 등 일단의 정치세력에 의한 내란음모설」로 압축해볼 수 있다. 물론 「김대중내란음모설」은 5공화국 집권세력이 사태직후 주장했던 내용임은 다 아는 사실이며 하나의 「정치조작극」으로 막을 내렸다고 볼 수 있다.
이점과 관련, 5·18광주민중혁명 위령탑건립추진위(위원장 洪南淳)는 85년 6월 7일 尹誠敏국방의 국회보고를 반박하는 성명서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일부 정치세력과 불순분자 등의 책동으로 광주사태가 일어났다고 윤국방은 망언을 되풀이했는데, 일부 정치세력 중 그 누가 광주시민을 어떻게 조종하였으며, 또 불순분자들이 책동했다면 그 많은 투옥으로 그처럼 무자비한 수사를 통하여 어느 누가 불순분자라고 처발받은 사람이 있는가. 당시 계엄국당국이 위장한 간첩들을 도청에 침투시켜 광주의 5월혁명을 불순분자의 소행으로 몰려고 했으나, 애국학생들이 이들을 붙잡아 계엄당국에 인계했는데, 이 무슨 망발인가. 정치인으로 광주의 내란을 일으켰다고 사형까지 판결되었던 김대중선생이 지금 생존하여 활동하고 있으니 그분의 진실된 이야기를 국민 앞에 공개하지 못하고 왜 허위적인 내용만 주장하고 있는가. 사태수습을 위하여 어려움을 무릎쓰고 나섰던 성직자, 변호사, 교수 및 민주인사들은 오히려 내란수괴, 내란 주요임무종사, 내란죄 등으로 구속되어 가혹한 고문 끝에 사형·무기·20년 징역형의 중죄를 언도 받았지만, 너무도 엉터리 짓임을 스스로 자인하고 2년도 못되어 모두다 석방하고 복권되어 대부분 본래의 직장으로 돌아가 일하고 있는데 지금도 그분들이 불순분자들이었다고 주장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朴모씨 등이 주장하고 있는「과잉진압설」은 엄밀한 의미에서 앞서의 두가지 시각과 궤를 달리한다고 볼 수 있다. 군부세력에 의한「국가권력 탈취를 위한 고의유발설」과「김대중 내란음모설」이 본질적인 문제에 귀착된다면, 과잉진압설은 본질론이 낳은 부수적 현상론으로서 그 책임의 한도나 깊이가 전자에 비해 월등 축소 될 수 있는 주장이다. 이희성 당시 계엄사령관은 민화위에 제출한 서명증언을 통해『발생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계엄군의 과잉진압이 직접적인 원인의 하나임은 부정할 수 없다고 본다』고 말함으로써 초기의 강경진압 작전이 끝내 사태를 유발시킨 점을 시인 하고 있다.
『학교앞 시위가 발단』
한편 지난 85년 7월에 나온 정부당국의「광주사태의 실상」(발행처―국방부, 85년 7월 30일 발행 총 92쪽)이나, 尹誠敏국방장관의 국회보고(85년 6월 7일 제125회 국회 국방위원회) 내용 그리고 사태직후 80년 5월 31일 계엄사가 발표한「광주사태」등은 일관되게 사태의 발생동기가 잇달은 학생소요에 기인하고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10·26사태 이후에 80년 당시 정부는 사면·복권을 약속하고 계엄일정을 단축하는 등 민주화일정을 추진하고 있었으나 일부 정치세력의 성급한 주장과 학생사주로 인해서 학원요소가 격화되어 전국적으로 치안경비가 곤란한 가운데에 경제적으로도 노사분규가 가열되어…… 위기의식에 사로잡힌 대다수 국민들이 사회 안녕질서 회복을 갈망하는 상황에 이르러 정부에서는 부득이 국가적 비상난국을 슬기롭게 대처하기 위해서 5·17 비상조치를 단행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 조치로 서울 등 대부분의 지역이 일단 평온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광주에서만은 전국 계엄령이 선포된 다음날인 80년 5월 18일 9시 일요일인데도 불구하고 일부 정치세력의 배후조종을 받은 전남대생 약 2백 명이 사전에 계획된 시위를 강행하기 위해서 가방 속에 돌을 넣고 도서관 출입을 요구하다가 계엄군이 이를 저지하자 준비한 돌멩이로 일제히 투석전을 전개 파상적으로 공격을 감행하였으나 질서유지를 위해서 출동한 계엄군이 학생으로부터 돌을 맞는 사태가 발생을 하였고 그후 학생들은 시내로 잠입을 해서 가두시위를 자행하였던 것입니다.』<尹국방 국회국방위 보고>尹국방의 국회보고가 발표되자,「5·18 광주민중혁명희생자 위령탑건립 및 기념사업 범국민운동추진위원회」는 즉각 반박 성명을 발표, 광주사태는『계획된 정권탈취 음모획책과정의 일환』이었음을 거듭 주장했다.『10·26이후 열화같은 민주화열기는 국민적 합의사항이 되어 조속한 민주정부의 수립으로 유신독재의 늪에서 민주화된 조국을 건설하자는 것이었다. 그 우선조건이 명분없는 계엄령의 해제요, 본질적인 언론자유의 획득이었다. 그러나 계엄당국은 아무런 이유를 밝히지 않고 계엄령 해제의 여망도 없이 군부의 유리한 조건을 이용하여 차근차근 정권탈취 음모만을 획책하고 있었던 것이다. 80년 5월 14일부터 16일까지 3일간, 전남대학교와 조선대학교 및 각 대학생들은 광주 도청 앞을 중심으로 정말로 평화적이고 이성적인 시위를 통해 그들의 요구이자 국민의 요구를 외쳤던 것이다……
그리하여 토요일인 5월 17일에는 각 대학에서 정상적인 수업이 이루어진 것은 공지의 사실이었다. 권력을 잡겠다는 욕구 이외에는 달리 변명할 길이 없이, 아무런 명분이나 타당성이 없었는데, 그들은 5월 17일 야밤을 기하여 계엄확대조치라는 엉뚱한 기만행위를 발표하고는 대학을 폐쇄하고 민주인사들을 대거 연행해다가 터무니없는 모함과 모략을 뒤집어 씌우고는 국민을 향해 공갈과 협박만을 서슴지 않고 있었다……17일 야밤의 조치가 18일 아침에 알려졌지만, 일요일인 그날의 대학생들은 집에서 대부분 쉬고 있었다. 전후 사실에 민감하지 못했던 전남대학교 학구파라는 학생들은 일요일인 그날 대학도서관을 이용하려고 공수특전단이 지키는 학교의 정문을 통과하고자 했었다.오직 공부를 위해서 대학에 접근한 그들에게 당시에 어떠한 만행을 저질렀는가. 공부하러 온 학생들을 닥치는대로 붙잡아 옷을 벗기고, 총대로 두들겨 패면서 잔인무도한 학살만행을 저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밤, 학교에 있으며 공부하던 도서관의 대학생들은 얼마나 비참하고 가혹한 만행을 당했었던가. 금수에 비길 만행에 청년학도들이 어떻게 더 이상 참고 있었겠는가.
그당시 그러한 무자비한 만행을 당했던 증인이 수십 명 엄연히 생존하며 그 일을 증언하고 있으니 어떻게 그 사실을 속일 수 있었겠는가.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18일 오전 전남대학교 정문에서부터 일어나게 된 학생시위가 바로 다름아닌 광주항쟁의 구체적인 발단이었다.』<성명서―「6·7국방부 발표는 진상이 아니라 날조된 거짓이다」>
『정권탈취 위해 고의 유발한 것』
5·18희생자 유관단체들의 주장과 궤를 같이 하는 주장들이 지난해말 대통령 선거를 전후, 金大中후보의 성명과 鄭雄장군(당시 光州인근 00사단장)의 증언에서도 함께 터져나왔다. 이들의 주장은 한결같이『광주사태는 정권탈취를 위해 사전에 음모돼 고의로 유발된 것』이라는 주장을 담고 있다. 즉「광주의거 진상」(87.12.14. 金大中 후보 기자회견발표)이라는 성명서에서 金씨는『광주사태는 사전에 모의됐다』면서『광주의거는 본인이 입수한 자료에 의하면 분명히 군사독재자들이 그들의 불법적인 정권탈취를 합리화하기 위하여 유발시킨 사전계획된 음모였음이 확인되었으며 선량한 광주시민들은 철저하게 그들의 희생물로 이용당했다』고 주장했다. 이 자료는 특히「사전계획된 정권탈취 음모」의 증거로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밝히고 있다.『12·12사건으로 군부의 실권을 장악한 전두환·노태우·정호용은 이희성·황영시 등을 하수인으로 하여 무력으로 정권을 찬탈하기 위해 1980년 5월 14일에 육군본부에서 5·17 비상계엄령 확대선포와 김대중의 체포를 모의하고 이에 따라 필연히 유발될 것으로 예상되는 광주시민들의 항의 데모를 부마사태 때와 같이 가혹하게 진압하기로 결의하였다. 이 계획에 따르는 군사정권은 2개 대대의 공수특전부대를 사전에 투입하여 5월18일에 평화적 데모를 하고 있던 광주학생들과 시민들을 곤봉으로 마구 때리고 대검과 단검으로 마구 찌르는 무자비하고 참혹한 진압행위를 자행하여 수많은 사상자를 속출시켰다』작년 11월29일 여의도에서 있은 김대중후보의 대통령선거유세에 찬조연사로 나온 정웅장군도 이같은「광주살륙작전」이 사전에 예비음모됐다고 폭로했다. 정장군은 80년의 광주사태는 12·12반란을 주도했던 군세력과 그 추종자들이 사전계획에 의해 고의적으로 유발시킨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그 이유로서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지적했다.
첫째, 당시의 계엄당국이 5월15일까지의 데모를 일부러 방치하고 있었던 사실.
둘째, 5월16일, 17일에는 최규하 대통령의 귀국을 기다리며 데모도 않고 조용했는데 갑작스레 17일 밤 김대중 씨 등을 체포한 사실.
셋째, 이같은 불법적인 처사로 데모를 다시 유발시키고 이를 빙자해 강경유혈 진압방식을 지시한 사실.
넷째, 단순한 군사독재에 반대하는 민주적인 데모에 5천 명 이상의 특수부대원을 투입하는 등 필요이상의 병력을 데모 이전부터 광주에 배치한 사실.
「광주사태」와 더불어 잉태된 國保委
이 점에 관해 정장군은 최근 기자와 만나 보다 상세히 그 배경을 풀어나갔다. 정씨의 주장은 12·12주역과 5·18주역들에 의한 國保委구성에로까지 이어졌다.『이 당시 군부에서는 사단장인 본인에게는 5월16일까지 광주시내에 있는 10개 대학교와 2개 신문사, 2개의 방송국을 점거하라는 명령과 공수부대 약 1천명이 5월17일부로 작전 통제된다는 명령이 있어 본인은 사단병력 5백명으로 필요시설 및 기관을 점거시켰으며 전남대학과 조선대학에는 공수여단병력 각각 5백명씩을 배치하였습니다.여기에서 한가지 부언하고 싶은 것은 12·12사태 주도자들은 김대중선생을 체포함으로써 광주학생으로 하여금 데모를 필연적으로 일으키겠금 유도해서「광주사태」를 유발시킨 후, 사회불안을 이유로 국민으로 하여금 군부의 정치개입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 들이게 하고 여태껏 얼굴에 쓰고 있던 베일을 벗고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하나의 방법으로, 저 악명높은 國保委의 조직을 자연스럽게 인식케하는 흉계가 이 속에 숨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날짜상으로 보아도 5월27일에「광주사태」가 끝난 지 불과 4일 후인 5월31일 國保委라는 그 거대한 권력장악 기구가 출현한 것으로 보아 능히 당시의 실상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고, 데모도 일어나기 전에 공수부대병력을 광주에 미리 배치했던 것부터 우리는 그 흉계를 여실히 찾아 볼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민화위에 회견차 나온 田桂良 5·18유족회장도 같은 맥락의 발언을 한 바 있다.『▲李忠煥위원=정부 고위층이 光州사태를 일으키는데 결정적인 관련이 있다고 단정할 만한 구체적인 증거가 있는가.▲ 田씨=12·12쿠데타이후 80년「서울의 봄」을 불렀다. 그 과정에서 가장 실권자가 全斗煥대통령이다. 盧당선자는 명령을 따랐건, 안따랐건 뜻을 같이했다.▲ 李위원=두사람이 직접 개입했다는 증거가 있는가.▲ 田씨=5·18사태가 서울·부산·대구가 아니고 광주에서 발생한 이유를 보면 알 수 있다. 이는 사전에 군부집단에 의해 개입된 것으로 우발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고 내란음모도 아니다. 군부세력이 사전개입에 의해 광주지역을 선택했다. 광주사태를 일의킬 수 있는 지역적 여건에다 김대중씨를 매개체로 한 것이다』
『광주사태는 부마사태의 再版』
위에 예시한 증언들 중 우리가 한번 더 주목해야 될 대목은『5·17비상계엄령 확대선포와 김대중의 체포를 모의하고, 이에 따라 필연히 유발될 것으로 예상되는 광주시민들의 항의데모를 「釜馬사태」때와 똑같이 가혹하게 진압하기로 결의하였다』는 내용이다.「부마사태」는 여러 자료와 증언을 종합해보면 부산이 낳은 정치인 金泳三에 대한 박정권의 정치적 핍박이 불러일으킨 사태임이 틀림없다. 당시 박정권은『위수령의 필요조차도 없는 상황』에서 비상계엄과 함께 공수특전부대와 해병대를 투입하는 등 초강경진압책으로「부마민중항쟁」을 성공적(?)으로 밀어붙일 수 있었던 것이다. 趙甲濟기자의 증언을 들어 보자.『정부가 계엄령 선포 직후 전투력이 가장 뛰어난 공수단과 해병대를 긴급 투입 한 것은 부산사태를 철저하게 진압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과잉대응이었다. 파리를 잡는 데 도끼를 휘두른 꼴이었다. 현지의 군 지휘관은 위수령의 필요성조차 느끼지 않았고, 경찰 병력만으로도 사태 진압이 가능하다고 보았는데 비상계엄령에다가 특수부대투입이란 고단위의 진통제가 투여된 것이었다.
