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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5월과 문화항쟁. 민중문화연구회(민족현실과 지역운동. 1985. 12)

본문

5月과 문화항쟁

민중문화 연구회



  우리 「민중문화연구회 」는 다른 지면을 통해 「 5월 」과 「문화항쟁 」에 대한 몇 가지 조사작업을 원고화하여 발표한 바 있다. 그러나 그 지면은 지면의 특수성으로 인해 '확산' 에 한계가 있었음을 깊이 생각하여 여기에 다시 소개하기로 뜻을 모았다.
  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10일간 전개된 광주민중항쟁은 여러가지 측면에서 재조명되고 논리화해야 할 단계에 이른 듯 싶다. 하지만 아직도 그 진상에서나 또는 사적 접근에는 미비한 점이 많다고 여겨진다 . 이런 작업이 원할히 이뤄지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자료와 더불어 민중항쟁에 직접 참여한 여러 부류와 다각적인 활동상을 면밀히 조사하고 종합하는 제 1차적 작업이 선행되야 할 것이다.
  이에 이 지면에서는 「문화」적 측면에서의 활동상을 「문화패 」의 수기, 부상자와 희생자들의 활동상을 살피는 것으로 제 1차적 자료를 제시하고자 한다. 앞부분에서는 연극 및 마당극 활동을 하다가 민중항쟁에 참여한 참여자와 수기, 미술패의 수기, 그리고 광주를 탈출하면서 느낀 어느 시민의 글 그리고 옥중에서 쓴 수기등을 한데 묶었으며, 뒷부분에서는 민중항쟁에서 희생된 박용준열사의 투쟁상과 인간적인 측면, 부상자 이광영씨의 체험담을 종합하여 한데 묶었다. 물론 광주민중항쟁에서 「문화패 」만이 주요 몫을 담당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묵묵히 자기 삶을 살아온 수많은 무명의 민중들이 항쟁의 큰 몫을 해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안다. 그러나 이들의 집단의지를 한 곳에 묶어내고 10일간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을 싸워 버티게 한 데에는 「문화패 」의 역할도 컸었다.
  따라서 여기에 나오는 수기, 체험담, 평전형식의 글은 수많은 시민과 문화패가 어떻게 힘을 모으고 전열을 가다듬었는가를 살피는 좋은 기회가 되리라 믿는다. 그리고 앞으로 이런 작업을 계속 펼쳐 나가겠다는 것을 밝혀둔다.

    ●금남로에 울린 문화패의 북소리

  "평화시에는 민중의 집단적 신명을 돋우는 북소리도, 민중항쟁시에는 민중의 전투욕을 고취시키는 장산곶 북소리가 된다."

민족사의 분수령이 될 5.18광주 민중항쟁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여,민중의 북소리가 되기를 자처했던, 우리 문화패는 다음과 같이 문화항쟁의 발자취를 밝혀 역사적 진실과 우리의 입장을 밝히고자 한다.

  1980년 5월 18일 - 21일
  이 기간동안 문화패 「광대 」는 3월의 「돼지풀이 J 마당극을 마무리 짓고, 새 작품 한씨 연대기를 준비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5월 18 일 0시를 기해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고 수많은 민주인사들이 예비검속되는 상황이 발생했던 날, 오전 10시에  평상시처럼 연습장소에 모였다. 그러나 급작스런 정국변화에 따른 불안과 어수선한 분위기로 연습을 하지 못하고, 시내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2 - 3명씩 뿔뿔이 흩어졌다. 오후부터 시내에 들이닥친 공수부대들이 닥치는 대로 젊은이를 구타하고 대검으로 귀를 찌르는 등 잔인한 만행을 군데군데서 목격한 문화패들은 이대로만 있을 수 없다고 판단, 5.18폭거와 공수부대의 잔인한 만행을 시민과 학생들에게 알리는 전단을 만들기로 하였다. 그들은 날을 새워 전단문구를 작성하고 등사하여 시내곳곳에 살포하였다.
  이 전단배포작업은 계엄군이 물러가기 직전인 21일에 절정에 달했는데, 특히 윤상원( 5월 27일 사망)등은 짚차를 구해 타고, 계림동 인쇄소등을 전전하며, 서방일대, 산수동 동명등 일대, 장동 대의동 일대에 8절지 크기의 갱지 전단에 공수의 만행과 오후 2시에 도청 앞으로 모이자는 등의 내용이 담긴 벽보를 벽에 부착하거나 살포하였으며, 박용준( 5월 27일 사망)등을 중심으로 한 야학팀도 '투사회보' 를 꾸준히 제작살포하였고, 다른 이들도 시내 곳곳에서 전단을 만들어 뿌렸는 바, 이는 관제언론에 의해 조금도 보도되지 않았던 진실을 알리고자 함이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공수부대의 끔찍한 만행을 널리 알리고자 함이었다. 이것이 어찌 저들이 덮어씌우는 유언비어 유포란 말인가?

  1980년 5월 22일
  이 날 시민들은 계엄군을 격퇴시키고 시내를 완전 장악했다.
  시민들은 걸어서 혹은 차량에 나누어 타고 도청 앞으로 집결했다. 금남로 거리는 완전히 '자유의 거리' 가 된 느낌이었다. 오후 5시경 도청 앞에서 임시 수습위의 계엄군과의 협상보고 대회가 개최되었다.
  시민들은 처음에는 유혈방지와 질서유지 발언에는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으나, 유신치하에서 국회의원에 입후보했던 장휴동이란 자가 등단해서 인기위주의 발언을 늘어놓고 급기야는 사태수습만을 거론, 임시방편책 타협책만 늘어놓자 이에 격분한 시민들은 분수대 위에 올라가 마이크를 빼앗고 '계엄철폐' '굴욕적 협상 반대' 등을 부르짖었다. 산발적이고 즉흥적이긴 하지만 분노에 충전해 있던 민중의 힘이 분출구를 찾고 있다가 시행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의의가 큰 집회였다고 생각한다.

