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고 있는 키워드를 검색해보세요.

DRAG
CLICK
VIEW

아카이브

온라인 자료실

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광주' 계속되고 있는가? / 절규와 걱정…객관적 관조가 / '5월문학'의 생성과 흐름. 문병란(월간예향,…

본문

절규와 격정‥‥객관적 관조가

「5월문학」의 생성과 흐름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전개된 광주의 5월민중항쟁에 대해서는 아직 그 진상규명에서 부터 책임자에 대한 정치적 법적 추궁, 피해자 보상 문제에 이르기까지 제대로 풀리지 않고 있다.

「광주5월」 역사적 성격과 민족운동

  '광주'하면, 1970년대 이미 유신독재에 항거해온 뿌리 깊은 민주운동단체가 있었다.
  ① 고 이성학장로나 강신석목사등이 중심이 된 개신교 NCC계통 그룹.
  ② 홍남순변호사를 중심으로 한 헌정동지회 그룹
  ③ 카프카서점에서. 출발한 남민전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있는. 김남주시인, 그 서점을 녹두서점으로 확산 발전시킨 김상윤등 전남대 민청그룹의 독서를 통한의식화작업 .
  ④녹두서점과의 유대와 함께 더욱 현실과의 연결에 적극성을 띤 윤한봉· 정용화등을 중심으로 한 현대문화 연구소팀.
  ⑤엠네스티 국제사면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변호사이기홍씨와 「함성」지 사건등으로 옥고를 치르고 출옥한 박석무씨 등을 중심으로 한 엠네스티 그룹
  ⑥장두석선생, 교내시위사건으로 대입이 거부된 황일봉군을 실무진으로 안진교수, 필자 자신등이 지도위원이 된 양서협동조합. '
  ⑦명노근교수, 송기숙교수 등이 중심이 된 전남대 해직교수팀, 권광식교수등이 중심이 된 조선대해직교수팀.
  ⑧조아라장로, 이애신총무등이 중심이 된 YWCA그룹.
  ⑨ YWCA이행자씨, 노조운동의 이양현, 정상용등이 중심이 된 노동운동.
  ⑩ 옥바라지등 부녀 자 단체인 송죽회 팀.
  ⑪황석영,문병란등이 중심이 된 문화운동팀
  ⑫서경원씨. 최성호씨, 배종렬씨등이 중심이 된 농민운동팀 .
  ⑬고 박관현씨등이 중심이 괸 들불야학팀.
  ⑭윤만식씨, 박효선씨등이 중심이 된 전남대의 문화팀 광대 .
  ⑮조비오신부등이 중심이 된 천주교의 정평위팀.
  이 같은 단체들이 각각 또는 상호유대를 가지고 광주 운동권의 어떤 골격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1979년 10월 26일이 오고, 12·12의 여파가 결국 5.18로 연결, 광주의 비극이 온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광주 5·18』을 우발적인 민중들의 감정에 의한 폭동으로 보려는 견해에 대해서 경계하지 않으면 안된다. 뚜렷한 의식과 이념을 가지고 확실한 민주노선을 밝힌 14개 이상의 단체가 있었는데, 어떻게 우발적으로 저항이 일어나는가.
  5·18전야. 계엄확대의 방송이 5월17일 밤11시에 있었고 운동권 사전검거 및 광주의 요로에 병력 배치가 완료되었다는 점은 치밀한 사전계획에 의한 하나의 작전이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5.18이 광주에서 일어난 것은 작전지역으로 선택되었고 당시 이 고장 출신 야권지도자와 광주의 운동권을 연결시켜 『내란음모』라는 정치적 스캔들로 만들려는 정치적 의도가 숨어 있었던 것 같다.
  또 도시 크기나 광주 사람들이 지닌 반골적 저항 기질을 십분 이용하겠다는 계산이 있었음을 쉽게 유추할 수 있다.
  근자에 여러 신문·잡지· 민화위의 보고 등에 의하면 사태가 악화된·27일 이후를 들어 발포의 불가피성을 강조하고 폭동이 일어났으니 부득이 했다는 식으로 무자비한 실상을 보도하는데, 이것은 전후 전말 원인 과정의 치밀한 진상규명없이 부분적 현상만 가지고 논하는데 서 오는 우견이라 생각한다.
