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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자료실

작성일2007-05-15

[군 투입 일지]5월 27일

본문

5월 27일

27일 00:00 계엄군의 진입로

- 양평 20사단 : 지원동-광주천-적십자병원-도청 남쪽

양평 20사단 : 지원동-학동-전남대병원-도청 후문

양평 20사단 : 백운동-한일은행-도청 정문

- 상무대 병력 : 화정동-양동-유동 삼거리-금남로-도청 정문

- 31사단 : 계림국교-시청-도청 북쪽

- 7공수 : 광주공원

- 3공수 : 도청

- 11공수 : 관광호텔과 전일빌딩 (1980년대 민주화운동)


충정작전

가. 작전개념

은밀 침투 기습 및 동시 목표 제압 작전, 외곽도로 및 배치선 차단 작전(봉쇄선 형성), 특정목표 은밀 침투 타격작전(도청, 공원, 관광호텔, 전일빌딩), 내곽에 대한 동시공격 및 특공부대와 연결 공격 후 주요지점 배치 및 작전 소탕, 계속적인 무기회수 및 선무활동.

26일 23:00 - 27일 08:00 3여단 도청 특공작전 실시 보병에게 인계 후 K-57로 철수.

26일 23:15 - 27일 07:00 11여단 전일빌딩, 관광호텔, YWCA 특공작전 실시, 보병에게 인계 후 K-57로 철수.

27일 01:00 - 05:40 7여단 광주공원 특공작전 실시, 보병에게 인계 후 K-57로 철수. (말, 1988. 8)


작전 지도지침(20사단 작전일지)

1. 이 작전 명칭은 '충정'이라 칭한다.

2. 지하실 작전시 가스탄 사용으로 무력화시킨 후 공격.

3. 공격간 폭도들에 대한 사격은 가급적 하복부에 지향한다.

4. 전차 및 APC는 피배속부대 요청에 의해 지원되며 자동적으로 배속 전환된다.

5. 중대단위로 안내 경찰 2명씩 운용목표에 이르는 통로를 안내토록 할 것.

6. 목표확보 후 책임지역내 행정기능 복구에 최대한 노력(파출소, 동회 기능 복구, 경찰, 예비군, 반장 소집)

7. 외국인 거주지에는 '외국인 우선 보도' 방송 실시 및 경계방책 강구 및 저명인사 가옥 주변 부대배치 보호할 것.

8. 예행연습 실시.

9. 작전은 불순분자 생포 위주로 실시하되 불가시는 무력화한다.

10. 목표확보 후 소대를 관측이 용이하고 자체 방호가 용이한 건물 또는 요지요부에 배치할 것.

11. 보안유지를 철저히 하고 무선사용을 금지하여 유선을 음어화할 것이며 제한된 관계관만 계획 발전.

12. 작전부대간 상호 긴밀한 사전협조를 할 것이며, 특히 31사단과는 소대장, 분대장급에 취할 행동에 의한 세밀한 협조를 할 것(정웅 31사단장의 이탈에 따른 조치인 듯-편집자주).

13. 양민에게 피해가 없도록 최대한 노력하라.

14. 주도로 위주 작전을 지향하고 주도에서 지선도로 또는 지선도로에서 주도 로로 공격을 병행 실시한다.

15. 작전간 우발사태 발생에 대한 대비책을 발전시킬 것.

(1) 강력한 폭도와 접촉시 공격을 위해 재집결해야 할 집결지 선정.

(2) 건물 내부 TNT 처리 및 사전 파악된 기관총 진지 제거방책 강구.

(3) 폭도들의 특공대 편성 기습 방지책.

(4) 민간인을 인질로 폭도가 완강한 저항시 대책.

16. 작전시행을 위한 추가지원 사항을 판단 보고.

17. 약정된 우군부대 표지를 하여 상호 오인사격을 하지 않도록 할 것.

