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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청문회 속기록] 제 144회 국회(페회중) 5·18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 회의록 제 7 호(5)

본문

제 144회 국회

5·18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 회의록 제 7 호(5)

ㅇ 위원장 文東煥

시간이 많이 지나갔기 때문에 핵심적인 것만 해 주세요.

ㅇ 金光一위원

이것 한 마디만 하고 마치겠읍니다.

ㅇ 위원장 文東煥

마지막이 세번째인데 이것을 정말 마지막으로 해 주세요.

ㅇ 金光一위원

예. 尹潽善 전직대통령은 증인과 더불어 76년도에 징역 5년을 받은 일이 있고 또 1979년 YWCA 위장결혼사건에서 징역 2년을 받은 바 있읍니다.전직대통령이라고 해서 사법적 처벌을 해서는 전혀 안된다고 생각하십니까?

ㅇ 증인 金大中

안된다는 것이 아니고요. 저는 그런 개인적 심경을 가지고 있고 또 저희 당은 정치보복을 안 한다는 당의 정책을 가지고 있고 또 우리는 독재정권이 尹潽善선생이나 그런 분한테 한 것을 나쁘다고 하면서 우리가 그것을 모범받을 필요는 없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읍니다.

ㅇ 金光一위원

사후에 처벌은 안 하더라도 조사와 재판까지는 받아야 된다고 생각 안 합니까?

ㅇ 증인 金大中

예.

ㅇ 위원장 文東煥

이제는 그만큼 하시고 될 수 있는 대로 우리 질문은 입증취지에 될 수 있는 대로 벗어나지 않는 각도에서 해 주시기를 부탁드리면서 이번에는 신민주공화당의 金文元위원 말씀해 주세요.

ㅇ 金文元위원

신민주공화당의 金文元입니다.증인님 아시다시피 저는 경기도의정부출신입니다. 오늘 참 어려운 걸음을 하셨습니다. 광주사태의 주역으로 주목되는 崔圭夏 전대통령이나 또는 全斗煥 전대통령이 나오지 않는 자리에서 이렇게 참 어려운 발걸음을 하셨습니다. 우선 그 두 분이 안 나온 사항에 대해서 증인께서는 뭐 느끼시는 점이 있읍니까 우선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ㅇ 증인 金大中

저는 그 두 분이 꼭 나왔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崔圭夏 전대통령은 그렇게 막중한 국민적 기대와 신임을 갖고 있으면서 그러한 결과를 가져온 데 대해서 국민에게 대해서 왜 그렇게 되었는지 소상하게 밝힐 아주 피할 수 없는 책임이 있습니다. 또 全斗煥씨는 광주에서의 사건이 그 당시 대통령인 崔圭夏 국방부장관 周永福 참모총장 李熺性등 지휘계통에 있지 내게 없다 이렇게 말한 일이 있는데 본인이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오늘 여기 국민앞에 나와서 자기 입장을 밝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두 분이 안 나온 것은 대단히 유감이라고 생각합니다.

ㅇ 金文元위원

저도 증인과 꼭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증인께서는 워낙 해박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제가 잠깐 좀 질의를 하기 전에 저의 약간의 느낌을 말씀드리겠읍니다마는 [아놀드 토인비]의 역사연구라는 것을 아마 읽으셨을 것입니다. 저도 읽었읍니다. 거기에 서문에 무슨 얘기가 나오느냐 하면 역사는 반복한다 하는 얘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주체와 객체가 다를 뿐이지 여사는 어느 시대에 가면 또 같은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 역사의 속성이다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오늘 사실 증인을 앞에 놓고 제가 또 신문자로서 얘기를 하면서 참 역사는 반복한다 하는 것을 절감을 합니다. 예를 들어서 그 당시 80년대에는 3金씨 金鍾必총재 또 金泳三총재 앉으신 증인 이 세분이 총칼의 억압을 받고 구속을 당하고 연금을 당하고 했는데 요새에는 근자에 와서는 이제 全斗煥 전대통령이 그 행위를 저질렀던 그 분이 이번에는 총칼에 의해서 연금을 당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민심에 의해서 민심의 억압속에 지금 있어가지고 꼼짝도 못하고 있는 상황속에 있읍니다.

그래서 야! 참 역사의 반복성이라고 말씀한 [토인비]의 얘기가 참 맞는구나 하는 것을 저는 요사이 절감을 하고 있는 그런 상황에 있습니다. 제가 증인께 말씀올리고자 하는 것은 이 청문회라는 것은 미국에서도 아시다시피 [히어링]입니다. 주로 증인의 말씀을 많이 듣고 또 그 당시의 상황 역사관 그리고 증인이 가지고 있는 자기 나름대로의 소신 이런 것을 많이 듣는 것이 일종의 청문회의 역할을 하고 그때그때 의문이 나는 것을 살짝살짝 물어보고 거기서 또 질의자가 판단하는 그러한 형태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많은 기회를 증인께서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가 드리면서 그러나 질문을 좀 가급적이면 많이 하는 방향에서 많이 듣기로 이렇게 결정을 하고 제가 질의를 하겠습니다. 질의에 들어가기 전에 이것은 증인께서도 아시다시피 이 자리는 국민 전체가 지켜보고 있고 또 이 말씀 한 말씀 한 말씀이 역사의 기록으로 남아서 먼 훗날 우리 후손들이 보고 읽고 느끼고 그리고 역사의 방향을 잡아가는 그러한 중요한 자리이기 때문에 조금 아까 증인께서 여러가지 말씀을 하셨읍니다마는 몇가지 좀 납득이 안 가는 것이 있어서 증인께서 좀 친절히 이 말씀을 좀 대답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첫째는 아까 어느 분이 말씀하시기를 신민당 결별을 왜 했느냐고 물어보신 적이 있읍니다. 그런데 그때 증인께서 말씀하시기를 그 당시에 시국관이 달랐다 全斗煥씨가 중앙정보부장이 된 사실을 가지고 나는 대단히 중대한 문제로 보았고 이것이 역사에 굉장한 오점을 남기는 일이기 때문에 사실 그것을 주창을 했읍니다마는 신민당측에서는 그것에 대해서 과히 그렇게 큰 반응을 안 보이고 그대로 민주화개혁을 추진해 나가자는 그러한 의사상충이 있어서 신민당을 결별했다 이런 말씀을 하셨읍니다.그런데 사실 인간의 어떤 사상이나 생각이라는 것이 일관되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항상… 저는 그렇습니다. 그래서 혹시나 잘못 착각을 하고 계시는가 해서 제가 한 말씀 여쭈어 보겠읍니다마는 全斗煥씨가 중앙정보부장에 취임한 것이 제가 알기로는 4월14일입니다. 14일로 제가 기억을 합니다. 그런데 金大中고문께서는 그 당시에 4월7일 결별선언을 하셨어요. 그래서 혹시 이 문제가 무슨 착각을 하고 계시지 않는가 그 당시 시대상황을 보시는데 이것이 기억이 좀 잘못되시지 않았나 생각을 하는데 이 문제를 우선 어떻게 생각을 하시는지 이것은 좀 바로잡고 나가야 될 것같아서 제가 여쭈어 보는 것입니다.

ㅇ 증인 金大中

그 당시 신민당과 저 사이에는 서로 직접 또는 여러가지로 대화가 있었읍니다. 그런데 저는 계속 시국이 민주주의가 위태롭다고 그러고 이것은 언론에 난 얘기만 합니다.신민당측에서는 민주화는 제대로 되는 것인데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라는 것을 또 공식으로 언론에 보도가 되었읍니다.그러한 생각이 나중에 全斗煥씨가 정보부장 되었을 때에도 그렇게 반응의 차이가 언론에 그렇게 나왔습니다. 그래서 시국관이 신민당은… 신민당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신민당이나 상당수의 사람들은 이대로 민주주의가 된다고 보았고 저는 민주주의가 대단히 위태롭다고 보아서 그래서 신민당을 제가 지금 신문이 저기 있읍니다마는 보면 민주화가 확정된 후로 신민당 입당문제는 다시 협의하겠다 이렇게 제가 얘기했읍니다.

