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고 있는 키워드를 검색해보세요.

DRAG
CLICK
VIEW

아카이브

온라인 자료실

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취재기자 좌담 / 191명이냐, 2천명이냐. 서청원 외(월간조선, 1985. 7)

본문

취재기자 좌담


191명이냐, 2천명이냐.



서청원(11대 국회의원, 전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
이영배(조선일보 사진부 차장대우)
오효진(조선일보 월간조선부 차장대우)
조갑제(조선일보 월간조선부 차장대우)
조남준(조선일보 월간조선부 기자)



『우리에게도 운명적인 사건』

  -금기로 여겨졌던 광주사태에 대한 논의가 활발합니다. 지난번 임시국회에서는 국방장관의 발표도 있었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진상은 아직 분명히 드러나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광주사태를 어떻게 풀 것인가 하는 얘기도 차츰 진지하게 거론되고 있지요.
이런 뜻에서, 가장 객관적인 눈으로 광주사태를 현지 취재했던 5년전의 특파기자들의 좌담을 마련했읍니다.
  -생각하면 광주사태는 우리에게 운명적인 사건이었읍니다. 회사의 명령을 받고 취재에 참가했던 우리 가운데 몇몇은 그후 그 회사를 떠나야 했읍니다. 또 우리는 진실을 봤으면서도 광주얘기만 나오면 [꿀먹은 벙어리]가 돼야 했읍니다. 그런가 하면 [말해도 좋을 믿을 만한 자리]에서 진상을 말해도, 한쪽 편 사람은 [사꾸라 발언]이라고 생각했고 또 다른 편에 있는 사람은 [유언비어]나 [반체제 발언]이라고 생각했읍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어느쪽으로부터도 신임이나 환영을 받지 못했읍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다 말해도 됩니까?(웃음)
-모두 털어놓읍시다. 양심과 소신을 가지고.... 그동안 국회에 진출했던 서청원 의원부터 말문을 열어주시죠.
-5월19일 오후였읍니다. 당시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였던 저는 검찰출입을 하고 있었읍니다. 회사에서 급히 들어오라는 연락을 받고 가보니 김대중사회부장이 [광주 조짐이 이상하다]며 급히 가라는 거였읍니다.  사진부 이영배기자와 부랴부랴 고속터미널로 갔읍니다. 그 때가 오후 4시쯤이었는데 버스가 못들어간다더군요. 할 수 없다 싶어 전주로 들어가서 1박을 한 뒤 이튿날 오전 9시 20분에 광주로 진입했읍니다.
그러나 이미 광주 시외버스터미널이 봉쇄되어 들어갈 수 없었어요. 하차한 지점이 톨게이트 부근이었읍니다. 다시 시내 버스로 광주시가지에 들어갔읍니다. 19일부터 진압군이 들어온 27일까지 현장을 지켜볼 수 있었읍니다.
-저는 21일 출장을 떠났읍니다. 회사차로 장성 부근까지 갔는데 분위기가 살벌하더군요. 무장시위대가 장성까지 나와 있었어요. 택시를 빼앗긴 운전기사가 엉엉 우는 모습을 보았읍니다. 생각 끝에 회사차를 전주로 돌려보내고 걸어서 극락강을 건넜어요. 아세아자동차 부근에서 데모대의 차를 얻어타고 도청앞까지 들어갔읍니다. 그때 광주시내의 상황은 전쟁터를 방불케했어요. 가드레일이 무너지고 버스정류장표지가 부서졌고, 유리가 깨어져서 전쟁상태를 연상케 했습니다.


경상도 기자도 안전했다

-저는 국방부에서 주선한 기자팀에 합류해서 들어갔읍니다. 5월23일이었읍니다. 당시 조연흥사회부차장의 전화가 왔어요. {국방부에서 광주 현장에 들어가니까 빨리 들어오라}는 내용이었읍니다. 현장을 보고 싶은 욕심이 있었던 게 사실이었읍니다.
성남에서 비행기로 송정리까지 들어갔읍니다. 그러니까 거기까지는 다른 기자들보다 편하게 간 셈이지요. 송정리 비행장에는 이미 장갑차 2대가 와 있었읍니다. 우리 일행을 실은 버스는 장갑차의 호위를 받으며 상무대로 갔어요. 간단한 보고를 들었읍니다. 그날밤은 부대내의 BOQ에서 잤읍니다. 낮에 브리핑받은 내용이 너무 엄청나서 온전히 잠들 수가 없더군요. 숙소도 안전한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튿날인 24일 소위 [판문점]으로 알려진 화정동 국군통합병원엘 갔읍니다. 그곳에서 부상자와 사망자들의 시신도 봤읍니다. 상무대쪽으로 돌아오기 직전 사진부 이영배기자가 통합병원으로 나를 찾아왔더군요. [사진을 찍었으나 필름을 송고할 방법이 없으니 서울까지 전달해 달라]는 것이었읍니다. 혼자 곰곰 생각해보니 이대로 돌아갈 수 없다고 느껴졌읍니다. 먼저 광주에 들어간 선배기자들이 [판문점]까지만 왔다 돌아갔다면 어떻게 생각하겠읍니까. 그래서 광주로 가기로 결심했읍니다. 필름은 합동통신기자에게 맡기고 군인들이 쳐놓은 철조망을 넘고 [시민군]쪽도 무사히 통과, 결국 광주시내로 들어간 게 24일 오전이었읍니다.
-저는 그때 부산의 국제신보사 사회부에서 경찰출입기자로 있었읍니다. 광주사태가 일어나고 21일 부산의 일부 기자들이 남해고속도로로 광주로 진입하려다 저지당했읍니다. {경상도차가 들어가면 다 부숴지고 만다}는 이야기 때문이었어요. 사태가 이쯤 되자 저는 더욱 들어가고 싶은 호기심이 났어요. 당시 전국적으로 송고거부운동이 일어나 별로 할 일도 없던 차에 잘됐다 싶어 혼자 광주로 가기로 했읍니다. 그 때가 22일이었읍니다. 부산에서 여수행 고속버스를 타고 여수까지 간 뒤 택시를 대절, 광주외곽까지 들어갔읍니다. 밤 8시가 다 되었읍니다. 광주로 들어가는 소로를 군인들이 막고 있었읍니다.
시골 마을에서 하룻밤을 지낸 뒤 23일 아침에 그 길로 들어갔읍니다. 군인들이 통제를 하긴 했으나 오가는 사람들이 많아 그냥 들어갈 수 있었읍니다. 주로 나오는 사람들이었는데 피난민 대열 같았읍니다. 교도소 밑을 지나 광주시내까지 걸어갔읍니다. 시내 상황은 우려했던 것만큼 어수선하지 않았읍니다. 제 경우 {경상도 사람은 맞아 죽는다}는 말을 듣고 있었기 때문에 22~23일 이틀동안 입을 열지도 못했읍니다. 하루 정도 도청주위를 오가며 분위기를 보니 말을 해도 괜찮을 것 같았어요. 그 다음날부터는 마음대로 취재도 할 수 있었읍니다. 그러나 아무런 위해를 당하지 않았어요. 지역감정은 광주사태의 요인으로는 거의 무시해도 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경상도 사람으로서 특히 고마왔던 것은 학생.시민들이 서로 {지역감정을 노출시키지 않도록 조심하자}고 다짐을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양쪽에서 경원당한 기자들

