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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청문회 속기록] 제 144회 국회(페회중) 5·18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 회의록 제 7 호(6)

본문

제 144회 국회

5·18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 회의록 제 7 호(6)

ㅇ 朴熺太위원

증인께서는 오전에 답변하시는 중에 5월20일이 되면 계엄이 해제되지 않을 수 없다 국회에서도 계엄해제를 결의할 것이고 또 그때 학생들이 5월20일까지 계엄해제를 하지 않으면 전국에 걸쳐서 대대적인 시위를 하겠다 또 일부 지식인들도 이에 합세했고 이래서 5월20일 지나면 다시는 증인께서 말씀하시는 일부 군부세력이 집권할 기회가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결국은 군부가 5·17이라는 이런 확대계엄을 단행했다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그런데 군부라는 것을 아시다시피 그냥 힘이 없는 그런 조직이 아닙니다. 더우기나 계엄이라는 막중한 소임을 갖다가 완수하고 있는 국가의 보위의 임무를 띠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계엄당국을 이와같은 조직세력을 가지고 물리적으로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은 것이 5월20일이라는 싯점을 향해서 과연 올바른 민주투쟁의 방법이라고 말씀하실 수 있겠습니다.

ㅇ 증인 金大中

그런데 군부는 무엇때문에 있는가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지키기 위해 있읍니다. 이 나라 국시인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있습니다. 그런데 군부가 이유없이 계엄령을 선포한 것을 해제를 안 하려고 하니까 7개월을 기다려도 안 하니까 그때는 할 수 없이 법에 의해서 국민의 대표인 국회가 해제결의한 것은 나는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기다릴만큼 기다려도 全斗煥씨 중심으로 한 군부세력이 자기들의 정권야욕때문에 해제를 안 하니까 그때는 국민도 부득이 참 자기들의 자위적인 입장에서 시위나 집회의 정당한 권리를 행사할 것이고 또 국회는 국회대로 결의할 것이고 이런 것은 저는 조금도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또 저는 그 당시 정부내나 군부내에도 全斗煥씨의 그런 정치개입의 자세에 대해서 찬성하지 않는 사람들도 상당히 있었기 때문에 5월20일 해제결의하면 정부내나 군부내에서도 상당히 이것을 지지하는 세력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믿고 있읍니다.

ㅇ 朴熺太위원

결국은 그렇게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붙인 그 지도노선자체가 과연 합리적이었느냐 하는 그런 식의 제가 질문을 해 본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궁하게 몰리다 보면 그분들이 어떠한 반발로써 군에 의한 정치적인 그 부상 정치일면에 군이 부상하는 이런 것을 오히려 촉진할 염려가 있었다고 생각하시지는 않았읍니까?

ㅇ 증인 金大中

그런데요. 군인의 책임은 나라를 지키는 것입니다. 나라지키는 일을 못 하게했다면 군인이 화를 낼 수가 있지만 정치개입한 것 하지 말라는데 군인이 화를 낸다면 그 군인이 잘못된 것 아닙니까? 그리고 아까도 말씀했지만 궁지로 몰은것이 아니라 7개월이나 기다려 주었으면 충분히 기다려 준 것입니다.

ㅇ 朴熺太위원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이러한 물리적인 힘으로써 서로 대항하는 그런 식이 아니라 다른 방도는 없었겠느냐 이것을 묻고 있습니다.

ㅇ 증인 金大中

아주 좋은 질문을 하셨는데요 그래서 사실은 全斗煥보안사령관 이 실무자를 제가 한번 만나려고 무척 노력했읍니다. 노력을 했는데 안 만나주어요. 사람을 여러[루트]를 통해서 만나자고 했는데 안 만나주어요.나는 그 분하고 얘기해서 제 충정을 다해서 얘기해 보려고 그랬어요. 그런데 그것에 앞서서 제가 2월중순쯤으로 생각되는데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충북옥천출신 李龍熙의원이 옥천서 올라왔어요. 와 가지고 全斗煥 보안사령관이 저를 좀 만나자고 한다…… 그래 잘 됐다고 나도 한번 만나고 싶은데 잘 되었다 그래서 내자[호텔] 뒤에 거기에 그 분들이 쓰는 말로 안가 무슨 집이 있대요. 그래서 골목길로 들어가서 2층으로 올라갔어요. 갔더니 全斗煥사령관은 안 나오고 權正達씨하고 李鶴捧씨 두 분이 나와 있어요. 당시 한 분은 정보처장이고 한 분은 대공처장이라고 그러대요.그래 가지고 그래서 全사령관 기다리니까 그 분이 지금 무슨 급한 일이 있어서 못 나온다 그래 제가 좀 속으로는 불유쾌했습니다.

그러나 거기까지 갔는데 뭐 일어설 필요도 없고 해서 앉았더니 여러가지 시국얘기를 하다가 李鶴捧씨가 종이를 한장 끄집어내서 이렇게 내놓는데 서약서라는 것을 이렇게 끄집어서 내놓아요.그래 보니까 시국의 안정에 협력을 하고 무슨 그 소란 일으킨 그 사회불안을 일으키는 일을 하지 않는다 이런 것 그리고 6월말까지인가라고 생각되는데 해외에 안 나간다 이런 것으로 해서 서약한다고 이렇게 서약을 하면 사면복권을 해 주겠다 그렇게 말을 하대요. 그래서 그 종이를 도로 이렇게 밀어내면서 그 앞에 좋은 말이 있었어요. 같이 협력해서 정국안정하고 뭐 하자 이런 좋은 말이 있어가지고 그것을 요구한 것이에요. 그래 정말로 당신들이 나하고 이렇게 나라 일을 같이 하자면 이런 것 내가 쓰고 싶다고 해도 쓰면 안 된다고 내가 이런 것이나 쓰고 하겠냐고… 나는 사면복권 안되어도 좋으니까 이런 것 안 쓰겠읍니다. 그리고 일어서서 나온 일이 있어요.

ㅇ 朴熺太위원

그것이 그러니까 증인께서 사면복권 되시기 전인 80년2월이지요?

ㅇ 증인 金大中

그렇습니다.

ㅇ 朴熺太위원

그러면 사면복권이 돼가지고 완전히 정치적인 자유를 회복하신 뒤에 군부와 대화의 노력을 보신 적이 계십니까?

ㅇ 증인 金大中

했지요 예. 했읍니다.

ㅇ 朴熺太위원

몇 번쯤 누구를 통해서 하셨읍니까?

ㅇ 증인 金大中

여러 선을 통해서 했어요.국방위원 통해서도 부탁을 하고요. 국회의원 통해서도 부탁을 하고 또 다른 예비역 장군 통해서도 부탁을 하고 여러 사람 통해서 했어요.

ㅇ 朴熺太위원

그런데 한번 만나보셨읍니까?

ㅇ 증인 金大中

한번도 안 만나주었어요.

ㅇ 朴熺太위원

왜 못 만나셨읍니까?

ㅇ 증인 金大中

그 분들이 저를 싫어하니까 못 만났지요.

ㅇ 朴熺太위원

왜 싫어했을까요?

ㅇ 증인 金大中

그것은 잘 모르지요.

ㅇ 朴熺太위원

증인 혼자 힘으로 안 되시면 증인은 그 때 야적 입장에 있었으니까 그때 여당의 입장에 있던 金鍾必총재라든지 이런 분하고 어떻게 합심해서 대화를 해 보시려고 하는 것을 했으면 어땠을까요?

ㅇ 증인 金大中

그 때 정치상황은요 지금은 조금 이해가 안 되시겠지만 저는 오랫동안 재야권에서 있어가지고 재야분들하고 많이 어울려져 있었고 유신치하의 정치에 참가했던 분은 또 그대로 그 속에 어울려서 金鍾必총재는 그 때 신민당하고 상대로 해서 헌법개정을 추진하고 있는 입장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 분이 저하고 대화를 할 그런 처지는 아니었읍니다.

