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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광주사태 관련 10대 오보·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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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사태 관련 10대 오보·과장

                                                                                                    이동욱(월간조선 기자)



  오보로 엮어 본 사건

  기사를 모으면 역사책이 된다고 한다. 한 시대의 주요 사건을 알기 위해 가장 많이 사용되는 조사방법은 사건관련 기사 스크랩을 보는 일이다. 김대통령의 「5.18 특별법」 제정지시가 내려진 1995년 11월 24일부터 검찰의 12.12, 5.18 재수사 발표가 끝난 1996년 2월 27일까지 3개월간 신문에 보도된 광주사태 기사를 훗날 누군가가 보게 된다면 그는 광주사태를 다음과 같이 생각하게 될 것이다.
<광주사태가 일어나기 전부터 공수부대는 혹독한 진압훈련을 받았고 특히 시위대의 머리를 때리도록 훈련받았다. 1980년 5월18일 광주에서는 시위대 중 90% 이상이 곤봉으로 머리를 맞았다. 어림잡아 10여 명이 숨겼다. 당시 광주에 투입되기 전 7공수병력들은 1인당 60발씩 실탄을 이미 지급받았다.
진압과정에서 공수부대원들은 여자들을 연행해 성폭행했으며, 지휘권은 2원화되어 전두환 보안사령관 및 정호용 특전사령관이 지휘계통에 끼어 들어 사실상의 영향력을 행사했다. 또한 전두환씨는 실질적 발포명령자로서 그의 명령에 의해 시민들이 총에 맞아 숨겼다.
한편, 탱크 진압도 있었으며, 시민이 탄 차에 화염방사기를 발사해 3명이 중화상을 입었다. 광주 교도소에서는 수십 명을 학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특히 교도소에서 계엄군들은 대검과 개머리판 등으로 마구 때리고 담뱃불로 눈을 지지거나 대검으로 머리 껍질을 벗겼고 매일 사람들이 죽어 헬기로 실어 날랐다. 광주 교도소에서 최소한 52명이 숨겼다.
80년 5월24일에는 계엄군 간 오인 사격이 있었는데 매복하고 있던 전교사 병력이 지뢰까지 매설했고 이것을 11공수여단 병력이 밟아 터지는 바람에 9명의 사망자와 33명의 부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열흘 뒤인 5월27일 계엄군측의 전남도청 진압과정에서 도청 폭파 및 타대 공격까지 계획했으며 이 날 진압과정에서 어림잡아 1백여 명 이상이 사살됐다>
이 내용은 신문기사를 통해 보도된 기사만으로 엮어 본 것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 내용과 유사한 사건 인식을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유사한 인식들이 모이면 여론이 된다.
그 여론에 편승한 이른바 「역사 바로 세우기」가 「역사의 심판」을 진행하는 시점에서 광주사태와 관련한 유사한 인식을 구성해 온 주요 신문기사들을 검증해 보기로 했다.