특수부대는 적과의 싸움에서도 가장 위험성이 높은 특수한 전투 목적에 쓰여야 할 부대이고 훈련도 바로 그런 식으로 받아왔다. 이런 부대가 비무장의 민간인을 상대로 하는 임무를 받은 것이 애당초 잘못된 것이었다. 부대의 성격상 과격한 진압은 예정된 것이었고, 이로 인한 민간과 군대 사이의 감정은 대한민국 존립의 절대명제인 국가안보를 위해서도 나쁜 것이었다.공수부대와 시위대의 충돌에서 비롯된 광주사태의 원인은 부마사태 때부터 배태됐다고 볼 수 있다. 광주사태 때 정부는 부마사태 때와 같은 방법으로 진압하기 위해 공수부대를 초장에 투입했다. 부산에서와 똑같은 구타가 대낮에 벌어졌다. 이것을 보다 못한 시민들이 동물적 분노심에서 들고 일어난 것이 광주사태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 국민을 떠난 군대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두 사태는 뼈저린 교훈으로소 보여주고 있다』(조갑제 著『有故』에서)조갑제기자는「광주사태는 부마사태의 再版」이라는 인식을 독자들에게 심어주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부산지역항쟁이 조기강경전략으로 3일만에 진압될 수 있었지만, 광주쪽의 사정은 전혀 달랐다는 점이다. 바로 여기에 부산과 광주, 더 나아가 경상도와 전라도의 역사적 뿌리의 相異가 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공수특전부대의 투입으로 야기된「부마사태」의 경험과 함께, 鄭雄장군이 증언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사실은 광주의 강경진압작전이 우발적 충동적으로 이뤄진「과정상의 실수」가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한번 더 알수 있다.『5월21일, 12·12사태의 주역중 한사람이었던 朴俊炳소장이 지휘하는 20사단 병력이 광주에 증파되었고, 5월22일에는 朴忠勳국무총리서리가 수행장관과 함께 광주에 내려와서 현지 작전부대의 각 지휘관들과 간담회를 가졌는데, 그 자리에서 놀랍게도 이런 말들이 오갔다. ―광주를 이번 기회에 한번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데모군중의 버릇을 고쳐주기 위해 몽땅 쓸어버려야 한다. 나는 그 자리서 강력히 반대하였고 다행히 朴총리께서도 본인의 말에 찬동해줘서 아슬아슬한 위기를 넘기게 됐다』이상과 같은 증언과 자료, 그리고 선례가 엄존하는 역사적 경험에 따를 경우 5·18 피해당사자측이나 재야민주운동권, 그리고 김대중씨 등이 주장하고 있는「국가권력찬탈을 위한 고의 유발설」에도 수긍이 가는 면이 있다 하겠다. 다시 말하면『전라도민의 열화와도 같은 기대를 받고 있는 김대중씨를 잡아들일 경우, 필연코 광주시민들이 반발할 것이며, 이에 대해 사전포석으로서 비상계엄확대조치를 발하고 동시에, 79년 10월의 부마사태를 경험삼아 조기강경진압책으로 초기진압을 꾀했지 않았느냐』는 풀이인 것이다.이같은 풀이에 따를 경우, 일부 관련당사자들이 사태의 배경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강경진압설」은 다만 본질적 배경에 부수되는 하나의 현상론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요는 어떤 의도에서 누구(主體)에 의해 그같은 비인간적「살륙작전」이 이뤄졌느냐에 대해 광주시민들은 보다 더 깊은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악성「流言蜚語」의 사실여부
지난 2월8일 民和委에 참고인으로 나온 具龍相의원(民正·당시 광주시장)은『5월18일 이후 계엄군의 과격행동에 놀란 시민들의 전화제보가 시장실로 무수히 걸려왔다』면서 당시의 메모지를 들춰가면서 급박했던 상황을 설명했다.具의원에 따르면『무장군인들이 학생들을 마구 구타하면서 연행해가고 있는데 이런 식으로 나가면 광주시민이 다 들고 일어날 것』이라고 많은 시민들이 항의하기도 했다면서 당시를 회고했다. 이어서 날짜별로 일지형식을 빌어 증언을 마무리한 구용상의원은 끝으로 언급한 개인의 소견중 첫째 항목으로,『조기진압과정에서 발생한 과잉진압행위는 시민들을 분노케 했고 학생들을 자극하는 요인이 다분히 있었다. 여기에다 구조적인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악성 유언비어까지 번져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고 본다……』면서 악성유언비어가 사태의 큰 원인인양 언급했다.기자는 여기서『악성 유언비어가 사태를 악화시켰다』는 구의원의 발언에 주목하고자 한다. 어느 면에서「부마사태」에서와 같이 조기강경진압이 성공할 수 없었던 요인중의 하나가 바로 이같은 지역적 특수성을 배경으로 한 소문들이 광주시민들에게 同一體의식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애초의 정부당국의 작전의도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나 여겨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당시 사태를 악화시켰다고 평가되는 유언비어를 망라해보고 그같은 소문이 나온 배경, 그리고 그 진위를 분석해보기로 한다. 먼저 국방부발표「광주사태의 실상」을 보자.『전날 오후에 이어 5월 19일에도 아침부터 나돌기 시작한 유언비어는 급속도로 번져갔다.「계엄군이 임산부의 배를 갈라 태아를 끄집어 냈다」「경상도 계엄군이 광주, 전라도 사람 씨를 말리러 왔다」「대학생이 많이 죽어가고 있다」「계엄군에게 흥분제의 약을 복용시켰다」는 등 내재적인 지역감정과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유언비어가 난무하였고 이들 유언비어는 시민들을 격분하게 만들었으며, 이에 흥분된 과격분자들은 이성을 잃고 과격한 활동을 하기데 이르렀다』
국방부발표의「유언비어」
국방부 발표자료는 이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고딕체로 강조하고 있다.『이들의 유언비어는 그 진원을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러나 당시 유언비어의 유포과정을 살펴보면 다소의 시간적 차이가 있으나 거의 동시 다발적으로 전파되고 있었다. 처음「계엄군이 여대생 국부를 찌르고 유방을 대검으로 도려냈다」는 유언비어였다. 이 유언비어에 가장 민감하게 자극되어 흥분한 계층은 주로 젊은 남·녀 학생들이었으며, 이들은 이러한 유언비어를 듣고 사실인가를 보기 위해 삽시간에 수백명이 금남로로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다음으로「계엄군이 임산부 배를 갈라 태아를 끄집어 내어 길거리에 뿌렸다」는 유언비어였다. 이에 가장 충격을 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20∼30대의 결혼부부와 중년층이었다. 다음은「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사람 씨를 말리러 왔다」「계엄군에게 흥분제 약을 복용시켰다」는 유언비어였다.이는 당시 소요 진압중인 계엄군의 선무활동시 소요군중의 귀가를 종용하는 마이크에서 경상도 특유의 음성이 방송되자 즉시 유포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유언비어의 유포과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10대들의 말초신경 자극에서부터 중년층의 격분, 그리고 지역 감정을 자극한 대(對)계엄군 투쟁의식 유발 등으로 연결되는 계획적인 일면을 찾아 볼 수 있다.
광주사태후 사망자들에 대한 검시 결과에 의하면 18일에 사망자는 없었으며 더구나 총 사망자 1백91명 중에는 칼에 찔려 사망한 여자는 단 한명도 없었다. 더구나 대한민국의 군부대 내에 어느 특정지역 출신자들로만 조직된 부대는 존재하지도 않고 또한 존재할 수도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상의 사실들을 종합해 보면 당시 유포되었던 유언비어는 학원소요를 배후 조종한 자들 중 군에 대한 일반적 상식도 없는(군미필자?) 불순분자가 의도적이고 계획적으로 유포한 것으로 보여진다』이와 함께 최근 출간된 千金成씨의 저서『10·26 12·12 光州事態』(후편)는 이와 관련된 주목할만한 내용을 담고 있다.작가 千씨는 이같은 내용의 전거가 어디인지를 분명히 밝히고 있지 않으나, 한 대목에서「당시의 군작전보고서」에 의존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다음 날인 18일, 광주 일원의 사태가 계엄령의 확대조치에도 불구하고 격렬해지고 있다는, 제7여단장 신우식 준장으로부터 현지보고를 받은 특전사령관 鄭鎬溶소장은 제3공수특전여단 여단장 최세창준장에게 광주 지역에 계엄군으로 출동할는지도 모르는 형편이니 만반의 준비를 갖추도록 이르고 자신은 C-54특별기를 탔다…… 정호용 사령관은 광주에 도착하여 이미 와 있던 제7여단장 신 준장으로부터 지금까지 광주 일원의 사태에 관한 보고를 받은 다음 곧장 육군전투병과 교육사령관 尹興禎장군과 부사령관 金基錫장군을 만났다…… 戰敎司정보참모가 세장군앞에 나타났다.
정보참모는 갖고 있던 노트를 펼치며 읽기 시작했다.「경상도 군인이 전라도에 와서 여자고 남자고 닥치는데로 밟아 죽이고 있기 때문에 사상자가 많이 나……」정보참모는 계속해서 읽어 내려갔다.「…18일에는 40명이 죽었고, 금남로는 피바다가 되었다는데 군인들이 여학생들의 브래지어까지 찢어버린다. 공수부대애들이 대검으로 아들 딸을 난자해버리고 브래지어와 팬티만 차게 해서 장난질을 한다. 공수부대가 몽둥이로 머리를 무차별 난타, 눈알이 빠지고 머리가 깨졌다. 한신대 학생 한 명이 그날 다쳐서 죽었다. 학생들 50여 명이 맞아서 피를 흘리며 끌려 다니고 있다. 계엄군이 출동하여 APC로 사람을 깔아 죽였다. 계엄군이 점거하고 있는 가톨릭 센터 건물 안에는 시체 여섯 구가 있다. 데모 군중이 휴가병을 때리자 공수부대 요원이 군중을 대검으로 찔러 죽였다. 계엄군이 달아나는 시민들에게 대검을 던져 복부에 박혀 중상을 입었다. 진압군인들은 모두 경상도 출신들만 골라 보냈다…」』
『결코 유언비어만은 아니다!』
지난 2월 8일 民和委에 참고인으로 나온 全玉珠씨(본명 全春心)는 『계엄군이 여대생의 유방을 대검으로 도려냈다』는 유언비어와 관련, 자신이 직접『계엄군이 젊은 여자들의 가슴을 칼로 내려치고 찌르는 것을 본만큼 결코 유언비어만은 아니다』고 말했다.또 한 관련자에 따르면『빌당이나 옥상 같은 높은 곳에서 볼 경우 이같은 계엄군의 만행은 곧 여성의 가슴을 잘라내는 것으로 충분히 오인될 소지가 있었다』고 당시의 정황을 설명하기도 했다.한 자료는 이와 관련된 내용을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광주역 분수대에서 여학생을 발가벗겨 놓고 유방을 칼로 도려내어 죽였다는 소문이 퍼짐(후에 계엄분소의 부사령관도 이런 시체가 있었다고 시인했으나, 대검으로는 할 수 없는 행위이며 불순분자의 면도칼 소행이라고 잡아뗐음)』『두 명의 공수병에게 만삭의 여인 끌려옴.「이년아, 주머니에 들어 있는 게 뭐냐? 뭔지 모르가? 머스마가, 기집아가?」다그치자 여인 모른다고 함.「그럼 내가 알려 주지」옷을 쭉 찢고는 배를 대검으로 찌름. 아랫배를 가르더니 태아를 끄집어내어 쓰러진 여인에게 집어던짐(「찢어진 기폭」의 목격자 증언)』『광주일고 부근, 여대생인 듯한 세 명의 여자들, 공수대원이 브래지어·팬티까지 찢어내고도 발길로 차며 꺼지라고 궁둥이를 걷어 참. 여자들은 가슴을 쓸어안고 길에 주저앉음. 욕설을 퍼붓던 공수대원,「살기가 싫은가 봐. 할 수없지」하며 등에 대검을 꽂고 쓰러진 여자의 가슴을 X자로 긋더니 트럭 위로 던져 버림』「<NCC인권위 간행,『광주민중항쟁자료집 및 상반기일지」>
『오전 11시에는 광주세무서 지하실에 시체가 있다는 시민들의 신고를 받고 시민군 4명이 현장에 가서 직접 확인했는데, 시체는 유방과 음부가 도려내어져 있었고 얼굴이 대검으로 난자당한 여고생이었다. 교복에서 나온 학생증으로 전남여교 2년 모양이라는 것이 알려져, 주소에 적힌 대로 시체를 싣고 가서 부모에게 확인시키자 부모는 그 자리에서 실신해버렸다. 화염방사기로 그을린 시체 여러구가 발견되기도 하였다』『여자라도 몇 명 붙들려 오면 여럿이서 겉옷은 물론 속옷까지 북북 찢어발기고는 아랫배나 유방을 구둣발로 차고 짓뭉개고 또는 머리카락을 휘어잡아 머리를 담벽에다 쿵쿵 소리가 나도록 짓찍었다. 손에 피해자의 피가 묻으면 웃으며 그 몸에다 쓱 닦는 식이었다. 그런식으로 살륙을 즐기다가 군용 차량이 오면 걸레처럼 희생자들을 던져 버렸다』『광주일고 부근에서는 길가던 여학생을 아무 이유 없이 붙잡아 머리카락을 잡아 끌어내려 구둣발로 올려차고 상의와 브래지어를 찢어 버리고는 여러 시민들이 보는 데서,「이 씨팔년이 데모를 해? 어디 죽어 봐라」하면서 계속 피투성이가 되어 실신할 때까지 주먹과 발길질로 난타했다』이상은 전남사회운동협의회가 펴낸『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황석영기록)에 나오는 내용들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계엄군이『임산부 배를 갈라 태아를 끄집어내어 길거리에 뿌렸다』는 유언비어는 전혀 뿌리가 없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다만 전라도민과 광주시민들중 대다수를 흥분시킨 것으로 추측되는『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사람의 씨를 말리러 왔다』는 유언비어는 몇몇 경솔한 하급지휘관들의 특유의 언동에서 비롯되었다는 자료가 나타나고 있어 주목된다. 이같은 점은 국방부 자료에서도 언급된 바 있다.『공용터미널 부근에서는 지나가는 시내 버스를 모두 정차시켜 놓고 차안을 검문하면서 학생으로 보이는 사람들을 불문곡직하고 끌어내렸다. 학생 아닌 청년들이 약간 반항하자 공수대원 7∼8명이 우르르 달려들어 돌려가면서 난타한후에「광주놈들은 모조리 죽여 버려야한다」라고 고함을 질러댔다. 안내양이 약간 반항의 기색을 보이자「네 년은 뭐냐」면서 곤봉으로 후려갈겼고 안내양은 차 아래로 실신하여 굴러떨어졌다. 만약 시내버스를 세웠는데 몇 미터 앞으로 더 나가서 정차하면 곧장 버스 위로 올라와 운전석에 앉은 운전기사의 뒷통수를 곤봉으로 타격했다』
하급지휘관의 무책임한 언동
이와 함께 평민당측이 87년 12월14일에 발표한「광주의거의 진상」에서도『군중들 앞에서 다음과 같은 계엄군의 언동이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요인이 됐다』고 자료를 열거하고 있다.이를테면 하사관급 지휘자가『전라도놈들 몰살시켜버리겠다』든가, 중위계급을 단 지휘관이 데모학생 7명을 무릎 꿇려놓고선『전라도 놈들 씨를 말리겠다』고 특유의 사투리로 폭언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이와 관련, 광주사태를 직접 겪은 다음과 같은 증언은 그 어떤 설명보다도 큰 설득력을 갖추고 있다고 보겠다.『여기에서「경상도 군인만 골라서 전라도 사람 씨를 말리러 왔다」는 유언비어를 그날 18일 오후 18:00시경에 시위대가 처음으로 말을 하더군요. 전군조직체에 아직 경상도로만 조직된 군은 없으며 또한 사태 당시에도 전국 특히 전남, 경남 병력이 많은 부대원이었답니다. 절대로 경상도로만 골라서 조직 되어 있지 않답니다. K형도 잘 알다시피 저 역시 고향이 전남이고 전남 병력이 많았습니다.
