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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15

[광주민중항쟁 총일지]해방 기간 -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

본문

제 2 절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

(23일 - 25일 오후)


도청 앞 광장에 모인 시민들은 23일 오후부터 매일 오후 2시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를 열었다. 노동자, 시민, 학생, 가정주부 등 각계각층 사람들이 분수대 위로 올라가 계엄군의 만행을 성토하고 앞으로의 수습대책을 토론했다. 또한 그때 파악된 피해상황이 보고되었으며 장례준비를 위한 모금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도청의 '수습대책위원회'는 시민들의 의사를 수렴하지 못하고 미온적인 태도로 계엄사와 협상을 벌이고 있었다. 일방적인 무기반납만을 주장함에 따라 수습위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과 갈등은 점점 더 심화되어 갔다. 시민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불안해 했으며 도청 내부에서도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믿지 못하고 경계하는 등 분위기가 살벌했다. 시민군 중에도 무기를 반납하는 사람이 차츰 늘어 났다.

궐기대회를 준비해 온 청년,학생,노동자들은 YWCA에서 모여 도청의 수습위로는 현재의 상황을 수습하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이 토론에 참석한 청년들이 25일 발족되는 항쟁지도부의 핵심을 이룬다.

무기를 반납해서 희생을 줄이자는 의견과 우리의 요구사항이 전혀 관철되지 않은 상황에서 무기를 반납하는 것은 시민들의 피를 팔아먹는 것이니 끝까지 싸워야 다는 의견으로 학생수습위 내부에서도 강.온파의 대립이 팽팽히 맞섰다. 결국 수습위원 일부가 조직에서 이탈됨에 따라 박남선 등 일반인을 포함시켜 학생수습대책위 기구를 개편했으며,25일 김창길이 학생수습위원장직을 물러나면서 수습위원들이 대부분 빠져나가 윤상원, 정상용 등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광주민중항쟁 지도부가 발족되었다.


23일 00:40 지원동 숙실부락에서 계엄군과 총격전

* "조선대 뒷산의 숙실부락에서 계엄군이 랜턴을 잠깐씩 비치며 냇가를 지나갔다. 그곳에서 본부까지 약 1백50 미터 정도의 거리였고, 숙실마을 6조와 무등육아원의 7조와는 약 70-80미터 거리밖에 안 됐다. 그곳에 매복해 있던 6조와 7조가 계엄군을 향해 사격을 했다. 이에 다른 조 까지 발사하기 시작하자 계엄군 역시 총을 쏘았다. 양쪽에서 불꽃 튀기는 접전이 벌어졌다. 칠흑같은 밤이었지만 양쪽에서 날아온 총탄에 의해 마치 여름 날 반딧불이 날아든 것처럼 주위가 훤했다. 약 20-30분 정도의 격전이 있었다. 배고픈다리까지 계엄군이 쏜 총알이 날아와 다리 난간에 구멍이 뚫렸다. 한참 후 어느 쪽이 먼저 사격을 중지했는지 모르지만 총성이 그쳤다." (구술 : 문장우, 현사연 조사)


01:00

- 무장시위대가 해남에서 광주 방면으로 나가다 옥천면 소재 우슬재에서 길에 매복중이던 계엄군 1개 중대에 포위, 계엄군은 M16, LMG 난사, 수류탄 투척, 시위대 20명 이상 사망, 다수 부상, 생존자 몇 명만 빠져나감. (1980년대 민주화운동)


02:00 충정작전 계획 건의

- 군사령관 방문(대구 - 서울 - 광주 - 대구)

충정작전 계획 건의 5. 24 02:00)

- 국방부장관 지침

5.25 02:00 이후까지 작전 연기

- 군사령관 작전지침 접수

.상황의 추이에 적합하게 계획 발전 및 만반태세 유지

.5.25 02:00 이전 작전시행 금지(이후 시행도 승인)

.경찰 및 행정력으로 대민질서 회복

.광주시 외곽지역 봉쇄(도주 및 침투 방지)

.사상자 처리는 군. 경. 검.합동검시관, 언론기관 입회하에 실시

.부상자 적극 치료.

.사상자 발생 억제.

.군은 고통을 감내, 시민을 보호한다는 목적 달성. (말, 1988. 8)


03:36

- 송정리 삼양타이어 공장 무장폭도 30여 명 기습 시도. 예비중대 위협사격으로 격퇴, 생포 2명. (전교사 작전일지)


05:00

- 녹동마을에 있는 33대대 숙영지, 폭도들 사격. (전교사 작전일지)


06:00 광주시 안정 되찾아

- 광주시의 표정은 점차 안정을 되찾아가는 듯했으나, 시외곽지역에서 들려오는 간헐적인 총성 때문에 여전히 긴장감을 씻어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날 날이 밝기가 무섭게 새벽 6시부터 남녀 고교생 7백여 명(여학생 50명)은 시내 전역의 청소작업에 앞장섰다. 이에 대해 수많은 시민들이 호응, 청소를 함께 했으며 대다수의 상가들도 문을 열기 시작했다. (신동아, 1985. 10)

- 불탄 자동차의 잔해는 길 옆으로 치워진 채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학생들은 장례반, 총기회수반, 차 량통제반 등으로 나뉘어 수습중인데, 장례반은 시체 43구가 안치돼 있는 도청 뒤뜰에 사망자 가족들의 신원을 확인하고 안으로 들여보내고 있고 사망자 중 신원 미확인자를 찾기 위해 가족들이 우왕좌왕하며 아우성. (월간조선, 1985. 7)

- 도청을 중심으로 한 빌딩 앞에는 전날보다 더 많은 대자보가 나붙기 시작했다. 이날 처음으로 전일빌딩 앞에 '민주시민 강령'을 공고하면서 '시민군'이란 말이 등장했다. 4개항으로 된 강령에는

1) 시민은 시민군을 믿고 적극 협조합시다.

2) 시민군은 위장된 계엄군 및 불순분자를 주의합시다.

3) 질서회복에 힘씁시다.

4) 평소 생활로 복귀합시다.

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월간조선, 1985. 7)

- 해남. 안동리 군부대 앞 국도상에서 시위버스 1대, 군의 총격으로 전복, 다수 사망, 중경상 입음. (1980년대 민주화운동)


06:10 해남 우슬재에서의 총격

- 해남 우슬치 고개, 폭도 2명 검거, M1 1정, 카빈 실탄 55발 노획. (계엄사 상황일지)

* "광주로 가려고 7,8명이 트럭을 타고 가던 중 해남 우슬재에 도착했을 때 잠시 차를 세웠다. 용변을 보기 위해서였다. 근처 도로변에서 용변을 보고 있는데 고개마루에서 청년 1명이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며 '동지들! 어서 오시오'라고 소리쳤다. 무슨 일이 있나 보다고 생각하고 그쪽으로 가려는데 일행 중 누군가가 '저 사람 사복을 입었으나 총도 M16이고 군인인 것 같다. 아무래도 군 첩자일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살펴보니 머리에 수건을 둘렀으나 머리가 짧아 보여 더욱 의심스러웠다. 어찌할 바를 몰라 망설이던 나는 트럭 있는 곳으로 갔다. 그때였다. 오른쪽에 있던 산에서 총알이 빗발치듯 날아왔다. M16 자동소총 소리였다. 나는 재빨리 적재함으로 올라가 머리를 감싸고 엎드렸다. 총탄이 차를 뚫고 들어와 오른쪽 발가락을 관통했다. 운전을 하던 선배가 차를 돌려 군인들의 사정거리를 벗어났으나 모두 부상당한 뒤였다. 나는 강진 도립병원으로 갔다. 그 병원은 부상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우리가 공격당한 우슬재에서 다른 차량도 여러 차례 습격을 받아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것이라고 했다." (구술 : 강석신, 현사연 조사)


06:47

- 작전 8-6호에 의거, 비아 KBS 송신소 병력 투입(08:00도착). 20사단 61연대 3대대 10/197명 전차 3대 배속. (전교사 작전일지)


07:00

-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질서를 찾아가고 있는 상황 속에서 오전 7시경 금호고교 부근에서 공수부대 3명이 학생 2명과 할머니를 살해하고 도주하였는데, 후에 정부는 이 사건을 시민군의 행위라고 책임전가.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

- 해남. 복령리 국도상에서 군과 총격전. 무장시위군 1명 사망. (1980년대 민주화운동)


08:00 교도소 앞 총격

- 담양으로 나가던 시위대가 교도소의 경비계엄군에 의해 저지당하면서 총격 교전, 시민 3명이 사망하고 2명이 부상. 교도소는 시외로 나가는 분기점에 자리하고 있어 시위대가 교외로 오갈 때마다 교도소 경비계엄군에 의해 차단당하면서 공격을 받곤 함. 계엄사에서는 이를 교도소 습격이라고 발표. (아! 광주여 민족의 십자가여!)

