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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광주사태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장을병(신동아, 1985. 7)

본문

광주사태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장 을 병<성균관대 사회대 교수·정치학>

「광주사태」에 대한 루머의 발생은 정부가 사태를 터부시하면서 되도록 언급을 피하려 한데서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정부발표가 사실이라면 왜 진상조사 제의에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느냐는 의문이 그것이다.

<한맺힘과 한풀이의 악순환>

  십수년전 필자는 프랑스 정부론을 강의한 일이 있었다. 그 강의 중에 유혈사태로 점철된 프랑스의 현대사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었다. 1789년의 대혁명 과정에서 빚어진 유혈사태는 물론 19세기 중반에 들어와서 두 번에 걸쳐(1848년 6월과 1871년 2월) 행해졌던 유혈사태들도 보통의 사건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러한 유혈사태들은 그 사건의 규모나 참상 자체도 끔찍한 것이었지만, 그것들이 후세 프랑스 정치에 미친 영향도 가혹하고 집요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관심이 쏠렸다. 두 번에 걸친 유혈사태의 과정에서 맺힌 한과 응어리가 쉽사리 풀리지 않아 후세의 정치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고 곧잘 복사판으로 재현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이런 한과 응어리를 풀어서 현실정치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를 없애려는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성과는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당시 [빅토르 위고]와 같은 양심적인 지성인들은 유형사태로 희생된 사람들의 영혼을 달래보려고 꽃을 들고 그들의 무덤을 찾기고 했지만 즉각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까지는 아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상처를 아물게 만드는 데 1세기에 가까운 시간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세월이 약이겠지]하고 무작정 기다린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중엽에 찢기운 프랑스의 상처는 [드골]이 이끈 레지스탕스운동과 그것으로 되찾은 [프랑스의 영광]으로 비로소 아물 수 있었다고 한다.
  필자는 프랑스 정부론 시간에 이러한 사실들을 설명하면서 {운동경기와 역사는 결코 같아서는 안된다}고 강조한 기억이 있다. 즉 운동경기에 있어서는 승자와 패자가 확연히 구분되는 것이 바람직스럽고, 무엇보다 관객의 입장에서 승자와 패자로 갈라지는 것이 속 시원할 수도 있지만 역사는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예로서 권투시합의 경우, KO로 승패가 명확히 갈라져야 기분도 후련해지고 판정에 따르기 쉬운 시답잖은 군말도 없어지겠지만, 인간의 역사는 이와 같아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만일 승자와 패자가 확연히 구분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오해이자 위험천만한 사고방식이 아닐 수 없다. 역사로 기록되는 인간들의 투쟁은 일방적인 승자와 일방적인 패자 없이 국민들의 판정으로 결판이 나던가, 아니면 승자와 패자의 구분없이 타협으로 매듭지워지는 것이 가장 바람직스럽기 때문이다. 승자와 패자가 확연히 구별지워지면, 승자편은 만족스럽고 기쁠지 모르지만, 패자편은 그 패배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은 물론이다. 더욱이 불공평하고 부당하게 벌어진 싸움에서 패자편은 희생의 폭이 넓고 상처가 깊다면, 그들 마음속에는 한이 맺히고 응어리가 질 따름이다. 이런 한과 응어리는 역사의 상처로 남아 그 한과 응어리를 풀 수 있는 복수의 기회를 엿보게 만든다. 이렇게 된다면 인간의 역사는 한 맺힘과 한 풀이가 교대하는 악순환을 거듭할 가능성이 생긴다.

