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고 있는 키워드를 검색해보세요.

DRAG
CLICK
VIEW

아카이브

온라인 자료실

작성일2007-05-15

[광주민중항쟁 총일지]계엄군의 발포 - 집단 발포

본문

제 2 절 집단발포 (21일 12:00 - 13:00)


12시까지 퇴각하겠다던 계엄군이 약속을 지키지 않자 분노한 시민들은 차량을 앞세우고 한 발 한 발 도청을 향해 나아갔다. 그때 장갑차 한 대가 전속력으로 시위대를 앞질러 분수대를 돌아 질주, 전남대 쪽으로 빠져나갔고, 트럭에 실은 기름통을 불질러 밀어붙이는 일을 여러 차례 반복하자 전일빌딩으로 가로질러 포진해 있던 공수들이 분수대까지 밀려났다. 시민들이 이렇게 서서히 계엄군을 도청 쪽으로 밀어붙이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귀를 찢는 총소리가 들렸다. 시민들은 건물벽과 골목으로 일제히 몸을 피했다가 공포탄임을 깨달았다. 그러나 잠시 후 다시 울리기 시작한 총성은 공포탄이 아니었다. 도로의 시민들이 픽픽 쓰러졌다. 장갑차 위에 몸을 드러내놓고 용감하게 도청으로 진격해 가던 학생이 피를 내뿜으며 그 자리에서 숨졌고 아직 신음하고 있는 부상자를 구하기 위해 접근하는 사람까지도 총격을 받았다. 계엄군이 도청과 수협건물, 전일빌딩 옥상에서 정확한 조준사격을 한 것이다. 승리감에 들떠 있던 낭만적 분위기가 일시에 사라졌다. 생존을 위한 무장의 필요성이 절박해졌다. 시민들은 무기탈취를 위해 곧바로 시외지역으로 빠져나간다. 같은 시간, 전남대 정문 앞에서도 수위실에 설치된 기관총제거를 요구하는 시민들에게 계엄군의 발포가 있었다.



12:00 화염방사기 분사

- 부대 배치현황(시내)

.3공수 - 전남대 1개 대대, 시청2개 대대, 광주역 2개 대대

.7공수 - 조선대 1개 대대, 도청 1개 대대

.11공수 - 조선대 본부, 도청 3개 대대 (전교사 작전일지)

- 도청 앞에서 전단을 뿌림.

- 압수한 차량에 학생의 시체를 싣고 시위.

- 평소 사격술 훈련의 강화와 적절한 사격 통제대책이 필요. (특전사 전투상보)

- 가톨릭센터 앞에 포진해 있던 시위대들이 장갑차와 트럭을 앞세우고 2백여 미터쯤 돌진, 관광호텔 앞에서 군인과 10여 미터 간격을 두고 대치.

* "공수들이 금남로가 전일빌딩 앞에 탱크를 세워놓고 완전군장을 한 채 서 있었다. 맨 앞에는 중령, 대위들이 마치 사열받는 듯한 상태로 서 있었고, 그 뒤로 사병들이 도청을 등지고 있었다. 몇 개 대대 병력 정도 되었다. 12시까지 광주에서 철수하겠다던 공수들이 약속을 어기자 시민들이 공수에게 항의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구술 : 김용대, 현사연 조사)


전남대 앞 발포

* "전남대 정문 앞에서 시민과 공수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 시민들이 정문 앞 수위실에 설치된 기관총의 제거를 요구하자 계엄군은 이를 즉시 제거했다. 시민들이 공수를 향해 돌을 던지자 갑자기 하늘에서 최루탄 파편들이 쏟아졌다. 공수들이 최루탄을 무차별 쏘아댄 것이다. 흩어졌던 시민들이 다시 모여 본격적인 투석전을 벌이자 공수들이 M16을 드르륵 갈겼다. 전남대 앞에서 처음으로 발포한 것이다." (구술 : 정상현, 현사연 조사)