-뭐니뭐니 해도 당시 가장 어려운 일은 취재와 송고였다고 생각됩니다. 제일 먼저 들어간 서의원은 어떻게 일을 했나요?
-20일만 해도 취재와 송고엔 어려움이 없었읍니다. 시내외 전화 통화가 모두 가능했읍니다. 그러던 것이 21일 새벽 2시쯤부터 전화선이 끊어져 송고할 길이 없었읍니다. 그래서 기지를 발휘할 수밖에 도리가 없었읍니다. 도경국장집을 찾아갔죠.
비상시에도 통하는 경비전화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요. 가정부를 구슬러 경비전화를 통해 서울시경 기자실로 송고했읍니다.  철도역의 철도전화도 이용했고 도청의 행정전화도 사용했읍니다.
-도청 전화가 자주 끊어지지 않았읍니까?
-맞습니다. 끊어졌다 이어졌다 몇번 반복된 걸로 기억됩니다. 송신 수단이 극도로 제한된 상황에서 각 언론사가 벌인 취재경쟁은 대단했읍니다. 서로 마감시간에 맞춰야 했으니 어땠겠읍니까. 신문기자가 이런 거로구나 하고 느낄 수 있었읍니다. 그나마 저는 나은 편이었고 사진부 이형은 고생이 말도 못했지요.
-취재하는 데 어려움이라면 어느쪽으로부터도 [보호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읍니다. 계엄군은 계엄군대로 시민은 시민대로 기자를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읍니다. 제가 당시 MBC소속이었기에 기사보다는 [그림]이 중요했읍니다. 기사야 철도전화로 교통부 기자실을 통해 송고할 수 있었읍니다. 광주역에 갔더니 곳곳에 핏자국이 있었고 유리창이 산산이 깨어져 있었읍니다. 아무도 없는 역장실에 가서 철도전화의 다이얼을 돌리니 서울이 나오더군요. 그러나 사진은 그렇지 못했읍니다. 처음엔 송고는 커녕 사진을 찍을 엄두도 못 냈으니까요. 동행한 카메라맨도 취재를 할 수 없었읍니다. 무장시위대가 외신기자들의 촬영은 허용하면서 내신기자들은 심하게 통제했어요. 신문사진과 달리 TV는 카메라가 컸기 때문에 감추고 다닐 수도 없었지요.


그래서 시위대가 점거한 도청을 찾아가 신분을 밝히고 촬영에 협조해 줄 것을 간청하게 됐읍니다. 처음엔 막무가내로 [사꾸라]라느니 [일본 스파이]라고 몰아 붙였지만 설득을 했더니 의외로 허가를 해주더군요. [역사의 기록은 남겨야 한다]는 우리의 말에 순순히 응해주었읍니다. 취재 편의를 봐 준다며 지프에 [호위병]까지 붙여주었읍니다. 그런데 시위대 내부의 지휘계통이 서 있지 않아 다른 시위대에게 카메라기자가 붙잡혀서 갖은 협박과 수모를 당하기도 했읍니다. 물론 카메라와 필름은 모두 빼앗기고 말았읍니다. 저녁때 돌아와서 어찌나 시달렸든지 엉엉 울더군요.
카메라 없는 방송기자는 총없는 군인과 마찬가지입니다. 도청에 들어가 간신히 16mm 카메라 한 대를 얻는 데 성공했지요. 카메라맨이 부지런히 그림을 만들었고 운반은 제가 맡았어요. 담양을 거쳐 전주로 가서 서울로 보냈읍니다. 두어 차례 왕복한 기억이 납니다.

