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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광주학살, 미국 신군부의 협조와 공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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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살, 미국  신군부의 협조와 공모

최근 미국 외교문서를 통해 본 5 17 쿠데타,
광주학살과 미국의 대한정책-

                                                    이삼성(역사비평)

  1. 광주학살에 대한 미국의 개입을 보는 시각

  1980년 5월 한국 정치군부가 당시 한국민의 민주화 열망과는 반대로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총검으로 군부독재를 연장하려 했을 때,그리고 그러한 정치군부의 음모와 시민의 저항이 특히 광주에서 정면으로 대결했을 때,미국은 이 문제를 어떻게 인식하고 어떻게 행동했는가? 미국이 1980년 5월 22일경 20사단의 광주투입 계획을 한국 군부로부터 통보받고 이를 승인했다는 사실은 『뉴욕타임즈』와 『워싱턴포스트』 등 당시 미국의 주요 언론들이 미국방부 관계자의 발표를 근거로 이미 사실로서 보도했다. 또 당시 주한미사령관 존 위컴과 주한미대사 월리엄 글라이스틴의 증언과 주장 속에서도 확인되어온 바 있다
1996년 초 한 미국 언론인의 노력으로 공개된 광주 관련 미국무부 외교전문들에서는,광주에서 시민에 대한 군부의 무차별 학살행동이 진행된 후 20사단의 광주 추가투입을 승인했을 뿐 아니라,그러한 사태가 전개되기 전인 5월 초순에 당시 가열되어가는 조짐을 보이던 한국의 학생과 시민 그리고 광부 등 노동자들의 민주화와 생존권을 위한 투쟁이 본격화되어가는 상황을 한국의 신군부가 대민군사행동으로 대응할 계획을 세웠으며 미국이 이를 사전에 동의했다는 사실이 추가로 밝혀졌다. 이것이 1996년에 공개된 미국무부 문서들이 광주와 관련한 미국의 인식과 행동에 대해 말해주고 있는 것의 핵심이다.
  문제는 이 핵심적인 사실 자체로부터 우리가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어떤 질문을 던질 것인가 하는 것이다. 먼저 우리는 1980년 5월 22일 20사단의 광주 추가투입에 대한 미국의 승인,그리고 5월 초순 한국 군부의 대민군대투입계획 통보와 이에 대한 미국의 동의라는 개별적 행동들의 동기를 둘러싼 인식의 차이를 발견하고 이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부딪친다. 둘째는 그러한 개별적 행동들이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라는 특정 시기와 한국이라는 장소에서 전개되기에 이른 배경과 동기에 대한 역사적 인식이다. 셋째로 더 근본적이며 포괄적인 문제의식이 있다. 그것은 그러한 문맥 속에서 전개된 미국의 개별적 행동들을 한국을 비롯한 세계 전반의 현대사에서 미국의 자유주의 외교가 내세워온 인권외교의 성격과 그 한계라는 전체적인 맥락과 어떻게 연결지어 볼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한국정치군부의 대민무력행사에 대한 미국의 협조행위를 증거하는 개별적인 행동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인간사회와 국제질서에서 바람직한 것, 즉 정의가 무엇인가에 대한 인식,그리고 인간사회와 국제질서,즉 현실의 역사에서 무엇이 가능한가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을 둘러싼 몇 가지 다른 세계관에 따라 달리 해석되게 마련이다. 특히 냉전시대를 포함한 현대 국제정치학을 지배해온 현실주의적 시각에서 본다면,그같은 미국의 행동은 이상적인 행동은 아닐지 모르지만 미국이 취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행동이었다. 미국은 한반도에서 미국의 군사,정치,경제적 이해관계에 대한 냉정한 계산, 그리고 당시 한국의 정치에서 무엇이 가능한가에 대한 냉정한 인식을 바탕으로 한국의 현실정치를 장악하고 있던 전두환 등 한국 신군부의 '질서회복' 노력에 협조했을 뿐이다. 미국은 자연스럽고 현실적인 선택을 했을 뿐, 이것을 어떤 이상주의적인 도덕적 잣대로 질타할 사안은 아닌 것으로 된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현실주의적 국제정치론의 핵심개념인 '권력정치(power politics)'의 관점에서 미국의 행태를 이해하고 수긍하는 것이다. 국가의 권력정치적 행태는 시대와 상황에 따른 도덕적 시비를 초월하는 하나의 초역사적 인간과 국가의 행동원리로 간주된다. 1980년 5월 한국에 대한 미국의 인식과 행동은 그러한 초역사적 보편적 원리를 재확인해준 것에 다름아니다.
  그런데 이러한 시각은 그 의도와는 상관없이 권력정치 결정론적 결과를 낳고 있다. 당시 미국의 정치권과 행정부를 채우고 있던 인물 및 그들의 인식과 사상의 특성과는 큰 관계없이 미국은 어떤 행정부라도 그 상황에서는 동일하게 인식하고 동일하게 행동했을 것이라는 결정론적 가정을 깔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결정론적 인식의 면에서는 당시 한국을 비롯한 제3세계의 정치상황에 대한 미국의 대응을 제국주의라는 문제 틀에서 파악하는 맑스주의적 관점 역시 크게 예외가 아닐 것이다. 제국주의론의 철학적 기초인 맑스주의는국제정치 시각으로서의 현실주의와는 달리 국가들의 권력정치적 행태를 초역사적 또는 몰역사적인 보편적 원리로서가 아니라 지배와 피지배,계급적 착취가 존재하는 사회구조와 그 위에 선 국가들의 국제적 질서에서 나타나는 것,즉 역사적 제도의 소산으로 보았다. 그러나 맑스주의는 그렇게 역사적으로 규정된 자본주의질서가 지배하는 국제질서에서 국가의 행동은 불가피하게 경제안보와 군사안보라는 두 가지 핵심적인 국가와 자본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것으로 파악했다.
