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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청문회 속기록] 제 144회 국회(페회중) 5·18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 회의록 제 7 호(8)

본문

제 144회 국회

5·18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 회의록 제 7 호(8)

ㅇ 金吉弘위원

지난 80년 당시 재야 및 학생세력이 주축이 되어서 5월20일에 개최키로 했던 소위 민주화촉진선언국민대회와 증인께서 4월29일 덕산온천 기자회견에게 밝히신 민주화추진전국민운동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입니까?

ㅇ 증인 金大中

뭐 꼭 같지는 않지만 일맥상통한 것이지요.

ㅇ 金吉弘위원

증인과 관계된 기록에 의하면 이 국민대회는 5월20일 12시를 기해 서울 부산 광주등 전국의 시도청광장에서 검은 리본에 민주주의의 관을 메고 동시 다발적으로 시위를 전개키로 했다는데 그것 준비한 사실을 알고 있읍니까?

ㅇ 증인 金大中

모릅니다.

ㅇ 金吉弘위원

모르신다고요. 본위원의 생각으로는 당시 그러한 모임이 실행된다면 전국적으로 치안을 마비시켜 사회를 극도의 혼란상태로 몰아넣기 위한 우려가 있다고 보고 있읍니다.이 촉진대회에 앞서 가진 준비 모임에서 모 신부가 이런 식으로 전국규모의 대회를 강행한다면 피가 흐른다고 하면서 반대했다는 데 들으신 적이 있으십니까?

ㅇ 증인 金大中

저는 그 준비모임에 가본 일이 없고 다만 5월24일 文益煥목사가 오셔가지고 尹潽善 전대통령이 이미 서명한 문장을 가지고 왔는데 거기에 보니까 崔圭夏정권 全斗煥 이런 분들이 민주주의를 회피하고 있다 비난하는 말을 쓰고 요구사항으로서 군인들은 총을 놓고 부대에서 전부 나와서 합류해라 노동자들은 [햄머]를 놓고 나와서 같이 해라 상인들은 문을 닫고 철시해라 이런 말이 있어서 제가 깜짝 놀라면서 이런 짓 하면 안된다고… 이것은 가능성도 없을 뿐아니라 해도 안되고 이것은 큰 재난을 가져온다고 그래서 거기서 한 한시간 내지 두시간 여러가지 격론을 해가지고 다 취소시켜 버리고 그래가지고 정치일정을 빨리 발표해라 계엄령해제해라 申鉉碻 全斗煥 물러가라 이런 정도로 해서 성명서를 냈는데 그렇게 고쳐주고 서명하고 그리고 나중에 장충공원이나 그런데에서 집회할 때는 해도 좋다 이런 정도로 얘기를 끝냈읍니다.

ㅇ 金吉弘위원

만약 5·17계엄확대조치가 없었다면 그러한 전국규모의 국민대회가 실현될 것으로 생각했었읍니까?

ㅇ 증인 金大中

전국규모는 모르고요 장충공원에서 했겠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질서 지키면서 했지 지금 말씀하신 바와같이 국가기능을 마비시킬… 마비시킬 힘이나 있나요. 그런 것은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

ㅇ 金吉弘위원

5월20일 열고자 했던 이 촉진대회를 이틀 앞두고 증인께서 연행되므로써 증인과 가장 연고가 깊은 광주에서 반대 시위가 폭발되었다고 보는데 증인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ㅇ 증인 金大中

광주 그것은 요 나중에 더 현지분들 조사해 가시면 알지만 결국에서는 이 군부에서 의도적으로 거기에 질서유지에 가장 자극적이고 부적합한 공수부대를 침투시켜가지고 광주시민을 자극해서 이래가지고 문제를 일으킨 것입니다. 이 문제하고는 관계가 없읍니다.

ㅇ 金吉弘위원

본위원이 알기로는 공수부대가 광주에만 간 것이 아니고 대구 서울 여타 지역에도 파견된 것으로 알고 있읍니다.

ㅇ 증인 金大中

그것이 다 잘못된 것이지요. 공수부대를 왜 보냅니까?

ㅇ 金吉弘위원

정치적인 행사가 언제나 그렇듯이 증인의 지지세력이 광주집회 또는 여타지역의 이 촉진대회준비를 위해서 사전에 대회 또는 시위계획 지역에 증인이 이끌고 있는 지지세력들을 파견한 적이 없읍니까?

ㅇ 증인 金大中

뭐 그렇게 특별히 지지세력을 파견한 일도 없고 또 아시다시피 제가 지방간 것은 경주는 金庾信장군 제사에 갔고 그렇기 때문에 거기는 [호텔] 식당에서 사람모아서 좀 얘기한 것 뿐이고 전주는 동학제에 갔기 때문에 제가 사람 모이게 할 필요 없고 그리고 덕산온천은 尹奉吉의사 제사에 갔으니까 거기도 사람 모을 필요 없이 모인 것이고 나머지는 학교 학생들이고 그렇지요.

ㅇ 金吉弘위원

본위원의 야당 취재 경험으로는 정당의 어떤 집회가 열리면은 사전에 정당요원들이 파견돼서 그 모임을 준비하는 것이 관례인 것으로 알고 있읍니다.다음 질문하겠읍니다.지난 80년 당시 계엄사는 증인께서 집권하면은 공천 또는 관직 및 이권을 준다는 구실로 막대한 돈을 걷어들여 이 가운데 일부를 학원소요 및 선동자금으로 사용했다고 발표한 바 있읍니다. 그것이 사실입니까?

ㅇ 증인 金大中

사실이 아닙니다.

ㅇ 金吉弘위원

증인 말씀대로 그러한 사실이 아니라면 당시 별다른 직업이나 재산이 없었던 증인께서 어떻게 생활을 꾸려 나가시고 또 정치활동 자금을 어떻게 마련을 하였읍니까?

ㅇ 증인 金大中

그렇게 공천 팔고 직책 안 팔아도 옳은 일 하고 있으면 또 옳은 일하는데 도와주는 의로운 사람도 있읍니다. 그래서 우리들도 큰 돈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그런 도와주신 돈 갖고 살고 또 제 아내가 조금 저축도 있었기 때문에 그것도 쓰고 그런 것이지요.

ㅇ 金吉弘위원

당시 증인께서 주변에 비서를 몇명씩 두시고 또 두 세대의 승용차를 사용하신 것만 봐도 한달에 최소한 몇 천만원정도는 필요하셨을텐데 그러한 자금이 과연 한 두사람의 지원으로 가능할 수 있었다는 말씀이십니까?

ㅇ 위원장 文東煥

광주와 관계있게 질문해주세요.

ㅇ 증인 金大中

그런데요. 그것 참 광주와 관계없는데……

ㅇ 위원장 文東煥

그것은 너무 사사로운 얘기가 되기 때문에……

ㅇ 金吉弘위원

위원장! 본위원이 질문할 때만 광주하고 관계없는…… 얘기를 말씀하셨는데 아까 오전 회의에서 동료위원들도 수차 의제외의 발언을 많이 한 바 있읍니다. 그때는 제지를 안하시고 본위원이 발언할 때 제지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ㅇ 위원장 文東煥

지금 시간도 없고 해서……

ㅇ 증인 金大中

됐읍니다. 제가 간단히 하겠어요. 저도 말 많이 하고 싶지 않으니까요.아까 말씀같이 그런 최소한도의 생계비는 도와주는 사람도 있고…… 그랬었고 저는 비서와 경호원들은 사실 그런 5·17때도 거기 잡혀가서 참 발가벗겨 가지고 고문당하고 제가 빨갱이라고 시인하라고 해서 구타당해 가지고 몇 바늘씩 꿰매고 그렇게 했지만 그 사람들이 평소에 저하고 일할 때는 돈도 안 받고 정말로 동지적으로 봉사한거지 저한테서 특별히 보수받은 것 없읍니다.

ㅇ 金吉弘위원

5·18 당시 계엄당국의 분석과 당시 신문의 보도내용에 따르면은 광주에서 전남대학생들의 시위가 가장 격렬했다고 보는데 증인께서는 그 원인을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ㅇ 증인 金大中

잘 모르겠는데요. 저는 그때는 벌써 이미 중앙정보부에 있었고요 잘 모르겠는데요.

