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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광주투쟁기/구두닦이에서 광주투사로/한 밑바닥 인생이 겪은 5·18과 고문.박래풍(말,1989. 1)

본문

광주투쟁기

구두닦이에서 광주투사로

한 밑바닥인생이 겪은 5·18과 고문

구술 : 박래풍(당시 구두닦이)

정리·제공 : 한국현대사사료연구소(소장 송기숙 전남대 교수)

“데모 조금 한다고 민족을…”

내가 여섯 살때 아버님께서 돌아가셨다. 어머님은 그해에 나를 고아원에 맡기고 개가하셨다. 형제도 없기 때문에 그때부터 혼자 생활하기 시작했다. 무등갱생원에서는 월산국민학교를 졸업하던 해까지 살았다. 원생들은 150여명쯤 되었다. 어느 고아원과 마찬가지로 사회 사업가나 사회단체의 보조금으로 생활하고 국민학교 다니면서부터 학용품은 각자가 벌어서 섰다. 나는 구두닦이를 했는데 다른 친구들은 신문팔이도 했다. 국민학교 졸업 후 구역부근에서 약 4년동안 구두닦이를 하다가 서울로 올라갔다. 친척도 없기 때문에 기숙사에서 생활하면서 장롱에 자개 붙이는 일을 2년간 했다. 그때 고생했던 것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겠는가! 연락이 닿는한 고향사람들을 틈틈이 찾아다니면서 어머님 소식을 물었다. 그렇게 생활한지 2년이 지난 어느날 고향어른으로부터 어머님이 화순에서 살고 계시다는 말씀을 듣고 곧바로 그곳 생활을 정리하고 화순으로 왔다.

여섯 살때 헤어진 후로 13년만에 어머니를 만났다. 과거야 어찌됐든 어머니 곁에 있으면서 도움이 되고 싶었다. 새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동생이 다섯명이다. 화순에서 한국 음식을 전문으로 하는‘우리식당’에서 4년간 종업원으로 일했다. 어머니와 함께 살기는 힘든 조건이기 때문에 식당에서 먹고 자고 했다. 그후 화순버스터미널에서 구두닦이를 하면서 매표소 일도 했다. 그곳에서 일할 때 80년 5월을 맞았다. 당시 터미널에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빨리 광주에서 데모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광주에서 온 사람들이 학생과 시민들이 데모를 하는데 경찰이 최루탄을 뿌리고 학생들을 다 잡아 간다고 했다. 그말을 듣고 나는 피가 거꾸로 솟았다.‘데모 조금한다고 같은 민족을 실신하도록 때리고 잡아갈 수가 있어서야!’하는 생각이 들자 분해서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그길로 화순에서 농사짖고 있던 친구 용호와 함께 광주로 갔다.

5월 19일 우후 3시경에 광주에 도착했다. 그날은 도청에는 못가보고 금남로 4가로 갔다. 거기에서 학생들과 함께 데모를 하다가 현대극장 앞에서 처음으로 시체를 봤다. 공수부대가 때려서 죽인 사람이라고 했다. 그것을 보고‘같은 민족끼리 이럴수가 있나’하는 생각이 들면서 분노가 치밀었다. 오후 4시쯤에 많은 시민과 함께 금남로 2가로 가서 군인들과 투석전을 벌였다. 나도 그때 돌을 던졌다. 그들이 최루탄을 쏘자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고 또 흩어지는 식으로 데모를 했다. 그날 화순으로 가려다가 친구와 함께 가지말기로 합의를 보고 여관에서 잤다.

다음날 아침 9시, 도청 앞으로 나갔다. 그곳에 있던 시위대들이‘각자 자동차를 한 대씩 타고 도청으로 쳐들어가자’고 하면서 돌을 던지고 몽둥이도 던지면서 힘껏 싸웠지만 도저히 그들을 이길 수는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싸워봤자 우리만 손해보겠다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친구와 함께 화순으로 가려고 했다. 우리는 둘다 주민등록증이 없었는데 그러면 공수부대들이 시외로 빠지는 길목에서 지키고 있다가 총으로 쏴서 죽인다는 말을 듣고 무서워서 못갔다. 도청 부근에서 세수를 하고 시위군중들과 함께 금남로에 있는 중앙극장 앞까지 갔다. 거기에서 다시 올바른 보도를 하지 않은 방송국을 불태우러 가자고 해서 스크럼을 짜고 화염병을 숨겨서 MBC 앞에까지 왔다. 그곳에서 학생으로 보이는 청년에게 화염병 2개를 받아서 문화방송국 건물에다 던졌다. 시위대와 함께 있다가 밤 11시경에 같이 데모하고 다녔던 시민의 집에 가서 친구와 함께 잤다. 우리가 집에 가지 못하는 사정을 얘기했더니 백운동에 있는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다.

