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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 및 지역간에 단절된 5·18을 서로 연대할 수 있는 기억과 학습의 장”

5·18 온라인 기념관

소개

전남대학교 5·18기념관은 80년 5·18항쟁을 정점으로 하는 우리나라의 민주화운동 역사에서 전남대인들이 함께 걸었던 발자취를 모아 기억하고 기념하기 위한 공간이자 또한 이를 현재적 의미로 승화시키기 위한 공간이다. 5·18기념관에는 광주의 일반 시민, 전남대학교 출신 민주화운동가 및 교수들이 소장하고 있던 성명서, 전단지, 회의록, 메모, 서적, 사진, 비디오, 희생자들의 유품, 항쟁 당시 용품 등 귀중한 자료 1,000여점이 각 주제별로 전시되어 있다.

또한 196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의 전남대학교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했다.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산화한 김남주, 윤상원, 박관현, 박승희 등 전남대학교 출신 열사들의 활동과 수고한 정신도 보고 느낄 수 있다. 5·18기념관은 비록 넓지 않은 공간이지만 세대 및 지역간에 ‘단절된 5·18’을 서로 공감하여 연대할 수 있는 기억과 학습의 장이다.

제1관 민주역사관은 1960년대 이후 현재까지 전남대 학생과 교수가 참여했던 주요 투쟁과 운동의 기록을 소개하고 있다.

제2관 오월관은 5·18항쟁의 전개과정을 사진과 현장 자료들을 중심으로 재현하여 5·18항쟁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는 공간이다.

제3관 민주열사관은 민주화 운동에 헌신하였던 전남대 열사들의 삶을 이해하고 추모하는 곳이다.

제4관 민주영상관은 민주화운동의 영상기록과 영화, 비디오 등 영상자료를 관람할 수 있는 곳이다.

제5관 민주감성관은 5·18 및 민주화운동 관련 자료와 예술작품을 기획 전시하는 공간이다.

제6관 아카이브실은 전남대가 축척해 온 민주화운동 연구와 성과와 기념물들을 보관 열람 공유하는 공간이다.

‘겨울공화국’ 유신체제를 지나 움트는 민주 의지

1980년 봄, 5.18민주화운동의 발발

518항쟁, 해방광주와 대동세상으로

한눈에 보는 518항쟁의 전개과정

계엄확대 조치와 산발적 시위 (1980. 5. 17. ~ 5. 18.)

  • 1980. 5. 17.

    비상계엄령 전국 확대, 광주 시내 대학에 계엄군 진주 및 학생연행

  • 1980. 5. 18.

    전남대 정문에서 학생, 공수부대 간 최초 충돌

  • 1980. 5. 18.

    오후 유동삼거리에 공수부대 등장하면서 진압 작전 감행

  • 1980. 5. 18.

    시위과정에서 시민·학생 549명이 검거됨

강경진압에 대한 시위 확산 (1980. 5. 19. ~ 5. 20.)

  • 1980. 5. 19.

    시민들 광주 시내 운집하기 시작. 11공수여단 광주에 증파

  • 1980. 5. 20.

    오전 가톨릭센터 앞에서 남녀 30여 명이 속옷만 입은 채 구타당함 / 공수부대와 시민 간의 공방전 계속

  • 1980. 5. 20.

    오후 200여 대의 택시가 전조등을 켜고 경적을 올리며 차량시위 전개

  • 1980. 5. 20.

    저녁 광주 MBC 사옥 방화

계엄군의 집단 발포와 무장항쟁 (1980. 5. 21.)

  • 1980. 5. 21.

    오전 실탄 지급 받은 공수부대원 맨 앞으로 배치

  • 1980. 5. 21.

    도청 스피커에서 애국가 울리자 공수부대 사격 시작

  • 1980. 5. 21.

    시민들이 아시아 자동차 공장에서 군용트럭, 장갑차 수십 대 끌고 나옴

  • 1980. 5. 21.

    화순, 나주지역에서 무기 획득한 시위대가 도청 앞에서 시가전 전개 / 오후 공수부대원 시 외곽으로 철수

해방광주, 시민자치 공동체 (1980. 5. 22. ~ 5. 26.)

  • 1980. 5. 22.

    시민수습대책위원회 결성

  • 1980. 5. 22.

    시체 18구를 도청광장에 안치한 채 시민대회 개최

  • 1980. 5. 23.

    학생수습위원회 대변인 외신기자들에게 광주 상황 브리핑

  • 1980. 5. 26.

    시민군, "계엄군이 오늘 밤 침공할 가능성이 크다"고 공식 발표

무력진압과 결사항전 (1980. 5. 27.)

  • 1980. 5. 27.

    새벽 탱크를 앞세우고 계엄군 시내로 진입

  • 1980. 5. 27.

    새벽 도청주변 완전 포위, 시가전 전개

  • 1980. 5. 27.

    새벽 계엄군, 도청을 비롯한 시내 전역 장악하고 진압 작전 종료

  • 1980. 5. 27.

    새벽 계엄군 무력진압으로 5·18항쟁 막을 내림

5월 운동에서 6월 항쟁으로

한번에 열기
  • 자유를 빼앗긴 대학

    시위 방지를 위한 학생지도 지침들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1980년대의 대학은 자유와 자율성을 완전히 상실했다. 대학의 교직원들은 학생들을 감시·통제하는 역할을 강요받았고, 학교 당국은 시위 우려가 있는 학생들을 분류하여 감시·지도했다.

