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2007-05-15
[광주민중항쟁 총일지]도청 함락 - 최후의 항쟁
본문
제 5 장 도청 함락
제 1 절 최후의 항쟁(27일 00:00 - 06:00)
외곽지역의 시민들로부터 계엄군이 쳐들어온다는 제보가 속속 들어오고 도청 행정전화가 끊기자 도청 상황실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홍보부에서는 시민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고 결정하고 광주시내 전지역을 돌면서 마지막 가두방송을 했다.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형제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숨져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일어나서 계엄군과 끝까지 싸웁시다." 애절한 여자의 목소리가 정적을 가르고 울려퍼졌다. 도청과 YWCA에서는 최후의 접전을 앞두고 전열을 가다듬었다.
항쟁 10일째!
27일 새벽 계엄군은 가공할 무기를 앞세우고 충정작전을 개시한다. 영용한 시민군은 계엄군에 맞서 목숨을 걸고 끝까지 싸웠으나 뒷담을 넘어 들어온 특공조의 후방공격과 무차별한 사격으로 순식간에 전투력을 상실당하였으며, YWCA를 지키던 사람들도 총 몇 방 쏘아보지 못한 채 진압되고 말았다. 광주항쟁 전기간을 통해 가장 많은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했다. 콩볶는 듯 울리는 총소리에 광주시민들은 분노와 통곡의 밤을 지새웠다. 동이 터올 무렵 계엄군은 시체와 부상자를 헬기와 트럭에 싣고 어디론가 떠났고, 생존자들은 도청 방화자, 총기소지자, 특수폭도로 분류되어 군부대로 이송되었다.
시민들은 밖으로 나오지 말라는 경고방송 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모자에 흰띠 를 두른 계엄군이 거리를 소독했다.
27일 00:00 계엄군의 진입로
- 양평 20사단 : 지원동-광주천-적십자병원-도청 남쪽
양평 20사단 : 지원동-학동-전남대병원-도청 후문
양평 20사단 : 백운동-한일은행-도청 정문
- 상무대 병력 : 화정동-양동-유동 삼거리-금남로-도청 정문
- 31사단 : 계림국교-시청-도청 북쪽
- 7공수 : 광주공원
- 3공수 : 도청
- 11공수 : 관광호텔과 전일빌딩 (1980년대 민주화운동)
- YMCA에서는 농성중이던 2백여 명이 모두 도청으로 들어가 무장한 후 전일빌딩, YWCA, 계림국교로 배치되었다. 또한 박영순(여, 21, 송원전문대 2년)은 지프차를 타고 가두방송에 나서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공격해 오고 있습니다. 우리 형제자매가 계엄군의 총칼에 죽어가고 있으니 전시민은 도청으로 오셔서 무기를 들고 싸웁시다"고 대인동, 신역, 시청, 산수 오거리 등지를 돌며 간절한 목소리로 호소, 많은 시민들이 도청으로 몰려와 속속 총을 들었다. (신동아, 1985. 10)
- 시내전화 끊김.
충정작전
가. 작전개념
은밀 침투 기습 및 동시 목표 제압 작전, 외곽도로 및 배치선 차단 작전(봉쇄선 형성), 특정목표 은밀 침투 타격작전(도청, 공원, 관광호텔, 전일빌딩), 내곽에 대한 동시공격 및 특공부대와 연결 공격 후 주요지점 배치 및 작전 소탕, 계속적인 무기회수 및 선무활동.
26일 23:00 - 27일 08:00 3여단 도청 특공작전 실시 보병에게 인계 후 K-57로 철수.
26일 23:15 - 27일 07:00 11여단 전일빌딩, 관광호텔, YWCA 특공작전 실시, 보병에게 인계 후 K-57로 철수.
27일 01:00 - 05:40 7여단 광주공원 특공작전 실시, 보병에게 인계 후 K-57로 철수. (말, 1988. 8)
작전 지도지침(20사단 작전일지)
1. 이 작전 명칭은 '충정'이라 칭한다.
2. 지하실 작전시 가스탄 사용으로 무력화시킨 후 공격.
3. 공격간 폭도들에 대한 사격은 가급적 하복부에 지향한다.
4. 전차 및 APC는 피배속부대 요청에 의해 지원되며 자동적으로 배속 전환된다.
5. 중대단위로 안내 경찰 2명씩 운용목표에 이르는 통로를 안내토록 할 것.
6. 목표확보 후 책임지역내 행정기능 복구에 최대한 노력(파출소, 동회 기능 복구, 경찰, 예비군, 반장 소집)
7. 외국인 거주지에는 '외국인 우선 보도' 방송 실시 및 경계방책 강구 및 저명인사 가옥 주변 부대배치 보호할 것.
8. 예행연습 실시.
9. 작전은 불순분자 생포 위주로 실시하되 불가시는 무력화한다.
10. 목표확보 후 소대를 관측이 용이하고 자체 방호가 용이한 건물 또는 요지요부에 배치할 것.
11. 보안유지를 철저히 하고 무선사용을 금지하여 유선을 음어화할 것이며 제한된 관계관만 계획 발전.
12. 작전부대간 상호 긴밀한 사전협조를 할 것이며, 특히 31사단과는 소대장, 분대장급에 취할 행동에 의한 세밀한 협조를 할 것(정웅 31사단장의 이탈에 따른 조치인 듯-편집자주).
13. 양민에게 피해가 없도록 최대한 노력하라.
14. 주도로 위주 작전을 지향하고 주도에서 지선도로 또는 지선도로에서 주도 로로 공격을 병행 실시한다.
15. 작전간 우발사태 발생에 대한 대비책을 발전시킬 것.
(1) 강력한 폭도와 접촉시 공격을 위해 재집결해야 할 집결지 선정.
(2) 건물 내부 TNT 처리 및 사전 파악된 기관총 진지 제거방책 강구.
(3) 폭도들의 특공대 편성 기습 방지책.
(4) 민간인을 인질로 폭도가 완강한 저항시 대책.
16. 작전시행을 위한 추가지원 사항을 판단 보고.
17. 약정된 우군부대 표지를 하여 상호 오인사격을 하지 않도록 할 것.
18. 이 작전은 명에 의거 실시한다. (말, 1988. 8)
- 26일 광주비행장에 집결되어 정비중인 제11특전여단은 1개 중대 규모의 특공조를 편성하여 전일빌딩에 있는 방송국과 관광호텔을 점령하라는 작전명령을 전교사에서 수령하고 제61특전대대 4중대를 특공조로 편성, 동일 18:00에 특공대를 UN-1H 5대로 주남마을로 이동시켜 제20사단 61연대와 합류시켜 작전을 협조한 후 23:15분에 침투를 개시하였다. 익일(27일) 01:50분에 임무지원 지점으로 선정한 조선대학교 뒷산에 도착하여 최종적인 작전준비를 완료하고 동일 03:30에 은밀히 목표지역으로 이동 04:00에 목표 전일빌딩과 관광호텔을 완전히 점령했다. 당시 진압작전 상황은 3여단이 도청, 7여단이 광주공원에서 폭도들과 치열한 교전이 계속되고 있어 그곳을 지원하기 위해 충장로를 우회하여 도청을 측방에서 공격하라는 작전명령을 하달하여 작전팀은 1개 지대로 전일빌딩과 관광호텔을 경계하고 2개 지대를 중대장이 인솔하여 도청으로 이동중 05:15분에 YWCA 건물 앞에서 30여 명의 폭도들로부터 사격을 받아 도청으로의 진출이 저지되고 현장에서 약 1시간 동안 폭도들과의 치열한 교전이 계속되어 과감한 공격으로 06:20에 YWCA 건물 내부를 완전 소탕하고 사살 3명, 포로 29명의 전과를 올리고 06:40 작전지역을 보병 제20사단 61연대에 인계 후 작전을 종료하였다. (특전사 전투상보)
02:00 새벽을 가르는 가두방송
- 계엄군이 진입하고 있다는 젊은 여자 목소리의 다급한 가두방송이 밤의 정적을 가르며 시가지를 울렸다. 방송을 들은 시민들이 도청을 향해 나왔다. 도청의 무장한 철야 시위대들은 드디어 계엄군에게 포위되었음을 직감하고 술렁이기 시작했다. '수류탄으로 자폭할 것인가, 그들의 총에 죽을 것인가' 두 가지 죽음의 길을 놓고 잠시 이견들이 무겁게 오갔다.