기사 송고 중에 『손들어!』

-광주사태취재에서 가장 어려움을 겪은 사람들은 사진기자들이 아니었던가 생각됩니다. 제가 처음 광주에 들어간 때가 20일 오전 8시40분이었읍니다. 가톨릭 센터 유리창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고, 저희 지사에 들어가보니 지사 유리창도 군데군데 깨져 있어 사태의 심각성이 피부로 느껴지더군요. 지사에서 광주의 분위기를 들었읍니다. 한마디로 살벌하더군요. 각 언론사마다 불신을 받고 있는 기색이 역력했읍니다. 거리엔 학생과 시민들이 극도로 흥분돼 있어 사진기를 들이댈 수 없었읍니다.
카메라를 들고 거리에 나가면 학생.시민들이 붙잡고 신문을 하는 거였읍니다. 기관원 정도로 생각하는지, 또는 서로 통하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여간 괴롭히는게 아니었읍니다. 결국 궁리 끝에 가방을 하나 사서 카메라를 넣고 다니면서 틈틈이 찍었읍니다.
-실제 생명의 위협을 받은 적도 있었읍니다. 23일, 이미 모든 전화선이 거의 끊어져 송고할 방법이 없을 때였읍니다. 조선일보 취재팀이 최후의 수단으로 전남도경을 찾아가 [출입금지] 팻말이 붙여있는 국장실로 슬쩍 들어갔읍니다. 다행스럽게 경비전화가 살아 있어 서울시경 기자실과 연락이 닿았읍니다. 취재 내용을 송고하는 도중에 [쾅] 소리와 함께 20세쯤 돼 보이는 청년 둘이 문을 박차고 들이 닥쳤읍니다. 다짜고짜 [손들어! 너희들 뭐야!] 하면서 총알을 장진했읍니다. 취재팀은 신분을 밝혔읍니다만 그들은 다 필요없다는 듯이 쏴 죽이려 하더군요. 가시가 들어와박히듯 가슴이 뜨끔거렸읍니다. 그 때 광주지사에 근무하던 조광흠 기자가 그들을 향해 [나도 광주시민이요. 조선일보 광주 지사에 근무하는 기자입니다]라고 광주사투리로 말하자, 그제서야 총부리가 땅으로 내려지더군요. 그러더니 [당장 나가라]며 내몰았읍니다.
그때 서울과 통화하던 수화기를 내가 그만 떨어뜨리고 말았읍니다. 서울 시경에서 경비전화를 받고 있던 임백 기자가 {손들어!}하는 소리를 듣고 {이거 큰일났구나!} 하고 생각했다는 겁니다. 나중에 조선일보 기자들이 다 죽었다는 소문이 났던 건 이 때문이었읍니다.
-당시 통신사텔렉스가 살아 있었지요?
-동양과 합동통신이었어요.
-텔렉스한번 치려고 여러 번 굽신거렸던 기억이 납니다. 20일 밤에 MBC가 불탔읍니다. 불탄 뒤에 방송국을 찾기가 두려웠던 게 사실입니다. MBC기자라고 신분을 밝히면 무슨 화를 당할지 모를 상황이었어요. 가까스로 기술책임자와 방송국에 들어가 회선을 점검했어요. 서울에 방송 프로그램이 내려오는 회선에 라디오 스피커를 대보니 라인이 살아있었어요. 그걸 확인하고 본사와 철도전화로 약속을 했읍니다. 로컬방송 시간대에 육성으로 송고하기로 말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턴 어렵잖게 송고를 할 수 있었읍니다.
-찍은 사진필름을 서울로 올려 보낸 것이 24일이었읍니다. 국방부 기자단이 상무대로 온다는 연락을 받고 부리나케 나갔지요. 중간중간에 시민군의 검문을 수없이 받고 무장시위대와 계엄군이 대치한 경계선을 넘은 셈입니다.

20일 밤 시위가 가장 격렬

-당시 그 라인 중간의 가시덤불 부근을 [판문점]이라고 했지요?
-맞습니다. 필름을 다른 회사 기자에게 넘겨주고 조남준 기자와 다시 시민군쪽 경계선을 넘었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1시간도 채 안됐는데 시민군의 분위기가 확 달라진 겁니다. 수류탄을 막 까서 던지려고 자세를 취하며 윽박지르는 것이었어요.
-저도 그자리에서 당황했지요. 기자라는 신분도 못 밝히고 그저 묵묵히 추이를 살폈읍니다. 공연히 내가 끼여들면 그들의 기세를 누그려뜨리기보다는 무슨 화를 입을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읍니다.
-학생.시민군들의 당시 생각으로는 데모 장면을 촬영한 사진이 나중에 주동자를 찾는 데 쓰여질 거라는 생각을 했던 것같습니다.
-결국 저희 둘은 그들을 설득해서 시민군의 차편으로 지사까지 돌아올 수 있었읍니다.
-저도 필름을 전주까지 두번 수송했읍니다. 저는 처음부터 자전거를 이용했읍니다. 피난민 대열에 섞여 자전거를 시외곽까지 나가는 겁니다. 인근마을에 자전거를 맡겼읍니다. 그런데 그 일대에 오토바이들이 길에 늘어서 있었읍니다. 왜 그런가 궁금했는데 알고 보니 이들이 소로길을 달려 택시 있는 곳까지 태워다 주고 돈을 받았지요. 또 거길가면 택시가 기다리고 있었읍니다.
그 난리 속에서도 돈을 벌려는 상혼은 번득이고 있었읍니다. 그길로 몇 번 다녀보니 안전한데다 아주 편하더군요. 해방뒤 38선을 넘은 월남민 생각이 났어요.
-저희는 차로 부산을 오갔읍니다. 제가 먼저 광주에 들어온 뒤 곧바로 본사에서 차로 기자 세명이 왔읍니다. 차는 광주근교에 맡겨놓고 기사를 받으면 곧바로 부산까지 전달하는 식이었읍니다. 한번은 그 차가 사천근방 검문소에서 군부대에 기사를 압수(?) 당했는데 알고 보니 그걸 복사해서 정확한 정보를 보고, 칭찬을 받았다는 겁니다.


-지금까지는 어려움이나 공포분위기를 말했읍니다. 광주사태의 상황가운데 특징적인걸 시간별로 서로 정리해 보도록 하지요. 자세한 상황은 다른 기사에 다뤄질 테니까요.
-가장 데모가 피크에 달했을 때가 언제냐 하면 20일까지입니다. 밤을 꼬박 새우면서 철야 데모를 했읍니다. 20일 밤 무등경기장에 모인 수백여대의 택시가 헤드라이트를 켜고 도청 앞으로 행진하면서 데모는 거의 절정에 이르렀어요. 밤새 데모를 하는데 고등학교 여학생들이 구급낭을 들고 나와 부상자 치료를 하는 모습도 보였읍니다. 제가 받은 느낌은 18,19양일간의 지나친 데모진압으로 광주시민들이 진압군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했다고 볼 수 있었읍니다. 분기탱천해있었으니까요. 예를 들면 아무리 최루탄을 많이 쏴도 시민들이 한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기자들은 눈도 제대로 못 들 지경이었읍니다.
-그때 데모대가 몽둥이나 쇠파이프를 사용했읍니까?