ㅇ 朴熺太위원

국가가 이렇게 위험한 시기에 있고 민주회복이 되느냐 또 다시 군사통치의 연장이 되느냐 하는 이런 중대한 기로에 있읍니다.당시의 정치지도자로서는 제 생각에는 만난을 무릅쓰고 정말 모든 어려움을 다 무릅쓰고 합심협력해야 되지 않았나 하는 그런 아쉬움이 듭니다. 어떻게 생각합니까?

ㅇ 증인 金大中

예. 좋은 말씀입니다. 그래서요 아까 朴燦鍾위원 질의에도 나왔지만 5.월에 들어서면서 각계 지도자회의를 제가 계속 제창을 했던 것입니다.

ㅇ 朴熺太위원

5월달은 좀 늦은 감이 안 있읍니까?

ㅇ 증인 金大中

예. 결과적으로 보면 늦었지요.

ㅇ 朴熺太위원

그러면 金鍾必씨와는 당시에 전혀 만나신 적도 없읍니까?

ㅇ 증인 金大中

어디에서 그저 잠깐잠깐 지나는 자리에서 만나가지고……

ㅇ 朴熺太위원

아니 어떠한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만난 일은 없고…

ㅇ 증인 金大中

예. 만난 일 없읍니다.

ㅇ 朴熺太위원

예. 아까 오전 신문을 통해서 말씀하셨읍니다마는 신민당에는 증인께서 입당을 안하셨다고 그랬지요? 정말 아쉬운 장면입니다. 만일 그 때 신민당에 들어 가셔가지고 金泳三총재와 합심해서 군부를 설득하고 정치적인 비중있는 두 분이 정말 그 높은 식견을 가지고 군부세력을 잘 타일렀다면 군부가 정치 전면에 나서는 일이 없었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마는 어떻습니까?

ㅇ 증인 金大中

그런데 그것은 제가 같은 합심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 말은 동의하나 그렇게 하면 군부가 그러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는 말은 동의하지 않습니다.만일 군부가요 그 후로 자꾸 선전한대로 두 金씨가 합치지 않았으니까 그랬다 하면 자기들이 개입했다 하면 그러면 두 金씨 제거하고 다른분 내세워서 민간인들 시키면 됐지 왜 全斗煥씨가 꼭 대통령 되어야 합니까? 그러니까 그것은 구실입니다.

ㅇ 朴熺太위원

저는 두 金씨뿐만 아니라 세 金씨가 지난 작년 대통령선거때도 마찬가지였읍니다마는 세분 金씨께서 단합하지 못한 것을 우리 국민들이 못내 아쉬워 했읍니다. 저도 그 중의 한 사람입니다마는 당시에도 이 … 가정입니다마는 세 金씨가 정말 단합을 해 가지고 자기의 이해를 떠나서 또 자기의 정치적인 욕망을 버리고 정말 구국대도의 입장에서 민족을 위해서 합쳐서 의연히 군부세력과 대처를 했더라면은 제 생각에는 감히 군이 정치일선에 나서는 이러한 불행한 일은 없었지 않나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마는 증인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ㅇ 증인 金大中

아까도 말씀을 했는데 朴위원이 여당의 몸에 있으면서도 그런 충고를 해주신데 대해서 감사히 생각합니다.

ㅇ 朴熺太위원

아까 증인께서는 신민당에 입당하시지 않은 이유가 신민당과는 시국관의 차이때문에 그렇다 말하자면 신민당 金泳三총재께서는 민주화가 될 것이다. 이렇게 낙관을 하셨는데 증인께서는 매우 어렵다 이렇게 상당히 비관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시각의 차이때문에 신민당에 입당을 하지 않았다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ㅇ 증인 金大中

뭐 金泳三총재라고 지적하지는 않았는데요.

ㅇ 朴熺太위원

아니 신민당에 안들어가신 이유가 신민당의 입장하고 증인의 시국관하고 차이가 있어서 그랬다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ㅇ 증인 金大中

예. 그렇습니다. 그렇게 그 당시 발표되어 있읍니다. 지금 제가 한 말이 아니라…

ㅇ 朴熺太위원

제가 이런 말씀 드리기는 안됐읍니다마는 혹시 그 때 신민당에 입당안하신 이유가 더 큰 목적을 달성하는데 신민당에 들어가면 장애가 되기 때문에 그렇다 이렇게는 생각 안하셨읍니까?

ㅇ 증인 金大中

뭐 저 … 그당시 제가 국민한테 성명한 것이 신문에 나 있는 데 또 나중에 그것이 사실로 입증이 되었는데 저는 그 때 표현을 그렇게 했어요. 밥상이 차려져야 숟가락싸움을 하지 밥상도 안차려졌는데 숟가락싸움 할 수는 없다 지금 민주화가 될 가망이 확실않고 거의 위태로운데 대통령부터 하겠다면 뭐하느냐 그러니 신민당은 정치권에서 열심히 노력하고 또 우리는 시국을 더 걱정하는 입장에서 보니까 여하튼 우리는 우리대로 민주화촉진국민대회를 추진해서 그래가지고 민주화를 해 놓고 그렇게 되면 가을쯤 되겠는데 그 때 신민당 입당여부를 결정하겠다 이런 말이 제가 이 자리에서 지금 한 말이 아니라 신문에 다 나와 있읍니다 그대로…

ㅇ 朴熺太위원

예. 알겠읍니다. 그런데 정말 민주화투쟁을 위해서 몸바치신 것은 저도 상당히 알고 있읍니다마는 분열해서 싸우는 것이 유리합니까? 단합해서 싸우는 것이 유리합니까?

ㅇ 증인 金大中

그것은요 그렇게 말씀하시지 말고요 그 당시 만일 군부가 개입하지 않고 공정하게 3金씨가 경쟁해서 국민이 지지하는 사람 중에 누구 하나가 대통령 됐다면 그것 나쁠 것 없지 않아요? 그 세 사람 각기 지지자가 있으니까 또 대통령후보 셋 나온 것이 많은 것도 아닙니다. 문제 군부가 명분없이 정권욕에 사로잡혀 가지고 정치에 개입한 것이 나쁜 것이지 정치인들이 국민이 지지하면 대통령 되겠다는 것이 그것이 비난받을 일이 아닙니다.

ㅇ 朴熺太위원

이 문제는 아무리 물어도 참 너무나 안타깝고 제 마음이 쓰라린 장면입니다.시간관계상 그것은 그만치 해 놓고 증인께서는 아까 5월20일 국민대회 그 때 이제… 계엄을 해제하라 정치일정을 밝히라 하는 이러한 국민대회를 22일로 연기하셨다고 그랬읍니다. 증인께서… 20일로 되어 있는 것을 22일로 날짜를 증인께서 손수 연기했다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사실입니까?

ㅇ 증인 金大中

그것이 잘 … 아까 내가 그렇게 말한 것같지가 않는데요.그런데 저는 20일로 했다가 22일로 연기했는지 그 기억은 자세히 없는데요. 그런데 아마 22일로 그 때 文益煥목사 기타 몇 분이 와서 그 문안을 가지고 와서 했을 때 20일이 촉박하다 해서 22일 했는지 잘모르겠읍니다. 그것은 …

ㅇ 朴熺太위원

날짜는 지금 자세히 어떻게 …

ㅇ 증인 金大中

예. 기억이 없읍니다.

ㅇ 朴熺太위원

그 때 증인이 자필로써 분명히 20일로 되어 있는 것을 22일로 연기했다…

ㅇ 증인 金大中

예. 그랬을 수도 있읍니다. 제가 부인한 것은 아닙니다.

ㅇ 朴熺太위원

그런데 그 연기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ㅇ 증인 金大中

아마 날짜가 촉박해서 그랬는지 모르겠읍니다. 또 20일 국회가 열리니까 혹은 20일 국회 결과 보고 하자 그래서 했는지도 모르지요.

