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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자료실

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해직시절을 말한다/광주민중항쟁 관련 이광우 교수.최시영(월간예향, 1988. 8)

본문

「해직시절」을 말한다

광주민중항쟁관련 李光宇 교수

교수노릇 못해도 애비노릇은 해야지

앞치마 두르고 튀김 튀기며 삭인 울분

崔時永 <광주일보 특집부기자>

“후덥덥하던 장마철, 마침 부슬비가 내리던 초저녁이었어요. 저녁상을 막 물리고 앉아 있는데 우악스럽게 생긴 사내 둘이 느닷없이 들이닥칩디다.”1980년 7월 10일 밤. 전남대 정치외교학과 이광우(56·李光宇)교수는 이렇게 체포되었다. 그에게는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길고도 험난한, ‘악몽의 49개월’의 첫날은 이렇게 시작됐다. 5·18직후부터 교수들이 하나 둘씩 끌려감에 따라 극도의 공포감에 떨며 지내던 그 질식할 것 같은 8년전의 여름을,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그는 생생하게 더듬어냈다.“끌려 가면서 내 머릿속에 뱅뱅 돌던 생각은 딱 한가지였어요. ‘아, 이제 죽는구나. 살아 나오기란 도저히 불가능하겠구나’하는……. 가정과 학교생각은 그만두더라도 내가 왜 잡혀 가는지, 무슨 죄가 있는지에 대해서도 아무런 생각도, 짚이는 것도 없었어요. 오직 죽는다는 공포뿐이었어요.”끌려가서 ‘지하실’에 혼자 남겨져 있던 시간이 왜 그렇게 길고 무서웠는지, 지금도 소름이 돋는다고 진저리를 친다.

“옆방에서 들리는 구타소리와 이어 터지는 외마디소리……. 말 그대로 아비규환입디다. 나는 차츰 마음을 추스려 잡았지요. ‘이젠 어차피 죽는다. 죽음을 어떻게 맞을 것이냐. 죽기는 죽는데 교수답게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잠시 후 나를 데려 갔던 친구가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몽둥이를 들고 들어오면서 ‘이교수님, 좀 문질러 드릴까요?’해요”순간 이교수는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뒤이어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 있었다.“왜 망해?”사내가 몽둥이를 구석에 던지고 껄걸 웃으며 물었다. 이교수는 여기서부터 ‘대화’라는 것이 시작되었다고 하면서 멋적게 웃었다.“이렇게 독재정권을 유지하려면 질서유지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 그걸 감당하지 못해서 나라가 망해.”그는 말을 못 알아듣는 사내에게 미국정치학자 가브리엘 아몬드의 ‘일로 상승해 가는 질서유지비용’(The rising of maintaining order)에 대해 설명을 했다.“정권의 정통성을 상실했기 때문에 학생과 국민들이 데모하고 반대하는 것 아닌가. 이를 진압하려면 전투경찰을 계속 뽑아야 하고 최루탄을 수없이 만들어야한다. 또 중고등학교 선생들한테까지 학생지도비니 정보비니 해서 돈을 주고 있다. 이 어마어마한 유지비를 누가 내는가. 국민들이 세금으로 바치고 있다. 이 질서유지비는 계속 상승해 갈 터인데 그것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外紙 복사죄’·‘美帝 호칭죄’…

