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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자료실

작성일2007-05-15

[광주민중항쟁 총일지]도청 함락 - 상무대로 연행

본문

제 2 절 상무대로 연행(27일 07:30 - 22:50)


07:30 - 09:30

- 기갑학교 인원 1/48, 전차 14대, APC 1/4톤 1대 무력시위, 금남로-도청-학동- 시민회관-광주구역-부대. (계엄사 상황일지)

- 공무원 근무 개시

- 시내전화 개통.


07:45

- 작전 성공요인

1. 기습 달성

2. 광주시내 주동 폭도들의 활동에 대한 정확한 정보 입수

3. 작전계획의 보안유지를 위해 계획으로만 발전시키고 실제 작전투입을 위한 명령을 작전개시 2시간 전에 하달

4. 계획시행 전 유무선을 사용하지 않고 지휘관 상례 구두지시로 업무추진

5. 명령시행 30분 전 광주시내 유선 단절 조치

6. 분산된 경찰을 소집해서 안내원으로 운용

7. 작전 수행 병사들의 은밀한 침투행동 및 철저한 지휘통제 확립

8. 지휘관의 단일화로 특수임무 부대와 보병부대와의 효율적인 협동작전 실시

9. 확고한 지휘체계 확립과 지휘관(자)의 진두지휘

10. 소속감 및 부대 단결심 발로

11. 효과적인 선무심리전 활동

12. 전장병이 국가보위의 마지막 중책 자각 임무 완수

13. 국민의 군대로서 국민의 생명과 재산 보호의 사명감 견지 (말, 1988. 8)

- 피해 전사 2명, 부상 11명, 민간인 생포 295명, 사살 13명.

- 도청 생포자 172명(남 164, 여 8명). (전교사 작전일지)

- 도청에는 5백여 명의 직원이 모두 나와 사후 수습대책을 협의하고 있으며, 시청에도 직원들 나와 구호, 의료, 교통, 병역문제 등 협의중. 도청 복도에 있던 핏자국을 청소중. 특히 학생들이 상황실로 사용했던 도청 서무과 출입문 옆에서는 10여 발의 총알 흔적이 보였고, 도청 본관벽 여러 군데 총알 흔적. 경찰버스, 일반버스, 백차, 지프차 등이 깨끗이 정리됐고, 대자보와 플래카드도 철거. 계엄군은 도청 정문 앞에 모래부대로 방어진지를 구축, 기관총을 걸쳐놓고 경계중. 그 옆에는 학생들이 사용했던 화염탄 2상자가 버려져 있었음. (월간조선, 1985. 7)


09:00 계엄군 가택수색으로 청년들 연행

* "임동에 있는 친구 집에서 자고 있었다. 9시가 조금 넘었을 때 워카를 신은 채 군인 3명이 방으로 들어왔다.

'움직이면 죽인다', '누가 탄창을 갖다두었는가?'

한 사람의 손에 탄창이 들려 있었다. 우리는 겁에 질려 '아니다', '모른다'고 부인했지만 그들은 하영렬, 박노정, 김진균, 하영렬 처남 등 하영렬 씨 부인만 빼놓고 모두 끌어내어 극렬 시위가담자라고 했다.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그 무렵 임동 쪽에서 강도사건과 전남방직 기숙사에 강간사건이 발생하여 우리의 주소가 단지 임동인 것 때문에 같이 묶여버렸다. 그때는 그런 줄도 몰랐는데 그들은 광주사태 관련자들이 폭도라는 것을 공개하기 위하여 하지도 않은 짓을 했다고 한 것이었다. 그 아가씨들은 아니라면서 돌아갔지만 결국 우리는 5.18 때 총기를 가진 극렬분자에다 강간절도범으로 몰린 것이다. 이는 광주사태는 폭도들이 일으킨 난동이라는 것을 조작하기 위하여 하지도 않은 짓을 한 것처럼 꾸민 것이다." (구술 : 윤재근, 현사연 조사)