18. 이 작전은 명에 의거 실시한다. (말, 1988. 8)

- 26일 광주비행장에 집결되어 정비중인 제11특전여단은 1개 중대 규모의 특공조를 편성하여 전일빌딩에 있는 방송국과 관광호텔을 점령하라는 작전명령을 전교사에서 수령하고 제61특전대대 4중대를 특공조로 편성, 동일 18:00에 특공대를 UN-1H 5대로 주남마을로 이동시켜 제20사단 61연대와 합류시켜 작전을 협조한 후 23:15분에 침투를 개시하였다. 익일(27일) 01:50분에 임무지원 지점으로 선정한 조선대학교 뒷산에 도착하여 최종적인 작전준비를 완료하고 동일 03:30에 은밀히 목표지역으로 이동 04:00에 목표 전일빌딩과 관광호텔을 완전히 점령했다. 당시 진압작전 상황은 3여단이 도청, 7여단이 광주공원에서 폭도들과 치열한 교전이 계속되고 있어 그곳을 지원하기 위해 충장로를 우회하여 도청을 측방에서 공격하라는 작전명령을 하달하여 작전팀은 1개 지대로 전일빌딩과 관광호텔을 경계하고 2개 지대를 중대장이 인솔하여 도청으로 이동중 05:15분에 YWCA 건물 앞에서 30여 명의 폭도들로부터 사격을 받아 도청으로의 진출이 저지되고 현장에서 약 1시간 동안 폭도들과의 치열한 교전이 계속되어 과감한 공격으로 06:20에 YWCA 건물 내부를 완전 소탕하고 사살 3명, 포로 29명의 전과를 올리고 06:40 작전지역을 보병 제20사단 61연대에 인계 후 작전을 종료하였다. (특전사 전투상보)


02:00

- 특전단의 돌격부대가 도청 앞에 도착, 포진. 군의 진입을 알게 된 도청 수비대는 도청 전방 1백 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YMCA에서 첫 사격을 시작.(월간조선, 1985. 7.)


02:50

- 월산동에서 9지역대 유도병이 음주중이던 폭도 10-15명 발견, 전봇대에 은폐 후 수하, 10분간 교전으로 폭도들 도주, 계속 침투.

피해: 1명 사망. 5명 부상

전과: 1명 사살. 1명 생포(특전사 전투상보)


03:00

- 예비군 중대장이 30여 명의 시민군을 지휘했던 계림국교 앞 육교에서 치열한 교전, 포위될 것 같아 후퇴 명령. 20여 명이 계림국교 정문 쪽 담벽을 뛰어넘었으나 7명 남음. 총격전, 중대장 담벽 아래쪽 주택으로 피신, 허벅지 총상. (1980년 민주화운동)

* "6, 7명씩 한 조로 나뉘어진 기동타격대원은 YMCA에서 모여 각 조별로 자기소개를 하고 우리가 하는 일이 옳은 일임을 서로들 공감했다. 새벽 3시 계엄군이 외곽에서 쳐들어온다는 비상연락을 받고 개인당 총 1개와 실탄 2클립씩을 지급받고 20여 명의 대원이 계림국민학교 앞으로 갔다. 1개 분대는 계림동 육교 위에, 또 1개 분대는 육교 오른편, 마지막 분대는 왼편 육교 밑에 배치되었다. 우리 분대장은 예비역 장교라고 했다. 그는 '내가 명령하기 전에는 절대 총을 쏘지 말라'고 지시했다. 잠시 후 도청 쪽에서 대포소리, 카빈소리가 뒤섞여 들려왔다. 요란한 총소리가 들린 지 30여 분이 지나도 계림동 주변에는 계엄군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았다. 잠시 후 서방 쪽에서 계엄군이 침입할 것이라는 우리의 예상을 깨고 등뒤에서 계엄군이 나타났다. '계엄군이다!' 하는 외침과 함께 '드르륵' 소리가 들렸다. 재빨리 뒤돌아보니 계엄군 3명이 쪼그려총, 자세로 이동하고 있었다 . 막상 계엄군이 총을 쏘고 나타나자 온몸에 힘이 빠지고 두려운 생각이 든 나는 조재만과 함께 기어서 계림국민학교로 도망갔다. 우리가 '항복, 항복한다'고 아무리 소리쳐도 총소리는 그치지 않고 계속되었다. 그때 우리 대원 2명이 총에 맞 았다. 그들을 돌봐줄 여유가 없었던 우리는 하수구로 들어갔다. 그렇게 1시간쯤 지난 뒤 탱크와 장갑차가 지나다니는 소리가 들리더니 '하수구에 폭도들이 있을까?', '수류탄 하나 던져보자'는 말을 듣고 기겁을 한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항복'이라고 소리치면서 손을 들고 나갔다. 하수구에서 나오는 순간부터 죽도록 얻어터지고 포승줄에 묶여 광주고등학교로 끌려갔다. 우리보다 늦게 잡혀온 어떤 아저씨는 계엄군에게 반항하다 개머리판으로 맞고 실신했다. 계엄군이 그 아저씨 얼굴에 물을 끼얹었지만 영영 깨어나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광주고등학교에서 오후까지 개머리판과 군화발에 짓밟힐 대로 짓밟히다 오후 5시경 상무대로 연행되었다." (구술 : 이충용, 현사연 조사)

