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고 있는 키워드를 검색해보세요.

DRAG
CLICK
VIEW

아카이브

온라인 자료실

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광주YWCA명예회장 조아라 장로.김종남(월간예향, 1989. 6)

본문

□이달에 만난 사람□

“어머니들이 가정에서 좋은 자식 길러내야

가정민주화도 되고 대접도 받는다”

광주YWCA명예회장 조아라 장로

金鐘南 <광주일보 월간국 부국장대우>

운림동 596의 1번지. 광주 학동 삼거리에서 무등산 중심사로 가는 길목으로 접어들어‘배고픈 다리’가 지나고 의재 허백련선생의 유업이 살아 숨쉬는 연진미술원도 지나치면 무등산 상봉까지 시야가 툭트인다. 왼쪽으로 금남중과 학운여중 사잇길, 그 제일 안쪽에 빨간 타일집, 널찍한 정원에 잔디가 파릇파릇하다. 광주 YWCA의 산 역사이자, 광주여성운동의 선구자 조아라 여사(曺亞羅ㆍ77ㆍ광주YWCA명예회장)가 82세된 언니와 단촐하게 사는 곳이다.

“5ㆍ18때 얻은 신경통이 지금까지…”

조여사는 몸이 좋지 않은듯,“용서하시죠. 자리도 변변히 못치우고―“라며 몸을 일으킨다. 방바닥에 전기 담요가 깔려있다. 얼굴도 부석부석 부기가 빠지지 않았다. -몸이 몹시 불편하십니까?”“항상 아픈거지, 뭐-.5ㆍ18덕택으로 생긴 좌골 신경통이 통 안 나아요.”그녀는 80년 광주항쟁때 보안대에 잡혀가 6개월동안 옥고를 치른바 있다. 여고시절부터 민중운동에 앞장서면서 옥고도 수없이 겪었지만, 70세를 바라보는 늙은 나이에 치러야 했던 9년전 옥살이는 아직도 그녀를 괴롭히고 있는가 보다. -지내고 사는 데는 어떻게…”“데리러 다니면 억지로 나다니는데, 아주 누워버리면 일어나지도 못할 것 같고-.물리치료도 하고, 뜨거운 물로 찜질도 하고…때로는 화가 나요.

그래도 젊은 사람들은 그렇게 맞고도 다시 돌아 다니는걸 보면 정말 다행이예요. 나야-. 늙어서 그렇겠지, 한번 골병들어 버린거라 잘 안낫어-.”‘나이 드신분’까지 그렇게 다룬 9년전‘5공’의 죄과가 아직까지 뚜렷하게 척결되지도, 또 광주항쟁의 진상규명과 책임자처벌도 무엇 하나 제대로 이뤄진게 없으니 무어라 위로의 말을 찾기 조차 민망하다. 얼른 말머리를 다른데로 돌렸다. -이곳에 사신지는 얼마나 되셨습니까?”“10년 됐지요. 여기온지 10개월만에 5ㆍ18이 났습니다. 그전에는 지금 광주일보 뒷편 YWCA회관 안쪽사택에서 22년간 살았었습니다.”아마 그때 그대로 YWCA사택에 있었더라면 소위‘5ㆍ18진압’때 더 큰 화를 입었을 뻔 했다. YWCA는 도청과 함께 진압군의 집중공략을 당한곳이기 때문-.-조회장님은 YWCA와 함께 살아오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데요. 언제부터 Y와 인연을 갖게 됐습니까?”“여고 1년때인 1927년 이었습니다. 은사이시던 김필례(金弼禮)선생님의 감화를 받은거지요.

학생 YWCA회원 간부로 졸업때까지 4년간 Y가 무엇인지 배웠습니다.”-광주 YWCA는 언제 생겼습니까?”“제가 국교 3년때인 1922년 생겼습니다. 김필례 선생님이 앞장서시고 수피아 선생들 중심으로 또 교회 여성들과 합쳐 세워졌죠.”YWCA에 들어가면서 시작된 조회장의 여성운동은 고행의 연속이었다. 고3년(1929년) 광주학생운동때 잡혀들어간 것을 비롯해 학교를 졸업한후 33년 백청단 사건 주모자로 연행돼 감옥살이를 했다. 37년 신사참배 거부문제로 수피아의 존폐가 걸려있을때도 조여사는 공교롭게(?) 동창회장직을 맡고 있어 검거를 피할 수 없었다. ‘학교가 없어지더라고 신사참배는 못하겠다’고 버텼다. 학교는 폐교되고 조여사는 또 한달동안 감옥에 갇혔다.