- 2 1/2톤 탑승한 폭도 6명이 기관총을 난사하면서 교도소로 접근. 50 미터 전방의 바리케이드에 봉착, 진출하지 못하자 11대대에서 즉각 응사. 2명 사살, 4명 부상을 입고 도주. (특전사 전투상보)

* 대한통운 대형 트럭에 4,5명의 시민이 타고 교도소 앞을 지날 때 교도소에 있던 계엄군들이 그들을 향해 사격을 가했다. 시민 3명이 사망하고 2명은 총상을 입고 교도소로 실려왔다. 이날 오후에는 장갑차 1대가 정문 앞에 정차하자 계엄군이 총을 쏴서 그 차에 있던 2명이 사망했다고 동료가 말해줬다. 이렇게 죽은 사람의 시체는 헬기가 와서 어디론가 싣고 갔다." (구술 : 홍인표, 현사연 조사)


08:30

- 조선일보 서청원 기자가 확인한 사망자 명단.

'도청 뒤뜰 43구' - 이중 17명 이름 확인, 미확인 26명. 임규수, 김호중, 정민구, 정학근, 홍성기, 나종기, 정창용, 조남진, 조사천, 이상자(여), 김재환, 박기현, 임순춘, 양주섭, 전종호.

'전남대 22구' - 김안복(36), 김정웅(39), 박기웅,,이세호, 박기형(16), 신정대, 최승희(여21), 김재수, 김호중, 정민규(23), 최영호. (월간조선, 1987. 5)

- 남도예술회관 벽과 충장로 방향 YWCA 부근 벽에는 사망자 명단, 죽은 시체와 부상자들의 흑백사진 부착됨.

- 도청 앞 맞은편 상무관에는 30여 구의 시체를 무명천에 덮어 나란히 안치, 입관하지 못한 시체도 수십 구 있음. 분향소는 상무관 입구에 설치.

- 도청에는 행방불명자 명단 접수, 입원환자와 사망자의 명단 대조하며 확인.

- 도청 정문에 '수습대책위원회'라는 띠를 어깨에 맨 청년들이 사망자를 확인하려는 시민들을 주민등록증 대조 후에 통과시킴. 가족이 확인한 시체는 상무관으로 옮겨 안치. (1980년대 민주화운동)


09:00 녹두서점에 모인 교수, 학생 시민궐기대회 계획

* "오전에 집을 나서 녹두서점으로 갔다. 그곳에 교수와 전남대생들이 있었다. 윤상원 형도 있었다. 상원 형이 '지금 도청에는 학생들이 없으니 우리가 역할을 분담해서 일을 하자'고 제안했다. 또 우리가 아무런 대책 없이 무기를 반납해서는 안 되며 현재의 분위기를 고조시켜 민주화를 이룩해야 한다고 했다. 이러한 실천 방안으로써 시민궐기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궐기대회에 필요한 앰프, 마이크 시설 등의 물품은 YWCA로 가서 준비했다. 버스를 이용해 시내 각처를 돌아다니면서 오후 3시에 도청 앞 광장에 시민궐기대회가 열리게 됨을 알리고 다녔다." (구술 : 김태종, 현사연 조사)

- 함평. 버스 4대, 트럭 2대에 탑승한 4백여 명 시위 개시. (31사단 전투상보)

- 함평. 시위대는 본부를 함평경찰서로 결정. 영광으로 통하는 도로와 함평다리 입구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자체경비. (1980년대 민주화운동)

- 목포. '목포시민 민주화투쟁위원회'가 목포역에서 구성. (아! 광주여 민족의 십자가여!)

- 구용상 광주시장, '80만 시민에게 호소합니다' 전단 배포. (조선일보, 5. 24)

- 주한미국고위관리 발표/북한 오판 막기 위해 만반의 조치, 미 결의 이미 전달, 정치일정 공약대로 추진 확신.

- 해럴드 브라운 미국방장관 발표/북한의 대남도발에 대해서는 강력 대응, 한국에 60일분 전쟁물자 비축.

- 미국방성 관리/미국 항공모함 미드웨이 등 필요하면 한국에 급파, 코럴시호 파견 부인. (동아일보, 5. 23)


09:35

- 도청에 학생수습위원회 본부 설치.

- 무기 회수 활동 전개.


09:50

- 31사단장 함평지역 예비군 대대 방문. (31사단 전투상보)

10:00

- 80-7호에 의거 광주시내 변전소 확보 지시

. 광주변전소: 31사 병력 투입

. 계림변전소: 3공수 투입 (전교사 작전일지)

- 목포. 오전 8시부터 시민들 집결. 휴교령으로 중.고생들도 시위에 참가.

- '제2차 민주헌정 수립을 위한 목포시민 궐기대회'가 5만 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개최. 목포청년회의소에서 연단용 트럭을 제공하는 듯 위장하며 위원장의 연설을 막기 위한 납치 시도, 좌절. '더 이상 김대중 선생을 탄압하지 말라. 김대중 선생은 우리 목포시민이 30년 동안 탄압받으면서 탄생시킨 목포가 낳은 이 민족의 지도자이다!'라고 주장. '우리 겨레와 자유민에게 보내는 목포시민 결의문' 낭독 후 시가행진. 목포청년회의소 시위행렬 방해. (1980년대 민주화운동)

- 영암. 영암군 도포면 덕화리 저수지 부근에서 도포지서의 실탄을 싣고 대피중인 예비군 중대장 발견. 그들이 싣고 가던 M1, 카빈 소총, 실탄 2만 1천4백70발을 획득. (1980년대 민주화운동)

- 5. 23 10:00경 영암군 도포면 덕화리 소재 저수지 부근 노상에서 도포지서의 총탄을 경운기에 싣고 안전한 곳으로 대피중인 동면 예비군 중대장 김금호를 발견하고 피고인들이 총으로 위협하며 공포를 발사하여 동 김금호의 반항을 억압하고 경운기에 싣고 가던 카빈 및 M1 소총 총탄 2만 1천4백70여 발을 트럭에 옮겨 실어 이를 약탈하고 (공소장)


수습대책위원회 조직개편

- 도청 도지사실에서 일반수습위원회는 당초 15명 중 5명이 사퇴하고 전남대생 10명, 조선대생 10명을 추가해 30명으로 늘리는 한편, 수습대책위원장에는 윤공희 대주교를 추대했다. 이때 수습위원으로는 고광표, 서정수, 조비오, 윤성원, 이홍길, 심홍순, 한완석, 박찬일, 문행두, 최한영 등이었다.

한편 남동천주교회 유치원에서는 김성용, 홍남순, 이기홍, 조철현, 조아라, 이애신, 위인백, 이영생, 조봉환, 장기언, 김천배 등과 회합, 조철현이 도청 상황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도청내 수습대책위원회는 무력하고 도청 안에서 폭도들이 무기를 들고 싸우는 것을 보면 성직자로서 같이 싸우지 못하는 것이 부끄럽다고 말하자 이에 모두 동조하고 계엄사에 요구할

1) 광주사태는 공수단의 살상에 대한 광주시민의 정당방위 행위이다 .

2) 구속학생을 석방하라.

3) 공수단의 책임자를 처단하라.

4) 계엄군의 투입을 금지하라.

5) 시민, 학생 처벌 및 보복 엄금하라.

6) 계엄군은 사과하라.

7) 정부 책임하에 피해 보상하라.

8) 무기는 자진회수 반납한다.

등 8개항을 결의한 후 전원이 도청으로 들어가 최한영이 주도하는 시민대표 수습위원회에 참석하여 조직적이고 정치적인 무력시위를 하기 위하여 도청을 점거하고 있는 폭도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교수들을 지도자로 하자고 제의하여 참석자 전원의 찬동을 얻어 명노근, 송기숙, 오병문을 지도자로 선정했으나 무기를 회수하여 계엄당국에 반납하자는 등의 도청내 수습위의 입장에 이견을 보여 수습위에 합류하지 못하고 폭도들을 앞세워 끝까지 무장투쟁을 해야 한다고 결심. (공소장)


무기 회수를 둘러싼 의견대립

- 무기 회수에 반대하는 시민과 학생들은 수습대책위의 수습방안에 불만을 품고 도청 앞 광장에 모여들기 시작.