ㅇ 金吉弘위원

증인께서는 당시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공동대표인 尹潽善 전 대통령 咸錫憲씨 증인께서도 공동대표이신 것으로 알고 있읍니다. 이런 분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학생들은 국민연합에 가입하도록 하였읍니다.예를 들면 張琪杓 이현배 조성우 沈栽權 이런 분들입니다. 이런 학생들을 국민연합에 가입시킨 것이 사실입니까?

ㅇ 증인 金大中

그건 사실이 아닌데요. 저는 그분들을 거기에 가입시킨 일이 없고 국민연합에 저는 상임공동대표지만 尹潽善선생이나 咸錫憲선생이 그 사람들의 가입을 반대했다는 말씀도 못들었고 그때는 또 文益煥선생이 국민연합에 상임위원장으로서……

ㅇ 金吉弘위원

중앙위의장이지요.

ㅇ 증인 金大中

예 집행위원장인가요? 그걸로서 실무를 다하고 계셨기 때문에 누구를 가입시켰는지는 모르겠는데요.

ㅇ 金吉弘위원

張琪杓씨는 그 당시 조직국장이었고 이현배씨는 총무국장 조성우씨는 중앙위원 沈栽權씨는 홍보국장으로 일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읍니다.

ㅇ 증인 金大中

예. 그랬을 것입니다.

ㅇ 金吉弘위원

증인께서는 자신과 국가의 내일을 위해서 한창 공부에 전념해야 할 이러한 대학생들이 기성 정치권에 뛰어든데 대해서는 평소에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ㅇ 증인 金大中

그것은 대학생도 이미 성인이고 투표권이 있고 또 가장 애국심이 강하고 또 가장 국가의 현재와 장래를 걱정하는 사람들이니까 朴正熙씨와 같이 그런 명분없는 유신독재 가지고 그래가지고 국민을 자유 권리를 억압하고 부를 소수에게 집중하고 노동자 농민을 탄압하고 그리고 통일에 대한 양심적인 어떠한 노력도 말살하고 그런 것을 보고 그 사람들이 막연히 학교에서 공부만 하고 나는 학생이니까 세상이 어떻게 돼도 모른다면 그런 젊은이 밖에 없는 나라라면 그 나라는 나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ㅇ 金吉弘위원

질문시간이 5분밖에 남지 않아서 광주사태와 관련한 지역감정 문제를 말씀드리겠읍니다.88년 2월 민주화합추진위원회가 건의한 보고서 중에는 광주사태가 우리 사회에 잠재하고 있는 지역감정 때문에 확대되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지역감정을 더욱 심화시키는 요인이 된 점을 지적하고 있읍니다.또한 80년 5월 계엄사 작전일지에서도 광주사태의 배경 가운데 한 요인으로 지역감정의 문제를 들고 있읍니다.이처럼 광주사태와 지역감정의 상관성은 여러 측면에서 입증되고 있읍니다.증인께서는 광주사태와 지역감정이 서로 관련이 있다고 보십니까 아니면 없다고 보십니까?

ㅇ 증인 金大中

지역감정은 아시다시피 광주사태 이전에 있었고 만일 그것이 관련이 있다면 지역감정이 광주사태를 좀 조장한 면이 있다고 보지 광주사태때문에 지역감정이 더 악화됐다고 하는 것은 본말전도라고 생각합니다.이 지역감정은 아까도 말하다시피 朴正熙씨가 정권 잡아가지고 이 경상도와 전라도 양쪽 사람들을 이간시키기 위해서 조작한 그것에 불행하게도 일부 사람들이 말하자면 영향을 받아서 이렇게 오늘날까지 된 것이지 다른데 원인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ㅇ 金吉弘위원

현재 야권에서 주장하고 있는 광주사태의 발생 요인을 보면 대략 계엄군의 강력 진압행위라든지 또는 군부가 집권의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서 조작한 것이라는 두 가지 주장으로 요약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당시 계엄확대와 더불어서 서울 부산 대구 전주 대전등 전국적으로 계엄군이 진주하여 신속하게 사태를 진정하고 질서회복을 시켰읍니다마는 유독 광주에서만 유혈사태가 발생하였읍니다. 이같은 현상이 지역감정과 연관이 있다고 보지 않습니까?

ㅇ 증인 金大中

지역감정 보다도 제가 체포됐다는 말을 듣고 "金大中석방" "全斗煥 물러가라" "계엄령 해제하라" 이렇게 세가지가 주 [슬로건]으로 했다고 그러니까 그런데 원인이 있었다고 봐야지요.

ㅇ 金吉弘위원

마지막으로 질문드리겠읍니다.지역감정이 오늘과 같은 지경에 이르기 까지에는 여러가지 원인이 있겠읍니다마는 1971년도 제7대 대통령선거에서 영남출신인 朴正熙후보와 호남출신인 증인이 후보로 나서게됨으로써 지역감정이 실제로 대두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각종 선거에서 지역감정은 찾아보기 힘들었읍니다.예를 들어 李鍾南씨 曹在千씨 또 유석 趙炳玉선생 등이 이런 분들이 전남 또는 충청도 출신 인사이지만은 부산이나 대구에서 당선됐을 정도입니다.증인 자신도 출신지가 아닌 강원도 인제에서 당선되셨고 함경도출신인 鄭重燮씨라는 분이 목포에서 당선되었지요?

ㅇ 증인 金大中

그렇습니다.

ㅇ 金吉弘위원

본의든 본의가 아니든간에 증인께서는 우리 민족의 크나큰 불행의 씨앗이 되고 있는 지역감정의 심화에 스스로 책임이 있다고 보십니까 없다고 보십니까?

ㅇ 증인 金大中

그런데 지금 질문하신 金위원께서 조금 잘못 기억하고 있는 점이 있는데요. 李鍾南씨가 부산에서 당선되고 曹在千씨가 전라도 분인데 대구에서 당선되고 또 趙炳玉박사가 충청도분인데 대구에서 당선되고……

ㅇ 金吉弘위원

안동에서 또 任永信씨가 당선됐읍니다.

ㅇ 증인 金大中

또 상주에서 전라도 분인 洪正杓씨가 당선되고 반면에 경상도 분인 강성명씨가 저희 목포에서 당선되고 경상도분인 嚴敏永씨가 전주에서 당선되었읍니다. 이 모든 것은 자유당과 민주당때의 얘기이고 朴정권 된 이후의 얘기가 아닙니다. 朴정권 된 이후 이 지역감정을 조작해가지고 이런 좋은 말하자면 지역을 초월해서 국회의원 당선시키고 하던 이 문제는없어져 버렸고 또 하나 첨가하면 朴正熙씨가 63년에 대통령이 될 때 그때 朴正熙 후보는 서울 강원도 경기 충북 충남 다 졌읍니다. 전라도하고 경상도에서만 이겼읍니다.전라도에서 35만표를 이겼읍니다. 그때 朴正熙씨가 겨우 15만표로 이겼는데 만일 전라도에서 안이겼으면 틀림없이 졌읍니다. 그런데 그렇게 은혜를 입고도 朴正熙씨가 지역을 차별했기 때문에 그 때부터 지역감정이 생긴 것이지 그 이전에는 없었기 때문에 이것은 전적으로 군사독재정권이 자기네들의 집권 야욕에 의한 지역 차별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ㅇ 金吉弘위원

본위원의 질문 요지를 잘못 이해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오늘날과 같이 지역감정이 악화된 것은 증인에게는 책임이 하나도 없다는 말씀인지 조금은 있다는 말씀인지 그것을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ㅇ 증인 金大中

저는 없지요. 朴正熙씨가 있지요.

ㅇ 金吉弘위원

장시간 수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ㅇ 위원장 文東煥

다음은 민주정의당의 李敏燮위원이신데 아시는대로 시간은 많이 흘러갔고 아직도 해야 할 과업은 산적해 있읍니다.우리 李敏燮위원은 간사이기도 해서 여유있게 하실줄 압니다마는 초점을 맞추시고 반복을 피하셔서 정말 5·18 광주사태 진상을 규명하는 그 일에 협조해 주실 줄 믿습니다.부탁합니다.