  여기서 생각나는 몇 가지 문제점을 요약해 보고자 한다.
  1) 5 · 18이 전의 광주상황으로 보아 「국가존망의 위기에서 부득이 취해진 조치였다」는 당시 실권자 들이나 국가기관의 발표는 맞지 않는다.
  2) 따라서 군의 투입은 사전에 계획된 작전이며, 이미 민주화 의사가 없었음을 입증한다.  그러므로 위기 운운은 작위에 의하여 과장된 것이며, 데모확대때문에 공수단이 투입된 것이 아니다.
  3) 따라서 군 개입은 반민주적 또 하나의 쿠테타였고, 그에 대항한 시민·학생은 민주수호라는 의로운 행위였으므로, 애국심의 발로이지 내란이나 폭동이 아니다.
  다음으로는 이 광주5월민중항쟁 그후 민족운동이나 민주화운동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가 그 의의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흔히 들 '광주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고  말한다. 이 말은 광주의 5월항쟁이 민족운동이나 민주화 운동의 표상으로서 그 정신적 에네르기가 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80년 이후 3천명에 달하는 정치범을 만들어 낸 그 근원이 바로 5월에 있고, 이 5월과 관련되지 않은 어떠한 운동도 없었다. 그만큼 광주의 5월은 한반도 모순의 어떤 표상이 될 만큼 커다란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광주의 5월 항쟁 이후 변화된 의식구조가 무엇이었던가?
  첫째, 미국에 대한 재인식이다. 우리의 우방이요, 민주주의의 본산으로서 독재정권을 견인하면서 선의의 민주 운동권을 옹호하고, 새로운 문민정권 수립을 후원하는 세력일 것이라는 우리의 기대가 얼마나 어리석었는가를 깨닫게 했다. 작전권을 가지고 있는 미 8군사령부의 허가없이 그런 엄청난 군사행동이 가능했을까라는 의구심은 바로 그 음모의 후견인이 미국이었다는 의식으로 발전, 자연히 반미의 계기가 되었다.
  둘째, 이러한 자각은 비민주적 이 땅의 정체현상들이 바로 분단에서 왔고, 이 분단은 외세이며, 이 분단과외세가 바로 친외세적 독재 정권으로 나타났다는 결론에 도달, 민족운동은 바로 통일운동으로 발전해야 된다는 새로운 이념을 추구하는 진보적 민족세력이 등장했다.
  셋째로는 70년대에 등장한 민중운동의 현실적 자각이다. 민중운동을 주도한 세력이 대학생이나 지 식 인에서 실제적 세력인 농민이 나 노동자 기층민중 주도로 바뀌어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농민에 관한 문제나 노동자의 권익 옹호등에 관한 것을 지식인의 대변자로서 시를 쓰고 소설을 쓰는 데서 농민이나 노동자자신들이 직접 자기 체험으로 작품을 쓰는 데까지 발전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와같이 70년대의 불투명한 민중의식이 광주 5월이후 반제, 반외세, 반식민에 대한 뚜렷한 의식구조로 바뀌면서 통일에 대한 커다란 민족적 자각으로 거듭나기 시작했고, 광주의 5월은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된 운동으로서 87년 6월항쟁을 불러오고, 또 일시 6·29라는 직선제 대통령선거에서 거듭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계속되는 민족운동으로서의 끊임없는 에네르기를 분출하고 있다.
  이러한 광주의 5월에 대한 역사적 성격과 의의를 전제로 하지 않고는 5월문학은 거론될 수도 없고 올바른 감상이나 평가를 할 수 없기 때문에 5월 문학을 논하기 전에 먼저 이상을 전제로 제시하는 것이다.