사례1. 「광주진압」 중화기까지 사용

대전차용 「캘리버50」 동원, 금남로 버스시위대에 발포(제목)
<80년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계엄군측이 대전차용 중화기 인 캘리버 50(M50)을 발포했다는 사실이 모 공수여단 소속 장교로 광주진압에 참가했던 최모씨(42.당시 중위)의 증언에 의해 밝혀졌다. 최씨는 3일 기자와 만나 『80년 5월 21일 오후 도청 앞 시위를 진압할 당시 공수대원들의 발포가 시작되자, 금남로 입구에 있던 APC장갑차에 장착된 캘리버 50을 발포했다』고 말했다…(중략)…
이와 함께 도청 앞 발포가 이뤄지기 전에 시민들이 몰려 장갑차에 깔려 군인 한 명이 숨지고 한 명이 부상당한 것으로 알려진 것과 관련, 최씨는 『시민들이 계엄군측 장갑차에 몰려들자 장갑차가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다 사고를 일으켰다는 얘기를 부대원들로부터 들었다』고 말했다…(후략)> (세계일보 1995년 12월17일자)
이 기사의 내용대로라면 제목에서는 「증언」 혹은 「주장」이란 단어가 들어가야 객관성이 확보될 수 있다. 기사 본문에서도 실수가 보인다. 기사는 「…증언에 의해 밝혀졌다」고 하여 취재원이 기자 개인에게 밝힌 내용을 두고 독자에게 「조사 결과 밝혀진 사실」로 오해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한편, 부제는 「금남로 버스시위대에 발포」 즉, 「버스시위대」에 총을 발포한 것으로 되어 있고 내용은 「버스」를 향해 발포했다고 되어 있다. 차량을 향해 쏜 것과 시위대에 총을 쏜 것은 엄연히 다르다. 특히 「발포했다」는 사실과 관련, 95년 7월 검찰 조사 결과를 보면 다음과 같다.
  <검찰측 자료:장갑차의 갑작스러운 돌진에 놀란 계엄군 장갑차 소대장이 장갑차에 거치된 기관총 방아쇠를 건드려 공중발포가 되었다>
검찰측은 공중발포라 하고, 진술자의 말을 빌어 쓴 세계일보 기자는 「버스를 향해」 혹은 「버스에 탄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이 기사를 쓴 기자는 검찰발표문을 대조해 검증하지 않고 일방적인 진술자의 말을 빌어 기사화했다.
한편, 검찰측의 발표문에도 문제는 있다. 6하원칙에 의해 기록했다면 무슨 기관총인지 밝혔어야 하지만 이것을 제대로 지키지 않아 세계일보의 「캘리버 50」이란 명칭을 「기관총」으로만 기재하고 있다.
기사내용 중 진술자의 「장갑차 사고는 계엄군측의 실수」라는 주장 내용은 기존에 알려진 것과 1백80도 다른 내용이다. 이 사건은 월간조선 88년 7월호에 실린 「공수부대의 광주사태」에서 실명 증언자에 의해 이미 소개됐으며, 95년 7월 검찰의 조사결과에서도 월간조선측과 동일한 결론을 얻고 있다.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검찰측 자료:(5월21일) 13시경 공수부대가 철수하지 않는 데 항의하며 시위대가 화염병을 투척하여 계엄군 장갑차에 불이 붙는 순간 시위대의 장갑차 1대가 갑자기 공수부대쪽으로 돌진했다. 공수부대 저지선이 무너지면서 공수부대원들은 장갑차를 피해 좌우로 갈라져 부근 전남도청, 상무관, 수협 도지부 건물 등으로 산개하였다. 미처 피하지 못한 공수부대원 2명이 장갑차에 깔려 1명이 사망했다>
<월간조선 88년 7월호 「공수부대의 광주사태」:당시 현장에 있던 11공수여단 소속 통신병 경기만씨 증언에 의하면 시위대 장갑차 돌진으로 사망한 대원은 11공수여단 소속 권용문 상병이라고 한다. 권상병은 머리가 장갑차 바퀴에 눌려 짓이겨진 채 즉사했고, 다른 사병은 가볍게 다쳐 곧 일어나 달아났다>
이 기사는 특히 두 차례에 걸친 검찰조사도 있었다는 점에서 최소한 검찰의 수사기록과 비교 검증하거나 국방부측의 견해도 함께 실었어야 공정성이 확보될 수 있다. 취재원의 말을 보도하는 경우, 가능한 사실검증을 해 줄 의무가 기자에게 있기 때문이다. 인용된 기사는 아무런 검증 없이 한 사람의 주장만을 보도하면서 「사실」처럼 독자들의 인식을 오도했다.