- 학생수습위에서는 '무기반납으로 사태를 해결짓자'는 주장과 '시민들이 납득할 수 있는 최소한의 요구조건이 관철된 상태에서 반납되어야 한다'고 맞섬. 타결이 되지 않자 회수된 무기 중 1백 정만 계엄사로 갖고 가 반응을 보기로 합의. (1980년대 민주화운동)

- 학생들과 시민대표, 도청 간부들 협상중. 어제부터 수습 나섰으나 뚜렷한 결론 못 내었고 일반수습위와 학생수습위의 양수습위에서는 '무기반납으로 사태를 해결짓자' 는 주장과 '지금 이 시점에서 무조건 무기반납을 하는 것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하며, 시민들을 납득시키기 위해서는 적어도 우리 광주시민을 폭도라 부르는 현 정권의 태도에 변화가 있어야 하며 이번 사태로 인한 피해가 정당하게 보상되고 사망자의 장례식을 시민장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이 엇갈려 수습전망 흐림. (아! 광주여 민족의 십자가여!)


10:20

- 3공수 추진진지(교도소-편집자주)에서 교전, 소방차 1대에 폭도 탑승, 카빈 사격하며 돌진. 4명 생포, 카빈 1정, 실탄 20발 노획. (특전사 전투상보)

- 동월 23일 10:00경 전남대학교내에서 공소외 김상집, 동 정유아 외 성명불상 3, 4명과 함께 동대학교 본관 뒤에 주차되어 있는 동대학교 소유 전남 5가 1155호 스쿨버스 1대와 동대학교 구내매점에서 빵 1상자, 콜라 1상자 및 동대학교 발전실에 있는 앰프 1세트를 들고 나와 앰프와 스쿨버스를 폭도를 규합하기 위한 가두방송에 공하고 (공소장)


10:30 남녀 고교생의 시위

- 남녀 고교생 1백여 명이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시위.

- 고교생들이 사망한 친구들의 시신에 태극기를 덮어주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 등의 노래를 부르며 시위. (월간조선, 1985. 7)


10:40

- 도청내 시체 속에서 화염방사기로 그을린 듯한 시체 여러 구 발견. (아! 광주여 민족의 십자가여!)


10:50

- 폭도 30명, 소방관으로 가장, 담양 고속도로에서 남영으로 이동중.

- 해남 황산만. 폭도 40명 아군 도로차단 병력과 교전, 폭도 1명 사망, 2명 부상, 그 외 해산 부상자 부대로 후송, 아군 피해 무.

- 해남. 폭도 체포 연행하고, 일부는 군부대장과 협의 후 신병을 인수해 귀가조치. (계엄사 상황일지)


11:00 부녀자 시위대에 식사 제공

- 이날도 그간의 피해상황이 목격되어 오전 11시경 광주세무서 지하실에 시체가 있다는 보고를 받고 김OO 씨 등 4명이 현지로 가서 확인한 결과 유방, 음부를 도려내고 얼굴을 난자당한 여고생의 시체가 있었다. 신원확인을 해본 결과 옷 컬러 속에서 학생증이 나왔다. 전남여고 2학년 학생 이O였다. 시체를 싣고 가서 확인하고 부모들이 시체를 인수했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 부녀자들 솥 걸고 시위자에게 식사 제공, 총기는 절반 가량 회수.

- 시민들은 미국무성 성명(미군이 진압군 차출하는 것 양해했다는 내용)의 의미가 뭐냐고 궁금해 함.

- 시민대표들 장례절차 논의중. (월간조선, 1985. 7)

- 영암. 영암읍의 아주머니들 시위대에 식사 제공.

* "22일 오후쯤부터 나이 드신 분들 사이에 '저애들은 얼마나 배가 고플까, 저 애들의 부모들은 자식들이 밥도 못 먹고 저러고 다니는 것을 알기나 할까' 하는 말들이 오고 갔다.

그런 다음날 아침이었다. 시위대가 광주에서 내려온 이후 장사는 전혀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장사(식당) 준비를 위해 사거리에 있는 상설시장에 갔다. 거기서 평소 언니라고 부르는 분을 만났는데, 언니는 내게 '몇몇 사람들이 돈을 걷어 시위하는 애들에게 밥을 해주기로 했는데 너도 참여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몇천 원 혹은 1만 원 정도씩의 돈을 걷어 10여 명의 동네 아주머니들이 '흥운식당' 안집에 모여 김밥을 말았다. 우리는 11시 30분쯤 시외버스 공용터미널에 있던 시위대들에게 김밥과 음료수를 갖다주었다. 시위대원들의 옷에 피가 묻어 있기도 했다. 그들은 우리에게 '고맙다'고 하면서 먹었다." (구술 : 이서운, 현사 연 조사)


11:00

- 청년운동권 핵심들은 무조건 무기반납을 막기로 논의. 시내 근처에서 많은 수의 학생운동권과 청년, 노동운동 관계자들이 모여 수습위가 시민 의사에 반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으며, 지금까지의 승리를 포기한 투항주의적 모습에 안타까움을 느끼고, 시민궐기대회를 주도하고 홍보반을 조직하여 대민 선전활동을 하기로 결정. 플래카드 제작, 민주영령에게 조의를 표하는 검은 리본 배부. (1980년대 민주화운동)


11:10

- 영산포-나주. 버스 1대, 타이탄 1대 접근, 바리케이드를 치던 병력이 정지를 명하자 회전, 도주하는 것을 대대장 명에 의해 타이어 사격, 폭도 15명 체포, M1 30정, 카빈 30정, 버스 1대, 트럭 1대 노획. (31사단 전투상보)


11:20

- 수습위원들이 7군데 시외곽을 돌면서 무기회수 권유. 총 5천4백여 정 회수. (신동아, 1985. 10)


11:30

- 전남대 뒷산에서 숨진 광주상고 2년 이성귀 군(16)의 시체가 도청으로 옮겨지면서 한때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수습대책위원회는 22일 결의된 8개 사항 외에 총기를 반납하지 않겠다는 일부 강경파 시위대들의 고집으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며, 시민들은 경찰이 나와 질서회복에 힘써주기를 바라기도 했다. (월간조선, 1985. 7)


11:48

- 봉쇄선 작전지침 하달

무기류 든 폭도의 봉쇄선 이탈 절대 거부

폭도 중 반항하지 않는 자 체포, 반항자 사살

차량을 이용 강습시도시는 사살

현봉쇄망은 주도로만 치중치 말고 지선도로도 장악, 폭도 탈출 적극 방지. (말 , 1988. 8)


11:50 계엄군 생포

- 47,48세쯤 보이는 대머리 남자가 도청 광장에서 간첩용의자로 학생들에 의해 연행.

- 민간인으로 위장한 공수대원 2명 체포.

* "배고픈다리에서 수상한 청년 1명을 발견했다. 그는 우리 앞을 태연히 통과하려 했다. 나는 그가 우리 앞을 지나려는 찰나 그를 나꿔채고 총을 들이댔다. 그러는 사이 계곡에서 황급히 도망가는 군인이 있었다. 우리와 70-80미터 거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쫓아가 잡을 수는 없었다. 나는 그를 향해 M2 자동소총을 갈겨대며 공중사격을 했다. 그러자 그 군인은 도망가지 못하고 꼼짝 않고 서 있었다. 몇명의 대원들이 그를 잡아왔다. 그들의 사복을 벗겨보니 군번이 나왔고, 속옷은 군용 포대 팬티를 입고 있었다. 틀림없이 민간인을 가장하여 염탐하러 온 공수부대였다. 그들을 붙잡은 우리는 천천히 조사를 했다.

'너희 아지트가 어디냐?'

'지원동으로 모두 넘어갔고 우리 둘만 남았습니다.'

'그럼 너희 장비는 어디에 있느냐?'

'태봉마을 철탑 밑에 있습니다.'

대원들이 그곳으로 가서 그들의 장비를 모두 가지고 왔다. 배낭, 신발, 총, 낙하산, 건빵 등이 있었다. 우리는 그들을 포승줄로 묶었다. 주위에 모여 있던 시민들과 다른 대원들 80-90퍼센트가 그들을 죽여버리자고 했다. 총을 겨누려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이놈들도 잔인한 군인이지만 우리 동포니 죽이지는 말자'고 설득했다. 그때 마침 도청에서 순찰대원 2명이 지프차를 타고 왔다. 나는 군인들을 장비와 함께 그들에게 넘겼다." (구술 : 문장우, 현사연 조사)


11:53

- 1백여 명의 중고생들이 거리 청소를 한 후 질서회복을 외치며 금남로 행진.