눈뜨고는 보지 못할 여학생의 시체

21일 친구와 나 그리고 우리를 데리고 간 시민, 이렇게 셋이서 백운동에서부터 걸어서 금남로 쪽으로 왔다. 금남로는 우리보다 먼저 나온 사람들로 꽉 메워져 있었다. 잠시 그곳에 있다가 배가 고파서 양동시장 쪽으로 갔다. 양동에서 시민이 싸준 김밥을 먹고 다시 셋이서 도청으로 왔다. 금남로는 각종 차량들과 사람들로 가득차 있었다. 장갑차에 다리만 넣고 몸은 밖으로 내놓고 태극기를 흔들면서 도청을 향해서 가던 한시민이 공수군이 쏜 총에 맞고 즉석에서 사망했다. 장갑차는 도청문을 받아버리고 멈췄다. 그 광경을 목격하고 두려운 나머지 더 이상 그곳에 있지 못하고 황금동 콜박스 부근으로 갔다. 거기에서 학생으로 보이는 청년 5명을 공수군이 잡아서 무릎을 꿇어 앉혀놓고 몽둥이로 구타하는 것을 봤다. 나도 저렇게 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겁도나고 분하기도 해서 그곳에 모여 있던 시민들 옆으로 갔다.

60여명의 시민, 학생들이 있었는데 그 광경을 보고 술렁거리기 시작했다.‘저럴수가 있느냐 우리가 이렇게 보고 있지만 말고 힘을 합쳐서 학생들을 구해주자’는 등의 말과 동시에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60여명의 시민들이 몰려가서 돌을 던지자 공수들이 도망갔다. 잡혀있던 학생들에게 가서 물어보니‘길을 가고 있는데 잡아다가 마구잡이로 때렸다’는 것이다. 학생들의 말을 듣고보니 더욱 화가 치밀었다.‘데모를 하지도 않은 사람을 때리다니’라는 생각이 들자 놈들이 한없이 미웠다. 그곳에서 불안감을 떨쳐버리기 위해 친구가 사온 맥주를 마시고 다시 도청 앞으로 갔다. 상무관 앞에 여학생의 시체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곳으로 갔다. 요즘 자료집이나 5ㆍ18사진 전시할 때 나오는 시체이다. 정말 눈뜨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했다. 여자라고는 하지만 도저히 육안으로는 구별되지 않았다. 팔과 다리가 모두 잘라져 나가고 없었다. 그 광경을 보고 이제 더 이상 무섭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여기저기 구경이나 하고 돌이나 던져서는 총을 든 공수들을 이길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친구와 함께 도청으로 갔다.

22일 도청에서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이래서는 안되겠다’싶어 친구와 함께 무기를 탈취하러 가기로 결심했다. 같이 있던 시민군들은 영산포 쪽으로 가자고 했으나 거부하고 평소에 지리를 잘 아는 화순으로 갔다. 중앙고속버스를 앞세우고 일부는 화순군 구암리 경찰서로 가고 나와 친구 그리고 세사람의 시민군은 짚차를 타고 화순 역전 파출소로 갔다. 무기고는 자물쇠가 채워져 있고 경찰은 아무도 없었다. 자물쇠를 짚차에 걸고 당겨서 문을 열었다. 다섯명이 함께 파출소로 갔는데 그때 모두 총 한자루 씩을 나눠 가진 것으로 기억한다. 그곳에서 실탄 1박스와 권총알 20개를 가지고 오니까 당시 상황실장을 하던 박남선씨가 총과 실탄을 반납할 것을 요구했다. 나는 단호히 거부했다.“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싫다”고 하자 더 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공수대놈들은 총으로 무고한 시민을 쏘아 죽이는데 우리가 화순까지 가서 탈취해 온 총을 달라고 하니 어이가 없었다. 친구와 함께 강당으로 가서 아줌마들과 학생들이 해준 밥을 먹고 도청에서 그날밤을 보냈다.