사례2. 성폭행 설 보도

5.18 성폭행 피해자 아직도 고통 (제목)
<5.18 때 진압군과 군수사관으로부터 성폭행이나 성고문을 당한 여성들이 아직도 심한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중략)…유씨는 「다른 여자 한명과 함께 얼굴을 치마로 가려진 채 실려가다 한 건물로 끌려들어가 군인 5명에 의해 윤간을 당했다」고 주장했다…(중략)…전옥순(46.가명.서울 거주)씨는 군수사관의 성고문으로 여성을 잃은 여자, 전씨는 계엄군이 시민군을 완전히 진압한 5월27일 계엄분소가 설치된 상무대로 끌려가 당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석녀가 됐다는 것> (중앙일보 1995년 12월20일자)
광주사태의 피해자 중 성폭행을 다했다는 보도는 이미 수차례 있었다.
성폭행과 관련한 보도는 1996년 1월9일자 동아일보에서도 발견된다. 그런데 이 기사는 「공수대원에 성폭행 당해」라는 제목을 뽑았지만 기사에서는 「성폭행을 당했다는 Y모씨」라고 표기해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피해자」라고 소개하면 피해사실을 인정한 것이지만 「당했다는 Y모씨」는 진술자의 말을 한걸음 물러나 소개하고 있는 점에서 사실로 인정한 앞의 보도와는 다르다. 이것은 기자가 확인하지 않고 당사자의 말을 들어 보도할 때의 원칙을 지킨 사례이다. 중앙일보와 동아일보는 5.18과 관련 성폭행사건이랑 유사내용을 보도하는 과정에서 대비되는 기사를 쓰고 있는 것이다.
한편, 5.17, 5.18 관련 재수사를 담당했던 한 검사에게 성폭행 설과 관련한 진위 여부를 물어보았다. 검찰의 답변은 이랬다.
「조사는 했어요. 그러나 단적으로 말해 입증 불가능한 사건입니다. 대부분이 정신이상 증세자거든요」
반면, 진압에 참가한 당시 공수부대 하사관과 장교들은 이렇게 대답하고 있다.
「상식적으로 군대를 모르는 사람들이 만든 말입니다. 진압이란 것이 우리들로서는 가장 위험한 지역에 투입된 셈인데, 개인행동이 가능할 수 없다는 겁니다. 중대장 밑에 열한 명이 함께 움직이는데 단 한 사람이라도 없어진다면 작전에 차질을 빚습니다」
「죽을지도 모르는 판국에 성욕이 일어납니까? 악의적인 소문이라 봅니다」
당시 동아일보 광주 주재기자로 광주사태의 현장을 취재해 「10일 간의 취재수첩」이란 책을 냈던 김모씨는 이 문제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때 공수부대들이 그런 짓을 할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얼룩무늬 예비군복이 공수부대와 비슷해서 피해자들이 오해할 여지가 많아요. 무조건 공수부대만 잘못한 걸로 몰아가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광주사태는 그렇게 해서 풀리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기자들이 확인하고 써야 진실규명이 됩니다」

사례3. 지휘권 2원화 있었나, 없었나. 명시적 발포와 실질적 발포

지난 1월24일 검찰의 5.18 재수사 결과 발표가 있자 모든 신문들이 이 내용을 기사화했다. 검찰은 기자회견에서 「전보안사령관과 정호용 특전사령관이 명령계통에 끼어 들어 사실상 영향력을 행사하긴 했으나 이를 지휘권 2원화로 보긴 무리다」라고 말했다. 검찰의 이같은 발언은 신문마다 다르게 보도되었다.
*조선일보:「발포명령자·지휘권 2원화 없어」 *동아일보:「전두환·정호용씨 지휘권 행사」 *중앙일보:「지휘권 2원화도 확인」 *경향신문:「광주지휘권 2원화 확인」
한편, 2월28일 검찰이 12.12 관련자들에 대한 추가기소를 발표하는 가운데 가진 기자회견에서 5.18의 발포책임자와 관련한 기자의 질문에 답변했다.
「80년 광주진압 당시 명시적인 발포명령자는 없었으나 광주진압에 투입된 현장 지휘관들이 육본 지휘부의 자위권 발동을 발포명령과 동일하게 받아들인 점으로 미뤄볼 때 당시 육군을 지휘한 이희성 참모총장과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실질적 책임자로 볼 수밖에 없다」
이 답변은 그날 석간부터 이튿날 조간의 모든 신문에 제목으로 뽑혔다. 그러나 발포책임자는 신문마다 다음과 같이 혼돈된 상태로 보도했다.
*조선일보:「전씨, 명목상 발포 책임자」 *동아일보:「전씨가 실질 발포책임자」 *한겨레:「명시적 발포 명령은 없었다」 *세계일보:「전두환·이희성씨 광주발포 실질 책임자」 *중앙일보:「광주 발포 책임자는 전씨」 *한국일보:「전씨, 광주발포 실질책임」
독자들로서는 지휘권 2원화가 있는지 없는지 헷갈리게 됐고, 발포책임자와 관련해서는 「명목상 책임자」와 「실질적 책임자」 사이에서 방황하게 됐다. 검찰의 발표를 기사화하는 과정에서 언론사들은 자신들의 구미에 맞는 쪽으로 해석해 제목을 뽑았던 것이다. 문제의 원인은 검찰이 제공하고 있다.
검찰은 언론의 입장을 계산하고 입맛대로 골라 쓰라는 식의 양면성있는 발언을 한 셈이다. 지휘권 2원화와 관련해 5.18 수사담당 김상희 부장검사에게 「지휘권 2원화는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까」라고 질문하자 김검사는 이렇게 답변했다.
『기자회견장에서는 「흑백논리로 말하자면」이라고 했는데 그게 아니라, 「예스냐, 노냐」라고 묻는다면 「노」라는 뜻이었습니다. 즉  없다고 해야죠. 우리 입장에서는 「2원화로 보기 어렵다. 사실상 무리다」라는 겁니다.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대세를 바꿀 만한 일은 없었던 걸로 압니다. 또한 정호용 특전사령관이 명령계통에 끼어들었다는 건 조언해 주는 차원이었습니다』

