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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단죄 받아 마땅한 5공비리·광주학살의 주범들(국민신문, 1988. 12)

본문

시사특집

단죄받아 마땅한 5공비리·광주학살의 주범들


다시 나부껴라 [반민특위]의 깃발이여!



- 5공비리·광주학살 청문회를 보며 반민특위를 되돌아 본다

  5공비리와 광주학살은 법과 인륜에 따라 반드시 처리해야 할 문제로서 역사진보를 위한 최선의 합리적 방법이다…. 민정당과 일부 극우파 군인들은 간첩을 죽인 사진이 어떻게 광주애국동포를(?) 죽인 사진이냐며 광주시민의 죽은 모습은 결코 그런 모습이 아니라며 청문회 폐지론까지 떠들지만, 이러한 반동적 정세를 바라보는 국민의 눈에는 "반민특위의 재판(再版)"을 염려하는 빛이 역력하고 가슴속에서는 새로운 반민특위에 대한 깃발이 펄럭이고 있다.

사진을 보니 폭도들의 난동, 광주사태이던데요 ?

  전국 방방골골에서 5공비리 및 광주학살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단에 대한 여론이 들끊고 있다. 저마다 더이상 역사의 잘못된 전철을 되밟아서는 안된다고 아우성이다. 만신창이처럼 널브러진 5공과 6공의 추악한 모습에 분노를 뛰어 넘어 일어설 기세다. 과거를 덮어주자고 뇌까리는 군사정권의 주문같은 소리에 이제는 더 속을 수 없다며 주먹을 불끈 쥐기도 한다.
  그러나 국민들은 5공비리와 광주학살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단은 법과 인륜에 따라 반드시 처리해야 할 문제라고 입을 모은다. 또 군사독재가 떠드는 것처럼 역사의 단절은 결코 아니며 역사진보를 위한 최선의 합리적 방향임을 각인하고 있다. 따라서 국민들 사이엔 또다시 어물쩡하게 넘어갔다가는 민족사의 새로운 지평을 열기 위한 몸부림이었던 해방직후의 반민특위(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꼴이 될 지도 모른다는 우려와 자성의 소리 또한 점점 거세게 일고있다.
  세상 순리가 이러 한데 또다시 단죄받아 마땅한 역사진보의 앞길을 가로막고 훼방을 놓는 반동적 작태가 연출되고 있다. 미국에서 수입해온 청문회에서 드러나는 여·야 의원들의 꼬락서니와 그에 야합한 앵무새 언론들의 허깨비춤이 분탕질을 하고 있다. '모른다' '기억이 안난다'…는 등의 형식주의적인 청문회도 문제지만 정국주도권을 잡으려 교묘하게 퍼붓는 노정권의 사술이 더욱 분노케 한다. 평민당의 이해찬 의원이 제시한 사진을 놓고 민정당과 일부 극우파 군인들은 군의 명예와 사기를 저하시켰다고 청문회 폐지론을 떠들어댔다. "간첩으로 넘어온 빨갱이들을 죽였지(그들에게 북한 주민은 동포가 아니라 영원히 죽여 없앨 대상이다)광주시민을 사살한 사진은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에 노태우까지 발벗고 나섰다. 시중에 나도는 광주항쟁 관련 비디오나 잡지 사진 등 모든 자료가 고의적으로 조작한 것이라며 피냄새를 지우기 위한 정치공세를 펼치는 등 점점 본색을 드러내고 있다. 제시된 사진 한장이 잘못되었다며 [광주민주화 운동]을 [광주사태] [폭도들의 난동]으로 환치시키려는 음모를 노골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 다음엔 무엇이 올까?
  해방 이후 정국과 왜 유사하다. 오홍근 기자 테 러·우리마당 피습사건 등으로 좌-우익 논쟁을 유도하려 들더니 이제는 아예 막무가내식으로 덤빈다. 5공청산을 떠들면서 6공을 확대·강화하려는 솜씨가 반민특위를 와해시키던 독재자 선배들을 뺨친다. 시점이 시점이니만큼 역사적 성과물과 과오에 대한 올바른 검토와 계승은 당연하다. 최근의 반동적인 정세를 읽어가는 국민들의 열린 귀와 입과 눈은 민족사의 앞날을 걱정하는 빛이 역력하다. "반민특위"의 재판(再版)을 염려하는 빛이고, 그것을 막아야 한다는 구국의 소리가 높다.