* "중앙고속 부근 초원장여관에서 친구들과 자고 있었다. 아침에 창문을 열어보니 건너편 건물 옥상에 1, 2명의 계엄군이 총을 들고 서 있다. 잠시 후 3명의 계엄군이 와서 검문을 했다. 그들은 방을 뒤지더니 우리의 신분증을 보고 나갔다. 그 후 세번째 검문을 나온 계엄군이 밖으로 모두 나오라고 했다. 여관 현관 앞에는 10여 명의 청년들이 잡혀와 있었다. 여관 앞에 세워져 있던 우리 차를 수색하여 트렁크에서 총을 발견한 계엄군은 차를 향해 총을 쏘았다. 총을 겨눈 채 나에게 달려들면서 머리 위로 총을 쏘아댔다. 그들은 내 머리채를 잡고 중앙고속터미널 대합실로 끌고 갔다. 그곳에 있던 5, 6명의 계엄군이 개머리판으로 내 머리를 찍었다. 한참 동안 두들겨맞다가 여관에 있던 친구들과 함께 31사단으로 끌려갔다." (구술 : 김정현, 현사연 조사)

- 9시 이후까지 간간이 총소리가 들림. (월간조선, 1985. 7)


09:00 - 11:00

- 1차 광주 선무활동

.광주 질서회복을 위한 계엄군의 강제출입

.시민의 안도 당부

.폭도 자수 권고

- 2차 목포 선무활동

.목포를 아끼고 사랑하자

.유언비어에 속지 말자


10:00 주영복 국방장관 광주 방문

- 주영복 국방, 황연시 육군참모차장 등 군장성이 헬기편으로 도청에 도착, 상황실에서 작전상황을 브리핑 받음.

- 계엄당국이 KBS 방송을 통해 발표한 말에 따르면 이번 작전중 민간인 2명이 사망하고 군인 4명이 부상, 2백 명이 생포되었다고 했으나 오후 2시 현재 본사 기자가 목격한 사망자만도 도청본관 옆 9구, 도경 민원실 앞 5구, 도경 공보실 앞 1구 등 15구. 이들은 총상을 입고 있었으며 이중 도청회의실에서 옮겨온 1구는 분신한 듯 새까맣게 타 있었다. 계엄군은 이날 도청 지하실에서 TNT 11상자, 도화선 2무더기, LMG 7정, 카빈 5정, M1 19정, 최루탄 4백 개, 실탄 10상자, 가스탄 2백개 등 회수. 도청 정문 수의실에서 1천여 정의 무기를 발견, 회수.

- 주영복 국방장관 일행이 헬기에 오르는 현장인 도청 앞 광장에서 40여 미터쯤 떨어진 담장 위에서 고교생 차림의 청년 1명이 카빈총을 계엄군에 겨누다 붙잡혔다. (월간조선, 1985. 7)


시체 검시작업

- 시체들에 대한 검시가 시작됐는데, 도청에서 장남용 광주지점 부장검사, 심한준 중령(CAC 법무참모), 군의관 등이 모여 검시. 시체는 상무관에 69, 도청 본관 옆 13, 국군통합병원 8, 상무대 6, 31사단 2, 군부대 2구 등이 안치. 이 시체는 검시 후 유족들에게 모두 돌려줄 방침. 조기자 확인 1백 23구(26일까지). 27일 15구, 27일 사망자 중 2명 신원확인 - 박병규(20, 서울 은평구 수색동 30의 2, 동국대 전자계산학과 1년, 흉부관통상), 서호빈(20, 여수시 만흥동 97의 5). (월간조선, 1985. 7)


10:30

- 도경 수사과 지하실에 숨어 있던 고교생 3명 등 7명, 군에 의해 체포. (월간조선, 1985. 7)


11:00

- 목포. 제5차 민주헌정 수립을 위한 목포시민 궐기대회, '우리 겨레와 세계 자유민에게 보내는 목포시민의 결의문(2)' 채택하고 항쟁 계속 다짐. (1980년대 민주화운동)

