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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광주ㆍ전남‘의식권’탄생주역 윤한봉.김성(월간예향, 1988. 11)

본문

광주·전남 ‘의식권’탄생주역

‘윤한봉’망명 6년…최초 인터뷰

망월동 흙파다 제단차려 놓고 “나는 진정한 통일주의자다”

金 星 <광주일보사회부기자>

1980년 5월 전국은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학생들과 각계의 움직임으로 열기에 휩싸였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은 군부의 태도 때문에 일말의 불안감이 함께 감돌고 있었다. 5월 17일. 군부는 드디어 ‘김대중(金大中)내란음모사건’을 발표하며 계엄령을 확대했다. 이 사건으로 전국에 수배된 인물중에는 윤한봉(당시 33세·全南大 축산학과 4년)이라는 이름도 끼어 있었다. 윤씨는 光州·全南의 민주화운동사(史)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1974년 4월 대학생들이 민청학련을 결성, 전국적인 봉기를 획책하고 있다는 이유로 당시 박정희대통령이 취한 긴급조치 4호 위반으로 붙잡혀 15년형을 받았다가 이듬해 형집행정지로 풀려 났었다. 이후 그는 다른 사람들이 숨죽이고 있을 때 기층민중(基層民衆)을 깨우쳐 진정한 민주화를 이룩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야학(夜學)과 근로자실태조사 등 노동운동에 접근하는 등 전남지역 의식권을 실질적으로 탄생시키는 산파역할을 해왔다. 76년 다시 긴급조치위반혐의로 2년형을 받았으나 출옥 후 그의 의지는 꺾이지 않고 광주에서 각종 민주단체를 조직하는데 깊이 간여했었다. 이러한 경력을 가졌던 윤씨였기에 수배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5·18이후 행적몰라…피살설까지

허나 그는 ‘광주민중항쟁’이 시작된 5월 18일 다음날인 19일부터 종적을 감춘 뒤 최근까지 소식이 끊겨왔다. 5·18직후 한때는 그가 피살됐다는 소문이 나돌아 무연고 사체를 조사하기도 했지만 윤씨라고 확인할만한 사람은 없었다. 그를 아는 친지들은 그의 행방을 궁금해했고 경찰 등 관계기관쪽에서도 그에 대한 추적을 계속했으나 좀체로 단서를 잡지 못했다. 그러나 꽁꽁 감춰졌던 그에 대한 소식도 8년의 세월이 흘러 민주화를 향한 가냘픈 햇살이 어렴풋이 비추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하고 있다. 더구나 평민당이 국회5·18특위에 내놓은 증인중 한사람으로 윤씨를 포함시킴으로써 그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은 시간문제로 남게 됐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윤씨는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보내고 있다. 그가 살고 있는 곳은 30만교민이 거주하고 있는 로스앤젤레스. 그것도 그냥 일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민족학교’라는 문화운동을 이끄는 한편 전세계의 진보세력과 긴밀한 교류를 가지며 새로운 운동을 확산시킬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지난 6월 20일 미국 서부의 중심지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한 기자가 그를 찾았을대 윤씨는 중부지역으로 강연을 나갔다가 되돌아오는 길이었다. 해질녘이 돼서야 그가 보내준 승용차를 타고 22번가 북구역 1401번지에 도착했다. 겉으로는 벽돌조의 평범함 2층짜리 주택이었으나 ‘민족학교’와 ‘KOREAN RESOURCE CENTER’라고 굵직한 글자로 쓰인 간판이 있어 인상적이었다.

텁수룩한 옷차림도 고무신도, 8년전 그대로

윤씨를 만나는 순간, 그가 8년전에 비해 하나도 변한게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중에 나오겠지만 6년여를 미국에서 생활해 왔고 이제는 40대에 접어든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텁수룩한 옷차림, 깡마른 얼굴, 고무신을 즐겨 신던 과거의 모습 그대로였다. “미국생활중 고국 기자는 처음 만났다”는 윤씨는 먼저 광주에 있는 많은 사람들의 안부부터 물어왔다. 그리고 인터뷰 요청에 대해서는 “그냥 이야기나 하자”며 이를 거절했다. 그의 이같은 태도는 국내정세가 아직도 미덥지 않은데다 언론매체들이 아직도 진실을 이야기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깊게 간직하고 있기 때문인 듯 했다.