11:55

- 부대이동 지시, 광주지역 소요진압을 위해 3군 예하의 33사단 101연대 2대대 25/447명을 14:00 성남 K-16기지를 출발 광주에 투입. 11:45 부대 출발, 12:25 K-16 도착. 13:24 이 작전은 취소되어 16:00에 부대 복귀. (육본 상황일지)


12:00

- 12시 현재 8백여 정 총기를 회수, 차량통제반은 시위군중들이 몰고 다니는 버스, 장갑, 페퍼포그차 등에 대해 함부로 못 몰고 다니도록 단속하고 있어 무질서한 차량통행은 통제됨. (월간조선, 1985. 7)

* "나는 김원갑과 함께 차량통제를 완벽하게 하기로 결심하고 도청 사무실 앞 에서 모든 차량은 등록을 하도록 지시했다. 차량기사는 반드시 믿을 수 있는 '증'을 발급해 줄 테니까 '증'을 소지한 자만 차를 탈 수 있다고 공고하고 차량번호를 매기면서 등록을 하지 않는 차는 모두 수거했다. 모든 것이 거의 자발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정확한 지도부의 부재 속에서 나 혼자 일을 추진한 데다 더군다나 상황은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급변하고 있어서 도청 안의 통제을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게 여겨졌다.

도청에서 밖으로 나와 녹두서점으로 가보니 그곳에서는 팀을 구성하여 시민궐기대회준비를 하느라고 부산했다. 이곳에는 박효선, 오재일, 윤강옥, 윤상원 등이 있었다. 나는 다시 도청 안으로 들어와 마이크를 설치하고 이들에게 상황설명을 해주었다. 그러나 도청 안의 지도부 청년들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고, 분위기는 전혀 다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이날 오전부터 1층 상황실의 맞은편 사무실에서는 조사부라는 쪽지를 붙여놓고 일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시민군들이 잡아온 수상한 자, 총기를 들고 시민들을 이유없이 위협하는 자, 물건을 훔치다 잡혀온 사람들을 심문하기 위해 조사부를 설치했다." (구술 : 이재의, 현사연 조사)

- 새벽 5시부터 도청 앞 광장에 시민들이 몰리기 시작, 현재 약 7만-8만 명이 운집해서 도청내에서 진행되고 있는 수습대책위원회와 학생들의 회의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수습대책위원회들은 오전 10시부터 도지사실에서 회의중에 있고 위원은 30명(지역 유지를 중심)으로 늘렸고 독립투사 최한영 씨를 위원장으로 뽑았다. 수습위원들은 22일 계엄사와 합의한 7개항의 내용을 문안으로 작성해서 마이크 등을 통해 시민들에게 이를 공지하기로 하고, 학생들에 대해서도 설득을 계속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내무국장실 옆방에서는 학생대표들이 회의를 열고 있으며, 대표들 중 온건파는 수습대책위의 의견을 따르자는데, 한편 강경파는 계엄령 철폐 등 기본적 문제가 관철될 때까지는 끝까지 투쟁하자고 주장해 의견일치를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어서 사태수습은 난항. 그러나 강온을 막론하고 광주시내 질서회복을 하자는 데는 이견이 없어 대학생 7백-8백 명(여대생 50여 명 포함)이 23일 12시 현재 하얀 헝겊에 '대학생'이란 완장을 두르고 질서회복에 나서고 있다. 이들 학생들은 '질서를 회복하자는 것은 대책위의 합의를 받아들여서 사태를 수습하자는 것이 아니냐?'는 우리 기자의 질문에 대해 '그것은 오산이다. 군 부대에서 연행학생 70명을 석방해 주겠다는 조건으로 무기를 회수하여 반환할것 을 대책위를 통해서 요청했지만 석방한다고 해도 다시 잡아갈 것이 분명하지 않느냐. 우리는 계속 투쟁할 것이다'고 했다. 학생들은 총기를 회수하여 이를 반납치 않고 시민들로부터 회수한 총기를 학생들만 갖고 학생들이 치안을 맡아 자체경계를 맡겠다는 움직임이 크다.

- 중심지역 주민 대부분, 변두리나 시외지역으로 피난.

- 광주시내 생필품 동나 이웃에서 꾸어서 생활.

- 전투병과 교육사령부에서 국군통합병원으로 가는 길목에 탱크 2대를 앞세우고 계엄군과 5백 미터 떨어진 지점에 무장시민 3백여 명이 대치. 이 지점을 시민, 학생들은 제2의 판문점이라고 부르고 있음. (월간조선, 1985. 7)


12:30

- 군부대, 광주변전소 병력투입. 1/44(방위병 40명). (전교사 작전일지)

- 목포역 광장에서 목포대학생연합회와 목포시민 민주화투쟁위원회 주최로 시민 학생 3만여 명이 모여 목포시민 민주화궐기대회를 열어 '김대중 석방', '계엄해제'등의 플래카드와 구호를 외치며 1시간 동안 성토대회. 시가행진에 돌입. (월간조선, 1985.7)


12:35

- 전교사, 해안경계 강화 지시

해안 경계 강화 지시 : 훈련단장

무기, 탄약 피탈 방지

탄약고 경계 강화 (말, 1988. 8)

- 화순 (?)량리에서 청룡면으로 가는 도로상에서 버스 3대 발견, 1대는 전복되고 2대는 도로상에 방치한 후 폭도 서성거림. (계엄사 상황일지)


13:00 계엄사 연행학생 34명 석방

- 회수된 총기 2백 정을 장휴동, 김창길 씨가 계엄사를 찾아 반납한 후 연행했던 34명의 신병을 인수해 오자 수습위는 '무조건 무기반납' 측과 '조건부 무기반납' 측으로 갈라져 갈등이 표면화됨. (신동아, 1985. 10)

- 도청내에서 무기관리담당 허규정 등이 회수하여 놓은 카빈 소총 및 M1 2천여 정 가운데 일부인 1백여 정을 시민대표 장휴동 등과 함께 김창길이 계엄분소에 반납한 후 5.18사태로 구금되었던 사람 34명의 신병을 인수해 왔다는 전갈을 김창길로부터 김종배는 전해 듣고, '지금 이 시점에서 무조건 무기반납을 하는 것으로는 문제의 해결이 불가능하다. 시민들을 납득시키기 위해서는 적어도 우리 광주시민을 폭도라고 주장하는 정부의 태도에 변화가 있어야 하며, 금번 사태로 인한 피해가 정당하게 보상되고 사망자의 장례식을 시민장으로 해주는 정부당국의 양해가 있어야만 한다'라는 결의를 표명 (공소장)


13:30

- 글라이스틴 주한미대사 의원 8명과 오찬/광주사태의 원인 등에 대한 의견 청취, 글라이스틴 대사는 이 자리에서 카터 행정부는 최근 한국사태를 이란이나 아프가니스탄보다 더 중시하고 있으며 한국방위에 대한 미국정부의 단호한 결의를 모종의 통로를 통해 북한측에 전했다고 밝혔다. 또 광주사태가 해결되면 정치일정이 당초 계획대로 진행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5. 24)


오후 계엄사령부, 광주지역에 투입된 계엄군의 행동조치 결과 발표

- 계엄사령부는 23일 오후 광주사태 발생 후 광주지역 일원에 투입된 계엄군의 행동조치 결과를 발표했다. 이 발표에서 계엄군은 '시민들이 점차 시위군중에 합세하고 난폭화되기 시작해 계엄군 병력을 증원, 주요시설의 경계를 강화하는 한편, 난폭시위자는 연행 조사했다'고 밝히고 군중시위가 과열되자 계엄군은 외곽지대로 철수, 교도소 등 주요시설을 경비하면서 '난동자들이 총격을 가하더라도 발포를 억제하고 전단 등을 활용한 선무활동을 전개해 왔다'고 밝혔다. 이 발표문은 또 '계엄군은 사태의 급격한 악화에 대비하여 국민의 생명과 출동병력 및 주요시설의 보호가 위태롭게 될 때에 한하여 불가피하게 자위권을 행사할 것을 천명'했다고 밝히고 '군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사태를 수습하도록 모든 노력을 경주할 것을 다짐하면서 자위권을 발동해야 할 불행한 사태가 오지 않도록 전국민이 공동노력을 경주하자'고 호소했다. (동아일보, 5. 24)


13:55

- 도청 앞 광장 1천 명 운집. 유족들을 도청 안으로 입장시키고 있음. (도청 앞 59구의 시체 있음). (계엄사 상황일지)