  미국의 대외정책을 바라보는 맑스주의의 두 가지 흐름으로서 흔히 도구주의적 관점과 구조주의적 관점이 구별된다. 도구주의적 관점에서는 미국의 국가는 미국자본의 경제적 안보를 위해 직접적으로 봉사하는 것으로 이해된다.반면에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미국 국가의 대외정책은 국가가 자본가들의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경제이익을 뒷받침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때로 개별적인 미국자본가들의 이익과 상충되면서도 전체적으로 미국 자본주의의 대외적 팽창과 유지에 봉사하는 틀을 유지한다는 논리에 강조점을 둔다. 국가는 개별 자본가집단들의 이해관계와는 상대적 자율성을 가지고 미국 자본주의 전체의 안녕과 팽창을 지원하는 거시적 안목을 추구한다. 그러한 취지에 기여하는 경제 및 군사안보적 차원의 정책들을 국가가 자율적으로 기획하고 관리해 나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주의적 맑스주의의 관점은 정치적 민주주의라는, 개별 자본가들의 직접적인 경제적 이해관계와는 별로 상관이 없는 정치적 ·문화적 가치를 미국 대외정책의 이념적 기초로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다소 유연한 사고를 내포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해되어온 맑스주의적 제국주의론은 경제 ·군사전략적 이해관계가 직접적으로 개입된 문제에 대해서는 미국이 의당 제3세계에서의 정치적 민주주의라는 추상적 가치보다는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경제적 이해관계에 충실한 대외정책을 펼 것으로 파악해온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 내용은 현실주의적 권력정치론과는 다르지만 그 결과에서는 그것과 마찬가지로 결정론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맑스주의적 이론도 그와 같은 관점을 취한다면 맑스주의자는 1980년 5월 한국에서 미국은 그와 같은 행동을 취하게 예정되어 있었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맑스주의가 상당부분 현실주의와 마찬가지로 어떤 자본가집단이나 국가가 추구하는 이익은 이미 '객관적으로' 주어져 있으며 국가와 집권세력은 그것을 잘 분별하고 그에 따라 합리적으로 그에 맞게 행동한다는, 국익의 본질에 대한 분명한 '객관주의'적 시각을 취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문제는 과연 한 사회,한 나라의 집권층 또는 국가의 지도집단이 언제나 자신들의 전체적인 이익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고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실제 언제나 그러한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객관적 국익'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 것인가? 그에 대한 규정은 적어도 어느 정도는 항상 주관적 성격을 가진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1980년 5월 한국에서 정치군부적 대민군사행동에 협조하는 것이 미국으로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할 때,그 정확한 의미는 무엇인가?그렇게 하는 것이 한국에서 미국의 군사적 ·경제적 이익을 취하는 데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선택이라고 미국정부 고위관리들이 판단한 것을 의미한다고 할 때,그러한 판단은 처음부터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었는가?현실주의적인 권력정치적 논리에서 뿐만이 아니라 맑스주의적 관점에서도 그러한 판단이 불가항력적인 것인가?나는 맑스주의적 관점 안에서도 결정론적 인식과 비결정론적 인식 간의 긴장이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우리가 적어도 구조주의적 맑스주의 관점에서 자본주의 국가의 정책결정과정에서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을 긍정하고,또 정치적 민주주의와 인권과 같은 비교적 추상적일 수 있는 가치들이 나름의 상대적 자율성을 갖고 상황에 따라서 미국 국가와 자본가집단들의 '장기적인' 이익계산에 고려될 수·있다는 것을 긍정한다면, 1980년 5월 한국에서 미국의 행동은 반드시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판단은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다소 성급한 것이 될 것이다.
  그것은 곧 1980년 5월 미국이 한국에서 추구하고자 했던 이익이나 가치의 개념에 어느 정도의 주관주의적 성격과 다양성을 부여할 공간이 있음을 말한다. 객관적으로 이미 규정된 이익과 그에 대한 정확한 인식에 따라 당시 미국의 대한정책이 수립되고 집행되었다는 인식에서 벗어나,당시 한국에서 미국의 이익에 대한 미국인들의 인식이 여러 가지 다른 형태를 띨 수 있었을 것으로 보는 것,즉 상대적으로 열린 역사적 가능성을 긍정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1980년 5월 한국에서 미국의 행태를 결정한 것은 당시,한국에서 미국이 갖고 있는 군사전략적 ·경제적 이익이라고 뭉뚱그려 간결하게 규정할 수 있는 것이라기보다는,미국인들이 그때 자신들의 전략적 ·경제적 이익이라고 인식한 것은 그들이 그것을 그렇게 인식하게 만들었던 그 당시 시대상황의 특정한 조건들,그리고 당시 미국 정책결정집단을 구성하는 인물들,그들의 정치세력적 배경과 인식의 특성 등의 복합적 결합의 결과라고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정치세력에 따라서는 한국에서 미국의 이익을 편협하고 단기적인 군사적 ·경제적 이익에 입각해 규정할 수도 있고,비교적 장기적 안목에서 자신들의 안보 ·경제이익을 규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한국의 정치적 민주주의나 인권문제와 같이 미국인들에게는 다소 추상적 차원의 가치도 인식 여하에 따라서는 미국내 특정 정치세력의 관점에서는 한국과 동북아에서 미국이 자신들의 장기적인 헤게모니적 위상을 정립하고 유지하는 데 중요한 가치로 인식될 수도 있는 문제이다. 또 다른 한편으로 생각할 것은 같은 정치세력,같은 인물들일지라도 그 시대의 분위기,그 시대의 총체적인 상황 -크게 보아 국제정세와 미국내 정치구도 등 두 가지 측면-이 변화하면 한국이라는 특정 장소에서 특정 시점에서 미국의 국익을 다르게 평가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그 시점에서 미국의 대외정책 결정을 주도하는 정치세력(행정부와 의회 등을 포함한 정치권)과 그 시대상황과의 역동적인 상호작용 속에서 특정 시점,특정 장소에서 미국인들의 국익에 대한 인식이 가변성과 유동성을 띨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하여 보는 것이다. 시대상황을 이끌어가는 주도세력의 세계관과 에토스,그리고 그것과 상승작용하면서 형성 변화되어가는 시대의 상황, 이 두 가지가 1979-80년 역사적 과도기 한국에 대한 미국의 국익 인식과 정책선택에 의미있는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점을 긍정하는 것이다.
  미국 대외정책의 성격에 대한 이같은 상대적으로 유연성있는 맑스주의적 인식은 흔히 우리가 자유주의라고 말하는 또 하나의 국제정치적 시각과 맑스주의가 만나는 지점이 될 수도 있다. 철저하게 방법론적 개인주의를 인식론적 기초로 한다고 볼 수 있는 자유주의의 국제정치론은 실제 구체적으로 정책결정에 참여하는 개인들과 집단들의 인식(또는 오인),그들의 행태,그들의 가치관,성격적 특성을 중요한 정책결정변수로 간주한다. 그리고 자유주의는 미국의 대외정책이 지향하는 가치나 국익의 개념에서 안보와 경제적 이익이 차지하는 비중을 절대시 하지 않는다. 인권과 민주주의 또는 여러가지 미국의 문화적 가치들이 미국의 대한정책에 투영될 수 있는 것으로 파악한다. 그런 점에서 자유주의 시각은 현실주의나 일반적 맑스주의가 경도하기 쉬운 여러가지 차원에서 결정론적 성향을 견제할 수 있다. 1980년 한국에서 미국의 정책을 이해함에 있어서,현실주의나 맑스주의는 미국이 추구하는 안보·경제적 이익들을 규정하고 그 중요성을 부각시키지만, 자유주의론자들은 미국이 나름대로 인권외교와 민주주의 가치의 차원을 부각시키거나 또는 그것이 충분히 반영되지 못했을 경우 그것의 원천적 불가능성보다는 그 반영을 억제한 미국 외적인 제약요인들을 강조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자유주의적 분석경향은 미국의 대외정책분석에 구체성과 다양성을 부여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방법론적 개인주의 접근의 일반적 문제들을 그대로 드러내게 된다. 미국 대외정책 결정과정을 파편화한 형태로 이해하고 그래서 개별적 사건들을 관철하는 역사적 연속성,그리고 일상적으로 되풀이되는 미국 대외정책 행태의 패턴과 그 구조의 문제를 주목의 대상에서 소외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1980년 5월에 극적으로 표출되는 이 시기 미국의 대한인식과 정책을 분석하면서 몇 가지 접근법상의 긴장을 어느 정도 유지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한반도 현대사에서 미국은 자신의 정책결정에서 안보전략적 ·경제적 이해관계를 우선시했고 그것이 1980년 5월 광주에서의 행태에 반영되고 또 그것으로 이어진 것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이 단기적이건 장기적 인식이건 간에, 우리는 한국에서 미국의 안보전략적 ·경제적 이해관계는 얼마든지 긴장을 유발할 수 있고,그 긴장의 공간에는 그 시대의 상황과 또 그것을 인식하는 미국 대외정책 주도집단의 정치적 성격과 가치관 그리고 시기적
변화에 따라 상당한 유동성이 끼어들 수 있다는 것을 긍정해야 한다.