ㅇ 李敏燮위원

李敏燮위원입니다.방금 동료 金吉弘위원도 말씀이 있었읍니다마는 우리가 역사적인 진실추구작업을 해 나가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우리 본특위가 하고 있읍니다.이러한 특위를 운영하는데 있어서 위원장께서는 좀 더 공정한 그런 사회를 봐 주십사하는 것을 먼저 촉구를 드리고 질문을 하고자 생각을 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의제외의 발언 여부가 나오는 이유는 우리 증인으로 나오신 金大中총재께서 광주사태와는 관련이 되어 있지마는 당시에 현장에 안 계셨기 때문에 또 제1야당을 이끌어 가시는 그러한 총재이기 때문에 그 사태 이전의 문제를 우리가 밝히고 또 그 80년 봄에 일어났던 일과 아울러서 우리 증인이 관련되셨던 그 사건을 다루기 때문에 얘기가 좀 산만하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 신문요지를 댁으로 보냈을 텐데 거기에는 분명히 이러한 포괄적인 말씀을 다 듣기로 이렇게 요지가 가있는 것으로 알아서 그렇게 좀 양해를 해주시기를 바랍니다.먼저 증인께서 말씀하신 한 두 가지 시국관 내지는 상황을 보는 시각에 관해서 말씀하신 것을 토대로 여쭈어 볼까 생각을 합니다.80년도 서울의 봄이 매우 순조롭게 평온한 가운데 민주화가 잘 이루어져 가고 있는데 어떤 정권을 획득하기 위한 의도적인 기도로서 모든 것이 전개 되어 나갔다 하는 것으로 저희는 증인의 말씀을 이해를 하고 있읍니다.그중에 아까 말씀하신 것중에 5월15일 서울 남대문 앞에서 벌어졌던 5만 내지 10만 군중의 모임의 성격을 우리가 정확히 짚어야만 5·17과 5·18의 진단이 이루어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합니다.

당시의 상황을 보면 저도 그 당시에 현장을 가보았읍니다마는 4·19못지 않게 엄청난 그러한 위기감을 조성하는 대군중집회였읍니다.이때 [도큐호텔] 쪽에 있는 언덕에서 서있던 [버스]를 기아를 빼고 시위 군중들이 타고내려가 돌진하면서 순식간에 막고 있는 전경을 밀어서 한명이 죽고 칠팔명이 부상 당한 행위였읍니다.이것을 증인께서는 조작된 행위다 이렇게 아까 말씀하셨는데 이러한 조작이 과연 가능했겠는가 이런 것을 한번 다시 여쭈어보고 싶읍니다. 이것은 제가 보기에 광주사태에 있어서 도청앞에서 시위군중들이 [버스]를 타고 돌진해서 도청으로 들어가서 거기서 그때 방위하던 군이 사망한 그러한 사건이 있었읍니다. 그러면 이러한 사건 당시에 그 [버스]를 몰고 질주한 사람을 과연 시위군중이 누가 잡고 어느 경찰이 그것을 잡을 수 있겠는가 남대문앞에서의 시위도 전경이 깔려 죽는 입장에서 그 범인이 안 잡혔다고 그래서 이것이 조작의 가능성이 많다고 하신 것은 좀 편견이 아니신가 해서 그 문제에 관해서 보시는… 그 5월15일의 집회성격이 그렇게 평온한 가운데 참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듯한 그러한 시위였고 따라서 우리가 위기감을 조성할 필요가 없는 그러한 분위기였던가 하는 데에 대해서 말씀해 주세요.

ㅇ 증인 金大中

먼저 그 시위에 대해서 얘기하면요. 그 시위는 너무도 너무도 오랬동안 계엄령 해제를 기다리다가 이제 더이상 참기 어렵다는 그 사람들의 행동이었다고 볼 수 있고 따라서 그 사람들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계엄령 해제시키고 평화적인 선거로 들어가는데 있었지 폭력으로 정권 뒤집는데 있지 않았읍니다. 그것은 5·17후 어떠한 수사에도 그것이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그리고 그 당시 전경 뿐 아니라 사복경찰이 그런 시위에는 쫙 깔려 있는데 [버스]안에서 운전석에 앉아서 차를 운전해서 밀고 가고 사람을 죽이고 [버스]의 문을 열고 나온다 하면 경찰들이 그것을 못잡을 리가 없읍니다. 그런데 그 때도 이미 이것은 말하자면 계엄사의 사람들이 조작해서 한 것이다 하는 말을 했었는데 그 후로 제가 여러번 그런말을 들었읍니다. 그것 조작한 것이었다고… 제가 증거는 없으니까 딱 아까 조작한 것이라고는 하지 않았읍니다. 그런 혐의가 짙다 이렇게 말을 했는데 지금 이 나라는 유신이전도 그랬지만 이후에 얼마나 많은 범죄자를 고문과 기타의 방법으로 조작을 했는가 또 얼마나 많은 소위 말하는 [사꾸라]를 학원이나 정치계에 침투시켰는가 생각해 볼때 그런 일에 있어서는 이 군사정권들이 국민으로부터 의심받는 것은 나는 능히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ㅇ 李敏燮위원

예. 알겠읍니다.전경을 이렇게 상해시키는 그런 조작도 가능할 수 있는 그런 환경이었다 그런 말씀으로 제가 이해를 하겠읍니다. 또 하나는 80년봄 서울에 또 전국의 학생들의 모든 움직임이 지금 증인께서 말씀하는 그러한 참 질서 있는 가운데 전개된 면.도 없지 않아 있다고는 봅니다마는 전반적으로 점차적으로 이것이 가열화되고 점점 강도가 높아졌던 것으로 압니다. 그리고 증인께서는 아까 말씀하시기를 5월16일에는 조용했는데 이러한 5.17조치가 난 것은 이것은 어떠한 의도적인 것이 아니냐 하는 그런 논리로 말씀했읍니다. 저는 여기서 5·17조치의 얘기보다는 이 학생들이 그당시 5월13일 부터 15일까지 격렬한 시위를 전국적으로 서울을 중심으로 벌였고 5월l6일은 이화대학에서 자기네들이 앞으로의 활동방향을 의논하기 위해서 소강상태에 들어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20일 전국적인 이것은 학생차원이 아닌 학생 노동자 농민 정당 사회단체 범 국민적인 규모의 집회를 갖기로 계획하는 그 시기가 5·16이었읍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폭풍전야의 정적과 같은 이러한 상황을 평온한 상황이었다고 보시는 그 시각이 너무 참 안일하신 것이 아니었던가 그러한 생각도 저는 해 봅니다.

그래서 5월에 학생들의 모든 움직임이 20일을 기해 가지고 폭발적으로 이것이 터지게 되어 있었읍니다. 그래서 증인께서도 학생들과 당시 沈栽權씨가 대학생들 모임에서 20일로 이렇게 날짜를 대충 의견이 교환이 되고 그것을 16일 북악[파크호텔] 521호실에서 다시 의논할 때 당시에 崔圭夏대통령의 어떠한 조치가 있을지 모른다 여러가지 의견이 있어서 또 아까 말씀한 대로 22일로 결정을 했다가 다시 이것을 가지고 이화대학에서 모이는 학생들 모임에 간 결과 거기서 이미 우리가 20일로 결정했는데 22일로 이렇게 되면 곤란하지 않느냐 해서 다시 그 문안이 와서 발표가 될 때에는 증인은 22일로 고치셨지만 20일로 발표돼서 학생들의 당초 계획대로 이렇게 나간 것으로 이해를 하고 있읍니다. 이러한 것을 볼때 20일은 정말로 그당시의 상황을 경험해 본 사람들은 어떠한 것이 터질지 모르는 매우 불안한 상황이었다 하는 것을 지금도 기억하는 국민들은 많이 있을 것으로 압니다. 그래서 이러한 그 당시를 보는 시각에 대해서 잠깐 여쭈어 봤읍니다.