- 특전단의 돌격부대가 도청 앞에 도착, 포진. 군의 진입을 알게 된 도청 수비대는 도청 전방 1백 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YMCA에서 첫 사격을 시작.(월간조선, 1985. 7.)
- YWCA에서 밤을 새우던 50여 명의 여자는 인근 교회로 피신. 남자들만 20여 명 남았으나 총이 10정밖에 없어서 무기를 받으러 도청을 감.(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02:50
- 월산동에서 9지역대 유도병이 음주중이던 폭도 10-15명 발견, 전봇대에 은폐 후 수하, 10분간 교전으로 폭도들 도주, 계속 침투.
피해: 1명 사망. 5명 부상
전과: 1명 사살. 1명 생포(특전사 전투상보)
03:00 계림국민학교 앞의 치열한 교전
- 예비군 중대장이 30여 명의 시민군을 지휘했던 계림국교 앞 육교에서 치열한 교전, 포위될 것 같아 후퇴 명령. 20여 명이 계림국교 정문 쪽 담벽을 뛰어넘었으나 7명 남음. 총격전, 중대장 담벽 아래쪽 주택으로 피신, 허벅지 총상. (1980년 민주화운동)
* "6, 7명씩 한 조로 나뉘어진 기동타격대원은 YMCA에서 모여 각 조별로 자기소개를 하고 우리가 하는 일이 옳은 일임을 서로들 공감했다. 새벽 3시 계엄군이 외곽에서 쳐들어온다는 비상연락을 받고 개인당 총 1개와 실탄 2클립씩을 지급받고 20여 명의 대원이 계림국민학교 앞으로 갔다. 1개 분대는 계림동 육교 위에, 또 1개 분대는 육교 오른편, 마지막 분대는 왼편 육교 밑에 배치되었다. 우리 분대장은 예비역 장교라고 했다. 그는 '내가 명령하기 전에는 절대 총을 쏘지 말라'고 지시했다. 잠시 후 도청 쪽에서 대포소리, 카빈소리가 뒤섞여 들려왔다. 요란한 총소리가 들린 지 30여 분이 지나도 계림동 주변에는 계엄군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았다. 잠시 후 서방 쪽에서 계엄군이 침입할 것이라는 우리의 예상을 깨고 등뒤에서 계엄군이 나타났다. '계엄군이다!' 하는 외침과 함께 '드르륵' 소리가 들렸다. 재빨리 뒤돌아보니 계엄군 3명이 쪼그려총, 자세로 이동하고 있었다 . 막상 계엄군이 총을 쏘고 나타나자 온몸에 힘이 빠지고 두려운 생각이 든 나는 조재만과 함께 기어서 계림국민학교로 도망갔다. 우리가 '항복, 항복한다'고 아무리 소리쳐도 총소리는 그치지 않고 계속되었다. 그때 우리 대원 2명이 총에 맞 았다. 그들을 돌봐줄 여유가 없었던 우리는 하수구로 들어갔다. 그렇게 1시간쯤 지난 뒤 탱크와 장갑차가 지나다니는 소리가 들리더니 '하수구에 폭도들이 있을까?', '수류탄 하나 던져보자'는 말을 듣고 기겁을 한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항복'이라고 소리치면서 손을 들고 나갔다. 하수구에서 나오는 순간부터 죽도록 얻어터지고 포승줄에 묶여 광주고등학교로 끌려갔다. 우리보다 늦게 잡혀온 어떤 아저씨는 계엄군에게 반항하다 개머리판으로 맞고 실신했다. 계엄군이 그 아저씨 얼굴에 물을 끼얹었지만 영영 깨어나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광주고등학교에서 오후까지 개머리판과 군화발에 짓밟힐 대로 짓밟히다 오후 5시경 상무대로 연행되었다." (구술 : 이충용, 현사연 조사)
* "26일 밤 YWCA에 있는데 상황실장 박남선 씨가 그곳으로 왔다. 총을 잘 쏘고 죽음이 두렵지 않는 사람은 기동타격대에 가입하라고 했다. 그때 나는 기동타격대에 가입하여 계림국민학교 경계임무를 맡았다. 계엄군이 진입해 오면 계림국민학교 앞에서 맞서 싸우기 위해 도청에서 총과 실탄을 지급받고 계림국민학교로 갔다. 새벽 3시부터 운동장에서 도로 쪽으로 총을 겨누고 계엄군에 대응할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계엄군이 쳐들어 왔다'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M16 자동소총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고 총알이 핑핑 날아왔다. 총에 맞아 쓰러진 나를 계엄군이 때리고 짓밟는 사이 나는 정신을 잃었다. 광주고등학교에서 내가 깨어났을 때 이미 날이 밝은 후였다. 내 옆에는 계엄군 한 명이 죽어 있었고 우리 대원들이 붙잡혀와 있었다." (구술 : 신광성, 현사연 조사)
- 7, 3, 11공수부대 병력 투입(03:30분 작전 4호 발령). (전교사 작전일지)
03:30
- 계엄군 광주 전격 기습(지원동, 화정동 등 3개소에서 총격전).
- 계엄군(이 병력은 도청을 덮친 공수부대가 아니고 시일원을 장악하기 위해 도청탈환 뒤에 들어온 야전사단인 듯 - 편집자주) 새벽 3시 30분 집결지를 출발, 화순에서 도청 쪽으로, 송정리 방향에서, 시청과 서부경찰서, 담양에서 광주 방면 등 4개 코스를 통해 각각 진입.(월간조선, 1985. 7)
03:20 - 07:30
- 68연대 2대대 6, 8중대 투입
전과 : 사살 1, 생포 15
피해 : 전사 1 (20사단 전투상보)
04:00
- 31사 병력 시가지 압축.(전교사 작전일지)
주남마을 뒷산에서 목이 떨어져나간 아들 시체 발견
* "친구와 함께 외곽경비를 맡았던 내 아들은 27일 새벽 계엄군이 시내로 쳐들어오자 산속으로 도망쳤다고 한다. 주남마을 뒷산으로 깊숙이 들어가다 내 아들은 그곳에 주둔해 있던 계엄군의 총에 맞아 목이 떨어져나간 채 산속에 버려지고 아들 친구는 계엄군에게 생포되었다 한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뒤 시청에서 온 연락을 받고 주남마을 뒷산으로 갔다. 억장이 무너지는 슬픔으로 목이 떨어진 아들의 시체를 안고 돌아왔다." (구술 : 김차남, 현사연 조사)
04:10 잠자다 총에 맞아
* "천지를 뒤흔드는 듯한 총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아내는 잠자다 깬 후 벽에 기댄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괜찮을 테니까 이리로 와서 누우라고 손을 잡아끌어도 팔짱을 끼고 앉아서 무서워할 뿐이었다. 그때 와장창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유리창이 깨져 흩어진 방바닥은 금세 하얗게 변했고 아내의 가슴에서 피가 쏟아졌다. 아내는 자신이 총에 맞은 사실도 모르는지 그대로 앉아 있었다. 아내를 리어커에 싣고 전남대병원으로 옮겼다. 뒤늦게야 알게 되었는데 대인시장 부근에서 금남로를 향해 쏜 총알이 우리 집으로 날아든 것이다." (구술 : 김재수, 유복남, 현사연 조사)
- 3공수여단 11대대 1지역대
전과 : 사살 13, 체포 2백 명, 소총 3백 정, 무전기 15정, TNT 다량. (20사단 작전일지)
04:25
- 61연대 전남의대 일대에서 교전. (계엄사 상황일지)
04:30
- 20사 병력 시가지 압축. (전교사 작전일지)
04:30 - 06:30 도청 함락
- 새벽 4시 도청 앞 완전 포위. 금남로를 중심으로 시가전이 벌어짐. 계엄군의 서치라이트가 도청을 비추며 계엄군은 항복을 권유. '폭도들에게 경고한다. 너희들은 현재 완전히 포위되었다.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라!' 순간 시민군측에서 발사한 총탄이 계엄군의 서치라이트 박살냄. 계엄군이 일제사격 개시.
- 도청 배후 수비하던 40여 명의 시민군, 건물 앞쪽으로 불안한 채 이동. 공수대는 도청 뒷담을 넘어 시민군 사이로 섞여 들어오며 난사.