14:00 주남마을 양민학살, 18명 사망

- 오후 2시경 시민과 학생 18명을 태운 버스가 주남부락 쪽으로 6백50미터 전방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차 안의 학생 5명은 카빈 소총을 들고 있었다. 주남부락 뒤에 매복해 있던 공수들이 10여 분 동안 M16으로 집중사격을 가했다. 15명이 버스 안에서 즉사했다. 당시 춘태여고 1년생 홍금숙과 청년 2명이 온몸에 피를 흘린 채 끌려나왔다. 한 청년은 눈알이 빠져나왔다. 공수들이 3명을 경운기에 싣고 가다 길이 좁아지자 청년들을 포승줄에 묶어 리어커에 싣고 홍금숙은 걷게 하여 여단본부 쪽으로 데리고 갔다. 무전연락을 받고 온 소령이 청년을 처치하라는 고개짓을 하자 벌집이 된 버스 앞에 청년들을 세우고 중사가 청년의 머리에 M16 3발씩을 쏘자 사망했다. (한계레신문, 1888. 5. 20)

* "여학생 4명을 포함하여 18명이 탄 미니버스가 주남마을 주변에 포진해 있던 공수의 집단발포로 15명이 즉석에서 사망했다고 했다. 내 동생 현숙이도 그때 사망했다." (구술 : 박현옥, 현사연 조사)

* "25인승 미니버스에 18명이 타고 지원동을 막 벗어났을 때였다. 군인 1명이 도로변에서 정지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차를 멈추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욱 속력을 내어 달렸다. 요란한 총소리와 함께 차를 향해 총탄이 쏟아졌다. 누군가 차를 돌리라고 소리쳤다. 기사는 차를 돌리려다 총에 맞아 쓰러졌다. 차에 탔던 청년들도 산을 향해 응사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더욱 많은 총탄이 쏟아졌다. 도저히 안 되겠다고 판단한 청년들이 총을 높이 들고 항복이라고 외쳤다. 그러나 공수부대의 총탄세례는 멈추지 않았다. 내장이 터져 차 바닥에 쏟아진 사람, 총에 맞아 아우성치는 비명소리, 총알이 차에 부딪히는 소리 등으로 차 안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다행히 나는 총알이 직접 맞지는 않았지만 온몸에 파편이 박혔다.

서너 명의 군인이 차 안으로 올라와 군화발로 툭툭 차면서 생사여부를 확인했다. 눈을 다친 남자 1명과 상처가 심한 교련복 차림의 청년, 그리고 나, 3명만 살아있었다. 우리는 간단한 응급치료를 받고 경운기에 실려 산속으로 옮겨졌다.

산에는 군인들이 많이 있었다. 잠시 후 높은 사람이 와서 '귀찮게 왜 데려왔냐? 사살해!'라고 명령했다.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두 남자를 손수레에 싣고 갔고 나는 군인 1명의 감시를 받았다. 나는 한참 후 헬기에 실려 송정리 비행장으로 실려갔다." (구술 : 홍금숙, 현사연 조사)

- 수습위원 10명(이종기), 무기 1백 정 지참하고 계엄분소 방문. (전교사 작전 일지)

* "시민들로부터 회수한 무기를 계엄사에 반납하러 가는데 운전할 사람이 없다는 말을 듣고 영업용 택시기사였던 내가 지원했다. 내가 운전한 지프차에 최한영, 김창길 외 1명이 탔고 트럭에는 무기를 싣고 계엄사를 향해 갔다. 화정동 잿등 부근에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이 도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시민대표가 계엄사로 협상하러 간다'고 하자 여기서부터는 차가 다닐 수 없으니 걸어서 가라고 했다.

시민대표들이 계엄사로 간 후 나는 차를 정차시켜 놓은 채 기다렸다. 잿등에 모인 시민들과 계엄군이 말싸움을 하면서 '광주로 재진입하려면 나를 죽이고 가라'고 길바닥에 누워 악을 쓰는 시민도 있었다. 몇 시간 후 계엄사로 갔던 시민대표들이 왔다. 그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아 협상결과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없었지만 얼굴 표정이 밝지 않은 걸로 보아 협상이 결렬되었던 것 같다." (구술 : 정영동 , 현사연 조사)


14:10

- 영암읍에서 시민군에게 실탄 지급

* "우리는 영암읍 입구에 차를 세워놓고 광주 방면으로 올라가는 시민군의 차마다 실탄을 한 상자씩 나눠주었다. 우리는 1시간 동안 10상자 정도의 실탄을 나눠주었다." (구술 : 박재택 외 5명, 현사연 조사)


15:00 제1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

- 궐기대회가 끝나고 집결한 2백여 명의 대학생과 '들불야학' 학생들 10여 명이 YWCA에서 모였는데 이 자리에서 기획부, 궐기대회조, 홍보 및 가두방송조, 대자보조로 편성. 기획부는 정상용, 이양현, 윤상원, 윤강옥. 홍보 및 가두방송조는 박용준(들불야학, 27일 새벽 YWCA 2층에서 피살) 등으로 구성. (현사연 조사 종합)

- 장례준비를 위한 즉석 모금운동을 벌여 1백여만 원이 수습대책위에 전달됨. (1980년대 민주화운동)

* "도청 앞 분수대를 중심으로 굉장히 많은 시민들이 모여 '시민궐기대회'를 개최했다. 그날 나는 친구들과 함께 그곳에 모인 시민들에게 모금을 했다. 시민들이 낸 돈으로 양동시장에서 광목천을 사서 수의를 짓고 즉석에서 플래카드를 써서 거리에 붙이기도 했다." (구술 : 김결, 현사연 조사)

* "오후 3시 제1차 범시민궐기대회가 도청 앞 광장에서 열렸다. 궐기대회 식순은 희생자에 대한 묵념, 애국가, 수습위의 공지사항 전달, 민주주의 만세 삼창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이날은 노동자, 농민, 시민, 학생 등 각계각층 대표의 성명서 발표가 있었다. 그때 사회를 보면서 '이 나라의 민주주의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피를 흘리고 싸워서 쟁취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을 때 함성과 함께 열렬한 박수를 받았다. 궐기대회가 시작되자 도청 앞 광장 상공에 헬기가 나타나 전단을 살포했다. 궐기대회를 마치면서 내일은 보다 효과적인 집회를 위해 '전두환 화형식'을 하기로 했다." (구술 : 김태종, 현사연 조사)


15:00 지원동 버스 종점에서 총격전

* "지원동 버스 종점에서 계엄군 3명이 버스 밑에서 총을 쏘기 시작했다. 총소리를 듣고 그 부근에 배치된 우리 대원들이 순식간에 모였다. 지원동다리와 건물 옥상 등 사격하기에 적합한 장소를 찾아서 응사했다. 계엄군과의 거리는 약 4백-5백 미터 정도였다. 나는 신축공사중인 영락교회 현관에 엎드려 사격을 하고 있는데 뒤에서 실탄을 가져오라고 했다. 나는 지원동다리로 가서 실탄 1백50발 정도를 가져와 전봇대에 몸을 숨기고 사격자세를 취했다. 계엄군이 또다시 집중사격을 가하자 나 역시 총을 쏘고 있는데, 옆에 있던 20세 가량의 대원이 고꾸라졌다. 그는 허벅지에 총을 맞았다. 그 청년의 허리를 잡고 기어서 옆 건물로 갔다.

이것을 본 우리 대원이 달려오다 머리에 총을 맞고 즉사했다. 뒤쪽을 향해 차를 보내달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지프차 1대가 후진해 왔다. 다시 총알이 핑핑 날아왔다. 계엄군이 지프차를 향해 집중사격을 한 것이다. 운전석 옆에 있던 대원이 다리를 부상당해 쓰러지자 운전수는 재빨리 차에서 내려 몸을 피했다. 나는 부상당한 대원을 이끌고 기어서 지원동다리까지 왔다. 그곳에 있던 소대장이 부상자를 차에 실어 병원으로 보냈다.