그러나 몇시간동안 이야기를 주고 받는 사이 미국에 입국하기까지의 그간의 경위를 파악할 수 있었고 그가 앞으로 계획하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고 대충들을 수 있었다. 먼저 그가 전력을 쏟아 운영하고 있는 ‘민족학교’의 성격에 대해 물었다.“우리 민족을 위한 일종의 문화셈터역할을 하는 곳이죠. 민족학교는 역사가 깊어요. 일제의 침략으로 조국을 빼앗겼을 때 국외로 쫓겨나간 우리 선배들이 조국광복의 큰 뜻을 품고 청소년들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우기 위해 곳곳에 운영했던 교육·훈련기간이 민족학교의 시초입니다. 이러한 활동을 일컬어 ‘민족학교운동’이라고 하는데 1970년 고 장준하(張俊河)선생님과 백기완·김지하씨 등이 조국의 민주화·자주화를 목표로 문을 다시 열었죠. 우리는 이를 계승해 미주의 90만 동포에게 조국의 민주화와 통일에 이바지하고 소수 민족의 일원으로서 긍지를 가지고 떳떳이 살아나갈수 있는 민족의삭과 문화를 심는다는 목적으로 설립했습니다.”

83년 2월 비영리단체로 등록하고 주정부와 연방정부로부터 면세허가도 받았다는 이 학교에서는 특히 동포청년 학생을 대상으로 조국의 역사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사상 등에 대해 공동학습하고 토론을 하고 있다고 했다. ―운영은 어떻게 합니까?”“이사회나 기부금을 통해서 아니면 회원들의 도서·자료·판화 등을 판매해서 충당하고있어요. 또 폐품수집을 하거나 복사·타자일을 해줘서 벌어들이기도 하죠.”―호응은 좋습니까?”“최근 들어서는 우리 것을 알자는 움직임이 젊은 층을 중심으로 알고 있어 호응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특히 미국서 생활해 온 교포들은 통일에 대한 관심이 높아 현대사의 재해석, 분단문제 등에 대해서도 자주 토론을 벌이고 있죠.”말머리를 미국으로 입국하게 된 경위쪽으로 돌려 보았다.

6년만에 받아들여진 망명신청

―미국에는 언제 도착하셨습니까?”“아마 81년 6월 3일이었을 겁니다. 미국 서북해안에 있는 시애틀 북쪽 조그만 항구에 도착해 곧 바로 이민국에 정치적 망명신청을 냈지요. 하지만 미국법원은 이를 계류시킨 채 결정을 내려주지 않다가 6년이 지난 87년 4월 17일에야 허용을 했어요. 81년에는 한미 관계가 밀착돼 국제문제화되기를 꺼리는 미국측 입장 때문에 계속 망명을 허용치 않다가 87년 4·13조치 등이 터지자 한국에 대한 일종의 압력수단으로 저를 풀어준 것 같아요.”윤씨는 “화물선으로 밀항해 미국에 망명신청한 사람은 대한민국 건국이후 자신이 처음일 것”이라며 태평양을 넘어오면서 당했던 고초를 설명했다.

그러나 항해경로, 국내에서 그를 도와줬던 사람들에 대해서는 밝히기를 마다했다. 하지만 이 부분은 지난 82년 겨울 ‘오송회’사건이라는 국가보안법위반사건이 터지면서 모두 드러났고 윤씨의 밀항을 주선한 윤씨의 후배 정용화씨(35)의 증언도 있었기 때문에 망명경로를 재구성해보기로 한다. 이에 앞서 윤씨가 미국으로 망명하기 전까지 국내에서 활동을 먼저 살펴보기로 하자. 윤씨의 고향은 전남 강진군 칠량면 동백리(全南 康津郡 七良面 東栢里). 48년 12월 22일 태어났다. 광주일고(11회)를 나와 전남대 축산학과에 입학, 2학년을 마친 뒤 군에 입대했다가 73년 복학했다.