18일에 첫 발포, 고교생 다쳐

-20일까지는 돌멩이 외에는 별반 다른 무기가 없었읍니다. 그렇지만 피해상황은 엄청났읍니다. 차량이 부서진 게 수십 대가 넘었으니까요. 불에 타고...전쟁후의 폐허를 방불케했어요.
-조선일보 사회부의 당시 일지를 보니까 진압군 쪽의 동향에 대한 기록이 나옵니다. {왜 이렇게 우리가 다쳐야 하는가. 군의 사기가 떨어지고 있다. 무장한 군중이 사방에서 몰려드는데 무작정 당할 수는 없다. 탄환을 달라}는 여론이 계엄군 쪽에서 나왔다는 겁니다. 계엄군쪽의 상황도 상당히 다급했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대형버스와 트럭을 앞세운 데모대가 20일 오후 7시 광주 관광호텔, 노동청 앞까지 진출하면서 격렬한 시위를 벌였읍니다. 광주관광호텔은 전남도청에서 불과 4백m  거리입니다. 최초 발포가 20일밤 10시50분에 시작됐읍니다.
-그때는 조준사격은 아니었지요.
-공포였지요.
-중요한 것은 첫 발포가 언제였느냐 하는 것입니다. 광주사태를 놓고 따질때 가장 중요한 대목이 이 부분입니다. 누가 발포명령을 내렸으며 어떤 상황에서 발포를 했는가 하는 사항입니다.
-18일엔 어떤 상황 아래서 발포했던가요?
-18일 오후 4시 조대부고 3학년인 김영창군이 하학길에서 총탄을 맞았읍니다. 손목과 옆구리 관통상이었읍니다. 제가 직접 그당시 장갑차에 있던 지휘관은 식별할 수 없었지만 첫 발포는 이 때였읍니다.
-일반적인 발포는 아니고 특수한 경우라고 볼 수 있겠군요.
-어쨌든 첫 발포는 18일 오후 4시였고, 두번째는 20일 오후 10시50분이었는데, 이 때는 공포를 쏘았던 것입니다. 조준사격이 시작된 것은 21일 낮 1시쯤이었읍니다.
사실 아닌 유언비어도 많아
-데모진압을 너무 강하게 했다는 인식은 광주사태 기간 도처에서 발견되었읍니다. 시민들이 18, 19일의 상황을 눈물을 흘리며 증언했읍니다.
-운전사들도 몹시 흥분해 있었어요. 그들이 흥분한 것을 이런 각도에서 볼 수 있읍니다. 택시를 타고 가던 젊은이들을 계엄군이 무조선 끌어내 검문하고 쥐어박았다는 겁입니다. 운전사가 내려 항의하면 한패거리라며 무차별 폭행을 했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연 화가 날 수밖에요.
-시민들이 또 화가 난 것은 데모하다 붙들린 사람들에게 길바닥에 원산폭격등 과격한 방법을 쓴 것에 자극받았기 때문입니다. 백주에 벌어진 이런 과잉진압에 시민들이 분노한 것입니다. 그밖에 역사적인 문제로 지역차별의식은 나중에 나온 이야기지요.
-그런 분노가 쌓여 데모가 격렬해졌읍니다. 20일밤 계엄군이 공포를 쏘며 데모를 저지했지만 시민들은 별반 두려워하지 않았던게 사실입니다.
-진압군들이 대검을 쓴 것은 어떻습니까. 대검에 관련된 갖가지 유언비어가 많지 않았읍니까.
-임산부를 찔러 죽인 뒤 태아를 끄집어 냈다는 유언비어도 있었지요. 이 소문의 근거를 찾아봤어요. 그랬더니 데모를 구경하던 한 부인이 놀란 탓에 유산을 한 것이 와전됐다는 겁니다. 어쨌든 유언비어는 사실로 확인되지 않았읍니다.
-그 사건에 대해 이런 사실도 있었읍니다. 전남 고등학교 교사인 남편을 마중나간 부인 최미애씨가 유탄에 맞아 사망했으며 실제로 그 부인이 임신 8개월째였읍니다. 기자도 그 부인이 총상으로 사망한 걸 확인했읍니다.
-여자 유방을 도려냈다는 얘기는 어떻게 시작됐읍니까?
-아마 군인들이 젊은 여자들을 난폭하게 다루었다는 데서 발단되었으리라 봅니다. 실제로 유방을 도려내는 장면이나 그 시체를 목격했다는 사람도 만나지 못했으며, 그런 시체도 확인하지 못했읍니다.
-그 부분에 대해선 제게 이런 증언이 있읍니다. 26일 새벽에 계엄군이 광주시로 다시 들어왔을때 광주사태 수습위원중의 한 사람인 조철현 신부등이 계엄군부사령관과의 면담에서 밝혀진 사실은 이렇습니다. {왜 들어왔느냐}란 이야기로부터 시작된 이들의 대화중 한 사람이 {왜 유방을 도려냈느냐}고 물었다는 겁니다. 부사령관이 한 대답은 {나도 그 얘기를 들었다}면서 도려낼 때 쓴 흉기가 대검이 아니라 면도칼이었을텐데 {우리가 무슨 면도칼이 있겠느냐, 불순분자의 소행이다}라고 하는 얘기를 신부들이 들었다는 겁니다. 이 경우도 간접 증언이기 때문에 신빙성에 문제가 있읍니다. 현단계에서 확실한 것은 유방이 도려진 여자의 신원이 제시되지 않고 있으므로 믿기 힘든 얘기란 겁니다.
-글쎄요. 제가 19일 광주에 들어가자마자, 택시운전사들이 그런 얘기를 했어요. {여자 유방을 도려냈다}느니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사람 씨를 말리러 왔다}는 얘기가 거침없이 퍼지더군요.
-어쨌든 저희 취재팀도 이 소문을 확인하느라 분주히 뛰었읍니다. 6명의 취재진이 분담해서 각 병원을 찾았지만 확인할 수 없었읍니다.
-광주 금남로변에 있는 모병원 원장이 얻어 맞았다는 얘기인데요. 젊은 여인들의 상의가 찢어진 것을 본 원장이 자기 부인옷을 간호원을 시켜 전달하려다 계엄군에게 발각돼서 매를 맞았다는 겁니다. 여자에게까지도 가혹행위를 했다는 사실이 그같은 유언비어를 유발시키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경상도 군인]은 낭설