ㅇ 金文元위원

제가 말씀올리고자 하는 것은 그 주원인이 全斗煥씨가 중앙정보부장에 취임을 했기 때문에…

ㅇ 증인 金大中

그것만이 주원인은 아닙니다.

ㅇ 金文元위원

그것은 주가 아니다 이런 말씀이지요.그러니까 그 당시에 착각을 좀 하신 것으로 저는 보겠읍니다.

ㅇ 증인 金大中

날짜가 다를는지도 모르겠읍니다.

ㅇ 金文元위원

날짜가 다릅니다.4월14일하고 결별선언은 그 전에 하셨으니까 이런 문제는 교정을 해 나가는 것이 좋습니다.그 다음에 아까 말씀하시는 것을 한마디 한마디 빼놓지 않고 가슴에 담았읍니다.그중에 이런 말씀을 하셨읍니다.그 당시 5·17조치이전에 학생들이 다소 나의 말에 영향력을 대단히 받고 있었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는데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학생들이 증인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ㅇ 증인 金大中

그때보다는 훨씬 못하다…

ㅇ 金文元위원

훨씬 못하다 알겠습니다. 그 다음에 제가 한가지 묻고자 하는 것은 광주사태가 처음에 발발했을때 그당시 광주사태 발발을 50일후에 들으셨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때 듣는 순간에 어떤 느낌을 가졌고 어떠한 일을 해야겠다 이런 생각이나 순간적으로 느낀 결심이 있었으면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ㅇ 증인 金大中

아까도 말했지마는 李鶴捧씨가 시켜서 넣어준 신문보고 알았는데 그 발표를 보니까 계엄사령부 발표에 이런 문구가 있었습니다. 5월18일 아침에 金大中체포의 보도를 듣고 말하자면 폭도가 일어나 가지고 사건을 일으켜서 얼마얼마의 사람이 죽었다 이렇게 계엄사령부 발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당시 광주시민들이 제 체포에 대해서 석방하라고 주장하다가 그렇게 죽었다는 것 그 자체가 벌써 다른 문제보다 너무도 충격이 와 가지고 제가 아까도 말씀했다시피 반기절하다시피 쓰러지니까 와서 [링겔]주사를 놓고 그렇게 했읍니다.

ㅇ 金文元위원

그랬읍니까? 알겠읍니다.지금 말씀이 상당히 감명적이었읍니다.일반 사람들이 상식으로는 이 문제를 짚고 넘어가야 될 것 같습니다.무엇이냐 하면 우리 대한민국이 법치국가입니다.법치국가인데 金大中증인께서 사형까지 받으셨어요. 사형까지 받으셨다가 결국은 미국행 비행기까지 타셨다 말씀입니다. 형집행정지가 되어가지고… 아까 말씀하신대로 3월1일 감형이 되었고 82년2월23일에 또 감형이 되었고 그리고 한국에서 미국으로 가는 도중에 형집행정지처분을 받으셨다 이러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이런 법치국가에서 도대체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것이 사형언도까지 받으셨던 분이 또 이렇게 되고 나는 이것을 무엇이라고 보냐 하면 5·17세력이 법을 저희들 마음대로 주물러서 죽일 사람도 살리고 살릴 사람도 죽이고 하는 그런 무법한 행동을 함부로 저지르고 있었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ㅇ 증인 金大中

그러니까 제가 그때 알고 있기로는 아까 李鶴捧씨 말에도 나오지만 그들이 꼭 저를 죽이려고 했는데 너무 근거없는 짓같고 하기 때문에 국민은 물론 세계 여론이 참으로 물끓듯이 비등했습니다. 각국 의회에서 사형반대결의도 하고 또 노동조합들이 만일 金大中을 사형에 처하면 한국 화물의 작업을 거부하겠다고도 하고 전세계 종교단체가 움직이고 그래서 차마 못 죽이고 감형했다가 감옥에 있는 것도 계속 세계적으로 규탄을 하니까 할 수 없이 미국으로 보낸 것으로 그렇게 알고 있읍니다.

ㅇ 金文元위원

결국은 5·17 세력의 무법적인 처사를 반증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겠군요. 두번째는 광주사태로 인한 불행했던 과거는 우리 민족이 철저히 원인 규명을 해야 되겠습니다. 이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누가 피해자이고 누가 가해자이고 또 이 민족의 가슴에 총을 겨눈 사람이 누구냐 하는 것까지 다 밝혀내야 하는 입장에 있읍니다마는 동시에 이 크나큰 상처를 어떻게 아물리느냐 하는 것도 상당히 저는 중요하다고 봅니다. 역사적인 의미로 대단히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것이 상처를 아물려 나가는 데에 있어서 증인께서는 광주사태의 피해자로 자처를 하고 계십니다마는 증인 한 분으로서는 아물리는 작업이 대단히 어렵다고 저는 이렇게 봅니다.결국은 세 金씨 그리고 또 더한다면 盧정권 이 네 분의 지도역량과 정치적인 역량을 발휘해서 이런 문제의 상처를 아물려 나가야 되는데 이 상처를 아물리는데 있어서 주도적인 역할을 할 용의가 있으시겠지요?

ㅇ 증인 金大中

저는 그 문제에 있어서는 金위원께서도 국회에서 제 연설을 들으셨지만 계속 성의있는 노력을 하겠다는 것을 다짐하고 해 왔읍니다. 그런데 이 광주민중항쟁 문제는 천하를 갖고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인명을 권력이 함부로 살상한 그러한 반인간적인 행동이기 때문에 그 진상이 철저히 밝혀지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는 조치가 취해져야 그 한이 풀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광주문제는 우리나라가 민주주의로 가는 맥을 절단한 그런 반민주적인 [쿠데타]이기 때문에 이것에 대한 철저한 청산과 척결이 있어 가지고 민주화의 길로 나가야 정통성이 다시 이어진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돌아가신 영령들의 뜻에 보담하고 그 죽음을 값있게 하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정치권이 전부 협력하고 특히 盧泰愚정권이 앞장서서 이런 길로 나갈 때 우리는 거기에 응분의 협력을 하겠다는 것을 계속 다짐해 왔읍니다.

ㅇ 金文元위원

10·26이후의 모든 사람들이 정국을 가르켜서 유행어처럼 안개정국이라고 전부 그랬습니다. 그 당시의 솔직한 말씀입니다마는 세 金씨께서는 대권을 향해서 열심히 뛰셨던 상황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 우리 국민들은 어떻게 생각을 했느냐 하면 이 세 金씨가 [페어 플레이]를 해서 당당한 [플레이]를 해가지고 빨리 민간정부가 탄생되어야겠다는 소망이 전민족적으로 퍼져 있었다고 저는 봅니다. 그런데 결국은 그 이후에 국민들께서는 심지어 세 金씨의 대권 주자가 대권을 향해서 뛰는 것에 대해서 부정적인 측면도 가지고 계신 분도 있다는 것을 아시고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세분의 대권 주자중에서 가장 먼저 말하자면 대학에 들어가셔서 대학에서 강연을 하신 분은 증인이십니다. 제가 알기로는… 거기에서 제일 먼저 시국강연도 하셨고 정치강연도 하셨고 그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부 군부세력이 무엇이라고 그러느냐 그러한 학생들을 선동하고 학생들에 대해 시국강연을 해가지고 결국은 우리가 총칼로 눌렸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읍니다마는 일부 식자들은 무엇이냐 하면 이러한 것이 분명히 군부로부터 정권을 잡게 한 빌미를 준 것만은 분명하다. 이런 말씀들을 많이 합니다.이것에 대해서 증인께서 어떻게 생각을 하시는지 설명을 해 주십시오.