ㅇ 증인 金大中

그런데요 그 학생들이나 그때 야당이나 재야가 요구한 것이 이것입니다. 계엄령 해제해라 정치일정을 분명히 밝혀라 이것이 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만 밝히면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 정당한 요구입니다. 그런데 그 정당한 요구를 듣지 않고 말하자면 시일을 7·8개월이나 천연시키니까 그런 문제가 생겨난 것입니다.그리고 또 그 당시 학생들의 5월14일부터 시위로 보더라도 어떠한 폭력을 써 가지고 파괴하거나 방화한 일이 없읍니다. 그러던 학생들이 16일 시위를 중단하면서 정부 태도를 보겠다 그래 가지고 정부와 국회의 하는 것을 보고있기 때문에 만일 5월20일 시작된 국회에서… 물론 그 이전에 양당 당수가 합의해 가지고 이번에 여기서 계엄령 틀림없이 해제한다 이렇게 발표했다면 학생들이나 우리가 굳이 집회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는 그렇게 정당하게 시국을 안 풀어간 정부에 책임이 있는 것이지 7개월이나 기다리다가 이제 집회해 가지고 혹은 시위해 가지고 그렇게 해 주시오한 학생이나 재야에 책임이 있다고는 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ㅇ 李敏燮위원

사태를 그렇게까지 몰고 간 정부에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어떤 학생들의 요구에 정부가 그것을 들어 주지 못했을 경우에 어떤 폭발적인 움직임이 발생한다 하는 문제는 우리가 생각할 때 그 사태의 결과에 대해서 우려하는 그러한 국민이 많았다 하는 얘기입니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다음에는 광주문제에 관해서 당시 계시지를 않았기 때문에 질문이 거의 안 나옵니다마는 워낙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유언비어에 관해서 한 가지만 어떻게 이해하고 계신지 여쭈어 보겠읍니다.광주 당시의 상황 발생이 지역감정의 문제도 상당히 영향이 있었을 것이고 또 우리 증인께서 구금되신 문제도 상당히 자극을 주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또 광주사태가 급속도로 악화된 데는 무엇보다도 유언비어가 매우 신속히 또 그리고 조직적으로 유포된 데도 큰 원인이 있다고 생각을 하는데 증인께서는 어떻게 생각을 하십니까?

ㅇ 증인 金大中

저는 유언비어보다는요 그런 유언비어가 발생한 원인은 진압부대들이 참으로 미안한 표현이지만 야만적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그런 진압방법 마구 부녀자들을 찌르고 어린애를 죽이고 사람이 도망가면 집안에까지 쳐들어가서 죽이고 심지어 집안에서 가족하고 조용히 있는 사람까지도 가서 죽이고 또 죽은 시체를 여러분이 [비디오]를 보셨다니까 알지만 질질 끌고 다니고 이러고 막 발길질하고 이런 참혹한… 제가 지금 얘기한 것은 아마 그 실정의 10분지 1도 못될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보니까 광주시민들이 격분하게 되고 또 그런 유언비어가 생기게 된 것이지 유언비어 자체 가지고 그렇게 되었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사태는 저는 거꾸로라고 생각합니다.

ㅇ 李敏燮위원

예. 그 문제에 관해서 하나만 더 묻겠읍니다.그 유언비어가 발생한 시기를 보면 인명살상이 시작되기 전인 첫날인가 18일로 기억을 합니다마는 그 날부터 이미 대검으로 어떠한 피해를 입었다는 이런 유언비어가 나돌기 시작을 하고 또 그것이 점차 처녀계층 또 부녀계층 이런 각계각층으로 그 유언비어가 그 피해상황이 물론 많이 나돌았읍니다. 이런 현상에 대해서 증인께서는 이것이 우연히 어떤 사태발생의 근거에 의해서만 나왔다고 보는지. 아니면 그 당시에 어떠한 그런 의도적인 생각을 가지고 이런 것을 만들었는지 이런 것에 대해서는 한번 생각을 해 보시지 않았는지요?

ㅇ 증인 金大中

그런데요 어느 사회든지 유언비어는 있게 마련이고 또 그런 긴장된 싯점에서는 더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지금 李위원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유언비어가 그런 대량살상이 시작되기 전이라면 만일 대량살상을 안했으면 그런 유언비어는 힘을 쓰지 못합니다. 그런데 대량살상을 하고 그런 말하자면 난폭한 행동을 하니까 유언비어가 기승을 부리게 된다 그래가지고는 더 효과를 내게 된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ㅇ 李敏燮위원

예. 알겠읍니다. 지난 대통령선거 때 보아도 서울 구로구청농성사건 때 순경들이 학생과 시민을 몰살시켜서 [트럭]으로 실어내고 있다 또 건국대학사태 때도 사망자 숫자가 시시각각 대자보로 나붙고 이러한 유언비어의 무시 못할 파급력 내지는 상상력 이런 데 대해서는 저도 인정을 합니다.그러면 이런 유언비어가 어느 쪽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다시 말해서 조작이라면 표현이 좀 점잖지 못합니다마는 極端的으로 말한다면 광주의 당시 상황을 악화시키기 위해서 어느 다른 쪽에서 만들었다고는 생각을 안해 보셨는지?

ㅇ 증인 金大中

저는 그 당시 상황을 현장에 없었으니까 자세히는 모르겠읍니다. 모르겠으나 아까 말씀과 같이 유언비어는 그런 혼란기에는 있기 마련인데 그런 유언비어가 만일 그 다음에 그런 살상이 없었으면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을 것이다 생각합니다. 아까 구로사건도 부정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유언비어가 또 그런 가혹한 탄압을 해서 해산했기 때문에 그러지 않았겠느냐 하는 일반적인 심리에 파고들어가서 효과를 낸 것이고 건국대학사건도 수천명의 학생을 체포하면서 이것을 전부 공산분자다 용공도 아닌 공산적색분자다 이렇게 몰아가지고 터무니 없는 누명을 씌워 가지고 그런 진압을 했기 때문에 그런 유언비어도 나온 것으로 생각합니다.

ㅇ 李敏燮위원

알겠읍니다. 그 원인행위에 대해서는 물론 이해를 합니다만 그것이 그렇게 가공할 과장내지는 증폭된다는 것이 유언비어의 가장 무서운 속성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이 듭니다.다음 우리 진상조사특위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될 수 있는 것이 발포경위의 규명입니다.이 문제에 관해서 아까 증인께서는 全斗煥전대통령이 발포명령자로 이렇게 떠오르고 있다 이런 말씀이 있어서 다시 한번 발포명령과 군에서 자위권발동의 개념이 어떻게 다른 것인지 그것을 한번 증인께서 아시면 한번 설명을 해주시면… 같은 것인지 다른 것…

ㅇ 증인 金大中

그러니까 발포명령은 자위권발동을 위한 발포도 있을 수 있고 또 자위권 아닌 공격목적으로 발포할 수도 있읍니다. 그런데 광주사태는 제가 쭉 확인한 바로는 자위권을 위해서 발포한 것은 아니고 광주시민을 의도적으로 탄압해가지고 그래가지고 말하자면 겁을 주고 이렇게 해서 진압을 하고 했는데 광주시민의 저항이 뜻밖에도 너무 커가지고 사태가 상당히 커지니까 더 많은 발포를 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보는데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광주에서의 발포는 정당한 자위권이었다고는 보지 않고 이것은 어디까지나 이 정권을 쥐고자 하는 全斗煥씨 세력들이 광주라는 체포한 金大中과 특수관계가 있는 그 지역에서 시민들을 도발해가지고 문제를 일으키고 따라서 그 총기발사는 불법적이고 자위권 행사가 아닌 무고한 시민들에 대한 불법적인 발사행위였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ㅇ 李敏燮위원