신사참배 반대하다 몇차례 감옥살이

이때 나이 25세. 결혼한지 1년여. 첫애가 젖먹이때다. 불운은 남편에게도 닥친다. 평양 신학교2년을 다니던 남편 이택규씨(李澤揆)는 ‘교회가 모금해서 일제에게 전투기를 사주자’고 결의하는 총회를 보고‘이런 썩은놈의 신학교 안 다닌다’며 자퇴서를 써 던지고 광주로와 피신해 다니던 중 진성장티푸스로 쓰러진다. 조여사와 동갑인 남편이 27살때이다. 1939년 6월 17일 유복자인 둘째 아들이 태어났다. “차라리 딸이었으면 했었는데….”첫째 아들 젖먹이때 겪은 신사참배 망령은 둘째 아들때도 또 나타난다. 양리동 친정에서 애들과 같이 기거하고 있던 조여사는 둘째애가 석달째되던 9월 어느날 저녁 영문도 모른채 끌려갔다. 일경이 신사참배를 반대하던 광주지역 교회청년단 37명을 일제히 검거한 것. 홍역을 앓고 있던 둘째애가 못 잊혀 조여사는 눈물로 지샜다. 여자들은 한달만에 풀리고 남자들은 대구에 가서 2심 재판까지 받았다.

당시 광주극장 옆에 있던 YWCA건물의 방 한칸을 얻어 쓰고 있던 광주 YWCA도 신사참배를 반대한다고 간판이 뜯겨 버렸다. 조여사는 해방이후 광주 YWCA재건에 주도적 역할을 맡고 45년부터 총무ㆍ회장으로 43년동안 일해오다 지난해 명예회장으로 물러나 뒤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왜 여자는 장로ㆍ목사 못됩니까?”

-수피아 재건에도 아주 열심이시던데요?”조여사는 해방이 되자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된 수피아를 복교 시키는데 앞장섰다. 그때도 수피아 동창회장직을 맡아 45년12월 전국장로교 여학교중 제일 면저 수피아의 문을 열게 했고 그 이후 3년여동안 학교의 재정을 대기위해 동창생들을 모아 행상까지 벌이는 등 노심초사했다. 지난해에는 개교80주년 기념사업으로 강당건축을 제안, 추진위원장 자리를 맡았다. 88년 광주시민대상을 받았을 때 상금 3백만원을 몽땅 내놓았고 올해에도 지난 2월말 회수(喜壽)를 맞아 들어온 축의금 9백9만8천원 전액을 희사한 바 있다.“수피아를 재건하는데 책임도 있지만 기독교학교가 예배볼 수 있는 장소하나도 제대로 없어 강당을 지어주고 나선것이지요.”

-지난해 시민대상 상금은 물론 올해도 희수축의금 전액을 기탁하셨던데요?”“당연한 일이지요. 제가 발생해서 제가 책임자로 있는데요-.”-수피아는 이지역 초기 여성교육 현장으로 뜻이 깊겠군요. 모금은 잘 돼갑니까?”“그 곳이 광주지역 3ㆍ1운동 발상지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해방이후에 졸업한 사람들은 너무 행복하게 자라서인지 잘 안 따라와 모금이 뜻대로 잘 안되군요. 아무튼 되긴 될겁니다. 시간이 좀 걸리지-.”