ㅇ 증인 金大中

저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대학교에서 강연한 것은 민주주의하는 나라치고 당연히 있는 일이고 또 그 강연 내용이 무슨 파괴적 선동적이었던 것도 아니고 또 강연의 결과로 어떤 파괴행위가 단 한건도 일어난 일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 강연을 통해서 학생들이나 모든 사람들에게 자제와 질서유지를 당부했지 그러한 혼란을 일으킨 일이 없기 때문에 군부에서 한 말은 전연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ㅇ 金文元위원

그러니까 그 사태는 일부 정권욕에 찬 군인들이 조작해서 만들어내서 정권을 잡는 그런 형태의 시국이 흘러가고 있었다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이지요?

ㅇ 증인 金大中

그렇지요.

ㅇ 金文元위원

알고 있겠읍니다마는 그런데 이것이 또 중요한 말씀입니다마는 5월16일 밤부터 17일 새벽까지 55개 대학생들이 시위를 자제를 해야겠다 군이 나오면 큰일 나니까 군에 빌미를 주어서는 안되겠다 해가지고 스스로 자제를 했읍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군인들이… 아까도 증인께서 말씀하셨읍니다마는 군인들이 [캠퍼스]에 들어가가지고 일부 학생들을 잡아끌어내고 이래가지고 학생들을 흥분시키고 또 분노를 시킨 그런 사례들이 곳곳에서 발견이 되고 있읍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이것을 역사적인 측면에서 보면 어떻게 이것이 상당히 중요한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마는 학생들이 흥분하고 군인들이 가서 끌어냄으로 해서 학생들이 흥분한다는 그런 상황을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ㅇ 증인 金大中

저는 군인들이 아까 말같이 5월20일이 되면 도저히 이제는 자기들이 정권 잡을 [찬스]가 없기 때문에 서둘러서 여러가지로 도발행위를 했다고 생각하고 있읍니다 서울에서도 그랬고 광주에서도 그랬고 ……그래가지고 여기에서 혼란을. 더 조성시키고…… 그 증거의 하나로는 이것이 있읍니다 계엄사령부에서 언론에 대해서 예를 들면 그 당시 사북탄광사건이라든가 또 학생들의 남대문 시위라든가 저런 것을 크게 보도하도록 자꾸 계엄검열당국에서 요구를 했읍니다. 그래가지고 사진까지 제공하면서 이것 크게 내라고… 그래서 혼란을 조성하는 방향으로 신문을 내게 하고 저같이 학생들에게 자제하라고 해서 동아일보의 요청에 의해서 써준 원고같은 것은 못내게 해버리고 또 제가 학생 자제하라는 것은 계속…… 말하자면 그 사람이 눌렀읍니다. 이것은 金鍾必총재나 金泳三총재께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으로 보더라도 그 사람들의 의도는 분명한 것입니다.

ㅇ 金文元위원

그러면 사전에 말하자면 모의를 해서 정권을 탈취하겠다는 그러한 계획이 서 있다는 이런 말씀으로 요약이 되는 것으로 알겠읍니다.

ㅇ 증인 金大中

그렇습니다.

ㅇ 金文元위원

좋습니다. 다음은 제가 좀 여러가지 여쭤볼 말씀이 많습니다마는 시간이 없어서 몇가지만 그냥 말씀드리겠습니다. 증인께서 사실은 민주화운동을 위해서 노력하신 것은 저도 인정을 합니다. 저도 존경을 합니다. 그 동안 많은 협박과 또한 고문과 그리고 참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해가면서 국내에서 굉장한 민주화투쟁을 해왔다 하는 것은 누구나가 다 인정을 하고 있고 본인도 그렇게 인정을 하고 있읍니다마는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일부 식자들간에는 사람들간에는 외국에서의 그 동안 다니면서 많은 강연도 하시고 정치활동도 하신 것으로 제가 알고 있읍니다마는 여러가지 활동상황이 불분명했던 점도 많다 이렇게들 사실 얘기들을 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아마 증인께서도 많이 들으셨으리라고 믿습니다. 심지어는 말씀하시는 분은 외국에서 민주화운동을 하는 것 이상으로 딴 일에 또 종사를 하셨다 뭐 이런 식의 얘기도 나오고 있읍니다마는 이것이 분명 이 자리에서 그 문제에 대해서 [크리어]를 하셔야 할 그런 입장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어떤 시각을 가지고 계신지 좀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ㅇ 증인 金大中

그 딴 일이라는 것도 얘기하시지요 딴 일이라는 것도 말씀하세요 그래야 제가 다 얘기하니까……

ㅇ 金文元위원

아니 ‥‥ 예를 들어서 민주화운동하고 그 다음에 여러가지 단체에……

ㅇ 위원장 文東煥

딴 일이 광주사건과 관련된 것인지를 설명해주셔야 대답할 것입니다.

ㅇ 金文元위원

예. 광주사태와 관련된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예를 들어서 한민통같은 데 한민통의 회장으로 이렇게 추대를 받았다든지 이런 문제에 대해서 상당히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분도 계신데 이런 문제에 대해서 좀 짚고 넘어가시는 것도 좋을 것같습니다.

ㅇ 증인 金大中

예. 그러지요 여하간 그 문제에 대해서 얘기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10월17일 유신선포때 일본에 치료받으로 갔다가 거기서 만나가지고 그 당시 국내는 계엄령 선포하고 완전히 독재체제하에 들어갔기 때문에 저라도 밖에서 민주화를 위해서 싸워야겠다 중국의 손문선생같은 분을 생각하면서 그런 제자가 되는 셈잡고 싸워야겠다 이렇게 해서 망명생활을 하면서 투쟁을 했읍니다. 그런데 이 투쟁하는 과정에 여기저기서 강연도 하고 했읍니다 그런데 제가 미국서 한민통을 발기한 것은 사실입니다 또 일본에 와서도 그것을 조직하려고 얘기하다가 발기는 미처 못한 채 납치되어서 중단되었읍니다 그런데 제가 한민통을 발기하는데 두가지 원칙이 있었읍니다. 하나는 대한민국 절대 지지 둘째는 선민주회복 후통일 이 두가지 원칙을 말하자면 내세워서 그것을 확인시키고 일을 추진했습니다.

따라서 저는 항상 말하기를 우리는 독재정권을 반대하는 것이지 대한민국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서 한민통 결성할 때 어떤 사람이 망명정부 세우자고 해서 그것을 즉각 취소시켰읍니다 우리는 대한민국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대한민국 있지 않느냐 그리고 일부에서는 그때 그런 독재체제가 되니까 절망적으로 민주주의는 안되어도 좋으니까 통일로 가자 이런 사람도 있어서 그것은 절대로 안된다 민주화해가지고 남한의 민주세력을 가지고 통일로 나가야 한다 그리고 일본에 와서 이것을 만드려고 할 때는 거기에 하나 첨부해서 일본은 교포들이 아시다시피 조총련계 교포들 하고 같이 뒤섞여 삽니다. 본국에서 7·4 공동성명이후로 남북이 왔다갔다 하고 특히나 유신이 통일을 위한 것이다 이렇게 朴正熙씨가 거짓말을 했지만 그대로 믿고 조총련 사람들하고 국경일행사같은 것 같이 했읍니다.그래서 이것을 중지시키고 이런 원칙하에서 했기 때문에 제가 해외에서 한 행동은 이 대한민국 국가이익에 위반된 일은 절대 한 일이 없읍니다.

ㅇ 金文元위원

그러나 조총련계라는 것이 대체로 좌익이다 하는 얘기는 일반적인 상식이 아닙니까?

ㅇ 증인 金大中

조총련은 좌익이지요 그러니까 저는 조총련하고 일선을 그었다 그 말입니다.

ㅇ 金文元위원

그래서 나중에 탈퇴를 하셨지요?

ㅇ 증인 金大中

아니오 나는 거기에 관계한 일이 없지요.

ㅇ 金文元위원

그러면 회장으로 추대되신 적이 있는데 ……

ㅇ 증인 金大中

한민통은 조총련이 아닙니다.

ㅇ 金文元위원

재일한민통……

ㅇ 증인 金大中

한민통은 조총련이 아니고 조총련하고 아무 관계도 없읍니다.

ㅇ 金文元위원

한민통은 조총련계가 아닙니까?

ㅇ 증인 金大中

아니지요.