-임산부 이야기는 그렇다 치고 지역 감정을 유발시켰다든가 군인들이 술을 마셨다, 밥을 굶은 군인들을 앞세워 데모를 진압시켰다는 얘기들은 어떻게 보십니까?
-최근에 전경대원 한 사람과 전 공수부대출신 제대군인 한 사람을 만났읍니다. 전경은 광주사태 당시 도청안에서 공수부대 군인들과 함께 진압작전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들 말을 종합해보면  술을 마셨다든가 경상도 군인만으로 편성된 부대라는 것은 낭설이라 생각됩니다. 그때 투입된 군인중 전라도 출신이 많이 있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밥을 굶었다는 것은 일부 지역에서는 사실로 확인되었읍니다. 여단본부였던 한 대학에서 부식차가 밖으로 나가다 데모대에 공격을 받아 식사공급이 안되었답니다. 그래서 이틀동안 비상식량으로 허기를 때워야 했다더군요.
-시민들은 {너희들 때문에 우리가 열흘이나 밥을 못먹었다}는 식으로 계엄군의 넋두리를 데모 현장에서 많이 들었다는데 위의 이야기가 다소 과장돼서 전파된 것으로 보입니다.
-유언비어가 난무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중 가장 중요한 것은 언론부재상황이었다는 점을 들 수 있읍니다. 광주 일원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통제되자 [유비 통신]이 위력을 발휘한 셈입니다. 유언비어를 확인하러 직접 현장에 가보면 소문은 와전된 낭설이곤 했읍니다. 하옇든 떠도는 얘기는 항상 크게 불어난 것이었지요. 그만큼 언론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걸 실감있게 일깨워 준게 광주사태가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결국 언론통제로 손해를 본건 누구였읍니까? 이제와서는 유언비어를 유언비어라고 해도 믿지 않는 사람이 많아요. [늑대와 소년]의 상황이 돼버린 느낌입니다.
-다음엔 계엄군의 진압방법을 한번 살펴보도록 하죠.
-요번에 광주에서 만난 전 중진언론인의 느낌은 이렇더군요. 사태가 심하게 악화되기 전인 18일 오전 10시에 미국 CBS, NBC, [타임]지 등 외신기자들이 광주에 왔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과 함께 공수부대가 와 있는 금남로 근방을 가보니, 어쩐지 보통 군인들과 다른 모습이었다고 기억하더군요. 상의를 밖으로 내놓고 모자도 제멋대로 쓰고 있어서, 보통 부대가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읍니다. 물론 그 날은 별 상황이 없었을 때였읍니다.
-공수부대가 진압을 거칠게 했다는 것은 이런 관점에서도 파악할 수 있겠읍니다. 공수부대는 데모진압 장비가 없었읍니다. 방패도 없어 날아오는 돌을 피할 방법이 없었다는 얘기입니다. 목격자의 말을 들으면 철모밑에 얼굴을 가린 철망이 각자 손으로 만든 엉성한 것이었다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 악이 바친 게 아닐까요. 단지 계엄군이 할 수 있는 진압방법이라면 근접해서 개머리판으로 때리든가 대처할 수밖에 없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나중에 국방장관이나 계엄사령관이 기자들과 만나 회견하는 중 이런 얘기도 하더군요. 계엄군더러 데모대를 진압하는데 병아리 만지듯 어루만지라고 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고 말입니다.
-계엄군이 인도로 뛰어들어 젊은이들을 때리는 모습을 본 사람 얘기는 이렇습니다. 붙잡힌 젊은이들 가운데는 대학생들은 많지 않았고 이발사.음식점 종업원등 단순 근로자들이 많았다는 거였죠. 데모 군중에게 공포를 주어 해산시키기 위한 진압방법이 빗나가 사태를 점점 악화시켰다고 봅니다.
-부산 사태 때도 공수단이 강경진압책으로 대응, 성공을 했읍니다. 저는 부산사태의 현장에도 있었읍니다만 광주사태처럼 그 진압의 정도가 과격하지도, 광범하지도 않았읍니다.
-사망자가 많이 생기게 된 발포 당시의 얘기를 정리해 보죠.

