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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15

[광주민중항쟁 총일지]해방 기간 - 항쟁지도부의 탄생과 활동

본문

제 3 절 항쟁지도부의 탄생과 활동

(25일 22:00 - 26일 밤)


새로 구성된 항쟁지도부는 그 명칭을 수습대책위원회에서 민주시민투쟁위원회로 바꾸고 무장투쟁을 준비해 가는 한편, 시민들의 민원사항 등을 처리하기 위해 행정체계를 정립해 갔다. 아침 일찍부터 각 부서별로 업무를 분담하여 시민생활 정상화에 노력했으며, 기동타격대로 재조직된 무장병력은 시내순찰과 계엄군의 동태 파악, 치안유지 등의 임무를 부여받았다.

26일 새벽 계엄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농성동 한전 앞까지 진입했다는 소식이 도청 상황실에 보고되자 전시민군에 비상령이 떨어졌다.

계엄군은 세 차례에 걸쳐 계속해서 최후통첩을 보내왔으며, 계엄군의 광주시내 진입은 기정사실화되어 갔다. 이날은 오전과 오후 두 차례에 걸쳐 시민궐기대회를 개최했다. 시민들은 심한 고립감과 불안 속에 밤을 맞았고 도청에 남은 사람들은 끝까지 광주를 지키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최후의 항전을 대비했다. 기동타격대 요원과 투쟁위원회, 그리고 마지막까지 남은 예비군, 학생 등으로 조를 편성하여 도청 방어작전에 돌입했다. 계엄군이 들어오는 길목에도 병력을 배치하였으며, 이미 지역방위군이 편성 운영되는 곳도 있었다.


22:00 민주시민투쟁위원회 조직

- 최후까지 투쟁하기로 결의한 학생들이 항쟁지도부의 조직명칭을 수습대책위원회에서 '민주시민투쟁위원회'로 바꾸기로 함.

위원장 : 김종배(조선대 무역학과 3년) 총괄적인 업무 관할

내무담당 부위원장 : 허규정(조선대 2년) 도청 내부문제, 대민 장례문제 관할

외무담당 부위원장 : 정상용(보성기업 영업부장) 일반수습위와 함께 계엄사 협상 관할

대변인 : 윤상원(신협 직원, 들불야학 대표) 기자회견 및 집행부의 대외 공식적인 발표

상황실장 : 박남선(골재차량 운전사) 시민군 군사업무 담당

기획실장 : 김영철(YWCA 신협이사, 광천동 빈민운동) 지도부의 제반업무 및 기획

기획위원 : 이양현(노동운동) 기획업무

기획위원 : 윤강옥(전남대 사학과 4년) 기획업무

홍보부장 : 박효선(교사,문화패 '광대' 회장) 궐기대회 및 제반홍보 업무 담당

민원부장 : 정해직(교사) 제반 대인업무, 장례담당

조사부장 : 김준봉(고려시멘트 직원) 치안질서 위배자 조사

보급부장 : 구성주(건재상) 식량조달 및 식사공급

- 조직구성 후 YWCA에서 대기중이던 학생병력 70명, 도청 3층 회의실로 옮겨 먼저 와서 대기하고 있던 30명과 합류.

- 도청내의 무장경비대를 대학생으로 바꿀 예정이라고 발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23:00 3개조의 취사부 편성

- 도청 취사부가 수습위의 해체와 함께 나가버리자 송백회 회원들은 여공을 중심으로 3개조의 취사부 편성.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26일 04:00 - 06:00 외곽지역 주둔 계엄군 광주 진입

- 봉쇄병력 3개소에서 시가지를 향하여 전진이동

통합병원-공단입구 사거리

광주-나주간 도로 봉쇄지점 2킬로 전진 (말, 1988. 8)

- 통합병원 부근에 있던 계엄군, 탱크 5대를 앞세우고 1킬로미터 전진. 백운동 쪽도 송암동에서 대동고교까지 전진. 운암동 고속도로에 있던 계엄군, 무등경기장까지 진격. KBS방송을 통해 '시민들은 동요하지 말라'고 하면서 서울-목포간 고속도로 개통을 위해서 진격했다고 이유 설명.