70년대 초반 한국사회는 매우 불안정했다. 3선개헌반대 등을 이슈로 사회참여를 해왔던 대학생들은 ‘유신’으로 일시적으로나마 방향을 잃는 듯 했다. 하지만 대학생 사이에는 통일에 대한 좌절, 독재정권의 탄압 등이 계속되자 다시 불만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진통 끝에 대학생들은 70년대 초반 운동의 목표를 민주화로 설정하기에 이르렀다. 이같이 방향이 한 곳으로 모아지는 시기인 1974년 4월 3일 박유신정권은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사건’을 발표, 조직화하려는 대학생들의 움직임을 초기에 꺾어버리려 시도했다. 이 사건은 전국의 대학생 대표자들이 약칭 민청학련이라는 ‘불순단체’를 조직. 전국적으로 봉기할 음모를 꾸몄다는게 그 전모다.

발표문에 따르면 윤씨는 전남·북지역의 총책임자로 김상윤씨 등 전남대·조선대생 11명과 함께 시위를 계획했다는 것이다. 정부는 검거되지 않은 대학생들에 대해서는 4월 8일까지 당국에 자수하도록 경고했다. 그러나 윤씨등 전대생들은 자수하지 않고 9일 새벽 캠퍼스에서 학우들에게 보내는 유인물을 뿌리다 끝내 붙잡혔다. 긴급조치 4호 위반으로 기소된 윤씨는 1심에 무기징역. 2심에 15년을 구형받았으나 이듬해 2월 형집행정지로 풀려나게 됐다. 윤씨는 사실 복학전만해도 이 같은 활동과는 거리가 먼 순수한 농학도였다. 그는 학업에 열중해 그의 성적표는 항상 A·B로 채워졌었다. 하지만 날로 강화되는 독재정치는 피끓는 청년학도를 책상에 앉아 있게만 할 수는 없었다. 긴급조치 4호로 구속된 11명의 전남대생은 모두 윤씨와 같은 독서회 멤버였다. 윤씨는 이 모임에 뒤늦게 참여했지만 민주화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갖게 된데다 연장자였기 때문에 리더로 활동할 수 있었다. 출옥한 윤씨는 독서모임을 계속 조직하던 중 77년 부활절사건으로 다시 수감돼 다시 옥살이를 해야만 했다. 하지만 78년 감옥을 나온 그는 공개적으로 민주청년협의회를 구성하는 한편 문화운동도 전개했다. 79년 10월 다시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위반으로 구속됐다. 12월 구속집행정지로 풀려남으로써 윤씨는 세 번째 옥살이를 마치게 됐다.

‘잡히면 운동권 와해’… 밀항 결심

박대통령이 살해당한 뒤 80년 초 전국적으로 일어난 민주화열풍은 윤씨에게 커다란 희망이었다. 그는 비록 전면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민주화운동을 주도한 대학가와는 끊을 수 없는 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이 해 5월 계엄령확대조치로 그의 꿈은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밀어닥친 검거선풍으로 그는 가까운 후배에게까지도 연락을 끊은 채 깊숙이 잠적하고 말았다. 그가 종적을 감추면 감출수록 당국의 시각에서 볼 때 모든 불순한 움직임은 그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조작됐다. 광주민중항쟁이후 조심스럽게 조직의 연결을 꾀하고 있던 운동권은 이것이 큰 부담이었다. 5·18이후 한때 구속됐었던 운동권 출신의 정용화씨(35·현 전남 사회문제연구소 소장)역시 윤씨가 붙잡힐 경우 조직이 다시 한번 와해되는 피해를 입게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를 위해서는 윤씨가 영원히 잠적하든지 아니면 당국의 추적이 미치지 않은 곳으로 옮기는 방법밖에 없다고 분석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자신도 윤씨와 연락이 닿지 않았다. 81년 1월 정씨에겐 그렇게 기다리던 윤씨로부터 연락이 왔다. ‘성묘를 가는 것처럼 위장하여 서울로 올라 오라’는 거였다.정씨는 윤씨를 만나자마자 운동권의 사정과 함께 대책을 설명했다. 윤씨의 입장에서도 벌써 열다섯차례이상 은신처를 옮겨온데다 아무런 활동을 할 수 없는 형편이어서 현재의 상태를 깨기 위해서는 해외망명도 한 전기(轉機)를 가져다 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007작전을 방불케하는 윤씨의 ‘밀항작전’은 이렇게해서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더구나 앞으로 나오겠지만 그를 망명시키는데는 많은 사람들이 나서 도움을 주게 됐다.