  1980년 5월 23일
  전날의 자연발생적 집회에서 민중의 분노가 어떤 것인지를 확실히 깨달은 윤상원 외 몇명의 문화패는 흩어진 단원들을 수소문해서 결집을 시작했다. 오전 10시 반경 윤상원 등이 도청이 들어가 당시 학생수습위원장 등을 만나 흥보임무를 자청하여 가두방송 및 전단제작·배포역할을 분담하기로 하고 도청을 나왔다. 이리하여 그낱 12시 반경 대의동에 있는 녹두서점을 근거로 하여 모인 문화패와 김영철 ·박용준등의 야학의 학생들은 프랑카드를 제작하였다. 대인시장에서 광목을 구입하고 계림동 제재소 등지에서 많은 각목을 얻어와 길이 5미터, 폭 60센티 정도 크기에 "전 시민은 총궐기 하자", "계엄해제하라""000물러가라" "000석방하라" 등의 내용이 담긴 20∼30개의 프랑카드와 피켓  16개정도를 만들어 도청담장과 상무관벽 경찰당국차고 등에 부착하였다. 
  또한 문화패는 YWCA (그 당시 현 전일빌딩 뒤에 소재함)에서 모임을 갖고 전날의 수습위 주최의 투항적 시민집회의 문제성을 인식하고 올바른 인식의 전달, 시민의 진정한 요구수렴을 위해 시민궐기대회를 갖기로 결정하여, 촉박한 가운데서 그 준비를 하였다
  이 시민궐기대회는 24일부터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 로 개칭되어 광주함락 전날인 28일까지 총 5차에 걸쳐 개최되었다.
  촉박한 가운데서 역할분당을 한 문화패는 사회자와 각 직능 대표별로 연설문구를 작성하여 분수대 쪽으로 나아갔다. 소식을 알기 위해 모여든 군중은 굳게 닫힌 도청문만 바라보며 무언가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도청 쪽에서 내준다던 앰프와 스피커는 아직도 나오지 않고 있었다. 애당초 도청의 투항파 수습위들은 대규모의 시민집회를 원하지도 아니하였거니와, 마지막 날까지 궐기대회에 비협조적이었다. 할 수 없이 근처에 대기중이던 전남대 스쿨버스에 가두홍보용으로 부착돼있던 마이크와 앰프를 떼어내 분수대에 설치했으나 작동법 잘 몰라 시간이 지체되고 있었다. 시민중에 앰프 다룰 줄 아는 분이 있으면 올라와 달라고 외치자 시민 두어 사람이 올라왔다. 그 중에 한 사람은 궐기대회가 끝나는 날까지 매일 나와서 앰프작동을 책임지고 거들어 주었다.
  드디어 오후 3시경 확성기가 울리자, 도청 쪽으로 향해 서있던 수많은 시민들이 분수대를 중심으로 모여들기 시작했고 조금 전까지 떠들썩하던 소리도 잠잠해졌다. 사회자가 "지금부터 제 1차 민주쟁취 시민궐기대회를 시작하겠습니다. "말을 시작으로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싸우다가 거룩하게 숨진 영령들을 위한 묵념을 올렸고, 애국가를 불렀다. 시민들의 합창소리가 물결처럼 광장을 메웠다. 애국가 제창이 끝난 뒤에 지금까지의 경과보고, 광천동에서 본 근로자 대표 김영철씨, 해남에서 현장공연을 통해 알게 된 한 농민대표, 시민대표, 학생대표등 각계각층의 성명서 발표 순서가 있었다. 발표가 끝날 때마다 시민들은 큰 파도와 같은 박수와 함성으로써 동의와 동참의 의사를 열렬히 표명하였고, 사회자의 선창에 따라 외치는 구호 함성은 하늘에 닿을 듯 우렁찼다.
  특히 이 대회에서 피해상황이 전달되었는 바, 병원에서 신원 확인된 시체 30여구를 포함, 사망자 수 백여명, 부상자 500여명, 연행자 천 여명 이상으로 알려졌다.
  수습위 공지사항에 이어 차기대회를 공고한 다음, 민주주의 만세 삼창, 광주시민 만세 삼창으로 오후 5시경 대회는 끝났다.
  군중대회는 끝났으나 시민들은 돌아갈 줄 몰랐다. 이 날 시민들에게 투사회보가 배포되었으며, 사람들은 제각기 피해상황등을 주고 받으며 분노를 가라 앉히지 못하고 있었다.
  이날 도청앞 상무관에는 분향소를 설치하였고 도청 앞 광장은 '민주의 광장' 으로 명명 되어졌다.
  23일 궐기대회에서 많은 준비 부족에도 불구하고 열렬한 호응을 받은 것은 민중의 열기때문이었다. 민중의 분노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으며, 그것은 광주를 일 주일간이나 이끌게 한 잠재적 역량의 시발이었다. 어찌 소수폭도만이 판치는 무법 도시었다면 계엄군이 쉽게 장악하지 못했겠는가 ?

  1980년 5월 24일
  23일의 집회가 끝나고 문화패는 다시 YWCA에 모여, 시민들의 요구사항에 대해 논의하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라디오와 신문이 끊기고 TV의 기만적 보도에 이골이 난 시민들의 소식에 대한 굶주림이었다. 그리하여 박용준 등 야학팀들은 밤을 세워 (투사회보)를 등사하였고 차량시위대나 혹은 배포를 자청하는 시민들의 손에 의해 배포되기 시작하였다.
  또 하나는 (대자보의 제작)이다. 문화패와 몇 명의 YWCA 간사들 그리고 일부 대학생들에 의해 순식간에 만들어진 대자보 외국의 신문들이 전일빌딩과 수협건물 벽등에 부착되어졌다. 또한 YWCA에서 여자들이 써 제작한 검은 리본이 시민들의 가슴에 부착되기 시작했다. 리본을 사러 대인시장에 갔던 한 여성 문화패는 검은 천을 사자, 주변에 있던 장사꾼들이 즉석에서 모금을 하여 핀 값을 대 주었다고 말했다.
  드디어 오후 3시경 도청 앞 민주광장에서 제2차 민주수호범시민궐기 대회가 개최되었다. 비가 오는 데도 5만여 인파가 광장을 메웠다. 시민들은 매일 계속적으로 불어나고 있었다. 대회직전에 시민들은 도청 앞으로 몰려가 궐기대회에 비협조적이고 투항주의적인 수습위를 규탄하였다. 대회는 전날과 같은 순서로 진행되었고, 중간에 전날 한 시민의 제의에 의해 준비되었던 '000화형식 ' 이 거행되었다. 시민들은 빨리 죽이라는 함성 속에 000의 화형식이 거행되었다. 시민들은 '000이 이렇게 유명해 졌으니 나중에 대통령에 출마하면 무조건 당선되겠다"고 농담도 하곤 했다.
  대회도중에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져, 우산을 펴는 등 약간의 소란이 일었는데, 사회자가 "지금 이 비는 원통하게 죽은 영령들이 눈을 못감고 흘리는 피 눈물"이라고 말하자 사람들은 전부 우산을 개고 비를 맞으며 궐기대회를 계속했다.
  광주 시민을 폭도로 몰아치는 정부당국자와 관제언론에 대한 성토절차가 있었으며, 또한 한 여학생에 의해 민주시가 낭독되었다. 이 시는 그 뒤로 여러 차례 낭독되었는 바, 4 . 4조의 짤막하게 직접적 감정을 드러낸 이 시는 비록 예술적으로 세련되지 못했을지언정, 사람들의 가슴을 칼로 도려내듯 아프게 찌르는 그 무엇이 있었다.
  대회가 끝난 직후 50여명의 대학생과 문화패가 YWCA에 모여 보다 더 적극적인 홍보활동을 하기로 하고, 기획조, 궐기대회 조, 가두방송조, 대자보조, 인쇄조 등으로 역할 분담을 하였다. 또한 이 자리에서 무장 시위대를 '시민군"으로 칭하기로 결정하였다.

  1980년 5월 25일
  두번째의 궐기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르고 나서 비로소 문화항쟁은 양적으로, 질적으로 발전하였다. YWCA에 많은 학생들이 모이기 시작했으며 이들은 저마다의 역할들을 성실히 수행해냈다. 상황은 갈수록 불투명했고, 변두리 지역 시민들 TV의 기만적 보도의 허구성을 깨닫고 진실을 알기 위해 도청 앞으로 모여들었다. 모여 드는 군중들을 보면서 문화패는 이들에게 우리가 무엇 때문에 싸웠고, 앞으로도 어떻게 싸워야 하는가를 알려줘야만 했다.
  가두방송조는 시내 곳곳을 돌면서 현재 상황과 행방불명자에 대한신고접수를 받았으며, 인쇄조, 대자보조도 한 가지라도 더 알리기 위해 정신없이 바쁘게 움직였다.
  그날 오후 2시!  제 3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가 열렸다.  전날에 이어 5만이 참석한 가운데 희생자 가족, 종교인, 전국 학생연합에게 드리는 글이 채택되었고 시민군 대표가 직접'나와"우리는 왜 총을 들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성명서를 낭독하였다. 특히 도청에서 한 사람이 나와 미군이 000일파를 견제하기 위해 미 제 7함대 2척을 부산에 파견하였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는, 광주 시민들은 일말의 기대와 함께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이날 문화패는 사회를 보던 사람도 연설을 했던 사람도 거의 다 목이 쉬어 여러 대학생들의 도움을 받아 진행해 나갔으며, 사이 사이 노래들(000물러가라 좋다좋다 훌라송, 군가를 개사한 것 )을 지도하기도 하였다. 이날은 시민군을 위한 모금절차가 있었는데,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로 활동에 필요한 충분한 돈을 쉽게 모금할 수 있었다. 이 외에도 시민들은 음료수, 쌀 등을 자진하여 기탁하기도 하였다.
  이날은 특히 외곽지대 주민들이 많이 참여하였는데, 이들은 " 우리는TV만 보고 이제까지 속아왔다. 대학생들이 각 동별로 임시 동장 맡아 홍보와 질서유지를 맡아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이날부터 대학생들의 보다 적극적인 결정을 호소하였고, 또 동별로 모여서 프랑카드를 앞세우고 도청 앞 궐기대회에 참여하는 자발적인 시민행렬이 많이 늘어 났는데 이것은 시민들의 조직력이 확대된 형태였다.
  이날 대회의 마지막 순서는 금남로 시위였다. 한 문화패가 이를 선도하여 전남대 버스를 앞세우고 금남로 신역을 돌아 공용터미널쪽으로 해서 다시 도청으로 돌아왔다. 약 5천명의 고교생 ·대학생 ·시민들이 민주주의 만세와 민주 정부수립 요구 등의 구호를 외치며 이 시위에 참가하였다.
  이날 80만 광주시민의 결의에서 시민들은 단순한 사태수습이 아니라, 근원적인 문제, 즉 나라의 민주화를 위한 민주인사들로 구성된 민주정부 수립을 요구하였다. 이것은 분명 새로운 자각이었다.