- 새벽 4시부터 군인들이 학생들과 대치하고 있던 시내 쪽으로 다시 진입, 압축해 들어옴으로써 강경하게 됨. 이 때문에 수습의 전망이 보이던 광주사태는 더욱 혼란에 빠져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돌변. (월간조선, 1985. 7)

* "새벽 5시경 계엄군이 통합병원 부근에서 탱크를 앞세우고 시내로 진입중이라는 제보가 들어왔다. 일반수습위원이 농성동으로 가 사태수습은 우리에게 맡기고 계엄군은 본래의 위치로 돌아가줄 것을 촉구했다. 계엄군의 시내진입 소문이 퍼진 결과 오전 8:30분 '제4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가 임시로 개최되었다." (구술 : 김태종, 현사연 조사)

- 광주시 농성동에서 계엄군이 진입한다는 첩보에 따라 양기남은 임성택, 구성회 및 상황실장과 함께 무장한 채 군용 지프차를 타고 농성동 한국전력 앞까지 순찰을 나가 동소 1백 미터 전방에서 계엄군 장갑차 1대를 발견하고 임성택은 진입을 저지할 목적으로 공중을 향하여 1발 위협사격을 가함. 구성회는 2발. (공소장)


04:30

- 학운동 최득철 씨(52) 집에 10대 괴한 침입, 최씨와 부인, 아들 등 3명을 총으로 살해. (월간조선, 1985. 7)


05:00 시민수습대책위원들의 죽음의 행진

- 계엄군이 농성동에서 탱크를 앞세우고 시내로 바짝 압축해 들어오고 있다는 제보를 접수한 수습위는 도지사실에서 긴급회의를 열고, 계엄군이 진입하면 광주는 피바다가 될것이 자명하다며 '17명이 총알받이로 나가 계엄군의 시내진입을 일시적이나 막자'고 결의 수습위원을 중심으로 농촌진흥원 앞까지 죽음의 행진을 벌였다. 진입현장을 목격한 이들은 탱크 앞에 드러누워 '우리 먼저 깔아뭉개고 지나가라'며 목숨을 걸고 계엄군의 시내진입을 저지했다. (현사연 조사 종합)

- 소요진원지인 광주시를 효과적으로 차단, 봉쇄함으로써 기타 전남 일대는 25일 현재 평온을 되찾았다고 계엄사 발표. (조선일보, 5.27)

- 안병학 전남도경국장 경질.


05:50

- 극렬폭도 2명 교도소 접근, 군 출동 생포(연대생 1명 광주사태 기록 소지, 공무원 1명 전남민주시민대회 승리하거라는 유인물 소지). (전교사 작전일지)


06:00

- 도청내 조사과 재편성. 조사반장 김준봉, 부반장 양승희, 조사원 위성삼으로 편성하여 거동이 수상한 자, 벽보을 찢는 자, 술 먹고 행패 부리는 자 등을 조사.


07:20 계엄군의 시내진입을 알리는 방송

- 시위대들은 차량을 동원하여 계엄군의 진입소식을 알리고 다니며 도청 앞에 모여 총궐기하자고 호소.

- 계엄군의 시내 압축 소식을 전하며 데모 주동자들은 차량을 이용 벽보를 시내 요소요소에 부착. 궐기대회를 09:00에 개최한다고 하면서 '다 같이 죽자', '총질 가하라'는 등의 가두방송을 하고 있음. 도청 앞 분수대 중앙에 마이크 휴대자 4명, 주변 12명. (계엄사 상황일지)

- 박영순은 김종배로부터 1) 시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수습대책위원회입니다. 계엄군과의 협상대로 모든 일이 잘 풀려가고 있으니 시민 여러분은 안심하시고 생업에 열중하십시오. 2) 거리질서를 위하여 내 집 앞 내 거리를 깨끗이 청소합시다. 3) 무기나 총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나 불순분자는 도청 상황실전화 2-8892로 신고해 주십시오 하는 내용의 방송문안을 받아 성명미상 폭도 3명과 경찰 데모진압 차량을 타고 09시경까지 지원동-산수동-서방시장-시외버스 공용터미널-금남로 등지를 돌아다니며 방송. (공소장)


07:55

- 산소용접기로 각 금융기관을 턴다는 소문이 있고, 수미상 폭도가 산소용접기를 들고 도청으로 들어감. (계엄사 상황일지)

- 화정동 지역에서 시내로 진입했던 계엄군들은 '외곽통로를 트기 위한 조치였지 진입은 아니다'며 먼저의 위치로 되돌아감.


