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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청문회 속기록] 제 144회 국회(페회중) 5·18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 회의록 제 7 호(2)

본문

제 144회 국회

5·18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 회의록 제 7 호(2)

ㅇ 辛基夏위원

증인께서는 5·18당시 계엄당국의 발표에 의하면 시위를 선동하였다는데 그것이 사실입니까?

ㅇ 증인 金大中

그것은 전혀 거짓말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저는 학생이나 모든분들에 대해서 지금 이 민주주의를 안하려고 하는 유신잔재세력 일부 정치세력의 음모가 진행되고 있으니 절대로 구실 주지 말아야 한다 평화적으로 비폭력적으로 해야만 우리가 성공할 수 있다. 그러면서 제가 자꾸 독려한 것은 그 당시 공화당과 신민당에 대해서 빨리 국회 열어가지고 계엄령 해제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정치를 말하자면 평상상태에서 계엄령 없는 상태에서 하자는 것이 제 주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아까 시위문제는 아까도 말했지만 5월13일 시위 나면서부터 제가 계속적으로 신문에 기고도 하려고 그랬고 기자회견도 했고 이렇게 해서 말하자면 자제를 호소했고 그래서 실제 또 학생들이 16일 밤에는 완전히 시위를 그만 두었는데 그 당시에는 지금하고 달라서 저의 말도 학생들에게 다소 영향력이 있어서 그런 점에 있어서는 16일 자제하는데 약간의 도움도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읍니다.

ㅇ 辛基夏위원

증인께서는 1979년10월26일 전대통령 朴正熙씨가 살해된 후 5·17이전까지 몇 회나 대중연설을 하셨으며 그 연설내용은 비슷한 것이었던 것인지 또 어떤 정도였으며 청중들의 반응은 어떠했는지 간단히 말씀해 주십시오

ㅇ 증인 金大中

10월26일 朴正熙씨가 말하자면 살해되었는데 저는 2월29일까지 사면복권이 안되었기 때문에 전혀 정치활동이나 연설을 못했읍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활동한 것은 3월 4월하고 5월하고 해서 2개월반 됩니다. 그동안에 연설한 것은 YWCA 한신대학 동국대학 그리고 정읍에 가서 동학기념일 대개 기억난 것이 이런 정도입니다. 그런데 각 연설에서 물론 그 당시니까 유신에 대해서 규탄을 하고 그리고 이제 민주화를 시키자. 그런데 이 민주화를 하는 과정에서 한편에서는 이 유신잔재세력이 민주화를 못하게 하려고 그러고 한편에서는 북한이 말하자면 남한의 혼란을 노릴 우려가 있으니 그러니 이 둘을 경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절대로 구실을 안주어야 한다. 그러면서 심지어 제가 학생들한테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내가 이렇게 희생당하고 이 정권하에 말하자면 유신정권의 고통을 받은 내가 여러분한테 이렇게 질서를 지키라면 그 뜻을 알지 않겠냐.

그러면 학생들이 열렬히 여기에 호응하고 이 수많은 10여만 사람이 모였다 가도 그야말로 돌 하나 안던지고 유리창 하나 안깨고 깨끗이 해산하는 한번도 제가 연설한 거기에서 어떤 혼란이 일어날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정부가 그 당시 全斗煥군사세력들이 그런 것을 구실로 해서 5·17한 것은 전혀 거짓말이라고 생각하고 있읍니다.

ㅇ 辛基夏위원

몇번에 걸쳐서 하신 연설중 그 연설내용이 거의 다 비슷하셨다 하는 그런 말씀이시지요?

ㅇ 증인 金大中

예. 거의 비슷했읍니다

ㅇ 辛基夏위원

증인께서는 1979년 10·26이후 기자회견은 몇해나 하셨으며 기자회견내용은 주로 어떤 것인지 기억하십니까?

ㅇ 증인 金大中

기자회견은 기자들이 매일 오니까 3월1일부터는 수시로 했지요. 그런데 공식기자회견은 아마 제가 청해서 한 것은 삼사회 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3월 이후 첫번에 한 기자회견에서는 그 당시 저의 납치문제가 상당히 부각되었는데 제가 저를 납치한 모든 범인들 중앙정보부장 李厚洛씨를 비롯해서 말단의 행동대원까지 다 용서하겠다 다만 저는 진실만 밝히고자 하는 것이지 사람에 대해서는 용서하겠다 그런 기자회견을 했고요. 또 저는 민주화가 대단히 지금 위태로우니 야당내부에서도 당권을 잡는데 주력하기 보다는 민주화에 모두 주력해야 한다 그런 방향의 기자회견을 몇번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ㅇ 辛基夏위원

증인께서는 10·26이후에 신문 잡지 등에 많은 기고를 하신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어떤 내용의 원고 대개 투고하셨읍니까

ㅇ 증인 金大中

신문 잡지도 아까 말같이 2월29일까지는 전혀 불가능한 것이고 그 이후도 기자회견은 했지만 기고는 별로 한 기억이 없습니다. 그리고 오래 되어서 잘 모르겠읍니다.

ㅇ 辛基夏위원

본위원에게 부여된 시간이 30분이기 때문에 간단 간단하게 묻겠고 또 역시 증인께서도 간단하게 답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1979년10월26일 이후 정부 정국에 대한 대처는 어떠하셨다고 생각하십니까?