- 도청 민원실 2층. 윤상원 등 항쟁지도부 간부들과 40-50명의 청년, 학생들, 2층 난간을 중심으로 엎드려 사격. 고교생 저격당하자 윤상원, '이봐 정신차려' 하며 근접, 자기 위치로 돌아오기 전에 윤상원 쓰러짐.
- 공수대, 2층 창 너머까지 근접. 시민군측의 실탄은 죽어 있던 동료의 것마저도 바닥이 나버림. 사기가 떨어지며 '항복, 항복' 외침. '무기를 거꾸로 창밖에 내밀어'. 곧장 창 너머로 뛰어든 공수대원, 시민군을 구석에 엎드리게 하고 실내 곳곳에 연발로 사격.
- 옆방 입구에 총을 대고 '모두 총을 버리고 기어나와' 하자 셋이 나옴. 공수대원, 그들을 한쪽으로 제치고 실내에 수류탄 던짐.
- 난간에 모인 시민군 포로는 손을 뒤로 결박당한 채 엎드린 10여 명뿐. 공수대원은 시민군의 M2 카빈을 집어 왼손으로는 M16을 그들에게 겨눈 채 도청 정문 쪽으로 필사적으로 도망나가는 시민군 1명 사살. 바로 그때 8명의 시민군이 무장 해제한 채 두 손을 쳐들고 항복하며 도청 앞뜰로 걸어나옴. 그 공수대원은 같은 자세로 8명의 투항자 전원 사살.
- 날이 훤해지자 계엄군은 항복한 시민군에게 총구를 시민군 자신에게 돌리고 기어나오도록 지시. 조금이라도 자세가 이상하면 사정없이 발사. 총을 빼앗고 군화발로 닥치는 대로 걷어차며 욕을 퍼붓고 등에다 '극렬', '실탄 10발', '권총 소지'등 분류기준에 따라 매직으로 휘갈김. 포로들은 손을 뒤로 묶인 채 포복으로 계단까지 접근. 계단에서는 그대로 굴러떨어져 고개를 들 수 없는 그런 식의 포복으로 도청 정문까지 기어가 도청 앞 광장에 대기중이던 군용 차량에 실림. 외신기자 비디오로 모두 녹화. 계엄군, 시체를 모두 끌어냄. (1980년 민주화운동 )
- 61연대 1대대 1중대 투입
전과 : 사살 1, 생포 2, 카빈 1,800, M1 400.
피해 : 없음. (20사단 상보)
* "30여 명의 시민군과 함께 도청 2층 강당에 있는데 총성이 울렸다.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들리고 비명소리가 요란했다. 나는 기어서 그쪽으로 갔다. 총알이 배를 관통해 쏟아지는 피로 주위는 빨갛게 물들었다. 나는 재빨리 옷을 벗어 지혈을 시키고 이불을 덮어주고 돌아섰다. '쾅!' 하는 굉음에 놀라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방금 총에 맞아 쓰러져 있던 동지(5.18 때 함께 활동한 사람을 동지라 칭함-편집자주)는 온데간데 없고 내가 덮어줬던 이불만 천정 형광등에 걸려 있었다. 내가 가지고 있던 총도 반쪽이 날아가버렸다. 공수들이 도청을 침입하면서 수류탄을 던진 것이다. 도청 정문 앞으로 장갑차와 탱크가 들어왔고 도청 뒤쪽에서도 총소리가 들렸다. 도청 앞에 공수들이 모습이 드러나자 나는 강당에서 총을 쏘기 시작했다. 2층 계단으로 공수들이 들어오자 2, 3명이 화장실로 숨었다. 콩볶는 듯한 총소리 때문에 한층 두려움이 심해졌다. 화장실에 있다가는 흔적도 없이 죽을 것 같아 손을 들고 나갔다. 우리를 본 공수들은 폭도들은 계단으로 내려갈 자격이 없으니 2층에서 나무를 타고 도청 앞 마당으로 내려가라고 했다. 공수의 위압적인 기세에 눌려 반항이라는 것은 생각도 못 하고 건물 앞에 있는 나 무로 뛰어서 그 나무를 타고 도청 마당으로 내려갔다. 두 다리에 땅에 닿자마자 밑에 대기하고 있던 공수들로부터 살인적인 구타를 당한 뒤 포승줄에 묶어 땅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그때부터 본격적인 구타가 시작되었고 약 2시간 후 상무대 헌병대 영창으로 끌려갔다." (구술 박내풍, 현사연 조사)
* "전날 밤 늦게 1백여 명의 시민,학생이 계엄군의 침입에 대비한 총격술 교육을 받고 50여 명은 도청으로 가고 나머지는 그곳에 남아 잠을 잤다. 얼마나 지났을까, '계엄군이 쳐들어왔다!'는 다급한 외침을 듣고 잠에서 퍼뜩깼다. 우리는 동료들을 깨워 일시에 도청으로 달려갔다. 도청 정문 앞 수위실에서 카빈과 실탄을 지급받고 도로변에 놓여 있는 화분대에 몸을 숨긴 채 총을 겨누고 있었다. 그로부터 몇 분 후 탱크와 장갑차를 앞세운 계엄군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계엄군이 사방을 향해 총을 갈겨대자 도청에 있던 사람들이 도청으로 빨리 들어오라고 소리쳤다. 우리가 도청으로 들어가자 12명씩 조를 편성하여 각기 다른 임무를 부여했다. 나는 도청 뒤에 있는 도경찰국을 사수하라는 명령을 받고 조원들과 함께 그곳으로 갔다. 잠시 후 계엄군이 30미터 전방까지 왔으나 우리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들은 철모에 흰 띠를 두르고 양쪽 어깨에 실탄을 대각선으로 차고 있었다. 계엄군이 우리가 지키고 있던 초소 앞을 지나자 무서워서 도경찰국 지하실로 갔다. 잠시 후 계엄군이 긁어대는 총소리에 놀라 나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옆방으 로 갔다. 거기에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이제는 꼼짝없이 죽었구나'하는 자포 자기한 심정으로 바닥에 벌렁 누워버렸다. 그때 계엄군 1명이 와서 드르륵 총을 쐈다. 나는 다리에 총을 맞았다. 조금 있자 2명의 계엄군이 와서 총에 맞은 사람들을 끌고 갔다." (구술 : 박병준, 현사연 조사)
04:40 YWCA 격전
- YWCA. 새벽 무렵부터 공격 시작. 안에는 문화선전조와 고교생, 근로자들이 방어중. 3층에서 '우리는 무기를 안 가졌다. 살려달라'고 소리침. 계엄군은 '모두 옷을 벗고 나오라' 하면서도 M16 발사. 여기에서 박용준, 공수대원과 교전하다 사살당함. 2층 양서조합 사무실에는 핏물이 고였고 서가의 책 속에는 탄환이 무수히 박힘. (1980년대 민주화운동)
- 11공수여단 61대대 4중대 투입
전과 : 사살 2, 생포 29, 카빈 31, 탄약 1,500발
피해 : 부상 2 (20사단 상보)
* "YWCA 2층 강당에서 보초를 교대하고 잠자리에 누우려는데 비상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도청에 있던 사람이 실탄을 가지고 와 지급하면서 '돌고개 쪽에서 계엄군이 진입하고 있다'고 말했다. 조금 후 도청 쪽에서 LMG와 M16 소리가 끊이지 않고 계속 들렸다. 30분쯤 지나자 천지를 진동하던 총소리가 잠잠해지는가 싶더니 내가 있던 YWCA 앞에서 총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캄캄한 밖을 향해 총을 쏘았다. 그야말로 동족끼리의 한맺힌 전쟁이었다. 우리는 사방을 포위당한 상태에서 얼마간 응사했지만 보이지도 않는 적을 향해 계속 총을 쏠 수 없어 중단했다. 동틀 무렵까지 일방적으로 총을 갈긴 계엄군에 의해 그곳에서 시민군 2명이 사망하고 다수가 부상당했다. YWCA 1,2층에 있던 시민들이 날이 밝자 항복을 했으나 나는 그때 항복하면 분명히 몰살당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2층에서 뛰어내려 탈출에 성공했다. 그러나 삼엄한 계엄군의 경계를 무사히 벗어나기가 어려워 인근에 있던 민가로 가서 이틀을 숨어 지냈다. 그동안 라디오에서 폭도들은 자수하라고 떠들어대고, 내가 숨어 있던 집에까지 계엄군이 들어오자 집주인 아저씨가 자수 권고 신고를 하여 상무대로 잡혀가게 되었다." (구술 : 김한중, 현사연 조사)