08:00 시가지 동정

- 금남로 중심가의 거리에는 민간차량 운행은 없으며 소요가담 차량만이 5-10분 간격으로 도청 앞을 배회.

- 식료품가게 등은 50퍼센트정도 개점, 소채류 거래 활발. 요식업소 약 20-30 퍼센트 개점.

- 종합상가 및 가구점은 미개점.

- 전남방직, 일신방직 등 대기업체 출근율 80퍼센트, 정상가동, 중소공장은 출근율 40-50퍼센트. (계엄사 상황일지)


09:00 수습위의 계엄분소 방문

- 수습위는 계엄분소를 방문, 4시간 30분 동안 대화.

* "계엄분소 부사령관 김소장(김기석)의 제의를 받아들여 학생대표를 포함한 11인이 상무대로 갔다. 김소장은 '나는 군인이다. 정치문제는 모른다. 그러므로 대화를 하자'며 1) 무기회수 2)군에 반납 3)그렇게 하면 경찰로 하여금 치안을 회복하게 하고 싶다고 일방적인 각본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수습회의는 4시간 반이나 계속되었다. 군인들과 이 이상 이야기해도 별 수가 없다는 것을 뼈아프게 느꼈다. 밤 12시까지 수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최후의 통첩이다. 그러나 무조건 수습을 위해 5개 항목의 요구조건을 제시했다.

1) 시간이 필요하다. 노력해서 수습한 것을 군이 약속을 깨었으니 시간을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한마디로 거절당했다. 며칠을 참고 후퇴까지 한 군의 사기에 영향이 있다는 것이다. 군은 항상 이겨야 한다는 것이다. 타당한 말이다. 국군은 언제나 이겨야 한다. 그러나 적군에 이겨야 하는 것이지 나라의 주인인 국민, 80만 광주시민에게 이겨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시간이 없어서 다시 묻지 못 했다.

2) 약속을 위반하여 전차를 이동케 한 데 대한 이유를 분명히 하고 사과하라. 이미 방송을 통하여 시민에게 전했다는 것이다.

3) 군은 절대로 광주시내에 진입해서는 안 된다. 오늘 아침에도 느낀 일이나 총구를 국민에게 돌리는 군대를 어떻게 대한민국 군인으로서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더구나 돌연 무자비한 살상행위를 한 군을 광주시민은 절대로 용서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신부이며, 살상행위를 목격하지는 않았으나 김장군을 처음 만났을 때 혐오감을 느꼈다. 하물며 직접 살상을 목격한 시민, 가족을 잃은 시민, 분노와 원한에 찬 시민이 어떻게 군을 용서할 수 있겠는가. 군인 중에도 많이 죽어 간 전우의 이러한 모습을 본 젊은 군인들이 분개하고 있다고 한다. 그들은 애국 애족에 관하여 교육이 잘되어 있어서 참고 있다는 것이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 민주학생이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고 시위하고 있는 것을 총검으로 무차별 살상하고 울분을 참지 못한 전시민을 의거케 해놓고 지금 와서 오리발을 내밀다니....

4) 경찰에게 치안을 담당시켜라. 무기가 회수되어 군에 반납되면 그렇게 하고 싶다는 조건을 낸다.

5) 보도로 화해와 호소하는 방법을 지양하고 시민을 자극하지 말라. 메모를 하여 전령에게 주면서 건의하여 노력한다고 약속한다." (구술 : 김성용, 현사연 조사 )

- 월산동 일대, 과격분자로 보이는 1, 2명이 메가폰으로 산소용접기를 가지고 모이라고 외치고 다님.

- 농성동, 백운동 일대 군인들이 탱크를 밀고 들어오니 궐기대회 하자고 메가폰으로 외침. (계엄사 상황일지)

- NYT지 기자가 시위대들과 인터뷰하면서 '앞으로 5일만 버티면 당신들이 승리할 것이다'고 격려.


09:30

- 미항모 코랄시호 제주도 남방 2백 마일 해상 한국해역에서 작전중. (육본 상황일지)

- 도청 출입부 작성하여 출입통제.