그날(18일) 오후 금남로에서 시위대를 진압하면서 경상도 소리로 떠들며 소리 지르는 병사들이 있어서 경상도 군인으로만 착각한 줄 알았을 거라고 저는 지금도 생각하고 있답니다. 고되고 고된 하루였고 지금 생각하면 잔인한 하루였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철없는 저희에게는 자랑스럽게 생각이 되었습니다. 저희끼리 모이면 나는 어디서 어떻게 때렸다고 또는 나는 어디서 어떻게 용감하게 싸웠다고 자랑스럽게 떠드는 것이었습니다. K형, 저도 예외는 아니었읍니다…』<『작전명령-화려한 휴가』39쪽>「광주사태」당시 광범위하게 퍼진 유언비어중 또 한가지는『계엄군이 독한 술에 흥분제를 타마셨다』는 내용이었다. 이같은 유언비어에 대해「광주사태」당시 계엄군의 일원이었던 한 하사관은 기자와 만나 다음과 같이 그 실상을 밝힌 바 있다.『아침식사도 거른 채 눈은 빨갛게 충혈되고 피곤이 온몸을 엄습하고 잠시도 서있지 못하게 피곤하였읍니다.「술에 다 환각제를 타서 먹였다. 눈이 빨갛게 충혈되었다」라는 유언비어가 그날부터 떠돌았습니다. 술에다 환각제를 타서 먹인 사실은 전혀 없으며 눈이 충혈된 이유는 이 글에서도 보아 알 듯이 며칠씩 잠을 못 자서 충혈된 것입니다.』
그러나 NCC인권위刊,「광주민중항쟁일지」는 이같은 소문이 전혀 허무맹랑한 것이 아님을 밝히고 있기도 해 여전히 의문점으로 남아 있다.『특히 제7공특전단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사병처럼 육성, 부마항쟁 때도 진압군으로 투입되었던 경력이 있는 부대임. 이들은「화려한 휴가」라는 이름의 1차 작전에서부터「충성」으로 끝나는 5차 작전까지의 임무를 띠고 광주에 투입됨. 22일 시민군에 의해 포로가 된 공수대원의 진술에 의하면 이들은 출동하기 전 독한 술에 환각제를 타 마신 상태였으며 수통에도 배갈을 담고 있었다 함』그리고 기자가 만난 광주의 한 언론인은 자신이 시내에서 직접『막걸리통들이 계엄군들 주변에 어지럽게 흩어진 것을 봤는데, 아마도 목이 마른데다 요기의 대용으로 했었지 않았나 하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광주시민들이 이같은 생각을 갖게 된 것은『도저히 인간으로선 상상할 수 없는 만행인지라 그렇게라도 생각해야 답답한 마음이 한가닥 풀릴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풀이해야 할 터였다. 따라서 이 유언비어 속에는「제정신이 아니고서야 어찌 백주의 대낮에 저같은 비인간적 만행을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하는 통한이 담겨 있다고 보겠다.
사실로 드러난「유언비어」도
한편 지난 2월 8일 민화위 증언에서 李光魯씨(당시 국보위 사태조사단장·현 디자인포장센터이사장)는,『계엄군들이 택시운전기사를 칼로 찔러 살해했다는 유언비어가 나돌아 광주사태의 기폭제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되는 이른바「차량행렬시위」가 벌어졌다』고 말했는데, 李씨보다 먼저 증언대에 나온 全玉珠씨는 공용터미날부근에서 자신이 직접『택시운전기사가 부상학생을 태우려 하자 계엄군이 달겨들어 택시운전기사의 옆구리를 대검으로 그대로 찔러버려 현장에서 죽는 걸 봤다』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밝혔다. 全씨의 증언은 다음과 같은 자료와 맞아떨어지는 내용이다.『공용터미널 로터리 부근에서 머리와 팔이 으깨어진 부상자를 병원으로 이송하던 택시운전사에게 공수대원이 내놓으라 명령. 기사는「당신이 보다시피 지금 죽어가는 사람을 병원으로 운반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하자 그 공수대원은 차의 유리창을 부수고 운전기사를 끌어내려 대검으로 배를 찔러 살해. 이런 식으로 최소한 3명의 기사가 살해됨. 이는 20일 또 하나의 기폭제였던 차량시위의 직접적 계기가 됨』<NCC인권위刊-『1980년대 민주화운동』
-『광주민중항쟁 자료집 및 상반기일지』>『이보다 앞서 20일 오후 2시가 넘어서 광주역 부근에는 10여 대의 택시가 모여 있었다.「우리가 영업하다가 손님을 실어 준 것이 무슨 죄가 되길래, 죄없는 운전기사들을 공수부대가 죽이느냐」「우리를 이런 식으로 곤봉과 대검으로 살해한다면 더 이상의 영업을 집어치우고 우리도 싸워야만 한다」며 서로 흥분된 의견들이 오고가는 사이에 택시는 20여 대로 불어났고, 기사들은 시내 곳곳을 운행하면서 공수부대의 살륙 만행을 누구보다도 많이 목격할 수 있었고 또한 피해도 많이 입었던 터였다.죽어가는 환자를 병원으로 싣고 가는 차를 정지시키고, 폭도를 빼돌린다는 이유로 택시 기사를 곤봉으로 두들겨패고 대검으로 찔러 죽이는 판국에 어찌 가만히 당하고 있을 수가 있겠는가. 그들은 무등경기장에 광주 시내 택시 기사들이 전부 모여서 들고 일어나자고 결정하고는 서로 연락하기 위하여 시내 전역으로 흩어졌다.무등경기장 앞에는 택시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는데 그 중에는 머리에 붕대를 감은 기사들도 보였다. 오후 6시까지 모인 택시는 2백대가 넘었다. 운전기사들은 차를 질서정연하게 모아 놓고 지금까지 목격했던 잔학상과 동료 기사들의 부상 및 죽음을 알리고 공수부대의 만행을 성토하면서「군 저지선의 돌파에 앞장서자」고 결의했다. 그들은 수건으로 머리를 질끈 동여매고 각자 차에 올라타서 고속도로로 통하는 길을 타고 서서히 금남로를 향하여 전진했다.
7시가 다 되어, 갑자가 유동 쪽에서부터 수많은 차량이 일제히 헤드라이트를 켜고 경적을 울리면서 돌진해 오고 있었다. 맨 선두에는 짐을 가득 실은 대한통운 소속 12톤 대형트럭과 고속버스, 시외버스 11대가 잇달았고, 그 뒤로는 2백여 대의 영업용 택시가 금남로를 가득 메운 채 뒤를 따랐다. 트럭 위에는 20여 명의 청년들이 올라서서 태극기를 흔들었으며 버스 속에는 태극기를 든 청년, 각목을 든 아가씨들도 타고 있었다. 차량 행렬은 어머어머한 분노의 파도처럼 밀려왔다』<「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發砲시점 및 기타
발포명령의 시점에 관해서도 쌍방의 주장이 분분하다. 발포시점과 관련, 민화위에 서면으로 제출한 이희성 전 계엄사령관의 증언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21일 쌍방피해를 줄이기 위해 시내 계엄군을 외곽으로 배치하고 하오 7시30분 방송을 통해 비극적 사태를 슬기롭게 극복해 줄 것을 모든 국민에게 당부하는 동시에 부득이한 경우 자위권을 행사한다는 경고도 했다.이 자위권 행사의 법적 근거는 위수령 제15조 2항, 군인복무규율 제1백 23조, 경찰관 직무집행법 제7조이며 이들 조항에는 군인 및 경찰관이 불가피하게 무기를 사용할 경우를 규정하고 있다. 이날 자위권 발동지시가 없었다해도 필요할 경우 당연히 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사태초기에 적절히 자위권을 행사했다면 병기 및 탄약을 탈취당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22일 계엄훈련 11호로 자위권 발동지시를 하달하여 예하부대의 이해를 촉구한 바 있다』李씨의 증언내용으로만 보면 정확한 발포명령시점을 종잡을 수가 없다. 그러나 문면상「22일에 자위권의 발동지시를 하달」하였다고 돼 있으나, 또 한편으로는 21일 하오 7시 30분「부득이 한 경우 자위권을 행사한다는 경고도 했다」고 말함으로써 바로 그 시각의 발포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군당국의 발포시점이 언제인가 하는 점은「市民軍」이 총기류로 무장한 시점과 관련해서 비상한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쌍방이 모두 상대측이 먼저 발포를 시작함으로써 자신들의 발포행위가 자위권발동의 정당방위임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국방부 발간『광주사태의 실상』은 다음과 같이 자위권발동시점(22일 12시)을 밝히고 있는데, 이는 이희성 전 계엄사령관의 증언과도 다르고 千씨가 보고 썼다는 군작전보고서와도 그 시점이 다르다. 다음은 발포시점과 관련된 국방부의『광주사태의 실상』중 일부분이다.『전날 저녁 시내에서 완전 철수한 계엄군은 소요의 외지 확산을 저지하기 위하여 시가지 외곽에서 봉쇄작전을 펴기 시작했다. 그리고 22일 12시를 기해 전남지역의 계엄군들에게 자위권이 발동 되었다.이에 앞서 오전 9시경「폭력으로 치안을 어지럽히는 행위에 대해 부득이 자위를 위한 필요한 조치를 취할 것이다」라는 내용의 계엄사 경고문이 시내 전역에 공중 살포되었다. 계엄당국은 자위권 발동을 함에 있어「사전 경고를 발하고 3회 이상 정지명령을 내릴 것이며, 가능한 한 위협발사로 해산시키되 정황이 급박할 때도 생명에 지장이 없는 신체부위를 사격할 것과 선량한 시민에게 피해가 없도록 유의할 것」을 강조했다.계엄사령관의 자위권발동 경고에도 불구하고 폭도들은 무장 난동을 계속하였다. 처음 학생들이 주동이 되었던 시위는 점차 불량배들과 특정 정치 목적을 가진 선동분자들 위주로 변해 갔으며…』
20일 밤 9시경 최초발포(?)
그러나 광주시민들이 주장하는 발포시점은 이와는 판이하다.『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및『1980년대 민주화운동-광주민중항쟁자료집 및 상반기 일지』,『작전명령-화려한 휴가』등은 이보다 훨씬 전에 계엄군이 시위군중에게 총격을 개시한 것으로 증언하고 있다.『19일 오후 5시경-아세아극장 앞에서 또 시위대와 맞닥뜨려서 또 한 차례의 전투가 벌어져 시위대를 물리치고 다시 계림동 쪽으로 진격을 하니 통신병이 다급한 무전을 받는 것입니다. 광주고교 앞에서 A.P.C.장갑차 무전으로 병력배치 및 시위진압 지시를 하던 작전장교가 A.P.C.장갑차와 함께 고립 포위되어 있으니 빨리 오라는 무전이었습니다. 있는 힘을 다해서 저희 팀(9명)이 달려가니 M16소총 소리가 자동으로 20여발 쏘는 소리가 연달아 나는 것입니다.
광주 투입 후의 첫 총소리였읍니다.(이 총성은 작전장교 모대위가 A.P.C.장갑차로 광주고교 쪽으로 해서 조선대에 복귀하다가 시위대에 포위돼서 앞유리를 돌로 집중 난타당하자 겁에 질린 장갑차 운전병이 속도를 가하다 장갑차가 인도로 뛰어들어 가로수 한 그루를 받으면서 장갑차 디퍼런셜 기어가 인도 난간에 부딪쳐 부러져 꼼짝 못하자 시위대가 집단으로 장갑차 밑에 불을 지르고 장갑차위의 해치를 열고 화염병을 넣어, 안에 있던 모포 등으로 불을 겨우 껐으나 연기로 질식될 위기에 처하자 작전장교가 밖으로 몸을 내어서 M16공포를 쏘는 과정에서 고교생 1명이 목에 맞아서 최초의「발포」사망).저희가 도착하니 한 집앞 골목에서 울부짖음이 들리고 장갑차 안에는 경계용 실탄 2십몇 박스와 최루탄 등이 어지럽게 널려 있고 사병 2∼3명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있더군요. 차량이 와서 장갑차를 끌고 가고 저희는 광주고교앞 로타리에 진을 치고 있자 다행히 그때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군요. 비를 피할 곳도 없고 배는 고프고 춥고 세상 모든 사람은 적개심에 불타는 눈으로 저희를 보는 것 같고, K형, 저희의 모습을 상상하여 보십시요.』<『작전명령-화려한 휴가』41쪽>
『5월 20일 오후 9시경, 신역 전투 시작, 무등경기장 부근 고속도로 진입로 입구에 각종 차량 사오십 대 집결, 그대로 시가행진 돌입. 임동성당을 거쳐 광주역 앞 KBS못미쳐 중앙고속 터미널 앞에 도착, 행진 도중 차량은 엄청나게 불어남. 차량이 계속 몰리자 갑자기 총성이 올리고 계엄군의 저항도 필사적이 됨.오후 10시 30분, 공용터미널에서 광주역으로 향하는 모퉁이의 주유소에서 한 청년이 휘발유가 가득 든 드럼통 2개를 트럭에 싣고 불을 붙여 광주역을 향해 질주, 청년은 계엄군 전방 20m쯤에서 밖으로 뛰어내리고 트럭은 불덩이가 된채 돌진하여 바리케이드를 부수고 역전앞 분수대를 들이받아 폭발, 불기둥 치솟음. 이 무렵 계엄군은 공포로 위협만하던 것을 그치고 M16소총을 발사하기 시작, 투석하던 전위의 청년들 픽픽 쓰러짐. 도청 앞은 치열한 심야의 공방전 계속. 계엄군, 공포를 쏘아 대고 공중으로는 위협사격을 하는 기관총의 예광탄이 날음.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된 계엄군은 M16자동소총 발사 시작. 공수대는 군중이 흩어지면 일단 사격을 멈추었다가 모이면 또 쏘아 댐』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공식 발포명령이 떨어지기 전인 20일 밤늦게 몇 차례의 총격이 시민들에게 가해진 이후, 일단의 시민들은 21일 새벽 1시경 도청뒤에 있는 광주세무서로 몰려가 최초로 무기고를 깨부수게 된다. 이들은 여기서 실탄없는 카빈 몇점을 손에 쥐었다.「무기탈취」가 개시된 순간이다.
