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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DJ판 역사 바로세우기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 5공-DJ정권 화해 최후의 덫. 박성원(신동아, 1998

본문

'DJ판 역사바로세우기'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5공 - DJ정권 화해 최후의 덫
80년 내란음모 혐의로 사형 등 중형을 선고받았던 김대중정부 핵심인사들의 명예회복 움직임은 DJ정권-5共간화해 여부에 최후 변수가 될 수 있다. 권정달 당시 보안사 정보처장은 체포 명단 작성자로 이학봉 당시 대공처장을 지목한 뒤 {내란음모는 과장된 것 같다}고 말했다. 이택돈 전의원은 자신이 고문을 당했으며 김대중씨에 관한 자신의 증언들은 왜곡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박 성 원<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이 나라의 야당 대통령후보까지 지낸 피고인이 반공이란 대한민국의 국시를 외면한 채 북괴의 주의·주장과 노선에 적극 동조하는 반국가적 행위를 자행하였을 뿐만 아니라 선량한 학생들을 선동 오도하여…}
  80년 9월17일 육군본부 대법정에서 열린 계엄보통군법회의에서는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의 [총책] 김대중(金大中)피고인에게 사형이 선고되고 있었다. 5·17을 기해 연행된 지 넉달 만의 일이었다.
  그로부터 18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김대중 피고인은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던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돼 있다. 김 대통령을 포함한 사건 관련자들은 이전부터 실시된 몇 차례의 사면조치를 통해 법적으로는 당시의 [전과]로부터 자유로운 몸이 됐다. 그러나 이들의 [내란음모]등에 관한 사법부의 판결문은 여전히 살아있다. 비록 이들 관련자들이 대통정직을 포함해 국가의 주요 직책을 맡고 있다 해도 이들이 [내란을 획책했었다]는 사법부의 기록은 엄연히 살아 있고, 그 기록은 훗날에도 지워지지 않는 것이다. 이 때문에 최근 당시 사건관련자들 사이에서 {신군부의 집권을 위해 조작된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이 무죄임을 사법부의 기록으로 남기자}는 재심청구 움직임이 일고 있다. 사상처음으로 정권교체를 이루고 [국민의 정부]가 들어선 마당에 잘못된 사법적 기록을 후세에 그대로 물려줄 수는 없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내란음모세력의 재심청구 움직임

  이들은 재심청구에 앞서 최근광주민주화운동 보상심의회에 이 사건으로 인한 피해보상을 신청했다. 이 가운데는 한승헌 감사원장 서리, 이해찬 교육부 장관 등 현직각료를 비롯해 한완상(韓亮相) 전통일부총리 국민회의 설훈 의원, 한나라당 이신범(李信範)의원, 이문영(李文永) 아태재단이사장 등이 포함돼 있다. 관련자들은 보상청구에 이어 사건 자체가 조작된 것이었음을 입증,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재심을 청구한다는 계획이다.
설훈 · 김옥두(金玉斗 국민회의) 의원 등 여권관계자 중심으로 추진되고 있는 재심 청구 작업은 자료수집 등 실무준비 작업을 마치는 대로 법률검토를 거쳐 재심청구 방식을 결정할 것이라는 게 관계자들 얘기다.
  이와 같은 움직임은 6공 초에도 한 차례 있었다. 그러나 5·6공 정권에서는 내란음모사건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12·12, 5·18의 진상규명 자체에 한계가 있었다. 김영삼 정부의 [역사 바로세우기]에서도 이 사건은 실체가 규명되지 못했다는 게 이들의 인식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사건 피고인들이 [집권세력]이 된 가운데 시도되는 진상규명 움직임이라는 점에서 귀추가 주목된다. 5·6공의 [성공한 내란세력]이 권좌에서 물러난 뒤 12·12, 5·18재판으로 단죄됐듯, [실패한 내란음모세력]이었던 오늘의 집권세력은 이제 자신들의 [전과(前科)]를 수정할 수 있을 것인가.
  [DJ판 역사 바로 세우기]가 될 수도 있는 [김대중내란음모사건]재조명 움직임을 계기로 그동안 언급 자체가 터부시돼 온 이 사건의 실체를 재추적해 보았다. 이를 위해 사건피고인들과 신군부측 인사들을 접촉하고 당시 계엄합수부가 작성한 수사기록과 내부보고서 등을 입수, 관련자들의 진술과 대조해보았다.
  사건에 연루됐던 인사들은 한결같이 고문과 강압에 의해 이루어진 짜맞추기 수사라고 주장했다. 특히 김대중씨의 유지혐의를 입증하는 데 적잖은 역할을 했던 이택돈 前의원은 자신도 가혹한 고문을 당했으며, 자신의 발언내용 대부분이 허위로 꾸며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신군부측 인사 가운데 권정달 당시 보안사 정보처장은 김대중씨 등 체포대상 명단이 이학봉(李鶴捧) 합수부 수사단장에 의해 작성 됐으며, [내란음모]라는 것은 과장된 얘기라는 견해를 밝혔다.