  이 글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할 때,미국이 카터정권 당시에 스스로 부각시킨 인권외교와 그 실제의 전개, 그리고 그것과 1980년 5월 광주에서의 미국의 행태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을 전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전제한다. 바로 이 점에서 필자는 카터행정부가 내세운 인권외교의 성격을 몇 가지 다른 차원에서 구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카터정권의 인권논의가 전적으로 유의미했다거나 또는 그와 정반대로 위선이나 허구에 불과했다고 단정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이기도 하다.

2. 미 국내정치의 보수화와 카터 인권외교의 이중성

  이 글에서 필자는 1980년 5월 한국 신군부의 대민군사력 사용계획에 대한 사전동의를 포함한 미국의 적극적 협조자세가 전적으로 미국외교의 본질적 성격이라고 단정하는 것을 피할 것이다. 그러나 몇 가지 중요한 의미에서 미국의 그같은 행동은 1980년 5월 훨씬 이전에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는 것을 입증하고자 할 것이다. 그것은 12 · 12사태 직후 리처드 홀브루크의 전문에 나타난 미국의 인식과 행동계획에 내포되어 있었다는 것,그리고 그보다 더 거슬러올라가면 1979년 7월 1일의 한미공동성명과 그것이 의미하는 카터행정부와 박정희정권 간의 '관계정상화'에서 이미 1979년 말 이후 한국의 정치상황에 대한 미국의 인식과 대응의 기본골격, 그리고 그 안에서 인권문제의 부차성과 주변성이 이미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었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한다.
  그리고 카터행정부가 1979년 초부터 박정희정권과의 관계정상화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도하면서 결국 1980년에는 전두환 신군부의 권력장악을 사실상 지원하기에 이르는 미국의 국내외적 상황 변화와 함께 카터행정부의 자유주의의 이중적 성격을 부각시키려고 한다. 그것은 미국 자본주의와 국가의 성격에 대한 본질주의적 분석의 가치를 부정하기 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미국 자본주의와 그 외교의 본질이 특정한 시점과 장소에서 고유한 형태로 구현되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분석해 보이는 것이 될 수 있다. 또다른 한편으로 이 글은 1980년 5월 한국의 신군부에 대한 미국의 적극적협조 또는 공모를 음모 차원에서 분석하는 것을 피할 것이다. 그것은 이미 하나의 공개된 정책이었고 뚜렷한 논리성과 일관성을 가진 예측 가능한 당시 미국외교의 기조였다.
  이러한 인식에서 당시 미국의 대한정책 기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장 핵심적으로는 카터행정부의 대한정책에 대한 이해를 혼란시키는 주요 요소,즉 인권외교라는 자유주의적 슬로건과 또 실제 그것이 상당부분 거론되고 실천된 측면이 있는 것을 1980년 5월 신 군부와의 적극적 협조라는 사실과 어떻게 동시에 이해할 것인가에 대하여 일정한 시각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 필자는 카터정권의 인권외교가 처음부터 세 가지 차원의 긴장된 전선을 안고 있었다는 점을 먼저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첫째, 지역적 편차이다. 카터행정부는 그 이전 공화당 정부들과는 달리 아르헨티나와 칠레 등과 같이 미국의 군사전략적 이해관계가 직접적으로 개입되어 있지 않은 남미의 독재국가들에 대해서는 무기금수조치와 같은 상대적으로 강력한 인권기준 외교를 적용했다. 그러나 이란이나 한국과 같이 대소봉쇄전략에서 안보전략적 이해관계가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지역에서는 인권외교가 상대적으로 매우 피상적인 것이었다. 이 문제는 데이빗 포사이스가 이미 정확하게 지적한 바 있다. 그는 카터의 인권외교는 제3세계의 친미독재정권이 맑스주의 정치세력으로부터 도전을 받지 않고 있는 나라로서 미국에게 경제적으로나 전략적으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나라에 집중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했다 그래서 카터의 인권외교는 라틴아메리카에만 한정되는 '라틴아메리카 정책'에 불과했다고 포사이스는 비판했다.즉 아르헨티나와 칠레같이 군부가 미국의 도움을 받아 맑스주의 세력들을 일망타진하고 미국이 대소경쟁에서 군사전략적으로 그렇게 의존하고 있지 않은 나라들에서 미국의 인권외교는 상징적으로 적용되었다. 그 결과 미국이 경제적 ·군사적으로 크게 비중을 두는 중동에서 벌어지는 회교보수정권들의 일상적인 인권유린은 미국의 인권압력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특히 이란 샤정권의 악명높은 사바크정치는 카터정권의 비판대상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중동의 빛'으로 높이 칭송되는 아이러니를 낳았다. 포사이스는 같은 맥락에서 미국이 특히 군사적으로 깊은 이해관계를 갖고 있던 한국에서도 카터의 인권외교는 실질적으로 거의 적용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그래서 그는 카터의 인권외교는 "급진적 성격(철저성)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카터행정부는)아무리 단기적인 안보적 이익이라도 그것을 희생시키고 인권외교를 추구한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당시 국방장관 해롤드 브라운이 1979년 10월 초 한국을 방문한 자리에서 "미국은 한국에서 맡고 있는 방위역할을 빌미로 한국에서 정치적 변화를 모색하는 무기로 사용하지 않겠다"고 공개선언한 것은 그러한 예의 하나에 불과하다. 
  둘째,정치범들에 대한 인도적 차원의 관심과 독재정권 자체와의 긴밀한 안보적 ·경제적 협조체제 유지라는 관심이 공존하는 데 따른 긴장이다.1979-80년 기간에 이러한 긴장은 대표적으로 김대중씨 개인의 제한적 수준의 정치적 권리에 대한 관심을 보임과 동시에 박정희정권 그리고 그에 뒤이은 전두환 군사체제와 안보적 ·경제적 협조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매우 중요시하는 행태,언뜻 상층되어 보이는 두 가지 행태의 공존과 그 둘 사이의 긴장으로 나타났다. 이 두 가지 행태의 공존은 미국 외교문서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국과 같은 나라가 박정희 정권이나 전두환체제 같은 군사독재체제를 벗어나 민간민주정권을 형성해 나가는 것,즉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기대나 관심이 없었다고는 볼 수 없으나,그것은 비교적 추상적이고 장기적 차원의 관심이었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이 인권문제를 거론할 때 그것은 정치적 자유를 구속당한 몇몇 개인들에 대한 관심으로 제한되어 나타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물론 민주주의는 개인들의 인권과 불가분한 것이고 그것이 민주주의의 기초인 점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몇몇 개인들의 자유에 대한 관심과 독재정권 자체와의 긴밀한 협력이 공존했다는 사실은, 거꾸로 말하면 그 두 가지가 따로 분리되어 취급될 수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그 두 가지를 분리하지 않으면 미국이 김대중씨 등 한국의 몇몇 개인에 대해 보인 인권 차원의 관심 그 자체를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진지한 관심으로 확대해석하는 환상이나 착각을 유발할 수 있다.또 그와 정반대로 미국의 인권외교 자체의 제한적 의미마저도 허구나 위선에 불과한 것으로 지나치게 축소 ·매도하는 논리로 연결될 수 있다. 