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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특집/광주민중항쟁, 그후 15년(생활성서, 1995. 5)

본문

특집/광주민중항쟁, 그후 15년

군인들이 쏜 총에 두 눈을 잃고

강 해 중 구술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인 1980년 5월, 광주의 중심가는 피범벅이 되었지만 외곽에 위치한 우리 집은 평온했다. 단지 당시 31사단 방위 근무중인 큰아들이 닷세째 집으로 돌아오지 않아 걱정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아들을 찾으려고 시내로 들어갔을 때는 시민군들과 군인들이 격렬하게 대치하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아들을 보고 온 나는 고등학생이었던 두 아들을 일단 피신시키기로 했다. 우리 동네의 많은 학생들이 시민군에 참여했지만 나는 아들들을 보낼수가 없었다. 두 아들을 화순의 친정집에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5월 21일, 나는 길 안내만 해주고 돌아올 예정으로 산을 넘고 있었다. 우리 주위에는 보따리를 싸들고 안전지대로 피신하는 시민들의 행렬이 줄을 잇고 있었다. 외곽지대로 밀린 공수부대는 들어오는 사람들을 차단했지만 걸어서 광주를 빠져나가는 사람들은 그냥 내 버려두었다.

그런데 그 길이 밝은 세상을 보는 마지막 길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날 나는 공수부대가 쏜 총탄에 맞아 두 눈을 잃고 말았다. 그때 내 나이 마흔일곱이었고, 집에서는 학교에 다니던 어린 6남매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 아들을 데려다주고 먼길을 혼자 돌아와야 하는 나를 생각해 큰딸이 자전거를 끌고 따라나섰다. 우리는 사람들 틈에 끼어 산허리를 뚫어서 만든 비포장도로를 묵묵히 걷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 뒤에서 유리창이 다 깨진 버스 한 대가 올라왔다. 그 버스 안에는 총을 든 사람도 있었다. 그 차가 우리 옆을 지나가는 순간 산속에서 한 발의 총소리가 울렸다. 길에 있던 사람들이 주변의 낮은 곳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두 아들도 낮은 지역으로 달려가 숨었다. 그러나 딸은 당황해서인지 멀리 피하지 못하고 버스 근처에 엎드렸다.나는 맨 마지막으로 아이들이 다 피한 것을 확인하고 길옆 도랑에 몸을 던졌다.

그런데 잠시 후 버스 있는 쪽을 향해 수많은 총탄이 날아오는 것이 아닌가. 딸이 그 근처에 있다고 생각하니 아찔했다. 벌떡 일어나 버스 쪽으로 달려가다가 나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며칠이 지났는지 모른다. 의식을 되찾을 때 내 눈에는 붕대가 감겨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나중에 안일이지만 4일 동안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국군통합병원에 누워 있었던 것이다. 밤을 새워 가며 의식이 회복되길 기다리고 있던 남편이 내 손을 잡고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때까지 나는 앞을 볼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얼마 후 공수부대원이 쏜 총탄이 내 눈을 스쳐 지나가 두 눈을 잃었다는 사실과 다시는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다는 것도 알았다. 나는 기절하고 말았다. 이제 세상을, 내 사랑하는 자식들마저 볼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리고 남편과 아이들의 짐이 되어 사느니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 일체의 음식을 거절했다. 남편은 끈질기게 매일 식사를 권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한 달 정도 지낸 나에게 남편은 밥을 먹지 않으면 당시 국민학생이었던 막내와 함께 죽어버리겠다는 협박 아닌 협박을 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밥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나 퇴원했다.

참으로 갑갑했다. 스스로 내몸을 추스리지 못한다는 사실도 힘겨웠지만 내 손길을 필요로 하는 아이들을 챙겨주지 못하는 어머니의 그 심정을 그 누가 알 수 있겠는가. 둘째딸이 살림을 하면서 어렵게 생활을 하던 우리 집안에 또 하나의 불행이 닥쳐왔다. 내 실명 때문에 심하게 가슴앓이를 했던 남편이 중풍으로 반신불수가 된 것이다. 아내의 병 간호, 학교 다니는 아이들의 뒷바라지로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노력했던 남편이었는데…. 가슴속 깊이 쌓였던 한이 결국에는 중풍으로 나타났다. 평온했던 우리 가정은 풍비박산이 되고 말았다.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움직일 수 있었던 나, 세 번의 대수술을 했어도 마침내 반신불수가 된 남편, 그리고 어렵게 학교를 다닐 수밖에 없었던 6남매를 생각할 때면 가슴이 무너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암담하기만 했다. 단지 위안이 되었던 것은 아이들이 건강하고 착실하게 성장해 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경제적인 형편도 너무 어려웠다. 남편의 퇴직금과 그때까지 알뜰하게 살림을 하면서 모아놓은 돈으로 근근이 생활을 이어갔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삶의 고통은 우리 가정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집 형편을 알고 있던 어느 개신교 단체에서 우리를 도와주었다. 그런 도움이 없었다면 이처럼 고통을 딛고 일어설 엄두는 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때 그날의 한을 그대로 삭일 수는 없었다. 나는 눈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나와 우리 가정을 이렇게 만든 그들이 원망스러웠다. 그리스도인으로 그들을 용서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져 보았지만 그것이 쉽지 않았다. 1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는 내 눈을 앗아간 그들을 용서해주려고 무던히 애쓰고 있다. 그들이 자신의 죄를 깊이 뉘우치고 사죄를 청한다면 말이다.

(정리/박창호 본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