나라를 어지럽히는 사람들 대책논의

  그러나 이학봉 수사단장, 나아가 합수본부장이었던 전두환(全斗煥) 前대통령측은 다시금 정치적인 시비에 휘말리고 싶지 않다는 점을 들어 사건에 관해 언급하기를 거부했다.
  김대중정권과 전두환 전대통령측의 연대설까지 나오는 게 오늘의 정치환경이지만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은 양자 사이에 가로 놓여 있는, 최대 미제(未i齋)사건이라 할 수 있어서 앞으로의 처리과정이 주목된다.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돼 10년형을 선고받았던 이해찬 교육부장관은 사건의 성격에 관해 {한마디로 신군부가 기획한 조작극}이라고 주장했다. 이장관은 {공식적으로는 계엄합동수사본부 작품이었으며, 신군부의 집권가도에 제일 저항이 큰 국민연합 등 재야세력과 학생운동세력을 연계시켜 함께 제거하려는 게 목적이었다}고 말했다. 이장관은 그러면서 합수본부장이었던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이학봉 수사단장을 그 책임자로 꼽았다.
  이장관이 사건의 [기획팀]으로 보안사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 멤버들을 꼽는 이유는 12·12, 5·18재판에서 도마에 올랐던 [시국수습방안], 일명 [집권시나리오]때문이다.
  시국수습방안은 80년 5월4일 권정달 당시 보안사 정보처장(현 국회의원·한나라당)이 중앙정보부장 안가에서 보안사 핵심간부 등 신군부 인사들에게 브리핑한 국가위기수습방안. 주요내용으로는 비상계엄확대, 국회해산, 내각을 통제할 비상기구설치 등이다. 이와 같은 시국수습방안을 토대로 비상계엄을 확대하고, 계엄포고령 10호를 발령한 것 자체가 집권 프로그램의 일환이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국수습방안 작성 및 집행과정에서 내란음모사건 관련자들의 체포 및 재판 계획은 언제 어떻게 마련된 것일까. 권정달 의원은 시국수습방안 작성경위와 관련, 96년 7월22일 법정에서 이렇게 말했다.
  {80년 5월 초순경 전두환 보안사령관으로부터 [시국수습방안]을 수립해보라는 지시를 받고 보안사 참모들과 2∼3일 동안 집중논의한 끝에 마련했다}
  권의원은 그러나 내란음모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범죄혐의 포착 및 체포계획 등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진술을 한 바 없다. 그래서 기자는 먼저 권의원을 만나 시국수습 방안과 내란음모사건의 연관성에 관한 몇 개의 의문점들을 해소해보기로 했다.
  기자는 권의원이 사건 수사 준비와 집행의 핵심으로 꼽은 이학봉 전의원과도 접촉을 시도했으나 이 전의원측의 거절로 실패했다. 권의원의 증언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시국수습방안 보고 및 토론과정에서는 김대중씨 등 내란음모 관련자들의 체포 및 수사계획이 구체적으로 거론된 바 없다는 것이다. 다만 권의원도 80년 5월4일 신군부 핵심인사들 사이에서 이미 [나라를 어지럽히는] 정치인들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다는 논의가 있었음을 부인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신군부 측은 언제부터 김대중씨 등의 내란음모 및 반 국가단체 수괴 혐의 등을 파악하고 있었을까. 이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의 [실체 여부]와 관련해 중요한 사항이라 할 수 있다. 만일 사전에 혐의에 관한 구체적 파악도 없이 연행을 했다면, 이는 5·17당시 다른 조치와 마찬가지로 [정권장악의 걸림돌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12·12, 5·18재판에서도 신군부가 김대중씨 등의 혐의를 언제 어떻게 파악하고 있었는지 여부가 명료하게 규명되지 않았다. 다만 전두환 전대통령의 법정 진술을 통해 이를 간접적으로 추론할 수 있을 뿐이다.
  (96년 6월 10일 12·12 - 5·18 1심 재판 12차 공판, 전두환 피고인에 대한 변호인 반대신문)
  -80년 5월12일 학원소요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한 시국수습방안을 권정달 당시 보안사 정보처장이 보고했지요.
  {그렇습니다.}
  -권정달은 학원소요 진정을 위해 국회해산, 국보위 설치, 비상계엄 확대 등 구체적인 방안을 직접 건의하며 기획안을 완성해 보고했지요.
  {본인이 전문가가 아니라 구체적인 방안을 지시할 처지가 못 되고 권정달 차장아 스스로 알아서 방안을 만든 것입니다}
  -피고인은 배후조종세력을 없애지 않는 한 학원소요를 뿌리뽑을 수 없다는 판단 아래 5월10일 권정달 정보처장에게 학원소요 수습방안을, 이학봉 수사단장에게 학원소요의 실태 파악을 지시했지요.
  {예}
  -피고인은 이에 추가해 권학할 부정축재자로 사회적 지탄을 받는 인사에 대한 수사계획을 세우라고 이학봉 수산단장에게 지시했지요.
  {예}
  -학원소요 배후조종 세력과 권력형 부정축재자 선정은 권정달 정보처장과 이학봉 수사단장이 보안사가 가지고 있던 정보자료를 토대로 수사실무적 차원에서 선정한 것이었지요.
  {예}
  -피고인은 5월17일 21시께 정보보고를 통해 비상계엄 실시 지역의 전국 확대 문제를 지라하자 위한 비상 국무회의가 소집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지요.
  {예}
  -피고인은 임시 국무회의에서 비상계엄 지역 확대 선포를 의결했다는 정보보고를 받은 뒤 권정달 정보처장에게 최대통령이 학원소요 수습을 위하여 정치활동을 금지하는 조치를 하도록 지시한 사실을 알리고 계엄사령부에 통보하라고 지시하였지요.
  {그렇게 지시했습니다}
  -피고인은 5월 17일 오전 10시께 학원소요 배후조종세력인 국민연합과 민주청년협의회, 그리고 전국총학생회 회장한 협의회 핵심 간부에 대한 국기문란 사건과 권력형 부정축재자에 대한 수사를 최대통령에게 건의해 승인받았지요.
  {예}
  -당시 이학봉 수사단장은 부정축재자는 보안사 수사국이, 국민연합 핵심 인사는 중앙정보부 수사국, 그리고 민주청년협의회 간부는 치안본부에서 각각 담당해 5월 17일 22시를 기해 조사를 개시하도록 지식했던 것으로 알고 있지요.
  {예}l
  -국기문란 사건과 권력형 부정축재자에 대한 수사는 이학봉 합수부 수산단장의 총괄지휘 아래 중앙정보부 수사국, 내무부 치안본부와 보안사 수사국익 담당했지요.
  {예}
  -중앙정보부 수사국이 김대중씨의 국가보안법 혐의사실을 수사한 것은 피고인이나 이학봉 수사단장의 지시에 의한 것이 아니었지요.
  {예}
  -중앙정보부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부터 국가보안법과 관련한 김대중씨의 혐의사실을 수사하고 있었는데, 5월18일에 국민연합에 대한 국기문란 사건의 수사 지시를 받자 이미 수사중이던 국가보안법 혐의까지 아울러 수사하게 된 것이지요.
  {예}
  -피고인은 지난 80년 6월30일게 국민연합 내란음모 사건과 김대중씨에 대한 국가보안법 관련 혐의사실, 그리고 권력형 부정축재자에 대한 최종수사 결과를 최대통령에게 보고했지요.
  {그렇습니다}
  -피고인은 최대통령에게 국민연합 내란음모 사건관련자는 국가와 관련한 중대사건이므로 전원 계엄군법회의에 사건을 송치하도록 건의했지요.
  {예}

나중에는 정말 죽이려 했다

  전두환 전대통령에 따르면 5월10일 이학봉수사단장에게 학원소요 실태파악을 지시했고, 이단장 등은 보안사가 갖고 있던 정보자료를 토대로 체포대상을 선정했다는 것이다. 또한 중앙정보부가 박정희 대통령 시절부터 국가보안법과 관련해 김대중씨를 수사하고 있었는데, 5월18일 국민연합의 [국기문란사건]수사를 지시 받은 합수부가 국가보안법 혐의까지 함께 수사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김대중대통령측 관계자들은 반국가단체 부분, 즉 한민통 관련 혐의는 김대중씨 등의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느닷없이]덧씌워진 것이라고 반박했다.
  사건 피고인의 한 사람이었던 이해찬 교육부장관은 {박정희정권에서부터 수사해 온 게 아니다. 이전에는 김대중선생이 한민통 문제로 인해 조사를 받은 적이 한번도 없다}고 말했다. 이에 관해서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73년에 한국 정보요원들이 김대중씨를 납치하는 과정에 일본 국내법을 위반했다는 점이 한일간 외교적 문제가 됐다. 그래서 김종필 당시 국무총리가 일본에 가서 일본 총리와 외상 등을 만나 사과하면서 이를 [없던일]로 하기로 했다. 김대중씨의 재일 한민통 활동을 한국내에서 문제 삼지 않는 대신 한국 요원들이 일본에서 김씨를 납치해온 혐의를 일본에서 문제삼지 않는 걸로 양국간에 합의가 된 것이다. 이해찬 장관의 주장은 그 한일간 합의로 김대중씨의 한민통 관련 문제는 끝난 것이라는 얘기다. 74년이래 박정희정권도 이 문제를 갖고 김대중씨를 수사한 일이 없으며 80년 5·17때도 애초에는 한민통 부분을 문제삼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시 이해찬 장관의 주장.
  {처음에 연행할 때는 자신들의 집권목적에 방해되는 재야인사와 정치인들을 체포하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나중에는 정말 죽이려고 했던 것 같다. 광주에서 저항이 격화되니까 우리가 유혈극을 사주한 것처럼 책임을 돌리려고 내란음모사건으로 비약시켰다. 그런데 내란음모의 최고형량이 [기껏해야] 무기징역이다. 그래서 일본에서의 해묵은 활동을 뒤늦게 문제삼아 국가보안법까지 동원해 엮으려 한 것이다}
  이장관의 주장은 김대중씨의 한민통 관련 수사에 관한 전두환 전대통령의 법정진술과 상치되는 것이다. 김대중씨의 내란음모 혐의에 관해서도 전두환 전대통령은 보안사 자료를 토대로 [수사실무적]차원에서 수사가 시작됐다고 밝힌 반면, 이장관은 광주유혈극 책임을 덮어씌우기 위해 [정치적]으로 혐의를 조작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김대중씨에게도 영향 있을 것

