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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자료실

작성일2007-05-30

[청문회 속기록] 제 144회 국회(페회중) 5·18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 회의록 제 7 호(9)

본문

5·18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 회의록 제 7 호(9)

ㅇ 鄭昌和위원

鄭昌和위원입니다.모든 국민들의 관심이 쏠려있는 오늘의 이 광주 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의 청문회가 지금 이시간까지 아주 잘 진행이 되어 왔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이제 마지막 순간에 와서 또 국회가 국민들에게 실망을 주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느냐 하는 생각에서 본위원 퍽 가슴아프게 생각을 합니다.그리고 아침일찍부터 이자리에 나오셔서 증언을 해주시는 증인께서도 퍽 피곤하실 것같고 또 많은 위원들이 이제 짧게 그리고 중복되지 않게 질문을 하는 것이 좋겠다는 또 의사진행발언도 있었고 해서 본위원은 아침부터 지금까지 증인께서 질의 답변과정에서 말씀하신 내용중에서 조금 의심이 가거나 다시 확인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되는 부분에 대하여 몇가지 물어보고자 합니다.

첫째 증인께서는 광주사태에 대한 내란음모죄로 유죄판결확정을 받은 것은 이미 8년전의 일입니다. 그렇다면 그동안 증인께서는 이 내란음모사건의 판결은 조작에 의해서 그렇게 되어진 것이다 라고 오늘 이 청문회에서 까지 말씀을 하셨는데 그렇다면 왜 그동안 조작에 의한 재판이었다고 하는 확증과 자신을 갖고 계시다면 왜 대법원에 재심청구를 하시지 않으셨는지 물어봅니다.

ㅇ 증인 金大中

과거 재판부는 행정부의 지배하에 있어 가지고 전연 공정한 재판을 할 수 없는 사법부열기 때문에 그런 일을 할 필요가 없고 더구나 그 대법원장 되어 간 분들 보면 제 사건이나 金載圭씨 사건때 공을 세운 사람들이 대법원장으로 되어 가는 판에 거기다가 무슨 신청했자 아무 의미가 없기때문에 안했지요.그러나 이제는 대법원도 바뀌고 그랬기 때문에 현재 저하고 같은 상피고였던 韓勝憲변호사가 지금 맡아 가지고 저희들 내란음모관계 전원이 지금 재심청구할 서류를 만들고 있는 중입니다.

ㅇ 鄭昌和위원

만약에 그동안에 사법부가 행정의 시녀였기 때문에 정당한 재판을 내릴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재심청구를 하지 않았으나 이제 우리 법원이 독자적인 독립성을 지닐 것이기 때문에 재심청구의 준비를 하고 계신다면 오늘 이 청문회에 증인께서는 반은 스스로 원하셔서 이 문제를 해명코자 하시고 또 광주항쟁의 진실을 규명하고자 하셔서 나오셨다고 하시는데 일본의 경우에도 재판에 영향을 주는 사건이 가능성이 있을 때에는 국회의 청문회에서는 의제로 삼지 않는 것이 그 관례로 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읍니다. 그렇다면은 증인께서는 혹시 재심을 청구 할 문제가 있는 이 건을 이 청문회에 나오셔서 스스로 답변하시겠다고 생각하신 것은 재판에 영향을 주고자 하시는 그러한 속셈은 없으셨을까요?

ㅇ 증인 金大中

그런 의도는 전혀 없읍니다.

ㅇ 鄭昌和위원

두번째 확인합니다.증인께서는 1980년2월29일에 복권이 되신 이후 또 다시 정치규제에 묶였다가 지난 86년에 다시 복권되신 적이 있으시지요? 그렇다면 그래서 사면복권이 되어 대통령후보로 출마하셨는데 이때에 대통령후보로 출마하시기 위해서 사면복권을 본인은 물론 주위에 계시는 여러분들이 증인의 사면복권을 건의하고 또 주장을 하셨는데 사면복권이란 원칙적으로 유죄를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 아닌지요?

ㅇ 증인 金大中

그것은 법이론적으로는 그렇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현실적으로 보아서 무슨 혁명을 해 가지고 정권을 바꾸지 않는 이상은 법적 조치로는 그 길밖에 없기 때문에 그것은 이미 말하자면 재판이 그렇게 조작하고 부당한 것은 다 아는 일이니깐 법적으로는 그 길밖에 없기 때문에 그 길을 택할 수밖에 없어서 그렇게 주장한 것이지요.

ㅇ 鄭昌和위원

되었읍니다. 아까 증인께서는 鄭東年이라는 사람에게는 85년4월경에 처음으로 만났고 돈을 주었거나 하는 사실은 전혀 없었다고 진술하셨읍니다. 당시의 수사기록 저희 광주특위에 제출된 수사기록을 보면 鄭東年은 군사법경찰 수사단계에서 열세번 군검찰 수사단계에서 두번 그리고 군법무사앞에서 세번 도합 18회에 걸쳐 金相賢씨를 통하여 증인으로 부터 돈을 수령하였다고 하는 사실을 자백한 바가 있읍니다.이렇게 열여덟번씩이나 그것이 허위로 자백이 될 수 있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ㅇ 증인 金大中

그것은 그런 공포 분위기하에서 본인이 일단 뭐든지 자백하겠다고 했으니까 수사관측이 요구하는대로 몇번이든지 했겠지요. 또 鄭東年씨가 곧 나오니까 물어 보시면 알 것입니다.

ㅇ 鄭昌和위원

그래서 먼저 확인을 해 보기위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시 金총재의 변호를 증인의 변호를 맡았던 우리 동료의원입니다마는 許京萬의원이 鄭東年씨가 법무사앞에서 증인으로 부터 500만원을 받은 사실을 시인한 이 부분에 대해서 진정성립을 인정했는데 그러면 당시의 변호사인 許京萬의원도 고문에 의해서 이것을 진정으로 성립했다고 생각될 수 있겠읍니까?

ㅇ 증인 金大中

그것은 許京萬변호사가 어떻게 해서 인정했는지 잘 모르겠는데요 저는 또 인정한 사실도 모르겠고요.

ㅇ 鄭昌和위원

다음 확인하겠읍니다.증인께서서는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모든 것은 고문과 또 그 상대방때문에 허위로라도 자백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용공부문만은 죽을 각오를 하고라도 인정을 하지 않았다라고 오전에 진술하셨읍니다. 그렇다면 그때 그 재판 과정에서 제시된 여러가지 죄목 중에서 용공부문보다도 이 부문을 훨씬 경한 그러한 것이었고 이 부문을 증인께서 용공부문만큼 강하게 또 절대로 그런 일이 없었다고 부인을 하셨더라면 이러한 무고한 피해자가 나오지 않았거나 그때 그 재판이 다시 재수사되어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되는데 그런 생각은 드시지 않는지요?