-요즘은 여성운동도 옛날과 많이 달라졌지요? 여성들의 지위나 또 생각들이…“물론 많이 달라졌지요. 그땐 사실 여자들이 배운 사람도 적고 미신에 많이 젖어 있어서 생활개선등 계몽단계였지요. 여성운동한다고 고생들 많았지요. 나 개인으로도 재봉틀 돌리고 바느질해야 살아가는판에 시간 쪼개 YWCA 에 나와 총무해야 했고-.”-어려웠던 시절 얘기는 한정이 없으실테지만 그보다 앞으로의 여성운동의 방향은 어찌 될까요?”“여권신장과 자질문제가 한 10여년 동안 여성운동의 주제가 됐지만 지금은 그런데 머물러선 안됩니다. 얼마전 어느 여성단체모임에 갔더니 아직도‘여권’이니‘여성지위’니 하고 떠들길래‘지금 단계는 남녀 동반자 시대인데 인제는 그런소리들 말라’고 했습니다. 그 많은 대졸여자들, 그 많은 공부들을 받아 가지고 동반자적 자세로 나가야지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합디다.”

-동반자시대라면 구체적으로 어떤…?”“의회나 지방자치제에 같은 자격으로 나가야 제…”-그런 방향으로 잘 돼 나가겠지요”“물론 대부분 잘되어가고 있습니다만 기독교계에 한마디 하고 싶어요. 기독교계는 아직도 전통유교사상, 남존여비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했어요. 기장과 감리교는 인정하지만 대다수 교파들이 여자장로나 목사를 인정치 않고 있어요. 왜 여자는 장로나 목사가 안됩니가? 요즘 그일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싸우고 있습니다.”불편한 몸을 일으켜 대화를 시작했던 조회장은 한번 말문이 터지자 줄줄 옛날 일들을 쏟아냈다. 목소리도 카랑카랑하게 지난일들을 날짜는 물론 사람이름들도 하나 빠트리지 않을 만큼 기억력이 총총하다. 말문이 자연히 기독교쪽으로 돌아갔다.

태어날때부터 기독교 믿어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셨다면서요?”“나주군 반남면 대안리가 고향인데 아버지가 교회를 세우셨지요. 내가 태어나기도 전이죠. 그때 당시 그렇게 빨리 기독교를 받아 들인것도 이유가 있긴 했습니다. 집안 남자들이 2대째 나이 40전에 일찍 죽는 불행이 큰 요인이 되기도 했지요. 하나님을 믿은탓인지, 아무튼 그뒤로는 일찍 죽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저희도 2남4녀, 6남매가 모두 다 잘 살고 있습니다.”집안에서 가장 먼저 기독교를 받아 들인 것은 조여사의 큰아버지. 그는 나중에 광주 미국선교회에서 장로로 일했다. 조여사의 부친 조형률씨도 조여사가 여고를 졸업할때쯤 광주로 옮겨와 양림웃교회 장로를 지냈다. 부농이던 조형률씨는 동네사람들이 굶지 않도록 선심을 잘 베풀었고 빚보증을 많이 섰다가 재산을 날리게 했다. “아버님은 예수를 몸으로 믿고 실천하며 평생을 사신 훌륭하신 분이셨습니다. 당연히 온집안에 기독교 신앙이 높았지요.”

‘애나’라는 선교사 이름에서 따온 ‘亞羅’

-태어나면서부터 기독교를 믿으신 셈이신데 그동안 회의를 느껴 보신적은 없으십니까?”“평생 회의를 느껴 본적이 없습니다. 제가 다섯 살때 국문을 해득했는데, 여섯 살때 소학성경문답이라고 100문을 다 외웠고 아홉 살때는 굉장히 어려운 성경교리 문답 100문을 내가 묻고 내가 답하는 식으로 다 외웠습니다. 태어날때부터의 교육, 특히 기독교식 가정교육이 나를 이끄는 큰힘이 됐습니다. 회의를 가질 수 없게 만들었지요.”-사회운동을 하시면서 갖가지 괴로움과 역경을 넘어서시는 용기가 바로 그 기독교신앙에서 나왔군요?”“결국 그것 뿐이지요. 이 몸은 죽더라도 내 혼은 영원하다는 그런 신앙심…”-이름도 서양식처럼 좀 독특한데요?”“제가 태어난지 사흘 되던날‘애나’라는 서양 여자 선교사가 우리집에 방문했다가 아기 울음소리를 듣고 자기 이름을 주었습니다. 아버님이 호적에 한자로 올리면서 ‘亞羅’로 변한것입니다.”