『살아남기 위해 武裝을……』
「발포명령」이전의 총격상황을 보면 다음과 같다.『제가 듣기로는 그날 밤, 발포명령은 21일 8시부로 내렸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발포는 그 앞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날 밤도 산속에서 그냥 지내는데 밤새 총소리는 잠시도 끊이지 않았습니다. 시위대가 우리의 지역에 침투, 경계지역대와 총격전이 벌어지는 소리였습니다.』<『작전명령-화려한 휴가』> -21일 새벽 4시경, 공수대의 발포에도 불구하고 계속 밀려드는 시위대의 필사적인 공격으로 쌍방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며, 계엄군은 끝내 신역에서 철수함. 이 과정에서 시위대가 KBS에 방화했으나 자체 소방시설로 곧 진화됨.아침에 신역전투에서 전사한 시민의 시체 2구 발견. 시민들은 군용 지프차 뒤에 손수레를 연결하여 그 위에 시체를 싣고 대형 태극기로 덮어 시내를 천천히 시위하며 지나감. <이하, NCC인권위刊「광주민주항쟁자료집」>
―오전 9시, 금남로에는 십여만의 군중운집. 무장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 청년 20∼30명이「우리도 무장이 필요하고, 무장을 위해서는 차량이 필요합니다」고 외치며 군납 방위산업체인 아세아자동차 공장에서 7대의 버스를 몰고 금남로로 돌아옴. 9시 45분, 이들은 아세아자동차 공장으로 다시 가서 대형 버스 22대, 장갑차 3대, 군용트럭 33대, 민간트럭 20대 등 모두 80여 대 징발. 차량에 가득 탄 중·고생과 젊은이들은 몽둥이로 차체를 두들기고 각종 구호를 외치며 오전 중에는 외곽지역의 시민들을 동원하여 금남로 수송』―11시 30분경. 도청을 중심으로 한 여러 갈래의 도로에 30여 만 이상의 시민 운집. 거의 바닥난 계엄군의 최루탄에도 시위대의 기세는 꺾일 줄 모름. 갑작스런 총성, 시위대 선두 몇이 쓰러짐. 순식간에 시위대열은 좌우로 갈라졌고 금남로는 텅 빔.―갑자기 벤즈 고속버스가 군 저지선으로 돌격. 계엄군 LMG난사, 차안에 있던 20여명의 청년 몰사. 시민들의 평화적 해결 기대 무산되고, 무기를 획득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 외곽지대에서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시위대들은 무기 탈취의 목적으로 가까운 교외 진출 시도.―노동청에서 도청으로 뚫린 길 입구의 고교생 2백여 명이 돌을 던지며 돌격. 공수부대의 조준사격으로 7명∼8명이 머리와 가슴을 맞고 쓰러짐. 시민들은 꿈틀거리는 학생을 구원하려고 뛰어나갔고 조준사격은 그들도 사살시킴. 연발 위협사격 가함. 또 몇 사람 뛰어갔다 쓰러짐.
피비린내나는 血鬪 계속
―오후 1시 5분, 금남로 YMCA와 제일은행 사이에 서 있던 대형 화물트럭이 공수부대의 저지선으로 돌진. 공수부대, M16자동소총 연발사격. 유리창에 맞고 정지. 차를 운전하던 청년은 피투성이로 트럭을 필사적으로 빼내고 동구청 앞에서 멎음. 운전석에서 절명, 뒤 화물칸의 두 청년도 돌멩이를 쥔 채 사망. 군중이 트럭 근처로 모이자 공수부대, 트럭을 향해 무차별 난사.― APC 장갑차를 타고 상의를 벗어 제친 청년이 머리에 흰 띠를 두르고 태극기를 휘두루며「광주만세」를 외치며 전속력으로 도청을 향해 진격. 도청 4층 옥상의 공수부대가 청년의 머리를 쏘았고 청년 즉사.―대여섯 대의 군용차량이 비무장인 채 연이어 도청으로 돌진. 공수대가 도청 옥상의 M60기관총으로 쏘아대자 차는 도청 분수대와 도청 정문, 담에 부딪치며 그들은 벌집이 된 채로 사망.―산수동에서 계엄군이 시위대원 5명을 살해한 후 트럭 위로 집어던짐. 그 위에 있던 자가 흰 페인트로 시체의 신원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시체의 얼굴에 칠을 함(목격자 증언).―도청 부근 상공에 군용 헬리콥터가 나타나더니 고도를 낮추며 MBC가 있는 제봉로 근처에 기총소사.―2시∼3시경, 2백여 명의 시민이 중앙로 지하상가 공사현장에서 농성 시작. 도청 쪽에서 날아온 탄환이 농성을 지휘하던 학생의 어깨 관통.―2시 40분경, 지원동 석산 탄약고 파괴. 다량의 TNT-뇌관 입수.
―3시 20분경부터 각종의 총기로 무장한 청년시위대가 도청 앞에 진격하여총격전 벌임. 시민들은 이들 무장시위대를 「시민군」이라 부르기 시작.「시민군」을 아군,「계엄군」을 적군이라 부름. 최정예군과 M16자동소총, M60기관총(자동), 기관단총에 2차대전때의 잔존무기인 M1과 카빈 소총으로 대항하여 엄청난 희생자가 생김. 전남방직과 호남전기의 예비군 무기고에서 다량의 무기와 실탄을 획득하여 계속 분배, 사상자는 방치된 채 사상자가 쓰던 총을 곧 집어 다시 싸우며 희생자는 계속 늘어감. 이 시가전은 공수대가 도청에서 철수한 5시 30분까지 계속됨.―4시경부터 민중들 사이에 자발적으로 형성된 전투지도부의 지휘로, 무장한 시민군이 탄 각종 차량들이 광주공원으로 집결 시작. 5시경 수백 대의 차량과 수천의 군중이 모이자 40대 예비군 중대장으로 보이는 중년남자가 통제 시작. 조별로 부대 편성, 총기조작법·수류탄 사용법·사격요령 등을 지도한 후 최후의 결전을 위한 배치를 하고 각 지역으로 분산시킴.
―유동 3거리에서도 예비군인 듯한 중년남자가 체계적인 지시를 하며 차량과 총기 배치. 2백 명의 무장한 시민군 편성.―5시경, 시민군 특공대 11명이 LMG기관총 2정을 메고 전남의대 부속병원 12층 옥상으로 올라감. 이곳은 계엄군 임시본부인 전남도청의 4층이 정확히 사정거리 안에 포착. 시민군은 전술적으로 유리한 고지와 우수한 화기를 갖추고 사격 시작.―5시 30분, 계엄군의 총퇴각 결정. 장갑차 한 대가 학동 방면으로 질주하며 길 양옆에 M60 기관총을 무차별 난사하며 지원동 입구까지 두 차례 왕복, 이는 계엄군의 퇴로를 확보하기 위한 위협사격이었음. 많은 시민들 살상. 잠시 후 병력을실은 군용트럭 10여 대가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며 길 양옆으로 M16난사. 시민군도 맹렬히 사격. 계엄군은 소속 부대별로 조선대 쪽으로 퇴각. 어둠을 이용하여 외곽도로로 전 부대가 빠져 나감.
『건물옥상에서 난사』
발포시점 및 「무장 시민군」의 등장과 관련, 지난 2월 4일 民和委에 출석한 배근수씨(5·18광주의거유족회 고문)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시민들은 총과 무기가 없어 삽이나 곡괭이를 갖고 나왔으며 부지깽이를 들고 나온 부인들도 많았다. 21일 오전부터 그렇게 사람들이 나왔는데 오후에 공수부대가 왔다. 사람들이 너무 차 있어서 뚫고 들어올 수가 없자 공수부대는 건물옥상으로 올라가 총을 난사했다. 그날 사람들이 제일 많이 죽은 것 같다. 내 사위도 그날 죽었다. 군인들이 총을 난사한 후 그날 저녁 철수명령이 내려 군인들이 나갔다.시민들은 전부 합세해 곡괭이들을 들고 忠壯路파출소 등을 삽과 곡괭이로 찍어 무기를 들고 나왔다. 경찰은 모두 달아나버렸다. 경찰무기창고도 곡괭이로 찍어 무기를 나눴다. 공수부대가 시내에서 나갈 때 진월동이라는 데서는 14살된 아이가 개울에서 친구랑 둘이 멱을 감다가 군인들을 보고 무서워 강둑위로 도망가던 중 신발이 벗겨져 그것을 주으려다 맞아 죽었다는 얘기도 들었다. 이것 하나만 보아도 光州사태진압이 어떤식으로 이뤄졌는지 위원들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시민들에 대한 계엄군의 무분별한(정확한 발포지점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지역마다 시점이 다르다)총격과 더불어 또 한가지 전율한 사건은 ▲헬리콥터에서의 총격과 ▲화염방사기가 사용됐다는 증언들이다.『19일 오후 트럭을 타고 羅州로 대피했다. 20일 光州의 세무서와 MBC KBS가 불타고 시민들이 광주를 장악했다는 소식을 듣고 아침 일찍 광주로 들어갔다. 시내 곳곳마다 검은 연기가 솟아 올랐고 군용트럭에 탄 시민들이 애국가와 반정부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오후 2시쯤 군용트럭을 타고 시내를 돌아봤는데 갑자기 월산동로터리 부근에서 헬리콥터가 나타나 사격을 가했으며 길가의 한 학생이 쓰러졌다……』<이광영씨(광주사태부상자회 부회장)증언중에서>『한편 금남로에서는 도청 부근 상공에 군용 헬리콥터가 나타나더니 갑자기 고도를 낮추며 MBC가 있는 제봉로 근처에서 기총소사를 하기 시작했다. 금남로 주변의 골목에서 웅성거리던 사람들은 일시에 땅바닥에 엎드리거나 건물안으로 숨었다. 많은 사람들이 계속 희생되었다.』(『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20일 오후 2시경, 서방 3거리의 시민과 공수부대 사이에 충돌. 공수부대는 화염방사기로 20m의 불길을 뿜어 댔고, 시위대 선두에 섰던 사람들은 순식간에 불에 타 죽음. 공수부대는 시체 및 부상자를 군용트럭에 싣고 감. <NCC인권위刊, 『1980년대 민주화운동―광주민중항쟁자료집 및 상반기일지』>
사망자 숫자는 과연 몇 명인가?
지난 7년여동안 내내 5·18관련단체들은 사태로 인해 유명을 달리한 「민주영령」은 줄잡아 2천여명이라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정부당국은 정부가 공식적으로 발표한 1백 98명의 사망자 이외에는 더 이상 없다는 주장을 견지해오고 있다.지난해 대통령선거 직전인 12월 14일 평민당측이 내놓은 「광주의거의 진상」에서 김대중후보는 5·18관련단체들이 지금까지 주장해온 숫자와는 조금 다른 「1천명 이상의 사망자」를 주장했다. 즉 김후보는 이 자료집에서 『희생자수만 하더라도 당시의 주한 미대사인 「글라이스틴」의 증언으로도 1천명에 달한다고 하였으며, 실제로 최소한 천명 이상의 사망자를 냈던 것』이라 밝히고 있다.앞서의 5·18부상자인 이광영씨는 「의문에 싸인 사망자 숫자」와 관련, 다음과 같은 증언을 함으로써 더욱 더 깊은 의구심을 자아내게 했다.『정부는 사망자 1백 98명, 부상자 1천여명으로 발표했지만 정부측사망자숫자는 기독―적십자―전대병원등 각 병원 영안실에 안치된 숫자만을 가리키는 것이다. 통합병원 사망자숫자는 포함조차 안했으며 계엄군의 차에 실려간 수많은 사망자숫자는 은폐돼있다. 당시 기종도라는 구청청소원이 광주사태 후 갑자기 교도소에 수감돼 사망했는데, 기씨가 사망자를 청소차에 실어 운반했으며 매장한 장소를 알고 있다는 얘기를 기씨에게서 직접 들은 적이 있다. 기씨가 비밀을 누군가에게 얘기했으며 수사기관이 이를 알고 교도소에서 죽인 것으로 판단된다.
의문 풀리지 않는 「광주시통계연표」
광주시 통계연표에 나타난 80년 5월 한달의 사망자숫자를 정부는 사무착오라고 발표했으나 나는 그렇게 믿지 않는다. 부상자수도 내가 알기론 2천5백여명에 달한다.정부가 재신고를 받는다고 하지만 기관에 찾아가면 「당신을 부상시킨 공수부대원의 관등성명을 대라」며 접수를 받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그러나 李씨의 『정부측사망자 숫자에는 통합병원의 숫자는 포함되지 않았다』는 주장에 대해, 당시 전남북 계엄분소장이었던 蘇俊烈씨(당시 CAC사령관)는 『그곳에도 물론 시체가 있었으나 사망자수에 다 들어가 있다』고 반박했다.이어서 蘇씨는 사망자숫자와 관련,『27일 새벽 작전에서 공수부대특공요원 등 3명이 사망했고 도청에서 끝까지 저항한 17명의 시민이 죽었다. 당시 실종신고를 자유롭게 받았으나 별다른 신고가 없었다. 사상자만큼은 본인의 명예를 걸고 발표된 이상이 안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시체에서 탄흔을 전부 검출해 보니 현역 군인들이 가지고 있던 M16에 죽은 사람은 45명이었다.』고 증언하고 이와 함께 蘇씨는 『최선을 다해 희생을 줄였다』『군인에 의해 죽은 숫자는 45명 뿐이다』『45명 이외에는 자기네들끼리 싸우다 죽었다』는 주장을 덧붙였다.이에 대해 『참으로 무책임하고 방자한 언행이 아닐 수 없다.
언제는 자기가 부임(CAC사령관)한 것은 5월 21일 이후라서 그전의 일은 모른다고 잡아
총동원한 「진상규명」을 위한 질문서
爭点! 무엇이 「光州」의 眞相인가
尹 在 杰(東亞日報出版局次長署理)
民和委, 光州시태 본격 거론
지난해 연말 대통령선거를 전후해서부터 80년 5월의 「광주사태」에 관한 논의가 사회 각계각층에서 분분하게 이뤄지고 있다. 특히 盧泰愚대통령 직접 지시에 의해 만들어진 민주화합추진위원회(약칭 民和委)에서 나오고 있는 관련당사자들의 증언들은 국민들에게 이 사태의 심각성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고 있다. 이 증언과 논의를 통해 국민들은 사태의 근본적인 치유책이 강구되지 않고서는 이 나라의 민주화는 결코 순탄치 않으리라는 인식을 함께 갖는 계기가 됐다.문제는 무엇이 사태의 근본적인 치유책이냐는 데 달려 있는 듯하다. 혹자는 『아픈 상처를 다시 건드려서 무엇이 득될 게 있느냐』면서 『용서와 화해만이 지금 이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인사들은 『사태의 철저한 규명이 선행돼야만 슬기로운 해결책도 나올 수 있다』면서 『무엇보다도 먼저 사태의 발생배경 및 그 전개과정, 그리고 아직까지도 미흡한 채 덮여있는 많은 의문점들(사망자숫자 등)이 백일하에 밝혀져야 할 것』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그리고 이같은 사태의 진상은 가해당사자측이 배제된 순수 민간주도의 차원에서 각게각층의 신망있는 인사들로 조사단을 구성, 지금까지 덮어둔 의문점들을 낱낱이 드러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民和委의 『광주사태』거론에 관해, 피해당사자들은 여전히 부정적인 시각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지난 8일 민화위에 출석한 田桂良씨(5·18광주의거 유족회장)의 주장이 이를 대변해주고 있다고 보겠다.『민화위는 노태우정권의 정통성과 기반을 구축하기 위한 대표적 협잡기구이다. 그간 기만적으로 광주사태해결 운운해 왔으나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 유족회는 민화위가 광주학살에 대한 원천적 치유방안을 모색할 수 없다고 본다.』첫째 민화위는 노태우씨가 대통령이 되기위해 구상한 기구로소 민정당의 한 위원회에 불과하다.
둘째 국가적 차원에서 법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임시자문기구에서 논의되는 것이므로 차기정부에서 모두 반영된다는 보장이 없다.셋째 문제의 원천적 해결은 軍에 의해서 빚어진 점을 감안, 국가적 차원에서 해결점이 모색되어야 하므로, 법적 제도적 보장을 받지 못하는 민화위는 그 기능을 다할 수 없다.넷째 민화위는 관련 피해당사자들이 제외된 구성체이므로 학살 만행을 은페하고 항쟁정신을 희석화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다섯째 근본원인에 대한 객관적 검토과정이 미흡하며 학살만행에 대한 배경의 진상은 완전히 은폐되고 있다.여섯째 미국의 개입에 대한 문제점은 설정조차 하지 않았다.한편 유족회는 학살만행에 대한 원천적이고 숨김없는 치유를 요구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첫째 민화위는 어용집단이므로 기만적인 국민우롱 작태를 중지하고 즉각 해체되어야 한다.