- 유류수급증 60매 발급. 유류수급 통제.

- 기자출입증 20여 매 발부, 외신기자에게 배포.


10:00

- 목포시민 민주화투쟁위원회는 역대합실에 민주화를 위해 꽃다운 나이에 숨져간 광주 학생, 시민들의 영혼을 달래는 분향소를 설치, 시내 고교 및 대학생과 시민 1만여 명은 오전 11시부터 역전 광장에 모여 연좌시위를 하면서 줄지어 분향. (월간조선, 1985.7)


10:10

- 시내 일원에서 강간 및 강도사건 발생시 즉각 도청으로 신고토록 방송중. 변두리 일부지역은 마을 단위로 자체방범대를 운용, 강간 및 강도사건을 예방하고 있음. (계엄사 상황일지)


10:15

- 화순 방면 도로, 시민 이동으로 밀집상태. 학생이 70퍼센트. (전교사 작전일지)


11:00

- 시내 곳곳에는 계속 수습대책위 등의 이름으로 각종 안내문이 나붙기 시작. 안내문은 1. 시민군을 믿고 적극 협조해 주십시오. 2. 질서회복에 힘써달라. 3. 평상생활로 복귀하자. 상가, 슈퍼마켓 시장 개시, 운수기관 차량 운행 재개, 직장 정상근무 및 학교 등교, 생필품 확보 및 안전수송 등을 호소했으나, 26일 현재 잘 지켜지지 않고 있음. (월간조선 1985. 7.)


11:30 - 13:00 제4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

- 시민 3만여 명, 도청 앞 광장에서 13:00까지 궐기대회. 16-26일까지의 투쟁보고, 계엄군과 허수아비 최규하 과도정부에 대한 성명서 낭독, 계엄군에게 보내는 글, 향토예비군에게 알리는 글, 고등학생에게 알리는 글. 궐기대회를 마치고 시가행진에 돌입. (계엄사 상황일지)

- 계엄군의 진입 소식이 전해지자 궁금한 시민들이 이른 아침부터 도청 앞 광장으로 모여들어 '제4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가 임시로 개최되었다. 계엄군측의 협상을 위반한 사실, 그들의 시민 이간 책동을 성토하였으며 '전언론인에게 보내는 글', '대한민국 국군에게 보내는 글'이 채택되었다. 3만여 군중이 모인 이날 궐기대회는 엄태주의 사회로 1)국기에 대한 경례, 2) 5.18 광주사태로 인한 사망자에 대한 묵념, 3) 5.18 경과보고, 4) 5.18 수습결과 보고, 5) 국군장병에게 드리는 글, 6) 대통령 각하께 드리는 글, 7) 민주시 낭송순으로 진행됐고, 정의가, 투사의 노래 등을 부르며 진행.

- 궐기대회 마치고 시가행진 돌입.

- 전남대 스쿨버스, 고등학생 1천 명을 선두로 하여 수많은 시민 시체를 메고 가두행진.

- 이들 시위대가 금남로에서 광남로로 꺾어 들어갈 때까지도 후미는 아직 출발 조차 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수였다. 이들은 '우리는 싸움을 포기할 수 없다', '무기반납을 절대로 안 된다', '살인마 전두환을 찢어죽이자'는 구호를 외치며 금남로-광남로-광주공원-양림교-전남대병원-청산학원-계림파출소-구역-한일은행의 코스를 따라 다시 금남로에 집결.

- 폭도들은 광주시민 일동이란 명의로 시민회보 제 9호(5.26 발행) 글 배포중. (계엄사 상황일지)


11:50

- 병기고 위치는 도청 구내식당 지하실과 정문 옆의 대기실. 3일 전부터 군투입설이 있어 범법자들, 불량배들은 밤에 잠이 안 온다는 등 불안, 근심. 투입설의 효과가 큼. (계엄사 상황일지)


12:00 기동타격대 조직

- 상황실장인 박남선은 지금까지의 순찰대를 보강 재편성하였다. 낮 12시경 도청 정문 앞에서 '기동타격대'가 조직되었다. 5,6명을 1개조로 하여 각 조마다 조장 1명, 타격대원 4,5명, 군용 지프차 1대, 무전기 1대, 개인무기로는 카빈 소총 1정, 실탄 1클립씩을 배정 7개조로 편성되었다. 기동타격대장으로는 윤석루가 임명되어 상황실장-기동타격대장-부대장-조장-조원의 지휘체계를 확립. 기동타격대 발대식을 갖고 시내순찰, 계엄군 동태 파악, 계엄군 진입 저지, 거동수상자 체포·연행, 치안유지 등의 임무를 부여받았다.