ㅇ 金文元위원

왜 아닙니까? 재일……

ㅇ 증인 金大中

제가 설명할께요.

ㅇ 金文元위원

예 좀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십시오.

ㅇ 증인 金大中

한민통은 제가 미국서 만들고 미국본부를 …… 일본가서 민단에 …… 우리나라 대한민국 민단에 동경단부 …… 합법적인 단부입니다 단부 사람을 중심으로 해서 한민통을 만드려고 하다가 미처 만들지 못하고 제가 납치되어서 왔읍니다.

ㅇ 金文元위원

그렇습니까? 그래서 저는 이 문제가 말하자면 일반적으로 좌익이라고 해서 오해가 일부 있었던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ㅇ 증인 金大中

예. 오해가 있읍니다.

ㅇ 金文元위원

또 한가지 제가 말씀을 드리고자 하는 것은 망월동을 참배하신 날짜가 6월29일 이후죠?

ㅇ 증인 金大中

9월8일입니다.

ㅇ 金文元위원

6·29선언 이후라고 저는 보고 있읍니다마는……

ㅇ 증인 金大中

그렇습니다.

ㅇ 金文元위원

그때 한참 민주화 물결이 닥쳐가지고 그 이후에 망월동을 가신 것으로 알고 있읍니다마는 저희들의 관습으로 습관적으로는 어떤 중요한 일을 성취하겠다든가 또한 어떠한 결심을 할 때는 사실 조상의 산소나 자기가 존경하는 산소를 찾아가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읍니다. 그런데 한가지 일부 섭섭하게 생각하는 분들은 왜 망월동 묘지를 그 전에 한번도 안 가시다가 그 당시에 갔느냐 하는…… 이것은 전혀 오해 없이 들으시기를 바랍니다.그러한 문제에 대해서 상당히 섭섭하게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이 문제에 대한 과정같은 것을 좀 설명해 주실 수 있겠읍니까?

ㅇ 증인 金大中

예. 귀국후 85년2월에 귀국했는데 하루도 광주 가야겠다는 생각을 안해본 날이 없읍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제가 주로 연금하에 있었고 완전히 봉쇄속에 있었읍니다. 또 제가 잘못 가면 혹시나 혼란이 일어날까 이런 것도 걱정을 했읍니다. 그런데 6·29가 끝나고 나서 7월 8월 양달이 있었는데 제가 말하자면 그 두달 동안은 여러가지 서울에서의 상황때문에 시간을 조금 늦췄읍니다. 또 광주상황이 조금 진정된 후로 가는 것이 질서유지를 위해서 좋겠다 하는 그런 생각으로 조금 늦게 간 것입니다.

ㅇ 金文元위원

그렇습니까? 그러나 그 당시에 아무런 신체의 구속이나 연금상태는 아니었던 것만은 사실이지요?

ㅇ 증인 金大中

그렇습니다.

ㅇ 金文元위원

한가지 더 묻겠읍니다마는 공소사실에 보면 이것은 아까도 여러분께서 물어 보셨읍니다마는 80년7월4일 계엄사 수사발표에 볼것같으면 5·17 이전까지 鄭東年씨를 아까 85년 처음 만나셨고 그때 처음 이름을 아셨다고 그랬읍니다마는 거기에 鄭東年씨 이름이 나오고 홍모씨의 이름이 나오고 있습니다. 정치자금을 500만원을 주었다 이런 공소사실이 있읍니다마는 아까 85년도에 처음 만나셨고 그때 그 이름을 들었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ㅇ 증인 金大中

이름은 취조과정에서 들었고 만난 것은 85년에 만났읍니다.

ㅇ 金文元위원

이 문제에 대해서 납득할 수 있는 해명을 다시한번 해 주실 수 있겠읍니까?

ㅇ 증인 金大中

80년5월17일에 잡혀가서 한 20일동안 鄭東年 이야기가 없었읍니다. 없고 그래가지고 주로 무슨 제 주변의 조직들 이런 것을 중심으로 해서 내란음모하지 않았느냐 그랬는데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鄭東年에 대해서 아느냐 나는 모른다고 이름도 성도 모르는 사람이다 그랬더니 제가 거기에 돈주지 않았느냐 그래가지고 아까 말한 것과같이 고문하겠다고 옷도 갈아입히고 깅장히 폭언 폭설을 하고 이렇게 해서 심한 고통을 주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비로서 鄭東年이라는 사람을 들었는데 무엇때문에 鄭東年이를 가지고 이러는가 그래서 제발 사진이나 좀 보여달라고 그러면 내가 기억이 날른지도 모르니까 보여달라고 해도 사진도 안보여주고 이래가지고 鄭東年한테 돈주었다 金相賢씨가 와서 어떻게 했다 이런 말할 때 제가 부인하면 이것은 이대로 하게 되어 있으니까 이렇게 한다 그러고 鄭東年이 자술서 金相賢씨 자술서 갖다보이면서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ㅇ 金文元위원

광주사태가 발발한 원인중에는 여러분들 많은 의견이 있겠읍니다마는 지역감정에 관한 문제도 가끔 들먹여지고 있읍니다. 사실 호남쪽에서는 증인에 대해서 대단히 관심을 가지고 있고 또 지지도 있는 것으로 저는 알고 있읍니다마는 사실 이 지역감정이 지금 상당히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나가느냐에 대한 증인 나름대로의 정치적 소신이 있으면 좀 밝혀주십시오.

ㅇ 증인 金大中

지역감정문제를 물으셨는데 이것은 朴正熙씨가 집권한 이후에 생겨났지 그 전에는 없었읍니다.

ㅇ 金文元위원

근자에 와서 더욱 심해졌지요. 5·17이후부터 더욱 이것이 심화된 것만은 사실인것 아니겠읍니까?

ㅇ 증인 金大中

그것이 자꾸 [에스컬레이트]되어 왔는 것이고…

ㅇ 金文元위원

[에스컬레이트]화되어 왔지요.

ㅇ 증인 金大中

그런데 지역감정은 왜 일어났느냐 하나는 인사문제에 있어서의 차별 둘째는 지역개발에서의 차별이기 때문에 이 두가지를 먼저 해소하면서 나머지 전국민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ㅇ 金文元위원

끝으로 하나 묻겠읍니다.발포명분자가 누구냐 하는 것을 지금 분명히 밝힐 수 있겠읍니까? 심증으로 온것까지도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읍니다.

ㅇ 증인 金大中

저는 아까 말한대로 상황증거라든가 또 제가 직접 기관에 있었던 사람한테 들은 말로라든가 또 국민일반의 확신이라든가 모든 이유로해서 저는 全斗煥씨가 발포의 진실한 책임자라는 것은 해가 아침에 동쪽에서 뜨는 것과 마찬가지로 확실하다고 생각하고 있읍니다.

ㅇ 金文元위원

그러면 발포명령자는 全斗煥으로 분명히 생각하고 계시다 이런 말씀을 분명히 하실 수 있다 이것입니다.

ㅇ 증인 金大中

그렇습니다.

ㅇ 위원장 文東煥

이제 시간이… 그만큼 하시도록 합시다.모두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오늘의 청문회는 5·18광주민주화운동진상을 밝히고자 하는 청문회입니다. 구체적으로 이문제에 조사에 필요한 신문에만 국한해 주셔야 효과적이겠읍니다. 여러가지 관심이 있는 것이 많으시겠지만 될 수 있는 바로 이 취지에 집중해서 물어주시기를 다시한번 부탁드립니다.다음은 무소속인 朴燦鍾위원님께서 신문해 주십시오.