가정집까지 쫓아와 화염방사기 발사

* "운암동에서 시위차량에 탑승하여 전남대 정문 앞 로터리에 도착했을 때였다. 전남대 앞에서 공수들이 몰려오자 나는 차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 주변 민가로 뛰어들어 화장실로 들어가보니 3명의 시민이 그곳에 숨어 있었다. 그런데 공수놈들이 거기까지 쫓아와 화장실 벽에 붙어 있는 유리창을 통해 화염방사기를 쏘았다. 엄청난 화염이 뿜어나왔다. 그 화기에 숨이 콱 막혀 죽을 지경이었다. 나는 얼굴 전체에 화상을 입은 채 전남대로 끌려갔다. 그날 저녁 전남대에 끌려온 시민들과 함께 교도소로 옮겨졌다. 차에 짐을 싣듯이 차곡차곡 태우더니 운전석 옆에 있던 유리창을 천막으로 막아버렸다. 그런 뒤 차 안에서 최루탄을 까넣어 숨도 못 쉬게 만들었다. 교도소에 도착해 보니 우리가 탄 차에서 한 명이 죽고 한 명이 실신해 있었다. 그곳에 있던 계엄군이 우리들 차에서 끌려내려 발로 차면서 '빨갱이 세끼들 죽여버린다'고 하자 어떤 사람이 매에 못 이겨 소리쳤다. '그래 김일성이 우리 아버지다'라고 악에 바쳐 부르짖으며 호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뿌리더니 죽어버렸다. 얼마나 오기가 발동했으면 그런 말을 하고 죽었겠는가! 그가 죽자 계엄군들이 물을 떠다가 얼굴 씻기더니 사진을 찍었다. 그런 후 하얀 가루을 얼굴에다 뿌렸다." (구술 : 최병옥, 현사연 조사)

- 정오까지 광주에서 철수하겠다던 약속을 어기자 가톨릭센터 앞에 포진해 있던 시위대들이 다시 장갑차와 트럭을 앞세우고 2백여 미터쯤 돌진.

- 관광호텔 앞에서 군인과 10여 미터 간격을 두고 대치.

- 도청 직원들은 뒷담을 넘어 하나둘씩 도망가기 시작.


도청에서 조준사격

* "런닝셔츠만 입고 한 손에 태극기를 든 청년이 탄 장갑차가 도청을 향해 질주해 갔다. 그때 도청 쪽에서 한 발의 총소리가 들렸다. 공수의 조준사격이었다. 총에 맞은 그 청년의 목이 뒤로 젖혀진 채 장갑차는 동구청 쪽으로 되돌아 왔다 ." (구술 : 박병준 현사연 조사)

- 고막을 찢는 듯한 총성과 함께 장갑차에 탔던 청년이 총탄에 맞고 그대로 넘어졌다. 당시 사상자가 얼마였는지는 취재가 불가능. (월간조선, 1985. 7)

- 폭도들이 광주교도소 입구까지 왔다 감. (계엄사 상황일지)


12:10

- 관광호텔 앞에서 10미터 간격으로 군과 대치하고 있던 시위대 중 장갑차를 몰던 청년이 2, 3겹으로 포진하고 있던 군인들을 향해 그대로 돌진했다. 군인 4, 5명이 쓰러졌다. 수없이 최루탄이 터졌다. 시위대가 다시 멈칫했으며 군인들은 쓰러진 동료를 데리고 도청 광장 앞 분수대로 퇴각했다. 대규모 살상을 예고하는 듯 했다. 도청은 금새 점령당할 기세였다. 한마디로 살벌했다. 군인들은 분수대 앞에서 횡대로 도열했다. (월간조선, 1985. 7)

-영암. 시위대 도착.

* "점심시간이 거의 다 되었을 때 광주로부터 시위대를 태운 버스 1대가 내려왔다. 그들은 노래도 부르고 유리창이 하나도 없는 버스의 옆면을 각목 등으로 두드리며 시외버스 공용터미널을 지나 영암읍 삼거리 쪽으로 올라왔다. 그 시위대는 '오후 4시(?)에 도청에서 만나자'는 얘기를 남기고 성전 쪽으로 빠져나갔다." (구술 : 최철환, 현사연 조사)


12:20

- 화순검문소에 민간인 차량이 와서 탄약고가 어디에 있는냐고 묻고 돌아감.(계엄사 상황일지)


12:25

- 나주 차량 6대에 2백여 시위대 분승. 목포 향발중 나주에서 시민 가세 선동. (전교사 작전일지)


12:30

- 해남, 해남 대흥사에서 해남 청년회의소 긴급 이사회 개최 1. 민주인사 석방 및 민주회복

2. 독재자 추방

3. 농어민 보호정책 활성화

4. 광주사태 희생자에 대한 보상

5. 계엄령 해제

등의 요구사항을 내걸고 시위에 들어가기로 결정. (현사연 조사 종합)


12:30

- 전남대 앞 광성여객 직원 7명 연행.