ㅇ 증인 金大中

용공부문은 저 한사람한테 국한된 문제니까 제가 그것을 싸워서 거부할 수가 있읍니다.그런데 다른 문제는 여러 분하고 관련되었는데 그 분들이 이미 허위자백을 했어요. 그리고 허위자백이 참 견딜수 없는 고문에 의해서 했는데 제가 더 우겨봤자 방법이 없어요. 그분들에게 고통만 자꾸 더 주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쪽 부분은 저도 할 수 없이 승인을 하고 법정에 가서 싸우겠다 이렇게 생각하고 또 용공부분은 또하나는 저로서는 죽고 사는 문제니까 또 이것을 승인한다는 것은 저뿐 아니라 저희동기들이나 자식들한테까지 큰 영향이 미치는 문제니까 제가 그것을 결사적으로 반대를 한 것이지요.

ㅇ 鄭昌和위원

증인께서는 80년5월15일 오후 남대문 부근에서 있었던 학생들의 시위가 극에 달해서 전경이[버스]에 치어 역살당하는 등 그러한 사건도 조작이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아침에 증언을 하셨읍니다. 혹시 조작에 대한 정확한 근거나 증거라도 갖고 계시는지요?

ㅇ 증인 金大中

그런 이야기도 들었고요 또 상황증거로 보아서 아까도 말씀했지만 [버스]에 타고 밀어부처 가지고 그렇게 사람죽이면 거기서 뛰어내린다고 하면 주위에 있었던 정사복경찰이 누군가가 잡았을 텐데 잡지도 않았고 그 후라도 영 범인이 안 나온 것으로 보아서 제가 들은 정보 즉 자기들이 혼란을 조성하기 위해서 그런일을 했다. 그때 그것이 국민에게 큰 충격을 주어 가지고 학생들 시위에 대해서 아주 부정적 반응을 일으키는데 큰 공헌을 했읍니다. 그런 점에서 의심을 한다 그거지요.

ㅇ 鄭昌和위원

그러면 이제 몇가지 마지막으로 물어보겠읍니다. 아까도 본위원이 질의를 했읍니다마는 오늘의 이 청문회는 우리 역사에 있어서 크나큰 비극이요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될 광주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한 이 특위의 청문회입니다. 그렇다면은 증인께서는 그 아픔을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치유하실 수도 있다고 생각을 하시고 또 이 광주사태에 대하여 그동안 누구보다도 많이 관심을 가져오신 우리나라의 지도급정치인사이십니다. 우리가 아침 10시부터 이시간까지 증인과 함께 광주의 아픔과 광주의 역사를 얘기하고 있는 이 청문회가 그 때에 아픔을 당했던 유가족들이나 국민들에게 어떠한 이익을 주실 수 있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ㅇ 증인 金大中

저는 광주민중항쟁 이것이 법률적으로 폭도 내란 혹은 용공 이런것으로 규정된 채 지금 시정이 안 되고 있읍니다. 그리고 그 때에 희생된 분들의 명예도 회복되지 않고 있읍니다. 그런 데다가 거기에 대해서 가해한 사람들 그렇게 구국의 결단을 했다 나라가 송두리째 잘못 될 것 같으니까 이런 일 했다고 그렇게 자랑하던 분들중에 단 한 사람도 지금 광주에서 그런 무력행사에 대해서 내가 시켰다 내가 책임자다 이제 그런 말 안 합니다. 서로 남한테 미루고 있읍니다. 이런 상황하에서 저는 진실을 밝혀야 그래야 돌아가신. 분들도 눈을 감고 지하에서 고히 쉴 수가 있고 그 유가족들의 한도 풀릴 수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읍니다. 동시에 이것이 분명히 되어야 그래서 그것이 잘못 되었다는 것이 판명되고 이렇게 해야 이 나라 민주주의에 대한 정통성이 서 가지고 다시는 이런 잘 못된 일을 되풀이하지 않는 역사적 현실적 교훈을 세울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번 이 광주특위의 사명은 민족사적으로 보더라도 굉장히 중요한 비길 데 없이 중요한 그런 사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여러분께서 이 광주민중항쟁에 대해서 이번에 여야를 당리 당략을 초월해서 이것을 분명히 밝혀 가지고 이래서 그 밝힌 결과에 따라서 여야가 중지를 모아가지고 올바른 그리고 국민적으로 지지받을 수 있는 해결책을 도출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해 주시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읍니다.

ㅇ 鄭昌和위원

이제 증인께서 간절히 말씀하신 그러한 뜻에는 본위원도 동감을 하고 또 이미 지난 1월에 민주화합추진위원회에 국가 많은 원로지도자들이 모이셔서 근 40일에 가까운 기간동안 이 광주의 아픔을 치유하는 일이 어떤 방법이 있겠느냐 해서 오랜 시간 토의를 해서 민주화합추진위원회가 정부에 대해 건의를 제출한 바가 있읍니다.그 속에도 이미 그러한 건의는 충분히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이 되고 또 광주사태의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 라고 오랜시간 증인들을 통하여 증언을 들었으나 명백한 원인을 가리기에는 참으로 어렸다 라고 결론을 내린 바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읍니다.아무쪼록 오늘의 이 청문회가 광주의 아픔을 달래고 민족의 밝은 역사를 열어가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면서 질의를 마치겠읍니다.감사합니다.

ㅇ 위원장 文東煥

수고 하셨읍니다.([위원장!]하는 이 있음)예.

ㅇ 辛基夏위원

제가 서로 질문자께서나 증인께서 법률용어를 잘 모르고 물으신것 같아서 시청자나 방청객에게 오인될 염려가 있어서 한말씀만 드리겠읍니다.방금 동료 鄭昌和위원께서 金大中 증인에게 신문하시면서 鄭東年학생이 돈을 증인으로부터 받았다는 내용의 피의자 신문조서나 또는 공판기일전 증인조서 등이 증인에 대한 증거로 제출되었을 때 증인의 당시 변호인이었던 변호사 許京萬이 [진정성립을 인정했다] 그랬읍니다. 왜 진정성립을 인정했느냐 그렇게 물으니까 증인께서는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그랬읍니다. 그러면 여기 진정성립이라는 용어 자체가 문제인데 이 진정성립이라는 말은 그 문서의 내용이 맞다는 말이 아니라 그 문서가 위조되거나 변조된 것이 아니라 그 수사 기관원이 의해서 진정으로 작성되었다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것이 고문에 의해서 되었느냐 어떠냐 여부도 판가름나는 것이 아닙니다.단 작성명의자로 되어 있는 사람이 작성한 것이지 모르게 위조되었거나 변조되었거나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어서 許京萬변호사의 당시의 답변은 맞는다고 볼 수가 있읍니다.이상입니다.