광주사태, 루머발생의 요인 갖춰

  필자가 1980년 5월의 광주[사태]를 간접적으로나마 전해 듣고 보았을 때 우선 쓰린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광주시민들이 우리 나라의 국시인 자유민주주의 실현을 외치다가 [불순세력의 조종을 받은 폭도]로 낙인찍힌 것인지, 아니면 국기가 흔들리는 위험한 상황에서 구국의 차원에서 [사태해결]이 된 것인지를 당장 헤아리지는 않는다 해도 좀더 마음을 트고 대화를 시도했더라면 타협의 여지가 없지도 않았을텐데 과도한 희생을 초래한 것에 대해서 유감이 아닐 수 없었고, 꼭 그렇게 밖에는 해결할 수 없었나에 대해 정부당국의 대응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광주사태]는 그 원인을 따지지 않고서라도 인간의 역사에서는 기필코 막아야 할 유혈사태를 빚어냈다는 데서 불행한 현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타협으로 마무리 지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불행한 결말이었으며, 사태를 마무리 짓는 과정에 과도한 힘의 행사로 희생의 폭을 넓혔고 상처를 깊게 만든 것 같은 인상을 준 것도 불행한 일이었다.
  그리고 광주사태를 마무리짓는 과정에서 빚어진 유혈참상에 대해서는 당시 계엄하에서의 통제된 언론을 통해 공식적으로 밝혀진 사실과 당국의 눈초리를 피해 암암리에 나돌았던 풍문과는 너무나 현격한 거리감이 있었기에 직접적으로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로서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광주사태에 대한 언급은 유언비어의 날조 내지 유포로 물리기 십상이었기에 직접적인 체험자들조차 언급을 회피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오히려 이들 스스로 입을 막는 경우까지 있었다. 이럴 경우 사태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스스로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광주사태는 풍문이나 루머가 번창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사태 자체도 1주일 이상 외부와 차단된 상황에서 빚어진 데다, 사태에 관한 보도가 정부당국이 발표한 일방적인 내용이었기 때문에 풍문으로 떠도는 얘기를 확인할 방도가 별로 없었다. 풍문이나 루머가 번창할 수 있는 최적한 조건이 아닐 수 없었다.

<진실의 호도와 [진실성]루머의 발생>

  풍문은 대개 전시나 사변으로 공식적인 언로가 차단될 때 더욱 창궐하는데, 대체로 진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는 것이 속성이다. 그런데 1970년대 중반 이후부터 우리 나라에는 풍문과 루머가 전례 없이 많이 발생했고, 그 영향 또한 심대할 정도였다. 당시 우리 나라에서 루머가 그렇듯 번창했던 것은 유신체제의 억업하에서 체제를 비판하는 언동을 일체 차단했던 탓이었다.
  바로 이 때문에 유신체제를 둘러싼 루머가 수 없이 만들어졌고 끊임없이 유포되었던 것이다. 1970년 후반에 우리 나라에서 번창했던 루머는 다른 루머와는 달리 허무맹랑한 것이 아니라 상당수가 진실로 밝혀졌다는데 특징이 있었다. 루머가 단순한 루머가 아니라 [유비통신] 내지 [카더라방송]이란 속어가 의미하는 것처럼 일종의 [언론]으로 격상하기도 했던 것이다.
  1970년대 후반 우리 나라의 루머가 상당수 진실로 밝혀졌다는 사실은 결국 루머를 루머로 몰아치면서 부인하려고 했던 정부의 발표나, 감춰진 진실을 밝히지 못하고 [통제된] 언론의 보도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도를 하락시킨 결과를 빚어냈다. 국민들의 공식적인 언론에 대한 불신과 루머에 대한 상대적 신뢰가 1970년대 후반 우리네 정치적인 상황의 특색이었고, 불안정의 큰 원인이었다.
  1980년에 접어들면서 소위 [서울의 봄]이 오면서 얼어붙었던 언로가 트이면서 루머의 발생소지는 없어지는 듯 했다.
  그러나 1980년 5월17일 비상계엄의 전국적인 확대를 계기로 언로는 또 다시 얼어붙기 시작했다. 언로가 얼어붙고 공식적인 언론이 정부의 의견만을 발표하는 [게시판]으로 되돌아갔다고 판단되자, 국민들은 다른 언로를 찾기에 이르렀고 이러한 요구에 순응해서 숱한 루머들이 고개를 쳐들고 나타나기 시작했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광주사태가 빚어졌다. 광주는 1주일 이상 외부와 차단되어 있었고, 전시를 방불케 하는 살벌한 분위기에 휩싸였기 때문에 루머가 발생하고 번창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들이 갖추어진 셈이었다.