ㅇ 증인 金大中

정부가 첫째는 崔圭夏내각이… 崔圭夏씨가 나중에는 대통령이 되었는데 崔圭夏대통령 申鉉碻국무총리 이분들이 4·19후의 許 政道班 같이 진지한 민주화의 성의가 없고 崔圭夏씨는 이리 저리 흔들리고 申鉉碻씨는 오히려 민주화를 안하려고 하는 군부하고 결탁해서 이것을 저지하려는 그런 방향으로 움직였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권을 잡고 있던 全斗煥씨와 그 세력들은 계획적으로 특히 12·12사태에서 실권잡은 이후는 계획적으로 정권을 잡기 위해서 찬탈하기 위해서 음모를 꾸며갔다 그래서 제가 경각심을 가지고 하루빨리 국회에서 계엄령해제해서 말하자면 군부가 정치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호랑이로부터 발톱을 빼는 일을 빨리 해야 한다 이렇게 사실 발을 동동구르다시피 하면서 정치권에 주장을 했지만 그 것이 잘 안되었습니다. 그래서 10·26 이후에는 학생들도 5월13일에 비로소 시위를 했는데 아무 필요성없는 명분없는 어떠한 혼란도 없는데 이 계엄령 선포를 해가지고 계엄령이 없는 요새에 비하면 그때는 참으로 정말로 조용하다는 말로밖에는 표현이 안될 정도로 질서정연한 시대에 계엄령을 6개월 이상 7개월 동안이나 이렇게 해가는 그러니 학생들이 많이 참았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이렇게 계엄령을 끌고감으로써 사태를 더욱 혼란으로 끌고 간 것이 군부의 태도였다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ㅇ 辛基夏위원

다음에 당시 1979년 10·26이후 5·17까지의 학생들의 학생운동의 방향은 그야말로 이 나라의 민주화를 바로 뿌리박아야한다는 학생들의 학생운동이 건전했다는 말씀과 아울러서 증인께서는 거기에 관여된 바가 없다 하는 그런 말씀이시지요?

ㅇ 증인 金大中

예. 학생운동이 아주 건전했다고 생각합니다. 어디서도 어떠한 과격한 주장이나 그런 것이 나온 일도 없고 또 폭력행위도 거의 없었습니다. 학생들이 어디를 습격한다든가 파괴한 일도 없었습니다. 다만 저는 학생들이 5월13일 시위를 안하고 그때 5월20일 국회를 소집했는데 그때까지 기다린 것이 좋았었다. 그때도 그렇게 생각하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 당시 全斗煥세력은 5월20일 국회를 소집해서 국회에서 계엄령해제하려고 하고 또 아까 말도 나왔지만 야권에서도 5월20일이나 22일에 국민대회를 해가지고 계엄령해제를 요구하려고 그리고 또 학생들도 16일에 시위를 자제하면서 앞으로 동향을 주시한다고 이렇게 나오고 또 언론계에서도 기자협회에서 5월20일까지 계엄령해제 안하면 우리는 이제는 검열을 거부하겠다. 이렇게 나와서 全斗煥세력은 그 당시에 5월20일까지 갔다가는 자기들이 도저히 정권을 잡을 희망이 없기때문에 벼랑에 몰렸기 때문에 폭력을 써가지고 [쿠데타]를 시도하고 광주에서 그렇게 인명을 살상하면서 혼란을 조성했다고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ㅇ 辛基夏위원

국방부나 육군본부 및 예하부대에서 우리 광주특위의 자료제출 요구에 의하여 보내온 자료나 알려지고 있는 바에 의하면 1980년5월17일 밤에 공수특전여단 2개대대가 외지에서 광주에 내려와서 전남대학교와 조선대학교에 포진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1980년5월17일은 광주는 평온했습니다. 공수부대를 광주에 보낸 이유를 증인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간단히 말씀해 주십시오.

ㅇ 증인 金大中

그것은 아까 전남경찰국장도 얘기했지만 전혀 불필요한 군대투입이었고 또 만일 군대를 투입한다면 그러한 시위나 무질서를 수습하는 이런 훈련을 주로 예비사단이 받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예비사단을 투입했어야지 가장 공격적인 공수부대를 투입했던 것 이것 자체가 당시 全斗煥세력의 마음속을 나타낸 것으로 투입자체도 잘못했지만 또 투입한 부대의 성격으로 보아서 이것도 잘못 된 것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ㅇ 辛基夏위원

비슷한 질문이지만 비상계엄확대에 대한 국무회의의 전격 결의 증인등 민주인사 체포, 공수부대의 광주이동등이 모두 1980년5월17일 밤에 거의 비슷한 시각에 이루어졌는데 그 이유도 방금 답변하신 그런 내용과 같다고 생각하십니까?

ㅇ 증인 金大中

물론 그때 군부들이 주동해가지고 정권을 찬탈하려고 해가지고 그렇게 자기들 권한 밖의 일을 정치에 개입해서 결의하고 심지어 또 국보위 만들어야 한다. 이런 아주 공공연한 정치의 불법행위를 했습니다. 그런데 崔圭夏정권이 쉽게 그것을 불과 8·9분 사이에 결의했는데 저는 崔圭夏씨가 참으로 그 朴正熙씨가 죽은 덕택으로 그런 막중한 자리에 올라 갔으면 그때 생명을 걸고 그런 군부의 의도에 저항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점에 대해서는 崔圭夏씨가 취한 행동에 대해서도 몹시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ㅇ 辛基夏위원

이미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이 선포되어 있어서 비상계엄 확대란 제주도지역을 포함하는 것에 불과하고 당시 제주도지역에는 비상계엄을 확대할 아무런 질서문란도 없었는데 비상계엄 확대결의를 밤 9시30분경 국무회의를 비상소집해 가지고 2시간도… 20분도 채 안된 시간에 그런 결의를 할 이유라도 있었다고 생각하십니까?

ㅇ 증인 金大中

전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ㅇ 辛基夏위원

본위원이 증인에게 신문할 사항이 많이 준비 되어 있읍니다마는 본위원에게 부여된 시간이 거의 다 되었읍니다. 그러면 결론적으로 증인께서는 1980년 5월에 광주에서 일어났던 그런 불행한 상황과는 전연 관계가 없다는 말이지요?