조사가 진행되면서, 본인도 몰랐던 자신의 죄목(?)이 몇가지로 요약되었다. 전남대 전체 학과장회의에서의 발언, 인문사회대 교수단 성명서 작성, 뉴스위크와 타임지에 실렸던 10·26 관련기사의 복사, 그리고 강의시간에 미국을 ‘제국주의’라고 했다는 내용 등이었다. 학과장 회의 발언이란 교수생활 15년만에 이교수가 처음 보직을 맡았던 80년 봄의 얘기다. 10·26 직후 그는 정치외교학과 학과장직을 맡았다. 80년 ‘서울의 봄’을 맞아 캠퍼스가 연일 술렁이는 가운데 전남대 전체 학과장 회의가 열렸다. 학생지도 방안을 논의하기 위한 자리였다. 총장이 학생지도를 위한 방안들을 얘기하도록 각 학과장들에게 요청했으나 어느 누구도 쉽게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총장은 이광우교수를 지목하여 의견을 말하도록 했다. 하는 수 없이 이교수가 발언에 나섰다.“지금까지 문교부에서 학생지도지침이라는 것을 내려 보냈는데 우리 교수들은 사실 이에 맹종만 했습니다. 학생들만 나쁘다고 봐 왔던 것입니다.

이제 이 고정관념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습니다. 교수들은 문교부의 학생지도지침이 과연 옮은 것인가 검토해야 할 시점에 와 있는 것입니다. 학생들에게 정치활동을 하지 말라고 하는데, 이미 그들은 성인이며 그 활동을 막을 수는 없다고 봅니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며 그렇기 때문에 정치적 활동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내용으로 봐서야 원칙적인 얘기에 불과했지만 회의장은 물을 끼얹은 듯 숙연했다. 몇몇 교수들이 이교수의 의견에 찬성하고 나섰고, 이 문제는 더 이상 논의되지 않은 채 학과장 회의는 끝났다. 이 회의에서 했던 이 발언이 문제발언으로 찍혀 ‘죄목’의 하나가 됐던 것이다. 사실 이광우교수는 유신정권 전까지는 강의와 연구에만 몰두했을 뿐 현실정치나 사회와 접촉할 기회가 별로 없었다고 스스로 얘기하고 있다.

평가교수때 현실문제에 눈떠

“유신 말기인 1979년, 전남 지역개발 평가교수로 지명되었어요. 광주시정 자문위원으로도 위촉되었지요. 도정이나 시정에 대한 브리핑을 받고 실제 조사를 해보니까 말 그대로 엉망진창입디다. 개발의 방향이나 방식이 근본적으로 틀려있음을 알게 되었지요. 이때부터 현실행정과 현실정치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현실비판쪽으로 눈을 돌리게 된 것이 이 무렵부터인 셈이지요.”또 하나, 교육자로서 그가 현실정치에 더욱 염증을 느꼈던 것은 유신말기의 소위 학생지도 문제였다.“문제학생이라고 당국에서 지목한 학생들의 집을 교수로 하여금 방문하여 그 가족들을 만나게 하는 일이었는데 관료적 권위주의 체제의 발악이었지요. ‘이 체제가 오래갈 수 없겠구나’하고 느끼던 터에 10·26이 터졌어요. 닥칠 것이 닥쳤던 셈이죠.”이 10·26이 또 이교수의 죄목하나와 관련되었다. 미국 문화원에서 복사했던 뉴스위크와 타임지의 10·26 관련기사 문제가 그것이다.당시는 국내에 들어오는 외국신문이나 잡지의 기사내용 가운데 한국관계 기사가 거의 가위질되어 배달되는 상태였다. 그래서 이 교수는 ‘국내에 알려지지 않은 국내사정’을 접하기 위해 미국 문화원을 찾았던 것. 그곳에 가면 외교행낭을 통해 들어온 ‘가위질 안 된’신문잡지를 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기사들을 복사하여 학교로 가져간 돌려본 것이 문제였다. 외지(外紙)복사죄라고나 할까?“누가 복사를 해 주었느냐고 계속 추궁을 해요. 결국 제가 박모씨의 이름을 대고 말았어요. 지금도 후회하고 있는 일입니다만….”전남대 영문과 출신인 박모씨는 당시 광주미문화원에서 통역으로 근무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교수는 그 박씨가 자기 때문에 몸을 피신해 다니다 문화원측의 주선으로 본의 아니게 미국에 가 살게 되었다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이 교수는 ‘강의시간에 미국을 제국주의라고 했다’는 그의 또 다른 죄목에 대해서 어이없는 표정으로 지어 보였다.“미국이 제국주의라는 주장은 미국학자들도 이미 하고 있잖아요? 1898년 이후의 미국역사는 제국주의의 역사라고 자기나라 학자들이 공공연하게 그것도 오래전부터 주장하는 판에 그 말 좀 했다고 나더러 빨갱이 아니냐는 거예요. 참 한심한 노릇입디다.”같은 질문에 똑같은 대답이 이어지는 조사가 이틀 밤낮 계속되었다. “나중에는 맥이 풀려 버리더군요. 그래서 ‘당신 마음대로 쓰시오. 내 지장은 찍을테니’하고 포기해 버렸어요. 그리고 다른 천막으로 옮겨졌다가 다음날 또 같은 조사를 받았어요. 먹는 것이야 보리밥과 깍두기뿐이었는데 저는 잡혀간지 3일만에야 대변을 보았습니다. 천막에 함께 있던 한 사람은 얼마나 악에 받쳤던지 보초한테 ‘차라리 나를 꽝 쏴서 죽여버려라!’고 고함을 치더군요.”