  1980년 5월 26일
  새벽에 계엄군이 약속을 깨고 농성등 방면에 1km진입하였다. 군 진입기도를 저지키 위해 오전 8시 30분경 '제4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 ' 를 임시로 개최하여 계엄군의 협정위반과 시민이간 책동등을 성토하였다. 특히 시민들은 정부당국자나 언론에서 시민군을 폭도라고 부르고, 소수폭도와 다수 선량한 시민 운운으로 이간책동을 펴는 것에 맹렬히 분개했다. 시민들은 이 고장을 지키고 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해 일어선 시민군이 폭도인가, 아니면 불법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무고한 시민을 살상한 000과 그 하수인들이 폭도인가 즉각 반문하면서 성토대회를 가졌다. 이어 언론인과 군인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전 언론인에게 보내는 글' 과 '국군에게 보내는 글' 이 채택되었다. 대회도중 한 예비군이 등단하여 예비군들이 시민군에 참여하여 각 동별로 치안을 책임지자고 제의하여 많은 호응을 받았다. 또 한국정치의 문제점, 한국경제구조의 모순 등 대중교육을 위한 프로그램도 진행되었다.
  대회가 끝난 후, 전대버스를 앞세우고, 1000여명의 시민이 화정동 계엄군 대치지점까지 가두시위를 벌이고 돌아왔다.
  오후 3시쯤, 제 5차 궐기대회가 열렸다. 그러나 이것이 마지막 대회가 되었다. 문화패의 대다수는 잠을 제대로 못자고,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해 몸과 맘이 말이 아니었지만, 눈빛만은 카바이트 불꽃처럼 빛나고 있었다.

  26일의 4차와 5차 궐기대회의 특징은 시민들의 자발적인 등단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한 시민이 등단하여, 22일 계엄군과 경찰 퇴각 후 우리 광주에서 평소면 하루면 몇 건씩 발생하던 강도, 절도 사건이 한 건도 없었으며 특히 은행이 습격당한 일이 있냐고 말하여 많은 공감을 받았다. 이외에도 증심사에서 온 '현덕' 이란 법명을 가진 스님이 등단하여 자신이 겪었던 과정을 이야기하였다. 또한 가족끼리 승용차를 타고 오다가 교도소 부근에서 계엄군의 총격을 받아 일가족이 몰살하고 자신만 살아남은 한 아주머니'가 올라왔으나 아직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는지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였다.

  오후 5시쯤, 상무대 방위병으로부터 흘러나온 병력증강과 진압출동에 따른 돼지고기 파티를 계엄군이 벌이고 있다는 소식과 군장교 부인으로부터 무력진압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다. 내일 새벽이면 계엄군이 진주해 들어올 것이다. 진행을 맡고 있던 문화패는 이를 시민들에게 알려야 되는지의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도청 안의 사정은 아직도 투항파와 투쟁파가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계엄군의 진압소식을 시민들이 듣는다면 희망과 기대를 갖고 있는 시민들은 크게 좌절할 것이다. 우리의 무력열세와 고립상태는 패배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는 떳떳히 죽어야 한다.
  마침내 눈물어린 목소리로 계엄군의 진압소식이 전해졌다. 시민들은 약간 술렁거렸다. 한 고등학교 교사가 올라와 글까지 싸우자고 열변을 토하였다. 끝까지 싸우자는 학생, 시민 5000여명이 화정동 바리케이트 지역까지 가두 시위를 벌였다. "우리는 결코 싸움을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 시민군들의 일관된 구호였다.
  밤이 오고 있었다.  돌아온 시위대 중 나이 어린 학생들은 돌려보내고 500여명 정도가 남았다. 그중 200여명 정도가 YMCA로 들어가 사격훈련을 받은 뒤 기동 타격대로 편성되었다. 그날 저녁 YWCA에 가장 많은 대학생들이 모였다.여자들은 열심히 밥을 해서 날랐으며, 인쇄소는 유인물 작업을 계속 진행하였다. 밤12시쯤 피곤에 빠져 잠에 빠져들었는데 새벽 4시에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방송소리에 잠을 깼다. 비상이었다. 계엄군이 외곽지대에서 진입해 들어오고 있다고 한다.  당시 YWCA에 모여 있던 많은 여학생들과 인쇄조를 맡아 며칠동안 밤낮 없이 일을 하던 야학패들은 모두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며 어둠 속으로 헤어졌다 당시 YWCA에는 10여 정의 총기가 배당되었는데 박용준(인쇄조장)이 총기를 잡으며, 우리가 이 총을 들것이니 여자들과 중 고생들은 피하라고 했다. 결국 박용준은 끝내 총격을 받아 사망하였고, 윤상원도 도청 안에서 사망하였다. 광주항쟁은 결코 끝난 것이 아니다.
광주항쟁 당시 시민들은 단순한 사태수습만을 외친 것이 아니었다 오직나라의 민주화만이 광주열사들의 흘린 피의 대가에 값할 것이며, 그 날이 올 때까지 우리의 북소리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 총탄 속의 프랭카드 - 미술패 의 수기