구체적으로 각 조에 대한 순찰구역을 1, 2조는 지원동 방면, 3, 4조는 전남대와 서방 방면, 5, 6조는 돌고개와 백운동 방면 등으로 배정하였다. (현사연 조사 종합)

* "오후 2시경 나는 후배들을 모아 기동타격대에 들어갔다. 우리는 기동타격대 7조에 소속되었는데 그것이 마지막조였다. 기동타격 대원은 50명 정도였고, 6, 7명씩이 한 조가 되고 무전기 1대, 개인장비로 카빈 1정과 실탄이 지급되었다. 내가 속한 조는 병력수송과 순찰업무를 맡아 화정동, 서방 등 외곽지역에 실탄을 공급하거나 밥, 과일 등을 도청에 조달해 주기도 했다. 그 외 시간에는 외곽지역의 순찰업무를 수행했다." (구술 : 김태찬, 현사연 조사)


12:10

- 학생대표, 시민대표 유인물 배포. 오전 10시 동사무소에 집결, 청소 및 피해 복구작업 실시. 내일 15시 도청 앞 궐기대회 실시 홍보.

- YWCA에서 홍보용 유인물 작성중 경찰의 방해가 있었다는 제보를 받고 상황실장 박남선에게 이를 제지하라고 지시하여 박남선으로 하여금 무장폭도 2명을 대동하고 광주경찰서에 가서 경찰관들에게 유인물 작성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협박을 하게 함. (공소장)

- 전남의대 부근에 시민 호소 벽보 부착

(1) 대학생은 YWCA로 모여라

(2) 광주시민은 뭉쳐라

(3) 최후의 일각까지 싸워라

(4) 전두환 물러가라

(5) 과도내각은 책임져라

(6) 죽은 자 앞에 부끄러움을 나타내지 말자

- 도청 강경폭도, 무전기로 군 작전상황 탐지행동.(전교사 상황일지)

- 항쟁지도부는 정부에 요구하는 7개항의 '80만 광주시민의 결의' 채택

1) 이번 사태의 모든 책임은 과도정부에 있다. 과도정부는 모든 피해를 보상하고 즉각 물러나라.

2) 무력탄압만 계속하는 명분없는 계엄령은 즉각 해제하라.

3) 민족의 이름으로 울부짖는다. 살인마 XXX는 공개 처단하라.

4) 구속중인 민주인사를 즉각 석방하고, 민주인사들로 구국 과도정부를 수립하라.

5) 정부와 언론은 이번 광주의거를 허위조작, 왜곡보도 하지 말라.

6)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피해보상과 연행자 석방만이 아니다. 우리는 진정한 민 주정부 수립을 요구한다.

7) 이상의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최후의 일인까지 우리 80만 시 민 일동은 투쟁할 것을 온 민족 앞에 선언한다. (1980년대 민주화운동)


14:00 광주시장에게 8개항 요구

- 도청 내무국장실에서는 정상용, 김종배, 정해직은 광주시장, 도청 국장급 등이 모인 자리에서 광주시장에게 8개항 요구

1) 1일 백미 1가마씩 제공해 달라.

답: 백미 5가마니 지원

2) 부식 및 연료를 제공해 달라.

답: 60 L 지원

3) 관 40개를 제공해 달라.

4) 앰블런스 1대를 지원해 달라.

5) 생필품 보급을 원할케 해달라.

6) 치안문제는 경찰이 책임지라.

7) 시내버스를 운행토록 해달라.

답: 업자와 협의 후 결정

8) 사망자 장례는 도민장으로 하라.

답: 추후결정

9) 장례비를 지원하라.

답: 의사, 검사 입회 검관 후 처리

- "동일 12:00경 위 시민궐기대회를 마친 후 선두에서 약 2만여 명의 군중들을 이끌고 광주시내 금남로-광남로-양동 복개상가-광주공원-전남대병원 앞-전남여고 앞 등 시내 일원을 행진하여 시위하는 등 내란에 부화 수행하고(공소장)


15:00 제5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

- 목포역 광장에 고교생 5백여 명 모여 농성, '전두환 물러가라', '계엄해제'.