알겠읍니다. 제가 알기로는 21일 저녁 7시 30분 계엄사령관이 자위권을 보유했다는 천명을 하고 이어서 그날 저녁에 전남북 계엄분소에서 자위권 발동지시가 있었고 또 그 다음날 2군사령부와 계엄사령부 모두 자위권발동지시가 정식으로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만. 이것은 조사과정에서 저희가 규명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아까 말씀하시기를 全斗煥 전대통령이 그 당시에 보안사령관으로서 이러한 발포에 관해서 모르고 있을 리가 없다 이런 말씀을 했읍니다. 그래서 이것은 발포의 상황을 갖다가 사후에 보고를 받고 아니면 그 과정에서 보고을 받아서 인지하는 아는 문제 즉 알고 있는 문제인지 아니면 현재의 상황을 시시각각 최고책임자가 파악을 해서 발포명령을 했다는 것인지 그것이 분명치를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러면 최고의 발포명령자면 이것이 현지의 상황을 파악해야 될 것이고 그 파악과 동시에 신속히 그것이 위에 부달되서 발포하느냐 안 하느냐 하는 것이 순간적으로 이루어져야 되는 이런 굉장히 기술적인 것을 요하는 문제인데 이것이 이러한 발포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는 그 추정으로써 최고 발포명령의 확증을 거증하기에는 여러가지 보완보강의 증거가 필요하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을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ㅇ 증인 金大中

아까 제가 말씀했는데도 모를리가 없다. 그것 하나가지고 얘기한 것은 아니고 당시 보안사령부는 합동수사본부장을 사령관이 겸하고 있어서 거기에다가 중앙정보부장까지 겸하고 사실상 우리나라 국권을 쥐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때이기 때문에 입법부만 빼놓고는 사법부 행정부가 다 실질적으로 그 사람 손아귀에 들어갔고 나중에는 입법부까지 지배했지만… 그런데 광주의 505부대라는 보안사령부의 그 지소를 가지고 있어가지고 이것이 그 당시에 광주의 그 모든 군 부대나 이 정보기관을 총 지휘하는 실질적으로 총 지휘하는 그런 기관이었읍니다. 그렇게 되어 있었고 해서 그것이 어느 순간에 한시간 두시간의 발포라면 모르지만 적어도 열흘을 두고 계속된 발포인데 이것을 그당시에 실질적인 이 나라 실권자요 이 모든 수사기관의 총 책임자가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또 그것에 대해서 아무 판단도 안 내렸다. 이러면 아마 삼척동자라도 웃을 것입니다.거기에다가 머지 않아서 어느 사람이 발표할 것으로 봅니다마는 그당시 그 지방기관에 있었던 사람이 증언한 바에 의하면 그 기관에서는 수시로 본부에 당연한 얘기지요. 全斗煥사령관하고 계속 전화로 연락을 하고 또 사람이 올라왔다 내려갔다 했다는 것입니다.그리고 鄭鎬容장군은 서울과 광주를 말하자면 왔다갔다 하면서 이래가지고 全斗煥씨하고 협의하고 현지에 내려왔고 또 이렇게 해서 결국에 이 모든 것을 말하자면 지휘하는 그러한 입장에 있었읍니다.이런 여러가지를 종합해서 全斗煥씨가 그당시 발포의 실제적인 책임자였다. 이것은 저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ㅇ 李敏燮위원

저는 그 당시 全斗煥보안사령관 실권자였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었을 것이다 하는 그런 것으로 이해를 하겠읍니다.이 발포의 경위는 앞으로 조사가 되겠지만 우리 군조직법에 의해서 그 계통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그 모든 과정이 정확하게 다 파악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을 해서 이 발포명령자와 자위권의 발동 소위 발포명령과 자위권의 발동에 관해서 우리가 정확하게 이해를 하는 것이 우리 진실추적의 가장 중요한 과제가 아닌가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ㅇ 증인 金大中

그런 의미에서도 오늘 여기에 崔圭夏 전대통령과 全斗煥 전대통령이 나와서 둘중에 과연 누가 발포에 대해서 그 당시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했고 이렇게 했느냐? 만일 그 당시에 崔圭夏씨가 실질적인 힘이 있었다면 능히 이것을 대통령권한으로써 제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그렇기 때문에 두분이 안나온 것이 지극히 유감이라고 생각합니다.

ㅇ 李敏燮위원

이제 한두가지만 묻겠읍니다.미국의 개입문제에 관해서 어느정도 이해를 하고 계신지 당시 한국군의 이동이나 진압작전에 있어서 미국이 개입이 되고 있다 하는 문제에 대해서 어느정도 이해하시는지 알고 계신지를 묻고 싶습니다.왜냐 하면 아까 보니까 2군이 한미연합사 산하에 있었다 이런 말씀을 하셨는데 이것도 2군과 3군 이것이 2군은 여하튼 한미연합사 산하에 있지 않았던 것으로 이렇게 또 이해가 되고 있고 그래서 또 공수부대를 왜 현지에 그렇게 파견했느냐 다른 부대도 있는데 하는 문제에 관해서 미군의 개입문제와 관련이 되어 있어서 말씀드립니다마는 당시 공수여단은 한미연합사의 지휘체계하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신속히 이동이 가능해서 이 부대를 배치했다는 그런 당국의 입장이 있는 것으로 이렇게 이해를 합니다.다만 구체적으로 미국의 개입이 예를 들어 어느 사람의 발언을 인용하시는 것보다는 어떤 구체적인 증거같은 것을 알고 있는 것이 계시면 말씀을 좀…

ㅇ 증인 金大中

제가 말씀드릴 것은 미국이 법적으로 개입했다는 것을 강조한 것은 아니고 논리적으로 얘기하면 2군은 미군산하에 있고 광주에 갔던 공수부대는 논리적으로 얘기하면 31사단 지휘하에 있고 이렇기 때문에 31사단은 또 2군관할하에 있고 이렇기 때문에 법적으로 연결해 보면 미국이 법적으로 책임이 꼭 없다고 할 수 없다. 제가 군출신 장군한테 확인한 바에 의하면 2군은 한미연합사산하에 있다고 말씀해 주었읍니다. 저는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그 분들 말씀 듣고 했는데요. 그런데 제가 아까 더 강조해서 얘기한 것은 그런 문제보다는 당시 어쨌거나 한미연합사의 사령관이요 또 우리나라 군사지휘자에게 대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있었고 또 정부에 대해서도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미국 이 미국이 적어도 한국사람들의 눈으로 볼때 가시적으로 그런 참상이 10일 가까이 전개되고 있는데 이것을 최선을 다했다는 그런 노력을 안한데 대해서는 대단히 유감이다. 그러한 한국사람들의 참 원망이랄까 그런 기대에 벗어난 미국의 태도가 결국 반미감정을… 말하자면 광주의거이후로 잃게 된 것이다 이런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ㅇ 李敏燮위원

마지막으로 한가지만 말씀드리겠읍니다.그런 광주의 비극적인 사태가 발생한 것은 우리 모든 국민의 아픔이고 또 우리 역사의 아픔이기도 합니다.다만 이런 아픔들이 빨리 치유되고 또 그러한 모든 광주시민의 명예가 되돌려지고 회복되는 이것이 다만 우리 정치권에서 참 이용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본위원의 소망입니다.어디까지나 진실규명은 진실추적을 통해서 실체적인 진실을 규명하는 것으로서 역사에 기록이 되어야 할 것으로 봅니다.앞으로 이 광주의 진상문제에 대해서는 앞으로 치유대책을 마련하는데 있어서도 제1야당을 끌고 가시는 총재이신 만큼 우리가 정말 인간화합의 차원에서 또 비정치적인 차원에서 이 문제가 지혜롭게 이렇게 매듭지어지는데 우리 증인께서 앞장서 주실 것을 말씀드리면서 신문을 마치겠읍니다.

ㅇ 위원장 文東煥

고맙습니다. 지금 여기 적혀있는 대로는 민주정의당의 鄭昌和위원과 역시 민주정의당의 李肯珪위원 두사람의 이름이 여기 적혀 있읍니다.([鄭東鎬위원도 있읍니다.]하는이 있늠)鄭東鎬위원의. 이름은 여기 없는데요.그러면 다음은 鄭昌和위원입니다.([鄭東鎬위원하고 순서가 바뀌었어요]하는 이 있음)

ㅇ 趙洪奎위원

위원장님! 진행에 관해서 말씀 드리겠느데요 특정정당만 계속 하는 것에 대한 배경설명을 해주셔야 알지…

ㅇ 위원장 文東煥

예. 다른 당에서는 지금 발언이 다 끝났읍니다.그래서 이제 민주정의당만 남았는데 다음에 鄭東鎬위원께서 말씀하시는 동안에 간사님들 우리 앞으로 할 일이 많은데 간사님들이 모이셔서 혹시 이것을 빨리 조속히 끈낼 수 있는 방법이 있겠는지 의논해주시기를 부탁합니다.그럼 다음 鄭東鎬위원께서 말씀하시되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은 이미 민주정의당만 남았기 때문에 그러는데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끝내서 우리 다음 증인의 얘기를 듣도록 협력해 주시기를 부탁하는 것입니다.그러면 鄭東鎬위원 질문해 주십시오.