  공용터미널에서, 금남로에서, 또는 학교에서 많은 시민과 학생들이 계엄군들에게 맞아 부상자들이 속출하고 시체까지 발견되었다는 사실들이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우리들이 운영하던 소규모 미술학원의 고등학생들도 길에서 부딪친 참혹한 이야기들을 전해주었다. 수업할 분위기는 이미 교실에서 떠나버리고, 우선 어제까지 9차준비 모임을 가졌던 회원들에게 안부전화를 걸었다. 모두들 먼저 안부를 물어온다. 학원 학생들도 모두 옥상으로 올라가 시내쪽을 바라보면서 참혹하게 전개될 상황에 대해 예감을 하고 있는지 모두 소리를 죽이고 있었다. 이미 내가 옥상에 올라갔을 때는 건물 옥상마다 동네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때로는 외마디 소리로 시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페퍼포그가 자욱하게 깔린 시내는 군데군데서 검은 연기가 치솟고 있었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함성소리도 들리고 있었다. 그때가 5월 18일로 기억된다.
  아침 출근길에 골목마다 대문 앞, 상점 앞에서 사람들이 웅성이며 근심스런 표정이다. 아침이라서 시내는 소강상태로 조용하고 사람들의 발걸음만 지나쳐 가고 있으나 넘어진 가로수, 뜯겨진 보도블럭, 아스팔트 위에 깔려진 유리조각과 돌멩이들이 어제의 상황을 자세하게 이야기해주고 있었다. 19일 오전 11시 경부터 시민들의 분노는 다시 불붙기 시작하면서, 잔인한 공수부대의 만행이 저질러지기 시작했다.
  MBC가 불타던 날 밤, 거리에서 군중들과 몰려다니며 참혹하고 몸서리 쳐지는 현장들을 목격하고 분노와 흥분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21일 늦은 아침에 귀에 익는 군중들의 노래소리와 함성소리에 선잠을 깼다. 트럭, 버스 군용차 등을 몰고 시위 군중들이 만세를 부르며 온거리를 신나게 달리고 있었고 연도를 메운 시민들이 함성과 박수로 그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시위차량들을 바라보면서 우리들이 할 일을 생각해냈다. 그렇다, 저 시위대들에게 구호가 쓰여진 피켓과 프랑카드를 나누어 주어야 한다.
  우리 학원에 있는 학생들의 스케치북과 모든 여분의 종이들을 수거했다. 그 당시 학원에서 강사로 있으면서 또한 우리 미술인들도 무엇인가를 해보겠다고 엊그제 제 9차 준비모임까지 계속 같이 참여했던 후배 1명과 붓을 들었다. 우선 시위대들이 외치는 구호를 받아 썼다. 작은 것 큰 것 모두 합쳐 50장 정도 만들었을 때 우리 학원에 있는 모든 종이가 바닥이 났다. 우리는 그것을 들고 학원과 어느정도 거리가 떨어진 산수동 오거리에서 시위차량을 세우고 한 장씩 나누어 주었다. 프랑카드를 부착한 차량들에게서 이야기를 듣고 새로운 차량들이 몰려와서 프랑카드를 원했으나 우리들이 제작한 50장의 프랑카드는 30분도 못 되어 바닥이 났다. 후배가 부근 페인트 가게를 가르켰다. 우리는 그곳으로 달려가 페인트를 사려고 하자 주인 아저씨가 얼마든지 필요한 만큼 가져가라고 하며 층층이 쌓인 페인트통이며 붓과 휘발유 등을 있는대로 내주었다. 또한 한참을 뒤따라 오며 내몫까지 싸워 달라는 부탁과 함께 우리들의 손을 일일이 잡아주었다. 우선 급한대로 우리는 차량들의 몸체에 구호를 썼다. 차량들이 우리들 앞에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면서 낯익은 얼굴들이 몇몇 보이기도 했다.
  그날밤 후배 2명과 학원에서 논의된 사항은 다음과 같은 반성과 해야 할 일을 결정했다.
1) 페인트와 붓은 번거롭고 힘드므로 락카 스프레이를 사용한다.
2) 차량에 부착되는 구호 외에도 시장에서 싼 옷감을 구해 밤새워 시위용 프랑카드를 제작한다.
3) 골목 건물벽 전봇대 등에도 스프레이 작업을 한다. 
  시민군들이 마침내 계엄군들을 도청에서 철수시켰던 22일 오전 학동에서 거주하는 우리 회원 두 명을 만날 수 있었다. 우리는 서로 얼굴을 보자마자 지금까지 서로 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우리도 놀랐다. 광주는 금남로를 중심으로 동구와 서구로 나뉘어 진다.  21일까지는 금남로를 계엄군이 장악했으므로 동구와 서구와의 연락이 두절되었으나 양쪽에서 각각 벌어진 양상은 똑 같은 것이었다. 그들도 학동에서 지금까지 우리가 했던 작업과 똑 같은 작업들을 진행했던 것이다. 우리는 서로 놀랍고 반가워 하면서 우리들이 진행하고 있는 일들과 앞으로 할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는 2개조로 나누어 한 조는 시내 곳곳에서 스프레이 작업을 시작했고, 다른 한 조는 시장에서 옷감(광목) 20필을 구해 프랑카드 제작을 맡았다. 스프레이 작업은 인도의 보도블럭 위에, 그리고 전봇대 등 조그만 여백이 있는 곳은 모조리 긁어댔다. 그리고 프랑카드는 산수동 오거리를 중심으로 결집되어 있던 시민군 산수동부대와 시민군 지원동 부대등에 전달되었다. 그 작업들은 23일 · 24일 · 25일까지 계속되면서 스프레이 락카 냄새와 온종일 엎드려 일하는 피곤함으로, 한 시민군 도청 지휘본부의 '수습 대책위'에 '무기 반납'과 라디오 뉴스에서 느끼는 '광주, 홀로 분투하는 외로움' 등이 더욱 우리들의 작업을 힘겹게 만들었다. 26일 오전 9시에 스프레이 작업의 기동성을 위해서 시민군 산수동 부대원 몇명과 도청에 들어가 봉고차 한 대를 얻을 수 있었다. 봉고차에 페인트와 프랑카드용 목재 그리고 스프레이 락카통등을 싣고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작업을 시작하려 했으나, 오전 11시에 봉고차의 기름이 떨어지고 어느 곳에서도 기름을 구할 수가 없었다. 아니 몸이 움직여주질 않았다. 해야 할 일은 너무도 많았으나 육체의 피로감과 우리 자신의 무기력함이 우리를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게 피곤으로 억누르고 있었다. 그때 우리는 모처에서 내일 새벽 0시를 기해 계엄군들이 진입한다는 연락과 함께 나의 집에 몇 명을 피신시켜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후 YWCA에 들려서 그들과 연락을 하고 우리 작업조는 소주를 간단하게 마시면서 뒷마무리를 정리했다. 학원에 잠깐 들러 그동안 작업으로 인해 엉망이 된 교실을 정리하고 집에 들어온 시간이 밤 10시 몸은 솜뭉치같이 피곤하나 잠은 오지 않았다. 간간히 총소리와 함께 검은 밤하늘에 포물선이 그어졌다. 자정이 넘으면서 외곽지역에서 Ml6소총의 난사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그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마구 써 갈겨했던 빨강색 .파랑색 .검정색의 구호 글씨들이 총소리에 놀라 벽면에서 한자씩 한자씩 지워져 가는 느낌이 들었다.

  "살인마 XXX을 찢어 죽이자"
  "계엄 철폐 "
  "민주인사 전원 석방하라"
  "우리는 싸움을 포기할 수 없다"
  " 광주 만세 "
  그토록 신명을 바쳐서 열심히 했던 우리들의 작업이 콩볶듯 토해내는 총소리 앞에서 아무런 힘도 없이 무기력하게 주저앉는 것 같았다. 그러나 '힘'은 '완결' 이 아니다. 완결 즉 승리는 대물림으로 남겨지면서 더 강한 힘을 키워가는 것이 아니던가. 그 구호 글씨들이 더욱 불어나서, 그리고 온통 우리들의 안팎을 감싸고 있을 때, 또한 감싸는 방법들을 다시 창조적 매체로 점진적 변환을 이루어 나갈 때, 저 총소리를 잠재우는 거대한 힘, 정신적 통일의 거대한 힘을 갖게 되리라.  총소리가 점점 크게 들릴 때마다 우리들이 이곳 저곳에 스프레이로써 갈겨 댔던 구호들이 춤추며 벽에서 떨어져 나가 도청을 사수하는 시민군들의 얼굴들과 겹쳐져서 하늘로 날아 올라가고 있었다. 새벽의 혼미한, 그러나 이제부터 우리가 해야 할 명백하고 뚜렷한, 그리고 구체적인 우리들의 자유와 해방이 총소리와 함께 새벽의 여명 속에서 더욱더 분명하고 확실하게 정리되면서 그 통한의 5월 27일 새벽이 하늘을 희뿌옇게 열고 있었다.

  ● 민중언론 '투사회보'  - 들불야학 수기

  18일
  시내에서 12시부터 데모가 크게 났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오후에는 공수부대들이 투입되어 학생이라면 무조건 두둘겨 패고, 때리고 찌르고 한다는 소문이 여기까지도 좌악 퍼져 나왔다. 공용정류장에서 맞아 죽은 시체가 나왔다고 사람들은 수근수근대며 근심스러운 표정들이었다.
  우리들도 모두들 시내에 나갔다가 쫓겨서 광천등으로 돌아왔다. 통금이 8시로 앞당겨지자 미처 집에 가지 못한 강학들도 이곳으로 하나둘 찾아 들었다. 밖은 여기저기에서 연기가 치솟고 사람들이 불안하게 웅성댔지만 우리 학당은 오랫만에 만난 강학, 학생들이 수인사하고 정담을 나누며, 곧 이어 상황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에 대해서 열띤 토론들이 오가면서 18일 밤을 지냈다.


  19일
  상원이 형은 시내 상황을 알아보려 나갔고, 영철이 형은 신협으로 출근하였다. 우리는 어제 토론 결과대로 야학으로 썼던 빈방에서 오전 11시부터 '민주시민회보' 라는 제하의 유인물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내용은 18일 상황을 고약 정리했으며, 시민들에게 행동강령을 안내하는 내용을 주로 한 것이었다.. 약 2000매 정도를 등사하였으며 배포는 주택가와 외곽으로부터 차츰 중심가로 뿌려 나가는 방식을 택했다. 왜냐하면 중심가는 상황이 벌어졌던 현장으로 구태여 유인물이 필요 없으리라는 판단 때문이었던 것이다. 시내는 한층 데모가 가열됐으며 시민들까지도 대대적으로 참가하였고, 공수부대의 신앙도 훨씬 가혹하고 잔인해서 사상자가 십 여명을 넘어섰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왔다.


  20일
  학당에서 시민 아파트 앞에 있는 빈집으로 장소를 옮겨 등사를 계속해서 '민주시민회보' 3호, 4호까지 제작하였다. 여러 번의 작업으로 기능이 저절로 분담되어서 손이 빠른 학생 2명과 필경글씨 전문인 용준이가 제작을 도맡아 하게 되면서 제작매수도 점점 늘어났다.
  시내 상황은 잠시 소강상태에 돌입하는 듯 하다가 밤7시가 넘어서면서 불길은 더욱 거세어졌다. 왜곡보도 표적으로 지탄을 받아온 MBC방송국은 불이 나면서 건물이 통채로 불길에 휩싸였다. 신역KBS근방과 도청 앞 청산학원 앞에서는 밤새내 계엄군의 총격소리와 시민차량 시위행렬의 애국가 등의 노래소리와 함성 그리고 성난 시민들의 끈질긴 육탄돌격과 화염병 공격으로 전투는 밤새워 진행되었다.