‘지옥과 같은 영창’에서 ‘민주강의’

끌려간지 1주일이 지난 뒤 기소자를 분류하기 시작했다. 이 교수는 기소자로 분류되어 헌병대 영창으로 옮겨졌다. 거기서부터는 군복을 갈아 입히고 신발을 벗겨 맨발인 채였다. 그는 영창생활을 ‘지옥’이라고 표현했다.“허기증과 언제 불려갈 지 모르는 불안, 한시도 가만히 두질 않고 이어지는 참을 수 없는 기합….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된장국에 꽁보리 이야 차라리 견딜만 했죠. ‘너희들 하나 죽여봤자 광주사태 통계숫자 하나 바뀐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껄였습니다.”이 교수는 당시 수용자들이 보여줬던 용기와 의연한 자세를 보고 정말 깜짝놀랐다고 얘기한다. 30명 정도나 들어갈 방에 1백여명이 수용되어 더구나 무더운 복더위에 그야말로 실내는 찜통이었으나 밤이면 그 수용자들이 잠을 자지 않고 한 덩어리가 되어 데모할 때 불렀던 노래들을 합창했다. 노래를 부른다고 단체기합을 주었으나 그래도 굽히지 않고 노래를 계속했다.

그리고 교수들은 밤을 이용해 한사람씩 돌아가며 ‘민주화를 위한 강의’를 했다. 수용자들이 앞으로 나가 5·18때의 경험담을 털어놓기도 했다. 가을로 들어서면서 감방안의 분위기가 차가와진 날씨만큼이나 올씨년스럽게 변해 갔다. 재판이 진행되면서 수용자들은 불안과 초조로 하루해가 뜨고 하루해가 저물었던 것이다. “같은 방에 있던 김종배군이 사형선고를 받고는 새 하얗게 질려 돌아와요. 공포를 이기지 못해 잠을 못 자더군요. ‘걱정할 것 없다. 절대로 우리를 죽이지는 못 할테니까. 지금 저들은 정권을 잡기 위한 수단으로 조작극을 꾸미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니 염려마라’고 김군을 달랬습니다. 김군도 나중에는 조금 누그러진더군요.”마침내 이 교수의 차례가 왔다. 1980년 10월 23일 이광우 교수는 보통군법회의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1년의 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는 그 다음날 군부대 안에 있던 교회로 다시 끌려가 각서를 써주고서야 석방되었다.‘부슬비가 내리던 그 밤’으로부터 1백5일 만에야 이 교수는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나야 안에서 몸으로 감당하면 되었으나 잡혀간 사람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소식도 모르고 석달 반을 넋이 나간 채 보냈을 노부모와 처자식의 심정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어요?”