-아까 여성운동 얘기를 하다가 기독교 얘기로 흘렀습니다만 동반자시대에서 구체적 실천은 어떤식으로 추진해야 할까요?”“여성운동은 이제 남녀동등의 민주운동입니다. 앞으로 실시되는 지방자치제에서 여성은 적어도 30%의 자리를 받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을 내보내야 하는지 미리 준비해야 합니다. 여성들이 여성을 뽑아서 가난한 지방 살림을 지켜나가야 합니다. 지금까지 큰 살림 작은 살림 다 남자에게 맡겨서 이런 행태가 왔으니 이제 우리가 지키자는게 제 주장입니다.”조여사는 정치에도 여성들이 참여해야 하는데 우선 시군의회 직할시의회부터 힘을 키워 국회로 나가야한다는 지론을 편다.-평소에 가정민주화가 곧 사회와 국가민주화에 직결된다고 자주 말씀 하시는 걸 들었습니다만-.”“가정이 민주화 안되면 아무일도 될 수 없죠. 가정에서 어머니가 어머니 대접을 못받고 아내가 아내대접을 못받으면 자식들이 커 또 그 어머니 제 아내 무시하게 되니까 악순환이 됩니다. 이 문제는 남자들과 의논해야 할 문제입니다. 남자들이 여자대접을 잘해야 합니다. 현실적으로 어머니를 존중하고 대접하도록 가정교육을 해야 합니다.”

가정에서부터 좋은 자식 길러내야…

조회장은 말이 가정과 자녀교육문제에 이르자 스스로 열을 이기지 못했다. 왜 이렇게 요즘 청소년 범죄는 극악인가? 강력범이 청소년속에서 왜 이리 많이 나오는가? 이것이 문제입니다.”묻기도 전에 질문을 던져놓고 답을 잇지 못한채 울먹인다.“어머니들이 어머니노릇을 잘못 한 때문입니다. 그 책임은 나도 져야 하고, 안 지려고 하는건 아니예요. 여성들이 여성노릇을 잘 했으면 이렇겠습니까? 가정교육을 제대로 해야 되는데, 그걸 못하고 학교 교육에만 맡겨놓으니-. 지금 학교가 인성교육 합니까? 학교란게 대학입시 교육만 시키고 있으니 이런 사태가 온 것 아닙니까-. 어찌됐든 아무리 변명하고 아무리 회피하려고해도 그 책임은 어머니에게로 돌아옵니다. 어머니들은 제일 먼저 가정에서부터 좋은 자식 길러내고 그렇게 해야 가정민주화 이뤄지고 대접받는 아내, 대접받는 어머니가 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조여사는 요즘 젊은 여성들에게도 한마디 덧붙인다.“대개들‘뭐가 될것이냐고’고 물으면‘현모양처’라고 대답들 하는데‘어진 어머니, 좋은 아내’라는 것은 여성으로 태어나 당연히 되어야 하는것인데, 그것마저 안 한다고 하면 되겠어요? 한단계 더 나가 가정민주화를 이루고 또 사회민주화에도 힘을 쏟아야겠지요.”조회장은 그런 의미에서 30여넌동안 여성사회운동으로 애써온 가족법개정이 아직까지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는데 대해 가슴이 아프다고 말한다. “겨우 하나 통과된 게 남녀취업동등 관계법인데 그것도 법대로 정말 실시될지 두고 봐야지요. 아무튼 가족법개정은 금년내 기어코 되도록 해야지요.”대단한 각오를 보인다. 얘기를 가정민주화에서 사회민주화쪽으로 옮겨본다.

‘보안법 고치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요즘 문익환목사 사건으로 통일문제가 가장 큰 사회이슈가 되고 있는데요.”“해방이후 제 기도중에 통일문제가 빠져 본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요즘 너무 슬퍼 많이 웁니다. 어째 이럴수가 있느냐? 오늘 새벽에 기도하다 또 울었습니다. 문목사가 용기있게 통일문제를 공적으로 들고 나온 사람들중의 한사람 아닙니까-. 그가 자기의 생명을 내놓고, 그런 각오밑에 간것인데 여당은 물론 야당까지 들고 나서서 불법이라고, 잡아넣어야 한다고 말하니 아픈 가슴 말도 못해요. 거기다가 소위 기독교지도자들-.우리는 지도자로 생각지도 않지만-.자처하는 그 지도자들이‘문목사를 의법조치해야 한다’고 이런 성명을 내고 있을 때 내가 기독교인이라는게 부끄럽습니다.”조여사는‘개신교가 이런 과오를 많이 범했으니 완전한 기독교개혁, 기독교혁명이 다시 와야 한다’고 말하다 감정이 격해서 눈물에 젖어든다. 야당에 대해서도 그녀는 혹독한 비판을 가한다.