- 유족대표 8명과 부지사, 사회국장 등이 부지사실에서 장례절차를 논의. '냄새가 나므로 빨리 장례를 치러야 한다'라고 말하고, 이에 대해 부지사는 '힘있는 대로 돕겠다. 장지는 광주시 망월동(광주형무소 뒤 시립공원 묘지) 시민장으로 하겠다'고 말했다. 유족들도 시민장에 동의했다. 장례는 28일로 예정. (월간조선, 1985. 7)

- 도청 앞, 군중 5천여 명 시위. (전교사 작전일지)

* "오후 3시 제5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가 도청 앞 광장에서 개최되었다. 이 대회에서는 계엄군에 대항하여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시민 5천여 명이 화정동 대치지점까지 시위를 한 후 도청으로 돌아왔다. 이날 궐기대회 집행부는 성명서를 낭독하던 종전의 대회와는 양상을 달리하여 시민행동강령을 채택하여 발표했다. 5차 대회 때는 굉장히 많은 시민들이 연단에 올라가 계엄군의 만행에 대한 체험담과 목격담을 토로했다. 또 해방 후 현재까지의 정치, 경제적인 문제점 등을 성토하기도 했다. 한 아주머니는 연단에 올라가서 교도소 부근에서 공수들에 의해 가족이 몰살당한 얘기를 하면서 말을 제대로 잇지도 못하고 통곡을 했다. 어떤 여교사는 현상황에서 자신이 해야 될 일이 무엇이냐고 진지하게 물었다. 또 시민궐기대회에 처음으로 참가했다는 아주머니는 폭도와 깡패들이 난동을 부린다는 TV 보도를 듣고 무서워서 나오지 않았는데 직접 와보니 전혀 다르다는 말을 하면서 시외지역이나 변두리에 와서도 홍보를 해달라는 부탁의 말까지 하고 연단을 내려갔다. 3:00에 시작된 제5차 궐기대회가 거의 끝나갈 5시 30분 무렵, 30대 초반의 한 고교교사가 연단에 올라와, '나는 학생수습위의 한 사람으로 고생하는 후배들을 옆에서 보고 있을 수만은 없어 주책없이 끼어들었습니다. 내일이면 여러분을 만날 수 없을지 모르기 때문에 신분을 밝히겠습니다' 하고 말했다.

궐기대회가 거의 끝날 무렵, 상무대에 근무하는 방위병으로부터 내일 계엄군이 쳐들어온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군병력 증강 소식과 계엄군의 사기앙양을 위한 돼지고기 파티가 예정되어 있다는 말을 들었다. 또 상무대에 근무하는 장교 부인이 남편으로부터 며칠 동안 집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과 함께 위험하니까 절대 집 밖에 나오지 말라는 말을 통해서 짐작한 것이다. 우리는 왜 총을 들 수밖에 없는가 등의 성명서를 낭독하고, 이 대회가 끝나자 목숨을 걸고 끝까지 싸워서 광주를 지켜야 한다고 결의한 시민 5천여 명이 화정동 군 대치지역까지 시위를 한 후 도청으로 돌아왔다." (구술 : 김태종, 현사연 조사)


15:40 시민, 학생 끝까지 싸우기로 결의

- 도청 앞, 군중 2만여 명 궐기대회. '우리는 왜 총을 들게 되었나' 낭독. (전교사 작전일지)

- 동월 26일. 15:40경 광주시 서구 사동 소재 성하맨션에 타격대 1조원인 위 양기만, 위 이재춘, 위 오정호 등과 함께 성명불상자들에게 카빈 소총과 동실탄을 휴대한 채 군용 지프차를 타고 출동하여 협조하지 않으면 동인들로 하여금 신체, 재산에 어떠한 외포를 가할지 모르는 태도를 보임으로써 이에 외포된 동인들로부터 마스크 50개, 양말 50개, 식빵 50개를 교부받아 이를 탈취한 후 도청 폭도들에게 제공하고 (공소장)