105일만의 귀가…이번엔 ‘解職’

바깥세상에 나온 이 교수는 대부분의 다른 교수들이 그랬듯이 1심에 불복하여 고등군법회의에 즉시 항소했다. 죄를 지은 일이 없으며 판결이 부당하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과정도 순탄하지는 않았다.“별의별 공작을 다 하더군요. ‘항소해 봤자 부질없는 일이다’‘자칫하다간 또 붙들려 갈지도 모른다’는 등 회유와 협박을 끊임없이 하는 거예요. 그러나 기어이 항소했지요.”항소 결과 재심에서는 선고유예 판결을 얻어냈다. 1심에서 유죄를 받았던 전남대 교수들 중 명노근·송기숙 교수만 빼고는 재심에서 대부분 선고유예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이 교수가 재판의 멍에에서 벗어났다고 막 숨을 돌리려는 찰나 그는 다시 뒤통수를 얻어맞는 아찔함을 느꼈다. 교수직에서 내쫓긴 것이다. 1981년 1월 6일의 일이었다. 이제 그에게 서야할 강단은 없었다. 묻혀 있을 연구실도 없었다. 분노를 먼저 터뜨리기에는 너무도 다급한 암담한 현실만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한 마디로 세상이 깜깜하게 보입디다. 월급에만 의존해 살아온 데다 이렇다 할 다른 생활수단은 전혀 없고….”

당시 이 교수는 열한명의 대식구를 거느린 가장이었다. 더구나 노부모는 와병중에 있었다. 밤잠을 못 이루고 몇 날을 고민하다 부인과 머리를 맞대고 살아갈 한 가지 방법을 짜냈다. ‘튀김장사’를 하기로 작정한 것이었다. 살아 있는 입들에 거미줄을 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교수 노릇은 못 하게 쫓겨났지만 애비노릇마저 포기할 수은 없는 일 아닙니까? 애들 학교는 보내야 하고 와병중인 노부모의 약값은 마련해야 했어요.”당시 이 교수가 열한 식구는 광천동의 대지 34평짜리 미니 2층집에서 살고 있었다. 열한명이 살기에는 2층까지 다 써도 좁은 형편이었으나 2층을 전세로 내 주어야 했다. 따로 모아둔 돈이 없었기 때문에 2층 전세금을 받아 튀김가게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2층의 전세보증금으로 운암동 숭일고 아래 세모진 조그만한 가게를 얻어 튀김장사를 시작했다.

“애비 노릇은 해야겠다…”튀김집 차려

새벽 다섯시. 자명종 소리에 몸을 일으킨 이 교수는 ‘새 직장’으로의 출근을 위해 서둘렀다. 목도리로 귀를 감싸고 면장갑을 낀 채 녹이 슬대로 슨 자전거를 타고 쏙쏙거리는 찬공기를 가르며 튀김가게로 향했다. 학교에 갈 아이들의 식사를 위해 부인이 집에서 서두르는 동안, 이 교수는 가게에 나가자 마자 연탄화덕에 불을 피우는 것으로부터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밀가루 반죽을 하고 기름을 끓이고…. 새로 시작한 직장은 대학교수에게는 낯설기만 했다.  새삼스럽게 사람이 산다는 의미가 여러 갈래로 나뉘어 다가왔다. 천덕스럽지 않게, 구차하지 않게 살아야 한다는 울분같은 것이 가슴 저 밑바닥에서 불끈불끈 솟구치는 나날이었다.“경험해 보지 않았던 또 다른 삶의 한 모습이었습니다. 내 힘으로 기어이 살아 남아야 한다는 오기같은 것이 생기더군요. 고객은 주로 부근 학교의 학생들이었으나 나이 든 사람들도 많이 들르더군요. 각양각색의 삶의 군상들을 바라보는 기회가 되기도 했습니다.”한번은 튀김을 먹고 난 한 청년이 돈을 내지 않고 줄행랑을 놓은 일이 있었다. 앞치마를 한 이 교수는 신발마저 벗어던진 채 아스팔트 길을 뛰어 그 청년을 뒤쫓았다.“결국 놓치고 말았지요. 맨발로 터벅터벅 가게로 향하면서 비애를 씹었습니다. 세상엔 이런 사람도 있구나하고.”