ㅇ 증인 金大中

전혀 관계가 없읍니다.

ㅇ 辛基夏위원

이상입니다.

ㅇ 위원장 文東煥

수고하셨습니다. 다음은 통일민주당의 金光一위원 신문해 주십시오.

ㅇ 金光一위원

증인께서 지금 沈明輔위원과 辛基夏위원께서 물으신 내용가운데에서 하나 확인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증인께서는 비상계엄령이 5월20일까지 해제될 수 있다고 생각했읍니까?

ㅇ 증인 金大中

저는 그때 국회에서 제가 알고 있기로는 공화당이나 신민당이나 양측이 다 더이상 계엄령을 지연시키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 이러한 결심을 가지고 국회를 소집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만일 소집되었으면 계엄령해제결의안이 통과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ㅇ 金光一위원

그당시 증인께서는 군부가 국회가 개회되도록 허용했을 것으로 생각했읍니까?

ㅇ 증인 金大中

저는 조금 순진하게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국회 개회한 것을 그렇게 군사력으로 막을 줄은 몰랐습니다.

ㅇ 金光一위원

그리고 학생시위자제문제가 나왔는데 만약 그당시에 5월15일과 같은 극렬한 시위가 계속되지 않았고 학생들이 잠잠했다면 군부들이 5·17과 같은 조치를 안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까?

ㅇ 증인 金大中

저는 그래도 했다고 생각을 합니다. 왜그러느냐 하면 학생들이 5월16일 시위를 중단했는데 5월17일 일을 저지른 것을 보고…

ㅇ 金光一위원

그때 전후 사정을 보면 만약 학생들이 시위를 안하고 조용히 있다면 학생시위를 조장해서라도 명분을 삼았을 것으로 생각을 안합니까?

ㅇ 증인 金大中

저도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읍니다.

ㅇ 金光一위원

그 다음에 증인께서는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를 받으면서 쉽사리 풀어줄줄 알았다 하셨는데 증인은 그 당시에 군부의 동향이라든지 군부의 집권진행과정을 볼 때 증인을 비롯한 金泳三씨 金鍾必씨등 이른바 3金씨를 제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읍니까?

ㅇ 증인 金大中

물론 그렇게 그 사람들이 그런 음모를 하고 있다고 생각을 했지요.

ㅇ 金光一위원

그 다음 崔圭夏내각이 과도정부의 노릇을 하지 않고 군부와 결탁했다는 표현하셨는데 崔圭夏내각이 군부와 결탁을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사실상 집권하고 있던 일부 소수의 정치군인들에 의해서 강압적으로 조종을 받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읍니까?

ㅇ 증인 金大中

崔圭夏대통령은 강압적으로 조종을 받고 있다고 생각을 했고 申鉉碻총리는 상당히 그들하고 협력했다고 생각을 하고 있읍니다.

ㅇ 金光一위원

그러니까 崔圭夏내각한테는 그당시에 민주화 일정을 순조롭게 진행할 수 있는 것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 아니었읍니까?

ㅇ 증인 金大中

그렇게 약체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국민이 민주주의를 열망하고 또 당시에 국회 전세력 공화당과 신민당이 그렇게 열망하고 추진했기 때문에 나는 崔圭夏대통령이 좀더 확고한 태도를 취했으면 어렵지 않게 됐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ㅇ 金光一위원

당시나 지금으로나 우리 민족의 지도자로서 나라의 장래를 좌우할 수 있는 중요한 위치에 계시기 때문애 그 당시에 시국의 흐름을 어떻게 보셨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기 때문에 이렇게 한번 따져 물어보는 것입니다. 증인께서는 72년의 유신선포후에 73년에 동경에서 납치되어서 연금되었다가 76년에 3·1구국선언사건으로 징역 5년형을 받고 78년말에 석방되고 79년12월8일에 연금이 해제되고 80년2월29일에 사면복권될 때까지 8년동안 정치활동을 전혀하지 못했지요?

ㅇ 증인 金大中

그렇습니다.

ㅇ 金光一위원

증인은 그 8년기간 동안에 주로 정당과는 관련을 맺지 못하고 재야인사나 국민연합 또는 민주청년협의회의 회원등과 연대해서 민주화 투쟁을 많이 해온 것은 사실입니까?

ㅇ 증인 金大中

그 8년… 73년에 납치되어서 돌아와 가지고요 10·26까지 약 그러니까 6년 동안 한 3년가까이는 감옥에 있었고 한 3년중에서 1년여는 연금하에 있었고 나머지 한 2년 동안은 재야인사들과 민주화운동을 했고 그랬읍니다.

ㅇ 金光一위원

그렇지요. 그러니까 주로 재야세력들과 민주화운동을 같이 했기 때문에 6월29일 복권이 되고 정치활동이 사실상 허용된 후에도 그들과 더불어 접촉이 많았던 것이 아닙니까?

ㅇ 증인 金大中

그렇습니다.

ㅇ 金光一위원

그런 것이지 그들과 만난 것도 곧 그들과 더불어 앞으로 혼란을 획책하기 위한 음모를 하기 위해서 했다고 볼 수 없는 것이 아니겠어요?

ㅇ 증인 金大中

물론 그렇습니다.

ㅇ 金光一위원

그렇겠지요. 79년10월26일 朴正熙대통령이 죽은 후에 긴급조치9호가 해제되고 모든 국민들은 유신철폐와 민주제도의 회복이 눈앞에 온 것으로 알고 또 그 구체적인 절차는 대통령직선제라는 개헌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모두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요.

ㅇ 증인 金大中

예.