  이와 같은 양측의 주장에 대해 당시 김대중피고인에게 불리한 진술을 했던 이택돈 전의워은 한민통 관련부분이 김대중씨 발목을 잡기 위해 수사기관에 의해 오랫동안 [준비된 혐의]라는 주장을 폈다. 이 전의원의 주장은 이렇다.
  {김대중씨측 입장에서는 느닷없는 사건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어요. 그러나 사실은 77년 국내에서 재일 한민통이 사건화 되어 대법원에서 반국가단체로 규정돼 관련자들이 유지판결을 받을 때부터 뭔가 예비돼왔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습니다. 77년 당시 서울지검 간부로 있던 A씨가 내 대학동기인데, A씨가 내게 뭔가 귀띔해주었습니다. 한민통이 반국가단체로 규정됐는데 나와 가까운 김대중씨에게도 언젠가는 영향이 있을지 모른다면서 나를 걱정해 준 것입니다. 당시 나는 박정희대통령이 이미 명동사건 등으로 김대중씨 등을 고생시킨 마당에 또 반 국가단체 수괴로까지 엮겠는가 생각하면서 이희호 여사에게 그 얘기를 전해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5·17 이후 김대중씨를 그 한민통 관련으로 엮으려는 게 신군부의 시도라는 것을 알게 된 거죠. 신군부는 5·17내란을 일으키면서 김대중씨를 한민통으로 엮으려고 준비해놓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합니다}
  한민통 관련 혐의의 포착시기만 생각한다면 이 전의원의 얘기는 신군부측 주장에 가깝다. 그러나 5·17 이후 한민통 문제가 김대중씨에게 적용되는 과정에 관해서는 [순수한 장기수사의 결과]라는 신군부측 주장과 정반대로 김대중씨 제거를 위한 카드였다는 이해찬 장관 등의 주장에 가까운 것이다.
  이렇게 엇갈리는 주장들 속에서 김대중내란음모 사건의 수사경위 및 의도에 관한 객관적 판단을 위해서는 12·12, 5·18사건의 사실관계에 관한 법원의 판결문 일부를 인용해 볼 필요가 있다.

  …이에 따라 피고인 이학봉, 허화평, 허삼수, 권정달 정보차장, 정도영 보안처장이 2, 3일간 수시로 만나 논의한 끝에 대학가 시위를 강력히 제압하고 군이 전면에 나서서 정국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군주도 세력의 협조하에 전국계엄을 실시하는 동시에 비상기구 설치와 국회해산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이를 [시국수습방안]으로 정리하기로 하여
  …피고인 전두환은 같은해(80년) 5월초 이학봉에게 학원소요사태를 근절하기 위해서는 학생시위를 배후에서 조종하는 정치인과 재야인사 복학생대표들을 검거하여야 한다는 이유로 그들에 대한 조치방안을 지시하면서, 북정축재자들에 대한 조치방안도 아울러 검토할 것을 지시하고, 이학봉은 권정달로부터 관련자료를 협조받아, 같은달 13일 검거대상을 학생시위 배후조종자에 대해서는 국기문란자로, 부정부패행위자에 대해서는 권력형 부정축재자로 각 분류하기로 하고, 이를 피고인 전두환에게 보고한 다음 권정달과 함께 대상자 선정작업을 마무리하여 이른바 국기문란자와 권력형 부정축재자의 선정기준, 명단, 혐의내용 등을 정리한 [국기문란자 수사계획]과 [권력형부정축재자 수사계획] 등 두 개의 보고서를 작성, 같은달 15일 피고인 전두환에게, 최종보고하고, 피고인 전두환은 이들을 검거할 준비를 하라고 지시함으로써….
(96년 8월26일 서울지법 형사30부)

  이상과 같은 판결문 내용은 김대중씨 등 내란음모사건 관련자들의 체포·연행이 신군부의 정권장악을 위한 여러 조치들 가운데 하나라는 사법부의 인식을 반영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김대중씨 등의 체포 수사가 설령 신군부의 정권장악을 위한 것이었다 해도 신군부가 과연 [허위사실을 날조해] 김대중씨 등을 체포·기소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사법부의 판단이 따로 나와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12·12, 5·18에 대한 법원의 유죄판결과는 별도로 내란음모사건의 실체 여부에 대한 사법적 판단은 81년의 대법원 유죄확정 판결에서 뒤집힌 게 없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12·12, 5·18재판은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의 실체에 관한 의문을 새삼 제기하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80년 당시 신군부가 취한 일련의 비상조치들이 정권장악을 위한 내란행위의 일부분이었다는 점을 전제로 한다면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이란 것도 한마디로 [신군부의 집권 프로그램을 완성하기 위해 꾸민 사건]일 개연성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사건 관련자들은 대부분 이와 같은 논리적 연장선상에서 재심청구에 기대를 걸고 있다.

2만명을 죽이면 묻을 데도 없다

  그러나 전두환 前대통령측의 이양우 변호사는 이런 움직임에 구체적 코멘트를 거부했다. 이변호사는 다만 {12·12, 5·18과 관련한 문제는 이미 재판에서 모두 다루고 걸러진 문제}라면서 {피해자라고 하는 분들도 검찰이나 법정에서 입장을 다 진술했고 가해자라고 하는 분들도 다 진술하지 않았느냐}고 반문했다. 김대중대통령의 요청에 따라 사면복권까지 된 상황에 이 문제로 다시 논란에 휩싸이고 싶지 않은 전둔환 전대통령측 심중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중앙정보부 수사국장으로서 사건수사에 깊숙이 간여했던 김근수 현 상주시장은 {우리는 조사만 해서 군검찰부에 넘겼을 뿐 기소와 관련된 모든 것은 법률전문가인 군 검찰부에서 알아서 한 것}이라며 입을 다물었다. 김시장은 {조용히 시정을 돌보고 있는 사람으로서 정치문제에 개입하고 싶지 않은 심정을 이해해 달라}고 말했다. 수사기록을 입수, 확인한 결과 당시 사건을 맡았던 군 검찰부는 검찰부장 정기용중령, 군 검찰관 이병옥 소령, 정인봉 대위, 김대권 중위, 홍경식 중위, 김인규 중위 등으로 돼있다. 1심재판부는 재판장 문응 식 소장, 심판관 박명철 준장, 이재흥 준장, 여운건 준장, 법무사 양신기 중령 등이었다.
  당시 검찰부장이 었던 정기용변호사는 {지금은 내가 대답하기에 시기가 적절치 않다}면서 {몇 년 뒤에 다시 얘기하자}고 완곡히 답변을 거절했다.
  수사기록과 함께 입수된 수사담당자 명단은 표와 같다.