그 두 가지를 분리할 때만이 우리는 미국 인권외교의 제한적 의미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면서 동시에 한국 신 군부와의 협조와 공모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시간적 편차이다. 이것은 카터행정부의 대외정책 환경으로서의 국제질서와 미국내 정치역학이라는 당시 시대상황과 그것의 변동 차원이기도 하다. 1960년대 중엽에 본격화해서 1970년대 중반까지 지속된 미국의 베트남전쟁 개입 후유증과 워터게이트 추문 등,미 국가권력이 대내외적으로 타락한 방식으로 남용되어온 데 대한 강한 자기비판 기풍에 바탕한 자유주의 분위기 속에서 카터행정부는 등장했다. 그것이 카터정권의 도덕정 치와 인권외교의 슬로건을 가능케 했다. 그것은 또한 전후 세계에서 미국의 헤게모니적 주도권이 도전받는 데 대한 미국내 보수와 리버럴 간의 대응전략 차이와 의식의 분열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했다. 한편으로 세계적 패권을 유지해야 하는 필요와 그것이 초래한 부도덕성에 대한 인식과 비판이 공존했던 때이다. 미국의 민주주의에 대한 우월감과 합께 워터게이트에서 드러난 미국 민주주의의 부패와 타락 가능성에 대한 당혹감과 경계심이 공존했다. 카터행정부의 대내외정책은 이같은 미국의 의식분열시대의 반영인 측면이 있다. 닉슨행정부가 처음에 시도했다 중도하차한 주한미군 철수계획을 재차 거론한 것, 그리고 코리아게이트로 대표되는 한국 유신독재정권의 추악한 대미 로비활동과 인권문제에 대한 미의회의 비판과 조사 활동,박정희정권의 핵개발 기도로 그것이 초래할 여러가지 역기능에 대한 미국의 우려는 그처럼 미국이 국내외적으로 처한 의식분열상태 속에서 한미관계의 긴장된 한 국면을 조성하는 상황적 기초가 되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의 그같은 의식분열은 미국이 그간 추구해온 대내외정책의 관성을 유지하려는 힘과 그것의 남용들과 타락상을 도려내려는 힘 간의 긴장과 갈등이었고,그것이 한미관계에서는 박정희정권에 대한 한편에서의 비판과 다른 한편에서의 한미관계 공고화 노력으로 이중 표출되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동시에 존재하는 경향이었지만,또 시간적으로 편차를 보이며 드러난 것으로 볼 수 있다. 카터정권 출범 초반인 1977-78년 기간은 현상에 대 한 문제제기와 비판이 상대적으로 우세한 시기였다. 반면에 1979-80년의 카터정권 후반부는 과거의 관성과 그를 지지하는 정치세력의 힘이 우세해지는 시기였다. 이 점은 미국의 대한정책에서 카터행정부와 의회가 다같이 박정희 독재정권과의 '관계정상화'를 위해 노력한 것으로 나타나며,그것은 1979년 6월 말-7월 초에 이루어진 카터의 한국방문과 카터-박정희간의 정상회담으로 '승화'된다. 카터정권 대외정책의 이같은 시간적 편차는 초기에 어느 정도 인권외교를 적용했던 나라들,즉 아르헨티나와 칠레에서도 정권 후반기에 들어서는 인권정책 자체를 포기하려는 움직임을 보인 데서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그 증거는 의미심장하게도 한국에서 정치군부에 의한 광주학살의 초연이 아직 역연했을 1980년 5월 말 카터정권이 아르헨티나의 살인적인 군사독재정권에 대해 종전에 취했던 무기금수조치를 철회하려 준비하고 있었던 사실이다. 당시 국무부 인권담당 차관보였던 패트리샤 데리안은 당시 카터행정부가 취하려 한 이 조치에 항의하는 뜻으로 카터행정부를 떠날 의사를 언론에 밝혔다. 그녀는 『뉴욕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곧 아르헨티나에 대한 중대한 정책전환이 있을 것이다. [카터정권은] 이 정권과 관계를 정상화하고 이 정권에 대한 공식적인 비판을 중단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데리안은 '워싱턴의 외교정책 주도집단'과의 싸움에서 지고 있다는 것과 그로 인한 좌절감을 숨기지 않았다.그녀는 당시 워싱턴의 전반적 분위기를 묘사하는 가운데,'〔서방과 제3세계 사이에는〕 문화적 수준차이가 있으며 다른 나라들이 우리의 가치관을 받아들일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는 등의 몰상식한 주장들"이 〔카터행정부 안팎을〕지배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초기에 인권외교를 강조하는 듯하던 카터정권의 고위관료들이 1980년 5월의 사태를 두고 "광주사태는 인권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동북아의 안정을 확보하고 유지하는 미국 국익의 문제"라고 공언하기에 이른 배경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카터정권의 인권외교 거론이 이처럼 시간적 편차를 보이는 데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카터정권의 인권외교는 슬로건의 성격이 강했을 뿐 실질적인 내용이 없었기 때문에 결정적으로 미국의 이해가 걸린 사태가 발생했을 때는 철저한 현실주의적 권력정치 행태를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고 보는 관점이다. 이것은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하나의 본질주의적인 결정론적 관점이라고 해석할 수 있겠다. 두번째 이해방식은 카터정권 초기와 후기 사이의 대내외적 환경변화가 카터 인권외교의 향방에 의미있는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하는 관점이다. 이 둘 중에서 어느 하나를 절대적으로 선택해야 한다는 것에서가 아니라 여러가지 이해방식을 같이 고려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 상황의 변화를 개략할 필요가 있다. 특히 본질주의적 이해방식은 사실상 검증이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따라서 우리는 당시 상황에 대한 실증적인 인식을 통해 어떤 형태로든 우리의 이해를 풍부히 할 필요가 있다. 사태의 전개와 그 구조의 성격에 대한 다각적인 이해는 또한 특정 시점에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나는 미국외교와 '본질'을 확인하는 기본조건이기도 하다.
  1979년을 카터외교 환경변화의 전환기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우선 국제환경의 변화를 들 수 있고, 그것은 다시 크게 두 가지로 말할 수 있다. 하나는 미소관계의 전반적인 냉각이며 다른 하나는 이란 친미독재정권 사의몰락으로 대표되는 제3세계 반미혁명들의 진전이다. 이 두 가지 점은 다같이 미국의 대한정책에서 대소봉쇄를 재확인하기 위한 한미안보동맹조치와 거론과 한국에서 이란사태와 유사한 성격의 정치적 격동이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는 데 대한 관심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면서 1977-78년 카터정권 초기의 불편했던 한미관계를 정리하고 다시 한미동맹 관계를 강화한다는 문제의식이 미국의 대한정책을 지배하고 있었음을 이번에 공개된 미국무부 외교문서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우리가 1979년 이후 미국 대한정책의 커다란 맥락으로서 미소관계의 냉각,즉 제2차 냉전 또는 신냉전으로의 전환을 말할 때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신냉전의 전개에는 카터행정부 대외정책의 이중성이 처음부터 중요한 추진력으로 작용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신냉전의 발전이라는 외적 상황은 사실 카터외교의 내재적 성격이 구현된 것에 다름아니었다는 말이 된다. 또 그것은 카터외교의 외적 환경의 변화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카터외교의 성격의 발현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카터외교의 국제환경적 변화를 얘기하는 것은 복합적인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함을 뜻한다.