ㅇ 朴燦鍾위원

朴燦鍾위원입니다.어제 특위위원으로 교체되어서 들어 왔읍니다. 위원장께 이 청문회가 국민앞에 우리 국조권행사의 한 방법으로 공개조사하는 형태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특위가 기왕에 파악하고 수득한 과거 민화위의 광주항쟁당시의 [비디오테잎]이라든지 이런것이 어떤 방법으로든지간에 우선 공개해야되는 것이 저는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집중적으로 피해자를 먼저 다 신문을 하고 그 이후 일응 가해자측이라고 할 수 있는 군과 정보관계인사들을 신문하는 것이 옳은 의사일정이라고 저 개인은 그렇게 생각합니다.이후 위원장께서 이러한 의사일정조정에 저의 이런 생각을 반영할 기회를 주시기 바랍니다.증인께 묻겠읍니다.증인께서는 80년봄 당시 우리 정국이 힘내지는 권력의 진공상태부분이 상당히 있다하는 이런 인식을 어느정도 하셨읍니까?

ㅇ 증인 金大中

아까 말씀과 같이 민주화가 대단히 어렵게 되어가고 있다고 걱정할 정도로 했지요.

ㅇ 朴燦鍾위원

그 구체적인것은 崔圭夏대통령이 곧 폐기될 운명에 있는 당시 유신헌법절차에 따라서 다시 체육관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고 그 임기가 전임 朴대통령의 잔임기가 되는 것인지 아니면 崔대통령 자신의 절대적 임기를 다 행사하는 것인지도 가장 불분명했고 이것이 정국의 진공상태에 가장 큰 요인이었다고 생각합니다.증인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ㅇ 증인 金大中

저는 그때 국민적 일반적인 상식이나 합의는 이 국회에서 양단간에 헌법개정안이 통과되면 그 부칙에 의해서 당연히 새로운 대통령 선거가 있기 때문에 崔圭夏씨의 임기는 오래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문제보다는 아까 말같이 崔圭夏씨의 우유부단한 태도 申鉉碻씨를 중심으로 한 정부에서의 이원집권제의 음모 그리고 군인들의 영구집권에 대한 획책 그런데다가 이 계엄령해제가 늦어진 이런 등속이 정치에 대해서 불안요인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읍니다.

ㅇ 朴燦鍾위원

10월17일 부산 마산지역 일부지역에 계엄이 선포되고 10월26일 제주도를 뺀 전국에 확대된 그 계엄은 제 생각으로는 12월6일 崔圭夏씨가 통대대의원회에서 대통령에 선출되고 12월20일 정식으로 취임식을 가졌고 그 당시에는 이미 학원도 조용했을 뿐아니라 전혀 계엄을 유지할 요소가 저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崔정부가 그러한 무리한 출범이지요. 정치도의상도 그렇고 도의적으로도 그러한 무리한 출범이지만 그 출범으로서 당시 그 계엄은 이미 분명히 소멸하여야 할 절대적상황이라고 생각하는데 증인! 동의하십니까?

ㅇ 증인 金大中

예.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ㅇ 朴燦鍾위원

그러면 80년봄에 와서 증인께서는 5·17… 더더욱 계엄을 확대내지 강화하는 조치가 언제쯤 구체적으로 예생되셨읍니까?

ㅇ 증인 金大中

계엄확대 강화는 제가 그것을 자체를 예상했다는 것 보다는 이 崔圭夏정권이 민주화일정을 도무지 발표하지 않고 언제까지 헌법 해가지고 언제까지 선거한다는 말을 하지를 않고 또 申鉉碻씨가 무슨 선거를 그 다음해에 한다느니 또 정부가 갑자기 헌법개정위원회를 만들어가지고 구라파로 조사를 보내고 이렇게 해서 국회에서 하고 있는 헌법개정안을 놔두고 무시하고 그렇게 하는 상태 이런 등속을 정부가 하는 것을 보고 이 사람들이 말하자면 딴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생각을 했고 그리고 全斗煥씨가 차츰 힘을 발휘하기 시작을 하고 그래 가지고 합동수사본부라고 계엄법에 없는 기관을 가지고 그야말로 전권을 행사하는 그런 상황을 보고 우리가 상당히 위기의식을 느낀 것이지요.

ㅇ 朴燦鍾위원

5월5일 시국수습대책협의회를 증인께서 제안하셨고 그러시지요? 5월5일 …

ㅇ 증인 金大中

오래되어서 기억이 잘 없네요.

ㅇ 朴燦鍾위원

李宅敦씨가 東橋洞 자택에서 기자들에게 발표한 시국수습대책협의회입니다. 그 당시에 5월15일 난국수습을 위한 비상시국대책회의소집을 제안하셨는데 여기에는 당시 총리 계엄사령관 그 다음에 각 당의 총재 각 대학의 총장등 종교계 지도자들도 포함이 되어 있읍니다. 이것을 성명하신 사실이 있지요? 제안하신 사실이 있지요? 이 5·15에 제안하신 비상대책회의 이것은 증인께서 당시에 이미 아까 우리 동료위원들이 쭉 질문에 나왔읍니다마는 이미 이때는 결과론이지마는 일부정치군인들이 확고한 의지와 [시나리오]와 [드라마]를 가지고 권력찬탈을 구체적으로 도모하고 있었을 때입니다. 결과론입니다마는 증인이 5월15일 비상시국대책회의 제안하실 이 싯점에 있어서는 군의 직접적 개입이 절박했다 하는 상황인식을 하신 것입니까?

ㅇ 증인 金大中

그런 위험을 느꼈기때문에 마지막 타결의 시도로서 그런…

ㅇ 朴燦鍾위원

예. 좋습니다.저 개인도 지나간 일이지마는 증인께서 제안한 이 안은 그 당시 안으로서는 대단히 훌륭한 안이었다고 생각됩니다. 문제는 이것이 제안에서 그치고 말고 그 회의체가 성립되지 못하고 말았읍니다. 그 못한 이유는 증인께서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ㅇ 증인 金大中

그것은 주로 崔圭夏정부가 그런것 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ㅇ 朴燦鍾위원

그러면 나머지 여기 참석[멤버]로 제안하신 계엄사령관 또 증인과 잠재적 경쟁적 위치에 있었던 金泳三총재 또 金鍾必총재 통일사회당대표 金추기경을 비롯한 각계 종교계지도자 또 국민연합의장 尹潽善 전대통령 咸錫憲선생 그리고 서울대 고대 연대 이대 유수한 대학의 총장 이 분들의 동의는 받으셨읍니까?

ㅇ 증인 金大中

그게 5월15일이지요?

ㅇ 朴燦鍾위원

5월15일입니다.

ㅇ 증인 金大中

그렇게 발표해가지고 접촉도 못한 차에 5월17일이 와버린 것이지요.

ㅇ 朴燦鍾위원

결국 이것은 증인께서 군의 정치개입의 결정적 시기를 다소 소홀한 판단을 하셨다는 것을 지금와서 시인하십니까?

ㅇ 증인 金大中

저는 거꾸로 생각하는데요. 그런 위험성이 절박하니까 마지막으로 모두 모여서 그러면 군도 참가해서 같이 한번 얘기를 해보자… 최후 시도지요

ㅇ 朴燦鍾위원

저의 논리는 이렇습니다.군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는 집단이고 거기에 일부정치군인들이 강력한 물리적 폭력을 가지고 제도권내의 야권 정치인들을 그것 가지고 위협하고 제압해 들어오는 것입니다. 강력한 물리력앞에서 무방비상태의 제도권 정치인이 할수 있는 길을 저는 오로지 연약하지마는 연약한 모습대로 꼭 껴앉고 단합 통합하는 것만이 거기에 유일한 대응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증인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ㅇ 증인 金大中

그것 좋은 말이지요.

ㅇ 朴燦鍾위원

따라서 제가 증인께 여쭈는것은 5월15일에 이러한 민간의 주요인사들을 포함한 시국수습협의회 이 제안이 좀 늦었다는 감이 있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읍니다. 동시에 늦게나마 더욱 어떤 증인께서 헌신적인 몸짓으로 이것을 주도해서 이것을 통합하려고 하는 노력이 결과론이지만 좀 소홀하거나 결여됐지 않느냐 하는것이 제 눈에 비치는데 증인께서 동의하십니까?

ㅇ 증인 金大中

15일 그렇게 하고요 16일 金泳三총재하고 만나서 시국수습에 대해서 둘이가 합의해가지고 6개항을 발표해서 그런 노력을 시작한 거지요.