ㅇ 朴熺太위원

증인께서 아까 오전에 말씀하시기를 5월20일이면 이제 모든 것이 끝장난다. 군부는 더이상 집권할 기회를 상실한다. 계엄령도 해제된다. 이렇게 하셨는데 5월20일이 지난 5월22일 국민대회를 개최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ㅇ 증인 金大中

20일 개회하더라도 20일은 개원식하고 21일부터 토의하니까 며칠 걸릴 것 아닙니까? 계엄령해제까지…

ㅇ 朴熺太위원

혹시 20일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을 예견하고 22일부터 바로 행동을 하실려는 그런 계획은 없으셨읍니까?

ㅇ 증인 金大中

그런데 어떤 의미로 그렇게 물으시는지 모르지만은 우리는 그당시 군부의 거대한 세력앞에서 맨주먹 가지고 그것에 도전할 힘이 없었읍니다.우리는 오직 바라는 것은 선거만을 바랬지 다른 것 바란 것 없읍니다.

ㅇ 朴熺太위원

지난 그 비극적인 80년대를 되돌아 볼 때 증인께서는 정말로 당시에 증인이 전개하신 민주화투쟁방법 또 그러시고 세 金씨가 단합하지 못하고 분열한 이 문제 이것이 유사한 상황을 앞으로 또 맞는다면은 여기서 어떤 교훈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겠다 이런 것이 있으면 좀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읍니다.

ㅇ 위원장 文東煥

죄송하지만은 5·18광주민주주의에 관련… 민주사상에 관련된 질문을 해 주세요.

ㅇ 증인 金大中

제가 그것은 관련은 없지만 물으시니까 답변을 하겠읍니다.다시 말씀해서 그 당시 5·17사태는 군인들의 정권야욕에서 나온 것이지 3金씨의 책임이 제1차적이 아닙니다.그리고 3金씨는요 그당시 민주화를 해야겠다 대통령 직선제를 해야겠다 모든 것을 선거를 통해서 해결해야겠다 이런 점에 있어서 완전히 단합되어 있었고 같은 목적을 향해서 갔읍니다.매일 만나지는 않았지만 그 점에 있어서는 추호도 차이가 없었읍니다.

ㅇ 朴熺太위원

목적은 같았는데 투쟁의 방법이 달랐다 이런 말씀입니까?

ㅇ 증인 金大中

그것은 어떤 분은 정당에서 싸우고 어떤 사람은 재야에서 싸우고 그랬지요.

ㅇ 朴熺太위원

감사합니다.

ㅇ 위원장 文東煥

고맙습니다.다음은 평민당의 李海瓚위원 질문해 주십시오.

ㅇ 李海瓚위원

평민당의 李海瓚위원입니다.앞에서 여러 위원들께서 좋은 신문을 하셨기 때문에 본위원은 5·18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되는 사항중에서 몇가지 사실적인 것에 관해서만 신문을 하겠읍니다.실제로 5·18광주민주화운동과정속에서 金大中증인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는 한 부분이라고 본위원은 생각을 합니다.앞에서 다른 위원들이 말씀하신 것처럼 결국 12·12에서 5·17계엄확대조치까지 일련의 과정 소수정치군부가 쿠데타를 해서 정권을 잡는 과정 그리고 그에 저항하거나 흑은 반대할 것으로 예상되는 민주인사들을 탄압하는 과정에서 발생된 문제라고 본위원은 현재까지의 자료검토를 통해서 확인한 바 있읍니다.증인께서는 5월17일 밤 10시에 연행이 됐다고 아까 답변을 하셨읍니다. 그래서 첫심문조서를 받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입니까?

ㅇ 증인 金大中

정확히 기억은 없는데요. 그러나 심문은 그 다음날로부터 시작이 되었는데요. 아시다시피 심문을 할때는 예비적으로 자꾸 묻다가 나중에 조서를 만들고 하니까 첫 조서를 며칠날 꾸몄는지 그것은 잘 기억이 없는데요.

ㅇ 李海瓚위원

5월17일 저녁에 연행이 되어서 5월22일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에서 중간수사발표를 했읍니다.그 중간수사발표에 보면은 증인께서는 각대학의 복학생에게 자금을 지원하거나 혹은 정치선동을 기한 것으로 많이 나와 있읍니다. 그 중에서 하나씩 물어 보겠읍니다.합동수사발표문에 보면 80년3월에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 沈載哲학생회장을 집으로 오도록 해서 100만원을 주고 서울대 [데모]를 책임지라고 했다 라는 발표문이 있는데 이런 사실이 있읍니까?

ㅇ 증인 金大中

전연 없읍니다.

ㅇ 李海瓚위원

이 점에 관해서 조사를 받아본 사실은 있읍니까? 5월20일 이전에요.

ㅇ 증인 金大中

없읍니다.

ㅇ 李海瓚위원

없습니까? 그 다음에 두번째로는 鄭東年과의 관련에서 물어보겠습니다. 계엄사에서 여러가지 조서를 많이 받았는데 鄭東年과 관련되는 부분… 鄭東年에게 자금을 주어서 전남대학교[데모]를 교사를 해서 광주사태 광주의 엄청난 참극을 가져오는 결과를 빚어냈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본위원이 지금까지 정부측에서 제출한 모든 자료를 다 검토해 본 결과를 우선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金大中 증인은 최초의 진술서를 5월20일 작성했습니다. 맞습니까?

ㅇ 증인 金大中

아마 그랬을 겁니다.

ㅇ 李海瓚위원

그리고 鄭東年 증인은 5월18일 처음으로 작성했습니다. 그런데 이 500만원 자금수수에 관련된 조사는 鄭東年 증인의 심문조서를 정밀 검토해 본 결과 5월30일 처음으로 나오고 있읍니다. 그리고 증인의 심문조서에서는 6월15일 처음으로 나오고 있읍니다. 6월15일 처음으로 조사받은 사실이 맞습니까?

ㅇ 증인 金大中

여하튼 鄭東年씨 관계는요. 처음에 잡아가서 한참 말이 없다가 한 20여일 지나고 나서야 鄭東年이란 말이 나왔어요.

ㅇ 李海瓚위원

예. 그리고 중간에 연결의 고리가 되었던 金相賢증인은 5월19일 최초의 진술서가 나오고요. 자금에 관련된 심문은 6월3일 처음으로 나오고 있읍니다. 그래서 본위원이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은 만약에 증인께서 鄭東年씨로 하여금 광주를 선동케 할려고 했다면은 이 사실이 수사초기단계에서 밝혀지지 않고 왜 그 심문시작 20일후에 처음으로 밝혀졌는가에 대해서 의문을 갖고 있읍니다.이점에 관해서 지금까지 증인이 아는 바가 있으면 말씀을 해보세요.

ㅇ 증인 金大中

그러니까 5월22일 발표는 보면 주로 제가 민주헌정연구회라든가 또 청년정치문화연구회라든가 이런 저하고 가까운 조직을 동원해 가지고 반란을 모의했다 이렇게 했다가 그것이 아마 상당기간 나중에 나와서 알고 보니까 잡아다가 모두 고문하고 했지만 잘 안 엮어진 모양입디다. 그러자 또 광주문제가 5월22일 그 당시까지하고 달라서 그것이 의외로 커져가지고 26·7일까지 가고 하니까 이 사건을 말하자면 크게 만들기 위해서는 저하고 관련을 지어야 하겠다 이런 생각하에서 그렇게 한 것으로 저는 알고 있읍니다. 또 그렇게 정보를 듣고 있읍니다.

ㅇ 李海瓚위원

좋습니다. 그러면 그 재판과정에서 鄭東年증인과의 대질심문을 하셨읍니까?

ㅇ 증인 金大中

그것은 조사과정이나 재판과정이나 鄭東年과의 대질을 여러차례 요구했지만 한번도 수락이 안되었읍니다.