튀김장수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대학생들이 가끔 찾아왔다. 또 부근 학교에서 교편을 잡던 제자들이 퇴근후에 자주 들러 주었다. 서울에서 학생들이 일부러 찾를 감시하는 눈은 언제나 떠나질 않았다. 장사도 몇 개월째 접어들던 봄날 오후, 손님들도 뜸 할 때였다. 가게 앞 30m 정도쯤에 검은 짚이 한 대 멈추더니 잠바차림의 건강한 중년사내가 가게를 향해 걸어왔다. 가게 앞에 다가선 사내가 절을 꾸벅하자 이 교수는 그가 누군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전남도 경찰 간부로 있던 제자였다.“들어 오게나.”머뭇거리는 제자를 탁자 앞에 앉히고 손수 튀김을 튀겨 내 놓았다.“같이 들세. 어쩐 일인가?”말을 전혀 하지 않고 있던 그 제자는 튀김을 한두개 집어 먹더니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지갑을 꺼내 1만원권 두장을 식탁위에 내놓았다.“이래서는 안돼, 이 사람아. 너희들에게 신세 안 지려고 내가 이 노릇을 하고 있어.”지폐를 집어 사내에게 건네며 사내를 문 밖으로 떠밀어 냈다. 몇 걸음을 옮기던 그 사내가 다시 돌아오더니 돈을 문안으로 던져놓고 불에 덴 듯 달아나 버렸다.“지금도 그 제자가 왜 왔는지 모릅니다. 내 사는 형편과 동태를 살피는 책임을 맡아서 왔던 것이 아닌가 추측합니다. 그 뒤로 그 제자는 내 앞에 얼굴을 한번도 내민 적이 없어요.”

학비 댈길 없어 장남 휴학시키고

튀김장사는 9개월만에 문을 닫았다. 타의에 의한 문닫음이었다. 전남대의 동료교수들이 해직교수들을 도울 방법을 강구하던 끝에 ‘전남대 30년사(史)’를 편찬하기로 했던 것이다.“사학과의 이홍길 교수가 튀김가게로 찾아왔습니다. 튀김가게를 그만 두고 ‘전남대 30년사’편집을 맡아달라는 거예요. 막상 정이 들었던 가게를 치우려니 서운하데요. 그러나 가게를 그만 두기로 했지요.”튀김장사를 하던 81년, 어려운 살림에 어쩔 수 없어 장남 재영(在永)군을 군에 입대시켰다. 당시 전남대 공대 2년에 재학중이었는데 등록금을 마련할 방법이 막연했기 때문이었다.“자식 교육비도 변변히 못 마련한 애비가 원망스럽기도 했을 겁니다. 대여장학금을 받았었는데 지금도 은행에 진 그 빚을 다 못 갚고 있어요. 이때 동료교수들이 쏟아준 온정에 지금도 감사할 뿐입니다. 월급날 교수들이 1만원씩 거둬 당국에서 눈치 안 채게 밤에 집으로 갖다 주곤 했으니까요.”튀김가게를 그만 둔 81년 9월부터 1년동안 ‘전남대 30년사’편집에 매달렸다. 부인은 보험판매원으로 나가고…. 82년 9월 책이 편찬되고 나자 이 교수는 다시 실업자 신세가 되어 버렸다.