* "회사(신안동 소재 광성여객) 2층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데 공수 한 명이 '앞에 총'을 하고 사무실로 들어 왔다. 그는 사무실을 둘러보더니 거수경례를 하고 나갔다. 우리가 전부 회사 유니폼을 입고 있으니까 그냥 나간 것 같다. 공수가 사무실을 나간 직후 공수대원 한 명과 사병 두 명이 다시 왔다. 그들은 우리가 먹고 있던 라면을 발로 걷어차면서 '이 세 끼들, 자동차를 데모대들에게 내준 놈들' 이라며 곤봉으로 구타하기 시작했다. 약 30분간 숨도 쉬지 못할 정도로 얻어 맞고 나는 실신해 버렸다. 나와 함께 식사하던 7명의 직원은 전남대 교정으로 끌려갔다. 다행히 실신해 있던 나는 버려두고 가 입원치료를 받았다." (구술 : 안민구, 현사연 조사)

* "회사(전남대 앞 광성여객)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데, 전남대 앞에서 데모하던 학생들이 공수들에게 쫓겨 삼익맨션 공사장으로 몰려와 우와좌왕하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어리둥절해진 내가 멍하니 앉아 있을 때 공수들이 사무실로 몰려왔다. 그들은 다짜고짜 라면 그릇을 엎어버리더니 우리를 사정없이 때렸다. 거의 실신 상태에 이르자 우리를 줄줄이 묶어 전남대학교 강당으로 끌고 갔다." (구술 : 류효성외 동상황 7명, 현사연 조사)


12:30

- 차량시위 2백 명, 함평읍에서 주민들 상대로 봉기선동.

- 광천동 공업단지 입구, 군용집차 10대, 1/2톤 10대, 버스 15대 정차하여 시위 중. 주민들이 시위대에게 식사 제공. (전교사 작전일지)

- 분노한 시민, 각목을 든 채 도청을 향해 돌격.

* "12시가 지나도 계엄군이 시내에서 물러나지 않자 우리도 무력으로 그들과 맞서기로 했다. 트럭에 타이어를 싣고 도청을 향해서 달려가다 불을 붙여 계엄군을 향해 밀어붙였으나 매번 실패했다. 트럭이 미처 계엄군이 있는 곳에 닿기도 전에 차가 멈춰버렸다. 이러한 방법으로 계엄군을 위협하자 YMCA 앞에 있던 계엄군들이 분수대 부근까지 후퇴하기는 했으나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그러자 차량이 선봉대 역할을 하고 각목을 든 청년들이 함성을 지르며 도청을 향해 달려갔다. YMCA 앞까지 달려간 차에서 청년들이 각목을 들고 뛰어내렸다. 그에 맞서 대열을 갖춘 공수들이 우리를 향해 뛰어왔다. 그때 뒤쪽에 있던 공수들이 분수대를 빙 둘러 '앉아쏴'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달려오던 공수들과 청년들이 막 충돌하려는 찰나에 총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흩어져 도망치기 시작했다. YMCA 쪽으로 도망치다 뒤돌아보니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7, 8명의 공수들이 달려들어 어린 학생의 뒤통수를 개머리판으로 치자 그자리에 고꾸라졌다. 쓰러져 있는 학생의 머리를 군화발로 밟고 M16 개머리판으로 온몸을 후려지기 시작했다. 학생의 머리에서 피가 흘렸다. 잠시 후 공수들이 그 학생의 다리를 끌고 도청 쪽으로 갔다. 그것을 본 나는 급히 YMCA로 뛰어갔다. 2층으로 올라가 창문을 열고 체육관 지붕으로 뛰어내렸다. 그곳에는 먼저 도망와 있던 시민들이 있었다. 잠시 후 연발의 총소리가 들렸고 금남맨션의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나는 1시간 정도 숨어 있다가 그곳을 빠져나왔다." (구술 : 김정기, 현사연 조사)