* "나는 대학생 한 명과 함께 YWCA 1층 회의실에 배치받고 경계를 서고 있는데 도청에서 총소리가 들렸다. 2층에서 한 청년이 허겁지겁 뛰어와서 도청을 향해 총을 쏘라고 했다. YWCA 1층에서 도청을 향해 지원사격을 한다는 것은 무리였으나 공중을 향해 무조건 발포했다. 잠시 후 공수들이 YWCA를 향해 발포하자 나는 기어서 부엌으로 갔다. 전일빌딩 옥상에서 공수 2명이 우리를 향해 총을 쏘는 것이 보였다. 여기저기에서 총에 맞아 질러대는 고함소리, 신음소리가 들렸다. '총에 맞았으니 그만 쏴라'고 외쳤으나 총성은 그치지 않았다.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 총알이 벽에 부딪히는 소리가 우리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나와 함께 있던 여학생은 가슴에 총을 맞아 등에 구멍이 뚫렸다. 그 여학생은 어깨를 심하게 떨면서 살려달라고 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여학생이 '총에 맞았으니 그만 쏴라'고 하자 '손을 들고 나와라'고 했다. 공수들이 그 여학생을 보더니 '이 상년, 집에나 처박혀 있지 가시내가 뭐 하러 여기를 나와, 이런 년은 죽여야 돼' 하면서 끌고 갔다. 포승줄에 묶여서 도청 쪽으로 가면서 얼핏 보니 공수들이 YWCA를 향해 사격을 하고 있었다." (구술 : 이덕준, 현사연 조사)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부근 접전
* "지역경비를 맡은 7, 8명과 함께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부근 건물에 있던 중 잠깐 잠이 들었다. 새벽녘에 요란하게 들리는 총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총소리가 점차 가까이 들리자 우리도 공중을 향해 총을 쐈다. 그 순간 바로 옆건물 옥상에서 우리를 향해 집중사격을 했다. 우리도 그곳을 향해 필사적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그때 내 친구가 총에 맞아 쓰러졌다. '더 이상 총을 쏘지 마시오'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그는 죽었다. 나도 다리에 파편을 맞았다. 함께 있던 사람들은 어느새 빠져나가고 없었다. 여기에 있으면 개죽음당하겠다고 생각한 나는 친구를 안고 3층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려 주변 민가로 숨어들었다. 잠시 후 공수들 이 폭도는 자수하라는 방송을 했다. 9시경 자수하여 시외버스 공용터미널로 끌려 갔다. 우리랑 같이 있다 먼저 빠져나간 시민군들이 이미 잡혀와 있었다. 우리는 상무대로 이송됐다. 그곳에서 곡괭이 자루로 얻어맞는 등 무수한 고초를 치뤘다 ." (구술 : 조성환, 현사연 조사)
헬기로 군방송 시작
- 전남북계엄분소 경고문 1호 발표
1. 옥내외 집회는 일절 금한다
2. 공무원, 전행정관리 인원은 오전 7시 30분까지 출근하라. 출근치 않을 경우는 근무이탈로 간주한다.
3. 습득 발견한 총기나 탄환 폭발물은 인근 경찰서나 파출소에 반환하라.
4. 이상과 같은 경고 위반시는 엄중 처단한다. 전남계엄분소 소장 소준열. (월간조선, 1985. 7)
04:55
- 3공수 도청 탈환, 완전 점령. (전교사 작전일지)
05:00 계엄분소장의 첫 담화 발표
- '폭도들은 투항하라', '도청과 광주공원도 군이 장악했다', '너희들은 포위됐다', '총을 버리고 투항하면 생명은 보장한다', 광주 KBS 방송은 군이 시내에 진입했음을 알리는 이 같은 방송을 되풀이했다. 간간이 행진곡도 들려줬다. '돌아 온 병사', '콰이강의 다리'. (월간조선, 1985. 7)
05:04
- 11공수 관광호텔, 전일빌딩 점령(생포 3).
- 광주보병학교 외곽배치 완료.
- 공설운동장, 광주천변, 백운동 철도 건널목 포교 병력 완전 장악. (전교사 작전일지)
05:06
- 7공수 광주공원 탈환, 완전 점령. (전교사 작전일지)
- 광주시 주요 공공기관을 계엄군이 점거.
05:10
- 62연대 1대대 도청 병력 증원.
- 06:00경에 61연대에 인계하고 철수.
- 남자 12, 여자 6명 등 사직공원에서 계엄군에 붙잡혀. 신원이 불확실한 남자 10명이 연행됨.
- 변두리에서 확성기로 '시민들은 나와서 싸우자'는 가두방송. (월간조선, 1985. 7)
05:20
- 61연대 2대대 광주경찰서 진입.
05:22
- 도청 잠적 폭도 소탕 완료.
05:23
- 광주시 점령 완료.
05:40
- 시내 곳곳에서 교전이 재개되어 총성이 계속. (월간조선, 1985. 7)
05:53
- 62연대 2대대, 폭도 15명과 대치 교전. (전교사 작전일지)
06:00
- KBS 방송을 통해 '폭도들은 진압됐다. 시민들은 위험하니 집 밖으로 나오지 말라'. 또 영어로 외국인에 대한 방송도 있었다. 방송은 '계엄군이 폭도 2명을 사살하고 2백7명을 체포했다. 폭도들은 진압됐지만 일부 잔당들이 주택가에 칩입하려 한다. 폭도들은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면 생명을 보존할 수 있으나 거부하면 사살된다'는 경고방송도 했다. 또 비행기와 헬기에서도 고성능 스피커를 통해 시민들에게 공중에서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경고했다. 날이 밝기 시작하자 밤새 불안했던 시민들은 창밖을 내다보고 조심스럽게 골목까지 나와 주위를 살펴보기도 하고, 시민들은 골목길에서 이웃과 함께 지난밤 사태에 대해 얘기를 나눴으며 큰길 쪽으로 나가려다 계엄군의 저지로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도 보였다.'경찰과 공무원들은 오전 9시까지 소속 관서로 복귀하라'는 계엄군의 지시가 KBS 방송을 통해 전해지자 오전 8시쯤부터 길거리에 출근하는 모습이 보였고, 계엄군은 길 곳곳에서 통행인의 신분을 확인한 뒤 경찰과 공무원을 통과시켜 줬다. 광주경찰서는 경찰관들이 사복 차림으로 나와 업무를 보고 있으며 도경국장 등 경찰 간부들의 정상업무가 시작됐다. 도경과 시청 등 무장시민들이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건물에는 총알 자국이 여기저기 박혀 있고, 계엄군은 도청 앞에 탱크와 장갑차, 군 트럭, 헬기 등을 포진시켜 놓고 밀집경계를 하는 한편, 데모대가 달아난 지역을 집중수색중. 시내 각 가정과 여관에 군인들이 들어와 가택수색을 하였으며 신원이 불확실한 사람은 모두 연행해 갔다. (월간조선, 1985. 7)
- 도청 및 YWCA, YMCA 등지에서 체포된 나머지 생존자들은 일단 전교사 건설공 단으로 이송되어 계엄군에 의해 심문이나 대화 없이 10파운드 곡괭이 자루로 초죽음이 되도록 두들겨맞았다. 한 생존자는 24시간을 아무 말 없이 맞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한편 이날 계엄군은 일정지역을 포위하고 수색 후 다시 포위망을 넓혀 시내를 수색하는 방법으로 시내 전역의 가택을 샅샅이 수색, 수백의 청년들을 끌어갔으며 여인숙에서 잠을 자거나 길거리를 통행하고 있는 젊은이들은 시청, 아모레 화장품, 관광호텔 등으로 끌고 가 무자비한 고문과 폭력을 휘둘렀다. 나머지는 밤 8시경 헌병대로 끌고 갔다. 이후 계엄군은 시내 골목골목마다 삼엄한 경비를 펴 시민들이 창밖으로 쳐다보는 것조차 일절 금했다. (현사연 조사 종합)
- 목포. 도청에 계엄군이 진입하여 점거되었다는 소식 받음. (1980년대 민주화 운동)
제 1 절 최후의 항쟁(27일 00:00 - 06:00)
외곽지역의 시민들로부터 계엄군이 쳐들어온다는 제보가 속속 들어오고 도청 행정전화가 끊기자 도청 상황실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홍보부에서는 시민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고 결정하고 광주시내 전지역을 돌면서 마지막 가두방송을 했다.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형제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숨져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일어나서 계엄군과 끝까지 싸웁시다." 애절한 여자의 목소리가 정적을 가르고 울려퍼졌다. 도청과 YWCA에서는 최후의 접전을 앞두고 전열을 가다듬었다.