김대중내란음모사건 수사담당자 명단

*합수부 수사담당자 현황(수사기록에서 발췌한 명단임)

  당시 수사관들은 피의자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고  피의자들은 수사관들끼리의 대화에서 성씨를 부르는 것을 간혹 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
  명단에 등장하는 수사관들 가운데 현직에 남아 있는 사람은 몇 사람 되지 않으며 대부분 전역했다. 이들 역시 사건에 관여한 사실 자체를 부인하는 등 사건에 관해 언급하기를 꺼렸다.
  한편 수사관계자들의 조심스러운 태도와는 대조적으로 피의자로서 조사를 받았던 인사들은 당시 상황에 대해 구체적으로 증언에 응했다. 이 가운데 특히 피고인의 한 사람이면서도 김대중씨에게 불리한 진술을 했던 이택돈 전의원은 자신이 혹심한 고문을 당했다는 점과 자신이 진술했다고 알려져 있는 내용 상당부분이 왜곡, 과장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준비된 조직도표에 깜짝놀랐다

  -그 당시 신문기사를 보면 법정에서 김대중씨의 용공 혐의 등에 대해 상당히 불리한 쪽으로 김대중씨의 용공 혐의 등에 대해 상당히 불리한 쪽으로 진술을 많이 하신 것으로 돼있는데.
  {아니다. 당시 보도된 바와 같이 말한 적이 없다}
  -[유신인사 2만명 제거 계획 등에 관해 이신범씨와 논의하고 이를 김대중씨에게 전달하기로 했다]는 진술을 한 적이 없나. 80년 8월29일 공판에서는 그렇게 진술한 것으로 당시 언론에 보도되지 않았는가
  {당시 재판자체에 대한 보도관제로 계엄사측의 일방적 브리핑에 의존하는 재판기사가 나간 것 같다}
  -법정에서 직접 얘기하지는 않았더라도 공판기일 전 증인신문 등에서 그런 얘기를 한 적은 없나.
  {그런 증거보전 절차도 없었다}
  -수사과정에서는 그런 진술을 한 적이 없나.
  {합수부에서 피의자신문을 받을 때 수사관들이 [유신인사 2만명 제거]어쩌고 하면서 묻기에 내가 이렇게 말한 적은 있다. [2만명을 죽이면 묻을 데도 없고 화장한다 해도 시신 태우는 냄새가 장안에 진동할 것이다. 그게 도대체 가능한 얘기냐]고. 그렇게 웃어넘겼는데 정반대로 진술한 것으로 발표돼 놀랐다. 수사관들이 이러저러한 내용을 떠보았지만 나는 대부분 어이없다는 투로 부정했다. 더구나 그런 대화는 정식 조서로 작성된 일도 없다. 그런데 합수부측이 일방적으로 왜곡해서 재판 때 나의 진술이라고 발표한 것이다}
  -그럼 임시정부 운운하는 얘기도 전혀 근거가 없는 얘기였다는 말인가
  {그들이 우리 피고인들에게 [임시정부수립 계획]혐의를 덮어씌우려 했던 것은 철저히 신군부의 시나리오에 따른 것이었다. 서울역 앞에서 학생시위가 고조됐을 무렵 버스기사가 대낮에 사람 2명을 치어 죽이고도 체포되지 않고 당당히 걸어간 일이 있었다. 늙수그레한 사람들이 대학에 격렬한 선동대자보를 붙이는 등 뭔가 정치 음모 기운이 감돌던 시기였다. 그래서 나는 이런 상황을 수습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5월16일 이신범씨와 당시 미8군사령관 정치특보였던 전한진씨 등과 함께 저녁을 먹으면서 젓가락 싸는 종이에 수습에 나서줄 만한 몇몇 인사들의 이름을 적어보았다. 윤보선, 함석헌, 김수환, 한경직 등 재야·종교계의 신망있는 분들과, 여성계의 이태영씨, 학생대표 심재철씨, 심지어 계엄사령관 이희성씨에 이르기까지 정치와 무관한 민관군 지도자들의 이름을 적어본 것에 불과하다}
  -그런 인사들 사이의 조직체계 등은 어떻게 짠 것인가.
  {조직의 기본준비도 갖추어지지 않았다. 바로 그 다음날 잡혀들어 갔는데 합수부에 끌려가보니 금세 커다란 차트에 두 종류의 조직도표가 만들어져 있어 깜짝 놀랐다. 5월17일 밤 자정 무렵 [잠깐만 가자]는 말에 금방 돌아오려니 하는 생각에 양복을 입고 따라나섰는데 이때 양복주머니 속에 들어있던 메모가 화근이 됐다. 그들이 멋대로 각본을 꾸민 것이다.
  -법정에서 {간첩 장은성의 남로당원증 신청서에 장을 교양시킨 사람이 [김대중 동무]라고 기재돼 있는 것을 수사관이 보여줘 깜짝 놀랐다}고 진술한 것으로 보도돼 있는데.
  {그런 언급을 한 적이 없다. 다만 수사 과정에서 수사관들이 이러저러한 것을, 심지어 호적등본까지 들이대면서 [법률가로서 자문 좀 해달라]는 식으로 말을 꺼낸 적은 있다. 그러나 내가 그런 사실 여부를 인정할 위치도 아니었고 조사실도 어두워서 유심히 보지도 않았다. 어차피 정식조서로 작성하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김대중씨의 한민통 관련 혐의에 관해 법정이나 수사과정에서 인정한 적이 없나.
  {없다. 남산(중앙정보부)에서 수사관들이 자꾸 김대중씨를 국가보안법 1조로 몰려하기에 내가 이렇게 설명했다. [여보시오, 이 조항은 이승만 박사가 김일성집단을 처벌하기 위해 만든 건데, 필요적 사형조항(걸릴 경우 반드시 사형을 선고하도록 돼있는)인 이 조항을 김대중씨에게 써먹는다는 것은 난센스 아니오? 그러면 김일성이가 웃을 것이오]라고 농담삼아 충고한 적이 있다}
  -조사분위기가 농담을 할 정도로 부드러웠나.
  {그들은 처음 1개월 정도는 내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며 회유했다. 그러다가 7월 들어서면서 느닷없이 구둣발로 걷어차는 등 거칠게 나왔다. 갑자기 두들겨 패기 시작하면서 [임시대통령에 윤보선씨를 옹립하는 임시정부를 만들려 했다]는 진술서를 쓰라고 했다}
  -어떤 내용을 쓰도록 요구받았나.
  {변란을 꾸며 시국을 수습하고 김대중을 대통령에 옹립하려 했다는 것과 선거로는 안 되니까 임시정부를 구성,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만들려 했다는 식으로 쓰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쓰라는 대로 썼나.
  {내가 자꾸 그런 내용을 부정하는 식으로 쓰니까 요구내용에 근접할 때까지 7∼8차례나 진술서를 쓰도록 했다. 시국수습위원회 계획 정도로 생각했던 것을 그들이 불러주는 임시정부 수립계획으로 기술했다. 고문을 당해서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써준 것이다}