23일 정오쯤 되었을 때 박남선 씨가 조를 편성했다. 5인 1조로 나는 친구와 같은 조에 들어갔다. 우리조에게는 백운동으로 가서 외곽지역을 경계하라고 지시했으나 나는 그일보다‘시체담당’을 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하자 수락되었다. 그때부터 우리조는 각처에서 도청으로 옮겨진 시신들을 옷을 입혀 관에 넣고 관위에 태극기를 씌우고 과일도 놓아주는 일을 했다. 그날 오후에 시민의 제보가 들어왔다. 학동 남광주시장 부근에 시민 한명이 총에 맞아 죽었다는 것이다. 우리조 5명이서 가보니 옆구리에 관통상을 당해 죽어 있었다. 도청으로 싣고 가서 관에 넣었다.

‘의사에게 총을 들이대다’

24일 새벽에 근무를 서고 있는데 연락이 왔다. 학동에 있는 제재소에 총을 맞아 쓰러져 있는 사람이 있으니 운반하라는 것이다. 2층 강당에서 그 연락을 받고 앰블런스 운전수와 함께 갔다. 15살 정도의 학생 1명이었는데 아직 죽지는 않았지만 실신해 있었다. 주위는 피로 낭자해 있었다. 입고 있던 잠바를 벗어 총에 맞은 옆구리를 묶어 일단 지혈을 시켜 전대병원으로 갔다. 응급실로 가자 간호원이‘환자들이 침대마다 꽉 차있어 더 이상 수용할 수 없으니 다른 병원으로 가보라’면서 거절했다.‘사람이 죽어 가는데 어디로 옮기냐’면서 바닥이라도 좋으니 빨리 응급처치를 하라고 강요했다. 간호원과 한참을 옥신각신하고 있을 때 의사가 보였다. 의사에게 달려가 급히 수술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의사는 환자를 보더니 수술해도 가망이 없다는 이유로 외면하려 했다. 계엄군의 총에 맞아 죽어가는 어린 학생을 대하는 의사의 태도가 지나치게 냉정해 보이고 같은 시민으로 가질 수 있는 걱정하는 마음이 전혀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지금이야 나도 그 의사들 고생 많이 했고 당시 수없이 밀려드는 환자들을 치료하다 보면 당연히 있을 수 있는 행위라는 것을 이해하지만 그때는 그런 여유가 전혀 없었다. 의사가 어린학생에게서 돌아서자 총을 들이댔다.‘설령 수술하는 사이에 죽는 한이 있더라도 최선을 다하라’면서 수술을 강요했다. 우리의 요구를 의사가 들어줬다. 어린학생은 즉시 수술시로 옮겨져서 수술을 받았다. 막상 수술을 하고 보니 비교적 간단한 수술이었고 상처도 그리 크지 않았다. 갈비뼈 3개만 나가고 총알이 관통했다. 수술전에는 워낙 피를 많이 흘린데다 실신한상태였기 때문에 혹시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의사가 괜찮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해서 거듭 부탁하고 우리조 다섯명은 다시 도청으로 갔다. 24일 낮부터 26일까지도 계속 도청에서 생활했는데 특별히 기억나는 일이 없다.

도청에서 체포당하다

27일 새벽 3시경에 계엄군이 도청으로 쳐들어 왔다. 2층 강당에서 30여명이 있었는데 갑자가 총소리가 들렸다. 바로 그때 같은 조원 1명이 밥을 먹고 오다 총에 맞아 쓰러졌다. 기어서 그곳으로 갔다. 총알이 허리를 관통했다. 빨간 런닝셔츠를 벗어서 허리를 묶어서 일단 지혈을 시키고 이불을 덮어주고 총을 들고 돌아서자마자“꽝!”하는 굉음이 들렸다. 반사적으로 뒤돌아 보니 방금 총에 맞아 쓰러져 있던 동지는 온데간데 없고 천장을 보니 저쪽 형광등에 내가 동지의 몸에 덮어주었던 이불이 걸려있었다. 내가 들고 있었던 총도 반쪽은 날아가 버리고 반쪽만 남아 있었다. 계엄군들이 도청으로 쳐들어 오면서 수류탄을 던진 것이다. 계엄군이 도청으로 쳐들어 오기 바로 직전에 친구와 나는 밥을 먹고 강당으로 왔다. 왠지 이상한 예감이 들어 친구한테 라디오를 켜보자 했다. 친구가 시간도 오래 됐고 했으니까 그냥 있자고 해서 라디오를 틀지 않았다. 아마 계엄군이 도청으로 들어온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았다면 나는 도청을 나갔으리란 생각이 든다.