사례4. 탱크 진압 과장 보도

탱크진압 사실 확인(제목)
<황영시 참모차장은 5월21일 이구호 기갑학교장에게 기갑학교 전차1개대대(32대)를 동원하여 시위대를 진압할 것을 지시했다. 황씨는 또 김기석 전교사 부사령관에게도 「무장헬기와 전차를 동원해 시위대를 조기진압할 것」을 지시한 것으로 드러났다> (경향신문 1996년 1월24일자)
이 기사는 황영시 당시 육군 참모차장의 탱크진압 지시와 관련, 검찰측 발표를 보도하면서 제목을 「탱크 진압 사실 확인」으로 달았다. 기사내용대로라면 「탱크 진압 지시 확인」이라고 달았어야 한다. 그러나 지시라는 말이 빠졌기 때문에 마치 광주에서 탱크로 진압한 것으로 믿게 만들어 결과적으로 오보를 한 것이다. 이러한 오보는 의도적이라기보다는 편집자가 기사내용을 확대 해석하거나 과장시켜 제목을 다는 데서 빚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광주사태가 탱크로 진압됐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게 됐다.

사례5. 교도소 학살 사건 보도

광주 교도소내 수십명 학살-당시 수감자 증언 연행시민 무차별 구타 살해(제목)
<(중략) 현장조사팀은 이날 80년 5월20일 시위대에 참가했다가 광주교도소로 연행된 강길수씨와...(중략)...등을 불러 광주교도소와 전남도청 앞 상황에 대한 조사를 벌였다. 강씨는 검찰에서 「80년 5월20일 광주 교도소로 시민과 학생 1백여 명이 끌려왔는데 계엄군들이 대검과 개머리판 등으로 마구 때리고 담뱃불로 눈을 지지거나 대검으로 머리 껍질을 벗기는 등...(중략)...매 일 사람들이 죽었으며 헬리곱터로 실려나갔다」고 증언했다. 강씨는 또 「5월20일부터 10일 정도 전남대와 광주 교도소에서 계엄군이 대검이나 곤봉 등으로 최소한 52명을 숨지게 했다」...> (세계일보 광주발 1월6일자 기사)
다시 수감자의 주장만을 보도한 이 기사는 내용에서도 진술자의 주장을 여과나 검증없이 일방적으로 받아 실었다. 이 기사내용과 관련해서 담당 검사에게 문의해 본 바 다음과 같은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교도소 내 학살 사건 설을 조사해 보니 사실로 확인된 것은 한 건도 없었습니다」