황망했던 군경 철수

-20일, 21일 데모가 거셌읍니다. 20일밤 9시40분 MBC가 불타고 21일 새벽 5시30분쯤부터 KBS가 불탔읍니다. 20일 자정부터 새벽가지 큰 데모가 있었읍니다.
20일 오후 9시 노동청 근방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읍니다. 그때 제가 마침 현장에 있었읍니다. 그곳에서 경찰만 4명이 죽는 걸 보았읍니다. 데모대가 버스에 불을 질러 시위진압 경찰관 앞으로 밀어붙였어요. 그때가 데모의 절정이었읍니다. 부상자들을 실은 앰블런스가 데모대를 빠져 나올 수도 없을 정도였읍니다.
-그때 앰블런스가 분수대 주위만 뱅뱅 돌았다는 것 아닙니까.
-시민들이 죽은 현장도 많이  보았지만 부상한 경찰들이 앰블런스 안에서 시간만 지체하는 모습은 보기에 참 안타깝더군요. 동료들이 안타까운지 눈물을 흘리는 모습도 보였읍니다.
-그장면은 제가 부연 설명 하겠읍니다. 그 때 현장에 있던 전경대원 얘기로는 돌진하는 차를 보고 도열해 있던 전경들은 {도망가자}면서 흩어졌다는 겁니다. 담벼락에 붙어 변을 당한 경찰관들은 휴식을 취하던 사람들로 미처 차를 못 보았다는 겁니다. 뒤늦게 눈치채고 담에 바짝 붙었지만 버스에 부딪쳤다는 얘깁니다. 그 차안에 운전사가 2명 있었는데 담을 넘어 도망쳤읍니다.
-결국 나중에 그 두 사람이 검거됐지요. 그들 말로는 {시민들이 강제로 가라고 해서 간 것이지 경찰을 죽일 의도는 없었다}고 했읍니다. 차를 세우려 했는데 최루가스에 눈을 뜰 수가 없어 방향감각을 잃었다고 증언했읍니다.
-두 사람은 실형을 받고 복역하다가 모두 풀려났읍니다.
-경찰과 군인들 철수장면는 어땠읍니까.
-중요 서류는 헬기로 철수시켰읍니다. 경찰이 몹시 안절부절하더군요. 일반 경찰들은 사복을 갈아 입고 경찰서에서 빠져 나갔고 전경들은 운동복 바람으로 달아났어요. 그 뒤에 도경국장방에 들어가보니 모자 방독면 진압복 들이 그대로 있었읍니다. 얼마나 급하게 철수했는지 사물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흔적을 볼 수 있었읍니다.
-군대와 경찰이 철수할 만큼 급박한 상황이었던가요?
-경찰이 계엄군에 1개소대 병력을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는데 그것이 거절됐지요. 도저히 진압할 방법이 없다고 판단, 해산한 것으로 봅니다. 어쨌든 해산시기가 빨랐다는 이유 등으로 나중에 도경국장이 구속되었지요.
-제일 먼저 철수한 것이 광주경찰서였고, 그날밤 도경에 주둔한 군인, 경찰이 철수 했읍니다.
-21일 오후 7시55분에 경찰이 철수했고 8시 정각에 무장시위대가 도청에 진입했읍니다.
-경찰서 무전실까지 깡그리 철수했읍니다.
-물론이죠.
-21일 오후 8시부터 27일까지 광주는 무정부 사태로 들어갑니다.
-여기서 한가지 깊고 넘어갈 게 있읍니다. 우리가 무정부 상태란 표현을 썼읍니다만 광주 시민들의 이동상황을 주목해야 합니다. 18, 19, 20일 3일 동안 광주를 벗어난 학생.지식인들이 엄청났다는 겁니다. 시외버스와 기차로 수많은 학생들과 지식인들이 초만원을 이루며 피난(?)을 갔읍니다. 서울로, 제주도로 피신한 사람도 많았읍니다. 학생들이 이렇게 빠져 나간것은 18, 19 양일간 진압부대가 가가호호 가택수색을 함며 학생들을 잡아갔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어요. 그 학생과 지식인들이 다시 광주로 진입한 것이 22일부터 입니다.

무정부 상태에서도 질서는 유지

-그렇다면 도청을 접수한 사람 중에 학생들은 없었다는 얘기가 됩니까.
-많지는 않았다고 봐야죠. 제수생.휴학생 등이 대부분이었읍니다. 그런 흐름을 잘 되새겨볼 필요가 있읍니다.
-계엄군이 철수한 뒤 광주가 마치 [폭도]들의 횡포로 치안부재의 상태인 것처럼 보도된 사실은 어떻게 된것입니까?
-21일 오후 8시, 무장시위대가 도청을 접수한 뒤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이 사망자 시신을 수습하는 일이었읍니다. 1만여명 이상 시민이 몰려들기 시작했읍니다.
관도 마련해오고 병원등에 있던 시체를 옮겨와 가족이 있는 시체는 상무관에 안치했고 가족이 확인안된 경우는 도청안에 옮겨놨읍니다. 가족들이 찾아오면 시체를 확인하며 상무관으로 보냈읍니다.
-22일부터 최한영 조비오 이종기 변호사 등 10여명이 몰려 수습위원회를 구성했읍니다.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뉘어 수습이 어렵지 않았읍니까. 게다가 학생들이 그리 많이 모이지 않았읍니까. 학생대표들이 구성은 됐으나 그 안에서 다시 강.온건파가 나뉘었어요. 25일에 강경파가 도청을 장악했읍니다.
-25일 도청에서 보니 강경한 발언을 하는 사람들이 회의를 이끌어간다는 인상이었읍니다. 송정리쪽에서 반입된 조선일보의  기사 내용을 놓고 시비가 벌어졌어요. 기사중 [폭도]라는 말 때문이었읍니다. 도청 담당을 하던 제가 곤욕을 치렀읍니다. 다짜고짜 {이자식 조선일보 기자구나}하면서 윽박질렀어요. 설명을 해도 잘 먹혀들지 않았읍니다.
-22일 도청광장에서 시민대회가 벌어졌읍니다. 수습대책위원회가 8개항의 대책을 발표했읍니다. 그 내용은 {계엄군 시가지 진입 금지하라} {5.18 계엄군의 과잉진압을 인정하라}는 것등 이었읍니다. 그런데 7개항째를 거의 알리다가 중단되었읍니다. 한 청년이 연단에 뛰어올라 {그같은 수습방안은 받아들일 수 없다}며 강경론을 폈읍니다. 결국 끝까지 투쟁하자고 결의했읍니다.
-당시 해만 떨어지면 {계엄군이 들어온다}는 소문이 계속 퍼졌어요. 22일 저녁 5시30분 시민대회가 한참 벌어질 때 {계엄군이 들어온다}는 소문이 퍼지자 시민들이 와르르 도망을 쳤읍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계엄군에 연행됐던 학생 일부가 석방돼 나온 것이었읍니다.
-어두워지면 쥐죽은 듯이 조용했죠. 낮에는 궁금한 시민들이 도청 앞에 벌떼처럼 몰리곤 했지요.
-시민들이 한 일중 경비 외에 장례수습에 정성을 다하지 않았읍니까.
-외곽에서도 관을 들여오곤 했지요.
-일반인들은 광주의 무정부상태 기간동안 저항준비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실제 안에서 있었던 것은 질서유지.장례준비 등 좋은 일을 주로 했던 게 아닙니까?
-질서유지 하니까 생각나는 것은 생각보다 거리풍경이 푸근했다는 겁니다.
-시민들이 자체 청소도 하고 서로 협동하는 모습이었지요.
-당시 생필품이 떨어졌다고 보도됐으나 저희들은 매일 식당에서 밥을 사먹었지만 하등 지장이 없었어요. 밥값을 더 받지도 않았구요.
-안에서 보는 광주와 밖에서 보는 광주의 차이를 피부로 느낄 수 있었읍니다.