그때 도청정문 앞으로는 장갑차 탱크가 들어오고 뒤쪽에서 총을 쏘며 공격한 것으로 기억한다. 강당에 있다가 도청앞에 공수가 보이자 나도 강당에서 도청 앞마당을 향해 총을 쐈다. 같이 있던 동지들은 쓰러지는데 그때 상황에서는 그들을 보살펴 줄 수 있는 여유는 전혀 없었다. 공수부대들이 쏘는 총소리는 마치 콩을 볶는 듯 했다. 공수가 계단으로 올라오는 것을 보고 무서워서 화장실로 숨었다. 화장실에는 나 이외에도 2명이 더 있었다. 그때 도청 2층에 있는 강당에만 수류탄이 2개정도 터졌다. 화장실에 있다가는 죽을 것 같아서 셋이서 손을 들고 자수했다. 우리가 나가자 공수들이“너희들은 폭도들이니까 계단으로 내려갈 필요도 없이 나무타고 내려가!”했다. 도청 2층 강당앞에는 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우리는 반항은 생각도 못하고 시키는대로 하지 않으면 쏴버릴 것 같아 힘껏 나무있는 곳으로 뛰어 나무를 간신히 잡고 그 기둥을 타고 내려갔다. 땅에 내리자마자 구타하더니 포승줄로 묶어 땅바닥에 엎드리게 해 놓고 구두발로 밟고 다니면서 닥치는 대로 때리기 시작했다. 그런 상태로 2시간정도 지난 후에 우리를 미니버스에 태웠다. 새벽 5시경에 양동을 거처 상무대 헌병대 유치장으로 보내졌다.

배후를 대라며 갖은 구타와 고문 잇달아

상무대에 도착하자마자 한참을 때리더니 유치장에 처넣었다. 그동안에 쌓였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와 나는 잠을 잤다. 주위가 시끄러워서 일어났는데 옆방에 있던 동지가 자살하려고 변소로 가서 시멘트벽 모서리에 머리를 찍어 이마가 갈라졌다고 했다. 변소에 피가 낭자해 있는 것을 봤다. 그 동지는 통합병원으로 후송되었을 것이다. 아침부터 조사를 받기 시작했다. 포승줄로 묶어서 맨발로 연병장으로 끌려갔다. 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는다고 몽둥이로 맞고 기합을 받고 다시 유치장으로 갔다. 다시 5명씩 불려가서 조사를 받았다. 우리조에는 나하고 화순에서부터 같이와서 활동했던 김용호와 뒤늦게 화순에서 광주로 와서 잡힌 친구 강남원 외에 2명이었다.‘어떻게 해서 데모를 하게 되었는가’에 대해 물었다.“화순에서 광주에 공수부대가 투입되어 시민을 때리고 무작위로 잡아간다는 말을 듣고 같은 한민족으로서 분노를 참을 수 없어 광주로와서 시민군에 참가하게 됐다”라고 했다. 그러자“넌 빨갱이다. 어차피 죽게되니까 사실대로 말해라”고 하면서 발로 찼다. 그것이 사실이라고 버티자 유치장으로 보냈다.

28일 화순경찰서 수사과에서 세사람이 나왔다. 손반장, 한형사 그리고 1명이다. 그날부터는 화순경찰서에서 파견나온 형사들에게 조사를 받았다. 그들은 우리 세사람을 불러서 아리랑포승―한쪽팔은 어깨뒤로 하고 다른 팔은 등뒤로 해서 묶음―을 해놓고 심문을 시작했다.‘왜 데모에 참가했으며 누가 시켰느냐’고 다그쳤다. 나는 계속 같은 말만 반복했다.‘참을 수 없는 울분 때문에 자진해서 갔다’고 하자‘아리랑포승’하고 있는 손에다 방망이를 넣고 돌리면서 계속 심문했다. 그러기를 수차례 반복하여 까무라치기 직전에 유치장으로 돌려보냈다.