항쟁 10일째!
27일 새벽 계엄군은 가공할 무기를 앞세우고 충정작전을 개시한다. 영용한 시민군은 계엄군에 맞서 목숨을 걸고 끝까지 싸웠으나 뒷담을 넘어 들어온 특공조의 후방공격과 무차별한 사격으로 순식간에 전투력을 상실당하였으며, YWCA를 지키던 사람들도 총 몇 방 쏘아보지 못한 채 진압되고 말았다. 광주항쟁 전기간을 통해 가장 많은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했다. 콩볶는 듯 울리는 총소리에 광주시민들은 분노와 통곡의 밤을 지새웠다. 동이 터올 무렵 계엄군은 시체와 부상자를 헬기와 트럭에 싣고 어디론가 떠났고, 생존자들은 도청 방화자, 총기소지자, 특수폭도로 분류되어 군부대로 이송되었다.
시민들은 밖으로 나오지 말라는 경고방송 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모자에 흰띠 를 두른 계엄군이 거리를 소독했다.
27일 00:00 계엄군의 진입로
- 양평 20사단 : 지원동-광주천-적십자병원-도청 남쪽
양평 20사단 : 지원동-학동-전남대병원-도청 후문
양평 20사단 : 백운동-한일은행-도청 정문
- 상무대 병력 : 화정동-양동-유동 삼거리-금남로-도청 정문
- 31사단 : 계림국교-시청-도청 북쪽
- 7공수 : 광주공원
- 3공수 : 도청
- 11공수 : 관광호텔과 전일빌딩 (1980년대 민주화운동)
- YMCA에서는 농성중이던 2백여 명이 모두 도청으로 들어가 무장한 후 전일빌딩, YWCA, 계림국교로 배치되었다. 또한 박영순(여, 21, 송원전문대 2년)은 지프차를 타고 가두방송에 나서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공격해 오고 있습니다. 우리 형제자매가 계엄군의 총칼에 죽어가고 있으니 전시민은 도청으로 오셔서 무기를 들고 싸웁시다"고 대인동, 신역, 시청, 산수 오거리 등지를 돌며 간절한 목소리로 호소, 많은 시민들이 도청으로 몰려와 속속 총을 들었다. (신동아, 1985. 10)
- 시내전화 끊김.
충정작전
가. 작전개념
은밀 침투 기습 및 동시 목표 제압 작전, 외곽도로 및 배치선 차단 작전(봉쇄선 형성), 특정목표 은밀 침투 타격작전(도청, 공원, 관광호텔, 전일빌딩), 내곽에 대한 동시공격 및 특공부대와 연결 공격 후 주요지점 배치 및 작전 소탕, 계속적인 무기회수 및 선무활동.
26일 23:00 - 27일 08:00 3여단 도청 특공작전 실시 보병에게 인계 후 K-57로 철수.
26일 23:15 - 27일 07:00 11여단 전일빌딩, 관광호텔, YWCA 특공작전 실시, 보병에게 인계 후 K-57로 철수.
27일 01:00 - 05:40 7여단 광주공원 특공작전 실시, 보병에게 인계 후 K-57로 철수. (말, 1988. 8)
작전 지도지침(20사단 작전일지)
1. 이 작전 명칭은 '충정'이라 칭한다.
2. 지하실 작전시 가스탄 사용으로 무력화시킨 후 공격.
3. 공격간 폭도들에 대한 사격은 가급적 하복부에 지향한다.
4. 전차 및 APC는 피배속부대 요청에 의해 지원되며 자동적으로 배속 전환된다.
5. 중대단위로 안내 경찰 2명씩 운용목표에 이르는 통로를 안내토록 할 것.
6. 목표확보 후 책임지역내 행정기능 복구에 최대한 노력(파출소, 동회 기능 복구, 경찰, 예비군, 반장 소집)
7. 외국인 거주지에는 '외국인 우선 보도' 방송 실시 및 경계방책 강구 및 저명인사 가옥 주변 부대배치 보호할 것.
8. 예행연습 실시.
9. 작전은 불순분자 생포 위주로 실시하되 불가시는 무력화한다.
10. 목표확보 후 소대를 관측이 용이하고 자체 방호가 용이한 건물 또는 요지요부에 배치할 것.
11. 보안유지를 철저히 하고 무선사용을 금지하여 유선을 음어화할 것이며 제한된 관계관만 계획 발전.
12. 작전부대간 상호 긴밀한 사전협조를 할 것이며, 특히 31사단과는 소대장, 분대장급에 취할 행동에 의한 세밀한 협조를 할 것(정웅 31사단장의 이탈에 따른 조치인 듯-편집자주).
13. 양민에게 피해가 없도록 최대한 노력하라.
14. 주도로 위주 작전을 지향하고 주도에서 지선도로 또는 지선도로에서 주도 로로 공격을 병행 실시한다.
15. 작전간 우발사태 발생에 대한 대비책을 발전시킬 것.
(1) 강력한 폭도와 접촉시 공격을 위해 재집결해야 할 집결지 선정.
(2) 건물 내부 TNT 처리 및 사전 파악된 기관총 진지 제거방책 강구.
(3) 폭도들의 특공대 편성 기습 방지책.
(4) 민간인을 인질로 폭도가 완강한 저항시 대책.
16. 작전시행을 위한 추가지원 사항을 판단 보고.
17. 약정된 우군부대 표지를 하여 상호 오인사격을 하지 않도록 할 것.
18. 이 작전은 명에 의거 실시한다. (말, 1988. 8)
- 26일 광주비행장에 집결되어 정비중인 제11특전여단은 1개 중대 규모의 특공조를 편성하여 전일빌딩에 있는 방송국과 관광호텔을 점령하라는 작전명령을 전교사에서 수령하고 제61특전대대 4중대를 특공조로 편성, 동일 18:00에 특공대를 UN-1H 5대로 주남마을로 이동시켜 제20사단 61연대와 합류시켜 작전을 협조한 후 23:15분에 침투를 개시하였다. 익일(27일) 01:50분에 임무지원 지점으로 선정한 조선대학교 뒷산에 도착하여 최종적인 작전준비를 완료하고 동일 03:30에 은밀히 목표지역으로 이동 04:00에 목표 전일빌딩과 관광호텔을 완전히 점령했다. 당시 진압작전 상황은 3여단이 도청, 7여단이 광주공원에서 폭도들과 치열한 교전이 계속되고 있어 그곳을 지원하기 위해 충장로를 우회하여 도청을 측방에서 공격하라는 작전명령을 하달하여 작전팀은 1개 지대로 전일빌딩과 관광호텔을 경계하고 2개 지대를 중대장이 인솔하여 도청으로 이동중 05:15분에 YWCA 건물 앞에서 30여 명의 폭도들로부터 사격을 받아 도청으로의 진출이 저지되고 현장에서 약 1시간 동안 폭도들과의 치열한 교전이 계속되어 과감한 공격으로 06:20에 YWCA 건물 내부를 완전 소탕하고 사살 3명, 포로 29명의 전과를 올리고 06:40 작전지역을 보병 제20사단 61연대에 인계 후 작전을 종료하였다. (특전사 전투상보)
02:00 새벽을 가르는 가두방송
- 계엄군이 진입하고 있다는 젊은 여자 목소리의 다급한 가두방송이 밤의 정적을 가르며 시가지를 울렸다. 방송을 들은 시민들이 도청을 향해 나왔다. 도청의 무장한 철야 시위대들은 드디어 계엄군에게 포위되었음을 직감하고 술렁이기 시작했다. '수류탄으로 자폭할 것인가, 그들의 총에 죽을 것인가' 두 가지 죽음의 길을 놓고 잠시 이견들이 무겁게 오갔다.