ㅇ 위원장 文東煥

예. 고맙습니다.장시간 수고 많이 하셨읍니다.그러면 저녁식사를 위하여 7시반까지 정회를 하겠읍니다.그 동안 간사님들 좋은 해결방법을 강구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이제 정회를 선포합니다.

(18시22분 회의중지)

(19시34분 계속개의)

ㅇ 위원장 文東煥

이제 의회를 속개하겠읍니다.

ㅇ 李敏燮위원

의사진행 발언입니다!

ㅇ 위원장 文東煥

의사진행발언 李敏燮위원 해주십시요.

ㅇ 李敏燮위원

李敏燮위원입니다.오늘 하루종일 저희가 진지하게 증언청취를 했읍니다마는 지금까지 회의운영에 있어서 다소 유감스러운 말씀을 드리고 또 이 증언계속문제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유감스럽게도 위원장께서는 지금까지 회의를 운영해 오시면서 여당위원이 발언하는데 대해서만 의제외의 발언이라는 말씀을 하시고 발언을 제지하셨읍니다.앞으로 우리가 회의운영하는데 있어서는 이러한 일은 없도록 각별히 위원장께서 유념해 주시기를 바랍니다.또 조금전 회의에서 무소속의 朴燦鍾위원이 이미 국민은 심판을 내렸다하는 이런 발언을 한데 대해서 유감을 표시합니다.이제 오늘부터 우리가 본격적으로 특위활동을 시작해 들어감에 있어서 이렇게 미리 본인 개인의 의견으로 결론부터 내리는 행위는 우리 특위의 조사활동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을 합니다.위원장께서도 이러한 면에 각별히 유의하셔서 우리 특위의 운영이 좀더 진상조사에 효율적으로 임할 수 있도록 각별히 유념해 주실 것도 아울러 부탁을 드립니다.오늘 신문해야 될 증인이 金大中 李熺性 두분입니다. 金大中증인에 대한 심문한 부분은 저희 당에서 심문을 준비해오신 분이 아직 있읍니다마는 李熺性증인까지 우리 함께 신문해야 되는 이러한 일정인 관계로 나머지 충분한 신문의 시간을 갖기 위해서도 金大中증인에 대한 신문은 여기서 마치고 바로 이어서 李熺性증인에 대한 신문에 들어갈 것을 말씀드립니다.

ㅇ 위원장 文東煥

협력해주셔서 고맙습니다.그러면 신문할 위원이 더 없으실 것으로 알아서 이상으로 金大中증인에 대한 신문을 마치겠읍니다.증언하시느라고 수고하셨읍니다. 이제 증인 돌아가 주시기를 바랍니다.회의 계속하겠읍니다.다음 증인 곧 들어오실 것입니다.李熺性전계엄사령관님이 증인석에 나오시지요. 않으십시오.다음은 李熺性전계엄사령관의 증언을 듣겠읍니다.증언을 듣기 전에 관련법률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읍니다.국회에서의 증언감정등에관한법률에는 증인이 동법을 위반하면 처벌할 수 있는 규정과 이 법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증언내용에 대하여 불이익 처분을 받지 않는다는 보호법규도 있음을 알려드립니다.그러면 증인선서가 있겠읍니다.증인은 앞으로 나오셔서 선서를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ㅇ 증인 李熺性

(증인선서)

ㅇ 위원장 文東煥

그러면 첫번째 신문으로 평화민주당의 李海瓚위원 신문해 주시기 바랍니다.

ㅇ 李海瓚위원

평민당의 李海瓚위원입니다.지금으로부터 8년전 1980년 곡 이맘때 본위원은 증인휘하에 있는 육군교도소에서 수감되어 있던 사람입니다.그로부터 8년이 지나서 이제 바로 당시의 계엄사령관에 대해서 증인으로 채택해서 신문을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참 역사의 [아이러니] 를 느끼지 않을 수가 없읍니다.본위원은 증인의 휘하에 있던 계엄재판부에서 유죄를 선고받고 밖에 나와서 광주에서 무참히 학살당하고 부상당한 영령들을 위한 그들을 진혼하는 일에 나의 미력이라도 다하는것을 큰 역사적 소임으로 삼고 이제까지 살아왔읍니다.한 어린아이가 아버지의 영정을 들고 장의행렬을 따르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본위원은 잘못된 한 정권이 소수 군부의 정치적 야욕이 한 인간의 삶을 한 어린아이의 눈물을 저토록 유린할 수 있다 라는 것을 역사속에서 배우면서 살아왔읍니다.이제 본위원이 오늘 이 자리에서 증인에게 신문하고자 하는 것은 결코 다른 뜻은 아닙니다.

다만 한가지 이미 고인이 된 영혼들을 진혼하고 앞으로 우리 사회를 살아나갈 그 가슴에 상처를 안고 마음에 응어리를 가진 그분들의 한을 치유해주는 것이 본 특위이 역사적 소임이라고 생각합니다.본위원이 신문에 앞서 증인에게 간곡히 부탁 한가지를 드리겠읍니다.그것은 다름이 아니고 오늘의 이 자리는 서로가 한 동포로서 살아가면서 아픔을 치유하는 자리입니다.본위원도 이 역사적 소임을 다하기 위해서 정직하고 진솔한 마음으로 몇가지를 신문하겠읍니다.

증인께서도 저희들보다도 한 시대를 먼저 살아온 세상의 선배로서 또 한 시대의 책임을 맡았던 사회적 원로로서 정말 정직하고 소신있고 진솔하면서도 역사앞에 부끄러워할 줄아는 그런 증언을 해 주시기를 진심으로 간곡하게 부탁 말씀드리면서 신문을 시작하겠읍니다.1980년 5월17일 밤 9시42분부터 9시50분까지 8분동안 제42회 임시국무회의가 있었읍니다. 기억하고 계시지요?

ㅇ 증인 李熺性

예.

ㅇ 李海瓚위원

그 회의에서는 비상계엄선포안을 원안대로 의결한다 라는 결정이 있었읍니다.제출자는 국무위원 周永福 당시의 국방부장관입니다. 기억하고 계시지요?

ㅇ 증인 李熺性

예.