우리가 대법원까지 접수했어요

  {나도 처음 고백하는 것이다. 사실 그때 많이 맞았다. 창피하고 끔찍한 기억이라 아직 집사람에게도 얘기하지 않은 것이다. 발가벗겨진 상태에서 침대각목으로 맞고 또 맞았다. 각목으로 맞는 것보다 모욕적인 것은 따귀를 맞는 일이었다. 허리띠와 넥타이를 풀게 한 뒤 빰을 때리며 손을 들고 있으라고 했다. 옆방에 함세웅신부와 작고한 김녹영 전국회의부의장이 붙들려 와 있었는데 나의 비명소리를 들었던 것으로 안다. 수사관들은 송치날짜가 되니까 안티푸라민을 발라 상처부위를 은폐하려 했고, 그게 안 되니까 생쇠고기 붙여 멍든 흔적을 빼려 했다. 나는 송치될 때 수사관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수사기록에다가 [고문에 의해 임시정부 등등을 진술하게 된 것]이라는 소명서를 끼워넣었다}
  -고문으로 혼이 났다면서 그런 용기를 낼 각오가 돼 있었나.
  {수사가 사실상 다 끝난 상태에서는 수사관들도 많이 풀어져 있었다. 합수부 측도 막상 자기들이 강요한 진술내용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는지 송치의견서에서는 임시정부 수립계획과 관련한 대목이 상당히 톤다운 돼 있었다}
  -군 검찰부에서는 어떤 내용을 추궁당했나.
  {이미 나의 진술내용까지 타이핑을 다 해놓고 있었다. 군검찰관이 8월15일 나를 혼자 불러내더니 이렇게 말했다. [선배님, 혁명입니다. 우리가 대법원까지 다 접수했습니다. 군인들은 화끈해서 필요한 것을 인정해주면 나중에 다 잘 풀릴 겁니다]라고}
  -그렇다면 당시 합수부는 왜 이의원을 집중적인 공략목표로 삼았다고 생각하나. 정치권 일각에서는 이의원께서 뭔가 약점을 단단히 잡혔기 때문 아니냐는 설도 무성했는데.
  {내가 변호사 출신이고 신민당의 대표 선수 격으로 끌려왔으니 내 이름을 선전용으로 이용해서 김대중씨를 사형으로 몰고 가려 했던 것 아닌가 생각한다. 당시 현역의원으로는 신민당정책위의장이었던 나와 통일당의 김녹영부총재, 무소속의 예춘호 의원이 찍혔다}
  -이 사건이 전적으로 조작이란 말인가.
  {그렇다. 사전시나리오에 의한 음모였다. 수사관들은 자기들끼리 잡담할 때 전두환씨가 대통령이 될 거라면서, 잘된 일이라고 했다. 우릴 잡아간 게 5월17일인데 관련자들이 배후역할을 했다는 5·18은 그 뒤에 일어났다. 특히 내란음모만으로는 김대중씨를 사형으로까지 몰고갈 수 없을 것 같으니까 미리 한민통 관련으로 엮으려 한 것이다. 다시는 이런 정치공작이 없도록 해야 한다}
  -내란음모사건을 겪은 뒤 김대중씨와 관계가 그리 원만치는 못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나중에 김대중씨가 나의 처지를 이해해주셨기에 85년 신민당 사무총장직도 맡을 수 있었다. 이희호여사를 통해 진상이 전해진 것으로 알며 함세웅신부도 당시 상황을 전해준 것 같다. 김대중씨나 나는 모두 그 사건의 피해자다}
  이택돈씨의 이런 증언은 김대중씨가 대통령이 된 상황에 석연치 않았던 자신의 과거를 숨기기 위해 말을 바꾸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일으키는 것도 사실이다. 당시 이택돈 피고인의 변호인이었던 허경만 전남지사는 자신의 발언내용이 왜곡·과장돼 전파됐다는 이씨의 주장에 대해 {이씨는 자신에게 강요된 내용대로 법정에서 진술했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반박했다. 허지사는 {한민통 관계자들이 용공성이 있다는 식으로 이씨가 진술을 해서 내가 [누구누구를 그렇게 생각하는지 대보라]고 하니 말을 못하더라}면서 {이씨의 불분명한 자세 때문에 그의 변호인을 그만두었다}고 말했다.

이택돈씨의 석연찮은 법정 진술

  그러나 허지사도 이씨의 검찰진술 내용에 관해서는 {당시 수사기록을 확인해보았는데 이씨는 군 검찰부나 공판기일 전 증인신문에서 신문에 보도된 바와 같은 진술을 한 적이 없다}고 이씨의 주장을 인정했다. 허지사는 {그런데 이씨가 법정에서 느닷없이 이상한 얘기를 읊어대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다}고 수사당국의 조종 가능성을 제기했다.
  이씨와 함께 임시정부 수립을 계획했다는 등의 혐의로 재판을 받은 이신범(한나라당)의원도 {이택돈씨가 고문을 많이 받아 법정에서 석연치 않은 진술을 많이 한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의원은 {합수부는 공판기일 전 증인신문과 L씨의 자술서만으로 나를 주모자로 모는 등 몰아가기 수사를 많이 했다}면서 {이씨의 진술도 그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했다. 이신범 의원은 사건의 과장·왜곡의 한 사례로 {이택돈씨와 대화에서 그리스 등 다른 나라의 예를 들면서 독재한 사람들이 다시 정치 전면에 나서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얘기를 한 적은 있다}고 말한 뒤 {그러나 사형이니 숙청이니 하는 얘기는 꺼낸 적이 없다}고 했다.
  허지사나 이신범의원이 기억하는 이택돈씨의 [석연찮은 진술]에 관해 이택돈씨는 {당시 분리심리를 받아서 내가 법정에서 진술한 정확한 내용을 다른 피고인이나 국민들은 직접 들을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모든 것이 신군부 의도대로 발표되고 부풀려졌는데 같이 고생한사람들마저 당시에 전해들은 보도내용을 토대로 색안경을 끼고 자신을 보게 됐다는 것이다. 이신범의원도 이 점은 수긍했다. 이의원은 {당시 군사법원측은 공판조서를 우리가 진술한 것과 다르게 만들어놓고도 우리한테 열람을 시키지 않았다}고 말했다.
  실제 80년 9월2일 육본 계엄보통군법회의 13차 공판조서에 따르면 이택돈피고인은 변호사 김항석의 반대신문에 대한 답변을 통해 자신의 집에서 이신범의원과 만나 나눈 대화에 관해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누구를 처벌해야 한다는 일기는 없었고, 나치전범 얘기는 상식적 얘기이고 유신잔당과 연결하여 얘기한 것은 없다}
  이처럼 이택돈피고인이 법정에서 검찰 측 공소사실을 대부분 부인했는데도 실제는 이와 다르게 알려져 여론재판에 이용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변호인이었던 허경만 지사가 기억하는 이택돈 전의원의 법정진술이 잘못 입력된 것이라고 보기에는 상식적으로 무리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택돈 전의원의 법정진술이 과연 실제보다 과장·왜곡되어 전파됐느냐 하는 문제는 결국 재판기록 전체가 공개되면 가려질 일이다.