- 특전단의 돌격부대가 도청 앞에 도착, 포진. 군의 진입을 알게 된 도청 수비대는 도청 전방 1백 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YMCA에서 첫 사격을 시작.(월간조선, 1985. 7.)
- YWCA에서 밤을 새우던 50여 명의 여자는 인근 교회로 피신. 남자들만 20여 명 남았으나 총이 10정밖에 없어서 무기를 받으러 도청을 감.(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02:50
- 월산동에서 9지역대 유도병이 음주중이던 폭도 10-15명 발견, 전봇대에 은폐 후 수하, 10분간 교전으로 폭도들 도주, 계속 침투.
피해: 1명 사망. 5명 부상
전과: 1명 사살. 1명 생포(특전사 전투상보)
03:00 계림국민학교 앞의 치열한 교전
- 예비군 중대장이 30여 명의 시민군을 지휘했던 계림국교 앞 육교에서 치열한 교전, 포위될 것 같아 후퇴 명령. 20여 명이 계림국교 정문 쪽 담벽을 뛰어넘었으나 7명 남음. 총격전, 중대장 담벽 아래쪽 주택으로 피신, 허벅지 총상. (1980년 민주화운동)
* "6, 7명씩 한 조로 나뉘어진 기동타격대원은 YMCA에서 모여 각 조별로 자기소개를 하고 우리가 하는 일이 옳은 일임을 서로들 공감했다. 새벽 3시 계엄군이 외곽에서 쳐들어온다는 비상연락을 받고 개인당 총 1개와 실탄 2클립씩을 지급받고 20여 명의 대원이 계림국민학교 앞으로 갔다. 1개 분대는 계림동 육교 위에, 또 1개 분대는 육교 오른편, 마지막 분대는 왼편 육교 밑에 배치되었다. 우리 분대장은 예비역 장교라고 했다. 그는 '내가 명령하기 전에는 절대 총을 쏘지 말라'고 지시했다. 잠시 후 도청 쪽에서 대포소리, 카빈소리가 뒤섞여 들려왔다. 요란한 총소리가 들린 지 30여 분이 지나도 계림동 주변에는 계엄군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았다. 잠시 후 서방 쪽에서 계엄군이 침입할 것이라는 우리의 예상을 깨고 등뒤에서 계엄군이 나타났다. '계엄군이다!' 하는 외침과 함께 '드르륵' 소리가 들렸다. 재빨리 뒤돌아보니 계엄군 3명이 쪼그려총, 자세로 이동하고 있었다 . 막상 계엄군이 총을 쏘고 나타나자 온몸에 힘이 빠지고 두려운 생각이 든 나는 조재만과 함께 기어서 계림국민학교로 도망갔다. 우리가 '항복, 항복한다'고 아무리 소리쳐도 총소리는 그치지 않고 계속되었다. 그때 우리 대원 2명이 총에 맞 았다. 그들을 돌봐줄 여유가 없었던 우리는 하수구로 들어갔다. 그렇게 1시간쯤 지난 뒤 탱크와 장갑차가 지나다니는 소리가 들리더니 '하수구에 폭도들이 있을까?', '수류탄 하나 던져보자'는 말을 듣고 기겁을 한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항복'이라고 소리치면서 손을 들고 나갔다. 하수구에서 나오는 순간부터 죽도록 얻어터지고 포승줄에 묶여 광주고등학교로 끌려갔다. 우리보다 늦게 잡혀온 어떤 아저씨는 계엄군에게 반항하다 개머리판으로 맞고 실신했다. 계엄군이 그 아저씨 얼굴에 물을 끼얹었지만 영영 깨어나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광주고등학교에서 오후까지 개머리판과 군화발에 짓밟힐 대로 짓밟히다 오후 5시경 상무대로 연행되었다." (구술 : 이충용, 현사연 조사)
* "26일 밤 YWCA에 있는데 상황실장 박남선 씨가 그곳으로 왔다. 총을 잘 쏘고 죽음이 두렵지 않는 사람은 기동타격대에 가입하라고 했다. 그때 나는 기동타격대에 가입하여 계림국민학교 경계임무를 맡았다. 계엄군이 진입해 오면 계림국민학교 앞에서 맞서 싸우기 위해 도청에서 총과 실탄을 지급받고 계림국민학교로 갔다. 새벽 3시부터 운동장에서 도로 쪽으로 총을 겨누고 계엄군에 대응할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계엄군이 쳐들어 왔다'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M16 자동소총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고 총알이 핑핑 날아왔다. 총에 맞아 쓰러진 나를 계엄군이 때리고 짓밟는 사이 나는 정신을 잃었다. 광주고등학교에서 내가 깨어났을 때 이미 날이 밝은 후였다. 내 옆에는 계엄군 한 명이 죽어 있었고 우리 대원들이 붙잡혀와 있었다." (구술 : 신광성, 현사연 조사)
- 7, 3, 11공수부대 병력 투입(03:30분 작전 4호 발령). (전교사 작전일지)
03:30
- 계엄군 광주 전격 기습(지원동, 화정동 등 3개소에서 총격전).
- 계엄군(이 병력은 도청을 덮친 공수부대가 아니고 시일원을 장악하기 위해 도청탈환 뒤에 들어온 야전사단인 듯 - 편집자주) 새벽 3시 30분 집결지를 출발, 화순에서 도청 쪽으로, 송정리 방향에서, 시청과 서부경찰서, 담양에서 광주 방면 등 4개 코스를 통해 각각 진입.(월간조선, 1985. 7)
03:20 - 07:30
- 68연대 2대대 6, 8중대 투입
전과 : 사살 1, 생포 15
피해 : 전사 1 (20사단 전투상보)
04:00
- 31사 병력 시가지 압축.(전교사 작전일지)
주남마을 뒷산에서 목이 떨어져나간 아들 시체 발견
* "친구와 함께 외곽경비를 맡았던 내 아들은 27일 새벽 계엄군이 시내로 쳐들어오자 산속으로 도망쳤다고 한다. 주남마을 뒷산으로 깊숙이 들어가다 내 아들은 그곳에 주둔해 있던 계엄군의 총에 맞아 목이 떨어져나간 채 산속에 버려지고 아들 친구는 계엄군에게 생포되었다 한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뒤 시청에서 온 연락을 받고 주남마을 뒷산으로 갔다. 억장이 무너지는 슬픔으로 목이 떨어진 아들의 시체를 안고 돌아왔다." (구술 : 김차남, 현사연 조사)
04:10 잠자다 총에 맞아
* "천지를 뒤흔드는 듯한 총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아내는 잠자다 깬 후 벽에 기댄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괜찮을 테니까 이리로 와서 누우라고 손을 잡아끌어도 팔짱을 끼고 앉아서 무서워할 뿐이었다. 그때 와장창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유리창이 깨져 흩어진 방바닥은 금세 하얗게 변했고 아내의 가슴에서 피가 쏟아졌다. 아내는 자신이 총에 맞은 사실도 모르는지 그대로 앉아 있었다. 아내를 리어커에 싣고 전남대병원으로 옮겼다. 뒤늦게야 알게 되었는데 대인시장 부근에서 금남로를 향해 쏜 총알이 우리 집으로 날아든 것이다." (구술 : 김재수, 유복남, 현사연 조사)
- 3공수여단 11대대 1지역대
전과 : 사살 13, 체포 2백 명, 소총 3백 정, 무전기 15정, TNT 다량. (20사단 작전일지)
04:25
- 61연대 전남의대 일대에서 교전. (계엄사 상황일지)
04:30
- 20사 병력 시가지 압축. (전교사 작전일지)
04:30 - 06:30 도청 함락
- 새벽 4시 도청 앞 완전 포위. 금남로를 중심으로 시가전이 벌어짐. 계엄군의 서치라이트가 도청을 비추며 계엄군은 항복을 권유. '폭도들에게 경고한다. 너희들은 현재 완전히 포위되었다.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라!' 순간 시민군측에서 발사한 총탄이 계엄군의 서치라이트 박살냄. 계엄군이 일제사격 개시.
- 도청 배후 수비하던 40여 명의 시민군, 건물 앞쪽으로 불안한 채 이동. 공수대는 도청 뒷담을 넘어 시민군 사이로 섞여 들어오며 난사.