  21일
대대적으로 아세아 자동차공장에서 차량이 인수되면서 시위는 광주시외로 확산, 도내 전역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하면서 도청과 전남대,조선대만 남기고 계엄군은 철수한 상태였으며, 시내 전역은 시위군중으로 발디딜 틈도 없이 메워진 채 접전이 계속되었다. 우리는 '민주시민회보'를 '투사회보'로 개정한 후 '인쇄조 ' '물자조달조' '배포조' 의 3개조로 편성하고 아침부터 인쇄를 시작하였다. 1호 , 2호를 동시에 제작하여서 총 10,000매 정도를 제작한 후, 저녁 9시부터 는 3 , 4호를 양면으로 제작하기 시작했다.  배포조는 제작된 유인물을 시위대 차량행렬에 전달하기로 하고 운집한 군중 속에서 직접 뿌리기로 하였고 물자조달조는 충장로 및 상가 지역에 자리한 지업사에 가서 종이를 사기도 하고 때로는 즉석 기증을 받기도 하였다. 오후 1시에 계엄군의 무차별 사격과 함께 오후 3시쯤 시민들의 무장도 자구책으로 진행이 되어 도청 앞에서는 시가전의 총격전으로 싸움의 양상이 변화되었다. 이에 무장한 시민들의 위세에 눌린 계엄군은 철수를 결정하고 오후 5시 도청으로부터 철수하기 시작했다.


  22일∼ 56일
  광주 시민들은 계엄군을 격퇴시키고 광주시내를 완전 장악하였다. 군은 시외각 7개 지점에서 시를 봉쇄했으며 시민군들도 바리케이트를 치고 대치하였다. 날이 밝자 시민들은 도청 앞으로 모여들었다. 우리는 상황의 전반적인 흐름과 피해의 내용 등을 기재하여 투사회보 5호를 수만장 제작하였고 다음날 저녁에 작업하여 6호를 만들었다. 24일에는 오전에 7호를 제작하였고 다시 이름을 개칭하여 투사회보를 민주시민회보로 바꾼 후 8 . 9호를 양면에 제작하였다. 내용은 주로 시민들이 지켜야 할 준수사항과 전달되어야 할 홍보사항으로 궐기대회 홍보 및 대학생 집결처, 도청내의 진행상황 등이었다.
  25일은 장소를 YWCA로 옮겨서 10호, 11호를 제작하였으며, 이제는 '물자조달' '인쇄제작' '배포 ' '문안작성 ' 외에도 '취사 '조까지 정리가 되어 총인원은 20여명이 넘게 되어 자그마한 신문사를 방불케 하였으며 제작매수도 하루에 3 , 4만매를 능가하게 되었고 제작기재로 고속등사기 2대 등 차츰 대규모화 되어갔다. 제작팀들은 교대로 잠을 자가며 제작에 몰두했고, 기타 유휴 노동력들은 궐기대회팀 및 대자보 작성, 부착, 가두방송 등에도 힘을 보조하여 도와주었으며 도청 내의 취사까지도 일부 부담하게 되었다.
  26일 오전에 계엄군이 200미터 가량 시내로 진입해 들어왔다. 이에 오전부터 궐기대회가 진행되었으며 우리 투사회보조들도 한층 바빠졌다. 12호를 제작하여 배포하였으며 기타 궐기대회 결과 및 계엄군과의 협상 결과 등을 홍보하는 홍보전단을 따로 제작하여 배포하였다.  저녁부터 13호를 작성, 제작에 들어갔다.