- 비무장 시민에게 발포

- 시위군중 맨 앞에 도열해 있던 503벤츠 고속버스가 군경의 저지선으로 돌격하자 계엄군 쪽에서 LMG 기관총 난사. 차에 타고 있던 시위대원 20여 명이 살상당함. (신동아 1985. 10)

* "12시까지 광주에서 퇴각하겠다던 약속을 어기자 격분한 20여 명의 청년들이 시민이 가득 탄 관광버스를 밀면서 서서히 도청을 향해 갔다. 그 관광버스가 YWCA 앞에서부터 서서히 속력을 내며 분수대를 돌아 상무관 쪽으로 가자 공수들이 버스를 향해 일제히 총을 쏘았다. 총알이 차에 부딪혀 수없이 불꽃이 튀겼다. 그 차에 탔던 시민들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한 명도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했다. 관광버스가 공수들을 스치고 지나간 후 쓰러졌던 공수 2명이 배낭을 고쳐매는 것이 보였고 한 명은 공수의 부축을 받아 절뚝이며 길 옆으로 빠지는 것을 봤다. 여태까지 벌떼처럼 모여 있던 공수들이 순간적으로 길 옆으로 붙었고 무릎을 꿇고 전투자세를 취했다. 12시 30분경 또다시 귀를 찢는 듯한 총소리가 들렸다. LMG 기관총으로 위협사격을 가하자 관광호텔 주변의 가로수 가지들이 툭툭 부러 졌다. 잠시 후 시민을 향한 M16 조준사격이 시작됐다. 10여 명의 시민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부상자를 옮기려고 차도로 뛰어가는 시민들을 향해 공수들은 또다시 총을 쏘아댔다. 전일빌딩 건물 벽에 붙어서 이 광경을 목격한 나는 총소리를 뒤로 한 채 동구청 쪽으로 뛰어갔다. 눈에 보이는 공수는 한 명도 없는데 도대체 어디서 총을 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주변을 살펴보니 수협 옥상에 3명의 공수가 '서서쏴', '무릎쏴' 자세로 총을 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처음 총소리가 들린지 30분 후 나는 동구청 앞에서 총에 맞아 하반신 불구가 되었다." (구술 : 김용대, 현사연 조사)


12:35

- 군중들이 군용장비를 가지고 카빈과 실탄을 트럭에 싣고 전교사 북문까지 왔다가 신양수장 앞에 집결중임. (계엄사 상황일지)


12:40

- 광주에서 온 시위대로부터 발포소식을 듣고 곧바로 인근 경찰서로 달려가 무기 탈취.

- 버스 4대가 화순에 도착, 화순 중앙파출소에 방화. 주민 3백 명 합세, 파출소 무기 피탈. 버스 1대는 동면으로 가고 있음. (전교사 작전일지)

* "버스와 트럭에 탄 시위대들이 오전 11시경 화순으로 향했다. 우리가 화순경찰서에 도착하자 무기고를 지키고 있던 보초병은 재빨리 도망갔다. 그곳에서 카빈을 탈취하여 그곳 주민과 함께 화순군내를 돌아다니며 차량시위를 했다. 그날 밤은 화순에서 자고 22일 새벽에 광주로 와서 전남대 의대 부근에 있는 시민들에게 탈취한 무기를 나눠줬다." (구술 : 이상배, 현사연 조사)


12:43

- 도청 습격을 위해 트럭 2대에 자갈 싣고 진입. (육본 상황일지)


12:45

- 시민에게 발포. 1명 사망, 수명 부상. (월간조선, 1985. 7)

* "광주에서 장성으로 가려고 어린이 대공원 앞을 지나는데 비아에 있는 방송국 기자라는 사람이 차를 세웠다. 그는 도청 앞 시위상황을 비디오로 찍으려고 한다면서 도청으로 가자고 했다. 우리는 광주역, 시외버스 공용터미널을 거쳐 금남로로 갔다. 도청에 도착한 시간이 12시경이었다. 분수대를 중심으로 군인들이 중무장한 채 있었으나 우리는 별다른 두려움 없이 점차 분수대 가까이 접근하여 비디오 촬영을 했다. 그때였다. 난데없는 총소리에 놀라 차를 돌리려는 순간 나는 둔부에 총을 맞았다." (구술 : 박동환, 현사연 조사)

- 전교사 작지 80-4호로 광주도시권 북쪽 3개 지역 봉쇄 지시 하달. (전교사 작전일지)


12:55

- 도청 앞 YMCA 앞에서 군이 난사하여 수십 명 사망.