ㅇ 金光一위원

그리고 그와같은 개헌은 금방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고 왜냐하면 4·19때 3개월만에 개헌도 하고 선거까지 다 했기 때문에 당연히 개헌에 의한 선거도 금방 있을줄 알았고 또 정치활동이 허용된 증인으로서는 다른 경쟁자들과 더불어 금방 또 대통령에 경선에 나서고 또 동시에 당선될 것으로도 생각했읍니까?

ㅇ 증인 金大中

저는요 그 당시 신민당에 대해서 간접적인 관계가 있기 때문에 그 권고를 신민당 책임자분들한테 많이 했는데요. 첫째는 개헌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읍니다. 개헌을 하지 말고 유신 말하자면 [쿠데타]로 제3공화국헌법이 중단되었으니까 제3공화국헌법으로 바로 돌아가야 한다. 말하자면 회복하는 그런 법적 조치를 취해야 한다. 이래야 정통성의 맥이 이어지고 또 시간이 길게 안 걸리기 때문에 이 반민주세력들이 말하자면 획책할 기간을 주지 않는다. 이것 하나를 강력하게 권유했고요. 또 申鉉碻내각을 국회에서 인준할때 야당도 같이 들어가서 그래가지고 칼자루를 같이 쥐어야 한다. 이것도 권했고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계엄령을 빨리 해제해야 한다. 계엄령해제 않으면 이 군부장악은 날로날로 깊어간다. 그런데 이것이 잘 받아 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쪽에는 崔圭夏대통령의 그 유약한 태도 그리고 군부의 착착 진행된 음모과정 그리고 한쪽에서는 정치권의 이런 시간을 놓치는 여러가지 지연적인 태도 이런 걸로 해서 5월에 들어서면서 상당히 민주화의 전도에 대해서 우려와 말하자면 위기의식을 느껴서 그래서 지금은 정치문제가 문제가 아니라 말하자면 민주화를 하는 일이 중요하다. 그래서 재야세력들과 협의하니까 다 찬성을 해서 마지막 시도로 그런 국민적인 운동을 하려고 노력을 해서 여기 저기서 강연도 하고 그렇게 노력해 왔으나 결국 무위로 돌아갔습니다.

ㅇ 金光一위원

그점에 대해서 나중에 조금더 묻겠읍니다마는 요는 그 당시에 증인의 생각은 어땠는지 몰라도 국민들이 생각한 것은 3金씨중의 한분이 대통령이 될 것이다. 또 저분들이 공정한 경쟁을 할 것이다. 그렇게 알았다는 것은 사실입니까?

ㅇ 증인 金大中

그렇습니다. 국민이 그렇게 알았읍니다.

ㅇ 金光一위원

또 증인도 그런 기회가 있으면 그렇게 될 걸로 생각했던 것도 사실아닙니까?

ㅇ 증인 金大中

저도 그건 그런 생각도 가졌읍니다.

ㅇ 金光一위원

그런데 그런 입장에 계시면서 이 모든 국민이나 또는 증인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80년의 이른바 서울의 봄에 대해서 증인은 정부가 소수의 실권을 잡은 정치군인들에 의해서 요지부동으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그와같은 목적달성은 정면으로 그들의 의사와 배치되리라고는 생각 안 했읍니까?

ㅇ 증인 金大中

그러니까 저는 아까도 말씀했지만 국민의 민주주의에 대한 욕망과 의욕이 강하고 또 여야정당이 다 민주주의를 바래고 이렇기 때문에 우리의 힘 가지고 또 견제할 수있다. 또 그때에는 한국정치에 큰 영향이 있는 [카터]정부도 정부자체는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입장이라고 우리가 보았기 때문에 우리는 말하자면 이 민주주의를 이번에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까 말한 것과 같이 자꾸 시간을 놓치고 全斗煥씨가 중앙정보부장까지 겸임하고 이렇게 사태가 되어 가는 것을 보고 차츰 저도 절망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읍니다.

ㅇ 金光一위원

결국 5·17이라는 것은 서울의 봄 80년도 우리 국민들 모두의 가슴에 핀 희망의 꽃을 일부 정치군인들의 싹쓸이 방법으로 꺾어다가 자기네들 군복주머니에 꽂아버린 그런 파렴치한 정권탈취행위라고 보시지 않읍니까?

ㅇ 증인 金大中

전적으로 그렇게 보고 있읍니다.

ㅇ 金光一위원

그렇게 보게 되는 그리고 또 그 당시의 시국이 사실상은 증인이나 또는 우리 국민들이 낭만적으로 생각했던 바와는 달리 심각했다는 점을 몇가지 따져서 물어 보겠습니다. 80년 5월 17일의 계엄확대조치는 79년10월16일 부마항쟁시의 시위진압을 위해서 발령된 비상계엄 10월18일자 부산지역의 계엄령에서부터 출발 해가지고 두번째 비상계엄을 키운 것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까? 유신군사독재에 항거해서 그것은 또 일반적인 것은 그랬고 또 직접적인 동기는 그 당시 야당인 신민당총재 金泳三씨에 대한 직무정지가처분이 법원에 의해서 내려지고 또 국회에서 10월4일에 국회의원 자격마저 제명함으로써 그 출신지역이고 또 그 지지기반이 또 그에게 상당한 기대를 걸고 있던 부산 또는 경남지역의 국민들이 격분해서 이 유신독재에 항거함으로써 일어났던 것이 부마항쟁이고 또 그것을 진압하기 위해서 부마지역에 발령된 것이 비상계엄… 첫째 비상계엄이었는 것 알고 계시죠? 그 비상계엄은 발령 8일후인 10월26일에 계엄발령의 원인이 되었던 유신의 심장부라고 할수 있는 朴正熙대통령의 피살로 부산지역에서 발령되었던 그 비상계엄은 필요성이 없어졌다고 보지 않습니까?

ㅇ 증인 金大中

그렇습니다.