- 도청 민원실 2층. 윤상원 등 항쟁지도부 간부들과 40-50명의 청년, 학생들, 2층 난간을 중심으로 엎드려 사격. 고교생 저격당하자 윤상원, '이봐 정신차려' 하며 근접, 자기 위치로 돌아오기 전에 윤상원 쓰러짐.
- 공수대, 2층 창 너머까지 근접. 시민군측의 실탄은 죽어 있던 동료의 것마저도 바닥이 나버림. 사기가 떨어지며 '항복, 항복' 외침. '무기를 거꾸로 창밖에 내밀어'. 곧장 창 너머로 뛰어든 공수대원, 시민군을 구석에 엎드리게 하고 실내 곳곳에 연발로 사격.
- 옆방 입구에 총을 대고 '모두 총을 버리고 기어나와' 하자 셋이 나옴. 공수대원, 그들을 한쪽으로 제치고 실내에 수류탄 던짐.
- 난간에 모인 시민군 포로는 손을 뒤로 결박당한 채 엎드린 10여 명뿐. 공수대원은 시민군의 M2 카빈을 집어 왼손으로는 M16을 그들에게 겨눈 채 도청 정문 쪽으로 필사적으로 도망나가는 시민군 1명 사살. 바로 그때 8명의 시민군이 무장 해제한 채 두 손을 쳐들고 항복하며 도청 앞뜰로 걸어나옴. 그 공수대원은 같은 자세로 8명의 투항자 전원 사살.
- 날이 훤해지자 계엄군은 항복한 시민군에게 총구를 시민군 자신에게 돌리고 기어나오도록 지시. 조금이라도 자세가 이상하면 사정없이 발사. 총을 빼앗고 군화발로 닥치는 대로 걷어차며 욕을 퍼붓고 등에다 '극렬', '실탄 10발', '권총 소지'등 분류기준에 따라 매직으로 휘갈김. 포로들은 손을 뒤로 묶인 채 포복으로 계단까지 접근. 계단에서는 그대로 굴러떨어져 고개를 들 수 없는 그런 식의 포복으로 도청 정문까지 기어가 도청 앞 광장에 대기중이던 군용 차량에 실림. 외신기자 비디오로 모두 녹화. 계엄군, 시체를 모두 끌어냄. (1980년 민주화운동 )
- 61연대 1대대 1중대 투입
전과 : 사살 1, 생포 2, 카빈 1,800, M1 400.
피해 : 없음. (20사단 상보)
* "30여 명의 시민군과 함께 도청 2층 강당에 있는데 총성이 울렸다.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들리고 비명소리가 요란했다. 나는 기어서 그쪽으로 갔다. 총알이 배를 관통해 쏟아지는 피로 주위는 빨갛게 물들었다. 나는 재빨리 옷을 벗어 지혈을 시키고 이불을 덮어주고 돌아섰다. '쾅!' 하는 굉음에 놀라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방금 총에 맞아 쓰러져 있던 동지(5.18 때 함께 활동한 사람을 동지라 칭함-편집자주)는 온데간데 없고 내가 덮어줬던 이불만 천정 형광등에 걸려 있었다. 내가 가지고 있던 총도 반쪽이 날아가버렸다. 공수들이 도청을 침입하면서 수류탄을 던진 것이다. 도청 정문 앞으로 장갑차와 탱크가 들어왔고 도청 뒤쪽에서도 총소리가 들렸다. 도청 앞에 공수들이 모습이 드러나자 나는 강당에서 총을 쏘기 시작했다. 2층 계단으로 공수들이 들어오자 2, 3명이 화장실로 숨었다. 콩볶는 듯한 총소리 때문에 한층 두려움이 심해졌다. 화장실에 있다가는 흔적도 없이 죽을 것 같아 손을 들고 나갔다. 우리를 본 공수들은 폭도들은 계단으로 내려갈 자격이 없으니 2층에서 나무를 타고 도청 앞 마당으로 내려가라고 했다. 공수의 위압적인 기세에 눌려 반항이라는 것은 생각도 못 하고 건물 앞에 있는 나 무로 뛰어서 그 나무를 타고 도청 마당으로 내려갔다. 두 다리에 땅에 닿자마자 밑에 대기하고 있던 공수들로부터 살인적인 구타를 당한 뒤 포승줄에 묶어 땅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그때부터 본격적인 구타가 시작되었고 약 2시간 후 상무대 헌병대 영창으로 끌려갔다." (구술 박내풍, 현사연 조사)
* "전날 밤 늦게 1백여 명의 시민,학생이 계엄군의 침입에 대비한 총격술 교육을 받고 50여 명은 도청으로 가고 나머지는 그곳에 남아 잠을 잤다. 얼마나 지났을까, '계엄군이 쳐들어왔다!'는 다급한 외침을 듣고 잠에서 퍼뜩깼다. 우리는 동료들을 깨워 일시에 도청으로 달려갔다. 도청 정문 앞 수위실에서 카빈과 실탄을 지급받고 도로변에 놓여 있는 화분대에 몸을 숨긴 채 총을 겨누고 있었다. 그로부터 몇 분 후 탱크와 장갑차를 앞세운 계엄군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계엄군이 사방을 향해 총을 갈겨대자 도청에 있던 사람들이 도청으로 빨리 들어오라고 소리쳤다. 우리가 도청으로 들어가자 12명씩 조를 편성하여 각기 다른 임무를 부여했다. 나는 도청 뒤에 있는 도경찰국을 사수하라는 명령을 받고 조원들과 함께 그곳으로 갔다. 잠시 후 계엄군이 30미터 전방까지 왔으나 우리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들은 철모에 흰 띠를 두르고 양쪽 어깨에 실탄을 대각선으로 차고 있었다. 계엄군이 우리가 지키고 있던 초소 앞을 지나자 무서워서 도경찰국 지하실로 갔다. 잠시 후 계엄군이 긁어대는 총소리에 놀라 나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옆방으 로 갔다. 거기에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이제는 꼼짝없이 죽었구나'하는 자포 자기한 심정으로 바닥에 벌렁 누워버렸다. 그때 계엄군 1명이 와서 드르륵 총을 쐈다. 나는 다리에 총을 맞았다. 조금 있자 2명의 계엄군이 와서 총에 맞은 사람들을 끌고 갔다." (구술 : 박병준, 현사연 조사)
04:40 YWCA 격전
- YWCA. 새벽 무렵부터 공격 시작. 안에는 문화선전조와 고교생, 근로자들이 방어중. 3층에서 '우리는 무기를 안 가졌다. 살려달라'고 소리침. 계엄군은 '모두 옷을 벗고 나오라' 하면서도 M16 발사. 여기에서 박용준, 공수대원과 교전하다 사살당함. 2층 양서조합 사무실에는 핏물이 고였고 서가의 책 속에는 탄환이 무수히 박힘. (1980년대 민주화운동)
- 11공수여단 61대대 4중대 투입
전과 : 사살 2, 생포 29, 카빈 31, 탄약 1,500발
피해 : 부상 2 (20사단 상보)
* "YWCA 2층 강당에서 보초를 교대하고 잠자리에 누우려는데 비상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도청에 있던 사람이 실탄을 가지고 와 지급하면서 '돌고개 쪽에서 계엄군이 진입하고 있다'고 말했다. 조금 후 도청 쪽에서 LMG와 M16 소리가 끊이지 않고 계속 들렸다. 30분쯤 지나자 천지를 진동하던 총소리가 잠잠해지는가 싶더니 내가 있던 YWCA 앞에서 총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캄캄한 밖을 향해 총을 쏘았다. 그야말로 동족끼리의 한맺힌 전쟁이었다. 우리는 사방을 포위당한 상태에서 얼마간 응사했지만 보이지도 않는 적을 향해 계속 총을 쏠 수 없어 중단했다. 동틀 무렵까지 일방적으로 총을 갈긴 계엄군에 의해 그곳에서 시민군 2명이 사망하고 다수가 부상당했다. YWCA 1,2층에 있던 시민들이 날이 밝자 항복을 했으나 나는 그때 항복하면 분명히 몰살당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2층에서 뛰어내려 탈출에 성공했다. 그러나 삼엄한 계엄군의 경계를 무사히 벗어나기가 어려워 인근에 있던 민가로 가서 이틀을 숨어 지냈다. 그동안 라디오에서 폭도들은 자수하라고 떠들어대고, 내가 숨어 있던 집에까지 계엄군이 들어오자 집주인 아저씨가 자수 권고 신고를 하여 상무대로 잡혀가게 되었다." (구술 : 김한중, 현사연 조사)