ㅇ 朴燦鍾위원

왜 이 정치군인들이 全斗煥장군이 주도한 全斗煥정치군인[그룹]이 증인을 80년 봄에 잠재적 대통령경쟁후보자에 있었던 여타 양 金총재께서도 계시지만 증인만을 유독 광주항쟁의 주동인물로 왜곡 조작해서 가혹한 박해를 가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왜 증인만을 그랬다고 생각하십니까? 가령 부산에서 조작하지 않고 대전에서 조작하지 않고 왜 金大中총재를 광주에서의 주동인물로 조작했다고 생각하십니까?

ㅇ 증인 金大中

그것은 全斗煥증인을 불러가지고 물어보시는것이 좋을것 같은데요.

ㅇ 朴燦鍾위원

제 견해는 이렇습니다. 그 군부가 지역분열주의를 더욱 자극 조장… 큰 흠을 내가지고 그 새로운 군부의 집권기반을 다른 지역에 둠으로써 그들이 권력을 찬탈했을 때 최소한의 지역적 기반을 확보하는 그런 악랄한 발상에서 증인을 호남지역에 국한시켜서 그 주동인물로 부상시키고 조작 왜곡했다고 하는 이러한 견해… 저도 이 견해에 동의하는데 이런 견해에 대해서 물론 나중에 全斗煥씨 나오면 제가 물어 보겠읍니다마는 이런 견해에 대해서 증인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ㅇ 증인 金大中

저도 동의합니다.

ㅇ 朴燦鍾위원

그렇게 동의하시지요?따라서 저는 증인께서는 당시 권력찬탈을 기도했던 군부[그룹]의 지역분열주의의 저는 피해자라고 생각합니다. 증인께서는 그런점에서 피해자이십니다. 저는 정말 가슴이 아픕니다. 피해자이십니다. 따라서 그 피해자의 상황 아직도 제 소견에는 극복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증인께서 동의하십니까?

ㅇ 증인 金大中

그렇습니다.

ㅇ 朴燦鍾위원

지난 대통령선거 직전에 증인께서 관훈[클럽]에서도 말씀하셨고 또 최근에 수삼차 기자회견을 통해서도 광주항쟁의 조작 주범들 5공비리의 관련자들을 정치보복은 안하겠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할 수 없다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정치보복과 사법적 처리와의 관계를 증인께서 명확히 이 자리에서 구분해 주시기 바랍니다.증인께서 생각하시는 사법적 처리와 정치보복…

ㅇ 증인 金大中

그것은 참 어려운 질문인데요 그런데 결국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물론 현행법가지고 법을 어겼을 때 이것을 처단하는 것은 그것은 반드시 정치보복이라고 할 수는 없읍니다. 소급법같은 것 만들어가지고 한다면 그것은 반민주적인 정치보복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나 이 집권자들에 대한 문제는 일반적인것 하고는 다르다고 생각을 합니다.결국에서는 정권을 내놓고 나서 그 집권자가 법에 위배됐다고 해서 이것을 처벌하는 이런 관계가 되풀이돼가면 정권의 순조로운 교체가 앞으로 어렵고 또 나라의 정치의 안정이 어려운 면이 있읍니다.그리고 이 정치인에 대한 보복은 그 사람이 악을 행하는 그 힘을 뺏은것이 보복이지 그러면 충분한거지 반드시 육체적인 처벌까지 하는것이 필요하냐 하는 생각을 저는 가지고 있읍니다. 저는 그래서 아까도 말씀했지만 지금 무슨 정치적 이해타산을 하는것이 아니라 법정에서 마지막으로 죽음의 길로 가면서 그 자리에서 제가 말한 심정을 여러분이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제가 이런 말을 하니까 일부에선 왜 그렇게 미지근한 소리를 하느냐고 비판을 받고 있는데 저는 이것이 제가 믿는 기독교인으로서의 신앙양심 또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한 정치인으로서의 인도주의적 사고방식 그리고 나라의 장래의 안정을 걱정하는 그러한 여러가지 배려에서 제가 이런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겠읍니다.

ㅇ 朴燦鍾위원

증인께서는 이러한 견해… 정치보복이라고 하는 것은 예를 들면 지금 현재 연희동에 불행한 모습으로 있는 그 全斗煥씨를 아무나 돌을 던진다든지 이렇게 해서 상처를 낸다든지 하는 이른바 사형 [린치]를 가하지 않는다는 그 개념으로 저는 해석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또 우리의 오늘의 젊은이들이 과도정부가 수립되고 대한민국 정부가 선 직후에 있었던 반민특위가 당시 李정권에 의해서 물리적으로 해산된 이후에 일제잔재가 정리되지 않음으로써 민족정기가 말살됐다고 하는 개탄과 거기에 운동정신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 우리 다 인정하는 바입니다. 따라서 증인께서 생각하는 그러한 처리내용은 명명백백한 법절차 사법절차에 따라서 그러한 정신으로 구현되도록 할 필요가 있는 것이지 그 처리 자체를 생략하는 것이 정치보복을 안 하는 것이다 라고 해석하는 것은 저는 잘못된 견해라고 생각합니다.

ㅇ 증인 金大中

저는 지금 말씀한 것은 가령 全斗煥씨가 부정축재한 것 이런 것을 사법적으로 조사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법적으로 다 조사하되 꼭 과거의 집권자를 감옥에 보내는 것이 꼭 필요하냐 여기에 대해서 제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ㅇ 朴燦鍾위원

일부에서는 그 조사자체도 원치 않는 데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소지가 있는 것입니다.

ㅇ 증인 金大中

오해가 있다면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엊그저께도 제가 말했는데 그런 부정의 진상에 대해서는 철저히 특별위원회뿐만 아니라 수사당국에서 조사해야 한다 이것을 강조하고 요새 검찰이 하는 것은 말하자면 눈가림을 하고 있다 라고까지 제가 이야기했기 때문에 오해없기를 바랍니다.

ㅇ 朴燦鍾위원

지금 증인께서 바로 현재의 검찰이 그리고 현재의 수사기관의 구도로 보아서 눈가리는 수사할 수밖에 없고 또 광주항쟁에 대한 정부차원에서의 조사 사실 국회의 위원회차원의 이런 청문회조사라든지 하는 것은 대단히 비효율적인 점이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이해가 상반되는 정파도 있고 비효율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증인이 지금 말씀하신 그 대목 현재의 盧泰愚정부의 수사기관의 구도로서는 이와같은 진상파악이 저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증인께서 여기에 동의하십니까?

ㅇ 증인 金大中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읍니다.

ㅇ 朴燦鍾위원

이것은 全斗煥씨와 盧泰愚씨가 결국은 한 고리로 연결되어 있는 한 뿌리의 같은 정권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인식에 대해서 동의하십니까?

ㅇ 증인 金大中

고리에 연결되어 있더라도 盧泰愚대통령이 자기는 제6공화국의 대통령이다 6공화국과 5공화국은 다릅니다. 독재헌법을 민주헌법으로 바꾼 전혀 새로운 공화국이다 그러한 확실한 자각이 있어가지고 제가 盧泰愚대통령을 뵈었을 때도 여러번 이 이야기를 했읍니다마는 확실한 자각을 가져가지고 제5공화국에 대해서 분명히 단절하겠다 이런 결심하에서 지금까지 해 왔다면 이런 광주문제 5공화국 비리문제 그리고 구속자석방 사면 복권문제가 해결되어서 지금 우리 국정이 상당히 명랑한 방향으로 가고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 점에 대한 盧泰愚대통령의 인식과 자세가 대단히 미흡한 것이 오늘날 이런 상황을 가져왔다고 생각합니다.