사례6. 계엄군 매설지뢰 보도

중앙일보는 1995년 12월26일부터 6일 간 「광주로 간 군인들」이란 기획 기사를 연재했다. 「2회:효천 마을의 비극편」(95년 12월26일자) 기사는 「계엄군 매설지뢰 공수부대가 밟았다」는 제목을 달았다. 관련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지뢰가 터지면서 동료들이 무참히 죽어나가는 광경을 목도한 순간 눈이 뒤집히는 느낌이었다」
「...갑자기 선두차량이 90mm 무반동 총에 맞아 도로변에 처박히고 사방에서 총소리가 들렸습니다...(중략)...하지만 팬 웅덩이나 폭발음으로 보아 지뢰가 분명했습니다」
이 기사를 쓴 담당 기자는 위 진술을 바탕으로 확인취재까지 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
「전교사 임모(43. 당시 중사)씨는 『모르겠다』고만 대답했다. 부인하지는 않았다」
이 기사가 다룬 사건은 80년 5월 24일 13시 55분경 계엄군 간 오인 총격으로 9명이 사망하고 33명이 부상당한 것으로 이미 검찰 발표문에 조사돼 있는 사건이다. 검찰의 조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매복하고 있던 전교사 보병학교 교도대 병력이 11공수여단 63대대 병력을 무장시위대로 오인, 선두 장갑차와 후속 트럭에 90mm무반동총 4발을 명중시키는 등 집중사격을 가했다>
중앙일보 기자에게 증언한 사실은 로켓탄이 자신의 발 밑으로 날아와 터지는 것을 모른 채 지뢰로 오인했을 가능성이 크다. 검찰 발표문을 한번이라도 대조해 보았다면 취재원의 진술만을 일방적으로 믿고 보도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기사를 읽은 독자들은 민간인들 상대로 진압작전을 수행하던 군인들이 살상무기인 대인지뢰까지 매설한 사실에 대해 어떤 인상을 가지게 될까. 한편, 지금까지 정부의 어떤 조사에서도 지뢰가 사용됐다는 내용은 없었다. 이 기사를 쓴 담당기자와 통화를 해 보았다.
-대인지뢰 매설문제는 검찰 발표에도 없는데 취재원의 말만 믿고 쓴 것은 아닌가.
「무슨 소리 하나. (당신은) 광주사태에 관해 자료를 얼마나 읽었나. 우리는 합숙까지 해 가며…」
-사실관계를 물어보려는 것이다. 이 기사가 보도된 지 한 달 뒤에 검찰의 재수사 결과가 발표됐는데, 거기서도 지뢰매설 내용은 없었으니 정정보도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화를 내며) 사용하지 않았다는 근거 있으면 대 봐라」
상대는 당시 계엄군측이 「지뢰는 사용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없으므로 자신의 보도는 정당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논리대로라면 「광주사태 당시 원자폭탄 투하 계획을 세웠다」고 보도해도 기자에게 책임이 없는 셈이다. 계엄군측 자료에는 「원폭투하 계획은 없다」고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례7. 「광주 투입 전 실탄 지급받았다」

95년 12월28일자로 보도된 중앙일보 연재기사 제3회 기사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5.18 기간 중 54명의 사망자를 낸 전남 도청 앞 집단 발포 때 대부분의 공수부대원들이 사전에 실탄을 휴대하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 기사는 누구에 의해서 「실탄 휴대 사실」이 밝혀졌는지 대부분의 공수부대원이란 당시 도청 앞에 모인 3개 여단 병력의 대부분을 가르키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목은「광주 투입 전 실탄 지급받았다」고  되어 있다. 제목과 관련해서 근거가 될 말은 기사 중간에 7공수여단 33대대 박모(39. 중위)씨의 진술이 한 번 나온다.
「저희 대대는 출동하기 전 이미 1인당 60발씩 실탄을 휴대하고 광주에 내려왔습니다. 도청 앞에서 11공수와 첫 대면했을 때는 이미 실탄을 휴대한 상태였습니다」
실탄지급설에 관해서는 그동안 검찰, 국방부 심지어 재야단체에 이르기까지 중대한 관심을 가져 지금까지 수십여 명의 진술을 듣고 조사해 광주투입 전에 일선 사병들에게까지는 실탄이 지급되지 않았다는 점이 이미 밝혀졌다. 그러나 단 한 사람의 진술을 바탕으로 지금까지 조사된 내용을 전면 부정하는 내용으로 제목을 뽑은 이유는 무엇이며, 광주사태의 진실을 밝히는데 이런 류의 보도가 무슨 도움이 되는지 궁금하다.
언노련에서 출판된 「무엇이 오보를 만드는가」의 저자 노광선씨(38)는 이 기사를 보고 「오히려 광주사태를 제대로 이해하고 진실을 밝히는 데 장애가 되는 기사」라고 말하면서 「기자들이 광주사태에 대해서는 단정을 미리 내려놓고 취재하는 경우가 많다. 예단하고 쓴 기사는 십중팔구 오보를 낳는다. 검증도 없고 일방적으로 취재원의 진술만으로 증언, 참회 식으로 쓴다면 기자의 성실성에서 문제가 있다」고 평했다.