- 항쟁지도부는 궐기대회 끝 무렵에 '오늘밤 계엄군이 공격해 올 가능성이 크다'고 공식발표.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5천 ∼ 6천 명의 군중, 금남로 - 유동 삼거리 - 양동 복개상가 - 공단 입구 - 화정동 대치지점까지 행진. 3만여 명으로 불어난 시민은 계엄군 대치지역의 1백 미터 전방에서 구호를 외치며 성토한 후 도청으로 되돌아오며 흩어짐. (1980년대 민주화운동)

- 도청을 사수하기로 한 2백여 명이 남아 상황실장의 지휘로 YMCA에서 대기. 거의 노동자, 종업원, 실업자 등 하층민들이었고 대기업보다는 영세업체 노동자가 다수.

- YMCA에서 대학생 70명 결집. 도청에 들어가 끝까지 싸우기로 결의. (아! 광주여 민족의 십자가여!)


16:00 광주상황 알리기 위해 탈출

- 오후 2시에 YMCA에서 민주인사들이 김성용 신부를 추기경에게 보내 사실을 알 리고 대통령 면담을 요구하기 위해 탈출시키기로 결정. 수습위원 중 제일 젊은 김요셉 군을 수행, 오후 4시 광주 탈출.

- 목포역 광장에 15:00부터 고교생 5백여 명 운집. 전두환 물러가라고 외치며 농성중. 20:00 횃불데모 예정. (계엄사 상황일지)

- 목포. 시민민주투쟁위원회 집행부 회의 소집. 광주사태의 진압 예상하고 시위 종결 토의. (1980년대 민주화운동)


16:06

- 한국화약 광주화약고 경계병 배치(31사 1/11). (말, 1988. 8)


16:30

- 목포역 앞 광장에서 농성하던 고교생, 경찰서 앞으로 이동하여 연좌농성.

- 장형태 전남도지사가 기자회견을 갖고 사의를 표명함.


17:00

- 도청 무기고에서 공소외 박승열에게 카빈 1정과 실탄을 주면서 순찰을 돌도록 지시하여 동인으로 하여금 김상규, 동 박명국, 동 박영수, 동 안성옥, 동 김두진 지휘하여 광주시 풍향동, 계림동, 충장로, 금남로 등을 순찰케 하고, 동일 22:30경 상황실에서 시내 황금동에 총격사건이 났다는 전화신고를 받고 동 윤석루에게 지시하여 순찰을 돌게 하고, 동월 26. 5시경 치안본부장의 도주사건으로 치안질서반이 해체되자 상 피고인 김준봉에게 조사과를 재편성토록 지시하여 동일 13:00경 동인이 조사반장이 되고 부반장에 양승희, 조사원에 위성삼으로 편성되어 동인들로 하여금 거동이 수상한 자 등을 불법으로 조사케 한 다음, 동월 26. 9시경 기히 활동중인 순찰대를 재편성하도록 위 윤석루를 기동타격대원 중 총기 미소지자 6명에게 카빈 6정과 동실탄 6클립을 지급하여 타격대원 전원을 무장케 한 다음 상황실장-기동타격대장-부대장-조장-조원의 체계로써 지휘계통을 확립한 후 각자에게 계엄군의 동태 파악, 계엄군의 진입 저지, 거동수상자 체포, 연행 등의 임무를 부여하여 광주시내 일원을 순찰케 하고 (공소장)


18:00

- 전교사, 9관구 수송자동차 중대 도착(전작). 휴가 귀대 병력 복귀. (전교사 작전일지)

- 도청 부지사실에서 시민대표 및 학생대표들인 이종기, 김재일, 장세균, 조비오, 조아라, 황금선, 구성주, 노승암, 김화성, 정상용, 김종배 등이 모인 자리에서 김창길이 '오늘 낮에 계엄분소에 다녀왔는데, 계엄 당국에서 금일 24:00가 무기반납 시한이라고 하더라. 빨리 무기를 반납하라'고 하자, 김종배는 '지금 총기를 반납하면 전부 죽으란 말이냐. 나는 여태까지 시민들의 의사에 따라 행동하여 온 것이다'고 반대의사를 표시함. 김종배는 밖으로 나와 2층 복도에서 상황실장 박남선을 만나 '지금 김창길이 우리들을 계엄군에 넘기려 한다'고 하자, 박남선이 회의장에 들어가 회의를 무산시킴. (공소장)


18:30 - 20:00

- 전교사, 사령관 외곽지대 순찰. (말, 1988. 8)


19:00

- 외국인 207명(미국인 134, 일본인 9, 영국인 3, 기타)이 광주시에서 철수함.