* "26일 밤 YWCA에 있는데 상황실장 박남선 씨가 그곳으로 왔다. 총을 잘 쏘고 죽음이 두렵지 않는 사람은 기동타격대에 가입하라고 했다. 그때 나는 기동타격대에 가입하여 계림국민학교 경계임무를 맡았다. 계엄군이 진입해 오면 계림국민학교 앞에서 맞서 싸우기 위해 도청에서 총과 실탄을 지급받고 계림국민학교로 갔다. 새벽 3시부터 운동장에서 도로 쪽으로 총을 겨누고 계엄군에 대응할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계엄군이 쳐들어 왔다'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M16 자동소총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고 총알이 핑핑 날아왔다. 총에 맞아 쓰러진 나를 계엄군이 때리고 짓밟는 사이 나는 정신을 잃었다. 광주고등학교에서 내가 깨어났을 때 이미 날이 밝은 후였다. 내 옆에는 계엄군 한 명이 죽어 있었고 우리 대원들이 붙잡혀와 있었다." (구술 : 신광성, 현사연 조사)

- 7, 3, 11공수부대 병력 투입(03:30분 작전 4호 발령). (전교사 작전일지)


03:30

- 계엄군 광주 전격 기습(지원동, 화정동 등 3개소에서 총격전).

- 계엄군(이 병력은 도청을 덮친 공수부대가 아니고 시일원을 장악하기 위해 도청탈환 뒤에 들어온 야전사단인 듯 - 편집자주) 새벽 3시 30분 집결지를 출발, 화순에서 도청 쪽으로, 송정리 방향에서, 시청과 서부경찰서, 담양에서 광주 방면 등 4개 코스를 통해 각각 진입.(월간조선, 1985. 7)


03:20 - 07:30

- 68연대 2대대 6, 8중대 투입

전과 : 사살 1, 생포 15

피해 : 전사 1 (20사단 전투상보)


04:00

- 31사 병력 시가지 압축.(전교사 작전일지)


04:10 잠자다 총에 맞아

* "천지를 뒤흔드는 듯한 총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아내는 잠자다 깬 후 벽에 기댄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괜찮을 테니까 이리로 와서 누우라고 손을 잡아끌어도 팔짱을 끼고 앉아서 무서워할 뿐이었다. 그때 와장창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유리창이 깨져 흩어진 방바닥은 금세 하얗게 변했고 아내의 가슴에서 피가 쏟아졌다. 아내는 자신이 총에 맞은 사실도 모르는지 그대로 앉아 있었다. 아내를 리어커에 싣고 전남대병원으로 옮겼다. 뒤늦게야 알게 되었는데 대인시장 부근에서 금남로를 향해 쏜 총알이 우리 집으로 날아든 것이다." (구술 : 김재수, 유복남, 현사연 조사)

- 3공수여단 11대대 1지역대

전과 : 사살 13, 체포 2백 명, 소총 3백 정, 무전기 15정, TNT 다량. (20사단 작전일지)


04:25

- 61연대 전남의대 일대에서 교전. (계엄사 상황일지)


04:30

- 20사 병력 시가지 압축. (전교사 작전일지)


04:30 - 06:30 도청 함락

- 새벽 4시 도청 앞 완전 포위. 금남로를 중심으로 시가전이 벌어짐. 계엄군의 서치라이트가 도청을 비추며 계엄군은 항복을 권유. '폭도들에게 경고한다. 너희들은 현재 완전히 포위되었다.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라!' 순간 시민군측에서 발사한 총탄이 계엄군의 서치라이트 박살냄. 계엄군이 일제사격 개시.