- 같은 달 27. 09:00경 목포역 앞 세기다방에서 상 피고인 강수복, 동 명재용, 동 김상옥, 공소외 변인석, 동 정석봉, 동 박광용, 동 박용택, 동 정종희, 동 김인채 등과 함께 모여 동일 궐기대회 및 가두시위에 관하여 동 변인석이 궐기사를, 동 김인채가 광주사태의 진상보고를, 동 박승태가 결의문 낭독을, 동 강수복이 만세삼창을 분담하기로 한 후 2시경 궐기대회에 들어가 시위군중 2만여 명에게 선언문을 낭독하고 위와 같은 계획된 순서에 따라 궐기대회를 가진 후 동일 15:00경까지 가두시위를 함과 동시에 동일 19:00경부터 목포시 전역을 위 군중들과 함께 횃불시위를 하고 이어 동일 21:00경 위와 같이 횃불시위하던 성명미상의 폭도 50여 명이 각목을 소지하고 목포시청을 습격하여 동소의 출입문과 유리창을 전부 파괴하는 등 내란의 중요임무에 종사함과 동시에 국가의 안전보장과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일체의 정치목적 집회 및 시위가 금지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기와 같이 집회, 시위함으로써 계엄사령관의 포고문 제10호 제1항 가호를 위반하고 (공소장)


11:10

- 청년 3명 카빈 1백 정 지키고 있다가 끌려나옴. (월간조선, 1985. 7)


11:30

- YWCA에서 엽총, 조명탄, 방독면을 지니고 있던 청년 1명 검거. (월간조선, 1985. 7)

토머스 레스턴 미국무성 대변인 발표

- 미정부는 27일 한국의 광주사태의 현소강상태를 활용, 근본적 문제를 직시하고 사회 각계의 화해정신에 입각하여 민주발전 재개와 북한에 대한 현한국사태를 군사적으로 악용해서는 안 된다고 거듭 경고하면서 미국의 대한방위공약 준수 결의를 재확인했다.

미 국방성 발표

미국 항공모함 '코럴시'호가 한국의 안전보장에 대한 미국의 결의를 과시하기 위해 6척의 군함을 거느리고 27일 한국해역에 당도, 활동하고 있다고 미국방성이 27일 발표했다.


12:00

- 남자 12명, 여자 6명 등 사직공원에서 붙잡혀. 신원이 불확실한 남자 10명 연행. (월간조선, 1985. 7)


14:00

- 전일빌딩의 시민군, 오후 2시에 옥상에서의 저항을 마지막으로 전원 전사. (1980년대 민주화운동)

- 도청에 5백여 명의 직원이 모두 나와 사후 수습대책 협의.

- 시청 직원 구호. 의료, 교통, 병역 문제 협의중. (월간조선, 1985. 7)


15:00

- 신안동 사거리 앞 국민콜택시회사에 3/32명 출동 수색. 카빈 4정, M1 실탄 30발, 카빈 탄창 2, 카빈 실탄 110발, 방독면 1, 항공잠바 1, 중위계급장 1 회수. 폭도 11명 체포. (계엄사 상황일지)

- 시외전화 개통됨.


16:00

- 김원기 부총리를 단장으로 한 '광주사태 피해 조사단' 내광.

- 피해복구비 15억 원, 보조금으로 취로사업비 2억 7천4백만 원, 장례비 시체 1구당 20만 원 지급키로 함.

- 도의사회는 중경상자가 1,129명(중태 291, 중상 280 포함)으로 발표.


17:30

- 목포역 광장에서 목포시민 1천2백50명 운집한 가운데 성토대회.

- 시가행진 중 군헬기가 시위대 정찰. 전단살포 후 자진해산 및 자수 권유. (1980년대 민주화운동)


18:00 계엄사 2차 발표

- 무기소지자 사망 17명, 연행 295명, 계엄군 사망 2명, 중경상 12명.

- 시내교통 정상화. 오전부터 외곽지대 차량통제가 실시됨.


21:25

- 목포시민 목포역 광장에서 횃불 70여 개를 들고 학생 1천 명, 주민 1천여 명이 1호 광장으로 이동중.


22:50

- 목포시민 3천5백여 명이 횃불 들고 1호 광장까지 5백 미터, 2호 광장까지 8백 미터 거리 시위. 대성동 파출소 방향으로 이동중(28일 새벽 4시경 무장 보안대원, 사복형사들이 시위본부인 목포역 습격, 시위대 체포, 연행, 이로써 목포시위는 막을 내림). (현사연 조사 종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