5백만원 시위자금 대줬나

  내란음모사건의 수사 및 재판과정에서 쟁점이 된 사항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첫째는 비합법적 투쟁을 통한 과도정권 수립을 목표로 조직적으로 내란을 음모했는가 하는 점이고, 둘째는 반국가단체인 재일 한민통 의장으로 활동했는가 하는 점이다.
  이에 관해 계엄사령부가 80년 7월4일 발표한 사건전모는 다음과 같다.
  {김대중 일당은 국민연합을 주축으로 하고 복학생을 행동대원으로 내세워 과도정권 수립을 투쟁목표로 비합법적 투쟁을 추구, 내란선동과 음모에까지 이르게 됐다. 김대중은 사조직확대와 복학생을 통한 학원데모 선동 조종에 사용할 자금출연을 위해 자신이 집권하게 되면 경제적 이권 혹은 정부요직이나 각종 중앙 및 지방요직을 주겠다는 약속과 국회의원 및 지방의원 공천을 약속하는 등의 수법으로 정치인 실업인 정치지망생들로부터 무려 12억원을 거둬 이중 3억원을 예춘호 등 정치인과 복학생, 일부 학생회장 등 추종자들에게 줘 학원소요조직 및 선동 광주사태 야기 등 목적에 사용토록 했다. 김대중은 5월 22일 정오를 기해 서울에서는 장충공원, 지방에서는 시청 앞 광장에서 [민주화촉진선언 국민대회]를 일제히 개최할 계획을 꾸몄다.
  김대중은 또한 반국가단체인 재일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 국민회의](한민통)를 발기, 조직 구성하여 그 수괴로 있으면서 북괴노선을 지지, 동조하는 등 반국가적 행위를 자행하고, 외국으로부터 반입한 외화를 불법소지, 사용했으며 계엄포고령을 공공연히 의도적으로 위반했다}
  이와 같은 계엄사의 발표내용은 공소장은 물론 판결문에서도 대부분 사실관계로 인정되어 김대중씨(사형)를 비롯한 관련 피고인들이 중형을 선고받는 토대가 되었다. 이런 혐의사실에 대해 김대중씨의 변호인이었던 허경만 전남지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란음모라는 것은 실체가 없는, 그야말로 [음모]에 의해 씌워진 누명에 불과하다. 먼저 공소요지 가운데 장기표씨가 학생 폭력 시위를 이용, 정권을 전복하고 과도정부를 수립하자는 제의를 하고 다른 피고인들이 이에 동조했다는 것은 상식에 어긋나는 일이다. 정치 종교 학계의 지도자들 모.임에서 한 복학생이 무도하고 황당한 내란을 제의하고 다른 사람들이 아무런 토론이나 이의 없이 동조한다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인가. 둘째, 비상계엄하에서 각목을 가진 학생들이 군·경과 대치하여 정부를 전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상식에  어긋나는 일이다. 셋째, 만일 폭력으로 정권을 탈취할 의견을 모았다면 군·경을 포섭하고 지지세력을 확보하려 했을 것인데 그런 증거는 재판과정 어디에서도 발견된 일이 없을 뿐 아니라 무기확보를 위해 노력했다는 얘기도 나온 바 없다. 넷째, 내란을 목적으로 자금을 살포했거나 살포계획을 세운 바가 없다. 다섯째, 내란을 음모했다면 실행시기를 정했을 터인데 그것이 분명치 않다. 군 검찰부는 5월 중순경 또는 5월22일을 그 시기로 지목한 것 같으나 5월22일은 국민연합의 제2국민선언문에 명시된 날짜다. 내란을 기도하면서 그 날짜를 알려 준다는 게 있을 수 있는 일인가}
  허지사의 주장 가운데 증거 유무를 둘러싸고 가장 뜨거운 논란을 빚어온 대목은 김대중씨가 소요사태를 배후조종하기 위해 시위자금을 제공했느냐 여부다. 예컨대 복학생 정동년에게 5백만원의 시위자금을 제공했는지 여부는 88년 광주청문회에서도 논란이 된 바 있다.
  청문회 당시 김대중 평민당총재는 {복학생 정동년은 광주사태가 한참 후인 85년 4월 동교동 자택에서 처음 만났을 뿐 80년 당시 만난 일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한 정동년씨의 청문회 진술내용은 이렇다.
  {광주사태 이전에 김대중씨를 만나 자금을 교부받았다는 합수부에서의 진술은 고문에 못이겨 합수부측이 날조한 대로 진술해 준 것이다. 당시 조사관들이 김대중씨로부터 돈을 받고 광주사건을 주모했다는 것을 인정하라면서 금액을 정하는 단계에서 [얼마로 정할까, 학생에게 1천만원을 주었다면 너무 많은 액수지. 그러니까 너는 5백만원을 받은 것이다. 잘 기억해둬라. 5백만원이다]라고 진술을 강요했다. 고문을 못이겨 합수부측이 날조한 대로 진술해 준 데 대해 가책을 느껴 후에 플라스틱 숟가락을 뾰족하게 갈아 동맥을 잘라 두 번씩 이나 자살을 기도했다}

안가에서의 김대중 설득

  그러나 기자가 입수한 80년 7월22일자 김대중피의자에 대한 군 검찰부의 신문조서에 따르면 김대중씨는 광주사건 이전에 정동년씨를 만난 사실과 정씨에게 5백만원을 제공한 사실을 시인하고 있다.
  {정동년은 1980년 4월13일 경 처음으로 본인 집을 찾아와 6·3사태 당시 제적당하여 복학한 정동년이라고 인사하기에 … 5월5일 19:50경 한국정치문화연구소장 김상현을 따라 방문하여 먼저 내실에서 김상현과 만났다. 김상현이 하는 말이 [정동년은 15년만에 복학한 전남대생으로 데모자금 5백만원을 요구하고 있는데 지원하여 주는 것이 어떠냐]고 하기에… 미리 김상현에게 3백만원을 준 다음 정동년을 불렀더니…}
  하지만 김대중씨는 광주청문회에서 이같은 진술조서가 강압과 회유에 의해 나온 것이라면서 [자백의 임의성]을 부인한 바 있다.
  {수사관이 폭언과 잠 안재우기에 이어 고문할 듯한 태도로 옷을 갈아입도록 지시하면서 [정동년씨나 김상현씨가 이미 자백을 하고 있다. 이것을 부인하시면 결국 그 사람들이 고통만 더 당한다]고 압박을 가했다. 용공으로 몰리는 것만 자백을 거부하고 이 부분(시위자금 교부)은 법정에 가서 진실을 말하겠다는 요량으로 시인했던 것 뿐이다}
  수사 및 재판 당시의 분위기를 짐작하게 하는 증언은 김대중씨 등 피고인들의 신병관리를 맡고 있던 군 고위관계자로부터도 들을 수 있었다.
  {80년 12월 무렵으로 기억된다. 김대중씨가 증앙정보부 안가에 이틀동안 불려갔다. 중정 관계자는 첫날 저녁무렵 김대중씨 설득을 시도했다. 이 사건은 당신이 한 것이며 당신이 조종한 것이니까 항소도 포기하고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얘기만 하면 다른 사람들은 다 풀어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김씨가 거부하니까 분위기가 나빠지더니 옷을 다 벗기고 불을 껐다. 그리고는 구석에서 구렁이가 나오는데 거기 감겨서 죽든지 말든지 모르겠다는 협박소리가 들린 뒤 문이 닫혔다. 한동안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이윽고 다시 불이 켜지고 사람이 들어왔다. 김씨는 비로소 식사를 제공받고 그곳에서 하루 묵은 뒤 육군교도소로 되돌아왔다}
  더 직접적이고 가혹한 고문을 당했다는 증언도 많다.
  당시 고려대 복학생으로 체포돼 재판을 받은 설훈 의원(국민회의)의 증언.
  {나는 재판정에서 [주범 김대중 선생의 얼굴을 처음으로 볼 수 있었다. 내가 이 사건의 공범으로 돼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된 것은 공소장을 받아보고 나서다. 따라서 이 사건은 전적으로 조작된 것이다. 예컨대 체포 후 몇 차례 수사책임자로 보이는 사람이 나를 자기 방으로 데려가더니 벽면전체를 덮은 큰 도표의 빈자리를 가리켰다. [저기 아무나 들어가면 된다. 사건이 다 만들어져 있으니 협조하라. 더 이상 고생할 필요가없지 않으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더 이상 도리가 없다고 생각해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다 해줬다. 심지어 나는 운전면허도 없었는데 당시 서울역 시위과정에서 누군가 버스를 들이 몰아 두 사람이 죽은 사건도 내가 했다고 자백하라고 했다. 이는 사형에 해당하는 혐의였지만 당장 목숨을 유지하는 일이 급했다. 그래서 내가 운전을 했다고 조서에 썼다. 당시 하도 고문을 많이 당해 유치장에 들어갈 때도 경찰이 업고 들어갔다. 러닝과 팬티는 모두 찢어져서 걸레가 돼 있었다. 그러나 공소기록에서는 그들도 나의 버스운전이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는지 관련진술이 빠져 있었다}
  설훈 의원은 이 사건을 계기로 85년 3월 동교동 비서로 입문, 현재 국민회의의 핵심요직인 기조위원장을 맡고 있다.
  이해찬 교육부장관은 {나의 경우는 뒤늦게 잡혀서 고문을 상대적으로 덜 당한 편}이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보다 먼저 잡힌 심재철(沈在哲)씨에게 내 지시를 받아 움직인 것처럼 진술을 강요, 조서를 받아놓고는 나를 거기에 두드려 맞추려 하다보니 앞뒤가 맞지 않는 게 많았다. 그래서 나도 많이 맞았다. 허벅지가 굳어져 엎드리지도 못하고 누워서 등으로 밀고 화장실에 가곤 했다}
  관련자들의 증언은 한마디로 합수부 측이 사건을 각본대로 짜맞추기 위해 고문을 자행했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광주사태 진압 후인 5월27일 긴급 편성된 수사국은 대공수사관이었던 H씨는 {체포된 사람들을 김대중을 수괴로 하는 폭도조직에 꿰맞추기 위해 최대한 김대중씨와 연계시키라는 당시 505보안부대 대공과장의 지시가 있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일본은 공소요지를 알고 있었다