  먼저 신냉전 전개에서 카터행정부의 역할로 거론될 수 있는 것에는 카터외교의 진보적 측면과 미국외교의 내재적인 보수적 성격 두 가지가 다 같이 있다. 카터행정부의 인권외교는 그 자체로서는 리버럴한 성격을 갖고 있는 젓으로서 잘 적용되기만 한다면 애당초 그것은 비판할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미국이 제3세계의 많은 나라에서 직접 개입이나 독재정권에 대한 지원을 통해서 실질적으로 그 나라의 인권을 유린하는 데 책임이 있거나 그 문제를 피상적으로만 거론하면서도 소련과 동구의 인권문제에 대해서는 대단히 공격적으로 인권을 거론할 때,그것은 미소관계를 긴장시킬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카터의 인권외교는 앞서 포사이스가 지적한 대로 라틴아메리카의 몇몇 나라에만 상징적으로 적용된 '라틴아메리카 정책'이었을 뿐만 아니라 소련 ·동구권에 비 대칭적으로 부풀려 제기된 '반공주의 성전'이라는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강하게 띠고 있었다. 그결과 카터 인권외교는 그 의도와 상관없이 카터정권 초기부터 미소관계를 냉각시키고 그런 가운데 신냉전이라는 악화된 국제환경을 촉진시켰다. 그렇다면 그것은 미국의 제3세계 동맹국 독재국가들에 대한 카터 인권외교의 적용 가능성을 내재적으로 제약하는 요인이 되고 만 측면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카터행정부의 대소군사정책이 다소의 변화요소와 함께 그전의 공화당 행정부들과 마찬가지로 강한 냉전적 성격을 처음부터 안고 있었다는 사실은 여러가지 측면에서 지적될 수 있다. 한편으로 미국 외교사가들 사이에서는 카터의 초기 대외정책이 전례없는 자유주의적 성격을 띤 비군사주의적 노선으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가디스 스미스는 카터의 외교정책이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국내정치에 불러일으킨 뉴딜이라는 혁신에 상당하는 '외교정책에서의 뉴딜'을 시도한 것이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중동평화협상 추진,파나마운하조약의 추진,쿠바와 베트남과의 관계정상화 시도,한국으로부터의 미군철수 계획,무기수취국의 인권상황에 대한 평가를 기초로 한 대외 무기판매 규제,  CIA활동에 대한 부분적 제약 등이 그 표현들로 간주된다.
그러나 스미스가 잘 지적한 대로 그러한 외교정책에서의 뉴딜은 곧 올드딜로 복귀했다. 뿐만 아니라 프렛 할리데이는 카터 외교정책노선이 처음부터 현대 미국의 대소 냉전주의 외교정책의 골간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으며,이것이 궁극적으로 미소관계의 긴장과 냉각을 결과했다는 사실을 잘 지적하고 있다. 할리데이는 카터 외교정책의 접근방식을 '화해와 동시에 호전성을 강조하는 미국 남부인들의 접근방식'의 대표적인 경우라고 진단한다. 그는 카터외교의 이같은 이중성은 1976년 대통령선거전에서 그가 공화당 전임자들의 지나친 군사중심주의를 비판함과 동시에 포드 대통령이 1975년 헬싱키협정과 제2차 전략무기제한협상에 관한 블라디보스토크 각서에서 소련에게 지나치게 많은 양보를 했다고 비판한 행태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고 지적했다.  카터는 초기에는 이러한 두 가지 요소들 사이에 모호한 양가적 태도를 유지했으나,정권 후반부에 들어가면 본격적으로 제2차 냉전을 촉발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했다고 할리데이는 분석한다.
그가 지적하고 있는 대로 카터의 대외정책노선은 기본적으로 '자유주의적 냉전주의'였다. 그는 소련과의 전면대결을 주창한 전형적인 냉전주의자는 아니었지만,그렇다고 소련과의 데탕트를 선명하게 선호한 것도 아니었다.카터는 이 모호한 이중성을 유지함으로써 소련을 다루고자 했으나 그 정책은 통하지 않았고 특히 나중에 언급할 제3세계에서의 혁명적 상황은 그러한 정책의 국내적 호소력을 파괴시켰다. 그에 따라 카터정권의 대외정책은 후반부에 가서는 그러한 모호한 양가적 태도에서 벗어나 더욱 직선적으로 냉전주의적 대결과 군사주의로의 복귀를 나타내게 되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카터외교의 이중성은 제2차 전략무기제한협상과 관련해서도 드러났다.카터는 이 협상을 지속하고 결국 소련과 협상을 마무리지었지만 소련과 서독이 포함시키고자 했던 유럽에 배치된 전역미사일들을 제외시키는 바람에 협상이 불구화되고 지면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이 문제는 1974-76년 사이에 미소간 협상에서 최대 이슈였는데,카터행정부가 출범하자마자 국무장관 밴스가 맨 처음 방소해서 밝힌 내용이 그 부분에 대한 소련측의 제의를 거절한 것이었다.  무기개발 부문에서도 마찬가지의 이중적 요소들이 혼재했다. 출범 초기인 1977년 6월 카터는 B-1폭격기 생산을 취소하면서 당시 논란이 되고 있던 크루즈미사일 생산은 강행하기로 했으며, B-1의 취소를 훨씬 상쇄하는 것으로 평가되는 스텔스폭격기를 개발하기로 결정했다.
  월터 라페버는 카터행정부가 군사주의노선으로 회귀한 시점을 대체로 1979년 중엽으로 파악하고 있다.  나중에 1980년대 레이건이 대규모로 추진한 군비팽창은 사실상 카터행정부가 1979년 중엽에 발진시킨 것의 확대판에 불과한 셈이었다. 카터행정부는 페르시아만 지역에 미국의 군사기지들을 건설하고,특히 중동지역 등을 염두에 둔 제3세계 지역에 즉각 투입될 수 있는 이른바 신속배치군이라는 것을 신설했는데 이것은 미 국방예산의 상당한 수준의 증액과 궤를 같이한 것이었다. 이것은 소련과의 대화중단과도 일치했다. 브레진스키는 당시 미소관계를 "대화도 없고 억지도 없는 상황"이었다고 묘사했다.  제2차 전략무기제한회담은 타결되었지만 소련과의 군비통제에 대한 미국내의 정치기반은 닉슨행정부 때보다 오히려 더 약화되고 있었고,그 결과 전략무기제한협상은 미 의회의 비준신청 자체를 포기한 채 사문화되어가고 있었다.
  라페버는 바로 이같은 카터행정부의 군사주의로의 복귀가 소련 역시 군사주의적 모험에 경도하게 만드는 데 기여했고,그 한 예가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소련의 무모한 군사개입이었다고 이해한다.  소련은 적대적 중국의 등장과 광신적 모슬렘세력의 이란 장악으로 취약해진 남쪽 국경에 대한 안보적 관심에서 그해 12월 27일 10만의 군대를 아프가니스탄에 투입해 이슬람 게릴라들과 긴 소모전에 돌입했다. 이러한 소련의 행태가 미국의 신냉전정책을 더욱 본격화시켰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할 것은 카터정권이 1979년 전반부에 보인 군사주의적 회귀가 바로 그러한 악순환의 중요한 요인의 하나로 지적될 수 있다는 점이다. 
  카터외교의 이중성은 카터외교진용의 인적 구성에도 반영되어 있었다.강경한 냉전주의자로 잘 알려진 브레진스키가 백악관 안보담당 보좌관으로 진을 치고 있었고,베트남전쟁 당시 공군장관을 역임하면서 북베트남에 대한 폭격을 지휘한 해롤드 브라운이 국방장관으로 기용되어 제3세계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 개입능력을 제고하는 작업을 진두지휘했다.  포드정권하에서 대소련 강경책을 주창해왔던 제임스 슬레진저는 카터정권의 에너지성장관으로 들어앉았다. 또 카터의 개인고문이었던 마셜 슐만은 소련과의 협상을 선호했지만,막상 모스크바 주재 미국대사에는 말콤 툰이라는,소련과의 제2차 전략무기제한협상 자체를 사적으로 반대하는 사람이 포진하고 있었다.