반민특위-민족사 재창조의 신화

  반민특위는, 일제치하에서 해방된 민족으로서는 당연히 두들기고 건너야할 돌다리였다. 일제에 빌붙어 민족의식을 망각하고 오로지 개인의 영달을 위해 민족과 나라를 팔아먹고 아부·협력했던 민족반역자·친일파들을 제거하기 위한 반민특위의 발족은 민주적 새 질서를 건설하려는 시대적 요청에 따른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당연히 해방과 동시에 행해 졌어야 할 이 거족적인 작업은 3년여에 걸친 미군정당국의 방해로 저지되다가 48년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이란 비극을 확인하고서야 시작되었다.
  미군정당국이 한국민중의 주체적이고도 지극히 민주적인 요구를 짓밟고 내세운 이유는 가소롭게도 "한국에서 점령정책을 수행할 인재의 부족"이라는 식민지 침략근성이었다. 반만년 역사의 정통성을 간직해온 배달민족의 잠재력을 능욕한 것이다. 남한만의 단독선거(48. 5. 10)를 치루게 하고 점령군으로 침략해 온 미군정 당국이 저지른 행동은 일제에 빌붙어 동포를 죽이던 주구들을 재등용시킨 것이었다. 친일파·민족반역자·부일(附日)협력자 등의 모리간상배를 그대로 앉혀두고 미국의 입맛에 맞게끔 초치고 장친 것이다. 미국이란 온실 속에서 자라난 독재의 독버섯들은 남한의 현대사를 피로 물들였다.
  1948년 8월 5일 제헌국회 제40차 본회의는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한 친일부일협력자들을 처단하기 위한 법 제정을 둘러싸고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찼다. 이미 47년 7월 미군정하에서 구성된 과도정부입법의회에서 제정된 [민족반역자, 부일협력자, 모리간상배에 관한 특별법]이 미군정당국에 의해 공포되지 못했던 울분을 이제서야 토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날 본회의는 이미 제정·공포된 헌법 101조의 "이 헌법을 제정한 국회는 서기 1945년 8월 15일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는 조항에 의거 [반민족행위처벌법 기초특별위원회] 가결 심의를 거쳐 9월7일 59차 본회의에서 103 : 6으로 가결되어 9월22일 공포되었다. 공포된 법에 따라 설치된 반민족행위특별조사 위원회는 김상덕위원장외 9명의 위원과 특별재판부(김병로 대법원장)와 특별검찰부(권승렬 대검찰청장) 중앙사무국을 두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전민족의 의지로 표출되었던 반민법의 골자는 글귀 한자한자마다 독립국을 염원하는 피와 화약냄새가 진하게 묻어 있었다.
  ① 한·일합방에 적극 협력한 자, 한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조약 또는 문서에 조인한 자 및 모의한 자는 사형 또는 무기징역에 처하고 그 재산과 유산의 전부 또는 1/2이상을 몰수한다.
  ② 일본 정부로부터 작위를 받은 자, 또는 제국의회 의원이었던 자는 무기징역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고 그 재산과 유산의 전부 흑은 1/2이상 몰수.
  ③ 독립운동자나 그 가족을 악의로 살상·박해한 자 또는 이를 지휘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고 그 재산의 전부 흑은 일부를 몰수.
  ④ 작위를 받았거나, 책임관 이상의 관리, 밀정행위로 독립운동을 방해한 자, 독립을 방해할 목적으로 단체를 조직했거나 수뇌간부로 활동했던 자, 비행기 병기·탄약등 군수공업을 책임경영한 자, 관공리로서 그 직위를 악용 민족에게 해를 가한 악질적 죄적이 현저한 자, 종교·사회·문화·경제·기타 각 부문에 있어서 민족적인 정신과 신념을 배반하고 일본침략주의와 그 시책을 수행하는데 협력하기 위해 악질적인 반민족 언론·저작과 기타방법으로 지도한 자, 등은 10년 이하의 징역이나 15년 이하의 공민권을 정지하고 재산의 정부 흑은 일부를 몰수.