ㅇ 李海瓚위원

불과 8분만에 이처럼 중대한 역사적 결정이 아무런 토의없이 보고사항으로 원안대로 통과됐읍니다.바로 그것이 오늘 이 자리까지 오는 참극의 씨앗이 되었다고 본인은 생각하고 있읍니다.이 국방부의 원안은 증인께서 참석하신 같은 날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열린 3군 주요지휘관회의에서 이미 논의가 된 사실이지요?

ㅇ 증인 李熺性

예.

ㅇ 李海瓚위원

그 논의내용은 지역계엄을 전국계엄으로 확대한다는 것이었지요?

ㅇ 증인 李熺性

예.

ㅇ 李海瓚위원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계엄으로 확대했읍니다.그러면 제주도를 포함시킬만한 특별한 사유가 있었읍니까?다시 말씀드려서 제주도에 적군으로 포위가 되어 있다라든지 아니면 공공의 안녕질서가 국가의 존망에 위급할 정도로 제주도에 그런 불안한 상황이 이미 전개되고 있엇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그렇지 않았읍니다.

ㅇ 李海瓚위원

아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주도에 아무런 그런 계엄발동의 요건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타 지역에는 계엄이 발동돼 있는데 제주도까지 포함해서 전국계엄으로 확대시킨 저의는 무엇입니까?

ㅇ 증인 李熺性

그 전 해 10월26일 朴대통령 살해사건이 있고 난 다음에 제주도를 제외한 우리나라에 비상계엄이 발표됐읍니다. 그 이후 이 비상계엄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치안은 날이 갈수록 어지러워져서 보다 더 강력한 대책이 필요하겠다 해서 전국비상계엄으로 확대 발표한 것으로 저는 알고 있읍니다.

ㅇ 李海瓚위원

좋습니다.그러면 계엄이 비상계엄보다 더 강력한 계엄은 없지요? 전국계엄이라고 해서 지역의 포괄 범위만 달라지는 것이지 그 동안까지 시행해온 비상계엄보다 초강력 비상계엄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요?다시 말씀드려서 이런 전국계엄으로 확대한 것은 국민들에 대해서 계엄군으로서의 위압적인 위력을 과시하기 위한 하나의 계기를 잡으려고 했던 것이 아닌가요?

ㅇ 증인 李熺性

위압을 주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경각심을 높이는 방향으로 한 것입니다.

ㅇ 李海瓚위원

예. 좋습니다.그러면 80년5월17일 오전 10시부터 15시까지 3군주요지휘관회의에서 발언한 내용들을 증인은 지금 기억하고 계십니까?

ㅇ 증인 李熺性

본인이 발언한 것 말입니까?

ㅇ 李海瓚위원

증인뿐만 아니라 다른 지휘관들도요.

ㅇ 증인 李熺性

예.

ㅇ 李海瓚위원

하나하나 본인이 신문을 시작하겠읍니다.당시 鄭鎬容 특전사령관은 국회가 개원이 되면 국가를 오도할 사례가 많아 집니다.우리나라의 장래가 극히 염려되는 시점입니다. 이렇게 회의석상에서 발언한 사실이 있지요?

ㅇ 증인 李熺性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ㅇ 李海瓚위원

좋습니다.그 다음에 국방부장관은 정치 및 주요단체의 문제 인물은 완전히 제거되어야 한다는 것이 이 시점에서 요망되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발언한 사실이 있지요?

ㅇ 증인 李熺性

그것도 역시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ㅇ 李海瓚위원

증인께서는 그날 회의 방식에 대해서 다른 주요 지휘관중의 한 사람이 이의를 제기하자 회의에는 결정을 해 놓고 따라오라는 식의 회의와 .어떤 안을 놓고 토의하는 등 여러가지가 있읍니다.이 회의는 이런 결정된 안을 놓고 얘기를 듣는 방법입니다.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지요?그것도 기억이 안 나십니까?

ㅇ 증인 李熺性

제 기억으로서는 그날 본증인은 하나도 발언하지 않은 것으로 현재 기억하고 있습니다.

ㅇ 李海瓚위원

좋습니다.이 회의에 앞서서 오전에 장관하고 3군총장들이 또 회의한 사실이 있지요?

ㅇ 증인 李熺性

그것은 회의라기 보다는 본회의장에 들어가기 전에 잠깐 모인 것같은 생각이 듭니다.

ㅇ 李海瓚위원

그렇지요?

ㅇ 증인 李熺性

예.

ㅇ 李海瓚위원

이 회의 끄트머리에는 이 회의에서 채택할 결의사항을 이미 몇사람이 초안을 작성 해가지고 와서 그것을 서명한 사실이 있나요?

ㅇ 증인 李熺性

그런 사실이 없읍니다.

ㅇ 李海瓚위원

이 회의의 결의를 어떤 식으로 장관한테 모아 주었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본회의장에 들어가지 전에 말씀입니까?

ㅇ 李海瓚위원

이 주요 지휘관회의 끝에…

ㅇ 증인 李熺性

끝에 가서 말입니까?

ㅇ 李海瓚위원

예.

ㅇ 증인 李熺性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ㅇ 李海瓚위원

기억이 안나요?

ㅇ 증인 李熺性

예.

ㅇ 李海瓚위원

이 회의의 결론을 가지고 국방부장관이 비상국무회의에다가 제안을 했지요?

ㅇ 증인 李熺性

그런 것으로 알고 있읍니다.

ㅇ 李海瓚위원

그것은 인정을 하지요?

ㅇ 증인 李熺性

예.

ㅇ 李海瓚위원

이러한 5월17일 주요지휘관회의 비상국무회의가 있기에 앞서서 崔圭夏대통령이 5월16일중동에서 예정을 앞당겨 급거 귀국했지요?

ㅇ 증인 李熺性

그렇습니다.

ㅇ 李海瓚위원

그래서 오후 11시부터 12시까지 청와대에서 대책회의가 있었지요?

ㅇ 증인 李熺性

그렇습니다.

ㅇ 李海瓚위원

증인은 거기에 참석했지요?

ㅇ 증인 李熺性

그렇습니다.

ㅇ 李海瓚위원

누구누구 참석했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통상 중요한 일을 의논하는 보안관계장관들은 다 참석한 것으로 기억을 하고 있읍니다.

ㅇ 李海瓚위원

申鉉碻 金鍾煥 周永福 全斗煥씨도 참석했지요? 보안사령관으로서…

ㅇ 증인 李熺性

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읍니다.

ㅇ 李海瓚위원

계엄사령관도 참석을 하고요?

ㅇ 증인 李熺性

예.

ㅇ 李海瓚위원

바로 그날 회의에서 계엄확대조치의 필요성을 서로 논의했지요?

ㅇ 증인 李熺性

예.