다음날 다시 조그만 사무실로 불려갔다. 형사 세명이 있었다. 손반장은 화순에서부터 안면이 있던 사람이다. 손반장이 담배를 권해서 피웠다. 한형사가 밖으로 나가더니 5되짜리 주전자에 물을 담아왔다. 담배를 다 피우고나자 의자에 앉히더니 손과 발을 의자에 묶었다. 한사람이 머리채를 휘어 잡고 고개를 뒤로 잡아 젖혔다. 한형사가 강제로 입을 벌리게 하고 물을 부었다. 물이 입과 코로 들어가 숨도 못 쉬고 죽을 지경에 이르면 잠시 중단하고 또다시 전날과 반복된 질문을 지속적으로 했다. 내 대답은 맨처음 조사를 받았을 때나 그때나 일관했다. 상무대에 도착해서 처음 조사받을 때 했던 대답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날의 대답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같은 방법으로 또 물을 먹였다. 그것이 말로만 듣던 물고문이었다.

주전자의 물을 거의 다 먹어가도록 별다른 말이 나오지 않자 그들은 다시 협박을 했다.“화순으로 가서 진짜 맛을 볼래 아니면 여기서 끝낼래? 너는 빨갱이니까 어차피 죽는다. 개죽음 당하지 말고 누가 시켰는지 그것만 말하면 살려준다”는 것이다.“시킨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디서 조사하든지 알아서 해라”고 했다. 어찌된 영문인지 그들은 물고문을 더 이상 하지 않고 점심을 먹었냐고 물었다. 오전에 불려가서 그때가 점심식사 시간이 훨씬 지났으니까 그들도 밥을 먹지 않은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 물어봤다. 아무말도 하지 않았더니 형사 2명이 나가더니 한참 후에 빵 하나와 물을 가져왔다. 그때서야 팔과 다리를 풀어 주었다. 빵을 먹고 다시 유치장으로 돌아왔다. 그후로도 유치장에서의 생활은 거의 반복되었다. 하루 3∼4차례의 조사와 구타, 기합의 연속이었다.

야만적인 고문이 계속됐다

6월 30일 웬일인지 오전내내 부르지 않으니까 오히려 불안하고 조사 받으러 간 동지들이 고통에 못이겨 소리소리 지르는 비명이 직접 맞을 때보다 더 고통스러운 고문이었다. 점심을 먹고 조금 지난후 강남원, 김용호, 나를 불렀다. 우리가 나가자 그들은 화순에 사는 나와 내친구들을 차에 태워 화순경찰서로 갔다. 수사과로 우리를 끌고가더니 무릎을 끓어앉혀 놓고 무작위로 구타하기 시작했다. 구타하면서도 계속 같은 질문을 되풀이 했고 나도 같은 답변을 되풀이 했다. 그날부터 화순경찰서 유치장에서 생활하게 됐다. 유치장에는 이미 100여명의 동지들이 잡혀 와 있었다. 그때 당시 화순에 살고 있던 사람들로서 5ㆍ18과 관계돼 붙잡혀 온 분들이다. 그 가운데는 평소 알고 지내던 선배들의 모습도 눈에 띠었다.

거기에서는 하루종일 무릎을 꿇은 상태로 지내야 했고 화장실도 하루에 한번밖에 갈 수 없었다. 식사도 매끼마다 한숟가락도 되지 않는 보리밥에 김치 한가지였다.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기는 어디서나 마찬가지였다. 식사시간 끝나기가 바쁘게 배는 고프지 허기지다 보니 기력도 없고 날마다 서너차례씩 끌려가서 두들겨맞고 고문 당하다 보니 몸인들 어디 한 군데나 성한 곳이 있었겠나 이렇게 생활하는 것이 힘들면 힘들수록 어머님이 보고 싶었다. 5월 27일 붙잡혀온 이후로 한번도 집에다 연락한 적이 없기 때문에 어머님 생각하다 보면 더욱 걱정이 심해졌다.