ㅇ 李海瓚위원

이 부분은 굉장히 중요한 부분인데요. 증인께서 엄청난 광주참극을 야기시켰다 라고 하는 가장 중요한 대목이 바로 이 대목인데요. 이 대목에 대해서 재판과정에서 대질심문을 그렇게 요청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대질심문을 결국 못하셨다는 말씀입니까?

ㅇ 증인 金大中

그렇습니다.

ㅇ 李海瓚위원

그래서 본위원이 이 문제에 관련해서 자료를 정밀검토를 한 결과 대단히 중요한 자료 하나를 발견을 했습니다. 1980년5월19일자 계엄합동수사본부에서 작성한 金相賢증인에 관한 내란 선동등 피의자 피의사건인지동행보고서를 발견해 냈습니다. 이것은 정부측이 제출한 자료입니다. 5월19일 작성된 자료의 최종 페이지를 보니까 결재가 과장 국장 단장 참모장 본부장까지 [싸인]이 되어 있읍니다. 그리고 작성자는 군사법 경찰관 육군준위 김성구로 되어 있고 도장이 찍혀 있습니다. 이 자료에 보면 이 자료의 심문사항 12항에 보면은 다음과 같은 사실이 있습니다. 증인은 이 사실에 대해서 자세히 모르시겠지만 앞에 말씀하신 朴위원의 신문사항과 거의 유사한 내용이기 때문에 간략하게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1980년5월5일 18시30분경 한국정치문화연구소에서…]하고서[전남대 자연과학대학 4년 복학생 鄭東年으로부터 전남대도 다른 대학 못지않게 학내성토룰 잘하고 있는데…]하면서 쭉 金相賢과 鄭東年의 대화내용이 나옵니다. 그리고 다음 장에 넘어가서 [조선대학교 학생운동에 손을 쓰려면 자금 500만원이 필요하다라고 鄭東年이 요구하자 鄭東年을 동교동 金大中가 내실로 안내하여 金大中면전에서 현금 300만원을 제공하면서…]이렇게 하면서 앞에 朴위원이 말씀하신 그런 내용이 그대로 나옵니다.

그리고 설합속에서 200만원을 꺼내서 그 다음날에 또 준 사실도 나옵니다. 그 다음에 만났을 적에…그런데 본위원이 촛점을 두고자 하는 것은 바로 다음과 같은 사실입니다.金相賢에 대한 인지보고서에서 [일부 지역에 폭동을 야기케 하여 5월21일부터 5월27일간 군인 22명 경찰 4명 일반인 144명이 사망하고 군경 다수가 피해를 입은 사태를 야기케 한 자임]이렇게 되어 있읍니다.5월19일 작성된 범죄인지동행보고와 이미 광주사태의 내용을 이미 기술하고 있읍니다.이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ㅇ 증인 金大中

저는 만일 그것이 정말로 그 날짜에 작성되었다면 제가 잡혀 가서 한 20일 내외까지 묻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고 그것은 나중에 만들어 넣은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ㅇ 李海瓚위원

한가지를 더 묻겠습니다. 증인께서도 안기부 지하실에서 오랜동안을 수사를 받으셨지요?

ㅇ 증인 金大中

예.

ㅇ 李海瓚위원

金相賢증인도 역시 같은 장소에 있는 지하실에서 수사를 받으셨지요?

ㅇ 증인 金大中

나중에 그렇게 알았읍니다.

ㅇ 李海瓚위원

예. 그렇게 바로 광주문제하고 관련되어서 가장 중요한 두 분이 같은 지하실에서 이렇게 조사를 받으면서 이 엄청난 범죄내용인데 이대로 인정한다면은… 이것에 대해서 5월19일 이후에 鄭東年의 관계 6월20일 조사를 받을때까지 중간에는 한번도 이 사실에 대해서 확인도 없었읍니까?

ㅇ 증인 金大中

제가 金相賢씨가 아까 그 낭독한대로 저희 방에 와서 鄭東年하고 같이와서 저한테 돈을 받아갔고 그쪽으로 넘겨주었다. 그렇게 金相賢씨의 자필 자술서라는 것을 가지고 왔어요. 그래서 제가 보고 그러면 金相賢의원이 여기 서울시내에 있으니까 지하실에 갇혀 있는 줄 몰랐지요. 있으니까 그럼 金相賢의원을 나하고 대질시켜 주시오. 대질시키면 본인이 내 방에 왔던 것을 알 것 아닙니까? 이러고 대질을 요구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다음날인가 다음다음 날인가 다시 金相賢의원 진술서를 가지고 왔어요. 그때는 金相賢의원은 와서 鄭東年씨를 저한테 소개만하고 나가버렸고 나중에 鄭東年이 집에 한참 있다가 청년정치문화연구소에 찾아와서 내가 金大中씨로부터 이렇게 돈을 받았읍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이렇게 金相賢씨의 진술내용이 달라져있어요. 그래서 제가 보고 이거 굉장히 고통을 받고 있구나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 鄭東年씨도 곧 증인신문하면 아시지만 우리집에 한번도 와본 일이 없기때문에요. 안방을 이렇게 도면을 수사관들이 그려주면서 여기가 침대가 있고 여기 농이 있고 이렇게 해 가면서 鄭東年씨를 훈련을 시켰다고 그래요.

ㅇ 李海瓚위원

좋습니다.본위원이 한가지 더 의심스러운 것은 이러한 정도의 범죄사실이 金相賢증인으로부터 인지가 됐다고 한다면 당연히 金大中증인에게도 이러한 범죄사실을 확인을 했을 것이고 또 5월22일은 광주에서의 참극이 한참 진행되고 있던 상황이기 때문에 당연히 수사중간발표에 포함이 되었으리라고 판단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포함돼 있지 않았던 사실에 대해서 본위원은 상당히 의심을 가지고 있읍니다.(文東煥위원장, 李敏燮간사와 사회교대)마지막으로 광주하고 관련해서 증인께 몇가지 작은 사실만 더 확인하겠읍니다.그동안에 여러가지 정부의 발표나 이런 것을 종합해 보면은 증인께서는 광주에 사조직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그렇게 얘기가 되고 있읍니다.특히 그 중에서 전남 영암에 거주하는 김봉수 그리고 해남에 거주하는 김유곤이가 광주에 있는 증인의 사조직인 깡패조직이라고 돼있읍니다.두사람에 대해서 말씀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ㅇ 증인 金大中

그 잘 모르는 사람들 인데요.

ㅇ 李海瓚위원

전혀 모르는 사람들인가요?

ㅇ 증인 金大中

예. 얼굴을 보면 혹시 기억날는지 모르지만 이름갖고는 모르겠는데요 또 그런 사조직을 한 일이 없고요.

ㅇ 李海瓚위원

예. 광주 당시의 발표문에 보면 이들이 복면폭도로 활동하면서 화물차에 金大中 석방하라는 [플랭카드]를 붙이고 폭동을 가열시켰다라고 돼있읍니다. 이사람들에 대해 전혀 모릅니까?

ㅇ 증인 金大中

예. 모르겠읍니다.

ㅇ 李海瓚위원

김유곤씨에게는 집권하면 우체국장을 시켜 주겠다 라고 약속까지 하셨다는데요.

ㅇ 증인 金大中

좌우간 제가요 집권하면 뭐 시켜주겠다고 말한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읍니다.

ㅇ 李海瓚위원

예. 그 다음에 물어야 할 사실이 많이 있읍니다. 그런데 광주 이문제를 우리가 다룸에 있어서 명백한 사실을 확인하는 과정이 어떻게 보면 고인들에 대한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정도로 본위원의 신문을 마치겠읍니다.

ㅇ 위원장대리 李敏燮

다음은 張石和위원 신문해 주시기 바랍니다.