    5월의 문학적 형상화

지난 8년 광주문제는 금기시됐고 숱한 보도관제와 언론탄압에도 불구하고 광주를 소재로 한 저술과 작품이 쏟아져 나왔다. 우선 그 현황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1) 1980년 당시 지방신문에 많은 행이 삭제된 채 수록된 김준태의 시「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 !」
  2) 1981년 5월 간행으로 된 문병란의「땅의 연가」(창비시선 26권) 여기 수록된 광주항쟁을 소재로한 「구두닦이 철이」 「화정동의 저녁노을」 「전라도 뻐꾸기」「이장 보식이」등은 거의 간접적 암시에 불과했지만 출판되자마자 판금되고 말았다.
  3) 5월시 동인의 등장‥‥ 「하늘아 땅들아 사람들아」「다시는 절망을 노래할 수 없다」등 5집까지의 앤솔로지를 낸 5월시 동인들, 최두석, 곽재구, 이영진, 김진경, 나해철,나종영, 박주관, 윤재철, 박몽구등의 참신한 목소리는 한국문단에 은 충격 파를 던졌다.
  4) 김준태 의 「나는 하느님을 보았다」 (한마당 간 · 1981년), 「국밥과 희망」(84 풀빛), 「불이냐 꽃이냐」(86  청사), 「넋 통일」(86 · 전예원)등 4권의 시집은 모두 광주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었다.
  5) 1987년에 간행된 오월항쟁시선집 「누가 그대 큰 이름 지우랴」는 인동출판사가 문병란·이영진 편집으로 간행 , 광주의 모든 것을 시로 읊은 것을 수록했다.
  6) 문병란의 「아직은 슬퍼 할 때가 아니다」 (85· 풀빛) 「무등산」(85 ·청사)등에 실린 「트럭운전사 은철이」 「광주에 바치는 노래 송가」어느 구두닦이 혼을 대신한 「망령의 노래」어느 젊은 영혼들의 결혼식을 위한 「부활의 노래」등 다수의 광주문제를 제재로 한 시편들을 수록하고 있다.
  7) 나해철의 「무등에 올라」 (84 · 창비시선), 나종영의 「끝끝내 너는」 (85 · 장비시선),장효문의 「신의 눈물」(청사), 박몽구의 「십자가의 꿈」 (86 ·풀빛), 정남주의 「진혼가」(84 ·청사), 「나의 칼, 나의 피」(87 · 인동), 박선욱의 「그때 이후」 (85 ·풀빛),하종오의 「5월생」 (86 · 창비시선),양성우의 「5훨제」, 송수권의 「아도」 (85·창비), 강인한의 「전라도인」 (82 태맨), 박주관의 「남광주」(85 · 청사)등 창비시선, 풀빛시선, 청사시선에서 내고 있는 수십 권의 시집에서 2백50여 명의 시인들이 광주문제를 소재로 한시를 게재하였다.
  8) 전남대학에서는 종래 있었던 용봉문학상을 85년부터 「5월문학상」으로 바꾸어 3회까지 진행했으며, 도서출판 (광주에서 「너의 이름에 붉은 줄을 그으며」 (88)에 3회에 걸친 작품을 모은 앤솔로지에 「오월의 함성으로 오월의 몸부림으로 달려 오라 새 날, 새 날이여! 」를 펴냈다.
  9) 인동출판사에 서 는 「일어서는 땅」 (87) , 문순태 작을 필두로 한승원, 임철우, 김남일, 김유택등의 광주문제를 소재로 한 작품을 묶었으며, 창작과 비평 복간호 1호 (88)에 는 「깃 발」이 란 제 목으로 신인 홍희담 (황석영씨의 부인이었던 홍희윤여사)이 80년 당시의 체험을 소재로 하여 수작을 발표했으며 , 역시 월간중앙 복간호 3월호(88)에 문순태의 「무등굿」 1회가 발표되었다.
  이 외에도 80년 이후에 대량 등장한 신인이나 그 이전에 이미 활동했던 사람들, 예를 들면 김하의, 김기홍, 정안면, 오봉옥, 김진경, 고광헌, 박진관 등 수백 편에 이르는 시 편들을 보게 된다. 양적 인 면에 서 시 · 산문등 수천 편에 이르고 있다. 87년 6월항쟁을 절정으로 금기시된 광주의 5월항쟁이 현실적 논의의 정치 이슈화되면서 이는 훨씬 더 많이 문학적 소재로 취택될 가능성을 가지 고 있다.