둘째 새 국회에서 진상조사 특별법을 제정하고 국회의원 및 피해당사자, 재야 단체대표,언론인, 법조인, 정부추천인사 및 당시 군관련 지휘관 등으로 진상조사 特委를 구성해야 한다. 또 진상규명 후 가해자 처벌을 위한 특별재판소를 설치, 가해자를 의법처단해야 한다.
셋째 폭도로 규정된 光州시민의 명예회복이 전제되어야 한다.
넷째 군 작전권을 갖고 있는 미국의 묵인, 방조, 개입에 대해 외교적 조치를 단행해야 한다.
다섯째 피해자들에 대한 정신적 물질적 보상과 보훈대상자로의 예우가 필요하다.
여섯째 일부야당이 주장하는 현 국회에서의 국정조사권 발동 등 정치적인 해결방안을 거부한다.
이같은 부정적인 시각은 사태피해자로서 지난 3일 출석 증언한 李光榮씨(35·광주사태부상자회 부회장)등에게서도 똑같이 나타났다.그러나 이번 민화위에 출석, 부분적이나마 사태를 증언한 사람들은 대부분이 사태에 직간접적으로 관련한 당사자들로서 「진상규명」이라는 측면에서 적잖은 실마리를 제공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과거와 하나도 다를 바 없는 자신들의 입장만을 고수, 어느 쪽 주장이 진실인지 더욱 아리송하게만 됐다』는 여론이 없는 것도 아니다.따라서 기자는 이번 민화위에서 거론된 사태의 쟁점을 항목별로 정리, 가해자측과 피해자측, 그리고 지금까지 나온 각종증언과 자료를 같은 공간 속에서 논의해 봄으로써 진상규명에 한발짝 다가설 수 있도록 나름의 노력을 기울여 보기로 하였다.
사태의 발단배경
지난 1월 22일에 열린 민화위전체회의에서는 「광주사태를 어떻게 볼 것인가」하는 「視角」의 문제가 여러 위원들에 의해 거론되었다. 「광주사태」가 일어난 근본적인 배경을 헤아려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인용해보기로 한다.『광주사태를 보는 시각 세가지를 소개한다. 첫째 5공화국의 집권자들이 자신들의 집권을위해 사태를 조작했다는 「사전조작설」이고 둘째 김대중씨가 민주적 절차로는 정권획득이 어려웠기 때문에 내란을 음모했고 그에 동조한 사람들이 사태를 일으켰다는 「김대중 내란음모설」이고 셋째 계엄군의 시위를 과잉진압해 일어났다는 「과잉진압설」이다…』朴모씨가 언급한 이같은 사태발생배경은 지금까지 피해당사자들을 비롯한 재야민주운동권에서 되풀이해 주장해온 내용으로서, 이를 더 부연하자면 ▲12·12군부군테타 주역들이 「국가권력을 탈취하기 위해 자행한 고의유발설」▲「金大中씨 등 일단의 정치세력에 의한 내란음모설」로 압축해볼 수 있다. 물론 「김대중내란음모설」은 5공화국 집권세력이 사태직후 주장했던 내용임은 다 아는 사실이며 하나의 「정치조작극」으로 막을 내렸다고 볼 수 있다.
이점과 관련, 5·18광주민중혁명 위령탑건립추진위(위원장 洪南淳)는 85년 6월 7일 尹誠敏국방의 국회보고를 반박하는 성명서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일부 정치세력과 불순분자 등의 책동으로 광주사태가 일어났다고 윤국방은 망언을 되풀이했는데, 일부 정치세력 중 그 누가 광주시민을 어떻게 조종하였으며, 또 불순분자들이 책동했다면 그 많은 투옥으로 그처럼 무자비한 수사를 통하여 어느 누가 불순분자라고 처발받은 사람이 있는가. 당시 계엄국당국이 위장한 간첩들을 도청에 침투시켜 광주의 5월혁명을 불순분자의 소행으로 몰려고 했으나, 애국학생들이 이들을 붙잡아 계엄당국에 인계했는데, 이 무슨 망발인가. 정치인으로 광주의 내란을 일으켰다고 사형까지 판결되었던 김대중선생이 지금 생존하여 활동하고 있으니 그분의 진실된 이야기를 국민 앞에 공개하지 못하고 왜 허위적인 내용만 주장하고 있는가. 사태수습을 위하여 어려움을 무릎쓰고 나섰던 성직자, 변호사, 교수 및 민주인사들은 오히려 내란수괴, 내란 주요임무종사, 내란죄 등으로 구속되어 가혹한 고문 끝에 사형·무기·20년 징역형의 중죄를 언도 받았지만, 너무도 엉터리 짓임을 스스로 자인하고 2년도 못되어 모두다 석방하고 복권되어 대부분 본래의 직장으로 돌아가 일하고 있는데 지금도 그분들이 불순분자들이었다고 주장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朴모씨 등이 주장하고 있는「과잉진압설」은 엄밀한 의미에서 앞서의 두가지 시각과 궤를 달리한다고 볼 수 있다. 군부세력에 의한「국가권력 탈취를 위한 고의유발설」과「김대중 내란음모설」이 본질적인 문제에 귀착된다면, 과잉진압설은 본질론이 낳은 부수적 현상론으로서 그 책임의 한도나 깊이가 전자에 비해 월등 축소 될 수 있는 주장이다. 이희성 당시 계엄사령관은 민화위에 제출한 서명증언을 통해『발생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계엄군의 과잉진압이 직접적인 원인의 하나임은 부정할 수 없다고 본다』고 말함으로써 초기의 강경진압 작전이 끝내 사태를 유발시킨 점을 시인 하고 있다.
『학교앞 시위가 발단』
한편 지난 85년 7월에 나온 정부당국의「광주사태의 실상」(발행처―국방부, 85년 7월 30일 발행 총 92쪽)이나, 尹誠敏국방장관의 국회보고(85년 6월 7일 제125회 국회 국방위원회) 내용 그리고 사태직후 80년 5월 31일 계엄사가 발표한「광주사태」등은 일관되게 사태의 발생동기가 잇달은 학생소요에 기인하고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10·26사태 이후에 80년 당시 정부는 사면·복권을 약속하고 계엄일정을 단축하는 등 민주화일정을 추진하고 있었으나 일부 정치세력의 성급한 주장과 학생사주로 인해서 학원요소가 격화되어 전국적으로 치안경비가 곤란한 가운데에 경제적으로도 노사분규가 가열되어…… 위기의식에 사로잡힌 대다수 국민들이 사회 안녕질서 회복을 갈망하는 상황에 이르러 정부에서는 부득이 국가적 비상난국을 슬기롭게 대처하기 위해서 5·17 비상조치를 단행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 조치로 서울 등 대부분의 지역이 일단 평온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광주에서만은 전국 계엄령이 선포된 다음날인 80년 5월 18일 9시 일요일인데도 불구하고 일부 정치세력의 배후조종을 받은 전남대생 약 2백 명이 사전에 계획된 시위를 강행하기 위해서 가방 속에 돌을 넣고 도서관 출입을 요구하다가 계엄군이 이를 저지하자 준비한 돌멩이로 일제히 투석전을 전개 파상적으로 공격을 감행하였으나 질서유지를 위해서 출동한 계엄군이 학생으로부터 돌을 맞는 사태가 발생을 하였고 그후 학생들은 시내로 잠입을 해서 가두시위를 자행하였던 것입니다.』<尹국방 국회국방위 보고>尹국방의 국회보고가 발표되자,「5·18 광주민중혁명희생자 위령탑건립 및 기념사업 범국민운동추진위원회」는 즉각 반박 성명을 발표, 광주사태는『계획된 정권탈취 음모획책과정의 일환』이었음을 거듭 주장했다.『10·26이후 열화같은 민주화열기는 국민적 합의사항이 되어 조속한 민주정부의 수립으로 유신독재의 늪에서 민주화된 조국을 건설하자는 것이었다. 그 우선조건이 명분없는 계엄령의 해제요, 본질적인 언론자유의 획득이었다. 그러나 계엄당국은 아무런 이유를 밝히지 않고 계엄령 해제의 여망도 없이 군부의 유리한 조건을 이용하여 차근차근 정권탈취 음모만을 획책하고 있었던 것이다. 80년 5월 14일부터 16일까지 3일간, 전남대학교와 조선대학교 및 각 대학생들은 광주 도청 앞을 중심으로 정말로 평화적이고 이성적인 시위를 통해 그들의 요구이자 국민의 요구를 외쳤던 것이다……
그리하여 토요일인 5월 17일에는 각 대학에서 정상적인 수업이 이루어진 것은 공지의 사실이었다. 권력을 잡겠다는 욕구 이외에는 달리 변명할 길이 없이, 아무런 명분이나 타당성이 없었는데, 그들은 5월 17일 야밤을 기하여 계엄확대조치라는 엉뚱한 기만행위를 발표하고는 대학을 폐쇄하고 민주인사들을 대거 연행해다가 터무니없는 모함과 모략을 뒤집어 씌우고는 국민을 향해 공갈과 협박만을 서슴지 않고 있었다……17일 야밤의 조치가 18일 아침에 알려졌지만, 일요일인 그날의 대학생들은 집에서 대부분 쉬고 있었다. 전후 사실에 민감하지 못했던 전남대학교 학구파라는 학생들은 일요일인 그날 대학도서관을 이용하려고 공수특전단이 지키는 학교의 정문을 통과하고자 했었다.오직 공부를 위해서 대학에 접근한 그들에게 당시에 어떠한 만행을 저질렀는가. 공부하러 온 학생들을 닥치는대로 붙잡아 옷을 벗기고, 총대로 두들겨 패면서 잔인무도한 학살만행을 저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밤, 학교에 있으며 공부하던 도서관의 대학생들은 얼마나 비참하고 가혹한 만행을 당했었던가. 금수에 비길 만행에 청년학도들이 어떻게 더 이상 참고 있었겠는가.
그당시 그러한 무자비한 만행을 당했던 증인이 수십 명 엄연히 생존하며 그 일을 증언하고 있으니 어떻게 그 사실을 속일 수 있었겠는가.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18일 오전 전남대학교 정문에서부터 일어나게 된 학생시위가 바로 다름아닌 광주항쟁의 구체적인 발단이었다.』<성명서―「6·7국방부 발표는 진상이 아니라 날조된 거짓이다」>
『정권탈취 위해 고의 유발한 것』
5·18희생자 유관단체들의 주장과 궤를 같이 하는 주장들이 지난해말 대통령 선거를 전후, 金大中후보의 성명과 鄭雄장군(당시 光州인근 00사단장)의 증언에서도 함께 터져나왔다. 이들의 주장은 한결같이『광주사태는 정권탈취를 위해 사전에 음모돼 고의로 유발된 것』이라는 주장을 담고 있다. 즉「광주의거 진상」(87.12.14. 金大中 후보 기자회견발표)이라는 성명서에서 金씨는『광주사태는 사전에 모의됐다』면서『광주의거는 본인이 입수한 자료에 의하면 분명히 군사독재자들이 그들의 불법적인 정권탈취를 합리화하기 위하여 유발시킨 사전계획된 음모였음이 확인되었으며 선량한 광주시민들은 철저하게 그들의 희생물로 이용당했다』고 주장했다. 이 자료는 특히「사전계획된 정권탈취 음모」의 증거로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밝히고 있다.『12·12사건으로 군부의 실권을 장악한 전두환·노태우·정호용은 이희성·황영시 등을 하수인으로 하여 무력으로 정권을 찬탈하기 위해 1980년 5월 14일에 육군본부에서 5·17 비상계엄령 확대선포와 김대중의 체포를 모의하고 이에 따라 필연히 유발될 것으로 예상되는 광주시민들의 항의 데모를 부마사태 때와 같이 가혹하게 진압하기로 결의하였다. 이 계획에 따르는 군사정권은 2개 대대의 공수특전부대를 사전에 투입하여 5월18일에 평화적 데모를 하고 있던 광주학생들과 시민들을 곤봉으로 마구 때리고 대검과 단검으로 마구 찌르는 무자비하고 참혹한 진압행위를 자행하여 수많은 사상자를 속출시켰다』작년 11월29일 여의도에서 있은 김대중후보의 대통령선거유세에 찬조연사로 나온 정웅장군도 이같은「광주살륙작전」이 사전에 예비음모됐다고 폭로했다. 정장군은 80년의 광주사태는 12·12반란을 주도했던 군세력과 그 추종자들이 사전계획에 의해 고의적으로 유발시킨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그 이유로서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지적했다.
첫째, 당시의 계엄당국이 5월15일까지의 데모를 일부러 방치하고 있었던 사실.
둘째, 5월16일, 17일에는 최규하 대통령의 귀국을 기다리며 데모도 않고 조용했는데 갑작스레 17일 밤 김대중 씨 등을 체포한 사실.
셋째, 이같은 불법적인 처사로 데모를 다시 유발시키고 이를 빙자해 강경유혈 진압방식을 지시한 사실.
넷째, 단순한 군사독재에 반대하는 민주적인 데모에 5천 명 이상의 특수부대원을 투입하는 등 필요이상의 병력을 데모 이전부터 광주에 배치한 사실.
「광주사태」와 더불어 잉태된 國保委
이 점에 관해 정장군은 최근 기자와 만나 보다 상세히 그 배경을 풀어나갔다. 정씨의 주장은 12·12주역과 5·18주역들에 의한 國保委구성에로까지 이어졌다.『이 당시 군부에서는 사단장인 본인에게는 5월16일까지 광주시내에 있는 10개 대학교와 2개 신문사, 2개의 방송국을 점거하라는 명령과 공수부대 약 1천명이 5월17일부로 작전 통제된다는 명령이 있어 본인은 사단병력 5백명으로 필요시설 및 기관을 점거시켰으며 전남대학과 조선대학에는 공수여단병력 각각 5백명씩을 배치하였습니다.여기에서 한가지 부언하고 싶은 것은 12·12사태 주도자들은 김대중선생을 체포함으로써 광주학생으로 하여금 데모를 필연적으로 일으키겠금 유도해서「광주사태」를 유발시킨 후, 사회불안을 이유로 국민으로 하여금 군부의 정치개입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 들이게 하고 여태껏 얼굴에 쓰고 있던 베일을 벗고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하나의 방법으로, 저 악명높은 國保委의 조직을 자연스럽게 인식케하는 흉계가 이 속에 숨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날짜상으로 보아도 5월27일에「광주사태」가 끝난 지 불과 4일 후인 5월31일 國保委라는 그 거대한 권력장악 기구가 출현한 것으로 보아 능히 당시의 실상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고, 데모도 일어나기 전에 공수부대병력을 광주에 미리 배치했던 것부터 우리는 그 흉계를 여실히 찾아 볼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민화위에 회견차 나온 田桂良 5·18유족회장도 같은 맥락의 발언을 한 바 있다.『▲李忠煥위원=정부 고위층이 光州사태를 일으키는데 결정적인 관련이 있다고 단정할 만한 구체적인 증거가 있는가.▲ 田씨=12·12쿠데타이후 80년「서울의 봄」을 불렀다. 그 과정에서 가장 실권자가 全斗煥대통령이다. 盧당선자는 명령을 따랐건, 안따랐건 뜻을 같이했다.▲ 李위원=두사람이 직접 개입했다는 증거가 있는가.▲ 田씨=5·18사태가 서울·부산·대구가 아니고 광주에서 발생한 이유를 보면 알 수 있다. 이는 사전에 군부집단에 의해 개입된 것으로 우발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고 내란음모도 아니다. 군부세력이 사전개입에 의해 광주지역을 선택했다. 광주사태를 일의킬 수 있는 지역적 여건에다 김대중씨를 매개체로 한 것이다』
『광주사태는 부마사태의 再版』
위에 예시한 증언들 중 우리가 한번 더 주목해야 될 대목은『5·17비상계엄령 확대선포와 김대중의 체포를 모의하고, 이에 따라 필연히 유발될 것으로 예상되는 광주시민들의 항의데모를 「釜馬사태」때와 똑같이 가혹하게 진압하기로 결의하였다』는 내용이다.「부마사태」는 여러 자료와 증언을 종합해보면 부산이 낳은 정치인 金泳三에 대한 박정권의 정치적 핍박이 불러일으킨 사태임이 틀림없다. 당시 박정권은『위수령의 필요조차도 없는 상황』에서 비상계엄과 함께 공수특전부대와 해병대를 투입하는 등 초강경진압책으로「부마민중항쟁」을 성공적(?)으로 밀어붙일 수 있었던 것이다. 趙甲濟기자의 증언을 들어 보자.『정부가 계엄령 선포 직후 전투력이 가장 뛰어난 공수단과 해병대를 긴급 투입 한 것은 부산사태를 철저하게 진압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과잉대응이었다. 파리를 잡는 데 도끼를 휘두른 꼴이었다. 현지의 군 지휘관은 위수령의 필요성조차 느끼지 않았고, 경찰 병력만으로도 사태 진압이 가능하다고 보았는데 비상계엄령에다가 특수부대투입이란 고단위의 진통제가 투여된 것이었다.