잔혹행위와 희생자에 대한 루머

  그런데 오늘날의 루머가 지난날의 루머에 비해 신빙성을 갖게 되는 데는 그 나름의 이유들이 있는 것 같다. 우선 지난날의 사회구조는 단세포적이었는데 비해 오늘날의 사회구조는 복합적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외부세계와의 관계도 다면적인 연결을 맺게 마련이다. 더욱이 지난날의 사회는 고립적이고 폐쇄적이었는데 비해 오늘날의 사회는 상호의존적이고 개방적이다. 심지어 [지구촌]이라고 일컬어질만큼 상호의존적이고 개방적인 시대이다.
  요컨대 현대사회는 외부세계와 다면접촉의 관계이고, 공개적으로 노출될 수밖에 없는 상태이므로 제 아무리 철통같은 통제를 가하더라도 정보의 유출입을 온통 막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더욱이 커뮤니케이션의 기술발달은 현장의 상황을 쉽사리 취재해서 재생시킬 수 있다. 설사 현대사회에 있어서 인위적인 정보통제를 가하더라도 현대사회 자체가 외부세계와 다면접촉의 관계를 맺고 있어서 정보는 유출되게 마련이고, 커뮤니케이션의 기술발달로 정보의 유입 내지 환류현상은 일어나게 마련이다. 따라서 현대사회에서 발생하고 번창하는 루머는 지난날의 풍문과는 달리 통제에서 벗어난 일정한 정보를 토대로 삼고 있기에 진실로 밝혀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광주사태를 중심으로 발생해서 유포된 루머들은 주로 희생자들의 수와 잔혹행위를 중심으로 한 것들이었다. 정부는 광주사태로 인한 사망자수를 1백91명이라고 거듭 밝히고 있는데, 이 숫자는 소위 [광주사태를 아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숫자와는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더욱이 일반 국민들의 회의를 불러일으킨 것은 정부가 광주사태를 터부시하면서 되도록 언급을 회피하려 한데도 큰 원인이 있었다고 보여진다. 정부의 발표가 사실이라면 무엇 때문에 진상조사 제의에 대해 소극적이거나 기피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광주사태에 관한 진상조사제의에 기피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정부의 태도로 인해 국민들의 회의는 부풀어만 갔고 루머를 사실로 받아들이는 경향까지 나타나는 현상을 초래한 것 같다.
  새로운 정치체제가 출범한 직후부터 소위 민주화 추진세력 내지 재야세력들은 광주사태에 관한 진상규명을 요구했고, 그들은 그 진상이 규명되지 않는 한 새로운 정치체제의 도덕성과 정당성에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는 태도를 취해 왔다.
  급기야 1985년의 2월 총선거에서는 광주사태의 진상조사문제가 핫이슈로 부각했고, 새로운 국회의 개원과 더불어 그 문제는 일차적으로 규명되어야 할 과제로 제기되기에 이르렀다.

야당의 공격과 통계의 [誤記]