    ● 무등산을 뒤에 두고 - 한 동참자의 수기

세월은 느끼기 전에 앞서 간다고 했던가!  그날 그후 만 일 년이 지났다. 만 일 년이 지난 후 오늘에야 광주 시민 봉기와 총정리를 하면서 만감이 교차함을 느낀다. 먼저 가신 열사 제분들께 부끄럼을 가지며 용서와 아울러 채찍으로 함께 해주시기를 빈다. 하얀 지면 위에 핏기없는 액체가 뚝뚝 떨어져 포도 위에 핏방울 마냥 서서히 번져가고 있다.
  지난 5월 27일 이후에 나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27일 새벽 계엄군의 무차별 난사를 피해 끝까지 싸우고자 하는 동료들을 두고 친구집으로 피신을 했다. 친구집은 한창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 도청과 상가가 밀집해 있는 중심지와 가까운지라 끊이지 않고 총격과 폭약터지는 소리가 세차게 귓청과 대뇌부를 흔들고 있었다. 그러나 어인 일인가? 나는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잠이 들어버렸다. 오전 10시쯤 되었을 시 난데없는 고함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고 벌떡 일어났다. 완전 무장을 갖춘 계엄군이 나의 가슴팍 바로 앞에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순간 창문을 통해 밖을 둘러보니 거의 일개소대의 병력이 두명 한조를 이루고 바삐 돌아 다니며 건물 구석구석과 각방을 수색 중이었다. 난간에 나가있는 친구가 걱정에 차서 겁을 잔뜩 먹은 얼굴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가슴팎에 총구를 겨냥한 채 신분증의 제시를 요구했다. 나는 뒷주머니에서 주민등록증을 꺼내 그 병사의 손에 건내 주며 말없이 그의 눈을 마주 보았다. 긴박할 때일수록 침착해야 한다. 침착성은 위기의 순간을 행운의 길로 전환시켜 준다고 했던가?
  엄한 표정을 하며 병사가 몇 가지의 질문을 내게 던졌다.
  나는 그의 질문에 대하여 아무 것도 대답할 수 없었다.
  지난 몇 일 동안의 시민궐기대회와 간밤의 가두시위는 금새라도 터져 나와 버릴 것 같은 가슴속에 응혈진 소리를 제외한 목구멍의 최소한의 기능마저도 사용할 수 없었다. 다행히도 병사가 벙어리라고 생각해준 것일까? 병사는 아무말없이 자기를 응시하는 나를 한쪽 구석에 밀어붙이고 한 평이 채 못되는 방안을 마치 이 잡듯이 수색하기 시작했다.  벽장, 선반, 상자, 가방, 그리고 방안의 장판을 걷어 올리고 시멘트 바닥까지 샅샅이 조사를 했다.
  운이 좋았을까 ?
  아뭏든 그 순간은 무사히 지나갔다. 이와 같은 세밀한 수색은 27일 하루동안만 해서도 세번이나 있었다. 세번 모두 아무 반항없이 체념상태에서 묵묵히 그들의 지시에 따르며 그들이 무엇을 어떻게 하든 내버려 두었다. 다행스럽게도 병사들은 무기를 회수하며 수색하는데 혈안이 되어 다른 일, 즉 주모자를 색출하는 데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듯 했다. 수사요원은 오지 않았으며 그들 자신이 수사요원은 물론 아니었다.
  밖으로 나오니 햇빛이 눈에 부셨다. 건물 내를 제외하고는 시민들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모두 죽어버린 것일까 아니면 모두 오랏줄에 묶여간 것일까 답답증을 참지 못하고 밖으로 잠깐 다녀온 친구가 거리에는 민간인은 거의 구경할 수 없고 큰 도로든 작은 골목이든 관계없이 도로가 교차되는 곳은 계엄군이 차단하고 있다고 알려줬다.  계엄군 일개 분대는 한 조를 편성하여 각 교차로마다 도로를 차단하여 모든 사람들에 대한 검문 검색을 하고 있었다. 오층 이상의 건물옥상에는 어느 곳이든지 병사들이 진주해 있었다. 근처의 상황을 감시하여 조금이라도 수상쩍은 곳이 있거나 사람이 있으면 가차없이 M 16을 연발로 난사했다. 누구도 창밖으로 얼굴을 내밀 순 없었다. 카키색 무전기와 망원경, 햇빛에 반사되어 번뜩이는 총신과 휘장, 찬란한 제복 이것들은 생동하는 우리의 도시를 카키색으로 물들였다. 또한 호흡하는 공기마저 카키색으로 물들지 않음은 천만다행으로 여길 일이다. 커다란 군화 발자국은 어느곳이든 가지 못할 곳이란 없었다.
  나는 더 이상 도심지에 소재한 친구의 집에 머물 수가 없었다. 나를 잡아가 주시도록 하고 기다릴 수는 없어 이튿날 위험을 무릅쓰고 도심지를 벗어나 외각 지역에 있는 또 다른 친구 집을 향해 문밖을 나섰다. 활발하고 자유스럽고 인정있는 논리적이었던 도시가 하룻밤사이에 또 다시 철창없는 감옥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피비린내와 너절하게 찟긴 육체, 절규와 신음소리, 총기와 날이 번뜩이는 대검의 냉기, 이곳에서 탈옥하기란 과히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하게 느껴졌다.  거리의 구석구석이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했지만 빠져나갈 구멍은 없었다. 친구집을 나와 오분정도 경과할 때 그러니까 골목을 누비고 오륙백여 미터쯤 나아갈 무렵 이미 예상한 대로 불로등 다리에서 일군의 계엄군 병사들에 의해 제지를 받았다. 신분증이 제시되고 그들의 지시에 따라 바지와 소매자락을 걷어올려 보였다. 또한 그들이 육모 방망이의 표적의 대상이 되었던가를 확인받기 위해 머리도 헤쳐졌다.
  병사들 중 지도자로 보이는 자가 가까이 다가오더니 대뜸 " 당신주동자지 "하고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그리고는 상의를 벗으라며 호주머니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나는 거의 체념상태에 빠져있었다. 친구집에 남아 있거나 외곽 지대로 빠져나가거나 붙들릴 가능성은 매 한가지였다. 허나 가만히 앉아 붙잡히는 것과 최소한이나마 의지하고서 행동하며 붙잡히는 것은 심리적으로 보나 또는, 여타면에서 보나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내가 주동자도 아닌 그보다 불순분자로 간주되는 것은 과히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사실로써 그것은 증명되었다. 하얀 운동화의 더러움, 얼굴의 그을림, 전혀 말을 못할 정도의 쉰 목청, 이때 내가 취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었다. 다만 지휘관의 눈을 정확히 응시하고 있을 뿐. 년초의 토정비결이 좋았을까. 위기의 순간 의외로 그 지휘관은 낮은 목소리로 집에 가거들랑 절대 집 밖으로 나오지 말라는 당부와 호의를 베풀어 그들의 방위선을 무사히 통과시켜 주었다.
  그러나 역시 길은 험난하다. 내가 찾아 나서는 곳, 조금이나마 안전지대라고 자신이 판단하는 장소까지 가기 위해서는 아직도 십 리 정도의 길이 남아 있었다. 마음을 가라 앉히고 애써 태연한 척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을 때 마침 전번부터 안면이 두터운 형 한 분이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치는 증이었다. 뒷좌석에 올라타고 얼마를 갔을까. 또 다시 삼엄한 임시 검문소가 이 백미터 전방에 보였다. 아주머니나 혹은 늙은 분들을 제외한 젊은 사람이 검문을 피하기란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아니 그 보다 예외란 없다라고 말하는게 보다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도로와 접해있는 술집에 들어가 꽤 오랜 시간을 기다렸다. 검문을 당해야만 하는 사람들이 제법 줄을 잇고 있다고 판단되어 질때 도박을 해야 성공의 가능성은 높은 것이다. 운과 판단과 아주머니의 바구니와 치마자락은 어려운 상황을 무사히 넘기도록 배려를 해주었다.
  도심지에서 차츰 멀어져 갈수록 병사의 행진과 차량의 횟수도 줄어들었고 토박이라는 이점은 내게 최적의 골목길로 나를 안내했다. 무사히 도착했다. 가장 먼저 취해야 할 일은 고등학생마냥 머리를 짧게 깎는 일이었다. 이것은 또 다른 위험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나의 판단은 그 쪽을 택했다. 상황과 판단(감각)은 생존이다. 위급한 상황, 이에 대처하는 신속하고 정확한 판단과 실천으로의 연결은 운동의 향방과 생사의 문제에까지 영향을 준다.
  햇볕을 볼 수 없는 골방, 지극히 미세한 것에 대한 심리적인 불안감 패배의 아픔과 먼저 가신 열사, 동료분들에 대한 죄스러움과 부끄러움. 함께 뛰었던 동료들의 안부, 구석구석에 쌓인 분노로 이 개월을 보냈다. 가끔 친구들이 찾아와 시골이나 서울로 은신처를 옳길 것을 권했으나 가장 중요한 문제는 비록 골방에서 감금 상태에 있다고는 하나 자신이 취해야 할 태도에 대한 판단이었다.
  후에 이것은 여러 가지로 나의 판단이 옳았던 것으로 인식되었다. 권유와 설득에 의해 따라 나섰더라면 거의 붙잡혔을 것이 확실했다.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무사히 서울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가장 위험스러운 것처럼 느껴지면서도 가장 안전한 장소가 되어 줄 수 있는 곳인 서울은 묘한 도시였다. 전혀 생소한 사람에게도 거부감이 없이 쉽게 받아 주는 곳이 서울인 것이다. 열두 시간의 노동, 공장 밖으로의 외출이 자신의 위축감으로 인해 좌절된 상태, 사실과 거의 두절되고 왜곡과 오도에 매물되어 있는 노동자들과의 만남, 이런 것은 심신을 피로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어느 덧 서울 유배지의 생활도 사 개월이 흘렀다. 정국의 흐름과 동료들의 재판과정은 나를 다시 고향으로 유혹하고 있었다 81년 1월 사랑하는 도시에 다시 돌아왔다. 건강한 모습으로 그리고 그 후 5개월이 지났고 나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붓을 잡고 여러분들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1981년 6월)