반민특위는 치안유지에 걸리적거린다

반민족행위처벌법 제정이 거론되자 대부분의 국민들은 전폭적인 지지와 성원을 보내며 하루속히 반민특위가 가동되기를 학수고대했다. 쏟아져 나온 성명서들은 '국가의 주권을 회복하는 성스러운 마당에 무엇보다도 귀중하고 필요한 것은 민족 정기의 앙양이므로 친일파 반역자 처단 법단은 관용과 자비에 치중할 것이 아니라 추상같은 방침이 필요하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실례로 45년 8월7일자 경향신문 논설은 '친일 민족반역자를 처단하는 법을 만들자는 말이 국회에서 나오게 되었는데 늦은 감이 없지 않다… 이 땅이 해방된 지 3년이 지난 오늘까지 왜정에 아부하여 조국을 팔아먹고 동포를 괴롭혔던 악질적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처단하라는 국민의 부르짖음은 무시된 채 관리로서 미군정 아래 구석구석 파고들어 앉았으며 중요한 산업부문에 뿌리박고 들어가 조금도 앙심의 가책을 받음이 없이 뻔뻔스럽게 활개치고 있지 않은가?… 이제 우리 손으로 뽑아 내세운 대변자 국회의원들이 문제를 들고나선 것을 쌍수를 들어 환영하며 문서상의 처단법에 그치지 말기를 부탁하는바다' 라고 질타하고 있다. 반면 이종형(대한일보사장) 같은 친일파들은 "소급법을 만들어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처단하려는 것은 공산당을 즐겁게 하는 처사"라고 억지주장을 늘어놓으며 친일 및 극우단체들을 충동질하여 관제데모를 하기도 했다.
  특히 이승만과 한민당은 자기의 정치세력을 구축하기 위해 온갖 방해공작을 펼쳤다. 친일관료들을 거느린 이승만으로서는 당연했을 것이다. 반민법실시에 대하여란 담화문에서 이승만은 "…기왕에 범죄가 있는 것을 들춰내서 함부로 잡아들이는 것은 치안확보상 온당치 못한 일"이라며 반민특위활동을 헌법위반 운운하더니 "어떤 법이라도 전국치안에 관계 될 때에는 임시로 정지함이 마땅하다"는 억측을 담은 담화문에서 민족적 의지에 정면도전하고 나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민특위는 굽힘없이 활동을 전개한다. 국회는 물론 사법부, 반민특위는 한결같이 이승만과 친일파들의 반동을 뚫고 민족주체성을 살리는데 혼심을 기울였다. 이에 이승만 일파는 갖가지 중상 모략(반민특위 위원들을 친일파로 모함하고, 신상조사를 하여 투서를 보내는 등), 테러(반민특위 강원도지부 조사부장 김우종에 대한 총기오발을 가장한 암살음모), 반민특위요원 암살음모(전 서울시경 수사과장 노덕술 등은 직업테러리스트 백민태를 고용하여 특별재판부 김병로 재판장외 14명을 죽이려 함)등을 끊임없이 획책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반민특위를 경찰이 습격한 6·6사건을 계기로 민족주체성을 일으켜 세우겠다던 반민특위의 성스러운 깃발은 갈기갈기 찢겨지고 친일·반동모리배들이 이 땅을 지배하고 말았다. 6·6반민특위 기습사건은 극우 유령단체들이 반민특위를 헐뜯고 체포된 친일분자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사주한 서울시경 사찰과장 최운하, 종로서 사찰주임 조웅선등을 반민특위가 전격구속한데 불만을 품은 경찰과 이승만의 반민족적 쿠데타였다.
  결국 반민특위 기습사건은 반민특위 활동을 극도로 약화시켰고 반민특위 내부에 회의론을 불러일으켰다. 이틈을 타고 친일파들을 다시 기승을 부리며 반민법의 공소시효를 48년 8월31일까지로 앞당긴다는 개정안을 통과시키고 새로운 특위위원을 구성하여 반민특위는 활동 1년여의 짧은 생애를 마치고 말았다(49. 9. 22). 총 682건을 취급하였으나 실제로 처형받은 숫자는 불과 10여 명(박흥식, 최 린, 김태석, 김연수, 이광수, 최남선 등), 그나마 이들도 모두 풀려 나고 말아 당초의 의지는 하나도 영글지 못한채 반민특위는 민족사 천추의 한으로 남고 사라졌다.

  5공특위, 광주특위는 '좌초된 반민특위'가 되어서는 안된다.

  지난 11월 26일 노태우는 전두환이 5공비리·광주학살문제에 대해 사과·해명을 할만큼 했으니 용서해주자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친애하는 국민여러분'으로 시작된 이 담화문에서 노태우는 "언제까지 과거에 얽매어 있어야 합니까. 지난 날의 문제로 안정이 깨어질 때 어느 누구에게 이로움이 있겠읍니까?"라며 과거를 덮어둬야 한다고 했다. 흡사 협박조의 주장이다. 40년전 이승만의 반민족적 담화문에 비해 하나도 손색이 없다. 해묵은 탄압수단인 이념공세로 국민의지를 꺾으려는 노정권의 임기응변은 오히려 고색창연하기까지 해보인다.
  백담사로 가는 길목은 일찌감치 봉쇄됐다. 전씨부부가 살던 연희동 저택은 여전히 국민세금으로 무장한 전경들이 수비하고 있다. 광주학살 사진은 거짓이라며 일부 공수특전 제대용사( ? )들을 규합하여 관제데모, 농성까지 하고 전화부대까지 편성하여 [광주시민은 폭도]라고 떠들고 제도언론을 동원 여론조작에 날뛰는 노정권의 신출귀몰하는 정치사술은 언제까지 갈 것인가? 아마도 노정권은 빨리 정기국회가 끝이 나서 청문회도 식고 국민들이 세밑 분위기에나 젖어 홍청거리기를 바랄 지도 모른다. 노정권은 반민특위의 특별재판부나 특별검찰부가 없는 것을 퍽 다행으로 여기고 있는 것 같다. 일부 야당의원들도 덩달아 비실거린다.
그러나 이런 세태를 바라보는 국민들은 다가오는 세밑보다 부정선거, 구로학살 1주기를 먼저 떠올리고 반민특위의 추상같던 역사성을 쓰다듬는다. 살아남아 또다른 민족반역을 저지르고 있는 80년대 민족반역자들의 구역질나는 모습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가슴속엔 새로운 반민특위의 깃발이 펄럭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