“이 때부터 분노같은 것이 일어나기 시작했어요. 죽더라도 할 일은 하다 죽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가톨릭센터의 시민교양강좌였다. 천주교 정평위에서 마련한 것으로 정부비판강의였다. 첫 강의는 83년 4월에 시작되었다. 강의료는 시간당 3만원이었는데 강좌티킷을 판매한 수익금이었다.“목 내놓고 정부비판을 했지요. 강의실에 정보기관원들도 많이 들어 왔어요. 직접 녹음하고 메모까지 해 가곤 했지요.”목포에 가서 하기로 되어 있던 두 번째 강의 하루전 날, 전남지역의 어느 정보기관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한번 만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약속은 했으나 웬지 불안했다.“혹시 못 들어올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헌 옷을 꺼내 입고 찢어진 운동화를 신었어요. 그리고 자전거를 타고 ‘그곳’으로 향했습니다.”이 교수와 대면한 책임자가 입을 열었다.“이 교수님, 강의를 하는 건 좋습니다만 정부 비판만은 삼가 해 주십시요..”이 말이 떨어지자 마자 ‘감정이 솟구칠대로 솟구친’ 이 교수가 반말로 내질렀다고 한다. “이것 봐. 나는 비판을 하기 위해 내일 강의를 해. 지식인의 사명이 도대체 뮛이야. 비판이야. 무엇 때문에 배웠어. 비판하기 위해 배운것야!”

교수가 잘 못 가르치면 역사가 왜곡돼

이 교수의 흥분한 어조에 그 책임자는 사색이 되어 버렸다. 전혀 예기치 못한 대응이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이 교수가 입을 열었다.“당신 말이지. 대통령 책임이 무거워, 아니면 교수책임이 무거워?”무거운 책임이 둘 사이에 흘렀다. 그리고 이 교수의 얘기가 계속 이어졌다.“이거 봐. 대통령은 어떻게 권력을 잡았든 7년 임기만 끝나면 그만이야. 하지만 대학교수는 한마디를 잘못 가르치면 그 제자가 다시 다음 제자를 잘못 가르치고, 그것이 계속되면 역사를 왜곡하게 돼. 우리는 비판을 한다. 죽어도 비판을 해! 나는 이것이 교수의 사명이라고 믿는다.”더 말할 필요가 없었다. 내미는 봉투를 뿌리치고 일어서 나왔다. 문 밖으로 나올 무렵 재빨리 다시 이 교수의 외투 주머니에 봉투를 밀어 넣었다. 집에 들어서자 벌벌떨며 기다리던 부인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자, 봉투를 뜯어보시요.” 조폐공사에서 막 나온 듯한 1만원권 스무장이 넣어져 있었다. 이 교수나 부인이나 눈이 휘둥그레졌다.“제 돈이 아닐게요. 우선 쌀을 사고 연탄도 좀 들여 놓으시요.”다음 날 이 교수의 강의는 다음의 말로 시작되었다.“여러분, 오늘 이 강의는 23만원짜리 강의요. 20만은 이 지역 정보책임자가 준 돈이요. 내 평생 한시간에 23만원짜리 강의는 오늘이 처음이요.”

충남대 발령거부 하버드 유학

정부비판강의는 꽤 좋은 반응을 얻었고, ‘전국으로 확산하자’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래서 84년, 전국의 해직교수 87명 가운데 30여명이 서울에서 모였다.“37명의 이름으로 ‘해직교수 협의회’를 조직했어요. 이날 우리가 모임을 가졌던 식당은 ‘워키토키 부대’로 완전히 포위를 당했지요.”그 모임뿐만 아니라 서울에 한번씩 올라가면 어떻게 알았는지 쥐도 새도 모르게 언제나 검은 그림자가 따라 붙었다. 이 교수는 해직기간을 ‘비참한 세월’이었다고 표현했다. 당시는 해직교수들을 복직시킨다는 ‘유화책’만 내놓을 뿐 실제로는 복직을 단 한명도 안 시켰다고 한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해직교수 아카데미’. 이것은 ‘연구실과 강단을 뺏겼으니 우리 힘으로 강단을 찾는다’는 슬로건을 걸고 비판강의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려는 모임이었다. 맨 먼저 이 사실을 종교계에 알리고 마산 인천 등지에서 강의가 시작되었다. 대전 대구 서울로 강의가 계속 확산되자 청와대에서 전화가 왔다고 한다. 해직교수 아카데미 공동의장단(변형윤·이효재·안병무 교수)과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이 비밀리에 만났다. 해직교수들은 ‘해직교수들을 원래의 대학으로 무조건 복직시킬 것’을 강력히 촉구했다.