  신민당은 [광주사태 진상조사를 위한 국정조사 결의안]을 국회에 상정하면서, {광주사태는 1980년 5월18일 발생한 민족사의 대오점이다. 그 진실이 정치인들, 특히 애국적 의원 여러분들의 손에 의해 사실대로 밝혀졌으면 하는 충정에서 광주사태 진상조사를 위한 국정조사 결의안을 제안한다}고 했다. 또 {광주사태는 그 동기와 실상에서 국민과 정부간에 너무나 큰 시각의 차이를 갖고 있으면서 발생 5년을 맞았다}고 전제하면서, {사회의 안정과 민주화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 또 유언비어와 불신풍조를 없애기 위해서는 광주사태의 발생원인과 피해자의 숫자가 정확히 밝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정부측은 [광주사태전모]를 밝히는 보고에서, {광주사태로 인한 사망자수는 1백91명이었으며, 신분별로는 민간인 1백64명, 군인 23명, 경찰관 4명이었고, 부상자는 중상 1백22명, 경상 7백30명이었다}고 하면서 5년 전의 발표를 재확인했다. 그리고 광주사태 사망자가 2천여 명이나 된다는 유언비어가 사실이 아니라는 이유로서는, 첫째로 사태수습 후 10일간에 걸쳐 신고소를 설치하여 신고를 접수했으나 민간인 사망자 1백64명 이외에 더 신고된 사실이 없었고, 둘째로 의사 변호사 검사 군검찰관 민간대표들로 구성된 검안소 49명에 의해 확인된 숫자이며, 셋째로 광주시청에서 사망자 1명당 위로금 1천4백30만원씩을 지급했으나 더 이상 신고자가 없었고, 넷째로 사건 발생 후 현재까지 5년이 경과했으나 유족 친지 민권단체 등으로부터 추가적인 신고가 전혀 없었던 점 등을 들었다. 덧붙여 정부는 {민간인 사망자가 1백64명 이외에 더 있다면 언제든지 정부나 국회 각 정당 각 언론기관 종교단체 사회·인권단체 등 어디에라도 신고해 줄 것을 바란다}고 했다.
  국회의 질의 답변에서는 광주사태로 인한 사망자수가 초점이었는데, 여당측이 {무엇 때문에 정부발표를 믿지 않고 국정조사권을 발동해야 하는가}라고 묻자, 야당에서는 {예를 들면, 광주시가 공식발표한 인구이동상황 통계에 광주시 사망자수가 1980년도 월 평균 1백50명-2백50명이었으나 광주사태가 있은 다음인 6월에는 2천6백27명이라고 한 엄청난 숫자가 나와 있기 때문이다}고 응수했다. 또 이에 대해 여당의 한 의원은 {현재 본인이 수집한 통계에 의하면 경제기획원 컴퓨터자료는 1980년 6월 광주시 사망자가 2백36명으로 나와 있으며, 전남통계연보에는 2백3명으로 나와있다}고 했고, 내무부의 한 관계자는 {광주시가 발행한 통계연보의 주민등록에 의한 인구이동중 6월 중 사망자가 2천6백27명은 바로 옆란의 증가숫자가 착오로 오기된 것이며, 실제 사망자수는 2백36명}이라고 밝혔다.([동아일보] 1985.6. 5) 이렇듯 문제된 통계가 오기에 의한 착오라고 하는 해명은 기존의 의문을  더하게 만들면 만들었지 의문을 해소하는데 도움을 줄 수는 없었다. 더욱이 야당의 한 의원이 {1973년부터 1983년까지 10년간 광주시의 인구추이는 연평균 4.3% 증가를 보였는데, 1980년만 유독 0.6%의 감소를 보인 까닭은 어디에 있느냐}는 질의에 대한 해답은 아직 들은 바가 없다.
  요컨대 진실은 밝혀져야 한다고 보며 또 언젠가는 밝혀지게 마련이라고 믿는데, 일부 사람들은 앞서 발표된 사실을 뒤엎을 수 없는 상황에서 그것을 굳이 뒤엎으려고 들면 뜻하지 않는 부작용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하기도 한다.
  그러나 진상이 명확히 가려지지 않음으로써 악성루머가 번창하도록 만드는 현상보다는 이러한 부작용이 덜 심각하리라고 본다. 더욱이 우리 나라의 현실정치는 제도권의 안팎으로 갈라져 있고, 모든 국민들은 제도권 안으로 정치문제들이 수렴되어 가기를 바라고 있다. 이러한 때 국회에 [광주사태 진상조사를 위한 국정조사 결의안]이 기왕 제기되었으니, 민의의 전당인 국회의 손으로 그 진상이 속시원히 밝혀졌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정부·여당의 경우 광주사태의 진상조사가 사실구명의 차원보다는 정략적 차원에서 야당이 제기한 것으로 보는 것 같은데, 광주사태를 중심으로 한 루머의 해소와 쓸데없는 국력의 낭비를 막기 위해서 국정조사에 응하는 것이 좋으리라는 사견이다.