‘馬山에서 외항선 탄다’… 긴박했던 밀항작전

그렇다고 정씨에게 뾰족한 수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항구도시를 돌아다니며 알아보니 은밀히 ‘돼지몰이’라는 이름으로 밀항을 알선하는 경우가 없지 않았으나 3백∼5백만원의 엄청난 비용이 필요했고 그나마 낌새가 좋지 않으며 물에 빠뜨려버리거나 “여기가 일본”이라고 속이고 우리나라 해안선에 슬쩍 내려주고 가버린다는 이야기까지 들려왔다. 그러나 기회는 의외로 빨리 찾아왔다. 정씨의 선배이면서 경남 거창 YMCA총무로 있는 정찬용씨에게서 전갈이 온 것이다. “외항선 사관으로 있는 내 동생이 이번에 미국에 간다는데 만나보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외항선 사관 정씨와 최씨는 윤씨에 대해 과거를 잘 알고 있다며 “가능하다면 돕겠다”고 나섰다. 그들의 계획은 출입이 비교적 용이한 마산에 배가 하룻밤 묵을 때 윤씨를 태우자는 것이었다. 4월 28일 광주에서 정·최씨를 만난 정영화씨는 승선기회가 29일 밤밖에 없다는 걸 알았다. 너무나 긴박했다. 시간은 이제 단 하루밖에 남지 않았다. 정씨는 윤씨가 아무것도 모르는게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했다. 윤씨가 이 불안한 여행을 일찍 알았다며 상당한 부담을 가졌을게 분명했기 때문. 정씨는 밤차를 타고 서울로 가 29일 새벽 윤씨를 만났다.

“오늘 밤입니다. 형님.”“무어가 오늘 밤이란 말인가?”“미국 망명 말입니다. 모두 잘됐으니 오늘밤 배에 타야합니다.” “아니 아무런 준비도 안됐는데?”“준비는 다 됐고 지금 당장 마산으로 내려가셔서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빨리 옷을 입으세요.”윤씨는 한동안 당황해 했다. 5분정도 침묵기도를 한 뒤 그는 일어섰다. 평소의 그답지 않게 안경을 쓰고 늘씬한 양복으로 갈아입었다. 윤씨는 하숙비를 모두 치른 뒤 그의 은신처를 안내해 왔던 여대생 김보경양(가명)과 함께 팔짱을 끼고 집을 나섰다. 신혼부부사이로 위장하기 위해서였다.

29일 오후 6시.

4만톤이 넘는 거대한 외항선이 빤히 내다보이는 마산의 여관에 6명의 낯선 사람들이 빙 둘러 앉았다. 정찬용·윤한봉 그리고 두 사관과 김보경양, 여기에 대양을 횡단중 선원들에게 들킬 것에 대비해 필요한 자금을 광주에서 모아서 막 도착한 정용화씨가 합석을 했다.이들은 마지막 도상훈련을 실시했다. 정씨는 두 사관을 다른 방으로 따로 불러내 미국 도착시 만나야 할 사람과 암호교환방법, 성공했을 때 보내올 전보의 내용 등을 알려주고 있었다. 윤씨는 경비초소를 통과하기 위해 사관 수준의 새로운 패션 양복으로 갈아입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