ㅇ 朴燦鍾위원

저도 증인의 견해에 전혀 동감입니다. 지난 2월25일 취임 이후 열 달이 됐읍니다. 저는 선의로 盧정부가 그러한 것을 해 내리라고 기대했읍니다마는 그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했읍니다. 그것은 盧泰愚씨가 全斗煥씨 고리에서 우선 인적 물적 기반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제도권 야권의 가장 중요한 정상의 지도자중의 한 분이신 증인께서는 최근에 이 고리에서 盧대통령을 일응 끊어서 국민적 거국내각을 야 3당이 앞장서서 이루어가지고 그 중립내각이 새로운 법무부장관과 새로운 검찰총장과 새로운 수사기관의 장을 새로 임명해서… 그러니까 성격상 특별검사제가 도입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단시일내에 이와 같은 비리를 중립적으로 정부차원에서 조사하도록 하는 이러한 구상에 대한 증인의 견해는 어떻습니까?

ㅇ 증인 金大中

거국내각은 제가 재작년 10월의 선거 그때는 직선제개헌도 아직 안됐지만 그때부터 이야기해서 작년 선거때까지 말씀하던 것인데 그 거국내각이 지금 이 단계에 필요하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朴위원 말씀도 계시고 하니까 저도 신중히 생각해 보고 또 개인적으로 朴위원의 고견도 듣고 싶습니다.

ㅇ 朴燦鍾위원

아까 우리 동료위원께서 몇가지 질문중에 증인께서는 80년대에는 이 나라에 반드시 민주화가 이룩된다 이렇게 예견하시고 예언하셨읍니다. 저도 잘 기억하고 있읍니다. 이제 한달 뒤면 89년이 되고 80년대는 1년 남짓 남았읍니다. 증인께서는 아직도 80년대 민주화라고 하는 것이 1차적으로 군사정권의 실질적 종식 군사문화의 정치로부터의 퇴장 퇴조를 의미하는 것으로 제가 해석한다면 80년대의 증인이 예언하신 것이 이루어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ㅇ 증인 金大中

그렇습니다. 지난 4월 총선거를 통해서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던 여소야대를 만든 이 국민의 힘 그리고 올림픽을 그렇게 훌륭하게 성공시킨 국민의 힘 또 지금 이 나라에서는 대통령도 야당도 군부도 학생도 노동자도 누구도 국민의 뜻을 경시할 수 없는 오늘의 정치현실 이런 것으로 봐서 이 위대한 국민이 그 힘을 가지고 반드시 80년대 이제 민주주의로 들어가는 단계에 있다 지금 이런 것도 그 과정에서의 진통이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ㅇ 朴燦鍾위원

증인의 말씀 잘 들었습니다. 제가 질문한 요지는 이렇습니다. 80년 봄에도 우리 국민들이 과거를 청산하고 군사문화를 거부한다는 명백한 의사표시를 80년 봄에 한 것입니다. 또 작년 12·16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지난 4·26 국회의원 선거과정을 통해서도 이 국민의 확고한 의사는 두번 세번 이것이 증명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자연적 시간으로 봐서 증인께서 이야기한 80년대는 앞으로 1년 1개월이 남았읍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 안에 순리에 따른 군사문화의 종식은 저는 어렵다고 봅니다. 80년 봄 87년 가을 이 두번의 기회에 저희들은 이것이 실패되는 것을 목도하고 있읍니다. 그 실패한 가장 큰 원인에 대해서 저 자신은 책임을 느끼는 제도권 정치인의 한 사람입니다마는 이 점에 대한 증인의 감회가 어떠하신지 제가 묻고 싶습니다.

ㅇ 증인 金大中

朴위원께서 묻는 말씀이 지도자로서 단일화를 못한 데 대한 책임을 묻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것은 아까 말씀했고요. 저는 80년대 국민하고 작년 국민하고는 다르다고 생각했읍니다 제가 작년 그것이 아마 5월이나 4월말로 생각하는데 80년에 저를 찾아왔던 미국 국회의원이 80년에 왔을 때 그때 당신만 민주주의가 이번에는 어렵다고 했는데 자기는 믿지 않았으나 그 후로 全斗煥씨 [쿠데타]가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했을 때 제가 이번에는 된다고 그랬읍니다. 왜 그러느냐 해서 80년에도 국민이 민주주의를 열망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때는 국민이 민주주의를 위해서 희생하겠다고 일어서겠다는 결심이 없었고 지금은 결심이 있기 때문에 全斗煥씨가 4·13선언을 했지만 이번에는 반드시 민주주의가 된다 이렇게 말한 일이 있는데 저는 작년이후 지금까지 그런 신념을 한 번도 바꿔본 적이 없읍니다.

ㅇ 朴燦鍾위원

아까 증인께서는 우리 동료위원의 물음에 대한 답변을 하시는 가운데 80년 봄에 이미 군은 확고한 의지와 각본으로 권력찬탈을 기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하한 민간의 노력도 결국 결과론이지만 수포로 돌아 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취지의 말씀을 하신 것 같습니다.그러면 거꾸로 5월15일 시국수습회의제안하신 것 이것이 가령 극적으로 그것이 더 응고된 형태로 국민앞에 실체로서 이것이 보여졌다면 광주사태 진행중이나 그 이후에도 전국민적 무서운 저항때문에 군이 결국은 권력찬탈을 포기할 수도 있었지 않겠느냐 물론 이것은 가정의 가정입니다마는 이러한 저의 질문에 대해서는 증인께서 어떤 소견으로 말씀하시겠읍니까?

ㅇ 증인 金大中

예. 그럴 수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생각하는데 요컨대 이 민주주의는 결국 국민이 하는 것인데 그때는 우리 국민이 지금과 같이 그렇게 강하지 못했읍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의욕은 마찬가지였지만 그것이 군대의 야망을 봉쇄 못한 것이었고 또 반면에 지금은 이번 국정감사에서도 나타나고 최근에 국방부장관의 국회에서의 답변에서도 나타나지만 심지어 정치군인이라고 지목된 사람들까지도 자기들의 과거를 반성하고 이제는 절대로 군은 정치에 개입 안 하겠다 이러한 강력한 국민앞에서 군이 어떻게 정치에 개입할 수 있겠느냐 이런 말을 되풀이한 것으로 보아서 군도 크게 달라졌다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ㅇ 朴燦鍾위원

이제 마지막 질문이 되겠읍니다.많은 전문학자들의 견해도 그러하고 군측에서 광주사태 우리 민중민주화운동측에서 광주항쟁 그 연원적 배경에는 지역차등 지역분열주의 그것이 언제 어떻게 생성되었든지간에 엷게 있었읍니다. 또 이 광주항쟁을 통해서 이것은 광주 한 지역의 당시의 사건에서 머문 것이 아니라 광주[이데올로기]로 승화해서 이 나라에 문민정권을 하루빨리 세워야 하는 그 당위적 명제도 등장하게 되었읍니다.우리가 이렇게 놓고 볼 때 이 시대 책임있는 정치인들은 이 배경을 이루고 있는 분열극복 그리고 광주[이데올로기]를 조속히 민주화의 결실이라는 문민정권 창출쪽으로 이것을 전부 수렴하지 않으면 안될 그런 절박한 싯점에 있고 이것이 아직 혼돈상태에 빠져있기 때문에 증인께서도 이 증언대에 서신 것으로 생각합니다. 12.16대통령선거와 4.26국회의원선거를 통해서 그 배경을 이루는 분열은 더욱 심화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또 이 싯점에 있어서 5공비리 문제를 가지고 온나라가 들끓는데 역시 문민정권이 창출안된 혼돈상태 물론 증인께서는 희망적으로 말씀하고 계시지만 그러나 오늘의 이 상황은 대단히 절박합니다. 이런 양측에서 보아가지고 정상의 야권지도자이신 증인께서 마지막으로 이런 지역분열주의 극복과 문민정권 창출이라는 이 움직일 수 없는 이 시기에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정치인에게 주어진 가위 정언명제에 대해서 증인은 어떤 소신을 가지고 답변하시겠읍니까?