<터부와 비판기능의 위축>

  우리네 정치에는 터부가 너무 많은 것 같다. 터부란 신성불가침의 것, 말하자면 누구도 들출 수 없는 성역, 또는 누구도 건드려서는 안되는 [위방]이라는 것이다. 백성들을 다스리면 그만이지 알게 만들 필요가 없다고 여겨졌던 절대군주제 하에서는 정치란 온통 터부시되어, 백성들로서는 [오불관언] 혹은 [위방불입]으로 여겨지기까지 했다.
  백성들이 잘못 관여하거나 참여했다가는 큰 코 다치거나 처참한 몰골이 되기 십상이었다. 따라서 백성들은 정치를 성역 아니면 위방으로 보아 터부시했던 것이다.
  그러나 절대군주제가 무너지자 성역은 허물어졌고, 정치는 위험한 곳이 아니라 들어가 볼만한 곳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정치의 민주화란 바로 국민들로서는 성역의 철폐 내지 위방의 해제였다. 오히려 국민들은 마음대로 들을 수도 있고 또 보고 들은 내용을 말할 수도 있어야만 나라의 주인으로서 행세를 할 수 있었다. 한 나라의 민주정치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느냐를 재는 하나의 척도는 그 나라의 성역이 얼마만큼 철폐되었고 위방이 얼마나 해제되었느냐에서 찾아질 수 있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서는 아직도 정치의 성역이 너무 넓고 정치의 위방이 너무 많다. 국민들이 들어가서 살필 수 없게 만든 방책이 너무나 넓게 처져있고, 잘못 알고 지껄이다가는 낭패보는 일들이 너무나 흔하게 널려 있는 것 같다. 그것도 지난날처럼 [인의 장막]과 카리스마로 방책을 두른 허술한 것이 아니다.
  1970년대 이후에는 제도적 장치로 둘러친 공고한 성역이 있는가 하면 여러 곳에 건드릴 수 없는 위방도 설치하고 있다. 특히 [이것을 건드리면 낭패본다]는 정치의 위방들이 너무나 많다. 광주사태도 바로 이러한 정치의 위방들 중의 하나였다.
  광주사태는 우리네 민족사의 한 오점이었고 비극적인 상처였음이 분명하다. 광주사태가 민족사의 오점이자 아픈 상처임은 오늘의 집권세력도 함께 인정하고 있는 바다. 그리고 이러한 민족사의 오점이 가셔지고 상처가 아물기를 바라는 마음도 여·야간에 엄청난 차이를 드러내고 있는 것 같다.
  여당은 아픈 상처를 다시 들춰내어 상처의 부위를 넓히고 아픔을 되새기게 만들 필요가 없지 않느냐는, 이른바 덮어두기 작전이고, 야당은 제아무리 아픈 상처라고 해도 그 근원을 밝히고 아직도 진단이 올바로 내려지고 있지 않다면 올바른 진단을 내려보자는 재진단작전이다.
  우리 나라 속담에 {병은 널리 알리라}는 말이 있다. 이 속담은 병을 남에게 알리지 않고 혼자 고심하다 보면 처방이나 치료약을 구할 길이 없어지는 데 반해, 설사 남에게 알리기 민망스러운 병도 알리다 보면 뜻하지 않게 처방과 치료약을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혀주고 있다. 실상 난치병일수록 여러 의사들에게 진찰받아 볼 필요가 있다.
  광주사태라고 하는 깊은 이 상처를 덮어두고 약물만 쓸 것이 아니라, 재수술하는 마음으로 샅샅이 들춰내어 올바른 진단부터 내리는 것도 사태의 완전한 해결을 위해 필요할 것 같다. 올바른 진단이 내려졌을 때, 비로소 처방과 약물이 필요해지리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인간 세상사의 이치는 매일반이어서 사람들이 저지른 잘못을 덮어두려고 하면 그 잘못은 쉽사리 되풀이되고, 때로는 확대재생산되는 수도 없지 않다. 잘못을 은폐하기 위해 성역으로 방비하고 위방으로 설정한다고 해도, 그것은 일시적인 미봉책일 뿐이며 반복되고 확대재생산되는 과정은 멈추질 않는다.