- 61연대 1대대 1중대 투입

전과 : 사살 1, 생포 2, 카빈 1,800, M1 400.

피해 : 없음. (20사단 상보)


04:40 YWCA 격전

- YWCA. 새벽 무렵부터 공격 시작. 안에는 문화선전조와 고교생, 근로자들이 방어중. 3층에서 '우리는 무기를 안 가졌다. 살려달라'고 소리침. 계엄군은 '모두 옷을 벗고 나오라' 하면서도 M16 발사. 여기에서 박용준, 공수대원과 교전하다 사살당함. 2층 양서조합 사무실에는 핏물이 고였고 서가의 책 속에는 탄환이 무수히 박힘. (1980년대 민주화운동)

- 11공수여단 61대대 4중대 투입

전과 : 사살 2, 생포 29, 카빈 31, 탄약 1,500발

피해 : 부상 2 (20사단 상보)



04:55

- 3공수 도청 탈환, 완전 점령. (전교사 작전일지)


05:00 계엄분소장의 첫 담화 발표

- '폭도들은 투항하라', '도청과 광주공원도 군이 장악했다', '너희들은 포위됐다', '총을 버리고 투항하면 생명은 보장한다', 광주 KBS 방송은 군이 시내에 진입했음을 알리는 이 같은 방송을 되풀이했다. 간간이 행진곡도 들려줬다. '돌아 온 병사', '콰이강의 다리'. (월간조선, 1985. 7)



05:04

- 11공수 관광호텔, 전일빌딩 점령(생포 3).

- 광주보병학교 외곽배치 완료.

- 공설운동장, 광주천변, 백운동 철도 건널목 포교 병력 완전 장악. (전교사 작전일지)


05:06

- 7공수 광주공원 탈환, 완전 점령. (전교사 작전일지)

- 광주시 주요 공공기관을 계엄군이 점거.


05:10

- 62연대 1대대 도청 병력 증원.

- 06:00경에 61연대에 인계하고 철수.


05:20

- 61연대 2대대 광주경찰서 진입.


05:22

- 도청 잠적 폭도 소탕 완료.


05:23

- 광주시 점령 완료.


05:40

- 시내 곳곳에서 교전이 재개되어 총성이 계속. (월간조선, 1985. 7)


05:53

- 62연대 2대대, 폭도 15명과 대치 교전. (전교사 작전일지)


07:30 - 09:30

- 기갑학교 인원 1/48, 전차 14대, APC 1/4톤 1대 무력시위, 금남로-도청-학동- 시민회관-광주구역-부대. (계엄사 상황일지)

- 공무원 근무 개시

- 시내전화 개통.


09:00 - 11:00

- 1차 광주 선무활동

.광주 질서회복을 위한 계엄군의 강제출입

.시민의 안도 당부

.폭도 자수 권고

- 2차 목포 선무활동

.목포를 아끼고 사랑하자

.유언비어에 속지 말자


10:00 주영복 국방장관 광주 방문

- 주영복 국방, 황연시 육군참모차장 등 군장성이 헬기편으로 도청에 도착, 상황실에서 작전상황을 브리핑 받음.


15:00

- 신안동 사거리 앞 국민콜택시회사에 3/32명 출동 수색. 카빈 4정, M1 실탄 30발, 카빈 탄창 2, 카빈 실탄 110발, 방독면 1, 항공잠바 1, 중위계급장 1 회수. 폭도 11명 체포. (계엄사 상황일지)


18:00 계엄사 2차 발표

- 무기소지자 사망 17명, 연행 295명, 계엄군 사망 2명, 중경상 12명.

- 시내교통 정상화. 오전부터 외곽지대 차량통제가 실시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