ㅇ 張石和위원

통일민주당 張石和위원입니다.12·12사태로 정권탈취의 야욕을 드러낸 일부 정치군인들이 자신들의 음모의 마지막 단계로써 택하였던 5·17비상계엄확대조치는 광주시민의 저항권행사에 부딪쳐서 잊을 수 없는 민족적 비극을 초래했읍니다. 이들 정치군인들은 자신들의 정권장악에 방해가 되는 문민정치인들을 제거하기 위한 음모도 같이 진행시켰읍니다.그 대표적인 사건이 증인이 연루되어 사형선고까지 받았던 金大中 내란음모사건입니다.이 사건의 허구성과 군부세력의 부도덕성을 적나라하게 파헤치기 위해서 본위원은 주로 증인에게 이 사건에 관한 절차상의 불법성에 관해서 단문단답식으로 묻겠습니다.증인은 80년 5월17일 밤에 댁에 침입한 무장군인들이 연행이유를 말하였읍니까?

ㅇ 증인 金大中

이유는 말하지 않고요 집에 와서 그냥 총개머리판으로 막 대문을 치고 발로 차고 하면서 문열으라고…그래서 저희 집에 있는 경호원이 나가서 누구냐 대지는 않고 문만 열라고 막차고 그렇게 난리가 났어요.

ㅇ 張石和위원

연행 도중에 가혹행위나 난폭한 행위를 당하였읍니까?

ㅇ 증인 金大中

그래서 저희가 응접실에 앉아 가지고 문 열어주라고 그랬더니 뛰어들어오더니 일단의 무장군인 한 7·8명되는데 그 사람들이 총검을 꽃은채로 와서 제 가슴에다 대고 이래가지고 가자 이래서 끌려간 것이지요.

ㅇ 張石和위원

연행 도중에 가혹행위나 난폭행위를 당한 일은 없읍니까?

ㅇ 증인 金大中

연행도중에 제 머리를 눌러가지고 자동차 바닥에다 누르고 그래가지고 밖에를 못보게 그렇게 하고 끌고 갔어요.

ㅇ 張石和위원

80년5월22일에 발표된 계엄사의 중간수사발표는 대부분의 증인이 연행되기 전에 이미 작성되어 있었던 것이 아닙니까?

ㅇ 증인 金大中

아마 그렇게 생각이 되는데요.

ㅇ 張石和위원

그렇다면 증인은 계엄당국의 미리 짜여진 각본에 의하여 불법연행 감금을 당한 것이지요?

ㅇ 증인 金大中

그것은 뭐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ㅇ 張石和위원

또한 80년도 5월31일에 계엄사가 발표한 광주사태의 내용중에서 鄭東年씨 부분은 계엄당국이 조작한 것이지요?

ㅇ 증인 金大中

물론 그렇습니다.

ㅇ 張石和위원

그때 鄭東年씨는 5월17일에 이미 연행되어서 감금 상태에 있었다고 증인은 알고 있지요?

ㅇ 증인 金大中

모릅니다.

ㅇ 張石和위원

모릅니까?결국 그렇다면 증인을 비롯한 재야 민주인사들은 정권탈취의 야욕에 찬 일부 정치군인들의 각본에 따라 무자비한 고문에 의해서 허위의 진술서를 작성하게 된 것이지요?

ㅇ 증인 金大中

그렇게 되었지요.

ㅇ 張石和위원

증인이 80년도 7월11일에 육군 교도소로 이감되면서 구속영장을 처음으로 제시 받았지요?

ㅇ 증인 金大中

정확히 기억이 없읍니다.

ㅇ 張石和위원

예. 그러니까 증인은 5월17일부터 무려 50일 이상을 영장없이 불법구금을 당한 것이지요?

ㅇ 증인 金大中

지금 기록 봐도 아마 한 3·40일 불법구속된 것입니다.

ㅇ 張石和위원

80년 7월4일에 계엄사가 발표한 金大中 내란사건의 전모의 내용은 대부분이 조작된 것이라고 재판과정에서 주장했지요?

ㅇ 증인 金大中

그렇습니다.

ㅇ 張石和위원

증인은 5월17일에 무장군인에게 연행된 뒤에 80일 이상이 지난 8월9일에 가서야 처음으로 李姬鎬여사의 방문을 받았지요?

ㅇ 증인 金大中

그렇습니다.

ㅇ 張石和위원

李姬鎬여사가 그때서야 처음으로 면회를 하게 된 것은 계엄당국의 강제적인 출입통제때문 이었지요?

ㅇ 증인 金大中

그때에도 그랬고요 집의 사람은 그후로 1년동안 연금당해 있었읍니다. 면회갈 때만 그 사람들이 차 타고 동승해서 다니고 그랬읍니다.

ㅇ 張石和위원

증인은 그때 부인에게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다. 모두에게 대단히 미안하다 다른 사람은 전혀 관계가 없다 라고 되풀이 말했지요?

ㅇ 증인 金大中

예. 그랬읍니다.

ㅇ 張石和위원

그말은 증인이 감금되어 있는 동안에 진술한 소위 내란음모사건은 고문이나 협박에 의한 허위자백이었음을 뜻하는 말이었지요?

ㅇ 증인 金大中

다른 분들이 그렇게 고문 당해 가지고 자백해놓은 것 보니까 저 하나때문에 그렇게 당한 것을 생각하니까 굉장히 미안하게 생각하고 가슴아파서 그렇게 말했지요.

ㅇ 張石和위원

검찰수사과정에서도 처음 진술을 부인하지 않았지요?

ㅇ 증인 金大中

처음에 진실을 다… 정보부에서 한 것이 거짓말이라고 다 얘기를 했지요 했는데 제가 좀 부끄러운 얘기지만 그때는 죽고 사는 문제가 남았어요.그래서 조사… 정보부에서 쭉 해보니까 내란선동은 죽지는 않아요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이 국가보안법으로 해서 한민통으로 해서 연결해서 국가보안법 1조 1항에 해당시키려는 것 같애요. 그렇게 되면 죽는 것이지요. 사형언도지요.그래서 저는 전 신경이 사실 거기에 있읍니다. 어떻게 하든지 무기라도 좋으니까 살았으면 좋겠다 그런데 제가 참 어리석고 부끄러운 얘기지만 검찰관 꼬임에 빠졌어요. 검찰관의 얘기가 그렇게 부인하면 전부 피고에게 불리합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생각하기를 이 국가보안법 이것은 말도 안된다 이것은 적용될 수가 없다 그러니까 이 문제는 제가 책임지고 제가 적용 안시키겠읍니다 제가 기소 안하면 됩니다 그분이 검찰부장이니까 이러면서 나머지 문제는 다른 피고들이 다 시인했는데 여기서 다시 부인하면 또 한 번 정보부로 가 가지고 또 당해야 됩니다. 그러니 여기서 시인하시고 그래가지고 이 법정에서 할 말씀하십시오.그래서 저는요 검찰에서 얘기한 것이 증거능력은 없고 법정에 가서 얘기하면 다인줄 또 그렇게 알고요 제가 살겠다는 욕심때문에 그사람에게 대해서 일종의 말하자면 그렇게 해준다면 내가 이것은 시인하고 뭐 살아봤자 죽지는 않는 것이니까 이렇게 생각하고 시인한 것이지요.

ㅇ 張石和위원

증인에게 세명의 국선변호인과 세명의 사선변호인이 선임되었지요?

ㅇ 증인 金大中

전부가 셋입니다. 셋인데

ㅇ 張石和위원

예. 좋습니다.재판 시작되기 전에 변호사들을 접견한 적이 있읍니까?

ㅇ 증인 金大中

시작할 무렵에 직전에 접견했지요.

ㅇ 張石和위원

좋습니다.그래서 1심 1차 공판에서 검찰심문에 대해서 묵비권 행사를 한 일이 있읍니까?

ㅇ 증인 金大中

예. 그랬읍니다.

ㅇ 張石和위원

그러나 2차 공판에서 부터 심문에 응했지요?

ㅇ 증인 金大中

그랬읍니다.

ㅇ 張石和위원

그것은 협박을 받았읍니까?

ㅇ 증인 金大中

아니요.

ㅇ 張石和위원

좋습니다.항소심에서 증인을 비롯한 재야 민주인사들은 재판부의 편파적인 재판진행에 실망하여 변론을 거부한 적도 있읍니까?