5월을 소재로 한 작품 평가

  여기서 광주의 5월을 소재로 한 작품에 나타난 문학적 형상화의 특징을 몇 가지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어떤 역사적 사건이 문학작품으로 형상화되는데는 '작품'이라는 그 제약 때문에 시일이 걸린다고 생각한다.
  문학적 형상화란 그 작업이 사상이나 현실적 제재를 정서화시켜 일정한 폼(form)에 의하여 표현해야 하기 때문에 제재의 나열이나 르포적 사실 기록과는 다른, 창조된 예술이라는 점에 있다. 이런 기준에서 본다면 지난 8년간에 쏟아져 나온 작품들이 흔히 말하는 예술적 승화의 경지에 도달했는가는 의문시된다. 아니, 지난 8년간의 작품들은 아예, 그런 예술성 문제보다 그이상의 어떤 진실의 추구가 중시되었는지 모른다.
  그러기 때문에 최초의 작품들은 당국의 눈치를 보면서 간접적으로 조심스럽게 암시했거나 행사적 용도에 따라 고발·증언·저항·비판 등의 내용, 이른바 참여시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거기다가 공분과 울분, 의분, 연민등을 담은 광주에의 성원 내지 민주화운동과의 관련 속에서 투쟁적 현장문학 성격이 강했다.
  이미 등장한 70년대의 민중시·민족시에 어떤 짙은 음영을 더하면서 반독재하의 새로운 저항문학의 한 패턴이 되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그런 시를 '광주투의 시'라고 부르기도 했다. 격정 ·진술·영탄·저항 등 톤이 높고 낭만적 열정의 남발, 생경한 진술 위주의 관념이 미처 소화되지 못한 채 프로파간다적 목적의식의 노출도 과다했다고 본다.
  그러나, 그것이 작품으로서 실패라기보다 시대적 상황과 함께 충분한 설득력을 가지고 감명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5월항쟁 당시 많은 부분이 삭제된 채 지방 신문에 게재된 광주의 시인 김준태의 「아아! 광주여!우리 나라의 십자가여 !」는 이런 계통의 대표적 시가 될 것이다.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죽음과 죽음 사이에서
피눈물만 흘리는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중략)
죽음으로써 물리 치 고
죽음으로써 삶을 찾으려 했던
아 통곡뿐인 남도의
불사조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 1·2·3연-

  실행 105행의 이 시는 첫 행부터 감탄과 격정으로 시종일관, 저 항과 울분과 고발의 내 용을 담고 있다. 이 시의 경우, 광주에 대하여 함부로 말하지 못하듯 거의 비평의 대상을 삼지 않는다.

남녘의 땅 光州여 
그대는 우리 시대의 꿈이다
그대는 우린 시대의 횃불이다         
그대는 우리 시대의 황토현 눈보라다
그대는 우리 시대의 우금치의 아우성이다   
쓰러 지고 일어서는
그리하여 또 쓰러지고 일어서는         
아아, 멈출 수 없는 강물이어라
민족해방의 물결이어라
보리밭 이랑 너머 저 광야를 지나
우뚝 솟은 산 붕우리어라

아, 가장 낮은 곳에서부터
우리 시대의 가장 낮은 곳에서부터 우뚝 치솟은
끝낼 수 없는 사랑의 몸부림이어라 넋이어라
아아, 그대는 우리 시대의
땀냄새 피냄새를 끌어 안은 육체이다
총칼 앞에서도 쓰러질 수 없는,
그 어떤 어둠으로도
지울 수 없는 우리 시대의

아름다움이다 밥이다 얼굴이다
우리 시대의 피를 흘리는 희망이여
희망의 영혼이여
녹두꽃은 떨어져도 파랑새는 날아 오르고
녹두꽃은 떨어져도 떨어져도
들불은 타올라 소리치고

남녘의 땅 광주여
그 어떤 내부모순으로도 외부모순의 힘으로도
바닥을 낼 수 없는
흙덩이여 물줄기여 광주여
그대는 우리 시대의 흰옷뿐인 깃발이다
그대는 우리 시대의 원시공동체의
청보리밭 냄새다
그대는 산너머 밭, 강 건너 역사를
쟁기질하는 아버지다
그대는 사람의 땅. 새들의 하늘 속에
씨 앗을 다져 넣는 어머니다
가시 넝쿨 위를 날아가는 나비 떼 처 럼
그런 사랑의 어질머리처럼
광주여, 그대는 성난
그러나 젖가슴도 둥그런 어머니어라
그리 하여 일하고 일하는
오늘의 내일의 노래꾼이어라
우리 시대의 전망
우리 시대의 이정표
남녘의 광주여