“당시 나보고 충남대로 가라고 합디다. 거절했지요. 심지어는 종친회를 동원하면서까지 회유를 했어요. 해직교수들을 분산시키기 위한 술책이었지요.”이 무렵 이 교수는 심리적 갈등을 많이 겪었다고 털어놓는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외국유학.“복직에 대한 전망은 불투명하고 생활은 말이 아니고…. 가족이고 뭐고 다 포기하고 외국나가 공부나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하버드대학에 직접 신청서를 보냈어요. 시간은 가는데 소식이 안 와요. 안된 모양이라고 판단하고 시애틀에 있는 무스르카밍스대학에 신청서를 또 냈지요. 바로 초청장이 와서 출국준비를 하는데 하버드에서 전화가 왔어요. 무스르카밍스대학쪽에 양해를 구하고 하버드를 선택했습니다.”

1천5백일만에 전남대 복직

여권과 비자발급 과정에서도 말썽이 많았다. 어렵사리 여권을 얻어냈는데 ‘체포된 사실’ 때문에 비자발급에 문제가 붙었던 것. 이 교수는 미대사관의 정치담당 참사관을 직접 찾아가 대면을 했다. “내가 이러이러한 사람이오. 하버드는 가야 하겠으니 당신이 알아서 해보시요..”이틀 뒤 비자가 나왔다. 그런데 다시 문제(?)가 붙었다. 복직이 되어 교수발령이 났던 것이다. 1984년 8월 7일이었다. 칠혹같았던 먹구름이 걷혔던 것이다. 1천5백 일의 길고 긴 악몽의 터널을 빠져 나온 것이었다. 관용여권으로 다시 여권을 바꾸고 그해 9월초 출국했다. 체재비용은 WCC(세계기독교협회)에서 댔다. 한달에 1천불씩 1년간이었다.

그러나 이 돈으로 하숙을 하기란 힘들었다. 하숙비가 한 달에 8백불 수준이었기 때문. 에드워드와 와그너 교수의 소개로 그레고리 헨더슨(Gregory Henderson)의 집에서 묵기로 했다. 헨더슨은 하버드 안에 있는 페어뱅크센터(John King Fairbank Center for East Asia Research)의 연구원으로, 5·16전후 5년정도 주한 미국대사관의 참사관으로도 근무한 적이 있는 한국통이었다. 하숙비는 월 1백30불.“미국에 가서야 해직기간 동안 도움을 줬던 외국인들에게 편지를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통신의 자유도 없는 셈이었으니까요. 해직기간중 일본 동경여대의 스미야 학장을 비롯하여 이름도 모르는 외국교수들이 생활비를 보내 주기도 했었습니다.”이 교수가 하버드에서 연구하기로 되어 있던 문제는 ‘5·18이 역사발전 법칙에 원인을 파헤치는 것’이었다. ‘5·18이 역사발전 법칙에 따라 필연적으로 발생된 것인가’에 대한 연구였다. “일본학계에서 이미 분석이 나와 있기는 하나 내가 보기에는 불충분합니다. 연구를 1년동안에 다 끝내지 못해서 앞으로 다시 한번 들어갈 기회를 가지려 합니다. 귀국할 때는 압수 당할까 봐 연구자료들도 미국에 놓고 왔어요. 뒤에 에드워드 베이커 교수에게 부탁해 그가 가져 왔더군요.”