ㅇ 金光一위원

그렇지요? 그런데 10월26일 朴대통령이 피살되자 비상계엄을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 비상계엄으로 확대했거든요. 계엄사령관은 鄭昇和씨가 되고요. 그런데 10월26일의 朴正熙대통령의 죽음은 일종의 정치적 암살이기 때문에 암살범도 즉시 체포가 되었고 남은 것은 공정한 수사와 재판밖에 없었는데 그것을 이유로 해서 계엄을 전국적으로 확대할 무슨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하십니까?

ㅇ 증인 金大中

그것은 군대내부에서 결국에 가서는 세력을 장악하려는 그런데서 全斗煥씨 세력 이것이 12·12후는 계엄의 해제를 방해했고 또 그전에는 아마 鄭昇和씨 이 사람들이 자기들이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서 계엄의 유지가 필요해서 그러니까 정작 10·26부터 12·12까지는 鄭昇和씨의 권력욕에 의해서 그 사람을 중심으로 한 권력욕에 의해서 계엄이 확대 유지되었고 그 이후는 全斗煥씨와 그 주변의 권력욕에 의해서 계엄이 유지되었지 현실적 필요성은 전연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ㅇ 金光一위원

예. 좋습니다. 그당시 모든 국민들은 그와같은 대통령의 죽음에 대해서 자중을 했고 또 유신반대자들도 그 원인이 제거되었다는 점에 대해서 더이상 시위를 하거나 소요를 일으킬 필요는 없었던 것은 사실이지요?

ㅇ 증인 金大中

예. 전연 없지요

ㅇ 金光一위원

그런데 그 10·26 당시의 계엄은 계엄공고5호에 의해서 계엄사령부에 설치된 합동수사본부에다가 건국이래 최대의 권력을 집중시킨 특별한 조치가 있었던거 알고 계십니까?

ㅇ 증인 金大中

예.

ㅇ 金光一위원

그당시 중앙정보부 보안사령부 검찰청 그리고 치안본부의 모든 기관이 합동수사본부 부장의 지휘를 받게 되었고 그렇게 됨으로써 이 합동수사본부장인 全斗煥씨는 전국의 모든 권력을 사실상 자기 마음대로 행사할 수 있었던 위치에 있었다는 것 알고 계십니까?

ㅇ 증인 金大中

예. 그렇습니다. 계엄포고 5호에 의해서 그렇게 한 것은 계엄법에는 근거가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ㅇ 金光一위원

예. 좋습니다. 그러나 국민적 합의는 말이지요 당연히 유신철폐 그리고 또 민주화달성 이런 해빙[무드]였기 때문에 긴급조치 9호가 해제되고 구속자들이 석방이 되고 또 680명의 사면 복권이 있었고 언론자유가 다소 회생이 되고 또 학원자유가 전반적으로 회복되는 등 이렇게 해서 조속한 민주주의가 이루어질 것으로 모두들 생각했던 건 사실이지요?

ㅇ 증인 金大中

그렇습니다.

ㅇ 金光一위원

그런데 그러한 조속한 민주화일정이 있을 것으로 생각을 했기 때문에 사실 다른 자료를 보면 계엄의 필요성도 없었기 때문에 이 계엄군들도 거의 다 원대복귀한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그것까지는 잘 모르시겠습니까?

ㅇ 증인 金大中

잘 기억이 없습니다.

ㅇ 金光一위원

그래서 국회는 말이지요. 개헌일정을 여야합의에 의해서 11월29일 개헌위원회를 구성하고 1월16일에 개헌공청회를 여는 것을 시작으로 해서 5월 중순까지에는 여야합의에 의한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이 마련된 것을 알고 계시지요?

ㅇ 증인 金大中

예. 압니다.

ㅇ 金光一위원

그리고 학원의 민주화문제도 학원자체의 민주화 내지는 학원자체의 비리요소를 캐기 위한 그런 시위는 있었을지언정 정치적인 시위는 5월에 이르기까지는 없었단 것으로 알고 있지요?

ㅇ 증인 金大中

거의 없었읍니다.

ㅇ 金光一위원

5·17조치를 하게 된 이유를 정부 또는 군부측에서는 들기를 학생들의 시위로 사회가 혼란하고 정치인들의 무분별한 정쟁 또 그것으로 인한 경제압박 북한의 오판 안전보장위협 그런 것 때문에 5·17조치를 했다고 하지만 증인이나 또는 양식있는 모든 국민들은 그것이 허위라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겠지요?

ㅇ 증인 金大中

그렇습니다.

ㅇ 金光一위원

그다음 학생시위에 대해서 잠깐 말하자면 5월부터 비로소 정치시위로 변경된 것이고 5월에 나온 그 구호가 정부주도의 개헌을 반대한다 또 정치일정을 단축하라. 유신잔존세력은 민주의 공적이다. 이원집정부제반대한다 계엄령을 해제하라 하는 것등이었던 것은 틀림없지요?

ㅇ 증인 金大中

그렇습니다.

ㅇ 金光一위원

이 학생들의 구호가 나오게 된 것은 결국은 이 구호가 나와야 될 만한 상황을 군부 내지는 정부가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생각치 않습니까?

ㅇ 증인 金大中

물론 그렇습니다.

ㅇ 金光一위원

만약 그 원인만 제거되었더라면 학생들은 시위에 나설 아무런 이유가 없었겠지요?

ㅇ 증인 金大中

아까도 말씀했지만 학생들이 너무도 오래 기다렸읍니다. 그런데 정부가 민주화일정도 발표하지 않고 계엄령도 해제하려고 하지 않고 그리고 이원집정부제라는 음모를 꾸미기 시작한 것을 알고 학생들이 그렇게 하게 된 것입니다.