“13대 국회 첫 번 열때부터 보안법, 그것 먼저 고쳐달라고 그렇게 성화를 했는데-. 물론 안 고치고 싶어서 안 고친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야당들이 좀더 적극적으로 했더라면-. 물론 저 사람들이 거부권을 썼을지도 모르지만, 야당들이 기대에 맞게 조금만 더 노력을 했더라면 이 문제가 이렇게까지는 안되었을 것 아닙니까? 지금 이런 현실에서 문익환목사가‘나 이북 갔다 올테니 보내주시오’라면 보내주시겠습니까? 백번 죽는다고해도 못간다고 할 것 아니오? 그러니까 그런 방법으로라도 갔다와서‘거기는 이렇더라’는 말을 전달하려고 용기있게 간 것입니다.”조회장은 문목사 구속반대운동을 어느 모임에 가서나 적극적으로 앞장서 펴고 있다.‘이런 악법속에서 허락을 못 받을테니 문목사가 그러한 방법을 쓴것인데 어째서 정부가 그렇게 강경책을 쓰고 각계, 또 언론계까지 부정적으로만 몰려고 하느냐’는 지론을 서슴없이 역설한다.

“구렁이 담 넘듯 절대안됩니다”

- 시간이 흐르면서 결국 정부의 통일정책도 개방을 수용하는 방향으로 돌아가겠지요?”“6·29선언한지 이제 거의 2년이 돼 가는데 무엇하나 제대로 된게 있습니까? 언론 자유가 있다고 또 풀겠다고 했는데 무얼 풀었습니까-. 한겨레신문과 기독교방송기자에게는 왜 지금까지 청와대 출입을 금지하고 있습니까-. 자기들 말을 예전부터 잘 들어주는 사람들은 출입을 하게 하고…. 이따위 식으로 하니-.이번에 이 정부가 통일의사가 없다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이 정부를 절대 지지 못합니다.”조여사의 톤이 점차 높아진다. 통일문제는 물론 정치·경제·언론문제까지 확대되면서 신랄하게 정부의 잘못을 지적한다.“자유민주화체제로 나가겠다고 4당 총재들까지 모여 말하길래 행여나 하고 기다려 보았는데-. 또 지난해 7·7선언에서 경제·외교는 물론 학생·문인교류, 체육까지 교류한다고 하길래 기다렸는데-.무엇 하나 했나요.