그것은 광주에 대하여 너무도 큰 죄를 진 현실을 감안하여 성역의 어떤 금기의 대상으로 삼았는지 모른다. 또 그만큼 진실의 토로가 압도하여 성경 속의 예언시처럼 존경의 대상을 삼는지 모른다. 이 경우 우리는 스스로 예술이란 무엇인가 ? 또 시란 무엇인가 ? 라는 원초적 질문 앞에 선다. 진실의 토로, 그것이 아닐 것인가? 진실한 것 이상 퍼 아름다운 것이 있는가')
  추모행사시 추모시로 샜던 나의 시 어느 구두닦이의 홀을 대신하여 부른 「망령의 노래」나 광주에 바치는 노래로 쓴 「송가」도 고발·증언· 저 항의 내 용을 담은 시로서 동일한 계통에 들 것이다. 아니, 어떤 의미에선 필자 자신이 관계하여 인동출판사 젊은 그룹이 엮어 낸「5월 광주항쟁시 선집 -누가그대 큰 이름 지우랴」에 수록된 2백50여 편의 거개의 시들이 이런 계통의 시가 아닌가 한다. 어느 페이지 어떤 시를 보아도 비슷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어 광주에 대한 의혈의 공분과 처절 참절한 비극에 대한 깊은 연민과 분노가 모국어의 열도를 더 하고 있다.
  1981년, 필자는 너무도 암담한 현실 속에서 광주를 어떻게든 알려야겠다는 일념으로 전국 강연행 각을 서서이 다시 시작했고, 창비시선 26권으로 「땅의 연가」란 시집을 펴내면서, 거기다가 간접적으로 광주의 아픔을 암시한 작품을 몇 편 넣었다. 「구두닦이 철이」 「화정동의 저녁노을」 「트럭운전사 은철이」기타 간접 직접 광주와 연결시킨 「전라도 뻐꾸기」 「이장 보식이」등도 그런 광주의 한을 정서화시킨 것이다.
  그러나 편집진과 상의 , 「트럭 운전사 은철이」는 다음으로 미루었고 나머지는 수록했었다. 지금 보면 거의 암시적 수법만 쌨고 하고 싶은 말을 다 감춘, 어찌 보면 비굴한 시인 것 같지만, 숨통을 조이던 그 시절, 그것도 대견했는데 아니나 다를까,그 시집은 아마 그런 이유로 판금이 되었었다 6·29이후 그 책은 판금에서 풀려 나 복권이 된 셈 이 다.

올해도 뻐꾸기만 운다.
못 살고 떠나간
철이도 남이도 돌아오지 않는데
갈 곳 없는 사람들만 모여 사는 땅.
하늘만 미치게 푸른 땅에서
황토빛 무덤 만 늘어가는 땅에서
백년을 울고도 남은 울음을
천년을 울고도 남은 울음을
올해도 울고 남을 울음을
이 산에서 뻐꾹
저 산에서 뻐꾹
전라도 뻐꾸기 만 피를 토한다.
뻐꾸기 야
뻐꾸기 야
울다가  울다가 시진한 전라도 뻐꾸기야.
    - 「 전라도 뻐꾸기 」 종련 -


  이 시에 담긴 전라도의 원한. 그것은 전라도나 광주만의 것이 아니다. 개항 100년 외세와의 관계 속에서 맺혀진 동학혁명, 3 · 1운동, 광주학생독립운동, 6·25 4·19, 5·16, 10·26, 5·18로 이어지는 민족 수난사의 표상으로서의 원한이다. 이 원한이 절정을 이룬 표상적 사건이 바로 광주의 5월항쟁이었다.
  따라서 그 충격파가 자각된 반제, 반외세, 반미의 새로운 주제와 정서로 발전, 중량 감있는 민족시가등장하기 시작했다.
  필자의 「우리들의 8월」이나 「미국 개와 조선 똥개의 대화」, 채광석의 「밧줄을 타며」, 정회성의 「8·15를 위한 북소리」, 백기완의 「이제 때가 왔다」, 문익환의 통일시 「이제 더는 물러설 데가 없읍니다」등이 그 예가 된다.
  이러한 민족의식이 심도를 더해가면서 어떤 확율 이룬 듯한 「학살 Ⅰ,Ⅱ,Ⅲ .....」 을 담고 있는 「나의 칼 나의 피」의 옥중시인 정남주의 옥중 저항시는 칼날을 만지는 듯한 섬찟한 느낌마저 주고 있다. 이는 광주의 시가 반제, 반외세의 민족문학으로 그 심도가 짙어짐을 의미한다.
  필자나 문익환, 백기완등의 근자의 시들, 통일시 운동 역시 이 땅의 비극의 근원이 분단에 .있다고 보고 그것의 극복,즉 통일만이 이 땅의 모든 비극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민족적 염원이 그 열도를 더해간 것도 80년 광주의 5월이 준 충격파였다. 84년 도서출판남풍에서 펴낸 「분단시 선집」(편자 문병란 송수권, 출판대표 정진백, 발행인 최지선)도 이러한 자각의 산물이었다.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는 70년대 민주화 운동의 대표적인 시이지만, 그 이후에 등장한 「대설 남(南)」이 나 「애린」등도 80년 충격 이후 다른 차원의 탐구를 통해 심도를 더 해 갔다고 본다.
  이런 민족시 운동은 단순한 민중시의 민중적 대중정서 남발과는 다른 정을 지니고 있다. 식민주의를 극복하려는 허리 잘린 한반도의 몸부림인 것이다.
  필자가 이미 발표한 「병주고 약주는 나라」미국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서 시작된 「양키 고홈」의 구호는 이제 진보적 대학생들만의 구호는 아니다. 5월 이후 이른바 민족의식이 나타난 거개의 시집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새로운 감정이다.
  광주의 5월항쟁은 민중적 자각을 일깨운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노동자나 농민의 계층적 자각이 그것이다.  지식인에 의하여 대변되는 농민문학·노동문학이 아니라, 직접 그 계층에 의하여 등장한문학이 던진 충격파다. 어떤 의미에선 유행처럼 등장하고 있는 생생한 현장의 목소리로서의 민중 문학적 성격에서 생생한 체험이 바탕이 된 노동문학·농민문학은 과거 어느 때보다 활발하며, 또 유례없는 성공을 거두고 있다.
  그 중에서도 기법이나 내용, 신선한 탄력 , 저항적 열기의 날카로움을 지닌 노동시 「노동의 새벽」(풀빛·박노해)은 하나의 본보기가 될 것이다. 광주의 5월을 직접 소재로 하지 않았으면서도 그 역사적 혁명의식의 새로운 시정신으로 발전 심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우리 세 식구의 밥줄을 쥐고 있는 사장님은
나의 하늘이다.