  사례8. 「사망자 더 많다」는 보도

95년 12월29일자 연재기사 제4회분으로 보도된 중앙일보 취재반의 「『시위대는 빨갱이, 머리를 때려라』 혹독한 진압훈련」이란 제하의 기사 말미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버스에서 내린 시위대 중 90%이상이 뒷머리를 곤봉으로 맞아 머리가 터진 상태였어요. 어림잡아 10여명은 얼마 후 숨겼습니다」(최씨) 검찰은 18일 하루 동안 시위진압 과정에서 김경철(28)씨 한 명만이 머리 타박상으로 숨겼다고 발표했다>
앞의 인용구는 광주사태 첫날 사망자가 10명이 넘었다는 것을 「증언자」의 말을 빌어 보도하고 뒤에는 기자가 검찰의 결과를 갖다 붙인 것이다. 사실 관계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독자라면 담당기자가 검찰이 밝혀내지 못한 새로운 사실을 발굴했다고 착각할 우려가 있다.
이 기사가 보도된 이후 서울지검에서 재수사한 95년 7월의 검찰조사 결과와 일치한다. 그러나 사망자와 관련해서 유독 이 신문만은 이틀 뒤인 12월 30일에도 같은 연재물을 통해 한 증언자의 말을 실었다.
<검찰 보고서에 따르면 도청 진압 과정에서 17명이 사망했고 2백 97명이 체포됐다. 그러나 진압군과 시위대는 이보다 휠씬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사망자가 17명이라는 것은 말도 안돼요. 어림잡아 1백 명 이상이 사살됐습니다」(권씨)>
광주사태 진상을 조사하는 데 쟁점 중 하나가 사망자 숫자였다. 그만큼 민감한 사안이어서 검찰은 재수사 과정에서도 이 부분을 또 조사, 발표했다. 그 결과 사망자수는 변동이 없었다.

사례9. 도청 폭파 및 1백55mm  포 공격 계획 설 보도

95년 12월30일자 중앙일보 연재기사 제5회에서도 「도청 폭파.1백 55mm 포 공격도 계획」 이라고 보도하고 있다. 이 기사의 첫 문장은 「5.18 기간 중 계엄군측은 5월27일 전남도청 공격을 앞두고 도청폭파 및 포대 공격까지 계획했던 것으로 밝혀졌다」로 되어 있다. 포병공격과 관련한 증언내용은 기사 중에서 당시 20사단 포대 박모씨(38. 상병)의 말에서 발견된다.
<22일 광주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포대인 우리는 전방도 아니고 광주로 왜 이동하는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도청 진압 직전 26일 도청 부근에 1백55mm포와 함께 배치됐습니다. 아마 최악의 경우 도청을 포격할 의도였을 겁니다. 우리 때문인지 광주 불바다 설 등 유언비어가 파다했습니다>
기자는 우연히 어느 신문의 지방판에서 한 기자가 쓴 취재메모 기사를 보았다. 글 내용 중에서 「 포병 공격 설 」을 두고 쓴 구절이 있어 옮겨 본다.
<...한 지방 일간지는 80년 20사단에 근무한 포병전우회의 입을 빌려 「 포병대대 광주 투입 」, 「 광주 불바다 설 뒷바침 」의 식으로 대서특필하기도 했다. 육군 1개사단이 3개 보병연대와 1개 포병연대로 구성돼 있다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것이다. 사단 병력이 배치됐다는 이유로 「 불바다 설 」을 말할 수 있다면 마찬가지로 포병 부대가 진주했던 충북지역도 「 불바다 위협 」에 놓여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5.18 특별법과 전두환.노태우 전직 구속 등에 대해 광주 시민들의 15년 간의 투쟁 끝에 얻어낸 결과란 자긍심을 느끼고 있다. 그러나 「 법논리 」는 간데없고 「 정치 논리 」만이 역사를 좌지우지하고 있다고 언론들도 지적했었다. 그런 언론이 「 이제라도 진실을 밝혀내야 한다 」는 「 기자정신 」은 뒷전에 밀어놓고, 「 추측이든 과장이든 터뜨리고 보자 」는 「 한건주의 」에 열을 올리고 있는 형국이다. 시민들을 헷갈리게 하는 이런 식의 기사경쟁은 5.18에 대한 또 다른 모독이다>(95년 12월16일자 ㅈ일보)