ㅇ 李海瓚위원

바로 그 얘기를 가지고 전군지휘관회의에서 얘기를 하고 그 결론을 가지고 국방부장관이 국무회의에다가 제안을 해서 국무회의는 형식적으로 8분만에 통과시킨 것이지요?

ㅇ 증인 李熺性

그와같은 내용은 본 증인은 잘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ㅇ 李海瓚위원

바로 이 16일 17일 이루어진 일련의 결정이 우리 민족의 역사를 크게 왜곡시키는 중요한 회의였다고 본위원은 생각하고 있읍니다.그러면 이 사실에 앞서서 4월15일은 全斗煥합동수사본부장이 중앙정보부장서리로 취임한 사실이 있지요?

ㅇ 증인 李熺性

정확한 날짜를 기억하지 않습니다마는 그 시기에 그런 사실이 있읍니다.

ㅇ 李海瓚위원

그리고 합동수사본부장은 보안사 정보부 치안본부를 통괄하는 계엄법의 근거가 박약한 합동수사본부장으로서의 역할을 10·26직후부터 해왔지요?

ㅇ 증인 李熺性

예.

ㅇ 李海瓚위원

12·12사태이후 특전사령관을 鄭柄宙장군을 鄭鎬容장군으로 교체했지요?

ㅇ 증인 李熺性

그렇습니다.

ㅇ 李海瓚위원

그 다음에 수도경비사령관 張太玩장군을 盧泰愚장군으로 교체했지요?

ㅇ 증인 李熺性

그렇습니다.

ㅇ 李海瓚위원

보안사령관을 계속 유임했지요?

ㅇ 증인 李熺性

그렇습니다.

ㅇ 李海瓚위원

바로 증인은 그 세사람의 장군보다 군대에서 선배지요?

ㅇ 증인 李熺性

그렇습니다.

ㅇ 李海瓚위원

선배임에도 불구하고 중앙정보부장서리로 취임한 사실이 있지요?다시 말씀드려서 육군소장인 全斗煥소장이 합동수사본부장을 관장하고 있는데 그 휘하에 있는 정보부장서리로 취임한 사실이 있지요? 육군중장으로서…

ㅇ 증인 李熺性

저 말씀입니까?

ㅇ 李海瓚위원

예.

ㅇ 증인 李熺性

제가 중앙정보부장서리로 취임한 일이 있읍니다.

ㅇ 李海瓚위원

이 5·17 계엄확대조치가 증인이 생각하기에는 엄청난 내란죄였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ㅇ 증인 李熺性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ㅇ 李海瓚위원

그러면 계엄확대조치를 하면 대통령은 국회에 지체없이 통보하고 국회를 소집하도록 헌법상에 규정되어 있지요?

ㅇ 증인 李熺性

그런 것으로 알고 있읍니다.

ㅇ 李海瓚위원

국회에 통보했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그것은 제가 모르고 있는 사실입니다.

ㅇ 李海瓚위원

본위원이 확인해 본 결과 당시 계엄사령관 李熺性이름으로 국회에 5월18일에 통보한 사실은 있읍니다.그러면 대통령이 국회를 소집한 사실은 있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가만 계십시요. 계엄사령관의 이름으로 국회에 통보가 되었다는 것입니까?

ㅇ 李海瓚위원

본위원이 그 기록은 확인을 했읍니다. 국회의사록에 접수되어 있읍니다.좋습니다.대통령은 국회를 소집한 사실은 없읍니다. 이것은 헌법에 규정되어 있는 계엄조항에 대한 위법이 되겠읍니다.본위원은 증인에게 중요한 사항을 질문을 하겠읍니다.포고령 10호를 증인은 발동한 사실이 있지요?

ㅇ 증인 李熺性

그렇습니다.

ㅇ 李海瓚위원

포고령 10호에서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시킨다라고 규정했지요?

ㅇ 증인 李熺性

그렇습니다.

ㅇ 李海瓚위원

계엄포고령으로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시키는 것이 합법입니까? 불법입니까?

ㅇ 증인 李熺性

그 당시 저는 법률에 대한 지식이 아주 없을 때입니다.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이지만 그때 긴박한 상황에서 그와같은 문제가 가능하다고 보고 있었는데 그이후에 알고보니까 잘못된 점을 발견했읍니다.

ㅇ 李海瓚위원

그 후에 불법이라는 사실은 확인했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최근에 와서 그것도 알았읍니다.

ㅇ 李海瓚위원

그로 인해서 처벌을 받은 사실이 있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없읍니다.

ㅇ 李海瓚위원

또 하나. 이미 국회가 의원들의 서명으로 해서 계엄령 해제를 논의하기 위해서 5월20일 소집되어 있었지요?

ㅇ 증인 李熺性

그것은 제가 잘 모르고 있읍니다.

ㅇ 李海瓚위원

계엄사령관으로서 몰랐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몰랐읍니다.

ㅇ 李海瓚위원

이미 신문에 많은 공고가 발표가 되었고 했는데 몰랐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그렇습니다.

ㅇ 李海瓚위원

그러면 5월20일이 국회에 등원하는 국회의원들을 등원하지 못하도록 막은 사실은 있지요?

ㅇ 증인 李熺性

그 사건이 있고 난 다음에 들은 것같습니다.

ㅇ 李海瓚위원

그 사건이 있고 나서 들었다고요?

ㅇ 증인 李熺性

예.

ㅇ 李海瓚위원

증인은 육군참모총장으로서 또 계엄사령관으로서 육군본부의 작전상황일지를 지휘감독할 책임이 있지요?

ㅇ 증인 李熺性

그렇습니다.

ㅇ 李海瓚위원

육군본부의 작전상황일지에 보면 의원들이 등원하다가 군인들에 의해서 등원이 저지당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읍니까? 안되어 있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육군에 대한 전체적인 책임은 저한테 있읍니다. 그러나 각부처마다 가지고 있는 일지를 일일이 제가 확인할 수는 없읍니다.

ㅇ 李海瓚위원

그러면 이렇게 의원들 등원하는 것을 군인들이 막았다 라는 사후보고를 들은 바 있읍니까? 없읍니까? 당시에…

ㅇ 증인 李熺性

보고를 받은 일은 없읍니다.

ㅇ 李海瓚위원

보고도 안 받았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그렇습니다.

ㅇ 李海瓚위원

당시에 그 군인들은 어느 부대 소속 군인들이었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그것도 잘 모르고 있읍니다.

ㅇ 李海瓚위원

아니 국회에 등원하는 의원들을 막은 군인들이 어느 부대 소속이었는지를 모르신다는 말입니까?