  내란음모 대목 못지 않게 논란이 컸던 것은 김대중씨의 재일 한민통 관련, 즉 국가보안법상 반 국가단체 수괴 부분이다. 한민통이 특히 문제가 된 것은 77년 그 조직원인 곽동의가 북한을 방문한 사건 때문이었다. 또한 한민통은 73년에 민단-조총련과 국경일 공동행사를 추진하는 등 대공 당국으로부터 요주의 단체로 찍혀 있던 단체였다. 허경만지사는 김대중씨의 한민통 수괴 혐의와 관련, 이렇게 주장했다.
  {김대중씨가 73년 8월 일본에서 반국가 단체인 한민통 일본본부를 구성하여 그 수괴가 된 다음 수차례에 걸쳐 그 구성원과 통신을 하였다는 게 혐의 요지다. 그러나 김대중씨는 재일 한민통 결성을 논의하는 초기 단계에서 동경에서 납치돼 끌려들어 온 뒤 한민통 활동과 아무 관계가 없었다. 또 김대중씨와 한민통 결성을 논의했던 김재화는 대한민국 국회의원을 지낸 사람이고 배동호는 민단본부 상위의장을 지내는 등 반국가적 공산주의자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사람들이었다. 김대중씨는 또한 광복절 기념행사를 조총련과 공동으로 개최하자는 일부 인사들의 의견에 반대하는 등 의견대립을 빚다가 준비위원도 추천하지 못한 상태에서 귀국했다}
  한민통 관련 대목을 둘러싼 합수부측과 김대중씨 사이의 줄다리기는 한마디로 사활을 건 싸움이었다. 김대중씨는 88년 청문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군검찰부로 송치된 뒤 검찰관 정기용씨의 꾐에 빠졌다. 검찰관은 내게 말했다. [그렇게 부인하면 전부 피고에게 불리하다. 나는 이 국가보안법(한민통 관련) 적용은 말도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이 문제는 검찰부장인 내가 책임지고 적용시키지 않겠다. 나머지 문제(내란선동 등)는 다른 피고인들이 모두 시인했는데 여기서 다 부인하면 또 한번 정보부로 가서 당해야 한다. 그러니 여기서 시인하시고 법정에 가서 할 말을 하라]
  나는 그래서 검찰에서 얘기한 것은 증거 능력이 없고 법정에 가서 얘기하면 다 될 줄(뒤집어질 줄) 알고, 또 (내란선동 등은) 시인해도 사형까지는 가지 않으니까 시인했다. 한민통 관련 부분은 기소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검찰관 말을 들었다. 그러나 검찰관은 법정에서 안면을 바꾸었으며 내게 심하게 했다}
  김대중씨의 한민통 관련 부분은 재판 당시 한일간에 미묘한 외교문제까지 야기한 바 있다. 일본정부는 한국정부에 김대중씨 관련 재판기록을 도청, 한국정부가 이를 보내 주었는데 한민통 부분이 누락된 판결문을 보내준 것이다. 그런데 이 무렵 재판기록 가운데 피고인측이 갖고 있던 1부가 일본으로 유출됐다. 피고인 중 한 사람이었던 조성우씨가 보관하고 있던 것이었다.
  거기에는 한민통 대목이 실려 있었다. 일본측이 받아본 판결문과 비밀리에 입수한 판결문이 다른 것이다. 일본 중의원에서 {73년 합의에 의해 문제삼지 않기로 했던 한민통 부분을 왜 한국정부가 다시 문제삼았느냐}는 지적이 있었다. 일본정부는 한국정부에 항의를 해왔고 이 사건이 발생한 직후 피고인들은 갖고 있던 재판기록을 모두 압수당했다.
  그러나 한승헌 감사원장은 일본정부가 당초 김대중씨의 처벌내용에 한민통 관련 부분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것은 거짓말이라고 말했다.
  {재판 당시 서울에 있는 일본 대사관 1등 서기관이 내란 음모사건 재판 때마다 법정에 와서 방청을 했습니다. 그 사람은 한국말을 잘 알아듣는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일본측이 한민통 관련 부분이 포함돼 있던 공소사실 내용을 모르는 체하면서 [문서를 보내달라] [왜 누락시켰느냐]하는 것은 거짓이고 위선입니다. 일본정부가 애초에 진실을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딴전을 부린 것은 그냥 넘어가려는 속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법적 검증이냐, 역사적 판단의 문제냐

  이토록 많은 논란을 남긴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의 실체는 당사자들의 정치적 주장에 의해서가 아니라 철저한 사법적 검증을 통해 조명돼야 할 것이다. 물론 현재 정치 권력이 당사자로 돼 있는 이 사건에서 사법부가 과연 얼마나 중립성과 객관성을 지킬 수 있겠느냐는 것이 당시 재판관계자들이나 신군부측 시각이다. 그렇기 때문에 법조계에서는 이 사안을 단순히 법적 차원의 문제라기보다는 역사적 판단의 문제로 다루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내란음모 세력]의 개인적 [명예회복]차원을 넘어 정권의 역사적 정통성 문제와 직결돼 있는 사안이라는 점에서 재심청구 작업의 진전에 따라 현정권과 5공세력간의 긴장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

인터뷰 : 권정달 당시 보안사 정보처장

  -5월4일 시국수습방안 초안을(신군부) 지휘부에 보고하고 5월 12일 최종안을 전두환 대통령에 게 보고한 것으로 12·12, 5·18 재판기록에 나와 있다.  당시 시국수습방안을 논의하면서 정치인 체포 필요성이나 대상자 명단이 거론되지 않았나.
  {그런 이름이 구체적으로 거론된 바 없다. 다만 나라가 이렇게 어지러워서는 안 되고 이토록 나라를 어지럽히는 사람들에 대해 뭔가 대책이 있어야 한다는 정도의 얘기는 나온 것 같다.}
  -그런 필요성을 거론하다 보면 당연히 구체적인 [문제 정치인]들의 체포 필요성이나 혐의점 등도 검토해보았을 것 같은데….
  {시국수습방안은 뭔가 어지러운 나라를 추스려서 이 나라가 제대로 잘 가도록 하자는, 그야말로 수습책이다. 누구를 치고 하는 계획이 아니었다}
  -시국수습방안 문안은 당시 문관 윤두열씨에게 작성을 맡긴 것으로 아는데, 이후 어떻게 보관을 했나.
  {그런 것을 뭐하러 다 남기나. 나중에 정치적으로 시끄러워지고 공격받을 수 있을 텐데. 내가 전역하면서 당시 거의 모든 문서를 파쇄기로 파쇄한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그렇게 파쇄를 해도 엉뚱하게 어디서 뭔가 나오기도 한다. 이른바 K공작이란 게 그렇다. K공작이란 것은 당시 이상재씨가 언론인들도 만나고 뭔가 회유하려면 밥도 먹어야 하고 돈이 있어야 하니 돈 좀 달라고 하면서 소요내역을 써온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게 뭐 엄청난 쿠데타 문서인 것처럼 부각됐다. 시국수습방안이란 것도 그런 정도다"
  -5·18재판기록을 보면 이학봉 수사단장과 권처장이 함께 검거 대상자 명단을 작성한 것으로 돼 있던데.
  {나는 그런 작업에 관여할 위치가 아니었다. 다만 부정축재자들에 관한 정보를 정리, 문제 대상자들을 전달한 일은 있다. 그러나 그것은 내란음모사건 관련자들과 다르다}