사망자 2천명설은 과장

-도청 앞 광장은 어떤 의미에선 아크로폴리스를 방불케 했어요.
-자유 토론의 광장같았어요. 누구든 연단에 올라와 자기 주장을 말하고 누구도 반박할 수 있었던 분위기였읍니다. 처음엔 강경론이 우세하더니 차츰 온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박수를 많이 받더군요.
-결국 도청앞 광장은 언론이 통제된 상태에서로의 정보를 교환하는 창구 역할을 한 셈입니다.
-시내버스도 운행됐지요.
-데모대들이 변두리 사는 시민들 편의를 돕기 위해 차를 운행했읍니다.
-일반 시민들이 온건론을 펴는 반면 도청을 장악한 사람들은 강경태세였다는데 문제가 있었읍니다. 일사불란한 지휘통제가 먹혀들지 않았음에도 치안이 유지되고 생필품을 나눠 쓰는 모습은 감명깊었읍니다. 광주 시민정신의 한 면을 보여주는 모습이었읍니다. 광주시민들의 의식을 높이 평가해야 한다고 봅니다.
-23일부터 광주시민들이 총기회수에 나섰읍니다. 그때 도청 지하실에는 엄청난 화약이 쌓여 있었읍니다. 이리 폭파사고때의 화약의 몇배라고들 하더군요. 만일 불순분자가 침입해 그곳에 불을 붙였다면 광주시내 반경 몇백m 까지 싹 쓸어버렸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화약의 뇌관이 계엄군의 공작에 의해 다 빠져있었다는 것 아닙니까?
-사실 그때 도청안엔 누구나 들어가서 그런 공작을 할 수 있었지요. 그만큼 조직적인 면이 약했다는 반증도 되죠.
-당시 사망자는 얼마나 된다고 보십니까? 전에 취재할 때는 대체적으로 2백명 선으로 봤읍니다. 요즘엔 2천~3천명이란 게 유행처럼 떠돌고 있읍니다. 2백명 정도라고 말하면 [사꾸라] 라고 비난받기 십상인 실상입니다. 막상 취재하신 분들 견해는 어떻습니까.
-사실 제일 신경쓴 게 시체 숫자였읍니다. 광주시내 병원에 있는 시체는 샅샅이 뒤졌지만 1백구 정도밖에 확인 못했어요. 도청 앞서 분향제까지 지낸 숫자이므로 확실하다고 장담할 수 있읍니다.
-5년이 지난 지금 광주시민들은 만나면 한결같이 2천~3천명선이라고 말합니다. 그 근거를 물어보면 {50여명이 모처에 암매장했다}느니 {바다에 쓸어 넣었다}는 식의 얘기를 합니다. 전부 {~더라}식의 이야기입니다. 확인되지 않은 소문일 뿐입니다.
-국민이 오해할 수 있는 충분한 소지가 있읍니다. 국회에서 말썽났던 광주시 통계도 그 중 하나입니다. 연감의 원본을 보면 착오이거나 통계 자체가 엉터리임이 분명한데도 사람들은 당국의 해명을 믿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그걸 유력한 증거라고 생각하고 있읍니다.
-2천명설에 대해 과거 취재노트를 들춰봤읍니다. 25일 도청앞 궐기대회에서 한 학생이 나와 {확인된 시체 69명, 파묻은 것이 1백구쯤되라라는 추정, 부대로 데려간 시체는 7백구쯤 될것이다, 연행자수가 1천~2천명이고 다친 사람은 중상자만 3백~4백명이다}라고 보고했읍니다. 5월26일 마지막 궐기대회에서는 {시체는 1백1구까지 확인했다. 변두리에서 버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 5백구다 연행자는 2천명, 부상자 2천명}이라고 발표했읍니다. 지금 2천명설은 당시보다 엄청나게 부풀어 난 것입니다. 이번에 광주사태 부상자 모임에 가보니 부상자가 8백명이라는 겁니다. 상식적으로 판단해도 사망자수가 부상자의 2배가 넘는다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습니다.