정치의 [성역] [위방]없어져야 나라 발전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고 확대재생산하지 않게 만들 최선의 방법은 잘못이 저질러지면 즉각 고백하거나 시인해서 시정할 방책을 구하는 일이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미안하고 쑥스러워 잘못을 고백하거나 시인하기 어려울지 모르지만, 그렇게 하는데서 참다운 용기있는 사람이 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인간은 신이 아니기에 불완전하고 잘못을 저지를 수가 있게 마련이다. 잘못을 저지를 가능성을 안고 있다는 면에서도 인간들은 평등한 존재이다. 그런데 인간들의 어질고 교활함의 차이나, 현명하고 어리석음의 차이는 잘못을 저지른다는 면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저지른 잘못을 고백(혹은 시인)하느냐 않느냐의 사실 여부에서 드러난다고 보여진다. 인간이 잘못을 저지른 후에 고백하지 않거나 시인하지 않으면, 그는 교활하고 어리석은 인간이며 발전성이 없는 인간이다.
  인간의 발전이란 잘못을 저질렀을 때 그것을 고백하거나 시인함으로써 시정책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이룩되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적인 속성은 사회생활이나 정치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 같다. 어떤 나라가 성역을 설정하고 위방을 설치해서 잘못된 일을 감싸고 건드리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그 잘못을 은폐하려고 들면, 그 나라는 잘못을 되풀이하거나 확대재생산하게 마련이어서 한치의 발전도 이룩할 수가 없다. 정치의 성역을 철폐하고 위방을 해제해서 모든 국민들이 정치현상을 보고 듣고 알 수 있게 만들 때 그들의 정치참여는 뜻을 지닐 수 있고, 그들 중에서 비판 세력이 출현해서 정치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고 시정을 촉구하는 구실을 맡을 수 있다. 또 이러한 비판세력에 의한 자기수정의 메카니즘을 통해 무궁한 발전을 기약할 수 있다. 요컨대 정치의 성역을 철폐하고 위방을 해제해서 국민으로 하여금 보고 듣고 말할 수 있게 할 때, 민주정치는 올바로 실현될 수 있고 나라의 발전도 기약할 수 있다는 것이다.