ㅇ 金光一위원

그런데 이와 같은 5월쯤에 들어와 가지고는 국민들이 모두 안개정국 또는 불투명정국이 라고 해 가지고 과연 정부에게 민주화의지가 있는가 또 과연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가에 대해서 모두들 의심을 하고 걱정을 한 것은 사실이지요?

ㅇ 증인 金大中

상당수 사람들이 걱정을 했지요.

ㅇ 金光一위원

그것은 결국 정부가 계엄문제에 대해서 적극적이 아니었지요? 정부측에서는…

ㅇ 증인 金大中

정부는 그당시 정부나름대로 개헌위원회를 만들었어요. 그것은 직선제개헌이 아니고 이원제개헌으로 해 가지고 국민의 의사하고는 관계없는 그런 개헌안을 만들려고 한 것입니다.

ㅇ 金光一위원

결국 그 당시에는 국회에서 만든 이 개헌안은 통대회의에서 통과되어야 되고 정부에서 대통령이 만든 안은 국민투표에 바로 부칠 수 있는데 그 당시 모든 합의는 국회에서 만들어서 정부에다가 주면 정부가 바로 국민투표에 부친다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합의처럼 되어 있었는데 정부가 국회에서 다 만들어가는 개헌안을 두고 자기의 따로 개헌연구반을 1월에 설치하고 3월에 정부내에 개헌심의위원회를 만들어서 68명의 위원을 위측하고 5월이 되어서 개헌안을 정부에 넘기겠다고 할 무렵이 되었을 때에는 그때야 비로소 정부에서는 5월16일에 말하기를 이제 우리의 개헌요강을 작성하는 소위를 만든다. 그러면서 국회에다가 국회의 개헌안일정을 조금 늦추어 주시오. 이렇게 말한 일이 있었지요? 기억하고 있읍니까?

ㅇ 증인 金大中

예. 기억이 납니다.

ㅇ 金光一위원

국회측에서는 정부에다가 정부에 무슨 안이 있으면 국회로 보내라 그러면 우리가 최대한 환영하겠다. 그렇게 말했지만 정부에서는 아무것도 보낸 일이 없었지요?

ㅇ 증인 金大中

없었읍니다.

ㅇ 金光一위원

그리고 정치일정에 대해서도 崔圭夏대통령은 대통령취임사에서 하루빨리 개헌을 해 가지고 개헌에 의하여 구성되는 정부에다가 정권을 평화적으로 이양한다고 말했는데 중간에 申鉉碻총리등을 통해서 개헌일정 그리고 다음 국회의원의 선거는 내년봄 내지는 여름에 이룰 것이다 하는 식으로 연장하는 발표를 한 것이 사실입니까?

ㅇ 증인 金大中

예. 했지요.

ㅇ 金光一위원

그렇기 때문에 모든 국민들은 이 정부에서 다른 생각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대통령직선제가 아닌 이원집정부제라는 이상한 제도를 만들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힘이 없는 崔圭夏내각 대통령이하의 내각이 이것은 군부의 지배를 받아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닌가 이래서 모두들 그 진의를 진상을 캐기 위해서 의심했던 것은 사실이 아닙니까?

ㅇ 증인 金大中

그렇습니다.

ㅇ 金光一위원

그와같이 되게 된 것은 결국 12·12에서 실질적으로 권력을 쟁취한 全斗煥씨를 비롯한 일부 정치군인들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ㅇ 증인 金大中

全斗煥씨를 비롯한 일부 군인이 주동을 한 것은 분명하고……그 사람들은 申鉉碻총리하고 밀접하게 연결이 되고 제가 그 당시 느끼기는 그 사람들이 이원집정제를 해가지고 崔圭夏씨에 대해서 계속 대통령자리를 보장해 준다는 이런 감언이설가지고 崔圭夏씨를 꼬운 것이 아니었느냐 우리는 그당시 그렇게 판단을 하고 있었읍니다.

ㅇ 金光一위원

그때 육군참모총장이고 계엄사령관인 鄭昇和씨를 체포해서 형을 살리면서까지 권력을 잡은 핵심세력들이 누구누구인지 다 아십니까?

ㅇ 증인 金大中

그 당시 핵심세력으로서는 全斗煥 盧泰愚 鄭鎬容 그런 분들이지요?

ㅇ 金光一위원

소장이 세분 중장이 세분 이런 분들이 핵심이 된 것같은데 소장으로서는 全斗煥보안사령관 또 盧泰愚 9사단 사단장 朴俊炳 20사단 사단장 또 그 보다 한 계급높은 분들인데 나중에는 소장들보다 낮은 지위로 떨어진 중장급으로 黃永時 1군단장 兪學聖군수차관보 또 車圭憲 수도군단장 이런 분들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ㅇ 증인 金大中

예.

ㅇ 金光一위원

그분들은 일단 권력을 잡았지만 국민들 앞에 부상할 명분이 없었기 때문에 그때까지 부상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지요?

ㅇ 증인 金大中

그렇습니다.

ㅇ 金光一위원

그 자세한 내막은 증인도 잘 모르셨지요?

ㅇ 증인 金大中

잘 모릅니다.

ㅇ 金光一위원

그리고 그들은 그렇다고 해서 뒤로 물러설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까?

ㅇ 증인 金大中

물러서는 것은 설 수 있었지요. 왜 그러냐 하면 물러서면 군내에서 자기들의 위치는 안전하게 보장되는 것인데 이 사람들이 말하자면 터무니없는 정권 야욕을 가지고 달려들기 때문에 문제가 시끄러워진거지요.그런데 아까 말한 것과 같이 5월20일에는 국회소집이라든가 언론계에서 검열 더 이상 안 받겠다 이런 시한이 자꾸 오고 하니까 5월17일 마지막 단계에서 말하자면 문제를 일으킨 것입니다.