  이러한 이중성은 카터정권의 후반부에 가면서 냉전주의적 성격이 보다 분명히 우세한 쪽으로 변화한다는 것을 앞서 지적한 바 있는데, 그것은 인적 구성에서 비교적 리버럴한 쪽에 속했던 인물들이 1978년 말에서 1980년 초에 걸쳐 카터정권과 결별하는 데서도 투영되었다. 카터행정부에서 소련과의 전략무기제한협상을 이끌어온 견인차였던 군비통제군축국장 폴 완케는 1978년 10월 떠났고, 카터정권의 제3세계 인종화해정책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혹인 출신 주유엔대사인 앤드류 영은 1979년 7월 해고당했다. 그리고 비교적 온건한 인물이었던 사이러스 밴스 국무장관은 1980년 4월 자리를 떴다. 이와 함께 모든 문제를 대소 냉전 차원에서 바라보던 안보지상주의자라 할 수 있는 브레진스키의 영향력은 더욱 커져갔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란,니카라과,아프가니스탄 등 제3세계에서의 미국에 대한 도전 증가 경향도 다음에 부연할 미국내정치의 보수화와 상호작용하면서 후반기 카터외교의 안보지상주의 성격을 강화했다. 그 중에서도 이란의 샤정권에 대한 카터정부의 대응은 미국에게 비슷한 전략적 가치를 안고 있던 한국에 대한 미국의 정책을 이해하는 데 주목할 만한 중요성을 갖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실제로 이번에 공개된 미국무부 외교문서에도 이란 문제가 자주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란은 소련과 직접 맞닿아 있는 곳으로 미국은 이란 국경지역에 소련의 핵을 비롯한 군사활동을 감시하기 위한 레이더체제를 설치하는 등 이 지역에 깊은 전략적 이해관계를 갖고 있었다. 이란은 또한 미국의 주요 무기수출시장이었다. 카터는 취임 첫해인 1977년 말 이란을 방문하여 상호관계를 긴밀히 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란 민중은 샤를 증오했으나 카터는 이란의 왕 모하마드 팔레비를 "당신의 인민이 당신에게 보이고 있는 존경과 칭송과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칭찬했다.  그러나 1978년 이미 이란은 폭력적 혁명의 상황에 돌입하고 있었다. 샤는 계엄령을 선포했지만 그것은 혁명적 열기를 가열시켰을 뿐이다. 카터는 브레진스키의 권고를 받아들여 샤정권에 추가군사원조를 제공하여 이 위기를 넘기려 했다.
그러나 1979년 1월 마침내 샤는 왕위를 내버리고 이란에서 도망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란 종교혁명 지도자 아야톨라 호메이니는 1979년 1월 3I일 승리자로서 테혜란에 입성했다. 이후 이란은 샤가 추진했던 서구화전략인  '백색 혁명'을 거꾸로 되돌리는 작업을 시작했다.  이란의 석유에 대한 미국 등 서방의 지배는 끝이 났다. 이로부터 미국은 중동 전체에 대한 지배체제에 중대한 위기의식을 갖게 되었으며, 그만큼 중동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 증가를 걱정해야 하는 매우 심각한 상황으로 느끼고 있었다.
  이란사태는 바로 그와 같은 전략적 자원의 손실과 위기에 그치지 않았다. 1979년 11월 4일 테헤란에서 400명의 학생행동대가 미국대사관을 장악하고 66명의 미국외교관과 군무원들을 인질로 억류하면서 이란사태는 카터정권의 국내정치환경과 외교정책에 직접적 충격을 던지는 첨예한 정치적 이슈로 발전했다. 1979년 말 이후 한국에서 전개된 상황과 이에 대한 미국의 대응은 1979년 11월 초부터 시작된 이란 인질사태라는 정세와도 긴밀한 연관을 갖는 것이며, 1979년 12 · 12사태 직후 한국에 대한 미국의 대응의 요점을 가리키는 리처드 홀브루크 전문의 핵심을 관통하는 것이다.이 점은 나중에 상술할 것이다.
  많은 미국 정치분석가들은 1968년 리처드 닉슨의 대통령 당선에서 미국내정치 보수화의 출발을 보았지만,베트남전쟁의 후유증과 워터게이트는 그러한 보수혁명의 물결을 잠시 지연시키고 카터정권의 등장을 허용했다.
그러나 미국 자신이 견인차 역을 담당한 신냉전의 전개와 이란 등 제3세계에서의 미국에 대한 도전의 가시화 같은 상황변화 속에서 미국내정치의 보수화는 다시 활력을 갖고 정치의 전면에 드러나게 되었다. 1978년 11월 의회 중간선거에서'미국의 신우익이 상당한 의석을 차지하는 데 성공한 것은 그러한 미국내정치 역학구도의 한 증거이기도 했다. 더 중요한 것은 기존 민주당 내 리버럴한 정치인들의 정치의식과 노선이 보수화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미국정치의 보수화는 외교이데올로기 영역에서는 이른바 신보수주의적 외교이념의 풍미를 가져왔고, 이것은 1979년 『코멘터리』라는 보수적 저널에 실린 진 커크패트릭의 유명한 논문에 실린 '커크패트릭 독트린'으로 표현되었다. 그녀의 독트린은 레이건정권이 그녀를 주유엔대사로 임명하면서 유명해졌지만 그것은 이미 1970년대 말 미국의 대외정책 이데을로기로 각광을 받기 시작했고, 1980년 대통령선거전에서 레이건의 '강력한 미국 재건론'을 뒷받침하게 되었다. 이 '커크패트릭 독트린'의 요점은 미국이 전략적 ·경제적 이익을 위해 ~제3세계 독재정권들과 연대하고 지원하는 것에 대해 리버럴들이 느끼는 죄의식을 비판하고 그러한 연대를 적극적으로 정당화하는 데 있었다.
  이러한 여러가지 차원의 배경을 염두에 둘 때에야 비로소 1979년에서 1980년 5월에 이르는 한국의 정치적 격동의 시대에 미국이 전개한 대한정책의 흐름을 보여주는 미국무부 외교문서들에 나타난 모순과 착종과 그것을 꿰뚫는 근본적인 보수의 논리를 전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3. 1979년 초 한·미간 '관계정상화'

  카터행정부의 대외정책 성향이 전반부와 후반부 간에 시간적 편차가 있을 뿐만 아니라 전후반을 통틀어 이중성이 내재해 있었다면,전반과 후반의 차이를 따지는 것이 크게 의미있는 일은 아니다. 그러나 미국이 그리고 특히 카터행정부와 같이 1970년대 초 ·중반이라는 미국 현대사에서 그 유례를 찾기 힘든 자기환멸과 자기비판의 시기에 자유주의적 기풍을 딛고 출범한 행정부가 한국에서 안보·경제적 이익과 함께 인권과 민주주의와 같은 가치들을 동시에 추구하고 싶어했을 것이란 점은 부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문제는 미국이 한국에서 그 두 가지를 같이 추구하는 것이 가능한가,한국에서 안보 ·경제적 이익을 우선시한다는 것과 박정희정권에 대한 또는 전두환정권에 대한 진지한 정치적 비판이 양립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일단 그에 대한 카터행정부의 현실적 인식과 판단은 전반과 후반에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할 필요는 있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카터행정부의 전반과 후반의 차이를 증폭시키는 작용을 했을 시대적 상황과 정부 안팎의 인식차이들을 지적할 필요도 있다. 우리는 인권이 미국외교의 한 기준으로 존재했다는 것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또 우리는 어떤 시점에서 인권문제의 적극적 거론이 미국의 이 지역에 대한 안보 ·경제적 이익 추구와 양립할 수 있는가 아니면 그것을 해치는 것인가에 대한 현실적. 판단은 어떤 정치세력이 집권한 행정부인가에 따라 그리고 그 행정부가 시간적 변화 속에서 어떤 국내외적 상황 속에 처하느냐에 따라서 다소간에 변화와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할 필요도 없다. 아울러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안보 ·경제적 이익이라는 것에 대한 미국의 현실적 인식과 판단에 의해 언제나 부차화될 수 있다는 점이다.