<힘의 경제와 부정의 교훈>

  우리 나라 속담에 {맞은 사람은 다리 펴고 자고, 때린 사람은 다리 오무리고 잔다}는 말이 있다. 맞은 사람의 경우 맞을 때는 괴롭고 분통 터질 지경이고, 때린 사람의 경우 때릴 때는 즐겁고 속 시원했을지 모르지만, 짧은 기간의 육체의 고통과 긴 세월의 정신적인 고통을 견주어 보면 오히려 짧은 기간의 육체적인 고통이 훨씬 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는 의미이다.
  때로는 뻔뻔스러운 사람들도 있어서 남을 필요 이상으로 때려 놓고도 마음의 고통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필자도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는데, 수년 전 불행했던 시기에 피해자인 필자가 화해를 청하는데도 가해자가 응하지 못하고 오히려 화를 내는 것이었다. 그만큼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 같았다.
  여기서 [힘의 경제]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경제란 상식선에서 풀이한다면 재화의 생산과 분배를 뜻하기도 하지만, 재화의 절약을 뜻하기도 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경제가 재화의 절약을 뜻한다고 보면, 무엇보다 강조하고 싶은 것이 [힘의 경제]라고 하겠다. 경제를 재화의 절약으로 보면 그것은 미래를 위한 일인데, 힘의 경제를 강조하는 것도 미래를 위해서이다.
  미래를 고려하지 않고 재화를 마구잡이로 쓰는 것이 재화의 낭비라고 하면 힘을 아끼지 않고 함부로 쓰는 것은 힘의 남용이라고 하겠다.
  이렇듯 재화와 힘은 절약하고 아끼는 경제원칙에 따라야 하는 면에서 궤도를 함께 하고 있다. 재화를 마구잡이로 쓸 때 쾌감을 느낄지는 모르지만 곧 후회가 뒤따르듯이 힘도 함부로 쓸 때는 후련함을 느낄지 모르지만 후회를 되씹게 마련이다. 오히려 힘을 아끼고 경제하지 않음으로써 되씹는 후회는 재화를 마구잡이로 써서 느끼는 후회보다 몇 곱절이나 더 심할는지 모른다.
  예전처럼 정치에 있어서 힘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들이 자각하기 이전에는 제 아무리 힘이 남용되더라도 별 탈이 없었다.
  그러나 현재는, 말하자면 힘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들이 자각을 해서 힘의 행사가 정당한가 또는 남용되지는 않는가를 따지고 힘의 원천이 그들 스스로에 있다고 믿는 판세에 이르러서는, 제 아무리 강력한 힘이 주어져 있더라도 그 힘을 절도있게 쓰고 경제할 줄 알아야 한다.
  정치에 있어서 다스리는 자에게 힘을 안겨주면서 그로 하여금 힘을 아껴쓰도록 당부하고도 또 견제장치를 마련하고 있는 정치제도가 다름 아닌 민주주의다. 바로 민주주의는 힘의 경제를 바탕으로 삼고 있는 정치제도라고 하겠다.
  따지고 보면 광주사태의 원인은 힘의 경제를 깊이 생각하지 않고 힘을 행사했던 데도 한 원인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제 아무리 공공질서의 유지가 다급했고 불순세력의 개입의 위험성이 있었다고 해도 다스림을 위임받은 공복이 다스림을 위탁한 주권자에게 그토록 힘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인가를 되새겨 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광주사태가 힘의 경제를 망각하고 힘을 과잉행사함으로써 빚어진 것으로 판단하는 사람들에게는 힘을 과잉행사한 사람들의 도덕성의 문제만이 아니라 힘의 행사에 대한 정당성의 보다 더 구체적인 기준이 마련되고 힘의 행사에 대한 보다 더 엄격한 한계선을 긋는 작업이 광주사태의 진상규명과 더불어 병행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다시는 되풀이되지 말아야 할 교훈

  역사의 교훈에는 긍정적인 교훈과 부정적인 교훈이 있음을 명심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역사의 긍정적인 교훈은 우리가 그 뜻을 기리고 본받아야 할 교훈이지만, 역사의 부정적인 교훈은 본받거나 되풀이해서는 안되는 교훈이다. 구체적으로 우리는 爲民善政을 표방한 세종대왕의 치적에서는 긍정적인 교훈을 얻어야 하고, 비극적인 국권침탈과정에서는 부정적인 교훈을 얻어야 한다.
  역사의 교훈들 중에서 긍정적인 교훈보다는 부정적인 교훈이 더 엄격하고 절실한 교훈이다. 역사의 긍정적인 교훈은 본받는 것이 좋을 뿐이고 본받지 않는다고 해서 당장 잘못되는 것은 아니지만, 역사의 부정적인 교훈은 결코 되풀이해서는 안되는 절대절명의 교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후세 사람들은 역사의 긍정적인 교훈보다 부정적인 교훈을 더 값지게 받들지 않으면 안된다.
  바로 광주사태를 통해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 부정적인 교훈이어야 한다. 결단코 이 나라에서 광주사태와 같은 민족적인 비극을 또다시 되풀이해서는 안된다는 다짐을 하는 것만이 우리가 광주사태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값진 교훈이다.
  또한 우리는 좀 더 현명해질 필요가 있다. [오르테가 Y 가제트]의 말을 빌려보자.

  “우리는 우매한 자와 현명한 자 사이에는 언제나 차이가 있음을 발견한다. 현명한 자는 우매한 자와 자기 사이에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음을 언제나 알고 있다. 따라서 현명한 자는 목전의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노력을 기울이고, 이러한 노력 속에 바로 그 사람의 지성이 깃들어 있다. 그런데 반해 우매한 자는 스스로를 의심하지도 않고 스스로를 가장 분별있는 사람으로 착각함으로써, 그는 자신의 어리석음 속에 있으면서도 부러우리만큼 마음 편하게 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