프레스에 찍힌 손을 부여안고
병원으로 갔을 때
손을 붙일 수도 병신을 만들 수도 있는 의사 선생님은
나의 하늘이다.

두달째 임금이 막히고
노조를 결성하다 경찰서에 끌려가
세상에 죄 한번 짓지 않은 우리를
감옥소에 집어넌다는 경찰관님은
항시 두려운 하늘이다.
  - 「하늘」의 전반부-

  이러한 파라독스가 주는 노동시의 신선감은 단순한 저항에만 있지 않다. 「삼청교육대」,근자에 발표된 「씨받이 타령」에 이르기까지 모두 광주의 5월 이후 등장한 새로운 자각이 나타난 시편들이다.
  근자에 어떤 잡지 등지에서 광주의 5월을 격하시키거나 선거후유증으로 다소 왜곡시키는 경향이 있고 80년대의 중요 문학과제 가 노동문학· 통일문학임 을 인식하면서도 그것이 광주와 무관하게 보려는 입장은 매우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광주의 5월이 비록 「미숙한 혁명」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미완성 혁명인 광주의 10일간은 한반도의 큰 충격이었고 개 항 100년의 모순을 첨예하게 상징화시킨 것이다. 그러므로 단순한 소재상의 문제로 5월문학을 거론해 서는 안 된다.
  송기숙의 「개는 왜 짓는가」 「당제」등의 단편·중편등도 광주5월의 충격파가 근원적 문제 해결이라는 분단 극복의 통일의 식으로 승화됨을 본다. 광주는 광주사람만의 것이 아니다. 광주는 특수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다. 광주의 비극은 광주라는 특정 지역이 선택된 것뿐 한반도 어느 지역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이다.
  광주는 끝난 것이 아니라, 시작되고 있고 계속되고 있다. 동학혁명부터 시작된 그 길고 긴 민족운동의 맥을 이어받아 개항 100년 제국주의의 침략에 의해 짓밟히고 분단된 이 땅위에 끊임없이 계속되는 민족운동 ·통일운동·민주화운동의 참다운 에네르기로서 그 면면한 불꽃은 지금도 활활 타오르고 있다. 비록 미완성일지 모르나 모든 영역에서 광주의 5월은 민족 모순을 극복하는 민족운동의 핵으로서 활활 타오르고 있다. 
  이 뜨겁게 타오르는 열기가 가라 앉고 다시 응축 확산되면서 민족문제의 모든 영역에 다양성을 부여할 때 광주는 원한은 민족 보편의 참된 예 술로 승화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절규와 격정에서 역사적 반성 비판작업을 통한 객관적 관조가 요구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