- 동시에 '탕, 탕' 군중들을 향해 수없는 총탄이 퍼부어졌다. 처음에는 공포탄 인 듯했다. 우리 팀은 합의한 듯 책상 밑으로 엎드렸다. 시위대는 순식간에 골목과 빌딩으로 몸을 숨겼다. 총소리를 제외하고 시내는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우리는 완전히 지사에 갇히게 됐다. 시간이 흘렀다. 사무실 캐비닛에 기대어 도청 쪽을 바라보았다. 일단의 군인들이 분수대 앞에 횡으로 앉아 금남로쪽을 향해 거총자세로 버티고 있었다. (월간조선, 1985. 7)

* "12시 30분경 금남로에 있는데 갑자기 울린 총소리가 광주시내를 뒤흔들었다. 금남로를 가득 메운 시민들이 물결처럼 도로 양편으로 갈라졌고, 금남로는 삽시간에 텅 비었다. 광주은행 옆으로 도망친 나는 재빨리 금남로를 보니 총에 맞아 쓰러진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공포탄임을 확인한 순간 불안스러운 얼굴로 숨어 있는 시민을 향해 외치기 시작했다. '시민 여러분! 공포탄입니다. 놀라지 말고 다시 모입시다.' 잠시 후 곳곳에 숨어 있던 시민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고, 금남로는 시위대열로 가득 메워졌다. 시위대열은 또다시 도청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과 때를 같이하여 공수들의 무차별사격이 시작됐다. 총소리에 놀라 건물벽으로 도망가려는데 꼬집히는 듯한 통증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다리가 움직여지지 않아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총에 맞았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발목에서 쏟아지는 피를 본 후 나는 절규하기 시작했다. '시민들이여! 이대로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우리 모두 힘을 합쳐 공수들을 몰아냅시다.' 나는 절통하고 피끓는 심정을 그렇게 표출했다." (구술 : 김용택, 현사연 조사)


12:58

- 일부 과격한 군중이 광성여객 버스 2대를 몰고 도청 광장으로 쏜살같이 몰고 들어가 분수대를 돌고 있는 사이에 공수부대가 발포하자 이에 대항해서 시위군중들도 발포하고 나섰다. 이 버스 중 1대는 다시 군중 쪽으로 되돌아갔지만 1대는 분수대 옆에서 정차하고 말았다. 운전기사가 총에 맞아 숨진 것이다. 또한 숨돌릴 틈도 없이 눈 깜짝하는 사이에 아세아자동차 공장에서 빼앗은 앞이 뾰족한 장갑차 1대가 전속력으로 질주해 들어갔다.

물론 이 장갑차는 집중사격을 받았으나 끄떡없이 학동 쪽으로 빠져나가버렸다. 그러자 시위군중이 뛰어나가 땅바닥에 버려진 공수부대원의 M16 소총 2자루를 수거했으나 1자루는 망가졌는지 집어던져버리고 1자루만 가지고 갔다.

1천여 명의 공수부대원들은 난데없이 버스와 장갑차의 기습을 받아 뒤쪽으로 물러났지만 다시 전열을 다듬고 앞으로 나와 광장을 장악했다. (10일간의 취재수첩)

* "소방서 부근에 있는데 도청 쪽에서 총소리가 들리자 나는 전남여고를 거쳐 노동청 앞으로 갔다. 도로를 꽉 메운 시민들이 '김대중을 석방하라', '전두환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한동안 구호를 외치자 총소리가 들렸다. 주위에 다친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나는 '공포탄이다' 하고 소리쳤다. 골목으로 피했던 시민들이 거리로 몰려나왔다. 그 순간 수천 발의 총소리가 났다. 그때 교련복을 입은 학생 한 명이 배를 움켜잡고 고꾸라졌다. 그것을 본 나는 온몸에 소름이 끼쳐 바닥에 엎드린 채 골목을 향해 기어갔다. 나는 그 자리에서 엉덩이에 총을 맞았다. 다음 순간 세 명의 시민이 공수가 쏜 총에 맞고 쓰러졌다." (구술 : 이대성, 현사연 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