특수부대는 적과의 싸움에서도 가장 위험성이 높은 특수한 전투 목적에 쓰여야 할 부대이고 훈련도 바로 그런 식으로 받아왔다. 이런 부대가 비무장의 민간인을 상대로 하는 임무를 받은 것이 애당초 잘못된 것이었다. 부대의 성격상 과격한 진압은 예정된 것이었고, 이로 인한 민간과 군대 사이의 감정은 대한민국 존립의 절대명제인 국가안보를 위해서도 나쁜 것이었다.공수부대와 시위대의 충돌에서 비롯된 광주사태의 원인은 부마사태 때부터 배태됐다고 볼 수 있다. 광주사태 때 정부는 부마사태 때와 같은 방법으로 진압하기 위해 공수부대를 초장에 투입했다. 부산에서와 똑같은 구타가 대낮에 벌어졌다. 이것을 보다 못한 시민들이 동물적 분노심에서 들고 일어난 것이 광주사태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 국민을 떠난 군대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두 사태는 뼈저린 교훈으로소 보여주고 있다』(조갑제 著『有故』에서)조갑제기자는「광주사태는 부마사태의 再版」이라는 인식을 독자들에게 심어주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부산지역항쟁이 조기강경전략으로 3일만에 진압될 수 있었지만, 광주쪽의 사정은 전혀 달랐다는 점이다. 바로 여기에 부산과 광주, 더 나아가 경상도와 전라도의 역사적 뿌리의 相異가 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공수특전부대의 투입으로 야기된「부마사태」의 경험과 함께, 鄭雄장군이 증언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사실은 광주의 강경진압작전이 우발적 충동적으로 이뤄진「과정상의 실수」가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한번 더 알수 있다.『5월21일, 12·12사태의 주역중 한사람이었던 朴俊炳소장이 지휘하는 20사단 병력이 광주에 증파되었고, 5월22일에는 朴忠勳국무총리서리가 수행장관과 함께 광주에 내려와서 현지 작전부대의 각 지휘관들과 간담회를 가졌는데, 그 자리에서 놀랍게도 이런 말들이 오갔다. ―광주를 이번 기회에 한번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데모군중의 버릇을 고쳐주기 위해 몽땅 쓸어버려야 한다. 나는 그 자리서 강력히 반대하였고 다행히 朴총리께서도 본인의 말에 찬동해줘서 아슬아슬한 위기를 넘기게 됐다』이상과 같은 증언과 자료, 그리고 선례가 엄존하는 역사적 경험에 따를 경우 5·18 피해당사자측이나 재야민주운동권, 그리고 김대중씨 등이 주장하고 있는「국가권력찬탈을 위한 고의 유발설」에도 수긍이 가는 면이 있다 하겠다. 다시 말하면『전라도민의 열화와도 같은 기대를 받고 있는 김대중씨를 잡아들일 경우, 필연코 광주시민들이 반발할 것이며, 이에 대해 사전포석으로서 비상계엄확대조치를 발하고 동시에, 79년 10월의 부마사태를 경험삼아 조기강경진압책으로 초기진압을 꾀했지 않았느냐』는 풀이인 것이다.이같은 풀이에 따를 경우, 일부 관련당사자들이 사태의 배경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강경진압설」은 다만 본질적 배경에 부수되는 하나의 현상론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요는 어떤 의도에서 누구(主體)에 의해 그같은 비인간적「살륙작전」이 이뤄졌느냐에 대해 광주시민들은 보다 더 깊은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악성「流言蜚語」의 사실여부
지난 2월8일 民和委에 참고인으로 나온 具龍相의원(民正·당시 광주시장)은『5월18일 이후 계엄군의 과격행동에 놀란 시민들의 전화제보가 시장실로 무수히 걸려왔다』면서 당시의 메모지를 들춰가면서 급박했던 상황을 설명했다.具의원에 따르면『무장군인들이 학생들을 마구 구타하면서 연행해가고 있는데 이런 식으로 나가면 광주시민이 다 들고 일어날 것』이라고 많은 시민들이 항의하기도 했다면서 당시를 회고했다. 이어서 날짜별로 일지형식을 빌어 증언을 마무리한 구용상의원은 끝으로 언급한 개인의 소견중 첫째 항목으로,『조기진압과정에서 발생한 과잉진압행위는 시민들을 분노케 했고 학생들을 자극하는 요인이 다분히 있었다. 여기에다 구조적인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악성 유언비어까지 번져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고 본다……』면서 악성유언비어가 사태의 큰 원인인양 언급했다.기자는 여기서『악성 유언비어가 사태를 악화시켰다』는 구의원의 발언에 주목하고자 한다. 어느 면에서「부마사태」에서와 같이 조기강경진압이 성공할 수 없었던 요인중의 하나가 바로 이같은 지역적 특수성을 배경으로 한 소문들이 광주시민들에게 同一體의식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애초의 정부당국의 작전의도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나 여겨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당시 사태를 악화시켰다고 평가되는 유언비어를 망라해보고 그같은 소문이 나온 배경, 그리고 그 진위를 분석해보기로 한다. 먼저 국방부발표「광주사태의 실상」을 보자.『전날 오후에 이어 5월 19일에도 아침부터 나돌기 시작한 유언비어는 급속도로 번져갔다.「계엄군이 임산부의 배를 갈라 태아를 끄집어 냈다」「경상도 계엄군이 광주, 전라도 사람 씨를 말리러 왔다」「대학생이 많이 죽어가고 있다」「계엄군에게 흥분제의 약을 복용시켰다」는 등 내재적인 지역감정과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유언비어가 난무하였고 이들 유언비어는 시민들을 격분하게 만들었으며, 이에 흥분된 과격분자들은 이성을 잃고 과격한 활동을 하기데 이르렀다』
국방부발표의「유언비어」
국방부 발표자료는 이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고딕체로 강조하고 있다.『이들의 유언비어는 그 진원을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러나 당시 유언비어의 유포과정을 살펴보면 다소의 시간적 차이가 있으나 거의 동시 다발적으로 전파되고 있었다. 처음「계엄군이 여대생 국부를 찌르고 유방을 대검으로 도려냈다」는 유언비어였다. 이 유언비어에 가장 민감하게 자극되어 흥분한 계층은 주로 젊은 남·녀 학생들이었으며, 이들은 이러한 유언비어를 듣고 사실인가를 보기 위해 삽시간에 수백명이 금남로로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다음으로「계엄군이 임산부 배를 갈라 태아를 끄집어 내어 길거리에 뿌렸다」는 유언비어였다. 이에 가장 충격을 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20∼30대의 결혼부부와 중년층이었다. 다음은「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사람 씨를 말리러 왔다」「계엄군에게 흥분제 약을 복용시켰다」는 유언비어였다.이는 당시 소요 진압중인 계엄군의 선무활동시 소요군중의 귀가를 종용하는 마이크에서 경상도 특유의 음성이 방송되자 즉시 유포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유언비어의 유포과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10대들의 말초신경 자극에서부터 중년층의 격분, 그리고 지역 감정을 자극한 대(對)계엄군 투쟁의식 유발 등으로 연결되는 계획적인 일면을 찾아 볼 수 있다.
광주사태후 사망자들에 대한 검시 결과에 의하면 18일에 사망자는 없었으며 더구나 총 사망자 1백91명 중에는 칼에 찔려 사망한 여자는 단 한명도 없었다. 더구나 대한민국의 군부대 내에 어느 특정지역 출신자들로만 조직된 부대는 존재하지도 않고 또한 존재할 수도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상의 사실들을 종합해 보면 당시 유포되었던 유언비어는 학원소요를 배후 조종한 자들 중 군에 대한 일반적 상식도 없는(군미필자?) 불순분자가 의도적이고 계획적으로 유포한 것으로 보여진다』이와 함께 최근 출간된 千金成씨의 저서『10·26 12·12 光州事態』(후편)는 이와 관련된 주목할만한 내용을 담고 있다.작가 千씨는 이같은 내용의 전거가 어디인지를 분명히 밝히고 있지 않으나, 한 대목에서「당시의 군작전보고서」에 의존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다음 날인 18일, 광주 일원의 사태가 계엄령의 확대조치에도 불구하고 격렬해지고 있다는, 제7여단장 신우식 준장으로부터 현지보고를 받은 특전사령관 鄭鎬溶소장은 제3공수특전여단 여단장 최세창준장에게 광주 지역에 계엄군으로 출동할는지도 모르는 형편이니 만반의 준비를 갖추도록 이르고 자신은 C-54특별기를 탔다…… 정호용 사령관은 광주에 도착하여 이미 와 있던 제7여단장 신 준장으로부터 지금까지 광주 일원의 사태에 관한 보고를 받은 다음 곧장 육군전투병과 교육사령관 尹興禎장군과 부사령관 金基錫장군을 만났다…… 戰敎司정보참모가 세장군앞에 나타났다.
정보참모는 갖고 있던 노트를 펼치며 읽기 시작했다.「경상도 군인이 전라도에 와서 여자고 남자고 닥치는데로 밟아 죽이고 있기 때문에 사상자가 많이 나……」정보참모는 계속해서 읽어 내려갔다.「…18일에는 40명이 죽었고, 금남로는 피바다가 되었다는데 군인들이 여학생들의 브래지어까지 찢어버린다. 공수부대애들이 대검으로 아들 딸을 난자해버리고 브래지어와 팬티만 차게 해서 장난질을 한다. 공수부대가 몽둥이로 머리를 무차별 난타, 눈알이 빠지고 머리가 깨졌다. 한신대 학생 한 명이 그날 다쳐서 죽었다. 학생들 50여 명이 맞아서 피를 흘리며 끌려 다니고 있다. 계엄군이 출동하여 APC로 사람을 깔아 죽였다. 계엄군이 점거하고 있는 가톨릭 센터 건물 안에는 시체 여섯 구가 있다. 데모 군중이 휴가병을 때리자 공수부대 요원이 군중을 대검으로 찔러 죽였다. 계엄군이 달아나는 시민들에게 대검을 던져 복부에 박혀 중상을 입었다. 진압군인들은 모두 경상도 출신들만 골라 보냈다…」』
『결코 유언비어만은 아니다!』
지난 2월 8일 民和委에 참고인으로 나온 全玉珠씨(본명 全春心)는 『계엄군이 여대생의 유방을 대검으로 도려냈다』는 유언비어와 관련, 자신이 직접『계엄군이 젊은 여자들의 가슴을 칼로 내려치고 찌르는 것을 본만큼 결코 유언비어만은 아니다』고 말했다.또 한 관련자에 따르면『빌당이나 옥상 같은 높은 곳에서 볼 경우 이같은 계엄군의 만행은 곧 여성의 가슴을 잘라내는 것으로 충분히 오인될 소지가 있었다』고 당시의 정황을 설명하기도 했다.한 자료는 이와 관련된 내용을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광주역 분수대에서 여학생을 발가벗겨 놓고 유방을 칼로 도려내어 죽였다는 소문이 퍼짐(후에 계엄분소의 부사령관도 이런 시체가 있었다고 시인했으나, 대검으로는 할 수 없는 행위이며 불순분자의 면도칼 소행이라고 잡아뗐음)』『두 명의 공수병에게 만삭의 여인 끌려옴.「이년아, 주머니에 들어 있는 게 뭐냐? 뭔지 모르가? 머스마가, 기집아가?」다그치자 여인 모른다고 함.「그럼 내가 알려 주지」옷을 쭉 찢고는 배를 대검으로 찌름. 아랫배를 가르더니 태아를 끄집어내어 쓰러진 여인에게 집어던짐(「찢어진 기폭」의 목격자 증언)』『광주일고 부근, 여대생인 듯한 세 명의 여자들, 공수대원이 브래지어·팬티까지 찢어내고도 발길로 차며 꺼지라고 궁둥이를 걷어 참. 여자들은 가슴을 쓸어안고 길에 주저앉음. 욕설을 퍼붓던 공수대원,「살기가 싫은가 봐. 할 수없지」하며 등에 대검을 꽂고 쓰러진 여자의 가슴을 X자로 긋더니 트럭 위로 던져 버림』「<NCC인권위 간행,『광주민중항쟁자료집 및 상반기일지」>
『오전 11시에는 광주세무서 지하실에 시체가 있다는 시민들의 신고를 받고 시민군 4명이 현장에 가서 직접 확인했는데, 시체는 유방과 음부가 도려내어져 있었고 얼굴이 대검으로 난자당한 여고생이었다. 교복에서 나온 학생증으로 전남여교 2년 모양이라는 것이 알려져, 주소에 적힌 대로 시체를 싣고 가서 부모에게 확인시키자 부모는 그 자리에서 실신해버렸다. 화염방사기로 그을린 시체 여러구가 발견되기도 하였다』『여자라도 몇 명 붙들려 오면 여럿이서 겉옷은 물론 속옷까지 북북 찢어발기고는 아랫배나 유방을 구둣발로 차고 짓뭉개고 또는 머리카락을 휘어잡아 머리를 담벽에다 쿵쿵 소리가 나도록 짓찍었다. 손에 피해자의 피가 묻으면 웃으며 그 몸에다 쓱 닦는 식이었다. 그런식으로 살륙을 즐기다가 군용 차량이 오면 걸레처럼 희생자들을 던져 버렸다』『광주일고 부근에서는 길가던 여학생을 아무 이유 없이 붙잡아 머리카락을 잡아 끌어내려 구둣발로 올려차고 상의와 브래지어를 찢어 버리고는 여러 시민들이 보는 데서,「이 씨팔년이 데모를 해? 어디 죽어 봐라」하면서 계속 피투성이가 되어 실신할 때까지 주먹과 발길질로 난타했다』이상은 전남사회운동협의회가 펴낸『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황석영기록)에 나오는 내용들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계엄군이『임산부 배를 갈라 태아를 끄집어내어 길거리에 뿌렸다』는 유언비어는 전혀 뿌리가 없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다만 전라도민과 광주시민들중 대다수를 흥분시킨 것으로 추측되는『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사람의 씨를 말리러 왔다』는 유언비어는 몇몇 경솔한 하급지휘관들의 특유의 언동에서 비롯되었다는 자료가 나타나고 있어 주목된다. 이같은 점은 국방부 자료에서도 언급된 바 있다.『공용터미널 부근에서는 지나가는 시내 버스를 모두 정차시켜 놓고 차안을 검문하면서 학생으로 보이는 사람들을 불문곡직하고 끌어내렸다. 학생 아닌 청년들이 약간 반항하자 공수대원 7∼8명이 우르르 달려들어 돌려가면서 난타한후에「광주놈들은 모조리 죽여 버려야한다」라고 고함을 질러댔다. 안내양이 약간 반항의 기색을 보이자「네 년은 뭐냐」면서 곤봉으로 후려갈겼고 안내양은 차 아래로 실신하여 굴러떨어졌다. 만약 시내버스를 세웠는데 몇 미터 앞으로 더 나가서 정차하면 곧장 버스 위로 올라와 운전석에 앉은 운전기사의 뒷통수를 곤봉으로 타격했다』
하급지휘관의 무책임한 언동
이와 함께 평민당측이 87년 12월14일에 발표한「광주의거의 진상」에서도『군중들 앞에서 다음과 같은 계엄군의 언동이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요인이 됐다』고 자료를 열거하고 있다.이를테면 하사관급 지휘자가『전라도놈들 몰살시켜버리겠다』든가, 중위계급을 단 지휘관이 데모학생 7명을 무릎 꿇려놓고선『전라도 놈들 씨를 말리겠다』고 특유의 사투리로 폭언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이와 관련, 광주사태를 직접 겪은 다음과 같은 증언은 그 어떤 설명보다도 큰 설득력을 갖추고 있다고 보겠다.『여기에서「경상도 군인만 골라서 전라도 사람 씨를 말리러 왔다」는 유언비어를 그날 18일 오후 18:00시경에 시위대가 처음으로 말을 하더군요. 전군조직체에 아직 경상도로만 조직된 군은 없으며 또한 사태 당시에도 전국 특히 전남, 경남 병력이 많은 부대원이었답니다. 절대로 경상도로만 골라서 조직 되어 있지 않답니다. K형도 잘 알다시피 저 역시 고향이 전남이고 전남 병력이 많았습니다.