7월 1일 강남원, 김용호, 나를 수사과로 불렀다. 우리 세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그들은 강남원을 때리면서 누가 주동했는지 사실대로 말하라고 했다.“내풍이가 주동했지?”라고 다그치자 강남원은 “아니다. 우리는 각자 자기의 뜻에 따라 데모했다”면서 단호하게 대답하자 앞에서는 계속 심문을 하고 뒤에서는 눈뜨고는 못 볼 구타를 했다. 화가 나서 내가 반항하려고 하자 손반장이 나를 따로 불러갔다. “밥 먹었냐?”첫마디가 이것이었다.“워낙 많이 주기 때문에 먹었는지 안먹었는지 모르겠다”면서 비꼬아서 말하자 손반장은 국밥을 한 그릇 주문해줬다.“난 안 먹을테니 내 친구나 갖다주시요.”하면서 거절하니까 친구들까지 밥을 시켜줘서 먹었다. 손반장이 비교적 온화한 것 같아“엄마 면회 좀 시켜주시요”라고 요청하자‘보안대에서 면회승락이 떨여져야 할 수 있다’면서 안된다고 했다. 우리집에 가서 속옷 좀 가져다 주라고 부탁해도 안된다고만 하고 다른 말은 없었다.

그날 이후로는 다시 수사과로 부르는 일은 없어졌다. 아마 우리들을 아무리 다그쳐봐야 더 이상 나을 것이 없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5월 27일 새벽에 상무대 헌병대로 끌려 온 뒤로부터 7월 1일 이후부터 비교적 편한 생활을 했다.화순경찰서에서 오동찬 동지가 방귀를 뀌었다고 오동찬 동지는 개인적으로 거의 한시간 동안 폭행을 당하고 우리들은 단체로 원산폭격을 한시간 이상했다. 이렇듯 조금만 움직여도 단체기합, 본인은 구타를 당하는 생활을 한달 동안이나 계속했다.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화순경찰서로 옮겨진지 얼마후에 우리들은 각방으로 연락해서 3일동안‘단식투쟁’하기를 합의하고 시작했다. 아마 하루반밖에 못하고 끝났을 것이다. 우리의 요구조건은“면회를 실시하라”“죄없는 우리를 석방하라”등이었다. 노래도 부르고 구호는 주로“전두환을 몰아내자”였다. 7월 30일 아침에 화순경찰서에 수감돼 있던 사람 전원이 상무대로 다시 이송됐다. 친구들과 나, 이렇게 세사람은 짚차에 태워서 데려가고 나머지 사람들은 전경들이 타고 다니던 닭장차에 태워서 옮겼다. 날짜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데 재판은 9월 8일경 토요일―요일은 정확함―에 처음으로 받았다. 내 죄명은‘내란실행’‘총포터치’및‘계엄법위반’이었다. 1심에서는 구형 7년에 실형 4년을 선고 받았다.

폭도는 과연 누구인가?

9월 27일경에 상무대에서 1심재판을 받았던 전원이 교도소로 이감되었다. 교도소로 이감될 때까지도 집에다가 이렇다 할 연락 한 번 안해줬다. 교도소에 도착해서 죄수복으로 갈아 입고 밥그릇 3개와 플라스틱 수저를 배당받고 감방으로 갔다. 나와 같은 방에는 명노근 교수님, 김상집 씨 그리고 학생들이 여러 명 있었다. 감방에 오자마자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밥그릇으로 문짝과 벽을 두들기며 데모를 했다.“전두환을 처단하라, 김대중을 석방하라, 면회를 실시하라”등의 구호를 외쳤다.교도소에서 단체행동하고 우리들의 요구조건 중의 하나였던 면회 요청도 수락되니까 상무대나 화순경찰서에서 보다는 훨씬 힘이 났다. 그때 이틀동안 단식을 했었는데 자세한 상황은 잘 모르겠다. 나는 항소해 가지고 구형 7년에 실형 4년, 대법원에서는 구형 7년에 실형 2년을 받고 복역중에 81년 4월 3일 특사로 오후 6시경에 석방됐다.