사망자, 2백명대 넘지 않을 듯

-정부 발표 1백91명 외에 사망자가 다소 더 될 가능성은 있읍니다. 광주시내 밖에서 죽은 사람 가운데 혹 밝혀지지 않은 경우가 있을 수 있읍니다. 이밖에도 사망신고를 부득이 할 수 없었던 경우도 있을 수는 있겠지요. 공무원 자제들이나 큰 기업체와 관련된 유족이 이에 해당될 겁니다. 그들은 여러가지 형편상 신고를 기피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지요.
-이런 숫자를 합쳐도 광주사태 때의 사망자수가 2백명대 이상은 안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광주 분위기로 보아서는 사망자가 더 있었다면 신고를 안할리가 없읍니다.
-유족회 회장을 비롯 유가족 여럿을 만나 {사망자가 더 있다고 보느냐}고 물었더니 {지난 5년간 우리도 계속 희생자를 더 찾으려고 애썼으나 찾지 못했다면서 앞으로도 희생자 유가족을 찾기 위해 노력을 쏟겠다}고 밝히더군요.
-당시 외신들이 2천명 희생설을 보도해서 그게 다시 국내로 들어와 신빙성있게 퍼졌지요. 그러나 우리가 그때 외신기자들과 함께 취재를 했지만 그들은 현장에 우리처럼 쉽게 접근할 수 없어서, 기사내용은 우리의 풀을 받을 정도였지요. 그러니까 이들이 그런 소문을 듣고 기사를 썼던 게 아닌가 합니다.
-이번에 당시 시민측 수습위원이었던 분을 만났더니, 역시 2천명설을 얘기하더군요. 그러면서 당시 전남대 총학생회장으로 복역중 사망한 박관현씨가 법정에서 그렇게 얘기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잘알다시피 광주사태 때 현장에 있던 사람이 아니었어요.
-사실 2천명이 아니라 밝혀지지 않은 사망자가 몇 백 명만 더 있다고 해도 문제가 벌써 터졌을 겁니다. 광주시내에 밝혀지지 않은 사망자가 2천여명이나 된다면 동네마다 그런 사람이 몇명씩 있어야 할 테니까 드러나지 않을래야 드러나지 않을 수가 없거든요. 또 당시 광주에는 1백여 며의 기자들이 몰려 취재를 열심히 했는데, 어느 누구도 2천명설을 뒷받침할 만한 자료를 캐내지는 못했읍니다.
-아마 이 점 때문에 정부가 제일 골치를 앓고 있을 겁니다.
-그렇지요. 아무리 말해도 믿지를 않거든요. {어디에든 신고를 하라}고 해도 {신고하면 보복하니 신고를 안할 것}이라면서 다시 2천명설을 주장하는 사람이 적잖거든요.

어떻게 죽었느냐도 문제

-그런데 광주사태는 얼마나 죽었느냐는 문제도 큰일이지만, 어떻게 죽었느냐는 문제도 중요합니다. 계엄사가 80년 6월에 발표한 사망자 명단과 사인을 보면 1백44명의 시민측 사망자 가운데 18%인 26명이 타박상 두부손상 자사으로 숨진 것으로 돼있고, 23.6%인 34명이 19세이하라는 겁니다. 14세 아하 사망자도 5명이고, 두부손상 사망자 중엔 65세 노인도 있읍니다. 광주부상회 회원 1백31명중 12.2%인 16명이 구타에 의한 부상이고, 약 80%가 허리 위에 총격을 받아 다친 사람입니다.
광주시민과 학생들을 격분케 한 것은 바로 최초 진압부대의 모욕적인 진압태도였다고 볼수 있읍니다. 우리도 그렇게 느껴지는 부분이 많습니다. 가혹행위는 앞의 광주사태 일지나 광주시민들의 증언에서 언급됐기에 여기서는 상세히 거론치 않는다는 것을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언론이 제 구실을 못해 유언비어와 과장과 왜곡이 일어났어요. 언론이 제대로 보도만 했더라면 광주사태의 응어리는 벌써 풀렸을 지도 모릅니다.
-언론의 진실보도가 얼마나 중요하냐 하면, 글쎄 그때 광주에서 함께 취재하던 광주의 당시 언론인들도 사망자를 1천명 혹은 2천명 이상으로 보고 있었어요. 물론 단 한 건도 확실한 증거는 없었죠. 그래도 양심적(?)으로 말하는 사람이 {아마 정부발표의 배}는 될 것이라고 했읍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사람은, 같이 앉아서 얘기하던 사람들이 화장실에 간 사이에 귀에 대고 속삭이듯 [2백명대]일것이라고 했읍니다. 이것이 광주의 분위기였읍니다.
-그러니까 앞으로라도 보다 정확한 숫자와 진상을 밝히는 데 언론이 제 구실을 해서 국민의 궁금증을 속시원히 풀어주어야겠지요.
-그러면 이런 사태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요.
-우선 진상이 분명하고 충분하게 밝혀져야 하고, 그 다음에는 희생자 가족을 비롯한 광주시민의 마음에 맺힌 억울함을 풀어줘야 합니다. 이번에 만난 몇몇 광주시민은, 금전적인 보상보다는 정신적인 보상을 해줘야 한다고 주장하더군요.
-[난동]이라든가 [폭도]라는 용어도 정부의 공식문서에 아직 그대로 남아 있더군요. 광주시민의 응어리를 풀자면 이런 정부의 태도도 달라져야지요.
-맞습니다. 솔직히 손 안대고 코를 풀수야 없지요. 이번에 국방장관이 {군인들은 최후까지 자위권 발동마저 억제했다}고 발표했는데 그런 해명도 사태를 직접 목격한 광주시민들에겐 별로 설득력이 없어 보입니다. 정부도 솔직하게 진실을 말해야 하고, 잘못이 있다면 사과해서 광주시민의 한을 풀어야 합니다. 이러한 극적인 전환이 없이는 광주사태는 역사의 교훈이 되지 못하고 영원한 불행으로 남을 것입니다.
-어떻든 역사는 교훈이 돼야합니다. 다시는 이런 비극이 되풀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정부도, 여.야도, 광주시민을 비롯한 국민도, 그리고 대학생들도, 새로운 시각에서 새롭게 봐야합니다. 과거 주장만 되풀이 해서는 광주의 한은 풀리지 않을 겁니다.
-오랫동안 수고들 했읍니다. 기자가 사건을 무서워해서는 안된다고 하지만, 이런 취재는 다시 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