사례10. 화염방사기 사용 여부 보도

96년 1월 8일 국민일보는 사회면에 5단 크기로 「 5.18때 화염방사기 사용했다 」라는 제목을 뽑은 다음 제목 하단에 「 광주 조사 」라고 붙여 놓았다. 제목 바로 옆에는 작은 고딕체로 「 당시 피해 목사 증언. 시민 탄 차에 발사... 3며 중화상 」이라 붙여 더욱 구체화시켰다.
이 날 광주에서 5.18특별조사반이 이 사건과 관련해 재조사를 하고 있었다. 독자들은 신문을 보고 검찰에서 이 사실을 새롭게 밝혀낸 것으로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기사를 읽어보면 김이 빠진다.
기사 전체는 5단이지만 화염방사기 부분은 2단에 그치고 나머지는 구타사건에 관계된 기사로 채워져 있다. 내용에서도 특별수사본부가 화염방사기로 피해를 입었다는 피해자들의 진술을 들었다는 것과 그 진술 내용의 일부가 조그맣게 실린 정도였다.
화염방사기 문제는 작년 7월에 발표된 검찰측의 발표문에 「 화염방사기 사용된 적 없음 」이란 결론이 난 사안이었다.

「 전두환 강변이라니? 」

광주사태와 관련한 문제성이 있는 기사들을 추적하면서 언론학자 정진석 외국어대 교수와 전화 인터뷰를 했다.
-5.18 특별법이 제정된 이후부터 검찰이 재수사를 완료했을 때까지 광주사태 관련 신문기사를 검증해 보니 보도에 문제가 많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광주사태에 관해서는 그런 예를 든다면 한도 끝도 없을 겁니다. 요즘 언론들을 보면 한심해요. 사건이 발생한 직후 보도하면서 「 국민 여론이 높다 」고 합니다. 여론 조사할 시간이 없었던게 분명한데도 거짓말하는 거지요. 특히 전직 대통령과 관련해서는 「 이 X은 나쁜 X이다 」는 결론을 내리고 주관을 실어 보도합니다.
이번 관훈클럽에서 편집회의를 하면서도 「 객관보도로 돌아가자 」고 강조했어요. 부끄러운 일입니다』
-구체적으로 한 가지 예를 든다면 어떤 점이 가장 크게 지적받아야 될 것 같습니까.
『이런 예가 있어요. 전두환씨가 검찰 기소문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법정에서 말했지요. 이를 두고 「 전씨가 강변했다 」고 보도합니다. 어떤 신문에서는 「 궤변을 늘어 놓았다 」고까지 해요. 「 강변 」이라고 하면 죄 지은 사람이 변명한다는 이야기로 들리지요. 「 궤변 」은 한 술 더 뜬 겁니다. 법이 왜 있는 겁니까. 공정하게 판결 내리기 위한 제도 아닙니까. 아직 재판이 끝난 것도 아니고, 검찰이 기소한 것뿐인데 언론은 이미 판결을 내리고 보도합니다』
-이번 특별법과 관련해서는 검찰보다 언론이 한 발 더 나간다는 느낌도 받습니다만…
『검찰은 대통령의 말에 영향을 받는 집단이니까 그러려니 합니다. 그러나 언론은 검찰의 정치적 편향에 대해 항상 반박해야 하는 게 아닙니까. 말로는 공명정대한 언론이라면서... 특히 이번 특별법과 관련해서는 언론들이 검찰 편에 서 있어요.
보도문을 보면 「 아무개를 검찰이 소환하면서 범법 사실이 드러나면 사법처리할 것 」이라고 합니다. 당연한 소리 아닙니까. 길 가는 사람이라도 잡아다가 범법 사실이 밝혀지면 기소하는게 마땅하지요. 그러나 이 보도문으로 인해 당사자의 명예는 끝장 나는 겁니다.』
-특히 언론에서는 계엄군측 진술을 옮기면서 「 참회 」니 「 양심선언 」이니 하는데 기사 내용을 보면 참회하는 이유나 목적이 드러나지 않고 단지 폭로성 진술일 때가 대부분입니다.
『언론이 큰일 날 소리라고 있는 겁니다 말단 사병이나 초급 장교들이 참회할 것이 뭐 있습니까. 최근에 광주에 내려가 보니 참회할 사람은 따로 있더군요. 정웅씨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초기에 잘 다독거리지 않고 공수부대를 집어 넣은 장본인 아닙니까. 언론이 제대로 해 주어야 합니다. 광주사태가 실제로는 어떻게 벌어지고 진행됐는지는 언론이 공정하게 해 주어야 합니다』