ㅇ 鄭東鎬위원

민주정의당의 鄭東鎬입니다.본위원이 오늘 준비한 질의내용은 앞에서 신문하신 동료위원들과 많은 부분이 중복되었읍니다.그렇기 때문에 몇가지에 대해서만 간략하게 질의하겠읍니다.본위원이 질의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몇가지만 짚고 넘어가겠읍니다.증인께서 오전 답변하시는 가운데 崔圭夏전대통령중동순방은 아무 명분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보내놓고 정권을 탈취하기 위한 음모를 꾸민 것이 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본위원이 알고 있기는 당시 전 崔圭夏대통령은 5월15일부터 15일간 [사우디 아라비아] [쿠웨이트] 공식방문은 우리 국가로서는 첫번째로 중동지역방문인 것입니다. 그의 배경은 78년도말 [이란] 사태후에 세계의 원유수급사정이 매우 악화되어서 79년과 80년도 석유파동이 일어났읍니다.이로 인해서 국내유가인상이 1년 사이에 무려 105.9% 인상되었읍니다.따라서 이로 인해서 16년만에 처음으로 [마이너스] 6%라는 경제성장을 기록 하였읍니다.또한 도입선이 중동에 의존되어서 원유공급안정을 위한 문제는 시급한 상황이었읍니다.그 성과로써 원유안정공급을 확약받았읍니다.또한 [사우디아라비아]와는 3,000억불 상당의 경제개발 합작자본 기술협력을 받아 냈읍니다.이러한 뚜렷한 명분이 있었던 것입니다.그러면 과연 증인께서 명분없이 보냈다는 중동순방과 본위원이 알고 있는 것과 어느 것이 맞는 것인지 말씀해주십시오.

ㅇ 증인 金大中

한 나라의 대통령이 외국가는 것이 전혀 의미없이 간 것은 아니겠지요.그런데 제가 아까 말씀한 것은 그 당시 그렇게 미리 계획도 안되었던 것을 갑자기 만들어서 간 것이다. 그렇게 말했는데 그런 [사우디아라비아]하고 석유공급이라든가 흑은 기타 계약은 국무총리가 가도 되고 또 외무부장관이 가도 될 수가 있읍니다.그런데 국내정치문제는 5·17확대계엄을 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정부측에서 보면 그렇게 시국이 급박해 가는데 대통령이란 분이 불과 몇 일 앞을 안내다보고 이 나라의 그런 국내가 급박한 것을 놔두고 나라를 비우고 거기에 갔다 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판단이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요.제 판단은 제가 들은 정보로는 그렇게 대통령을 그 쪽으로 보내놓고 이 全斗煥씨 중심으로 한 군인들이 자기들의 그 탈권의 준비를 착착 진행시켰다 저는 그렇게 알고 있읍니다.

ㅇ 鄭東鎬위원

아무 계획없이 갑작스럽게 중동을 순방했다는 것은 친구와 친구사이에 옆집에 놀러가는 것과는 다릅니다.이것은 사전에 이미 일국의 국가원수가 타국가의 원수를 순방한다는 것은 치밀한 사전에 계획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항입니다. 이것은 고 朴대통령이 이미 중동순방계획을 세웠던 것을 실현한 것입니다.그렇기 때문에 국가와 국가간의 순방에 대한 약속은 국가원수는 꼭 지켜야 할 상황이었다는 것을 제가 말씀드립니다. 다음으로 넘어가겠읍니다.

ㅇ 증인 金大中

그런데요 그레 그렇습니다. 어느 나라에서 초청을 받으면 1년전 2년전에 받지요.편리한 시간에 가는 것이지요.그런데 그때 5월 그 무렵에 간 정도의 계획이 정부에 미리 없었는데 갑자기 계획을 세워서 갔다는 것이지 아무 계획없이 갔다는 것은 아닙니다.그런데 아까도 말하다시피 [타이밍]이 국내가 그렇게 중요한데 국내문제는 해결안하고 나라의 대권을 맡은 분이 중동에 갔다는 것이 결과적으로 보더라도 잘못된 것이 아닙니까?그러니까 도중에서 다 못하고 돌아왔지요.

ㅇ 鄭東鎬위원

앞서 본위원이 말씀한 바와 같이 우리나라의 배경에 대해서도 말씀을 했고 성과에 대해서도 말씀했읍니다.됐읍니다. 다음 넘어 가겠읍니다.마치 증인께서는 왜 하필 광주에만 공수부대를 강한 부대를 투입했느냐 이러한 말씀을 한 바 있읍니다.북괴의 전략은 원래 기습전입니다.가장 충격적인 요법인 기습전입니다. 또 속도전입니다.아울러서 과거의 전쟁과는 달라서 전국토를 전장화시켜서 제2전선 제3전선 심지어는 제 5전선까지도 형성해서 전쟁을 도발할려는 꿈을 버리지 않고 있읍니다 그런데 북괴는 그 당시에 이 전략부대와 적후방에서 주로 전쟁시에 활동을 하는 그러한 전략부대 특수 8군이 있읍니다.이 부대들이 우리 한국군의 옷 2만벌을 일본에서 도입한 바 있고 이 부대들이 갑자기 사라진 바가 있읍니다.이래서 그 당시에 본위원이 알고 있는 공수부대투입은 대전에 이리에 있는 7공수여단에서 1개대대 또 전주에 1개대대 서울에서도 역시 1공수여단이 성균관대학을 위시해서 7개대학에 공수여단이 한양대학등 7개대학에 13공수여단이 외국어대학외 2개대학에 투입되었다는 것을 말씀해 드립니다.

다음 또 묻겠읍니다. 증인께서는 앞서 동료위원들의 질의에 답변하는 과정에서 본인은 지역감정의 희생자라고 말씀했읍니다. 80년도 봄에 증인께서 전국을 순회하며 연설 강연시에 한번도 언급한바 없는 지역감정문제를 80년5월11일 전북 정읍농고교정에서 거행된 동학제 강연을 통해서 朴정권 18년간에 크나큰 과오는 신라통일후에 지방색을 다시불러일으킨 것이라고 말한 바 있읍니다. 유독 그곳 정읍에 갔을 때만 이러한 지역감정에 관한 발언을 하신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지 말씀해 주십시요.

ㅇ 증인 金大中

그때 정읍에서 그 말씀도 하고 그러나 우리는 절대로 이러한 지역감정에 현혹되어서는 안된다 내가 여기와서 이말한 것은 여기가 전라도이기 때문에 나의 고향땅이기 때문에 여러분들에 대해서 이런 朴정권이 조작한 지역감정에 우리가 현혹되고 이래가지고. 그것에 놀아나서 지역적으로 심화해서는 안된다 그 말을 그 다음에 붙여서 한 것입니다. 제가 그 말한 것은 이미 지역감정이 상당히 확산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을 그래서는 안된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 이것은 朴정권이 조작한거지 경상도분과 전라도사람과 서로 대립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렇게 설명한 것입니다.

ㅇ 鄭東鎬위원

됐읍니다. 다음 증인께서는 출생신고시에 최초 생년월일인 1924년1월16일을 43년도에 1925년12월3일로 정정하였읍니다. 그후 TV회견시에는 자신의 생년월일을 1923년1월6일로 말씀한 바 있읍니다. 그렇다면 증인의 3개의 생년월일중 정확한 것은 어느 것이고 생년월일을 두번씩이나 수정한 것은 흔치 않은 일이라고 생각되는데 그이유는 무엇입니까?