나는 소대장과 함께 남국민학교 옥상으로 갔다. 거기서는 지원동 버스 종점에 있는 계엄군이 훤히 보였다. 그들도 총에 맞았는지 4,5명의 계엄군이 부상병을 업고 도망치고 있었다. 그들이 도망가자 한 시간여에 걸친 전투를 끝냈다." (구술 : 안성옥, 현사연 조사)

- 계엄사가 '경고문'이라는 붉은 글씨의 전단을 광주시 전역에 살포. (1980년대 민주화운동)

- 광주 소태동 폭도 50명, 버스 1대 타고 군부대 기습 시도. 11공수 반격 소탕, 생포 3명, 부상 2명, 사살 17명. (전교사 작전일지)

- 사망자수는 오후 3시 현재 우리 기자 확인 121명에다가 조남준 기자가 통합병원에서 4명의 사망자 확인해 총 125명이 확인됨. (월간조선, 1985.7)

- 목포. 학생, 청년 중심의 목포시민 민주화투쟁위원회 집행부 결성. 집행부장 박상규(21세, 목포공전 2년), 총무부장 황인갑(한신대 3년) 선출. (현사연 조사 종합)

- 목포. 시가행진 후 목포역 광장에서 목포시민궐기대회 개최. (월간조선, 1985. 7)


16:00 20사단 부대배치

- 전교사, 부대배치 조정

외곽봉쇄 도로 배치

보교:2개소(23/655)

포교: 3개소(59/1,061)

기교: 1개소(5/176)

61연대 2대대(목포선) 교대 완료

62연대 2대대(통합병원) 교대 완료

62연대 3대대(서창다리) 교대 완료

61연대 3대대(송신소, 톨게이트) 교대 완료

집결보유

20사(1개 대대):상무대

20사 60연대:비행장

3공수: 교도소

7,11공수: 소태동, 주남 일대 시설경계 추가배치. (전교사 작전일지)


16:00 지원동 민가에 계엄군 난입

* "매형과 함께 밖에 나왔다가 헤어지고 혼자서 무등중학교 부근을 걸어갔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걷고 있는데 갑자기 주유소(무슨 주유소인지 기억나지 않으나 무등중학교 부근에 주유소가 하나 있었음) 앞에서 총소리가 났다. 나는 무조건 뛰었다. '쏴버려!' 하는 고함소리가 들렸다. 그때 나는 왼쪽 옆구리에 심한 통증을 느끼며 푹 고꾸라졌다. 연탄가게 대문을 두드리자 학생 2명이 나왔다. 그들의 부축을 받으면서 들어가는데 계속 총알이 날아들었다. 그 집 방으로 들어가 간신히 누웠다. 목이 엄청나게 타기 시작했다. 물 좀 달라고 사정했지만 주지 않았다. 잠시 후에 공수 1명이 그 집으로 들어와 방 안으로 총을 들이대고 쏘려고 하는데 주인이 주민등록증을 보여주자 그냥 가버렸다." (구술 : 김삼중, 현사연 조사)


피난가는 시민을 향해 난사.

* "광주시내 통신이 완전히 두절되었기 때문에 집배원이었던 나는 23일 출근을 하지 않았다. 지난밤 끊이지 않고 계속된 총성에 불안을 느낀 나는 가족과 함께 피난길에 올랐다. 오전에 짐을 정리하여 오후 3,4시경 화순 쪽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피난길에 오른 사람들이 듬성듬성 걷고 있었다. 우리가 논길을 따라 녹동마을(지원동)을 막 지날 때였다. 난데없는 총소리가 콩볶듯이 요란했다. 잽싸게 주위를 살펴보니 광주-화순간 도로변에서 계엄군들이 우리를 향해 총을 쏘고 있었다. 1개 소대 병력 정도가 2줄로 서서 앞줄은 '엎드려 쏴', 뒷줄은 '서서쏴' 자세로 갈겨대고 있었다. 나는 주변 민가를 향해 정신없이 뛰었다. 총알이 내 주위를 핑핑 스쳐갔다. 한참을 뛰어가다 신발이 벗겨지자 나는 그 자리에 섰다. 아니, 내 신발에 피가 흥건히 고여 있는 것이 아닌가. 그때야 나는 위아래를 살펴 봤다. 오른쪽과 왼쪽 다리에서 피가 흘러내려 이미 옷을 빨갛게 적셔놨다. 언제 총에 맞았는지조차 모르는 사이 양쪽 대퇴부를 관통했던 것이다." (구술 : 김동식, 현사연 조사)

- 무등산 중계소: 20사 1개 소대 배치(1/40)

비아송신소: 기교 14/255

시월산 탄약고: 포교 1/40(말, 1988. 8)

- 영암 시종지서 뒷산에 매장된 M1 소총 20여 정을 획득하고 광주시내 투쟁 지원을 위해 수차례 진입 시도하였으나 외곽을 뚫지 못함. (현사연 조사 종합)


학운동 자위대 무기반납

* "도청에서 순찰차가 와 무기를 회수한다고 했다. 우리는 무기를 회수할 의향이 없었는데 그들은 간곡히 사정했다. 그들의 말을 들어보니 일리가 있었다. 대원의 절반가량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제2의 생명인 총기를 반납하면 우리에게 죽음뿐이다'며 강력히 반대했다. 특히 김춘국 등이 심하게 반발했다. 대원들의 의견통일이 되지 않자 순찰대에게 다음에 오라고 했다. 나는 그사이 대원들을 설득하고 타협한 후 두시간 후에 그들이 다시 오자 총기를 전부 반납했다. 이렇게 해서 학운동 지역방위대가 해체되었다." (구술 : 문장우, 현사연 조사 )


17:00

- 도청 무장폭도들이 회수된 무기 재지급하여 무장 '정부 물러가라', '김대중 석방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강경화.

- 재향군인회관 옥상에 LMG 설치, 폭도 주동자 도청 철수, 장소 이동, 군 진입시 반격태세(특공대, 방석복 착용).

- 차량통제반은 차량통제를 위해 시민군이 타고 있는 모든 차를 도청으로 집결토록 하여 일련번호 부여 활동을 체계적으로 정비, 차량은 219호까지 있었음. (전교사 작전일지)


17:10

- 도청 앞 시민 4천여 명 모여. 시민궐기대회 진행. (전교사 작전일지)

- 거수자 검거, 경남 사천군 고속도로 톨게이트에서 전남 강진읍 이강술(20,공원)이 소지한 수첩에

(1) 고려대, 서울대 문리대생 3명씩 강진읍 영다방 집결.

(2) 동국대생 3백 명은 광주 진입로에 집결.

(3) 전남 5개대생은 5월 21일 원광대로 집결.

(4) 5.22 광주 탈출, 주민 선동.

(5) 5.23 고려대생은 장흥으로 피신. (계엄사 상황일지)


18:00

- KBS-TV 방송 재개. (월간조선, 1985. 7)

- 지원동과 화정동에서 교전. 환자운송 차량이 총격 받아 3명 사망, 10명 부상.

- 보성. 버스 3대에 탑승한 무장폭도 94명 자수. 회수품: M1 38정, 카빈 24정, LMG 1정, 실탄 449발, M1 194발, 카빈 255발, 기타 경찰장비. 주모자 6명 조사중. (특전사 전투상보)


저녁, 투사회보 제6호 배포

- 저녁 무렵 광주 진입로 지원동 부근에서 계엄군과 또다시 총격전이 벌어졌는데 군은 무자비하게도 헬기로 기총소사까지 감행해 무수한 희생자가 생겼다. 한편 5월 18일부터 시내 일원에 계속 살포되었던 '투사회보'가 이날로 제 6호가 배포되었다. 이는 허위날조된 당국의 기만보도에 분노하여 허수아비 언론을 규탄하고 광주사태의 진상을 밝힌다는 취지하에 8호부터는 그 명칭이 '광주시민회보'로 바뀌어 광주시민투쟁협의회 명의로 26일까지 발간되었다. 이 외에도 4,5종의 유인물이 계속 나와 시민들에게 소식을 전하고 투쟁을 고취시켰다. 신문, 방송 등 모든 언론, 외부와 차단된 시민들은 이 신문에 호응이 컸으며 자신들이 배포해 주겠다며 더 달라는 시민들도 많았다.

이날 밤 학생수습위원장 김창길이 화순탄광에 근무하는 화약 전문가라고 소개해 도청으로 들어온 계엄군 요원이 도청에서 최후 순간 자폭을 위해 보관중이던 뇌관을 제거해 버렸다. 또 이날 밤 수습위는 1층에서 회수된 총기 2천5백여 정을 포함, 상당량의 탄약을 도청에서 회수하였다. (아! 광주여 민족의 십자가여!)