ㅇ 증인 金大中

1심에 최후진술을 거부했고요 2심에서도 여러번 법정에서 투쟁을 했지요.

ㅇ 張石和위원

예. 증인이 관련된 내란음모사건의 항소심에서 재야 민주인사들이 신청한 증인들은 하나도 채택이 되지 않았지요?

ㅇ 증인 金大中

아니요. 우리가 채택한 중에서 예를 들면 李兌榮여사같은 분은 채택이 됐읍니다.

ㅇ 張石和위원

예. 그래서 이신범씨를 비롯한 대부분의 재야민주인사들은 재판부를 기피한다는 의사표시를 했읍니까?

ㅇ 증인 金大中

예. 그렇게 했지요.

ㅇ 張石和위원

그런데 재판부는 재판부 기피신청을 받아들이지 않고 변호사의 변론을 계속시키려고 했으므로 증인을 비롯한 재야민주인사들은 모두 퇴장했지요?

ㅇ 증인 金大中

예. 그런 일도 있었읍니다.

ㅇ 張石和위원

퇴장 할 때 이신범씨가 이런 더러운 재판을 받을 것인가 라고 소리 치던 것이 기억 납니까?

ㅇ 증인 金大中

누가 했는지는 모르지만 전부가 떠들고 나왔지요.

ㅇ 張石和위원

그야말로 연행에서 부터 재판때 까지 증인이 연루 되었던 내란음모사건은 군사독재정권의 더러운 음모에 의한 인권유린의 대표적 사례라고 증인은 생각 하지요?

ㅇ 증인 金大中

예. 그렇습니다.

ㅇ 張石和위원

증인은 확정판결 사흘전에 사형은 당 하지 않을 것 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고 월간조선 [인터뷰]에서 밝힌 바가 있지요?

ㅇ 증인 金大中

예.

ㅇ 張石和위원

81년도 1월18일에서 23일 사이에 육군교도소에 계속 수감 되어 있었읍니까?

ㅇ 증인 金大中

그렇지요

ㅇ 張石和위원

아니면 잠시 다른 곳을 다녀온 적이 있었읍니까?

ㅇ 증인 金大中

마지막 확정판결이 되면서 그 날로 무기로 감형이 됐는데 그 무렵에 한 이틀 아마 중앙정보부였지요. 그쪽 갔다 왔지요.

ㅇ 張石和위원

그때 탄원서를 작성 했읍니까?

ㅇ 증인 金大中

예. 그렇습니다.

ㅇ 張石和위원

탄원서의 내용은 무엇 입니까?

ㅇ 증인 金大中

처음에는 그 탄원서 쓰라고 해서 제가 안 쓴다고 했더니 거기서 하는 말이 어떻게 됐거나 사형수인데 그것을 감형하는데 탄원서 안 쓰고 되겠냐! 그러니 요식상 필요 하니까 써라 그래서 그것 또 이치에 맞는 얘기고 해서 제가 썼는데 제가 제가 쓰기를 저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모두 고초를 겪고 있는데 저는 아무래도 좋으나 그 사람들은 관대하게 해달라 그렇게 탄원서를 썼더니 가지고 갔다 오더니 당사자가 자기를 관대하게 해달라는 것인데 자기를 빼고 하라고 하면 말이 되냐 자기도 넣어서 써라 그래서 넣어서 썼지요.

ㅇ 張石和위원

증인에게 그 얘기는 누가 했읍니까?

ㅇ 증인 金大中

거기에 崔과장 이라는 사람이 했어요.

ㅇ 張石和위원

崔과장은 누구의 지시를 받아서 그렇게 말씀 하신 것 아닙니까?

ㅇ 증인 金大中

위에 왔다 갔다 하니까 협의 했겠지요?

ㅇ 張石和위원

위에 누구하고 협의가 됐다고 생각합니까?

ㅇ 증인 金大中

그것은 모르겠읍니다.

ㅇ 張石和위원

증인은 73년도 8월에 중앙정보부의 납치에 의한 강제귀국후에는 한민통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었지요?

ㅇ 증인 金大中

전연 없었지요.

ㅇ 張石和위원

그 의장직도 사임 한다는 뜻을 세번씩 이나 사람을 통해서 알렸다고 법정에서 주장 했지요?

ㅇ 증인 金大中

사임이 아니라 제가 납치는 8월8일이고 일본에서 한민통이 결성된 것은 8월15일 입니다. 1주일후 입니다.그래서 자기들 마음대로 나를 의장으로 했기 때문에 나는 의장이 아니라고 통고 한거지요.

ㅇ 張石和위원

73년8월의 납치사건과 관련해서 한일양국은 73년도 강제귀국 이전의 증인의 해외에서의 활동에 대해서는 처벌 하지 않기로 한다는 합의 소위 정치결착을 한 일이 있지요?

ㅇ 증인 金大中

그렇습니다.

ㅇ 張石和위원

그러므로 73년도 강제귀국 이전의 한민통과의 관련을 이유로 국가보안법 1조의 위반을 증인에게 적용 한다는 것을 이와같은 국제적인 약속을 무시 하는 것 이라고 생각 하지요?

ㅇ 증인 金大中

완전히 약속위반 이고 내용도 거짓 이고 하니까 결국에서는 이번 13대 국회에 와서 이 정부가 그 판결문을 내놓을 때 까지 8년동안 판결문을 못 내놓은 것이지요.

ㅇ 張石和위원

강제귀국 이후의 한민통 관련사실은 증인이 법정에서 부인 했고 李兌榮박사도 그 점에 대해서 증언한 바도 있지요?

ㅇ 증인 金大中

그렇습니다. 李兌榮여사가 가서 왜 본인이 승낙도 안 했는데 의장으로 했냐고 본인이 항의 하면서 취소 하라고 했다. 그말……

ㅇ 張石和위원

그러므로 군사법원이 증인에게 적용한 국가보안법 1조 위반은 증인에게 사형에 까지 처할 수 있도록 하려는 군부세력의 음모라고 생각 하시지요?

ㅇ 증인 金大中

그렇지요. 광주문제 가지고 하려다가 안 되니까 그런거지요.

ㅇ 張石和위원

이상과 같이 증인의 연행조작 감금과 수사에 있어서의 사전조작과정 적법절차를 무시한 재판과정등을 살펴 볼 때에 증인이 연루 되었던 내란음모사건은 일부 정치군인들이 집권야욕을 성취 하기 위하여 자기들에게 반대하는 재야민주세력을 말살 시키려고 치밀 하게 계획 하고 진행 시켰으며 때 마침 일어난 광주민주화항쟁에 증인을 배후조종세력으로 조작 하려고 수10일간의 불법감금을 통하여 만들어낸 부도덕한 정치음모극 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ㅇ 증인 金大中

그렇습니다.

ㅇ 張石和위원

그 외에 몇가지 질문을 보충을 하겠읍니다.증인은 82년도12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어서 미국으로 떠나면서 다시는 정치활동을 않겠다는 내용의 탄원서를 써서 당국에 제출 했다는데 그렇습니까?

ㅇ 증인 金大中

다시는 이 아니라 미국 가면 치료에 전념하고 정치활동 안 하겠다고 썼읍니다.

ㅇ 張石和위원

그것을 비행기내에서 아마 형집행정지가 된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그것이 사실 입니까?

ㅇ 증인 金大中

그렇습니다.

ㅇ 張石和위원

당국이 증인을 강제로 미국으로 보내려고 한 것과 마찬가지로 당국이 金泳三총재에 대해서도 단식때 강제로 미국으로 보내려고 기도했던 사시을 증인을 알고 있읍니까?

ㅇ 증인 金大中

잘 모릅니다.

ㅇ 張石和위원

金泳三총재에 대해서는 증인과 같이 구속하면 제2의 부마사태가 재발될 것으로 생각해서 구속하지 아니한 것으로 증인도 생각하지요?