    ● 광주는 아직 도 계속되고 있다· - 옥중 서신

  내가 이곳 병원으로 옮겨진 것은 80년 8월 28일 오전 10시경이다. 나는 27일 밤부터 '혈변 ' 을 20여 차례나 쏟았다. 그러나 철창 밖으로 감시하는 헌병은 "나도 그런 예가 있었으나 곧 나았다"라는 식으로 놀렸다. 28일 아침에는 가히 빈사 상태 속에서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환경이 좋고 대우가 좋다는 후송을 안가려고 몸부림 쳤다. 후송 가는 사람들은 죽기 직전이어야 하고 그 배경이 있어야 하고, 돈을 써야 한다는 것이 양성화 되었기 때문이며 내가 잘 아는 몇 사람도 배경으로 후송을 왔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최근에 안 사실이지만 수사관들에게 조사를 받다가 고문에 못이겨 몇 명은 시체로 나갔을 것이라는 설이 파다하게 퍼지고 있다. 아마도 내가 보기엔 과격한 학생 지도자들이 당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광주봉기에 대한 수사는 너무도 날조가 많기는 하나 광주 지역학생과 서울 김씨와의 금전거래설 문제로 수사는 벽에 부딪히고 있음이 최근 밝혀졌는데 재수사를 오다에 의해서 진행중에 (사실은 받은 사실이 전혀 없음) 매를 수없이 맞고 나서는 차에 실려 갔다는 것이다.
  나는 공소장을 민간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받았다. 그 공소장에는 내가 시인 못할 점이 너무도 많았다. 특히 '정치적 목적으로'와 광주에서 많은 사람이 죽고, "여학생 유방을 칼로 도려냈다"는 것과 "대동면 소재지 가면 차가 있으니 그 차를 타고 광주로 가라"는 (본인이 사는 함평군 대동면과 신광면 청년들에게) 내용은 검찰의 조작이었다. 그런데 원일인지 다른 사람에게는 재판 일정을 알려주면서 나에게만은 일정을 모른다는 것이었다. (법정서기 -중사의 답변)
  그렇다면 나는 왜 구속되었는가? 5월 22일경 청년들( 19 -22세,여럿)이 본인의 집에 와서 회장님 우리가 이 상황을 보고만 있을 수 있겠오? 라며 대책을 요구했다. 그래서 너희들은 동지를 더 규합하여 북동 성당이나 카톨릭센타에 가서 신부님의 지시를 받으라고 했으며 나도 내일 광주에서 만나자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광주에 가지 않고 함평지서의 유리창을 부수자 차량을 빼앗아 타고 총기를 들고 시위를 한 혐의로 체포됐었다. 그후 수사과정에서 나의 이름이 나오자 심문 끝에 하지도 않은 시위를 함께 선동했다는 이유로 6월 22일 함평경찰서로 넘겨져서 악랄한 수사과 형사에게 조사를 받았다. 저 얘들은 너무도 순진한데 당신 책임을 져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하고 반협박에 나는 좋다 시인할테니 저 얘들을 석방하겠다면 내가 총책임을 지겠다라고 약속하고 경찰 조사에 l00% 응하기로 했다. 이것이 나의 '내란 선동' 과 '계엄법 위반' 내용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9월 5일 아침식사를 마치고 나서 재판 받으러 나오라는 갑작스런 소리를 듣고 어리둥절했으나 어쩔 수 없이 나갔다. 통합병원에서 나와 김모 청년과 2명 뿐이었다. 나는 오늘은 우리 카톨릭농민회 회원 신부님들이 법정에 올 것으로 기대에 들떠 있었으나 그것은 정반대의 현상으로 다른 사람들은 가족들이 다 나왔는데 나는 직계 가족조차 보이지 않음을 보고 계획적이라는 것을 그때야 알았다. 나는 출정하면서 포승을 받기 위해 내가 있었던 영창으로 들어갔다. 앞에는 나와 같이 고생하던 형제들이 눈앞에 보이나 누구인지 분간할 수없었다.  그러나 그 어두캄캄한 속으로 손을 흔들어 보였다. 왜냐하면 영창 안에서는 내가 서 있는 쪽이 밝기 때문이었다. 거의가 나를 아는 사람들이라고 믿었다. 재판정은 새로 신축한 새 법정과 구 법정으로 나누어서 두 곳에서 재판을 했다. 나는 오후 재판이 시작되었는데 대령이 재판장이고, 중령이 심판장, 법무사 소령 등이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법무사가 재판장 노릇을 했고, 나머지는 거의 요식행위에 불과했다.  그리고 법무사는 내가 3년전부터 아는 학생운동을 했던 이화여대 여학생의 남편으로 약혼시절에 소개를 받고 고시공부한다고 했는데, 나는 '당신이 나를 재판할지 모르겠다' 했는데 3년후에 나는 그 사람 앞에서 재판을 받았다. 함은 우연의 일치라고만 봐야 할지‥‥‥ 재판과정은 순조롭게 진행됐으며 나의 사랑하는 동지들이 들어 올까 봐서 계속 뒤를 돌아봤으나 헛수고 였다. 그런데 내가 놀라워한 건 함평 경찰서에서 훈방됐던 나와 관련된 청년들이 재판진행중에 그들은 나에게 유리하게 진술했다. 예를 들면 "서경원의 선동에 의해서 했지 ?" 검사의 질문에 그들은 아니라고 했다. 그리고 그중 두 사람은 나는 서경원을 만나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최후 진술에서 그들은 "한번만 용서해 주신다면 국가에 봉사하겠다"라고 할 때마다 나는 괴로운 심정이었다.  물론 순진하니까 그러리라고 이해는 하지만 ‥‥‥‥ 나는 최후 진술에서 "나는 7명의 가장이며, 몇 백명의 회원 대표이며, 대광주 교구의산하 단체로써 국내외에서 신임받는 책임자이다. 공소장에는 함평 고구마 사건, 쌀생산비 조사를 통하여 반 정부 활동을 하는 자로써 ‥‥‥돼있는데, 작년도 우리가 조사한 자료를 보고 박대통령은 4% 올리라고 했다는데 그렇다면 박대통령도 반정부 활동을 했더라는 논리냐? 다음 고구마 사건은 합법적으로 하기 위해서 3년을 싸웠다. 그 근거로써 당시 도지사였던 고건씨가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광주 사태에 대하여 현 권력층에서는 반성하는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고 학생과 시민, 폭도들만 반성하고 재판을 받아야 하는가? 권력이 이렇게 난무할 때 이 나라 장래는 무엇이 되겠는가? 다음, 우리 농민은 피와 땀을 흘리면서 세금 낼 때마다 방위성금을 착실히 냈다. 그 돈으로 군복 만들고, 총 만들고, 칼 만들고, 철모 만들어 주니까, 그 총과 칼로 세금낸 사람을 찌르고 죽이다니, 우리는 외부의 적을 막고 지켜주라고 했는데‥‥‥ 같은 핏줄이요 단군의 자손이요 특별히 단일민족이다‥‥‥‥ 우리의 양민이 적으로 보였단 말인가?
  다음,보안대에서 모 수사관은 나더러 "너는 공산당 보다 더 악질이다. 오늘 내가 너 같은 걸 죽이고 말겠다:' 했는데 내가 알고 있기로는 유리는 공산당과 대치하고 있으며 제일의 적이라고 알고 있는데 우리에게 공산당보다 더 악질이라고 하는 말은 계엄 당국이 창조해낸 말인지 아니면 상부의 지시인지 알고 싶다. 그리고 권력만 가지고 아무렇게나 말해도 되고 우리 국민은 사실은 말해도 유언비어인가? 마지막으로 권력층은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갖기 바란다. 그리고 웃음을 가져올 수 있는(손을 잡고) 역사를 창조하자."
  재판부는 전원이 숙연했고 재판장은 본인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 듯하였다. 나는 이번에 4년 정도는 실형이 선고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리스도는 누구의 편인가?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 내가 함께 한다는 교훈은 무엇을 가르키고 있는가? 나는 현재 건강이 매우 안좋고 사회에서 있었던 병은 치료를 거부한다. 설령 옥사한다 해도 나는 웃으면서 죽으리라. 가족과 동지들과 사제님들은 주님께 맡깁니다. 라는 기도밖에 안나온다. 이름없는 분이 영치금을 넣었는데 서광주 정보과형사같다. 빛으로 평가되면 갚아주기 바라고 안감아 줘도 된다면 잘받았다고 선언하기 바란다. 가족과는 면회했다. 아무때고 오면 면회소에서 보면 창 너머로 대화할 수 있다. 서신을 통할 수 있는 요령은 우리를 담당한 소령 김 과장과 간호장교(지산동 천주길회 장 신부님 잘아시는) 조 대위를 통하여 위생병 김 하사를 통하면 되고 00가 아는 김 대위를 통하여 김 하사에게 주면 안전하다. 26일경에 선고 있을 것 같으며 형을 받으면 선을 형무소로 간다는 설이 있다. 00 편-문선생님께 또는 사무실로 여러 차례 쪽지를 보냈으나 아무 소식이 없다. 앞으로는 부탁은 삼가하려 하고 가족 편에 하겠다. 석방된다는 안이한 생각은 없고 그렇게 된다는 것도 만무하다. 왜냐하면 밖에서 보는 것과 안에서 견해는 다르다. 나는 선고 마치면 성동 구치소로 갈 가능성 이 짙다. (80.9.19)