ㅇ 증인 李熺性

그때 어느 부대가 배치되었는지 그것을 모르고요. 제가 알기로는 그 배치되어 있는 병력이 국가중요시설을 경계하기 위한 병력이었는데 그 병력들이 잘못을 저지른 것으로 알고 있읍니다.

ㅇ 李海瓚위원

당시 계엄상황일지 작전일지를 보면 군인들이 막은 것이 아니고 閔寬植 국회 부의장이 현장에 나가서 해산한 것으로 이렇게 보고되어 있읍니다. 그 병력은 수경사 병력이었나요?

ㅇ 증인 李熺性

제가 이 자리에서 어느 부대의 병력이라고 말씀드릴 수가 없읍니다.

ㅇ 李海瓚위원

그러면 그 막던 당시의 사진을 제가 보여드리면 그 병력이 어딘지 아시겠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사진을 가지고 판별할 수 있을지 모르겠읍니다.

ㅇ 李海瓚위원

그러면 누가 했는지도 모르고 계엄사령관으로서의 지휘책임의 불충분아닙니까?

ㅇ 증인 李熺性

그렇게 말씀하시면 변명의 여지는 없읍니다마는 육군참모총장이 모든 말단에 일어나는 것을 파악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ㅇ 李海瓚위원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사실입니다. 헌법상의 기구의 국회기능을 정지시키는 일에 증인의 휘하군대가 군인이 무력으로 막았는데 그 사실을 후에라도 확인조차 안해 봤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사후에 알기는 알았읍니다.

ㅇ 李海瓚위원

사후에 알았는데 어느 부대가 막았는지 확인도 안해 봤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그렇습니다.

ㅇ 李海瓚위원

본위원이 사진 한장을 보내드리겠읍니다. 한번 부대를 확인해 보십시오.입법조사관! 이 사진입니다.이렇게 헌법기구인 국회의 기능을 정지시키면 국헌을 문란하거나 국토를 참절한 경우 사형에까지 처하도록 되어 있는 내란죄에 해당된다는 사실을 증인은 알고 있읍니까 모르고 있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지금은 알고 있읍니다.

ㅇ 李海瓚위원

내란죄를 저지른 사실은 인정합니까?

ㅇ 증인 李熺性

그 정황을 다시 조사를 해봐야 명확해지리라고 생각합니다.

ㅇ 李海瓚위원

이렇게 명백한 사진이 있는데도 정황을 조사해봐야 됩니까?

ㅇ 증인 李熺性

이 사진 보니까 일본신문에 난 사진이군요.

ㅇ 李海瓚위원

AP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AP에서 찍어서 일본 [아사히]신문에 21일자로 보도된 사진입니다.증인께서는 계엄사령관으로 있으면서 외신기자들 하고의 간담회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계엄사령관으로 계엄의 모든 행동에 대해 내가 책임을 진다. 광주에서 계엄군은 작전명령을 받아 작전했으며 따라서 그 누구도 징계할 이유가 없다"외신기자들하고 이렇게 [인터뷰]한 것을 기억하시지요?

ㅇ 증인 李熺性

기억합니다.

ㅇ 李海瓚위원

이 계엄군의 행동에 대해서 책임을 지시겠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응분의 책임을 져야지요.

ㅇ 李海瓚위원

본위원이 왜 이 질문을 하느냐 하면 20일 국회가 개원이 되어서 계엄을 해제를 했더라면 광주와 같은 그 처참한 학살은 우리 역사속에서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당시에 모든 학생들이 모든 정치인들이 계엄해제를 요구했읍니다. 오로지 하나소수의 정치군부만이 계엄해제를 거부했읍니다.본위원이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鄭鎬容 특전사령관처럼 국회가 개원이 되면 나라가 어지러워진다 라는 그런 사고방식에 젖은 극소수의 정권야욕에 찬 군인만이 계엄해제를 거부했던 것입니다.광주에서 21일부터 발포가 이루어졌고 처참한 살상이 자행이 되었읍니다. 계엄이 해제가 되었으면 그런 상황이 이루어졌다고 증인은 생각하십니까?바로 그렇게 계엄을 해제를 못하도록 계엄군이 헌법기관을 정지를 시켰기 때문에 광주에서의 참극이 발생한 것입니다. 인정하십니까?

ㅇ 증인 李熺性

전적으로 그렇다고만 얘기할 수 없읍니다. 이 1개 말단의 병사가 그때 당시 한 순간의 잘못이 전체의 일같이 말씀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ㅇ 李海瓚위원

당시에 국회에는 여러대의 [탱크]를 진주해 놓았었읍니다. 약 300여명의 의원과 보좌관과 보도진이 국회에 들어 가려고 하는 것을 군인들이 막았읍니다. 그것을 증언해 줄 증인들은 이 현장에도 10대의원으로서 많이 계십니다. 바로 이러한 행위가 국헌을 문란하는 엄청난 내란죄에 해당이 되는 것이고 바로 이것은 5·17계엄확대조치가 사실상의 군부의 [쿠데타]였다 라는 것을 입증하는 명백한 증거가 아닙니까?

ㅇ 증인 李熺性

그렇게 단정 짓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ㅇ 李海瓚위원

바로 증인께서는 이런 엄청난 범죄를 스스로 한 것입니까? 아니면 누구의 힘에 의해서 강요를 받아서 한 것입니까?

ㅇ 증인 李熺性

누구의 강요에 의해서 한 것은 아닙니다.

ㅇ 李海瓚위원

그러면 증인이 당시 정황을 이끌어 가는 실세였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실세 비실세 그와 같은 문제가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ㅇ 李海瓚위원

李熺性증인! 역사앞에 신문이나 본위원이나 증언하는 증인이나 서로간에 겸손합시다. 정말 정직한 마음으로 이 증언을 이 청문회를 이끌어 가주시기를 바랍니다.오늘 이 자리에서의 증언이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는 아주 중요한 소중한 자리입니다.본위원이 모두에 부탁한 것 처럼 소신있고 정직한 답변을 해 주시기를 다시한번 촉구합니다.

ㅇ 증인 李熺性

예. 최대한도로 양심에 가책이 없는 답변을 드리겠읍니다.그런데 일순간의 말단의 잘못을 가지고 그것이 장시간에 전체같이 말씀하는 것은 조금 제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읍니다.

ㅇ 李海瓚위원

증인은 광주상황이 있은 후에 全斗煥장군을 대통령후보로 추대한 사실이 있지요?

ㅇ 증인 李熺性

그 추대하는…… 어떻게 하는 것이 대통령추대가 되겠읍니까?