지금도 공수부대들이 광주에 투입돼 광주시민을 대검으로 찔러 죽이고 군화발로 밟고 다니고 기관총을 난사해서 무고한 시민을 그토록 많이 죽이고 부상당하게 했던 생각을 하면 치가 떨린다. 5월 27일 도청에서‘공공연하게 자행돼 왔던 비인간적인 만행을 어떻게 견뎌내고 이렇게 살아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면 한편으로는 살아있음이 다행이다 싶기도 하고 또 때로는 어이없기도 하다. 5ㆍ18을 경험한 후부터는 학생들이 데모하는 것을 보면 내 속이 다 후련하고 정부에서 정치를 올바로 못하니까 많이 아는 학생들이 참지 못하고 일어난 것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5ㆍ18을 겪고나서부터 정부를 믿을 수가 없다. 내가 직접 피해를 당했기 때문에 강하게 그런 감정이 남아있다. 지금도 어느곳에서나 누구한테든지 5ㆍ18광주민중항쟁 당시 시민군으로서 참가한 부분을 떳떳하게 말한다. 타지방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광주나 전남지방 사람들은 똑똑히 봤으니까 알 것이다.‘국민을 지켜야 할 군인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죄없는 시민을 무참히 죽였을까

그광경을 목격하고 광주를 지키고 광주시민을 살리기 위해 그들과 맞서 총을 들고 싸운 사람들을 과연 폭도라고 할 수 있겠는가’하는 생각이 들면 광주시민을 폭도로 몰아붙인 살인마 전두환, 노태우를 찍어 죽여도 억울함이 안 풀릴 것이다. 5ㆍ18에 대한 진상규명은 개인적인 보상이나 문제 해결보다는 살인마 전두환과 노태우를 처단하고 또 이들의 정중한 사과를 받아내야 한다. 광주민중항쟁이 역사에 올바로 기록될 수 있도록 해야 하고 광주시민의 정신이 후세에도 전해질 수 있도록 꼭 힘써야 한다. 그리고 물질적인 보상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언제라도 불의에 맞서 싸울 것

화순경찰서에서 경찰들이 때릴 때 한쪽귀를 맞아서 고막이 터졌는데 치료를 하지 못해 그쪽 귀가 지금도 전혀 들리지 않는다. 당시 교도소에서 귀 치료를 몇 번 형식적으로 받고 석방 후에 1년간을 치료받으러 다녔는데 낫지 않았다. 의사는 수술을 해야만 치료가 가능하다고 하지만 수술비가 너무 많아 꿈도 못꾼다. 의료보헙카드도 발급 받지 못해 수술은 엄두도 못낸다. 귀뿐만 아니라 어깨, 허리가 결리고 아파서 무거운 것을 들면 통증이 훨씬 심해져 고생하고 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또 다시 5ㆍ18과 같은 사건이 일어난다면 나는 몸을 바쳐서 싸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총을 쏘면 절대 놓치지 말고 나도 그들을 죽여버릴 것이다.

작년 6ㆍ10대회 때는 직장에서 일하다가도 광주 와서 시민들과 함께 데모했다. 6월 19일날인가, 저녁에 일 끝나고 광주로 나왔다. 그랜드호텔 앞에서 데모를 하다가 학생과 노동자들이 사직공원 입구에 있는 KBS 방송국을 불태워 버리기로 작정하고 화염병 40여개를 숨겨들고 공원다리 부근까지 갔다가 부근에서 기다리고 있던 전경이 최루탄을 쏘며 저지하자 흩어져 버렸다. 지금도 오항동에서 모임있다는 연락이 오면 꼭 참석한다. 길을 가다가도 학생들이 데모하고 있으면 꼭 행동을 같이 한다. 건강이 조금회복되자 화순터미널 매표소에서 차표파는 일을 1년정도 했다. 1982년 6월 18일날 화순에 있는 미광식품에 입사했다. 빵 만드는 공장인데 나는 빵을 만들기도 하고 포장기계를 맡아 보니까 비교적 하는 일은 쉽다. 종업원은 총 60명 정도이다. 2교대를 하는데 오후반은 만들어야 할 물건이 남아 있으면 그작업이 끝날때까지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퇴근시간이 일정하지 않다. 대신 숙식은 직장에서 해결된다. 82년부터 내내 평직원으로 있다가 87년 7월에 주임으로 승진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