ㅇ 金光一위원

알겠읍니다.그런데 결국은 이미 건너지 못할 강을 건넌 군부세력 몇명으로써는 자기네들이 국민의 의사가 그렇다 하더라도 거기에 굴복하거나 그럴 입장이 되지 못했고 언제인가는 기회를 잡아서 국민앞에 전면 부상해야 할 필요를 느끼고 있다가 결국은 5월20일을 넘길 수 없다는 긴박감 때문에 5월17일에 이와같은 일을 서둘렀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ㅇ 증인 金大中

그렇게 생각합니다.

ㅇ 金光一위원

그렇지요?

ㅇ 증인 金大中

예. 그렇습니다.

ㅇ 金光一위원

그것은 왜냐하면 결국 국회가 계엄해제를 건의하게 되면 계엄을 해제해야 되는데 국회소집을 5월12일 여야총무들이 합의할 때 이미 20일 국회를 소집한다는 것이 되었고 또 사실상 5월17일 국회소집공고가 나간 것은 사실이지요?

ㅇ 증인 金大中

그렇습니다.

ㅇ 金光一위원

그렇기 때문에 결국 군부로서는 5월20일을 넘겨 가지고는 도무지 자기네들 목적달성이 어렵기 때문에 결국은 5월17일이라는 날짜를 당겨서 만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ㅇ 증인 金大中

예. 그렇습니다.

ㅇ 金光一위원

그 증거의 하나로서는 중동에 외교차 나가 있던 대통령을 하루 일정을 앞당겨서 오도록까지 해가지고 국무회의에서 그것을 통과시키게 했다는 점에서도 나타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ㅇ 증인 金大中

나타나고 또 중동에 대통령을 보낸 것도 특별한 계획도 없는데 보내놓고 그 사이에 일을 꾸민거지요.

ㅇ 金光一위원

이런 상황이라면 그 당시나 지금이나 우리 국민들이 모두 아쉽게 생각하는 것은 그 당시에 지도자이신 세 金씨 또 내지는 반유신투쟁에 앞장서셨던 두 金씨께서 이런 상황을 꿰뚫어 보고 어쨌든 군부에다가 어떤 명분을 주지 않기 위해서 단합된 모습을 보여 주었으면 좋았었다 이런 아쉬움들이 있읍니다.그런데 그때 두분께서 한분은 유일한 야당이라 할 수 있는 신민당의 총재로서 신민당을 지도하고 있었고 또 한분께서는 주로 재야세력과 규합해서 국민들에게 직접 호소하는 방법으로 이렇게 지도를 해 나가시고 있었는데 그 당시의 상황으로서 두분이 합칠 수는 없었습니까?

ㅇ 증인 金大中

그것이 아까도 말했는데 약간 시국관의 차이도 있었고요 그리고 그 때는 정치운동보다는 민주회복운동이 선결할 단계라고 판단해서 그 당시 신문도 제가 이번에 다시 보았읍니다마는 민주화가 확정된 후에 다시 정당을 같이 하는 문제를 토의하겠다 이렇게 말한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학생시위가 났을 때 金泳三총재와 제가 같이 공동으로 기자회견을 해가지고 정국수습6개방안을 제시한 일이 있읍니다. 우리는 결코 그 당시 무슨 싸움을 하거나 서로 비난하거나 그런 일이 없읍니다. 다만 지금 金위원께서 질문하신 그런 정도로 철저히 하나로 되지못했던 것은 대단히 지금도 미안하게 생각하고 또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음모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제가 저를 우리들이 변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음모의 진상은 그런 문제하고는 큰 관계가 없었다 이것도 얘기해 두고 싶습니다.

ㅇ 金光一위원

그 당시 해제해야 질 계엄을 계속하고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본위원은 이렇게 생각하는데 어떠신가 모르겠읍니다. 계엄을 계속해야 될 아무런 이유가 없었는데 계엄을 유지하고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언론통제를 위한 것이었다. 언론통제를 하기 위한 목적은 결국은 세 金씨간에 정치경쟁을 국민들한테 아주 더러운 정치투쟁으로 보이게 하고 또 학생시위 소요를 5월13일부터 일반적으로 크게 보도함으로써 이 학생시위를 그냥 두면 나라가 혼란해서 망한다 하는 위기감을 국민들에게 주기 위해서 그 유일한 목적으로써 이 언론통제를 하기 위해서 비상계엄이 계속되고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ㅇ 증인 金大中

그 문제는 물론 그렇고요. 아까와 같이 계엄령해제하면 자기들이 정권을 잡을 길이 도저히 없기 때문에 결국 계엄령을 유지한 것입니다.

ㅇ 金光一위원

좋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국민들한테 그런 식으로 비추어졌다 하더라도 만약에 그 무렵에 증인께서 야당을 통합하는 일에 좀더 적극적이셨거나 그렇게 했더라면 그러한 탄압을 하는 군부에 대해서는 5·17조치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즉 한 분으로 통일되어 있었던 그런 야권이 통일되어 있었더라면 탄압을 했다 그러면 전국적으로 이 국민의 저항이 일어남으로써 그것을 저지할 수 있었지 않았느냐 하는 아쉬움을 가지기 때문에 묻습니다.그런데 4월7일에 증인께서는 신민당에 입당할 의사는 전혀 없다 그렇게 밝히신 것은 사실입니까?

ㅇ 증인 金大中

예. 입당할 의사가 없다고 밝혔읍니다.

ㅇ 金光一위원

그런데 그와 같은 비슷한 상황이 1987년 작년에 온 셈 아닙니까? 그 때는 또 그 당시의 시국관의 차이때문에 입당을 안 하시려고 했다 하셨는데 그 당시에 증인께서는 야당에 가입을 하셨지요?