ㅇ 증인 金大中

그러니까 이 지역감정이 생긴 것은 아까도 말씀하다시피 군사독재정권이 자기네 정권잡기 위해서 과거 자유당치하에서 제일 민주주의 위해서 강하게 싸웠던 호남과 영남을 분열시킨 조치를 시작한 것입니다.그 방법으로 인사면에서 차별성을 심각히 시키고 또 지역개발에서 차별성을 하고 이래가지고 한쪽에 우월감을 조장하고 한쪽에 열등감을 조장하는 이런 정책을 취해온 것입니다.이래서 결국 양쪽 국민 사이에 불행한 대립관계가 상당히 격화되었읍니다.이 점에 있어서는 우리가 무엇보다도 앞으로 이것을 시정하려면 그러한 원인부터 제거해 나가야 한다 생각하고 또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독재정권이니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따라서 민주주의를 하게 되면 전국민적인 자발적인 지지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조작된 지지가 아닌 자발적인 지지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하게 되면 지역감정은 자연히 소멸되게 되고 인사문제나 지역발전도 자연히 공정하게 안하면 전국민적 지지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이러한 민주주의를 우리가 하는 것이 지역감정을 해결하는 가장 근본적인 방법이다 이렇게 저는 생각하고 있읍니다.

ㅇ 위원장 文東煥

예. 고맙습니다.시간이 다 되었기 때문에 오전신문은 이것으로 끝마치겠읍니다.모두 진지하게 질문해 주셨고 성실하게 답변해 주신 것을 고맙게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오늘 상기조차하기 싫은 5.18광주민주화운동진상을 극명하게 조사하여야 할 숭고한 책임을 지고 있는 그러한 청문회입니다.오전회의에서 보면 많은 신문이 주제를 벗어난 질문들이 많습니다. 정치적인 호기심 혹은 정치적인 논란을 하는 그런 것으로서 벗어나는 수가 많이 있었읍니다.오후에서는 의제외 발언을 삼가해 주실 것을 다시 한번 당부드립니다.각 교섭단체 간사께서는 원만히 회의가 진행되도록 각별한 협조가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앞으로 너무 지나치시면 원할한 사회를 위해서 강력한 당부를 드릴 것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오찬을 위해서 한시간 정회를 하겠읍니다.오후회의는 예정대로 2시 정각에 속개할 생각입니다. 위원여러분께서는 시간을 엄수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이제 정회를 하겠읍니다.

(12시55분 회의중지)

(14시2분 계속개의)

ㅇ 위원장 文東煥

시간이 지났고 정족위원수가 됐기에 회의를 속개하겠읍니다.우리 오전 회의에서 5·18광주민주화운동이 어떻게 시작돼서 문제가 되었느냐 하는 그 원인을 중심으로서 신문을 했었읍니다. 이것을 위해서 전대통령 崔圭夏씨 全斗煥씨와 더불어 金大中씨 세 분을 증인으로 1차 중요하게 생각하고 소청했으나 전대통령 두분은 거절하시고 우리 金大中 증인을 중심으로 해서 그동안 얘기를 쭉 해왔읍니다. 이제 오후에 다시 속개하는 마당에 다시한번 여러분에게 부탁드립니다. 이제 오늘 예정된 사람으로써 李熺性 전계엄사령관 신문이 있게 됩니다. 거기에서 발발 당시의 구체적인 문제들이 많이 토의되고 시간이 많이 소요될 것 같습니다. 이것을 감안하시면서 여러분께서 질문해 주시기를 바랍니다.될 수 있는 대로 우리가 조사해야 할 그 문제의 촛점에서 벗어나지 않으시도록 그렇게 질문해 주시고 시간에 관한 것도 오늘 해야할 것이 다 이룩될 수 있도록 시간조정 하시면서 협력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럼 민정당의 朴熺太위원께서 신문해 주십시오.

ㅇ 朴熺太위원

증인께서는 특히 요즘 4당이 화합하는 안정된 정국을 이루는데 많이 기여하고 계십니다.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하셔서 국민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시기를 바라면서 저의 질문을 시작하겠습니다. 저는 특히 어떻게 하면 앞으로 우리 민족사에 다시는 광주문제와 같은 비극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을까 하는 그런 재발방지의 측면에서 증인께 질문을 하겠습니다. 우선 점심을 자셨기 때문에 좀 오전 질문을 정리하는 뜻으로 약간 좀 범위가 넓습니다마는 한 말씀 여쭈어 보겠읍니다. 10·26이후에 증인께서는 사면 복권돼서 정치적 자유를 회복하셨읍니다. 그러나 그때는 계엄하이고 이래서 정치적인 활동이 규제돼 있을 때입니다.이러한 때 어떠한 방법으로 증인께서는 민주화를 이룩하실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셨읍니까?

ㅇ 증인 金大中

10·26사태는 그냥 일어난 것이 아니고 朴正熙의 날로 가중된 독재에 항거해서 부산과 마산의 애국시민들이 일어나서 10·26을 가져온 원인을 만들었기 때문에 저는 적어도 처음에는 이 정권에 관여한 사람들이 그런 朴正熙정권 밑에서 쓰라린 체험을 했기 때문에 반성을 해서 국민의 뜻대로 민주화로 갈 것이다 이렇게 기대를 했습니다. 또 일방에서는 만일을 생각해서 아까 말씀과 같이 공화당이나 당시 신민당이 내각에 참가해서 민주화의 말하자면 [키](Key)를 같이 잡고 나가는 것이 좋겠다. 이렇게 생각을 했고 또 하루속히 계엄령을 해제해가지고 군부들이 정치개입하는 그러한 기간을 줄여야 한다 이렇게 생각을 해서 헌법도 제3공화국헌법으로 그대로 돌아가는 것이 정통성도 유지되고 시간도 안 걸린다 그렇게 권고했으나 모든 것이 잘 안돼가는 과정에서 상당히 고민이 컸읍니다.

ㅇ 朴熺太위원

증인께서는 사면복권되신 이후에 굉장히 정력적인 활동을 많이 하셨습니다. 대학에도 몇군데 찾아가서 학생들에게 직접 연설도 하셨고 또 서울뿐만 아니라 지방에 대전 경주 정읍 등지에도 가셔서 직접 군중을 상대로 연설도 하셨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많은 성명을 발표하셨고 또 기자회견등도 많이 했고 또 여러 모임에도 많이 나가셔서 연설하셨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당시 증인이 생각하시던 그런 민주화운동의 일환이었읍니까?

ㅇ 증인 金大中

물론입니다.

ㅇ 朴熺太위원

아까 증인께서는 대학에가서 연설을 했다 하더라도 전혀 선동을 한 일이 없고 또 학생들이 아주 평온했다고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으로 압니다. 그런데 증인이 동국대학에 가서 연설을 하셨을때 그 학생들중의 많은 사람들이 "학원을 유세장화하지 말라"하는 이런[피케트]를 들고 아주 격렬한 반대를 했읍니다.이로 인해 가지고 학생들간에 각목으로 서로 다투는 그러한 소란이 일어났고 또 한국신학대학에 가서 연설을 하셨을 때는 거기에도 역시 소란이 일어나 가지고 유리창이 깨지고 하는 폭력사태가 일어났읍니다.이러한 점에 비추어볼때 정치지도자께서 직접 감수성이 예민한 학생들을 방문해서 연설하시는 것은 특히 당시와 같은 상황을 고려할 때 위험하다고 판단하시지 않았읍니까?

ㅇ 증인 金大中

동국대학사건은 저도 지금 기억이 있는데요 그것은 몇사람들이와서 그 사람들의 어떤 종교적인 입장에서 그렇게 얘기를 했는데 그것은 아주 순간적으로 불과 몇분 사이에 끝나버린 얘기고 한국신학대학에서는 제 기억에는 그런 충돌은 없었고요 그래서 요새 우리가 흔히 보는 현상으로 하면 그때는 참으로 질서정연하게 모든 것이 원만히 됐읍니다.

ㅇ 朴熺太위원

한국신학대학에서는 유리창이 깨져 가지고 뒷날 학생중의 한 사람이 증인댁에 방문해서 유리창값까지 받아간 일이 있다는데?

ㅇ 증인 金大中

그것은 지금 이 말씀하니까 기억이 나는데요 그것은 사람들이 마구 몰려들어서 다 못들어가고 밀고 당기고 해서 유리가 깨진 것이지 싸워서 깨진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