  1977-78년 카터행정부 초반에는 미국의 대한 인권외교라는 것이 후반에 비해 상대적으로 강조되다가 1979년에 들어서면서 보다 현실주의적 권력정치의 논리로 변화한 측면이 있다는 것은 당시 주한 미국대사관과 워싱 턴 사이에 오간 미국무부 외교문서에 자주 등장하는 두 가지 화두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카터와 박정희 간의 한미정상회담을 개최하는 문제였고, 다른 하나는 주한미군 철수계획을 재조정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통틀어 미 외교문서는 한미간 관계정상화로 표현하고 있다. 미국이 내세운 그에 대한 명분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소련의 위협에 대한 강조,즉 신냉전의 사고였고,그 다음은 한국정부가 그 직전에 미국의 권고를 받아들여 김대중을 석방했다는 사실이었다.
  1979년 초 한국의 정치상황은 유신체제는 물론이고 당시 한국내 정부비판세력이 제기하는 최대 이슈였던 긴급조치 9호가 엄존하는 상황에서 김대중 석방을 비롯한 몇몇 미미한 정치적 조치들만 개별적으로 이루어진 상황이었다. 그러나 1979년의 한미관계는 미국이 그러한 '인권상황의 개선'과 소련의 위협을 새삼 강조하면서 한미관계 정상화를 대한국 외교의 최대 목표로 거론하는 가운데 분위기 일신이 모색되고 있었다 이것이 1979년 10월 26일의 박정희 유고와 뒤이은 12 · 12군사쿠데타 이전 약 1년여간 미국무부 외교문서를 지배한 문제틀이었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우리가 이 글에서 카터행정부 4년 기간의 중간과도기라고 규정한 1979년 초 미국이 한국의 인권과 민주주의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가는 존 글렌 미상원의원의 방한에 앞서 주한 미국대사관이 작성해서 국무부로 보낸 「한국의 인권상황 관련 글렌 상원의원을 위한 브리핑 페이퍼」에 잘 요약되어 있다. 이 브리핑의 주요 부분을 그대로 옮겨보자,
  박대통령의 제5기 대통령 취임에 즈음해 한국정부는 가장 저명한 정치범인 김대중을 석방했다. 몇몇 정치범들은 아직 감옥에 있지만 석방된 사람들도 있다. 이 조치들은 인권 준수에서 몇 가지 진전이 있었던 지난 한 해의 결과를 마무리 하는 것이다. 1978년 한국정부는 언론에게 이슈들을 다루고 정부를 비판하는 데 있어 이전보다 많은 자유를 주었다. 한국정부는 국회의원들에게도 정부를 비판할 자유를 더 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정부는 비판세력(dissidents)을 다루는 데서도 더 관용적으로 되는 것 같다. 그들이 전보다 더 강경한 성명서를 발표할 때도 그들을 기소하는 것을 자제하는 것 같다. 정부당국은 총선거기간에 후보자들이 긴급조치들을 철폐할 것 등을 포함한 이슈들을 거론하는 것을 의미 있는 정도로 더 허용했다. 또 깨끗한 선거를 운영했으며 (총유효투표 중에서 집권당이 2위를 기록하는) 결과를 수용했다. 이것들은 부인할 수 없는 긍정적 조치들이다. 다른 한편 언론은 일정한 한계 안에서 활동했다. 비판세력이 그들의 견해를 전파하려는 노력들은 실질적으로 좌절되었다. 정부는 투표에서 과반수를 얻지 못했지만 계속해서 국회를 통제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한국정부는 정치적 의견표현과 정치활동에 더 많은 자유를 허용했지만 유신헌법이 정한 테두리 안에서였다. 이것이 비판세력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다. 한국정부는 유신체제 제2기 6년의 출범과 때맞춰 체제정비를 시도하고 있다. 한국정부는 이 기회를 이용해 사회정책을 더 많이 강조하거나 정부에 대한 더 많은 참여의식을 국민들에게 불러일으키려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정부가 그렇게 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자신의 조건에 따라 추진할 것이며 약한 위치에 몰려서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나라가 (북의 남침-역자)위협에 직면해 있으며 이런 상황에서 어느 정도의 정치적 제한은 정당화될 수 있다고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믿는다. 많은 한국인들이 아직도 역사적 문화적 요인들 때문에 강력한 정부를 받아들일 필요를 느끼고 있는 것도 틀림없이 사실이다. 이런 사람들은 한국이 근대화됨에 따라 분명 적어지고 있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유신헌법에 내포된 제약들의 내용이 정확하게 모든 한국인들에게 만족스러운 것이라는 합의가 한국인들 사이에 존재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당분간 그러한 제약들 속에서 살아갈 능력과 용의를 갖고 있다는 증거들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이들은 정부에 의해서 억압받고 있다고 느끼지 않는다. 동시에 그들은 미래의 정부에 대한 국민의 더 높은 수준의 참여를 희망한다. 한국정부는 미국을 포함한 외부적 원천으로부터의 압력에 응해서.자신의 인권정책을 수정하기를 꺼리고 있다. 더구나 한국의 주목할 만한 발전은 민족주의를 고조시켰다. 비록 한국인들이 (미국-역자) 제안한 (인권개선 관련-역자)사항들에 기본적으로 동의한다 하더라도,한국 여론의 주요 부분은 한국인들에게 그들의 법이나 행태를 수정하라고 (미국이-역자) 공개적으로 압력을 넣는 것을 혐오할 것이라고 우리는 믿고 있다. 우리는 한국에서 인권이 꾸준히 개선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최선으로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은 '우호적이며 튀지 않는 충고'일 것이다.
  이 전문에서 볼 수 있는 당시 미국의 대한국 인식과 정책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미국은 1978년 1년간에 한국에서 인권문제가 많이 개선되었다고 간주하고 있다. 유신체제 자체는 물론 긴급조치가 여전히 국민의 기본권을 유린하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그런 정치를 비판하다 감옥을 들락거리고 있었지만 미국은 그 직전에 있었던 총선거과정과 김대중 석방을 들어 한미관계를 '정상화'하는 데 충분한 인권개선의 명분이 섰다고 보았다. 즉 한국정부가 충분한 성의를 보였다고 판단하고 이를 강조했다. 다른 문서에서도 글라이스틴 당시 주한 미대사는 미 국무부가 연초마다 펴내는 세계 인권보고서 한국부분에서 인권개선이 있었다는 점을 강조하라고 주문하고 있다. 워싱턴으로 보낸 1979년 1월 10일자 전문에서 그는 "우리는 1978년에 한국에서 실제로 어느 정도 인권문제 개선을 이룩했다는 것을 워싱턴의 정부당국자들에게 상기시켜 주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고 있다.