  • 5·18항쟁의 계승을 위한 민주화운동

    1980년대 전남대 캠퍼스에서는 5·18항쟁의 진상 규명과 학살자 처벌, 대학 민주화, 구속 학생들의 석방과 복학, 광주학살을 묵인한 미국의 사과, 노동자·농민 등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배려 등을 목표로 수많은 시위가 이어졌다. 또한 전남대 총학생회장인 박관현이 1982년 구속 후 사망하자 전남대와 광주 시내 일원에는 5·18항쟁 이후 가장 치열한 대정부 투쟁이 전개되었다. 매년 10월 박관현 열사 추도 시위는 대학가를 달구는 연례행사가 되었다.

  • 총학생회의 부활

    1984년에 전남대생들은 대학 민주화를 위해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얼마 후 민주회복추진위원회로 바뀜)를 구성했다. 1985년에 학도호국단체 대신 직선제에 의한 총학생회가 출범하고 학생회장에 오병윤이 당선되었다.

    ▶ 1985년 투쟁조직 및 전국적 연대조직 출범

    ● 민주쟁취·민중수호·민족통일 투쟁위원회(삼민투)

    ● 5·18진상규명투쟁위원회(오진투)

    ● 전국학생총연합(전학련)

    ● 호남지구학생연합(호학련)

  • 6월항쟁 후의 민주화운동

    1987년 6월항쟁 후 한국 사회는 정치뿐만 아니라 교육, 노동, 문화 등 각 분야에서 민주화운동이 더욱 거세게 일어났다. 민주화 세력은 5·18 진상 규명과 책임자처벌, 남북화해와 평화통일, 민중의 삶의 질 개선, 민주화 세력의 집권 등을 희망하며 민주화운동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 6월항쟁 후의 학생조직

     

    6월항쟁 후 학생운동을 이끈 전국조직으로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가 출범했다. 전대협은 발족선언문에서 자주적 민주 정부 수립, 조국의 평화통일, 민중연대, 학원 자주화, 백만학도의 통일단결 등을 활동목표로 내걸었다. 전대협의 출범과 동시에 광주·전남지역 대학생들은 전남지역대학생 대표자협의회(남대협)을 결성했다. 전대협은 1993년에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으로 바뀌었다.

  • 전국 학생운동의 중심지로 떠오른 전남

    6월항쟁 후 전남대 학생운동의 큰 흐름은 민주화, 반미, 통일운동,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연대 운동으로 1990년대 이후 전국 학생운동의 중심에 서서 활동했다. 학생들 중 여러 명이 전국학생조직의 대표를 맡았다.

  • 치열한 학생운동과 박승희 분신

    1991년 4월 26일, 전남대생이었던 박승희(식품영양학, 90)는 명지대생 강경대를 사망에 이르게 한 정부의 폭력성을 규탄하며 온몸에 시너를 끼얹고 분신했다. 전남대생들은 박승희를 추모하는 대규모 집회와 가두시위를 전개하였고, 이후 매년 4월에 박승희 정신 계승 집회를 열고 있다.

  • 교수들의 민주화운동

    1987년 6월항쟁 후 전남대는 대학 민주화의 일환으로 전국에서 두 번째로 총장 직선제를 관철시켰다. 또 교수평의회를 결성하여 학원 민주화를 도모했다. 같은 시기에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민교협)'라는 전국적 규모의 민주 교수 조직이 출현했다.

  • 전남대 교수들의 시국선언

    전남대 교수들은 민주화운동의 중요한 길목마다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 1986년 4월, '우리의 견해'라는 시국선언문을 발표하여 민주화와 대학의 자율을 촉구

    - 1986년 6월, 전남대 교수들을 비롯하여 전국 23개 대학교수 265명이 '우리의 뜻을 다시 한번 밝힌다' 라는 시국선언문을 발표하여 민주헌법 제정 등을 촉구.

    - 1987년 5월, 60명의 교수들이 '현 시국에 대한 우리들의 견해'라는 성명서를 발표하여 직선제 개헌 촉구.

  • 정치적 민주화
      

    오랜 민주화운동의 역사는 권위주의 정권을 몰아내고 민주적인 정부의 수립을 이끌어냈다. 5·18항쟁이 일어난 지 16년 만에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부정부패 및 내란 목적 혐의로 법의 심판을 받게 했다. 

  • 민주주의의 제도화

    ‘5·18특별법’ 제정 운동은 1980년대 이후 민주화운동의 주요 목표 중의 하나였다. 1995년 ‘5·18민주화운동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어 광주 시민들의 명예회복이 이루어졌다. 또 1997년에는 5월 18일이 ‘광주민주화운동기념일’로 제정되었으며, 국가인권위원회와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설치 등 인권 보호와 신장을 위한 진일보한 제도적 조치들이 속속 마련되었다.

     

  • 통일운동의 큰걸음
     

    민주화운동세력들은 정치적 민주화 외에 통일을 또 하나의 중요한 과제로 설정했다. 통일운동은 2000년 6월 15일 남북정상회담으로 큰 진전을 이루었다. 남북의 두 정상은 대립과 반목으로 점철된 남북관계의 기본 틀을 평화공존과 화해·협력으로 전환하는 남북공동선언에 합의·서명했다.

     

  • 민주화운동의 승화

    억압되었던 시민의 삶의 개선이 민주화운동의 새로운 목표가 되면서 노동자와 농민 운동뿐만 아니라 여성, 평화, 인권, 문화예술, 소수자, 환경운동 등 새로운 운동들이 출현하여 민주주의의 지평을 넓혀가고 있다. 이제 민주화운동은 새로운 삶의 구성원리로 승화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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