ㅇ 증인 金大中

그럴 수도 있지요.

ㅇ 張石和위원

12·12사태의 가담자들은 반란죄 항명죄 또 5·17사태의 가담자들은 내란죄를 범하였다고 보는데 증인은 이들을 법대로 처벌하여야 한다고 보십니까?

ㅇ 증인 金大中

그 문제에 대해서는 아까 얘기를 했읍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문제는 다시 되풀이 할 것이 없고 아까 얘기로 대신하겠읍니다.

ㅇ 張石和위원

좋습니다. 결국 증인은 광주사태의 발발원인을 全斗煥씨가 국보위를 만들어서 정권을 탈취하려는 음모의 일환으로 광주사태를 일으켰다고 보는 것이지요?

ㅇ 증인 金大中

그렇습니다.

ㅇ 張石和위원

광주항쟁이 격화된 이유가 첫째 부마사태에서도 그랬듯이 증인의 불법구금으로 인한 호남인들의 증인에 대한 기대감 좌절로 인한 불안 둘째 공수부대의 과잉진압으로 인한 본능적항거 세째 호남지방 등의 푸대접에 대한 분노 네째 유언비어로 인한 지역감정격화 등으로 생각하는데 증인도 같은 견해를 가지고 계십니까?

ㅇ 증인 金大中

그런 점이 있지요.

ㅇ 張石和위원

증인는 수차 광주항쟁가해자들에 대해서 보복금지와 용서를 역설하였는데 지금도 그 소신에는 변함이 없읍니다.

ㅇ 증인 金大中

예. 이것이 지금 국민의 감정이 상당히 악화되어 있지만 저 개인이나 저희 당은 아직 방침을 바꾼 일이 없읍니다.

ㅇ 張石和위원

마지막으로 묻겠읍니다.광주민주화운동의 승고한 정신을 받든다면 지역감정해소와 야권의 차기집권을 위해서라도 야당을 통합해서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여야 한다고 보는데 이와같이 증인이 민주화에 앞장서기 위해서 지금이라도 당장 야당통합할 생각은 없읍니까?

ㅇ 증인 金大中

그 문제는 지금 이 자리가 그것을 논의하는 자리가 아니고 거기에 대해서…

ㅇ 張石和위원

민주화항쟁의 정신에 지금 비추어 보아서 제가 드리는 말씀입니다.

ㅇ 증인 金大中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는 張위원 얘기를 나중에 더 듣고 따로 얘기를 하겠읍니다.

ㅇ 위원장대리 李敏燮

다음은 辛卿植위원 신문해 주시기 바랍니다.

ㅇ 辛卿植위원

민주정의당 辛卿植위원입니다.金총재님 참 오래간만입니다.국회 막상 들어 왔읍니다마는 그동안 자주 뵐 기회가 없었읍니다.그동안 증인께서는 많은 세월을 고난과 역경속에서 지내 오셨읍니다.그 고난과 역경 그 지나온 발자취속에는 저희들이 증인에 대해서 동정을 하고 또 많이 이해를 하는 부분이 있고 또 일부 부분에 대해서는 많은 국민들이 의혹을 갖는 부분도 많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그래서 오늘 광주민주화운동과 증인이 관련된 것으로 이제까지 알려지고 있는 내란음모사건에 대해서 궁금한 점을 몇가지 묻겠습니다. 82년12월13일 증인은 건강상 치료를 받고자 미국에 가기를 원한다고 그러면서 [본인은 앞으로 국내외를 막론하고 일체 정치활동을 하지 않겠으며 일방 국가의 안보와 정치의 안정을 해하는 행위를 하지 않겠음을 약속드리면서 각하의 선처를 앙망하옵니다]라는 내용의 탄원서를 제출한 것으로 알고 있읍니다.사실입니까?

ㅇ 증인 金大中

예. 그런 것을 낸 것은 사실인데 그것은 제가 먼저 가겠다는 것이 아니고 정부에서 가달라고 얘기하는데 나중에 요식을 꾸밀 때 그렇게 꾸민 것입니다.그리고 제가 미국에 가서 그 정치활동을 했는데 그때는 대사관에다가 다 통고를 하고 내가 법적 책임진다고 말하고 했읍니다.(李敏燮간사, 文東煥위원장과 사회교대)

ㅇ 辛卿植위원

이어서 82년12월13일 탄원서를 내기에 앞서서 81년1월23일 내란음모사건이 대법원에서 상고를 기각하기 5일전인 1월18일 증인은 [본인의 행동으로 국내외에 물의를 일으키고 이로 인하여 국가안보에 누를 기친 데 대하여 책임을 통감하며 진심으로 국민앞에 미안하게 생각해 마지 않습니다. 본인은 앞으로 자중자숙하면서 정치에는 일체 관여하지 아니 할 것이며 오직 새 시대의 조국의 민주발전과 국가안보를 위하여 적극 협력할 것을 다짐하는 바 입니다]하는 내용의 탄원서를 그 당시에도 제출했읍니다. 여기서 서명하고 지장을 찍고 그랬는데 사실입니까?

ㅇ 증인 金大中

예. 그렇습니다.

ㅇ 辛卿植위원

제가 지금 이 두가지를 인용한 것은 아까 위원들 질문에 답변하실 때 무기로 되었다가 또 감형되었다가 출옥하고 이게 무슨 법을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냐 그런 질문을 했을 때 증인께서 답변하시는 과정에서 사실 근거없는 죄명으로 그렇게 되었었고 내가 나오게 된 것은 국내외 전세계의 여론의 압력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는 지금 이 두가지 탄원서가 증인이 감옥에서 나오는데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전적으로 이 탄원서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 아니라 이 탄원서도 일부 영향이 미쳤지 않았겠나 이런 생각을 하는데 증인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ㅇ 증인 金大中

그것은 거꾸로 입니다.저를 죽이려다가 도저히 죽일 수 없으니까 나중에 살릴 때 요식행위를 갖추면서 그것을 써 달라고 해서 써준 것이고 미국갈 때도 그쪽에서 가달라고 했는데 제가 안간다고 했으나 밖에서 저희 동지들이 내가 미국가야만 다른 사람도 석방이 된다 그래서 또 치료도 급한 면도 있고 해서 갔는데 정부가 먼저 방침을 결정해 놓고 요식행위로 그런 것을 다 써 달라고 한 것입니다.

ㅇ 辛卿植위원

아까 말씀하시는 가운데 李鶴捧위원이 회유를 하는데 절대 양보하지 않겠다고 말씀도 하셨고 또 양보를 하지 않았다고 말씀도 하셨고 또 양보를 하지 않았다고 그러셨는데 그런데 이 탄원서만큼은 써달라고 한다고 그대로 써서 친필로 쓰고 또 지장까지 찍은 것은 좀…

ㅇ 증인 金大中

제가 양보 안 한다는 것은 제가 용공분자라는 것을 승인한 것은 목숨걸고도 양보를 안 했다. 나머지는 그때 사정으로 할수 없어서 허위자백도 했다 그렇게 말했읍니다.

ㅇ 辛卿植위원

그러면 이것도 허위자백하는 그런 범주에 속하는 탄원서였읍니까?

ㅇ 증인 金大中

그것은 요식행위로서 필요하다고 느꼈기때문에 써준 것입니다.그리고 제가 거기 썼지만 미국가서 국가에 해된 일 하거나 안보를 해친 일 한일 없읍니다.

ㅇ 辛卿植위원

탄원서 두가지에 전부 정치를 안 한다는 것을 강조를 하셨는데 정치를 안 하신다고 강조를 해 놓았는데 그것은 그때 그러면 실제로 정치를 안 하겠다는 심정으로 탄원서에 서명을 하셨던 것입니까?아니면 내가 여기서 지금 너희들이 써달라니까 써주지만 두고 봐라 내가 나가서 정치할 것이다. 그런 마음을 갖고 계셨었던가요?