* "나는 대학생 한 명과 함께 YWCA 1층 회의실에 배치받고 경계를 서고 있는데 도청에서 총소리가 들렸다. 2층에서 한 청년이 허겁지겁 뛰어와서 도청을 향해 총을 쏘라고 했다. YWCA 1층에서 도청을 향해 지원사격을 한다는 것은 무리였으나 공중을 향해 무조건 발포했다. 잠시 후 공수들이 YWCA를 향해 발포하자 나는 기어서 부엌으로 갔다. 전일빌딩 옥상에서 공수 2명이 우리를 향해 총을 쏘는 것이 보였다. 여기저기에서 총에 맞아 질러대는 고함소리, 신음소리가 들렸다. '총에 맞았으니 그만 쏴라'고 외쳤으나 총성은 그치지 않았다.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 총알이 벽에 부딪히는 소리가 우리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나와 함께 있던 여학생은 가슴에 총을 맞아 등에 구멍이 뚫렸다. 그 여학생은 어깨를 심하게 떨면서 살려달라고 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여학생이 '총에 맞았으니 그만 쏴라'고 하자 '손을 들고 나와라'고 했다. 공수들이 그 여학생을 보더니 '이 상년, 집에나 처박혀 있지 가시내가 뭐 하러 여기를 나와, 이런 년은 죽여야 돼' 하면서 끌고 갔다. 포승줄에 묶여서 도청 쪽으로 가면서 얼핏 보니 공수들이 YWCA를 향해 사격을 하고 있었다." (구술 : 이덕준, 현사연 조사)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부근 접전
* "지역경비를 맡은 7, 8명과 함께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부근 건물에 있던 중 잠깐 잠이 들었다. 새벽녘에 요란하게 들리는 총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총소리가 점차 가까이 들리자 우리도 공중을 향해 총을 쐈다. 그 순간 바로 옆건물 옥상에서 우리를 향해 집중사격을 했다. 우리도 그곳을 향해 필사적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그때 내 친구가 총에 맞아 쓰러졌다. '더 이상 총을 쏘지 마시오'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그는 죽었다. 나도 다리에 파편을 맞았다. 함께 있던 사람들은 어느새 빠져나가고 없었다. 여기에 있으면 개죽음당하겠다고 생각한 나는 친구를 안고 3층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려 주변 민가로 숨어들었다. 잠시 후 공수들 이 폭도는 자수하라는 방송을 했다. 9시경 자수하여 시외버스 공용터미널로 끌려 갔다. 우리랑 같이 있다 먼저 빠져나간 시민군들이 이미 잡혀와 있었다. 우리는 상무대로 이송됐다. 그곳에서 곡괭이 자루로 얻어맞는 등 무수한 고초를 치뤘다 ." (구술 : 조성환, 현사연 조사)
헬기로 군방송 시작
- 전남북계엄분소 경고문 1호 발표
1. 옥내외 집회는 일절 금한다
2. 공무원, 전행정관리 인원은 오전 7시 30분까지 출근하라. 출근치 않을 경우는 근무이탈로 간주한다.
3. 습득 발견한 총기나 탄환 폭발물은 인근 경찰서나 파출소에 반환하라.
4. 이상과 같은 경고 위반시는 엄중 처단한다. 전남계엄분소 소장 소준열. (월간조선, 1985. 7)
04:55
- 3공수 도청 탈환, 완전 점령. (전교사 작전일지)
05:00 계엄분소장의 첫 담화 발표
- '폭도들은 투항하라', '도청과 광주공원도 군이 장악했다', '너희들은 포위됐다', '총을 버리고 투항하면 생명은 보장한다', 광주 KBS 방송은 군이 시내에 진입했음을 알리는 이 같은 방송을 되풀이했다. 간간이 행진곡도 들려줬다. '돌아 온 병사', '콰이강의 다리'. (월간조선, 1985. 7)
05:04
- 11공수 관광호텔, 전일빌딩 점령(생포 3).
- 광주보병학교 외곽배치 완료.
- 공설운동장, 광주천변, 백운동 철도 건널목 포교 병력 완전 장악. (전교사 작전일지)
05:06
- 7공수 광주공원 탈환, 완전 점령. (전교사 작전일지)
- 광주시 주요 공공기관을 계엄군이 점거.
05:10
- 62연대 1대대 도청 병력 증원.
- 06:00경에 61연대에 인계하고 철수.
- 남자 12, 여자 6명 등 사직공원에서 계엄군에 붙잡혀. 신원이 불확실한 남자 10명이 연행됨.
- 변두리에서 확성기로 '시민들은 나와서 싸우자'는 가두방송. (월간조선, 1985. 7)
05:20
- 61연대 2대대 광주경찰서 진입.
05:22
- 도청 잠적 폭도 소탕 완료.
05:23
- 광주시 점령 완료.
05:40
- 시내 곳곳에서 교전이 재개되어 총성이 계속. (월간조선, 1985. 7)
05:53
- 62연대 2대대, 폭도 15명과 대치 교전. (전교사 작전일지)
06:00
- KBS 방송을 통해 '폭도들은 진압됐다. 시민들은 위험하니 집 밖으로 나오지 말라'. 또 영어로 외국인에 대한 방송도 있었다. 방송은 '계엄군이 폭도 2명을 사살하고 2백7명을 체포했다. 폭도들은 진압됐지만 일부 잔당들이 주택가에 칩입하려 한다. 폭도들은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면 생명을 보존할 수 있으나 거부하면 사살된다'는 경고방송도 했다. 또 비행기와 헬기에서도 고성능 스피커를 통해 시민들에게 공중에서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경고했다. 날이 밝기 시작하자 밤새 불안했던 시민들은 창밖을 내다보고 조심스럽게 골목까지 나와 주위를 살펴보기도 하고, 시민들은 골목길에서 이웃과 함께 지난밤 사태에 대해 얘기를 나눴으며 큰길 쪽으로 나가려다 계엄군의 저지로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도 보였다.'경찰과 공무원들은 오전 9시까지 소속 관서로 복귀하라'는 계엄군의 지시가 KBS 방송을 통해 전해지자 오전 8시쯤부터 길거리에 출근하는 모습이 보였고, 계엄군은 길 곳곳에서 통행인의 신분을 확인한 뒤 경찰과 공무원을 통과시켜 줬다. 광주경찰서는 경찰관들이 사복 차림으로 나와 업무를 보고 있으며 도경국장 등 경찰 간부들의 정상업무가 시작됐다. 도경과 시청 등 무장시민들이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건물에는 총알 자국이 여기저기 박혀 있고, 계엄군은 도청 앞에 탱크와 장갑차, 군 트럭, 헬기 등을 포진시켜 놓고 밀집경계를 하는 한편, 데모대가 달아난 지역을 집중수색중. 시내 각 가정과 여관에 군인들이 들어와 가택수색을 하였으며 신원이 불확실한 사람은 모두 연행해 갔다. (월간조선, 1985. 7)
- 도청 및 YWCA, YMCA 등지에서 체포된 나머지 생존자들은 일단 전교사 건설공 단으로 이송되어 계엄군에 의해 심문이나 대화 없이 10파운드 곡괭이 자루로 초죽음이 되도록 두들겨맞았다. 한 생존자는 24시간을 아무 말 없이 맞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한편 이날 계엄군은 일정지역을 포위하고 수색 후 다시 포위망을 넓혀 시내를 수색하는 방법으로 시내 전역의 가택을 샅샅이 수색, 수백의 청년들을 끌어갔으며 여인숙에서 잠을 자거나 길거리를 통행하고 있는 젊은이들은 시청, 아모레 화장품, 관광호텔 등으로 끌고 가 무자비한 고문과 폭력을 휘둘렀다. 나머지는 밤 8시경 헌병대로 끌고 갔다. 이후 계엄군은 시내 골목골목마다 삼엄한 경비를 펴 시민들이 창밖으로 쳐다보는 것조차 일절 금했다. (현사연 조사 종합)
- 목포. 도청에 계엄군이 진입하여 점거되었다는 소식 받음. (1980년대 민주화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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