ㅇ 증인 金大中

예.

ㅇ 金光一위원

그런데 또 역시 국민들이 아쉽게 생각하는 것은 누가 잘못했다 잘했다 하는 것을 논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증인께서 또 굳이 탈당을 하시면서 다른 당을 하나 더 만들어 이렇게 두 개의 정당으로 대통령선거에 임하게 된 그 점은 그, 때와 지금하고 비교해서 어떻습니까?

ㅇ 증인 金大中

좌우간 이유는 있읍니다. 그러나 작년에 단일화 안 된 데 대해서는 대단히 국민한테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읍니다.

ㅇ 金光一위원

그 다음에 묻겠읍니다. 증인께서는 작년 대통령선거를 즈음해서 盧泰愚 대통령후보 또는 정부 여당측에서 80년의 봄에 우리들이 두 金씨를 찾아가서 또는 증인을 찾아가서 눈물로 정쟁을 자제해 달라고 호소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들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 5·17의 조치가 불가피했다 이런 말을 한 것을 들으셨지요? 과연 그런 일이 있었읍니까?

ㅇ 증인 金大中

전혀 없었읍니다.

ㅇ 金光一위원

그러면 현재 대통령이 되고 있는 그 분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ㅇ 증인 金大中

여하튼 전혀 없읍니다. 거짓말입니다.

ㅇ 金光一위원

전반적으로 80년도에 우리 정치 지도자들께서 너무 낙관론을 가지신 나머지 그런 일이 벌어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마는요.그 다음에 증인이 체포 구속된 정확한 시간은 몇시경이었읍니까?

ㅇ 증인 金大中

아마 밤 10시 조금 넘었을 것입니다.

ㅇ 金光一위원

그것은 17일입니까? 17일밤 10시입니까?

ㅇ 증인 金大中

예. 예.

ㅇ 金光一위원

그러면 비상계엄확대발령은 18일 영시부터 효력을 갖도록 되었는데 그 두 시간전에 체포된 것이 맞습니까?

ㅇ 증인 金大中

예. 맞습니다.

ㅇ 金光一위원

또 그와 동시에 신민당 총재인 金泳三씨는 가택연금이 된 것을 알고 계십니까?

ㅇ 증인 金大中

몰랐지요.

ㅇ 金光一위원

나중에 알으셨지요?

ㅇ 증인 金大中

예. 나중에…

ㅇ 金光一위원

또 증인이 그와 같이 체포된데 대해서 항의성명을 발표하고 계엄해제령을 촉구한 사실도 알고 있읍니까?

ㅇ 증인 金大中

몰랐지요.

ㅇ 金光一위원

그 다음 또 한분의 金씨인 金鍾必씨는 증인과 거의 같은 시간에 체포되어서 약 두달간 구금되어 있다가 재산자진헌납이라는 200여억원을 헌납하는 그런 형식으로 풀려난 것을 알고 계십니까?

ㅇ 증인 金大中

그때는 몰랐지요.

ㅇ 金光一위원

그 모든 사실은 석방된 후에 알았읍니까?

ㅇ 증인 金大中

그렇습니다.

ㅇ 金光一위원

더 묻고 싶은 것이 많습니다마는 시간이 되었기 때문에 몇가지만 묻고 마치겠읍니다.최근 민정당모임에서 또는 민정당이 주최하는 어떤 모임에서 서울대학의 盧在鳳교수가 광주항쟁은 金大中씨의 정권쟁취를 위한 외곽을 치는 노련한 정치기술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런 발표를 해가지고 제법 시끄러워졌던 사실 알고 계시죠? 그 점에 대한 증인의 견해는 어떻습니까?

ㅇ 증인 金大中

뭐 그분은 학자니까 학자가 자기 연구입장에서 한 것이니까 저는 별로 개의하지 않습니다.

ㅇ 金光一위원

알았읍니다.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묻겠읍니다.그 당시의 피해자로서 사형까지 받고 집행당할 뻔 했던 입장에서 그 가해자라고 할 수 있는 최고책임자에 대해서 증인께서는 지금 어떤 피해자로서의 처리를 원하고 계시는지 솔직한 심경을 밝혀 주시면 좋겠읍니다.

ㅇ 증인 金大中

저는요. 그 분들이 한 행동에 대해서는 굉장히 지금도 분노를 가지고 있읍니다. 동시에 그 사람들을 참 어리석고 불쌍한 사람들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금 참 죄에 대해서는 미워하고 사람에 대해서는 연민의 정을 가지고 있읍니다.그것이 저의 현재 심정입니다.

ㅇ 金光一위원

형사적인 처벌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ㅇ 증인 金大中

저는 그 당시 법정에서 2심에서 최후진술을 할 때 1심은 모두 최후진술을 거부했어요. 그때 2심에서 최후진술할 때 제가 이런 말을 했읍니다.저는 그 때 죽을 줄 알았지요. 또 2심 끝나면 다시는 피고를 같이 못 만나니까 제가 최후진술하면서 오늘로서 여러분과 마지막 작별하는데 제가 여러분께 부탁이 하나 있읍니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 당해보면 이런 정치적 보복이라는 것이 얼마나 당하기 어렵다 얼마나 이 참담한가라는가를 여러분이 잘 아십니다. 그러니 내가 죽더라도 나는 80년대에는 반드시 우리 국민이 민주화를 한다고 믿는데 80년대에는 민주화가 되었을 때 여러분이 내가 죽더라도 정치적 보복은 하지 말고 민주화만 철저히 해달라 그런 말을 한 일이 있읍니다.

ㅇ 金光一위원

현재의 심경은 어떠십니까? 그때는 그렇고

ㅇ 증인 金大中

글쎄 그말 할려고 합니다. 그 때 심경이나 지금 심경이나 마찬가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