ㅇ 李海瓚위원

1980년8월22일 전군지휘관회의에서 全斗煥장군을 국가원사로 추대하는 그런 모임을 가진 사실이 있지요? 증인이 추대한 그 全斗煥장군이 바로 오늘 이 자리에 증언을 거부한 전대통령 全斗煥씨입니다.다음에는 광주에서의 발포와 관련해서 증인에게 몇가지 사실을 확인하겠읍니다.광주에서 당시 사령관으로서 또 육군참모총장으로서 발포명령을 처음으로 내린 때는 언제입니까?

ㅇ 증인 李熺性

발포명령을 내린 바는 없읍니다.

ㅇ 李海瓚위원

자위권발동이 가능하다 라는 허가를 해준 것은 언제입니까?

ㅇ 증인 李熺性

자위권이라 하는 것은 누가 허가하고 안 하고 하는것이 아닙니다.

ㅇ 李海瓚위원

그러면 5월21일 오후 7시30분 증인께서는 자위권 보위를 천명한 사실은 있지요?

ㅇ 증인 李熺性

그렇습니다.

ㅇ 李海瓚위원

그 시점부터 예하부대가 자위권 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까?

ㅇ 증인 李熺性

그전에 부터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ㅇ 李海瓚위원

공수7여단에서 발포가 가능했던 시간은 언제부터 입니까?

ㅇ 증인 李熺性

그 현지상황을 잘 파악 못하고 있읍니다.

ㅇ 李海瓚위원

5월21일 18시부터 입니다. 그 부대의 전투상보에 의하면 그 다음에 20사단의 전투상보에 의하면 21일 21시부터입니다.그리고 당시 전교사… 전투교육사령부상보에 의하면 전남지역에서의 자위권 행사가 20시30분으로 되어 있읍니다 그렇게 부대마다 자위권 발동시간이 다른 이유는 무엇입니까?

ㅇ 증인 李熺性

앞에서도 말씀 올린 바와 마찬가지로 자위권이라 하는 것은 그와 같은 상황이 도달하면 누구든지 그 스스로 명령의 유무에 관계없이 할 수 있는 것이 그것입니다.그렇기 때문에 본 증인이 22일 저녁에 방송을 통해서 자위권을 유보하고 있다는 것을 천명한 것은 우리 국민이 군이 위급하고 필요할 때에는 자위권을 행사하니 우리 국민이 거기에 대한 피해가 없도록 하는 경고적인 목적으로서 발표한 것입니다.이 방송을 들은 예하부대는 그 부대마다 각각 이것을 전달했기 때문에 어떤 부대는 빠르고 어떤 부대는 늦을 수도 있고 그렇게 된 사실로 저는 파악하고 있읍니다.

ㅇ 李海瓚위원

공식적으로는 한번도 발포명령을 한 사실이 없다고 증언하셨지요?

ㅇ 증인 李熺性

그렇습니다. 자위권이 발포명령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ㅇ 李海瓚위원

그런데 광주에서는 발포를 한 사실은 있지요?

ㅇ 증인 李熺性

있었겠지요.

ㅇ 李海瓚위원

어느 부대가 언제 어디에서 발포를 했는지 말씀해 보십시오.

ㅇ 증인 李熺性

그와 같은 세부사항은 제가 파악할 수 없는 조그만 말단부대의 사건입니다.그렇기 때문에 제가 언제 제일 먼저 발포가 있었다 하는 것도 그 당시도 모르고 있었읍니다.

ㅇ 李海瓚위원

그러면 증인은 국회의 기능을 정지시키는 의원들의 등원을 무력으로 막은 사실도 모르고 있고 광주에서 자국민을 총으로 쏘아 죽인 그런 발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모르고 있고 계엄사령관으로서 무엇을 알고 있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계엄사령관이 하는 일은 많습니다. 또 참모총장으로서 하는 일이 많습니다.그런데 자위권에 의해서 발사된 그와 같은 문제까지 일일이 보고한다는 것은 작전현장에 있는 상황으로 보아서 그런 것은 대단히 어렵습니다.실제 전쟁을 해 보아도 압니다마는 말단부대에서 최초에 적을 발견하고 사격을 가했다 하는 문제가 정확하게 보고된다 하는 것은 지극히 힘든 사실로 경험있는 군인들은 다알고 있읍니다.

ㅇ 趙洪奎위원

광주에 전쟁에 일어나요?

ㅇ 증인 李熺性

아니 전쟁 때도 최초 적을 발견하고 사격한다는 것은 상부에 가장 빨리 정확하게 보고돼야 될 중요한 징후입니다.

ㅇ 趙洪奎위원

광주에서 적을 발견한 사람이 누구예요?

ㅇ 증인 李熺性

예를 들어서…

ㅇ 위원장 文東煥

증인! 증인! 가만히 있어요.

ㅇ 李光魯위원

위원장님! 발언권을 얻은 사람만 발언하도록 해 주세요.

ㅇ 위원장 文東煥

발언권 얻은 사람만 발언하세요.

ㅇ 李海瓚위원

이렇게 각 군에마다 발포시간이 다르고 당시 계엄사령관으로서 발포명령을 한 사실도 없다 라고 하는 것은 이미 현지에서 별도의 발포명령을 누가 비공식적인 체계로 했다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까?왜 그러냐 하면 국민에 대해서 발포를 한다 라고 하는 것은 국민을 적으로 알고 발포한다는 것은 일개 여단장이나 사단장으로서는 전혀 가당치 않은 일입니다.

ㅇ 증인 李熺性

답변해도 좋습니까?

ㅇ 李海瓚위원

말씀하세요.

ㅇ 증인 李熺性

자위권과 발포하는 명령이 다르다고 제가 말씀드렸읍니다. 자위권이라 하는 것은 위수령에 있는 것인데 위수령에 15조1항입니다. 이것은 대통령령 4949호 1970년4월20일에 공표된 것인데 여기에 의하면 자위권을 발동할 수 있는 여건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읍니다.그래서 그와 같은 여건이 되면 일개병사나 거기에 있는 부대 전체가 이 조건에 해당하면 사격을 할 수 있는 것이지 이것이 발포라고 얘기한다면 여러가지 혼선이 일어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ㅇ 李海瓚위원

자위권은 자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 그런 말씀인가요?

ㅇ 증인 李熺性

그렇습니다. 그리고 광주에서 전 광주와 동시에 이와 같은 자위권을 발동할 수 있는 상황이 동시에 일어나리라고도 볼 수 없읍니다. 지역에 따라서 한 사건에 따라서 일어날 수 있는 문제입니다.