그런식으로 국민을 기만하는 그런 사람들이라면 이나라 민주화가 결코 안된다는 것을 이번에 새삼스럽게 느꼈습니다. 노태우 대통령에게‘신 못 믿겠소’라고 편지를 쓰고 싶은 심정입니다.”조회장이 광주문제를 뺄리 없다.‘온 국민과 언론이 한데 뭉쳐 거짓말 하는 정부, 광주문제의 진실을 감추며 속이기만 하는 사람들을 규탄해야 한다’고 못 박는다. “그래도‘잘못했다’고 사죄한다면‘죽여라’는 말은 못합니다. 죽이는 것는 하나님 하시는 일이니 하나님께 맡기고 죄는 법에 의해서 처리할 일 아닙니까-. 내 입으로는‘죽여라’는 말을 안할려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저 하는 꼴들을 보십시오. 광주문제, 어떻게 슬쩍 구렁이 담 넘듯, 돈 몇푼씩 주고 해결해 버릴려고? 천부당 만부당, 안됩니다. 역사가 그들을 심판 할겁니다. 역사가 바로 써질날이 반드시 옵니다. 그들은 자기 후손들에게라도 떳떳하려면‘우리가 잘못했습니다. 사죄합니다. 용서 해주십시오’라고 빌고 문제를 풀어 가야 합니다.”너무 격양돼 진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조여사 주변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성빈여사나 계명여사 운영은 잘 됩니까?”“10여년전부터 적임자가 있으면 운영권을 넘겨줄려고 찾고 있는데 안 나타나군요. 다들 사회사업 하는걸 싫어하는 것 같습니다. 당초에 할려고 해서 시작한 것은 아니지만 옹고집으로 끌고온 사회사업인데…”6·25때 YWCA는 금동 구시청옆에 있었다. ‘광주여자기독청년회’라는 광주 YWCA간판을 보고 전쟁고아들이 몰려들었다.‘기독’이란 단어가 들어 있으니 당시 생각으로 자선기관으로 안것.‘잠 잘데만 달라’고 애걸하는 그들을 물리치지 못해 받아 들인게 두세달사이에 1백여명이 넘어섰다. 이렇게 해서 성빈여사가 시작됐다. 55년에는 2백여명을 수용했었다. 이어서 성빈여사에 있는 아이들을 교육시키러 만든게 3년제 야간중학교인 호남여숙. 호남여숙은 고교평준화 될 때까지 20회 1천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빈약한 YWCA재정으로 이들 기관을 이끌어 가기 위해 수없는 시련을 겪어야 했다. 계명여사는 62년도에 윤락여성들의 문제가 사회문제화 되었을 때 불우여성직업 보도를 위해 문을 열었다. 67·68년에는 심한 한발이 들어 이농이 급격히 늘었다. 이들 불우 여성들에게 낮엔 미싱, 자수를 가르치고 밤이면 글을 가르쳐서 자활의 길을 열어 주었다.“계명여사는 60년대초 빚에 몰려 갈곳이 없이 헤맬 때였습니다. 하루 종일 울며 기도를 했습니다. 사실 기도도 아닌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고 푸념이었습니다. 새벽녘 꿈속에 지금 계명여사자리 선교사 촌이 눈에 선하게 보이데요.‘하나님이 이리로 가라고 하는구나’, 아침에 선교사촌에 들어가 꿈에 보았던 그 자리를 얻게 됐지요. 바로 하나님의 지시였던거죠. 일주일후에 그 자리에 문을 열게 됐습니다.”

“통일위해 기도하며 살겠다”

-아드님이 두분 계신다는데…“큰아들은 미국에 있습니다. 디트로이트에서 사업을 하는데 대학시절 라이프지에 글 쓴 것이 당국의 비위를 거슬려 20여년동안 귀국을 못했습니다. 둘째아들은 전주예수병원에 의사로 있습니다.”조여사의 큰아들 이학인씨(李學仁·54)는 고려대영문과를 나와 미국 미시간대에서 정치학석사를 마쳤으나 라이프잡지에 한국정책에 대한 비판기사를 실은 것이 문제가 돼 한국에 오지 못하고 미국에 살고 있다. 그는 소위 당국의 블랙리스트에서 지난해 10월에야 빠지게됐다. 둘째아들 이학송씨(李學頌·51)는 전주예수병원에 17년째 근무, 현재 X-레이 과장직을 맡고 있다.

문갑이나 장롱하나 없이 휑뎅그렁한 조여사의 안방, 남쪽으로 난 창문옆에‘광주여/무등산이여/아아 우리들의 영원한 깃발이여/꿈이여, 십자가여’라고 써진 목판화가 하나 걸려있고 그밑에 조그마한 경상이 하나 놓여 있다. 경상위엔 두아들 가족이 함께 모여 찍은 사진이 책들 옆에 단촐하게 서있다. -요즘 무슨책을 읽고 계십니까?”“읽어야 할것들은 너무 많은데…. 눈도 안 밝고 해서…. 간단한 것만 그저 읽습니다. “들어 보이는 잡지는 신학연구소에서 나오는‘살림’이라는 월간지다. -앞으로는 어떤일을 하시렵니까?”“내가 앞으로 살면 얼마나 살랍디까?…제발 나 살아 있는동안 통일이나 됐으면 좋으련만…. 통일을 위해 기도하면서 살렵니다.”그녀는 끝내 눈물을 찍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