  ● 들꽃처럼 살다간 무등의 큰별로 떠오른 아!  박용준 열사

  언젠가 한 번 시내에 있는 사무실에서 그와 가까이 지냈던, 지금은 거리에서 구두를 닦는 친구 한 분을 만났을 때, 그는 두꺼운 안경 너머로 가느다란 예각을 덧세우면서 말했다:'용준이만 살아 있어도 우리가 이렇게 살지는 않았을 것이오" 한 때 그와 함께 야학을 같이하고 운동가로서의 동지라 자처했다. 우리들이 박용준의 죽음에 대하여 느끼는 것과는 어딘지 모르게 다르다는 느낌이었다. 다분히 관념적인, 연사라는 이론의 외피에 둘러 씌워져, 헤어나고자 발버둥치는 그의 죽음마저도 막연히 흠모의 대상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에 비해, 언제나 삶의 현장에서 치열하게 부딪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의 '투쟁'이란 한갖 지식인의 지적 유희일 뿐, 날마다의 끼니와 잠자리에 허덕이는 민중으로서 그 친구가 바라보는 박용준에 대한 생각은, 그와 함께 생활상의 어려움을 토로하거나, 푼돈이라도 주고 받는 식의 경제적 부담간을 함께 해결해 나간다는 등의 필요에 의한, 팍팍한 세상살이를 함께 헤쳐 나가지 못하는 것아 대한 아쉬움이었다. 분명 다른 인식의 차이였다. 한 인간을 둘러싼 객관적 조건의 차이란, 그와 비례해서 동일한 대상을 보는데 대하여 까지 이렇듯 각별한 차이가 놓인 것이다.
  우리와 함께 80년 5월 투쟁의 선봉에 섰던 박용준!  그의 친구들이 지금껏 부끄럽게 살아남아, 그리워하는 박용준! 그의 생애는 어떠하길래 그와 같은 불사조의 강한 투쟁력을 발휘할 수 있었단 말인가?
  그의 신상에 관한 것이라고는 아직까지도 고아원에 남아있는 너저분한 기록카드와, 그가 학교에 다닐 때에 손수 자필로 적었던 것 외에는 다른 곳에서 찾아 보기 힘들다.  1953년 1월 9일에 났으며, 그의 부모나 출생지는 알 길이 없다. 광주시 동구 학동 소재 영신영아원에서 유아시절을 지냈곤 조금 자란 후에는 인근 학동에 있는 무등 고아원으로 옮겨져 살면서, 그곳에서 서석초등학교,  숭의중학교, 숭의 실업고등학교를 차례로 졸업했다. 여기까지가 그가 그나마 끼니에 걱정하지 않고 지낼 수 있었던 고아원·시절경력의 전부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원에서 나와서 살았는디, 여그저그 취직할라고 별짓거리를 다했지만 항상 고아출신이라 신원보증이 없어서 취직도 못하구 "
  그는 취직을 하여 나름대로 생활의 자립을 이루려 무척이나 애썼다한다. 그러나 어디든 취직을 할려면 직책상 신분상의 보증을 서 줄만한 사람을 구하지 못했기 때문에 반듯한 직장하나 구하지 못하고 지냈던 것 같다. 그러한 연고로 그는 이루 셀 수 없을 만큼 잡다한 일자리를 많이 거쳤지만, 어디에고 그가 흡족할만한 보상을 받고 정착할만한 직장을 구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게 그의 젊은 세월을 보내고 있었을 즈음 그를 지켜본 사람들은 그를 두고 "고아로 자랐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였다. 그때마다 외로움과 울분으로 가득차 있었으나 쉽사리 그의 그러한 심경을 밖으로 토로하지는 않았다. 그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명석하고, 글재주가 뛰어나는 등 여러가지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는 평을 들었다. 비교적 활발하며, 남들과 어울려 지내려 무척이나 힘썼으며, 어떤일에고 한번 뛰어들기만 하면 끝장을 내고야 마는 강한 의지의 소유자였다. 그시절 자기가 처한, 말할 수 없이 처참한 빈곤에 비해 호화스런 집들과 사치와 향락에 문드러진 사람들을 보면 심한 경멸의 감정을 퍼부었다고 한다. 그의 그러한 성격때문에 길을 지나가다 부잣집이 보이면 그 곳에 돌을 던져, 파출소 신세를 진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런 반면, 외롭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하여는 자기의 모든 것을 줄 수 있을 정도로'애정이 풍부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그가 그처럼 암울한 시기의 일상성을 깨뜨리고, 참된 인간적행위들로 가득찬 세계에 대한, 그리고 그것이 가능하다는 주체적인 확신과 확고한 신념을 갖게 되었던 것은 광천동 슬럼지역에서의 빈민운동을 주도하던 김영철 형님을 만나면서부터였다. 79년 그는 오랜 괴벽, 떠돌이 직장생활을 청산할 것을 마음먹고 아는 사람의 주선으로 YWCA 신협 직원으로 취직하였다. 그곳에서 이전부터 근무했던 김영철 형님을 만나게 되는데, 그는 그분과 같이 숙식을 같이 하면서 밤을 세워 인간과 사회, 세계에 대한 대화를 계속하였다. 그후 곧이어 둘은 힘을 합하여 인근 광천등에 삼화신협을 개설하게 되는데, 그곳 현지 주민들과 대화 및 집회를 통하여 중단없는 주민운동을 전개하였다.  낮에는 YWCA 신협에 근무하고 주로 밤시간을 이용하여 주민들과의 만남을 계속해내면서 광천등 삼화신협의 기틀을 잡아가는데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처럼 바쁜 일과로 인해 개인적인 생활을 거의 갖지 못하였고, 오직 그의 모든 정력을 빈민운동에 투여하는 것으로 즐거움을 대신하였다.
  그가 싸움에 대한 확고한 세계관을 갖게 된 것은 이 때 여러 사람들과 나누었던 이야기와, 그의 생활을 과감하게 실천의 장에 투여하는 과정에서 비롯 되어진 것으로 이후 그는 끝없는 투쟁에의 결연한 의지를 불태우며, 굽힐 줄 모르고 만나는 사람마다 온통 억압을 깨뜨리는 대응양식을 역설하였다.
  그러던 중, 80년의 봄은 다가왔다. 시각을 다투어 변해만 자는 사회적 정세는 그대로 그가 행동하고 해결해야만 하는 과제들로 받아들여졌고, 그럼으로 직장으로 다니던 신협과 영철형과 그가 참여했던 들불야학 강학들과의 사이를 오가는 쉴틈없이 분주한 날들은 그의 짧은 생애를 통틀어 가장 활기찬 기쁨이었다. 아아 그러나 그러나, 역사의 진보라는 이름을 갖는 모든 통속적인 행위는 반드시 거치지 않으면 안될, 필연의 장벽을 격파해야만 하는가?
  5월 18일, 전날의 비상계엄 확대 공포와 이에 맞선 전남대 정문 앞으로부터 시작되는 치열한 전투, 그는 한군데도 빠지지않고,어디든 어깨를 부딪치는 대열이 있으면 달려와 함께 하였다. 20일 계엄군이 YWCA 신협 사무실에 들어와 그를 체포해 가려했으나 동료 직원들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실패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 많은 격정의 날들을 투쟁 대열에 함께 하였다. 어스름 깊은 밤 시간을 틈타서는 함께 했던 들불야학 학생들, 강학들과 '투사회보' 를 밀어서 배포하는데 혼신의 정열을 다 쏟았다.
  계엄군이 도시를 철수하고 시민군이 도청을 장악하여 시민들의 바램에 값하는 새로운 민중정부를 수립하는 과정에 있어서도 줄곧 그는 투사회보의 제작과 배포, 그리고 싸움에의 치밀한 토론들로 지냈다. 후에 YWCA 2층 구석에서 찾아낸 그의 일기 중의 ' 5월 21일 밤' 은"간간이 들리는 총소리는 밤의 정적을 깨고 있다. 악몽의 몇일, 모든게 그립다. 파란 잔디의 캠퍼스, 즐겁던 학우들, 또 총소리, 불안? 불안은 차라리 덜하다. 걱정, 그렇게 표현하는게 더 좋을 것 같구나. 오늘 오후 그들은 드디어 우리를 향해 총격을 가했다. 쓰러지는 몇몇 우리의 학우와 시민들, 품에 번지는 피! 모든걸 확인했다. 죽음! 파란 캠퍼스의 잔디 위에 내려 쪼이는 따스한 햇볕, 우리들의 피를 원한다면 이 조그마한 한 몸의 희생으로 자유(악몽의 몇일, 이런게 지옥이란걸 느낀다.)라는 댓가를 얻을 수 있다면 희생하겠다. 헬기소리, 또 총소리 싸우다 쓰러져간 학우 그리고 광주시민, 나도 부끄럽지 않게 일어서리라." 이라고 적혀 있다. 그리고 그 피의 나날 위에 적은 일기 ' 5월 25잎 비 '는 "조용한 밖, 흐느끼는 듯한 비가 내린다. 모든 걸 씻어버리듯이 조용히, 라디오에선 최대통령의 힘없는 목소.리가 들 린다. 신이여! 무엇이 오니까? 무엇 때문이 오니까? "라고 씌여 있다. 참혹한, 참혹한 죽음의 분노 위에 일어선 YWCA 시민들은 모여 '범시민 궐기대회 ' 를 하고 총을 든 시민군들은 시내를 순찰하고, 도시의 외곽을 방어하던 때, 그는 들불야학 동기생, 강학들과 대자보 · 가두방송 ·선전조를 자원한 시민들과 밤을 세워 등사기를 밀거나 문구를 초안하면서, 의연한 죽음에의 투철한 의지를 굳히고 있었던 것이다.
  26일을 기해 시 외곽에 배치 중이던 계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