ㅇ 李海瓚위원

예. 그 다음 질문을 하겠읍니다. 이런 광주의 참극이 있은 후 당시 현지 전투교육사령부 사령관이었던 蘇俊烈장군은 최종적인 결론에서 이렇게 결론을 맺고 있읍니다. 최근에 국방부에서 본 특위에 제출한 자료의 한부분입니다. "전반적인 견지에서 볼 때 사상적 이념적 위해요인은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 광주시민들이 유언비어에 현혹 우롱을 당하였으나 실제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광주시내 거주 영남출신자 및 군인가족 피해상황이 전혀 없다. 혼란과 무질서중에서도 용공분자로 의심되는 거동수상자를 자진체포하여 당국에 인계하였다. 광주시민들이 폭력으로 현 정부를 전복 또는 무장하여 군과 끝까지 대결하겠다는 적대의식보다는 단순히 자기보호 본능으로 무기탈취 및 계엄군에 저항한 것이었다" 이것이 현지 전투교육사령부 사령관의 최종적인 보고서였지요? 이것도 기억을 못하십니까?

ㅇ 증인 李熺性

못하고 있읍니다.

ㅇ 李海瓚위원

이 보고서는 군사연구실에 공식적으로 입수된 보고된 보고서입니다.

ㅇ 증인 李熺性

참고로 말씀드리면 각 부대에서 역사자료로서 보고되는 것이 총장결재서안에 올라 오지는 않습니다.

ㅇ 李海瓚위원

바로 이렇게 현지에 공식적인 총 지휘책임자였던 전투교육사령부의 최종적인 보고서입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증인은 이 보고서를 채택하지 아니하였읍니다. 왜냐 하면 사후에 여러가지 자리에서 증인은 광주는 폭도들의 난동이었다 하는 얘기를 거듭 거듭 한 사실이 있읍니다.본위원은 증인에게 한 가지 사실만 더 확인하겠읍니다. 민화위에서의 증언에는 왜 거부했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거부하지 않고 서면으로 제출했읍니다.

ㅇ 李海瓚위원

이렇게 참극을 저질러 놓고도 그것을 아무려보겠다 라고 하는 자그만 노력중의 하나인 민화위의 출석조차도 거부하고 서면으로 제출한 것이 온당한 처사라고 생각하십니까?

ㅇ 증인 李熺性

저는 그 나름대로 타당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자리에 가서 말하면 여러가지 와전될 수 있기 때문에 서면으로 보고하는 것이 내 진심이 왜곡됨이 없이 보존될 수 있기 때문에 서면으로 낸 것입니다. 또 이것은 민화위의 위원장과 상의를 해 가지고 서면으로 하는 것도 좋다 하는 양해를 구한 바 있읍니다.

ㅇ 李海瓚위원

좋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확인하겠읍니다. 충정계획에서의 지침에 보면 총포의 사용은 여하한 긴박한 상황하에서도 군사령관의 사전승인을 득해지면 사령관명에 의해 사용해라 하는 지침이 있지요?

ㅇ 증인 李熺性

어느 사령부 지침입니까?

ㅇ 李海瓚위원

11특전여단에서 나온 지침입니다.

ㅇ 증인 李熺性

예.

ㅇ 李海瓚위원

군수지원사령부!

ㅇ 증인 李熺性

어느 군수지원사령부입니까?

ㅇ 李海瓚위원

법률적인 판단은 보다 다시 추궁할 기회가 또 있을 것입니다.마지막으로 한 가지 육군특전사는 한·미연합사의 작전통제를 받고 있는 부대지요?

ㅇ 증인 李熺性

아닙니다.

ㅇ 李海瓚위원

아닙니까?

ㅇ 증인 李熺性

예.

ㅇ 李海瓚위원

이번에 국방부에서 본 특위에 제출한 군사작전지휘체계도가 있읍니다. 이 체계도에 보면 연합사가 특전사를 지휘·통제하도록 명시해 놓고 있읍니다.이것을 부정하겠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그것은 전시문서입니까? 평시문서입니까?

ㅇ 李海瓚위원

평시문서입니다.

ㅇ 증인 李熺性

그것이 전시를 위한 전시가 되면 연합사의 작전통제를 받는 경우가 있을지 모르지만 평시에는 작전권이 전적으로 제가 있을 당시에 작전권은 전적으로 육군본부에 있었읍니다.

ㅇ 李海瓚위원

본위원은 이제 신문을 정리하면서 몇가지 사실만 다시 더 확인합니다.우선 계엄사령관으로서 이런 국헌문란죄에 본인이 책임이 지금 있다고 생각합니까? 없다고 생각합니까?

ㅇ 증인 李熺性

국회에 대해서 말입니까?

ㅇ 李海瓚위원

예.

ㅇ 증인 李熺性

그때 당시 상황이 제가 명령을 하고 감독을 즉시 현지에서 했다면 해당되지만 제가 멀리 떨어진 데서 그와 같은 상황을 모르는 바에 있다 해서 지휘책임은 지지만은 현지 현실에는 책임질 수 없다고 봅니다.

ㅇ 李海瓚위원

예. 그 다음에 5월27일 도청진압작전은 자위권 행사였읍니까?

ㅇ 증인 李熺性

그것은 자위권행사가 아닙니다.

ㅇ 李海瓚위원

최종승인자는 누구입니까? 이 작전에…

ㅇ 증인 李熺性

최종 승인자는 작전을 실시해도 좋다는 권한을 당시 계엄사령관이 교육기지사령관에게 하달했읍니다.

ㅇ 李海瓚위원

한 사실이 있지요?

ㅇ 증인 李熺性

있읍니다. 그리고 거기에 오해가 있을까봐 한가지 더 합니다.위수령제15조1항에 조그만 3항에 이와같은 문장이 있읍니다.[신체 생명 및 토지 기타 물건을 방위함에 있어서 병기를 사용하지 않고는 방위할 수단이 없을 때는 병기를 사용할 수 있다]하는 것이 적용될 수 있지 않겠느냐 생각이 됩니다. 또…

ㅇ 李海瓚위원

시간이 다 되었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증인에게 한 마디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계엄포고령 10호가 계엄법에 위반을 했고 국헌을 문란하게 한 당시 계엄사령관으로서 오늘의 증언은 대단히 무책임하고 불성실합니다.이 점에 대해서 역사 앞에 사죄하는 심정으로 죽은 영령들에 대해서 부끄러워하는 마음으로 앞으로는 다른 위원들의 신문에 보다 진솔하고 정직하게 증언하시기를 바랍니다.바로 이 역사참극의 한 행위자로서 죄를 지은 마음으로 겸허한 마음으로 증언해 주시기를 다시한번 간곡히 부탁을 드립니다.수고하셨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