  『 반박할 자료와 근거가 정리돼 있지 않다 』

  이번에는 국방부 정훈공보관실 보도와 안정훈 중령과의 전화 인터뷰.
  -이런 류의 기사로 인해 피해받는 곳은 군인이라고 봅니다. 왜 국방부에선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고 있습니까.
「 일일이 대응했다가는 우리들이 잘 했다는 식으로 오해할까 봐 못합니다 」
  -묵시적 대응입니까.
「 현재는 재판이 진행중이고 하니 대응이 어렵지요 」
  -중앙일보가 6회에 걸쳐 연재한 내용들은 사실과 다른 부분들이 많은데요.
「 아직 그 기사를 안 봐서 잘 모르겠는데요. 언제 나온 겁니까 」
  -작년 12월 말입니다. 계엄군 출신들의 참회와 증언이란 표제로 피해자들 중심의 기사가 실려 있습니다.
「 알아보고 말씀드리지요. 그런데 경우에 따라서는 그 사람들 말이 맞을 수도 있거든요. 또 언론이 나중에는 스스로 정화할 것이라고 봅니다. 사실 군이 잘못한 것도 있지요 」
  -구체적으로 무엇이 잘못된 점입니까.
「 아니, 뭐... 많은 희생자를 냈고 총도 많이 쏘았고 수백 명이 죽어 망월동에도 가지 않았습니까. 지금은 당시 상황에서 부득이 대응한 겁입니다만... 어쨌든 국민에게 강변하는 듯한 인상을 풍길 것 같아 우리는 대응을 자제하려는 겁니다. 우리가 앞으로 반성해야 하겠지요 」
전화를 끊고 난 뒤 조금 있다가 다시 전화가 걸려 왔다. 같은 부서의 직속 상관인 장영주 대령이었다. 그는 오보와 관련해서 이렇게 말했다.
「 군인도 억울한 면이 많지만 반박할 자료나 근거가 정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
  -자료 부족을 이유로 말씀하시는데 6.25는 3년간 진행된 전쟁입니다. 월남전 참전 기록도 다 모아 놓고 있는데, 광주사태는 열흘 동안의 사건입니다. 왜 군이 자료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는 겁니까.
「 그러지 않아도 이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
광주사태와 관련해서는 거의 모든 오보가 피해자 중심으로 쏠려 있다. 검찰과 국방부 역시 마찬가지란 인상을 받았다. 피해자 편을 들면 정의롭다는 생각에 이성을 잃은 결과인지 모르겠지만 최근 한국언론의 5.18관련 보도는 오보율에 있어서 어두운 장을 남기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