그날(18일) 오후 금남로에서 시위대를 진압하면서 경상도 소리로 떠들며 소리 지르는 병사들이 있어서 경상도 군인으로만 착각한 줄 알았을 거라고 저는 지금도 생각하고 있답니다. 고되고 고된 하루였고 지금 생각하면 잔인한 하루였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철없는 저희에게는 자랑스럽게 생각이 되었습니다. 저희끼리 모이면 나는 어디서 어떻게 때렸다고 또는 나는 어디서 어떻게 용감하게 싸웠다고 자랑스럽게 떠드는 것이었습니다. K형, 저도 예외는 아니었읍니다…』<『작전명령-화려한 휴가』39쪽>「광주사태」당시 광범위하게 퍼진 유언비어중 또 한가지는『계엄군이 독한 술에 흥분제를 타마셨다』는 내용이었다. 이같은 유언비어에 대해「광주사태」당시 계엄군의 일원이었던 한 하사관은 기자와 만나 다음과 같이 그 실상을 밝힌 바 있다.『아침식사도 거른 채 눈은 빨갛게 충혈되고 피곤이 온몸을 엄습하고 잠시도 서있지 못하게 피곤하였읍니다.「술에 다 환각제를 타서 먹였다. 눈이 빨갛게 충혈되었다」라는 유언비어가 그날부터 떠돌았습니다. 술에다 환각제를 타서 먹인 사실은 전혀 없으며 눈이 충혈된 이유는 이 글에서도 보아 알 듯이 며칠씩 잠을 못 자서 충혈된 것입니다.』
그러나 NCC인권위刊,「광주민중항쟁일지」는 이같은 소문이 전혀 허무맹랑한 것이 아님을 밝히고 있기도 해 여전히 의문점으로 남아 있다.『특히 제7공특전단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사병처럼 육성, 부마항쟁 때도 진압군으로 투입되었던 경력이 있는 부대임. 이들은「화려한 휴가」라는 이름의 1차 작전에서부터「충성」으로 끝나는 5차 작전까지의 임무를 띠고 광주에 투입됨. 22일 시민군에 의해 포로가 된 공수대원의 진술에 의하면 이들은 출동하기 전 독한 술에 환각제를 타 마신 상태였으며 수통에도 배갈을 담고 있었다 함』그리고 기자가 만난 광주의 한 언론인은 자신이 시내에서 직접『막걸리통들이 계엄군들 주변에 어지럽게 흩어진 것을 봤는데, 아마도 목이 마른데다 요기의 대용으로 했었지 않았나 하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광주시민들이 이같은 생각을 갖게 된 것은『도저히 인간으로선 상상할 수 없는 만행인지라 그렇게라도 생각해야 답답한 마음이 한가닥 풀릴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풀이해야 할 터였다. 따라서 이 유언비어 속에는「제정신이 아니고서야 어찌 백주의 대낮에 저같은 비인간적 만행을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하는 통한이 담겨 있다고 보겠다.
사실로 드러난「유언비어」도
한편 지난 2월 8일 민화위 증언에서 李光魯씨(당시 국보위 사태조사단장·현 디자인포장센터이사장)는,『계엄군들이 택시운전기사를 칼로 찔러 살해했다는 유언비어가 나돌아 광주사태의 기폭제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되는 이른바「차량행렬시위」가 벌어졌다』고 말했는데, 李씨보다 먼저 증언대에 나온 全玉珠씨는 공용터미날부근에서 자신이 직접『택시운전기사가 부상학생을 태우려 하자 계엄군이 달겨들어 택시운전기사의 옆구리를 대검으로 그대로 찔러버려 현장에서 죽는 걸 봤다』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밝혔다. 全씨의 증언은 다음과 같은 자료와 맞아떨어지는 내용이다.『공용터미널 로터리 부근에서 머리와 팔이 으깨어진 부상자를 병원으로 이송하던 택시운전사에게 공수대원이 내놓으라 명령. 기사는「당신이 보다시피 지금 죽어가는 사람을 병원으로 운반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하자 그 공수대원은 차의 유리창을 부수고 운전기사를 끌어내려 대검으로 배를 찔러 살해. 이런 식으로 최소한 3명의 기사가 살해됨. 이는 20일 또 하나의 기폭제였던 차량시위의 직접적 계기가 됨』<NCC인권위刊-『1980년대 민주화운동』
-『광주민중항쟁 자료집 및 상반기일지』>『이보다 앞서 20일 오후 2시가 넘어서 광주역 부근에는 10여 대의 택시가 모여 있었다.「우리가 영업하다가 손님을 실어 준 것이 무슨 죄가 되길래, 죄없는 운전기사들을 공수부대가 죽이느냐」「우리를 이런 식으로 곤봉과 대검으로 살해한다면 더 이상의 영업을 집어치우고 우리도 싸워야만 한다」며 서로 흥분된 의견들이 오고가는 사이에 택시는 20여 대로 불어났고, 기사들은 시내 곳곳을 운행하면서 공수부대의 살륙 만행을 누구보다도 많이 목격할 수 있었고 또한 피해도 많이 입었던 터였다.죽어가는 환자를 병원으로 싣고 가는 차를 정지시키고, 폭도를 빼돌린다는 이유로 택시 기사를 곤봉으로 두들겨패고 대검으로 찔러 죽이는 판국에 어찌 가만히 당하고 있을 수가 있겠는가. 그들은 무등경기장에 광주 시내 택시 기사들이 전부 모여서 들고 일어나자고 결정하고는 서로 연락하기 위하여 시내 전역으로 흩어졌다.무등경기장 앞에는 택시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는데 그 중에는 머리에 붕대를 감은 기사들도 보였다. 오후 6시까지 모인 택시는 2백대가 넘었다. 운전기사들은 차를 질서정연하게 모아 놓고 지금까지 목격했던 잔학상과 동료 기사들의 부상 및 죽음을 알리고 공수부대의 만행을 성토하면서「군 저지선의 돌파에 앞장서자」고 결의했다. 그들은 수건으로 머리를 질끈 동여매고 각자 차에 올라타서 고속도로로 통하는 길을 타고 서서히 금남로를 향하여 전진했다.
7시가 다 되어, 갑자가 유동 쪽에서부터 수많은 차량이 일제히 헤드라이트를 켜고 경적을 울리면서 돌진해 오고 있었다. 맨 선두에는 짐을 가득 실은 대한통운 소속 12톤 대형트럭과 고속버스, 시외버스 11대가 잇달았고, 그 뒤로는 2백여 대의 영업용 택시가 금남로를 가득 메운 채 뒤를 따랐다. 트럭 위에는 20여 명의 청년들이 올라서서 태극기를 흔들었으며 버스 속에는 태극기를 든 청년, 각목을 든 아가씨들도 타고 있었다. 차량 행렬은 어머어머한 분노의 파도처럼 밀려왔다』<「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發砲시점 및 기타
발포명령의 시점에 관해서도 쌍방의 주장이 분분하다. 발포시점과 관련, 민화위에 서면으로 제출한 이희성 전 계엄사령관의 증언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21일 쌍방피해를 줄이기 위해 시내 계엄군을 외곽으로 배치하고 하오 7시30분 방송을 통해 비극적 사태를 슬기롭게 극복해 줄 것을 모든 국민에게 당부하는 동시에 부득이한 경우 자위권을 행사한다는 경고도 했다.이 자위권 행사의 법적 근거는 위수령 제15조 2항, 군인복무규율 제1백 23조, 경찰관 직무집행법 제7조이며 이들 조항에는 군인 및 경찰관이 불가피하게 무기를 사용할 경우를 규정하고 있다. 이날 자위권 발동지시가 없었다해도 필요할 경우 당연히 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사태초기에 적절히 자위권을 행사했다면 병기 및 탄약을 탈취당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22일 계엄훈련 11호로 자위권 발동지시를 하달하여 예하부대의 이해를 촉구한 바 있다』李씨의 증언내용으로만 보면 정확한 발포명령시점을 종잡을 수가 없다. 그러나 문면상「22일에 자위권의 발동지시를 하달」하였다고 돼 있으나, 또 한편으로는 21일 하오 7시 30분「부득이 한 경우 자위권을 행사한다는 경고도 했다」고 말함으로써 바로 그 시각의 발포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군당국의 발포시점이 언제인가 하는 점은「市民軍」이 총기류로 무장한 시점과 관련해서 비상한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쌍방이 모두 상대측이 먼저 발포를 시작함으로써 자신들의 발포행위가 자위권발동의 정당방위임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국방부 발간『광주사태의 실상』은 다음과 같이 자위권발동시점(22일 12시)을 밝히고 있는데, 이는 이희성 전 계엄사령관의 증언과도 다르고 千씨가 보고 썼다는 군작전보고서와도 그 시점이 다르다. 다음은 발포시점과 관련된 국방부의『광주사태의 실상』중 일부분이다.『전날 저녁 시내에서 완전 철수한 계엄군은 소요의 외지 확산을 저지하기 위하여 시가지 외곽에서 봉쇄작전을 펴기 시작했다. 그리고 22일 12시를 기해 전남지역의 계엄군들에게 자위권이 발동 되었다.이에 앞서 오전 9시경「폭력으로 치안을 어지럽히는 행위에 대해 부득이 자위를 위한 필요한 조치를 취할 것이다」라는 내용의 계엄사 경고문이 시내 전역에 공중 살포되었다. 계엄당국은 자위권 발동을 함에 있어「사전 경고를 발하고 3회 이상 정지명령을 내릴 것이며, 가능한 한 위협발사로 해산시키되 정황이 급박할 때도 생명에 지장이 없는 신체부위를 사격할 것과 선량한 시민에게 피해가 없도록 유의할 것」을 강조했다.계엄사령관의 자위권발동 경고에도 불구하고 폭도들은 무장 난동을 계속하였다. 처음 학생들이 주동이 되었던 시위는 점차 불량배들과 특정 정치 목적을 가진 선동분자들 위주로 변해 갔으며…』
20일 밤 9시경 최초발포(?)
그러나 광주시민들이 주장하는 발포시점은 이와는 판이하다.『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및『1980년대 민주화운동-광주민중항쟁자료집 및 상반기 일지』,『작전명령-화려한 휴가』등은 이보다 훨씬 전에 계엄군이 시위군중에게 총격을 개시한 것으로 증언하고 있다.『19일 오후 5시경-아세아극장 앞에서 또 시위대와 맞닥뜨려서 또 한 차례의 전투가 벌어져 시위대를 물리치고 다시 계림동 쪽으로 진격을 하니 통신병이 다급한 무전을 받는 것입니다. 광주고교 앞에서 A.P.C.장갑차 무전으로 병력배치 및 시위진압 지시를 하던 작전장교가 A.P.C.장갑차와 함께 고립 포위되어 있으니 빨리 오라는 무전이었습니다. 있는 힘을 다해서 저희 팀(9명)이 달려가니 M16소총 소리가 자동으로 20여발 쏘는 소리가 연달아 나는 것입니다.
광주 투입 후의 첫 총소리였읍니다.(이 총성은 작전장교 모대위가 A.P.C.장갑차로 광주고교 쪽으로 해서 조선대에 복귀하다가 시위대에 포위돼서 앞유리를 돌로 집중 난타당하자 겁에 질린 장갑차 운전병이 속도를 가하다 장갑차가 인도로 뛰어들어 가로수 한 그루를 받으면서 장갑차 디퍼런셜 기어가 인도 난간에 부딪쳐 부러져 꼼짝 못하자 시위대가 집단으로 장갑차 밑에 불을 지르고 장갑차위의 해치를 열고 화염병을 넣어, 안에 있던 모포 등으로 불을 겨우 껐으나 연기로 질식될 위기에 처하자 작전장교가 밖으로 몸을 내어서 M16공포를 쏘는 과정에서 고교생 1명이 목에 맞아서 최초의「발포」사망).저희가 도착하니 한 집앞 골목에서 울부짖음이 들리고 장갑차 안에는 경계용 실탄 2십몇 박스와 최루탄 등이 어지럽게 널려 있고 사병 2∼3명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있더군요. 차량이 와서 장갑차를 끌고 가고 저희는 광주고교앞 로타리에 진을 치고 있자 다행히 그때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군요. 비를 피할 곳도 없고 배는 고프고 춥고 세상 모든 사람은 적개심에 불타는 눈으로 저희를 보는 것 같고, K형, 저희의 모습을 상상하여 보십시요.』<『작전명령-화려한 휴가』41쪽>
『5월 20일 오후 9시경, 신역 전투 시작, 무등경기장 부근 고속도로 진입로 입구에 각종 차량 사오십 대 집결, 그대로 시가행진 돌입. 임동성당을 거쳐 광주역 앞 KBS못미쳐 중앙고속 터미널 앞에 도착, 행진 도중 차량은 엄청나게 불어남. 차량이 계속 몰리자 갑자기 총성이 올리고 계엄군의 저항도 필사적이 됨.오후 10시 30분, 공용터미널에서 광주역으로 향하는 모퉁이의 주유소에서 한 청년이 휘발유가 가득 든 드럼통 2개를 트럭에 싣고 불을 붙여 광주역을 향해 질주, 청년은 계엄군 전방 20m쯤에서 밖으로 뛰어내리고 트럭은 불덩이가 된채 돌진하여 바리케이드를 부수고 역전앞 분수대를 들이받아 폭발, 불기둥 치솟음. 이 무렵 계엄군은 공포로 위협만하던 것을 그치고 M16소총을 발사하기 시작, 투석하던 전위의 청년들 픽픽 쓰러짐. 도청 앞은 치열한 심야의 공방전 계속. 계엄군, 공포를 쏘아 대고 공중으로는 위협사격을 하는 기관총의 예광탄이 날음.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된 계엄군은 M16자동소총 발사 시작. 공수대는 군중이 흩어지면 일단 사격을 멈추었다가 모이면 또 쏘아 댐』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공식 발포명령이 떨어지기 전인 20일 밤늦게 몇 차례의 총격이 시민들에게 가해진 이후, 일단의 시민들은 21일 새벽 1시경 도청뒤에 있는 광주세무서로 몰려가 최초로 무기고를 깨부수게 된다. 이들은 여기서 실탄없는 카빈 몇점을 손에 쥐었다.「무기탈취」가 개시된 순간이다.