20:00

- 목포, 제4차 민주헌정 수립을 위한 목포시민 궐개대회 후 10만 인파 횃불시위.(1980년대 민주화운동)


20:10 기동타격대원 시내순찰

. 이재춘은 기동타격대 1조원과 함께 무장한 채 군용 지프차를 타고 금남로 - 학동- 방림동 등지를 돌아다니며 계엄군의 동태 파악.

. 박승렬은 2조원과 함께 풍향동 일대 순찰.

. 이성주, 김공휴는 4조원과 함께 풍향동 - 산수동 - 지산동 - 동명동 등지 순찰.

. 남승우는 5조원과 함께 금남로 - 광천동 - 양동 복개상가 부근 순찰.

. 박인수는 6조원과 함께 도청 - 금남로 - 양동국민학교 - 월산동 - 광주천변 등지를 돌아다니며 순찰

. 김태찬은 7조원과 함께 지원동 일대 순찰.(공소장)

- 무장시민군, 지프차에 탑승 시내시위, 광천동 공단 입구에서 2백30명의 시민 군이 계엄군과 대치.


21:00 전교사 문관 도청 잠입

- 지하실 TNT 2상자 뇌관 분리 제거 후 복귀.

- 특전대 하사관, 편의대 복장으로 시내투입 정찰실시. (말, 1988. 8)


항쟁지도부의 의견대립

* "밤늦게 정상용 씨가 YWCA로 왔다. 그는 몹시 괴로워하면서 도청 수습위의 대책회의에서 무기를 버리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고 전했다. 잠시 후 김종배 씨가 와서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총을 버리고 모두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으나 '광주시민의 핏값에 보답해야 한다'며 우리는 강력히 저항했다. 그러는 사이 도청에서 YWCA로 전화가 왔다. '강경파의 요구가 관철되어 무기를 들고 끝까지 계엄군에 맞서 싸우기로 했으니 광주를 사수하자고 했다."(구술 : 김한중, 현사연 조사)


23:00 시민군 병력배치

- 도청의 항쟁지도부는 상황실장 박남선의 지휘로 전투준비를 하면서 외곽지역 시민군 배치현황을 점검.

. 계림국민학교 30여 명(본부파견)

. 유동삼거리 10여 명(본부파견)

. 덕림산 20여 명(본부파견) - 이곳은 50-2백 명의 예비군 자체방어가 형성되어 훨씬 많은 숫자로 추정됨.

. 전일빌딩 40여 명(LMG 기관총 설치)

. 전남대병원 옥상 숫자 미상(LMG 기관총 설치)

. 서방시장 숫자 미상(LMG 기관총 설치)

. 학동, 지원동, 학운동 30여 명 - 문장우를 중심으로 한 예비군 방어지역.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 군 병력이 사복으로 시가지에 잠복. 이어 헬기로 병력을 계속 시내로 실어나르면서 길에 있는 학생들을 검거하기 시작. (월간조선, 1985. 7)

* "25일부터 나는 도청 조사과에서 반장격으로 일했다. 이날 밤에도 시민들이 신고하여 조사과로 붙잡혀온 거동이 수상한 자들을 조사하고 있었다. 간첩혐의로 붙잡혀 온 부부를 조사한 후 그들을 풀어주고 잠시 쉬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여기 00동인데 군인들이 총을 쏘며 시내로 가고 있읍니다. 빨리 피하십시오'라는 시민의 제보가 들어왔다." (구술 : 신만식, 현사연 조사)


23:50

- 상황실장의 상황병이 도청 행정전화로 중앙청 상황실을 불러냄.

"여기는 광주 도청이다. 오늘 밤 계엄군은 시내로 진입할 것인가?"

"모르긴 하지만 안 들어가는 것으로 알고 있다."

"만약에 계엄군이 들어오면 우리는 다이너마이트로 자폭한다"는 통화가 끝나 고 자정이 되자 시외통화가 끊김. 도청 안의 모든 전등을 꺼버림. (1980년대 민주화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