19:00 교도소 앞 교전

- 철수작전중 교전. 교도소 앞 삼거리 주유소, 트럭(2 1/2톤) 1대에 폭도 43명 탑승, 카빈 난사하며 접근, 1명 사살, 2명 생포, 트럭 1대, 카빈 1정(실탄 14발), LMG 실탄 13발 노획. (특전사 전투상보)

- 계엄사. 연행자 34명 도피. (전교사 작전일지)

- 장흥. 버스 3대와 트럭 3대에 분승한 시위대는 '김대중 석방하라', '살려내라, 내 형제'라는 구호 외치며 장흥읍 일대 차량 가두시위. (아! 광주여 민족의 십자가여!)

- 트럭 한 대에 장치한 확성기로 광주 현지소식 알림. 장흥고교생 중심의 4백여 명의 시위대가 이들을 환영, 관산면의 버스 한 대와 합류. (1980년대 민주화운동)

* "장흥읍내를 돌며 차량시위를 하던 우리는 면단위 지역으로 가서 광주의 시위 상황을 알리기 위해 차를 몰고 안양-용산-관산면 등을 돌아다녔다. 가는 곳마다 주민들이 대환영을 하면서 음료수, 음식 등을 차에 올려줬다. 관산면 청년들과 함께 버스 2대를 대동하고 해질 무렵 장흥읍으로 왔다. 시위를 마무리짓고 해산하려는데 장흥고등학생들과 청년 2백-3백 명이 스크럼을 짜고 구호를 외치며 그곳으로 왔다. 청년, 학생들이 대열을 이끌고 읍내를 돌며 시위를 하다 어른들의 당부로 해산했다." (구술 : 김영기, 현사연 조사)


21:00

- 목포역 광장에서 시국성토대회를 갖고 시내 남녀 중. 고. 대학생, 시민 5만여 명이 횃불시위를 벌였다. 여고생 2백여 명이 횃불을 들고 대열 중간에 서고 남녀학생과 시민이 좌우로 선 횃불대열은 시내 20킬로미터를 보행 시위하면서 구호를 외침. (월간조선, 1985 .7)

- 나주,영산포. 시위대 중 일부는 23일까지 나주, 영산포, 강진군 성전면, 해남군 옥천면 등을 왕래하며 각 지역에서 참가한 농촌청년들(이들은 대부분 대도시에서 잡노동, 행상 등을 하다가 다시 고향에 돌아와 농사짓던 잠재실업군층)과 함께 광주지역 투쟁지원을 위해 여러 번 외곽지역 돌파를 시도하다가 많은 사상자를 냄. 이들은 광주 진입이 봉쇄되자 23일까지 계속 각 지방과 연결 시위를 주도했으나 헬기 정찰과 계엄군에 의해 거의 모두가 많은 사상자를 내고 체포됨. (1980년대 민주화운동)

- 무등산 경계병력 투입. (전교사 상황일지)


21:30

- 아세아자동차, 폭도 6명 침입, 장갑차 1대 탈취. (전교사 작전일지)


22:10

- 광주시내 금남로, 백운동, 서방, 광천동, 산수동 등 시내 일원, 목포, 나주 등 도내 일원에서 시위 계속. (전교사 작전일지)


22:40

- 목포. 횃불시위 후 철야농성. 자체경비대 조직하여 시외곽 및 시내 순찰. (1980년대 민주화운동)


23일 도청 상황

* "23일부터 임시학생수습위는 실질적인 임무를 수행했다. 제일 시급한 것이 총기 회수였다. 조비오 신부님이 시내와 외곽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총기를 회수해 왔다. 회수된 총을 도청 상황실에 쌓아놓았다.

다음으로 중요한 일이 시체의 처리 문제였다. 시체처리반에 일한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고생이 많았다. 이들은 궂은 일을 마다 하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전남대 부속병원과 조선대 부속병원을 돌아다니며 신원이 파악된 시체는 입관시 고 신원파악이 되지 않는 시신은 지장을 찍어놓았다. 또 공수들이 21일 퇴각하면서 시체를 암매장한 장소를 찾아서 시체를 파오고, 각지에 흩어져 있는 시체를 도청으로 옮기는 일을 했다. 시체에 비해 관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합판으로 관을 만들어 입관시켰다.

치안유지를 위해 조직된 순찰대에게는 나름대로의 특권이 주어졌다. 총도 가장 좋은 것으로 지급하고 일반인과의 구별을 쉽게 하기 위해 도청에 있던 전경복장을 지급했다. 이들은 주택가와 외곽지역을 순찰하고 계엄군의 동태를 파악했다.

지프차를 25대만 남기고 그외 차량은 통제했다. 도청에 주둔한 시민군의 식사는 여학생과 아줌마들이 맡아서 해줬다. 또 시민들이 집에서 가져온 주먹밥으로 해결하기도 했다. 23일 계엄사에서 회수된 총기를 반납할 것을 요구하자 우리는 3개항의 요구사항을 제시했다.

1. 광주사태는 공수부대의 과잉진압에 대한 광주시민의 항거임을 인정할 것.

2. 광주시민의 명예를 회복하고 부상자, 사망자의 피해를 보상할 것.

3. 구속자를 전원 석방할 것 등이었다.

그들은 총기를 반납하면 요구사항을 들어주겠다고 했다. 조비오 신부와 김창길이 총기 5백여 정을 반납했다. 그러자 몇 명의 연행자를 석방시켰다. (구술 : 정해민, 현사연 조사)


24일 새벽 외곽지역을 돌아다니며 무기 회수

* "두번째 수습협상을 위해 상무대 계엄분소에 갔을 때, 부사령관인 김기석 장군이 수습위원들에게 말하였다. '무장헬기와 탱크가 준비되어 있어서 광주를 진압하려 한다면 며칠 안에도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인명살상을 하지 않으려고 군인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무기를 빨리 회수하여 반납해 달라'는 요지였다. 수습위원들은 '시민들을 지휘 통솔할 권한이 없으나 계엄사측에서 확실한 보장만 해준다면 목숨을 걸고 무기 회수를 하겠다'는 결의를 보였지만 계엄사의 태도는 무기반납만을 요구하는 냉랭한 고자세였다. 협상장소에 갔을 때 상무대 넓은 뜰에서 발진되고 있는 헬리콥터를 보면서 살벌한 분위기에 공포를 느꼈다. 어떤 형태로든 계엄군을 설득한다는 것은 어렵다는 것을 직감했을 때 답답하고 절박한 마음이 들었다. 피해를 당했지만 차라리 시민들을 설득하여 무력충돌을 피하는 마지막 가능성을 찾아볼 수밖에 딴 도리가 없다고 판단하고 그때부터 무기 회수 작업에 전력했다." (구술 : 조철현(비오), 현사연 조사)


03:00

- 조비오 신부 등 수습위원 4명은 무기 회수를 위해 외곽지역 방문(산수동, 학운동 다리, 계림동, 백운동 철길, 서방, 무등경기장, 화정동 공단 입구 등).


08:00 광주시내 생필품 품절

- KBS 라디오 방송 복구.

- 무장한 학생들이 도청 출입을 통제. 통행증 소지자만 통행 허용.

- 광주시내 쌀, 채소가게 등에 생필품 품절.

- 무기 자진반납 시한 08:00에서 12:00로 연장. (월간조선, 1985. 7)

- 아침부터 시내 곳곳에 대자보, 사진, 플래카드 등이 나붙기 시작. 특히 수습위의 자세를 비난하는 대자보 붙음. (아! 광주여 민족의 십자가여!)

- 목포시 선무활동, 시내 조기청소(방위병), 교통통제소 운용(10개소 : 예비군 30, 경찰 20, 육군 5/23, 해군 1/15, 차량 7대), 09:00까지. (계엄사 상황일지)

- 광주 시가지에 시민학생수습대책위와 계엄군의 협상내용 인쇄한 유인물 살포. '계엄군의 과잉진압을 인정하며, 연행자 9백27명을 제외하고 모두 석방했으며, 보상계획 수립과 치료대책 완비, 사실보도에 대한 노력, 폭도나 불순분자라는 용어사용 중지, 비무장 민간인의 시외통행, 사태수습 후 보복금지 약속' 등의 내용. (신동아, 1985. 10)


09:00 충정작전을 위한 부대배치

- 24일-26일 시가지 작전투입을 위한 부대배치 (전교사 작전지시 80-8호. 5월 23일).

- 20사단 61연대: 광주-화순간 도로차단 임무. 09:00 주남마을로 이동개시, 10:50 11공수와 교대 완료.

- 20사단 62연대: 교도소 지역 확보 임무. 09:50 이동개시(1천4백55명), 12:30 3공수와 교대.

- 임무교대한 11공수 충정작전 준비 위해 송정리 비행장으로 철수.

- 수습위의 총기반환 활동으로 1만 7천여 정 중 6천여 정이 회수됨.