『살아남기 위해 武裝을……』
「발포명령」이전의 총격상황을 보면 다음과 같다.『제가 듣기로는 그날 밤, 발포명령은 21일 8시부로 내렸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발포는 그 앞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날 밤도 산속에서 그냥 지내는데 밤새 총소리는 잠시도 끊이지 않았습니다. 시위대가 우리의 지역에 침투, 경계지역대와 총격전이 벌어지는 소리였습니다.』<『작전명령-화려한 휴가』> -21일 새벽 4시경, 공수대의 발포에도 불구하고 계속 밀려드는 시위대의 필사적인 공격으로 쌍방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며, 계엄군은 끝내 신역에서 철수함. 이 과정에서 시위대가 KBS에 방화했으나 자체 소방시설로 곧 진화됨.아침에 신역전투에서 전사한 시민의 시체 2구 발견. 시민들은 군용 지프차 뒤에 손수레를 연결하여 그 위에 시체를 싣고 대형 태극기로 덮어 시내를 천천히 시위하며 지나감. <이하, NCC인권위刊「광주민주항쟁자료집」>
―오전 9시, 금남로에는 십여만의 군중운집. 무장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 청년 20∼30명이「우리도 무장이 필요하고, 무장을 위해서는 차량이 필요합니다」고 외치며 군납 방위산업체인 아세아자동차 공장에서 7대의 버스를 몰고 금남로로 돌아옴. 9시 45분, 이들은 아세아자동차 공장으로 다시 가서 대형 버스 22대, 장갑차 3대, 군용트럭 33대, 민간트럭 20대 등 모두 80여 대 징발. 차량에 가득 탄 중·고생과 젊은이들은 몽둥이로 차체를 두들기고 각종 구호를 외치며 오전 중에는 외곽지역의 시민들을 동원하여 금남로 수송』―11시 30분경. 도청을 중심으로 한 여러 갈래의 도로에 30여 만 이상의 시민 운집. 거의 바닥난 계엄군의 최루탄에도 시위대의 기세는 꺾일 줄 모름. 갑작스런 총성, 시위대 선두 몇이 쓰러짐. 순식간에 시위대열은 좌우로 갈라졌고 금남로는 텅 빔.―갑자기 벤즈 고속버스가 군 저지선으로 돌격. 계엄군 LMG난사, 차안에 있던 20여명의 청년 몰사. 시민들의 평화적 해결 기대 무산되고, 무기를 획득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 외곽지대에서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시위대들은 무기 탈취의 목적으로 가까운 교외 진출 시도.―노동청에서 도청으로 뚫린 길 입구의 고교생 2백여 명이 돌을 던지며 돌격. 공수부대의 조준사격으로 7명∼8명이 머리와 가슴을 맞고 쓰러짐. 시민들은 꿈틀거리는 학생을 구원하려고 뛰어나갔고 조준사격은 그들도 사살시킴. 연발 위협사격 가함. 또 몇 사람 뛰어갔다 쓰러짐.
피비린내나는 血鬪 계속
―오후 1시 5분, 금남로 YMCA와 제일은행 사이에 서 있던 대형 화물트럭이 공수부대의 저지선으로 돌진. 공수부대, M16자동소총 연발사격. 유리창에 맞고 정지. 차를 운전하던 청년은 피투성이로 트럭을 필사적으로 빼내고 동구청 앞에서 멎음. 운전석에서 절명, 뒤 화물칸의 두 청년도 돌멩이를 쥔 채 사망. 군중이 트럭 근처로 모이자 공수부대, 트럭을 향해 무차별 난사.― APC 장갑차를 타고 상의를 벗어 제친 청년이 머리에 흰 띠를 두르고 태극기를 휘두루며「광주만세」를 외치며 전속력으로 도청을 향해 진격. 도청 4층 옥상의 공수부대가 청년의 머리를 쏘았고 청년 즉사.―대여섯 대의 군용차량이 비무장인 채 연이어 도청으로 돌진. 공수대가 도청 옥상의 M60기관총으로 쏘아대자 차는 도청 분수대와 도청 정문, 담에 부딪치며 그들은 벌집이 된 채로 사망.―산수동에서 계엄군이 시위대원 5명을 살해한 후 트럭 위로 집어던짐. 그 위에 있던 자가 흰 페인트로 시체의 신원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시체의 얼굴에 칠을 함(목격자 증언).―도청 부근 상공에 군용 헬리콥터가 나타나더니 고도를 낮추며 MBC가 있는 제봉로 근처에 기총소사.―2시∼3시경, 2백여 명의 시민이 중앙로 지하상가 공사현장에서 농성 시작. 도청 쪽에서 날아온 탄환이 농성을 지휘하던 학생의 어깨 관통.―2시 40분경, 지원동 석산 탄약고 파괴. 다량의 TNT-뇌관 입수.
―3시 20분경부터 각종의 총기로 무장한 청년시위대가 도청 앞에 진격하여총격전 벌임. 시민들은 이들 무장시위대를 「시민군」이라 부르기 시작.「시민군」을 아군,「계엄군」을 적군이라 부름. 최정예군과 M16자동소총, M60기관총(자동), 기관단총에 2차대전때의 잔존무기인 M1과 카빈 소총으로 대항하여 엄청난 희생자가 생김. 전남방직과 호남전기의 예비군 무기고에서 다량의 무기와 실탄을 획득하여 계속 분배, 사상자는 방치된 채 사상자가 쓰던 총을 곧 집어 다시 싸우며 희생자는 계속 늘어감. 이 시가전은 공수대가 도청에서 철수한 5시 30분까지 계속됨.―4시경부터 민중들 사이에 자발적으로 형성된 전투지도부의 지휘로, 무장한 시민군이 탄 각종 차량들이 광주공원으로 집결 시작. 5시경 수백 대의 차량과 수천의 군중이 모이자 40대 예비군 중대장으로 보이는 중년남자가 통제 시작. 조별로 부대 편성, 총기조작법·수류탄 사용법·사격요령 등을 지도한 후 최후의 결전을 위한 배치를 하고 각 지역으로 분산시킴.
―유동 3거리에서도 예비군인 듯한 중년남자가 체계적인 지시를 하며 차량과 총기 배치. 2백 명의 무장한 시민군 편성.―5시경, 시민군 특공대 11명이 LMG기관총 2정을 메고 전남의대 부속병원 12층 옥상으로 올라감. 이곳은 계엄군 임시본부인 전남도청의 4층이 정확히 사정거리 안에 포착. 시민군은 전술적으로 유리한 고지와 우수한 화기를 갖추고 사격 시작.―5시 30분, 계엄군의 총퇴각 결정. 장갑차 한 대가 학동 방면으로 질주하며 길 양옆에 M60 기관총을 무차별 난사하며 지원동 입구까지 두 차례 왕복, 이는 계엄군의 퇴로를 확보하기 위한 위협사격이었음. 많은 시민들 살상. 잠시 후 병력을실은 군용트럭 10여 대가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며 길 양옆으로 M16난사. 시민군도 맹렬히 사격. 계엄군은 소속 부대별로 조선대 쪽으로 퇴각. 어둠을 이용하여 외곽도로로 전 부대가 빠져 나감.
『건물옥상에서 난사』
발포시점 및 「무장 시민군」의 등장과 관련, 지난 2월 4일 民和委에 출석한 배근수씨(5·18광주의거유족회 고문)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시민들은 총과 무기가 없어 삽이나 곡괭이를 갖고 나왔으며 부지깽이를 들고 나온 부인들도 많았다. 21일 오전부터 그렇게 사람들이 나왔는데 오후에 공수부대가 왔다. 사람들이 너무 차 있어서 뚫고 들어올 수가 없자 공수부대는 건물옥상으로 올라가 총을 난사했다. 그날 사람들이 제일 많이 죽은 것 같다. 내 사위도 그날 죽었다. 군인들이 총을 난사한 후 그날 저녁 철수명령이 내려 군인들이 나갔다.시민들은 전부 합세해 곡괭이들을 들고 忠壯路파출소 등을 삽과 곡괭이로 찍어 무기를 들고 나왔다. 경찰은 모두 달아나버렸다. 경찰무기창고도 곡괭이로 찍어 무기를 나눴다. 공수부대가 시내에서 나갈 때 진월동이라는 데서는 14살된 아이가 개울에서 친구랑 둘이 멱을 감다가 군인들을 보고 무서워 강둑위로 도망가던 중 신발이 벗겨져 그것을 주으려다 맞아 죽었다는 얘기도 들었다. 이것 하나만 보아도 光州사태진압이 어떤식으로 이뤄졌는지 위원들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시민들에 대한 계엄군의 무분별한(정확한 발포지점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지역마다 시점이 다르다)총격과 더불어 또 한가지 전율한 사건은 ▲헬리콥터에서의 총격과 ▲화염방사기가 사용됐다는 증언들이다.『19일 오후 트럭을 타고 羅州로 대피했다. 20일 光州의 세무서와 MBC KBS가 불타고 시민들이 광주를 장악했다는 소식을 듣고 아침 일찍 광주로 들어갔다. 시내 곳곳마다 검은 연기가 솟아 올랐고 군용트럭에 탄 시민들이 애국가와 반정부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오후 2시쯤 군용트럭을 타고 시내를 돌아봤는데 갑자기 월산동로터리 부근에서 헬리콥터가 나타나 사격을 가했으며 길가의 한 학생이 쓰러졌다……』<이광영씨(광주사태부상자회 부회장)증언중에서>『한편 금남로에서는 도청 부근 상공에 군용 헬리콥터가 나타나더니 갑자기 고도를 낮추며 MBC가 있는 제봉로 근처에서 기총소사를 하기 시작했다. 금남로 주변의 골목에서 웅성거리던 사람들은 일시에 땅바닥에 엎드리거나 건물안으로 숨었다. 많은 사람들이 계속 희생되었다.』(『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20일 오후 2시경, 서방 3거리의 시민과 공수부대 사이에 충돌. 공수부대는 화염방사기로 20m의 불길을 뿜어 댔고, 시위대 선두에 섰던 사람들은 순식간에 불에 타 죽음. 공수부대는 시체 및 부상자를 군용트럭에 싣고 감. <NCC인권위刊, 『1980년대 민주화운동―광주민중항쟁자료집 및 상반기일지』>
사망자 숫자는 과연 몇 명인가?
지난 7년여동안 내내 5·18관련단체들은 사태로 인해 유명을 달리한 「민주영령」은 줄잡아 2천여명이라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정부당국은 정부가 공식적으로 발표한 1백 98명의 사망자 이외에는 더 이상 없다는 주장을 견지해오고 있다.지난해 대통령선거 직전인 12월 14일 평민당측이 내놓은 「광주의거의 진상」에서 김대중후보는 5·18관련단체들이 지금까지 주장해온 숫자와는 조금 다른 「1천명 이상의 사망자」를 주장했다. 즉 김후보는 이 자료집에서 『희생자수만 하더라도 당시의 주한 미대사인 「글라이스틴」의 증언으로도 1천명에 달한다고 하였으며, 실제로 최소한 천명 이상의 사망자를 냈던 것』이라 밝히고 있다.앞서의 5·18부상자인 이광영씨는 「의문에 싸인 사망자 숫자」와 관련, 다음과 같은 증언을 함으로써 더욱 더 깊은 의구심을 자아내게 했다.『정부는 사망자 1백 98명, 부상자 1천여명으로 발표했지만 정부측사망자숫자는 기독―적십자―전대병원등 각 병원 영안실에 안치된 숫자만을 가리키는 것이다. 통합병원 사망자숫자는 포함조차 안했으며 계엄군의 차에 실려간 수많은 사망자숫자는 은폐돼있다. 당시 기종도라는 구청청소원이 광주사태 후 갑자기 교도소에 수감돼 사망했는데, 기씨가 사망자를 청소차에 실어 운반했으며 매장한 장소를 알고 있다는 얘기를 기씨에게서 직접 들은 적이 있다. 기씨가 비밀을 누군가에게 얘기했으며 수사기관이 이를 알고 교도소에서 죽인 것으로 판단된다.
의문 풀리지 않는 「광주시통계연표」
광주시 통계연표에 나타난 80년 5월 한달의 사망자숫자를 정부는 사무착오라고 발표했으나 나는 그렇게 믿지 않는다. 부상자수도 내가 알기론 2천5백여명에 달한다.정부가 재신고를 받는다고 하지만 기관에 찾아가면 「당신을 부상시킨 공수부대원의 관등성명을 대라」며 접수를 받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그러나 李씨의 『정부측사망자 숫자에는 통합병원의 숫자는 포함되지 않았다』는 주장에 대해, 당시 전남북 계엄분소장이었던 蘇俊烈씨(당시 CAC사령관)는 『그곳에도 물론 시체가 있었으나 사망자수에 다 들어가 있다』고 반박했다.이어서 蘇씨는 사망자숫자와 관련,『27일 새벽 작전에서 공수부대특공요원 등 3명이 사망했고 도청에서 끝까지 저항한 17명의 시민이 죽었다. 당시 실종신고를 자유롭게 받았으나 별다른 신고가 없었다. 사상자만큼은 본인의 명예를 걸고 발표된 이상이 안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시체에서 탄흔을 전부 검출해 보니 현역 군인들이 가지고 있던 M16에 죽은 사람은 45명이었다.』고 증언하고 이와 함께 蘇씨는 『최선을 다해 희생을 줄였다』『군인에 의해 죽은 숫자는 45명 뿐이다』『45명 이외에는 자기네들끼리 싸우다 죽었다』는 주장을 덧붙였다.이에 대해 『참으로 무책임하고 방자한 언행이 아닐 수 없다.
언제는 자기가 부임(CAC사령관)한 것은 5월 21일 이후라서 그전의 일은 모른다고 잡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