ㅇ 증인 金大中

이것은 정말로 광주하고 관계없는 일인데 물으시니까 답변드리겠읍니다.세번은 아니고 한번 고쳤는데 호적이전에 정확히 얘기하면 제가 1924년1월6일생입니다. 그런데 호적은 1923년12월3일인가 어떻게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자 나중에 그것을 1925년12월3일로 고쳤는데 고친 때를 보면 알지만 그때 일본군대에 걸려가지고 제가 1기생으로 군대에 가게 되어 있었어요. 그런데 그것을 24년12월로 하면 한기가 늘어지고 25년12월로 하면 또 한기가 늘어져요. 그래서 되도록이면 군대를 안보내겠다는 가정에서의 생각에서 그렇게 호적을 바꾼 것입니다. 다른 의도는 없읍니다.

ㅇ 鄭東鎬위원

증인께서는 최초 본적인 전남 신안군 하의면 대리 231번지에서 1960년6월25일 강원도 인제군 북면 원통리 655번지로 본적을 옮긴 사실이 있읍니다. 이 1963년10월19일에는 본적을 서울 마포구 동교동 31-1로 두번째 옮긴 사실이 있읍니다. 맞지요?

ㅇ 증인 金大中

맞습니다.

ㅇ 鄭東鎬위원

이에 대해서 본증인께서는 본적을 두번씩이나 옮긴 이유에 대해서 그 당시의 상황과 관련해서 말씀해 주시지요.

ㅇ 증인 金大中

이유는 간단하지요. 제가 강원도에서 국회의원 출마를 했는데 아무래도 현지 분들이 같은 고향이 아니라고 해서 배척하는 점이 있어서 제가 거기에서 국회의원을 지구당위원장이고 하기 때문에 선거하는 입장이라면 아주 거기에서 하겠다 해 가지고 5·16전에 그리로 옮기고 해서 선거에 당선이 되었읍니다.그런데 5·16후로 제가 다시 출마하게 된 것은 강원도쪽은 아니고 목포에 가서 출마하게 되었는데 그렇다면 강원도에다 본적을 놔둘 이유가 없고 그렇다고 다시 전라도로 가지고 갈 필요가 없어서 서울 현 거주지로 옮겨 온 것이지요.

ㅇ 鄭東鎬위원

본위원이 알고 있기에 증인께서는 4·19혁명직후 1960년도 7월29일 국회의원선거때에도 인제에서 출마하여 두번째 낙선한 일이 있읍니다. 그 당시에 증인께서는 자유당의 全亨山씨에게 패했는데 그렇습니까?

ㅇ 증인 金大中

그렇습니다

ㅇ 鄭東鎬위원

5대국회의원선거인데 선거는 175석을 차지했고 자유당은 겨우 2석밖에 차지하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기억하고 계십니까?

ㅇ 증인 金大中

아마 그럴 것입니다.

ㅇ 鄭東鎬위원

다음 묻겠읍니다.증인께서는 앞서 민주당 金光一위원이 5·17이전에는 정치권에 대한 학생들의 시위[이슈]가 없었다는 내용의 질문에 대해서 그렇다라고 답변을 했읍니다.그런데 본위원이 가지고 있는 자료에 의하면 이 당시 학생들의 정치권에 대한 시위[이슈]는 5·17이전 4월7일 증인께서 신민당입당 포기선언을 한 이후에 이미 표출되고 있었다고 알고 있읍니다. 다시말해서 10·26이후 4월초까지의 학생소요는 주로 학원자율화요구와 총학장 퇴진 및 학교 재단 부조리 척결등 학내문제를 주 [이슈]로 하다가 증인께서 신민당입당 포기선언을 한 4월7일을 기점으로 해 가지고 시위 [이슈]가 유신 세력퇴진 정부계엄 반대 등 정치문제로 전환되었읍니다.본위원이 이를 짚고 넘어 가려고 하는 것은 이 문제는 80년 당시의 상황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이 필요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그렇다면 증인께서는 증인의 신민당입당 포기선언의 시점과 관련하여 학생들의 정치권에 대한 쟁점표출의 시기가 대략 일치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ㅇ 증인 金大中

그것은 관계가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학생뿐 아니라요 5월에 들어서면서 언론계에서도 상당히 이 명분없는 계엄사태를 지속하는데 반항을 해 가지고 기자협회도 5월20일까지 계엄을 해제 안 하면 앞으로는 당국에 가서 검열 안 받겠다고 나서게 되었고 또 재야의 많은 문인들이라든가 교수라든가 이런분들도 그런 주장을 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이것은 학생들에 국한된 일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 신민당입당 여부와는 관계가 없읍니다.

ㅇ 鄭東鎬위원

다음 질문하겠읍니다.증인께서는 다음 문제가 광주사태 발생 원인과 어떤 연관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증인께서는 한상석이라는 인물을 알고 계십니까?

ㅇ 증인 金大中

한상석이요. 뭐하는 사람인데요?

ㅇ 鄭東鎬위원

말씀 드리지요. 본위원이 알기로는 한상석은 鄭東年 金相賢의 하부선으로서 광주사태시 비밀기획실장이라는 직책을 담당했었읍니다. 한상석이가 쓴 시위 모의 [노트]를 본인이 가지고 있읍니다. 이 자유라고 하는 [노트]입니다.이 [노트]는 한상석이가 작성한 것인데 13[페이지]에 보면 5월19일 폭동계획이라 이렇게 해서 모의를 한 것으로서 14시부터 18시사이에 [카농]조직을 이용하여 죽창 [밧데리]등을 준비해서 폭동을 일으킨 후 방송국과 공공건물 및 예비군 무기고를 접수한다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실제 상황입니다. 실제상황에서 19일 방송국 공공건물인 파출소에 대한 투석공격이 시작되었읍니다. 5월20일 광주문화방송이 시위대의 공격으로 불에 타는 결과가 있었는데 증인께서는 학생들의 모의와 실제상황이 딱 맞아 떨어지는 것을 우연의 일치라고 보십니까 아니면 사태의 발생원인에 어떤 관계가 있다고 보십니까?

ㅇ 증인 金大中

한상석에 대해서는 제가 전혀 모르겠고요. 또 그 자유[노트]에 대해서도 모르겠읍니다.([내일 증인으로 나옵니다. 한상석씨가…]하는 이 있음)그러나 증인으로 나온다니까 그때 물어보시고 아까도 말씀하다시피 당시 전남경찰국장이 민화위에서 증언한대로 5월16일 시위는 지극히 평화적으로 끝났고 아무런 군대개입할 이유가 없었다 하는 경찰국장증언을 저는 정당한 증언이라고 생각하고 있읍니다.

ㅇ 鄭東鎬위원

됐읍니다. 다음 질문하겠읍니다. 증인은 1980년5월10일 자가에서 고 全泰一의 누이동생인 전순옥과 만나서 동인으로부터 인천 동일방직 해고여공들이 여의도에 소재되어 있는 대한노총회관에서 복직요구 농성자금을 보조해 달라는 요청을 받은 적이 있읍니다 기억됩니까?

ㅇ 증인 金大中

예 기억이 나는데요.

ㅇ 鄭東鎬위원

이때 증인은 부인 이휘호씨로 하여금 20만원을 제공함과 동시에 [메달]과 책자 [테이프]등을 제공했다는데 사실입니까?

ㅇ 증인 金大中

아마 돈좀 도와준 것 같아요 식대를…

ㅇ 鄭東鎬위원

이것이 증인의 당시 배포했던 [메달] [테이프] 사진인지? 이것이 맞습니까?

ㅇ 증인 金大中

멀어서 안 보이는데요.

ㅇ 鄭東鎬위원

입법조사관 이것 한번 확인해 주세요.

ㅇ 증인 金大中

예. 맞습니다.

ㅇ 鄭東鎬위원

특히 증인께서는 이 [메달] 3,000개를 만든 것으로 알고 있읍니다. 이외에 제작된 것이 더 많이 있는가 또 증인이 얼굴까지 특별히 넣어서 제작한 이유는 무엇인지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ㅇ 증인 金大中

이것은 저하고 아는 분이 저를 위해서 만들어 가지고 왔어요. 그런데 3,000개는 아니고 우선 일이백개 가지고 왔었는데 그것 몇사람 안주고 끝났는데 그거야 뭐 미국도 그렇지만 세계각국 정치하면 입후보자 [메달]도 주고 여러가지 사진도 주고 그런거 아닙니까? 그런 선이지요 뭐…

ㅇ 鄭東鎬위원

좋습니다. 이것으로서 본위원의 신문을 마치면서 한마디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광주사태의 원인을 규명하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만 지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이를 계기로 사랑과 포용으로 우리의 아픔을 국민 모두와 함께 나누어 가짐으로써 국민대화합의 일대전기를 마련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광주시민의 아픔은 곧 우리 모두 국민 전체의 아픔입니다.감사합니다.