- 광주시 상황. 공단 입구 20여 명 경계, 백운동 일대 4명이 검문과 연락임무 수행, 차량행렬 현저히 감소, 영업행위 확대, 시내 정돈된 상태. (계엄사 상황일지)

- 목포. 헌병대 차량이 순찰하며 시민 위협, 시민 침묵으로 응대하자 도주. (1980년대 민주화운동)


09:10

- 증심사 입구 다리에 폭약 설치. (계엄사 상황일지)


09:15

- 조선대 뒷산에 공용화기 설치. (전교사 작전일지)


09:20

- 수습대책위원 및 학생수습대책위원회 합동 명의로 전단 살포. 질서유지, 총기, TNT 회수, 금남로 청소 등의 내용.

- 무기 3천여 정 회수하여 도청에 보관. (계엄사 상황일지)

- 계엄분소장은 이날 오전, 전날 오후 6시 개통된 광주 KBS방송을 통해 특별담화를 발표. '무기 소지자 중 광주시내 거주자는 국군통합병원에 반납토록 하고 기타 지역은 군부대와 경찰서에 반납하라'는 내용. 이 담화는 계속 '무기를 반납하면 일체 불문에 부치겠으며 만약 시한까지 반납하지 않아 중대결심을 하는 괴로움을 없게 하도록 해달라'는 것. 대부분의 시민들도 무기반납을 원했으며 시위대들은 전일빌딩에 '무기회수반'을 설치. (월간조선, 1985. 7)


09:25 학동 대치지역에서 총격

- 화순 쪽으로 통하는 학동의 대치지역에 시민을 설득하여 무장해제시키기 위해 갔다. 계엄군의 총격을 받아 대치점 중간지역에 사망한 시민 1명이 죽어 있었다. 대치선을 건너가다 총에 맞은 것이다. 계속되는 계엄군의 총격 때문에 시체도 끌어올 수 없었다." (월간조선, 1985. 7 조철현 증언)


09:30

- 광주경찰서, 총원 3백91명 중 64명 집결, 서장 인솔하 대기. (계엄사 상황일지)


10:00

- 목포. '제3차 민주헌정 수립을 위한 목포시민 궐기대회' 개최, 각 학교별, 동별 등 단체로 모여듦. 시민들은 대회장에서 '김대중 석방하라'는 혈서를 씀. 군 헬기가 '폭도들은 자중하고 시민들은 흥분하지 말라'는 내용의 삐라를 뿌리며 선무방송. 광주시민 영령을 위한 분향소 설치. '경찰, 공무원은 정상근무를 할 수 있도록 준비할 것. 경찰은 시내에 나오지 말 것, 교통경찰만 시내버스 운행을 도와줄 것'을 행정당국에 요청. (1980년대 민주화운동)


10:30 계엄군의 오인사격

- 호남고속도로(운암동 톨게이트 부근)상에서 31사단 96연대 3대대 2/29명이 사단에서 영광으로 복귀중 매복중인 기갑학교 병력 3/117이 폭도로 오인 사격, 사망 5, 중상 11(민간인 1명), 경상 11(민간인 1명). (계엄사 상황일지)

10:30

- 7, 1공수여단, 주남마을에서 20사단 61연대에 외곽봉쇄 임무 인계. (특전사 전투상보)


10:35

- 정호용 특전사령관 교도소(3여단 주둔지) 방문. (특전사 전투상보)

10:50

- 학생대표들이 시민대표에게 지금까지 회수한 총기 3천여 정을 인계하고 시민 대표는 이를 군에 전달하기로 일차 합의. 그러나 학생대표간에 이견이 있어 아직 인계하지 못하는 실정. 현재 학생, 시민이 갖고 있는 무기는 4천여 정이고 이미 회수된 무기는 도청에 보관. 무기반납을 거부하는 학생과 시민들은 절대로 무기를 반납하면 안된다, 무기가 없으면 우리가 어떻게 저항하느냐며 반발. (월간조선, 1985. 7)

- 목포역 광장에 학생 3백여 명이 서성거리며 시가행진 예상. (계엄사 상황일지)


11:00

- 도청 앞 광장에서 시민궐기대회를 갖기로 했는데 의견들이 서로 엇갈려 열지 못하고 있음. 23일까지 도청 앞 대형 스피커를 통해 상황을 알려주는 방송도 24일에는 중단. 학생,시민들은 거리에서 발견한 시체 45구를 도청 앞으로 옮겨놓았고 도청 국기 게양대에는 조기가 게양됨. 학생수습대책위원회에서는 치안유지반원들을 동원, 차를 타고 다니면서 총기 소지자들에게 총을 내놓으라고 요구하고 있지만 반발 극심. 시내치안은 학생들이 맡고 있는데 어젯밤 학생들이 야간통행증을 발급, 통행증 소지자에게만 통과 허용, 차량들도 3백여 대에 일련번호를 붙여 번호부착 차량만 운행토록 허가하고, 기타는 압류해서 도청 앞에 세워두었음. 도청, 시청 등 관공서에는 총을 든 학생이 경비를 서서 학생들이 발급한 '비'자 도장 찍힌 출입증 소지자만 통과시키고 있음. 학생들은 청년회의소, 라이온스 클럽, 여성단체 등 민간단체들과 예비군요원이 함께 치안유지에 나서자고 권고중. (월간조선, 1985. 7)


11:10

- 군사령부, 병참선 개통 지시 접수(광주 - 장성간). (말, 1988. 8)


11:20 시민수습대책위원회의 무기 회수 작업

- 시민대책위원인 신부, 변호사, 목사 등이 화정동에서 무기를 휴대하고 군과 대치중이던 시민군 38명과 지원동에서 13명 등을 도청으로 데리고 와 울면서 설득. 1시간 만에 무장해제시키는데 성공. 그러나 화정동 등 시외로 빠지는 6개 외곽도로에서는 아직도 일부가 무장, 대치하고 있다. 특히 화정동 공단 입구에서는 인근 서광제재소에서 옮겨온 대형 원목 1백여 개와 버스, 트럭, 지프차 등으로 바리케이드 치고 20여 무장대원이 지키고 있다. 4백여 시민들이 현장에 운집해 있으며 대원들은 신분 확인 후 시내로 들어오거나 밖으로 나가는 시민을 통과시키고 있음. (월간조선, 1985, 7)

- 1만여 시민 시체확인차 상무관에 운집. 학생들은 어깨띠를 두르고 안내중. (계엄사 상황일지)




- 광주시내 표정은 표면상 평온한 가운데 군데군데 시민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고, 일부 상가는 문을 열고 영업중. 거리는 23일부터 시작된 청소작업으로 많이 깨끗해졌다. 노동청 사무소 앞에는 지난 20일 밤에 불에 탄 차량 7대가 아직 뒤집힌 채 있음. 시체가 안치된 상무관에는 유족들이 찾아와 울부짖고 있고, 학생일부가 내일(25일) 시민장으로 치르자고 주장하고 있으나 타협이 안 되고 있는 형편. 도당국은 장례방침이 결정되면 시설 등을 지원하려고 했으나 아직 미결. (월간조선, 1985. 7)


시체 3구 암매장한 계엄군 무전교신 도청

* "점심 무렵 도청 숙직실로 갔다. 거기에 무전기가 있어 주파수를 맞춰보니 계엄군의 교신이 들렸다.

'교련복을 입은 고등학생 3명을 사살했다.'

'거기가 어디냐?'

'고등학교를 짓고 있는 산중턱이다.'

고등학생을 죽였다는 계엄군의 교신내용을 듣고 나도 무전기에 대고 물었다.

'사람을 왜 죽였소?'

'그들이 총을 갖고 있었다.'

'장소가 어디오?'

'산밑에 신축공사를 하고 있는 학교다.'

'시체는 어떻게 했소?'

'부근에 땅을 파고 묻었다.'

이말을 끝으로 계엄군의 무전이 끊겼다." (구술 : 김용균, 현사연 조사)


12:00

- 낮 12시가 지나면서 사태수습은 급진전, 총을 들고 도청을 경비하던 학생들이 총기를 회수반에 내주었고, 학생, 시민들이 착용하고 있는 헬멧, 방석복 등 군경복장 및 장비도 '폭도로 오인받는 원인이 되고 있다' 하여 반납.

- 중심가 일부 사무실 직원 출근. 음식점, 다방 등도 영업 시작.

- 광주역 직원들 출근, 역장은 전화선 연결하여 외부와 통화.

- 광주시장을 비롯 전직원 출근, 영세민대책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