이학봉 단장이 실무를 총지휘했다

  -그러나 법정기록에 따르면 당시 체포된 [학원소요 배후세력]등은 권의원과 이학봉 수사단장이 보안사가 갖고 있던 정보자료를 토대로 선정한 것으로 돼 있다. 당시 권의원께서는 보안 정보처장 아니었나.
  {물론 정보처의 정보보고 자료에는 5·17전에 김대중씨가 정동년 등 재야 학생운동권 인사들에게 돈을 제공한다는 정보가 들어와 있었다. 그러나 그 정보수준이라는 것이 내란음모를 파악할 정도의 체계적인 것은 아니었고 단편적인 정보들이었다}
  -그렇다면 당시 김대중씨의 사형선고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 반국가단체 수괴혐의 즉, [재일 한민통]관련 혐의는 어떻게 포착된 것인가.
  {한민통 관련부분은 중앙정보부 소관이었다. 그런 대공관련 사항은 보안사에서는 대공처 관할이었다.}
  -그렇다면 한민통 관련부분은 대공처가, 광주사태 배후조종 등 내란음모 혐의는 정보처가 혐의를 포착했다는 것인가.
  {아까 말했듯이 정보처는 무슨 내란음모니 하는 것을 보고할 만한 기능을 갖고 있지 않았다. 이학봉 합수부 수사단장(보안사 대공처장)이 검거대상자들의 명단 및 혐의 등을 관장했고 중정 수사국(김근수 국장)도 이를 도왔다. 정보처는 대공분야를 뺀 국내 민심동향이나 정국수습방안 등에 관한 정보를 수집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5월 12일 시국수습방안이 최종적으로 보고된 뒤 구체적인 체포대상 정치인 명단을 보고하고 전두환 합수본부장의 허가를 받은 것은 이학봉대공처장이란 말인가.
  {수사에 관해서는 이학봉 단장이 준비했고 실무를 총지휘한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총지휘는 당시 대통령이 한 것이다. 이른바 [국기문란사범]이란 것도 그렇다. 엄밀히 말하면 대통령이 재가를 한 것이다. 나는 12·12, 5·18와 관련해 검찰조사를 받을 때 검사한테 얘기한게 있다. 아니 자꾸 우리가 멋대로 했다고 하는 데, 쿠데타를 할 때 대통령한테 허락받고 하는 것도 있느냐고 말이다}
  -그러나 재판 결과 5·17당시 일련의 조치들이 군권을 정권장악으로 연결시키기 위한 의도에서 나온 것들로 규정되지 않았는가.
  {그것을 몰라서 하는 얘기가 아니다. (재판결과는) 당시 대통령의 허가가 대통령의 자유로운 판단과 능력이 유지되는 상황하에서 나온 것이냐를 문제삼은 것으로 안다. 물론 그런 면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으리라는 점을 인정한다. 때문에 12·12, 5·18재판에서는 따로 판단하지 않았지만 전체적으로 이른바 [신군부]의 행위들이 모두 내란을 구성하기 위한 요소들이라는 게 사법부 얘기 아닌가}
  -12·12, 5·18재판결과를 그렇게 해석하고 있다면 앞으로 사법부가 김대중내란음모 사건에 관해서도 판단해야 하는 상황이 올 경우 이를 무죄로 선언할 것으로 보는가. 당사자들은 지금 그런 판결 자체가 잘못된 것이니까. 재심청구를 통해 이를 바로잡겠다는 얘긴데….
  {그렇다면 법원이 알아서 판단하지 않겠는가, 그 사람들이 권력도 잡았으니까}
  -개인적으로 당시 상황에 대해 어떻게 보는가. 관련자들이 실제 내란의 예비음모를 했다고 보는가.
  {당시 상황을 보는 눈은 서로 다를 수 있다. 상황이 심각했고 그런 상황에 대한 우려와 사태수습을 걱정하는 시각이 있을 수 있었다. 다만 그 사람들이 내란을 계획했다는 것은 실제보다 좀 과장된 것 같다}

김대중 최후 진술 전문

"내가 죽더라도 민주주의는 실현될 것"

  [신동아]는 김대중대통령이 내란음모사건으로 군사법정에서 사형이 구형된 뒤 행한 최후진술 기록 사본을 전문 입수했다.
  군법회의 당국이 A4용지 25쪽 분량의 공판조서 용지에 기록한 김 대통령의 최후진술 원문에는 당시 살벌했던 상황과 김대통령의 최후심경은 물론 그의 정치관 인생관 종교관등이 생생히 담겨 있다. 최후진술 가운데는 특히 [정치보복 금지]와 [비폭력 저항주의]라는 김대롱령의 정치 신념이 강조돼 있다.
  {(나는) 일관해서 (일관되게) 정치보복반대와 정부와의 대화를 요청했음(습)니다. 그 점에 (있어서)는 지금도 소신이 바꾸어지지 않았습니다. 저의 성명에서도 유신잔당 처리에 대하여 생각해본 적이 없었읍(습)니다.
  … 내가 제일 두려워하는 것은 사회혼란이고 내가 제일 바라는 것은 선거였읍(습)니다. 세 김씨가 (대통령)물망 대상인데 내가 다른 사람보다 지지세력이 적다고는 생각 안 했고 선거를 순조롭게 하면 내가 집권을 하거나 4넌 후 집권을 위한 튼튼한 기반을 다질 수 있다고 생각했읍(습)니다.
  나는 일관해서 간디와 같은 비폭력 저항주의자입니다. 폭력으로 정권을 잡으려고 했다는 데 내 의견은 일관되게 다릅니다}
  김대통령은 자신의 공소사실과 관련해서도 한민통 관련 혐의나 내란혐의가 정치보복 차원에서 터무니없이 씌워진 누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납치사건으로) 귀국 후 해외활동의 모든 문제가 조사되고 외무부장관도 외국(에서)의 활동에 대하여 문제삼지 않는다고 신문에도 발표되었읍(습)니다. 그후 긴급조치 위반으로 재판도 받고 3∼4차 조사를 받았으나 이 문제로 단 한번도 조사되지 않았고 10·26사태 후 복권까지 되었는 데 다시 이것이 나타나서 나의 목숨을 빼앗아 가려고 하는 중대한 문제한 문제가 되고 있읍(습)니다. … 내란문제는 가슴이 아픕니다. 내란을 하려면 조직적인 움직임이 있어야 하는데 5월1일 우리 집에서 민주제도연구소 이사 취임 승낙서도 다 받지 못하고 두 번 만난 것뿐입니다. 아무리 죄와 벌을 받아도 내가 잘못이 있다고 납득이 가야 합니다}
  김대통령은 최후진술에서 자신의 사형집행을 각오한 듯 담담한 심경으로 한국의 민주주의에 대한 낙관적 전망과 함께 {모든 것을 용서하고 싶다}는 종교적 감상을 내비치기도 했다.
  {80년대에는 우리 국민이 자유 정의가 실현되는 민주주의가 세워져 (민주주의를 세우고) 우리 국민의 능력으로 통일이 되어 민주주의가 꽃필 것이라는 걸 확신합니다. 내가 죽더라도 국민의 선에서(손에 의해) 민주주의가 실현될 것입니다. 그것이 하루 빨리 오기를 바랍니다. 혼란과 격돌 없이 토론과 관용과 이해로 (문제를 해결하는) 민주주의가 올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