  둘째,미국은 한국국민이 '역사적 문화적 요인들 때문에' 그리고 북한의 위협 때문에 유신체제와 같은 강력한 정부를 사실상 필요하다고 생각하거나 적어도 용납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즉 한국인들이 유신체제를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는 상황에서 미국의 인권압력은 무의미하거나 효과가 없다는 주장인 셈이다. 한국국민이 유신체제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인식은 박정희정권에 대한 미국의 협력정책을 정당화할 근거로는 더없이 중요한 점이다. 글라이스틴은 이 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는 자신이 서명한 이 브리핑 페이퍼에서 '지난 총선거의 결과는 한국국민들이 유신체제를 정열적으로 지지한 것을 나타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유신체제를 거부한 것도 아니라는 것을 증거한다' 고 주장하고 있다.
  셋째,이 문서는 위와 같은 인식에 기초해서 미국의 대한 인권정책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미국은 공개적으로 한국정부를 비판하는 정책을 펴서는 안되며 박정희정권과 기본적으로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는 가운데 '눈에 튀지 않는' 충고의 방식으로 인권문제에 접근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것은 미국이 1977-78년 다소 불편했던 한미관계를 정상화하는 데 필요한 인권부분의 입장을 정리하는 기본문서라고 할 수 있겠다. 조용한 충고로 인권문제를 거론하되,박정희 유신정권과의 우호적 협력관계를 재확인하고 발전시키겠다는 것이었다. 이 점은 ·1979년 2월 12일 미국무부 동아시아 담당부서가 서울 미 대사관에 보낸 전문에 담겨 있다. 이 문서에는 그 무렵 워싱턴을 방문한 문형태 의원과의 대담에서 당시 동아태담당 차관보였던 리처드 홀브루크가 "미국의 한국에 대한 인식은 미국을 방문한 한국관리들이 코리아게이트와 인권문제 등에 관해 공격적인 질문을 받곤 했던 지난해에 비해 크게 개선되었다"고 지적한 것으로 나와 있다. 이에 대해 문 의원은 그 자신도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개선된 것을 느꼈다"고 화답한다.
  1979년 1월 이란에서 샤 친미독재정권의 폭력적 몰락이 1979년 초 미국의 대한정책에 파장을 불러일으켰을 가능성을 부인할 수 없다. 미국은 한편으로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한국국민이 유신체제를 적극 지지하지는 않지만 거부하고 있는 것도 아니라고 인식하고 상당한 인권개선이 있었다고 자기만족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면서도 안정된 동맹정권으로 인식했던 이란의 독재정권이 일시에 몰락하자 한국의 유신정권에 대해서도 일말의 불안을 갖게 되었을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래서 1979년 초 미국무부 외교문서에는 첫째,한국에서 혁명적 위기를 조장할 수 있는 정부의 강제력 남용을 자제할 것을 종용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미국은 그 두번째 요소로서 김대중과 같은 영향력 있는 반정부 지도자들과 그들을 따라 정부에 강경대응할 준비가 되어 있는 추종세력 사이의 연결고리를 차단하기 위한 정부의 조치들은 필요한 것으로 인식하는 태도를 드러낸다. 또 그렇게 해낼 수 있는 박정희 정권의 정치적 능력과 수완에 기대를 걸고 있는 듯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미국은 박정희정권이 김 대중이나 그의 추종세력 그리고 학생들이 박정권에게 어떤 실질적인 위협을 주기는 힘들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1979년 2월 17일의 전문에서 글라이스틴은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춘계 투쟁전선이 다시 그어지고 있다. 우리는 반정부세력이 박정권에게 더 강하게 도전하고 정부 역시 단호하게 대응할 것으로 기대한다. 우리는 박정권에게 어떤 실질적인 위협이 가해질 것으로는 예상하지 않는다. 마찰의 불꽃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부는 안정을 유지할 수 있는 많은 자원들을 장악하고 있다. "
  한국에서 반정부세력의 진정한 잠재력과 그에 바탕한 정치적 도전과 격동 가능성에 미국이 눈을 돌리게 되고 그래서 이란사태 재연의 먼 가능성이나마 직접적으로 두려워하게 되는 것은 10월 부마항쟁과 10 · 26이라는 사태가 전개된 후였다고 할 수 있다. 1979년 초의 상황에서 미국은 한국의 정치적 사태가 박정희 정권의 불안정을 초래할 정도로 심각해질 것으로는 예상하지 못하였다. 미국이 1979년 박정희정권과의 전반적인 관계개선을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었다면 그 기초의 하나는 박정희정권의 정치적 안정확보 능력에 대한 신뢰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박정권에 대한 기본적 신뢰와 일부 인권개선이 이루어졌다는 정당화를 바탕으로 미국이 1979년 초 추진한 한미관계 정상화는 크게 두 가지 작업으로 투영되고 있었다. 하나는 1979년 여름경 한미정상회담을 서울에서 개최하는 문제였고, 다른 하나는 한미동맹 관계를 재확인하고 강화하는 맥락에서 주한미군 철수논의를 수정하는 문제였다.
  카터 대통령은 1979년 2월 9일 언론인들과의 대담에서 "한국으로부터의 미군철수는 잠정적으로 중단하며 몇 가지 북아시아의 사태전개에 대한 재평가에 따라 결정한다"고 발언했다.  이 전문은 당시 한국언론들의 반응을 조사한 것으로,당시 한국언론들은 카터행정부의 미군철수문제 재평가 발표를 단지 수사적인 제스처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하면서 미군은 궁극적으로 철수할 것이라고 보는 경향이 강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또 이 전문은 이란에서쳐럼 한국에서도 미국의 안보공약이 허구적인 것이 아닌가라는 등의 강한 의구심을 갖고 있다고 한국의 반응을 분석했다. 이 전문의 내용을 보면 당시 한국언론에서는 아직 미국의 신냉전주의와 군사주의로의 복귀경향,그리고 그와 연관된 박정희정권과의 관계정상화 의지를 충분히 파악하고 있지 못했던 것으로 판단할 수 있겠다.
  1979년 3월 21일 글라이스틴이 한미정상회담의 의의와 초점에 대해 건의한 전문은 그해 여름에 있을 카터-박정희 사이의 정상회담이 인권문제에 대한 한때의 불행했던 한미관계를 청산하고 신냉전의 기풍에 걸맞는 미국의 대한반도 안보공약 확인에 초점이 맞추어진 이벤트로 기획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전문에서 글라이스틴은 정상회담 장소를 서울로 할 것인가 워싱턴으로 할 것인가,또는 괌이나 하와이로 할 것인가를 거론하고 있다. 그는 서울을 제일의 선택으로 추천하고 있다. 괌이나 하와이에서 정상회담을 개최하는 것은 한국의 '종속적 지위'를 드러내는 문제가 있기 때문에 고려대상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어서 그는 워싱턴에서 회담을 여는 것은 동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안보공약을 천명하는 효과가 반감되고 불행했던 한미관계를 협조적 한미관계로 전환하려는 미국의 의지를 과시하는 효과 역시 반감된다고 시사한다. 반면에 서울에서 정상회담을 갖는 것은 한국의 인권문제와 관련해 골치 아픈 점이 없지는 않지만 그래도 가장 적합하다고 주장한다. "우리들 거의 모두는 이번 여름 서울에서 정상회담을 갖는 것이 제일의 선택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박정희가 워싱턴을 방문하는 것보다는 서울에서의 정상회담이 동아시아에 대한 우리의 안보공약을 표상하는 데 훨씬 나을 것이며 한미관계에서 매우 불행했던 한시기의 종결을 상징하는 데도 훨씬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건의하고 있다.  이 전문에서 글라이스틴은 더 분명한 표현으로 1979년 여름 카터의 한국방문과 박정희와의 정상회담은 인권문제 차원을 부차적으로 미룬 가운데, 한국에서 미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