ㅇ 증인 金大中

그때 미국갈 때 쓸 때는… 처음에 사형이 감형될 때는 다시 정치한다는 것을 생각도 할 수 없는 환경이었고 미국갈 때 쓴 것은 양쪽 제가 71년 국회의원선거때 자동차로 저를 깔아 죽이려고 해가지고 다친 복관절때문에 치료가 굉장히 그땐 긴급했읍니다.양쪽 치료하는데 1년 걸려요. 수술하면… 그래서 미국가서 정치한다는 것은 전혀 생각할 수가 없는 상황이어서 그래서 정치 어차피 못하는 것이고 또 요식이 그렇게 되어 있으니까 나올 때는 누구든지 다 그렇게 씁니다.형집행정지로 나올 때는… 요식이 그렇게 되여있는 것이니까 그렇게 써준 것이지요.

ㅇ 辛卿植위원

그 자동차사고는…

ㅇ 증인 金大中

그런데요 그 요식이 어쨌건 정치활동 안한다고 해놓고 했지 않느냐? 그것이 순거짓말 아니냐? 그러면 나 그 점에 대해서도 항변 안합니다.

ㅇ 辛卿植위원

그 자동차사고관계는 그 당시에 참 증인께서도 잘 아시겟지만 저도 신문기자로서 그때 신민당출입을 하면서 여러가지 내용을 참 많이 알고 있읍니다. 그런 관계는 이제 나중에 또 언제 언급될 날이 있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지금 말씀하시는 가운데 증인께서 미국가신 뒤에 정치활동 하시지 않았다 그런 말씀을 하셨읍니다. 거기에 대해서 몇가지만 묻겠읍니다. 증인은…

ㅇ 증인 金大中

하지 않았다고 말은 안했는데요. 가서 치료받으면 정치활동을 할래야 할 수 없고 상황이 그러니까 안한다고 했는데 아까 말한 바와같이 미국가서 보니까 이제 좀더 설명하면 치료를 받을 수… 수술을 받아보았자 아무 효과가 없기 때문에 의사가 그만 두라해서 수술은 안받았어요.그래서 자연히 그런데 세계각국에서 기자들이 몰려오고 이래서 그것을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환경인데다가 그 당시 정부에서 여기서 가기 전부터 지금도 그것을 유포하고 있는데 제가 정부로부터 거액의 돈을 받아가지고 정치활동을 안하기로 했다 이렇게 말을 유포를 했어요.그래서 제가 미국에 있는 우리 대사관에 사람을 보내 가지고 내가 이런 약속을 하고 왔는데 첫째는 내가 수술을 안받게 되니 도저히 기자나 이전 교포들의 요청을 피할 수가 없고 둘째는 또 당사자들 측에서 이렇게 허위정보를 유포하니 나로서는 그것을 가만히 있으면 시인한 것이 되니까 내가 정치활동을… 정치적 발언을 안할 수 없는데 다만 내가 국가를 해치는 얘기는 절대 안한다 그 대신 내가 여기서 정부의 정치를 비판하는 얘기는 하겠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내가 형식적으로 약속을 안지키고 또 법에 저촉된다면 돌아가서 책임을 지겠다 이렇게 분명히 통고를 하고 제가 시작했읍니다.

ㅇ 위원장 文東煥

이것이 어떻게 광주민주화운동하고 관계되는지 의문스럽습니다.

ㅇ 辛卿植위원

이 광주민주화운동과 증인에 대한 내란음모죄는 지금 우리 광주특위에서 처음부터 거론되었던 것이고 또 이 내란음모관계에 대해서 증인께서 우리 청문회에서 말씀을 하시겠다고 이미 말씀하셨기 때문에 이것은 마땅히 여기에서 거론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 위원장께 말씀드립니다.이 다음에 속기록을… 제가 지금 언뜻 잘못 들었는지 혹시는 증인께서 착각을 하시는지 모르겠읍니다마는 조금전 말씀하시는 가운데 또 사실 미국가서 내가 정치관계 안했고… 그런 말씀을 하신 것으로 저는 알고 있읍니다. 그래서 그런 질문을 했었읍니다.그 미국 가가지고 계신 동안에 도착하신지 한 6개월후에 [워싱턴]에 인권문제연구소를 설치하고 "행동하는 양심"이라는 신문을 발간하셨읍니다. 또 20여회에 걸쳐서 강연회 연설회를 다니시고 기자회견을 하셨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83년5월11일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프래아멘트 호텔]에서 저희 교포들과 강연회를 갖고 끝난 뒤에 질문 응답을 하는 과정에서 한국의 민주화목적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미국은 한국정부에 경제적 압력을 행사해야 한다 그런 말씀을 하신 것으로 저희가 알고 있고 또 84년3월27일 교포언론에 배포된 보도자료에 보면 미국은 내정간섭은 할 수 없지만 경제 무역상의 조치로서 격려도 하고 불만도 표시할 수 있을 것이다. 또 84년6월21일 [시카고트리분]지에 기고하신 것을 보면 대한경제원조를 全斗煥정권에 대한 상벌로 이용해야 한다 이런 말씀들을 하신 것이 보도되었읍니다.이같은 활동은 정치활동에 속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시는지요? 그리고 또 하나는 그 당시 국내에서는 전자제품 등에 대해서 일부 미수출품에 그 [덤핑] 판정을 하는 등 미국 수출에 아주 우리가 애로를 겪고 있을 그 무렵이었습니다.

그런데 증인의 정치적 소신이나 또는 정치적 신념에 반한다 해가지고 우리 경제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는 이러한 발언을 지도적 입장에 계신 증인으로서 그것도 국내가 아닌 국외에서 그런 말씀을 하신 데 대해서 저희들은 정말 가슴아프게 생각을 했읍니다.과거에 그 자유당말기에 維石 趙炳玉선생께서 그 당시 국회의 파동때 자유당의 독재는 밉지만 빈대잡기 위해서 초가삼간을 태울 수 없다.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이 오늘날까지 다들 알고 있는 얘기인데 우리나라에서 증인에 대해서 여러가지 문제가 있다고 해가지고 외국가셔가지고 한국에 대한 원조문제 경제문제 이런데 대해서 이렇게 비판적으로 말씀하신 것을 저희는 참 안타깝게 생각하고 또 이런 일은 있어서는 안 될것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는데 증인께서는 어떻게 생각을 하십니까?

ㅇ 증인 金大中

저는 그것을 정치활동으로 보신다면 아무 이의가 없읍니다. 그리고 제가 미국에 대해서 우리나라 안보에 해된 일을 하라는 것은 아니고 경제문제에 있어서 미국이 한국이 민주주의를 잘하면 경제를 더 많이 지원하고 못 하면 줄이고 하는 이런 것을 하나의 지렛대로 쓸 수 있다 말했는데 저는 그점에 대해서는 그렇게 후회하지 않습니다.왜냐하면 민주발전은 경제의 발전보다 더 중요합니다. 민주주의없이 경제만 발전되면 오늘 우리가 본바와 같이 부익부 빈익빈 오히려 국가의 안전이라든가 사회의 평화라든가 동족간의 서로 화해에 도움이 안 됩니다.따라서 독재자가 소수에게 부를 집중시킨 그런 경제발전이 큰 의미가 있지 않습니다.아까 維石선생 말씀을 했는데 저도 미국에서 망명때도… 73년 망명때도 아까 말같이 망명정부수립한다는 얘기는 취소시키고 대한민국을 절대 지지하는 그것을 제1조로 내세운 초가삼간을 태우지 않는 일을 했고 또 저 나름대로 아까도 말씀 했지만 저에게 그렇게 모진 박해를 가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제가 정치보복하지 말라는 그런 정도의 저 나름대로의 초가삼간을 안 태운 배려를 하고 있읍니다.그러나 독재하고 싸우는데 있어서 제가 미국으로 하여금 독재를 지원하는 그런 방향의 경제협력은 안 하는 것이 좋다는 것은 제가 그렇게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