ㅇ 위원장 文東煥

수고 하셨읍니다.

ㅇ 崔鳳九위원

위원장 의사진행발언 있읍니다.오늘 본 청문회의 의사일정이 金大中증인과 李熺性증인의 두분 증언을 듣게 되어 있읍니다. 듣게 되어 있는데 지금 오늘 시간을 보면 10시부터 자정까지 하면 전부 14시간이 됩니다. 지금현재 시간이 오후 6시가 다 되어 갑니다. 그러면 벌써 8시간을 소비했는데 앞으로 위원회의 능률적인 운영을 위해서는 위원장께서 불필요한 질문을 제지해 주시고 그 다음 야3당에서는 더이상 물어볼 말이 없다 해가지고 증언청취를 안하고 있읍니다. 이런데 유독 민정당에서만 계속해서 불필요한 질문을 하고 있는데 본위원회의 능률적인 운영을 위해서는 위원장께서 적절한 조치가 있어야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앞으로 남은 시간 6시간밖에 안남았읍니다.그러니까 위원장께서 적절한 판단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ㅇ 위원장 文東煥

예. 그 얘기 지금 하려고 일어 났읍니다.지금 민정당에서 요청한 이름이 세사람이 여기있읍니다. 그런데 李熺性씨에 관한 증인 신청 들어온 것이 18명입니다. 이것을 시간 계산해 보면 10시간이 쉽게 넘어가게 되어 있읍니다. 그러니까 대단히 난처합니다. 간사들 모이셔서 민정당에서 이것을 하겠다고 주장하면 권리가 있읍니다. 민정당에서 처리하셔야 방법이 섭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위원장이 권위가 있다고 해도 그런 권위는 없읍니다. 민정당에서…

ㅇ 趙洪奎위원

위원장! 아까 말씀하실 때 鄭昌和위원하고 鄭東鎬위원을 교체했고 李肯珪위원 한분 남았어요. 한분 들으면 끝나는 것이지 왜 세분이 더 나와요. 합의된 대로해요. 아까 말씀하셨잖아요. 신청들어온 것이…

ㅇ 위원장 文東煥

아까 명단을 낸 사람이 그것이었고 또 계속해서 명단을 낼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지금도 李光魯위원으로서 끝났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李光魯위원까지 적어 냈읍니다마는 이것으로 끝났다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그러기에 제가 부탁하는 것은 민정당에서 오늘의 시간을 아시니까 이렇게 계속해서 이것을 다 하신다면 이문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을 간사들이 모이셔서 의논해 주셔서 좋은 해결방안을 강구해 주시라 그런 이야기입니다.

ㅇ 辛基夏위원

위원장님 의사진행 발언입니다.오늘 첫 청문회에 들어가면서 우리 4당간사들은 서로가 5공특에서 있었던 청문회의 전철을 밟지말고 합리적인 운영을 해보자하고 다짐까지 했읍니다. 그 합리적인 방안의 하나중에 지지부진한 질의나 또는 중복된 질의는 피하고 의제와 거리가 먼 질의도 피하자고 합의를 한 바 있읍니다. 그래서 지금 金大中증인의 경우는 5·18광주민주화운동과 관계되는 문제 가 비교적 단조로와서 증인들의 수가 약 10명정도가 질의를 하게 되면 거의 파헤쳐지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민주당에서 3명 평민당에서 3명 그리고 공화당에서 1명 야권에서 7명이 질의를 했고 무소속 1명 그래서 8명이 질의를 했고 민정당에서 처음에 똑같은 수로 3명해서 11명이 질의를 했을 때 이미 상당수의 반복된 질의와 중복된 질의와 또한 지지부진한 질의를 했는데 그 이후 3명이 더 민정당에서 질의를 해 가지고 아주 본의제와는 거리가 먼 질의 또는 그렇지 않으면 중복된 질의를 거듭해 가고 있는 실정이올시다. 그래서 위원장께서 말씀하시기 전에 저희들 4당간사들은 뒷전에서 서로 합의를 보려고 노력을 했읍니다마는 이미 민정당측에서는 지도부에서 12명의 위원이 전원신문에 응해 달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李熺性증인에 대한 질의시간을 좀 단축해 달라 그런 약속이 있으면 하겠다 그래서 李熺性증인은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의 위치에 있기 때문에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을 밝히는데 있어서는 핵심적인 증인의 위치에 있기 때문에 그러한 정치적인 협상에는 우리가 응할 수는 없다 그래서 현재까지에 이르렀기 때문에 위원장께서는 잘모르고 계십니다. 아까 위원장께서 적절히 지적하신 바와 마찬가지로 나머지 민정당소속위원들의 金大中증인에 대한 신문권은 얼마든지 권한으로 보장되어 있지만 중복된 질문이나 또는 그 이외에 지지부진한 의제와 관계없는 질문은 위원장의 권한으로서 엄격히 다스려 주시기 바랍니다.이상입니다.

ㅇ 李敏燮위원

의사진행 발언입니다. 방금 평민당 辛基夏위원께서 의사진행발언을 하면서 타당위원의 발언에 대해서 부질없는 발언이다 중복 발언이다 또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시는데 유감을 표명합니다.우리가 같은 동료위원으로 역사의 진상을 파헤치는데 나름대로 열심히 진상추적을 위해서 준비해온 발언을 그것도 기회가 金大中증인께서는 이번밖에 안 나오시기 때문에 나오신김에 꼭 묻고 싶어서 지금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희도 의사진행에 협조를 해서 서로 원만하게 하려고 합니다. 저희만 일방적으로 하려고는 조금도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다만 분명히 여기서 밝히고자 하는 것은 우리 金大中증인의 채택에 관해서는 평민당에서 먼저 요청을 했습니다.

그리고 신문요지로 작성을 해서 본인에게 전달하는 과정에서 저희는 신문요지를 내지않았읍니다.평민당에서 낸 신문요지를 보면 金大中의 사태의 직접관련여부 당시 金大中 정치활동이 사태에 미친 직간접적 영향 사태와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金大中과 해외반한활동내용 소위 金大中내란음모사건의 진위 소위 金大中내란음모사건의 조작경위와 재판과정 5·17 이전의 정치적 상황과 국민의 민주화요구 기타 5·18광주민주화운동의 발발원인과 배경에 대하여 또 80년5월16일 金泳三 金大中시국수습 6개항 성명의 경위 및 당시 시국에 있어서의 정치인의 역할 5·17 이전 재야인사 및 정치인의 민주화운동 소위 金大中내란음모사건과 광주민주화운동과의 관련 조작경위 5·17이후 구속중 광주민주화운동 수습파악 및 관련 책임자 파악 여부 또 5·17이전 학생들의 주요 요구사항 이렇게 광범위한 신문요지를 야당측에 의해서 만들어서 본인에게 전달하고 오늘 신문을 이 범위에서 하도록 지금 여기 유인물에 나와 있습니다.

이렇게 광범위한 상황을 함에 있어서 당시 金大中증인과 광주와 직결된 사태만을 물어야 된다는 것은 여기 한 종목에 불과합니다. 열댓개중에…그래서 오늘의 의제밖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다만 우리가 모처럼 준비해 온 것을 저희 나름대로 의사진행에 협조하면서 이렇게 빨리 끝내도록 하려고 노력을 하고 있읍니다.그렇게 이해해 주시고 질문이 들어온 것에 대해서는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ㅇ 위원장 文東煥

예. 집행하겠읍니다.이제 그만 얘기합시다. 꼭 얘기하셔야 되겠어요?

ㅇ 金仁坤위원

꼭 해야됩니다.지금 전국민이 주시를 하고있읍니다. 광주사태를 어떻게 진상을 진실되게 규명하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 전국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