평의회 부의장 맡아 총장 직선 강행

85년 8월 귀국한 뒤로는 연구와 강의에 전념해오다 올 들어서 학교문제에 깊숙이 뛰어 들었다. 교수평의회 부의장을 맡으면서 총장선거관리위원장으로서 총장선거를 치러낸 것이다.“이제 문교부도 우리의 뜻에 굴복했읍니다만 당초 그들은 교수들에 의한 총학장 직접 선출은 지연이나 학연 등 파벌을 조성할 우려가 있다고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대학의 경우 전혀 그런 현상이 없지 않아요? 대학에 전폭적으로 자율권을 주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실증한 것입니다.”이광우 교수는 지금도 부교수(副敎授)이다. 정교수(正敎授)승진서류를 내라는 요청이 두 번이나 있었으나 거절해 버렸다.“전두환이나 6공화국에서 주는 정교수 임명장은 받지 않겠다는 것이지요.”아직 석사로 머물러 있는 이교수에게 박사학위는 생각하지 않느냐고 묻자 ‘박사를 가르쳐 내는 입장인데 박사학위는 받아 무엇에 쓰느냐’고 일축해 버린다.이 교수는 전남대 내에서 ‘전남대의 6인방’의 한사람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반정부 투쟁에 앞장서 온 송기숙 명노근 이방기 노희관 김동원 그리고 이광우 교수를 묶어 부르는 별명인 셈인데, 이러한 반체제 성향 때문에 이 교수는 복직 후 네 번이나 총장의 경고를 받았다고 한다. ‘입조심하라’는 내용이었다는 것.

시국이나 정치문제의 관측에 있어 분석과 통찰력이 뛰어난다는 세간의 평을 얘기하자 그는 ‘생사람 잡지마라’며 너털웃음부터 터뜨렸다.“세계적인 학자들이 써 놓은 논문이나 책 등을 들여다 보면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틀과 눈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종합하고 내가 진단하는 것을 정리하다 보면 세계속에서 한국의 위상이 떠오르게 마련이겠지요.”이광우 교수의 해직시절은 그만의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 어려운 여정을 불평 한마디 없이 같이 걸어준 부인 김춘화(金春化·41)여사와 5남2녀의 자녀들이 함께 보낸 세월이었다. 자녀가 많은 것은 그가 재혼을 했기 때문이다. 그 자녀들이 아버지의 수난을 함께 하면서 지금은 거의 민주화대열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바로 자신들의 수난이기도 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야기가 운동권으로 미치자 이 나라의 젊은이들이 데모하는데 젊은 에너지를 쏟을 수밖에 없는 현실을 그는 무척 안타깝게 여겼다.“학생들이 데모하는 일에만 쏠려 국제적인 면에서 지식수준이 계속 떨어진다면 정말 큰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이 그들을 가만히 있게 하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한국의 현실적인 정치과제였던, 전체적 권력의 악순환 궤도에서 영광의 탈출을 하게끔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역할을 학생들이 전개해 온 것이 학생운동을 과소평가했었습니다.

그러나 군사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대쪽 쪼개지는 소리를 내쏟던 젊은이들을 보고 그들을 다시 평가하게 되었습니다.”그들은 산 공부를 하는 것이며 그들의 시각은 매우 희망적이고 건전하다고 못 박았다.“그들에게 있어 모든 문제의 출발점은 한국입니다. 모든 이론의 현실적 저변을 한국적 상황에 두고 시작하는 거죠. 이제 우리의 역사도, 술에 물탄듯한 역사도 그 페이지를 한 장 넘겨야 할 때에 이르렀습니다. 현실이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비판을 해야 하는 것이 대학의 존재가치입니다. 그래서 저는 대학을 인류사회의 생장점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이광우 교수는 1967년 강단에 서기 시작하면서부터 ‘자전거 교수’라는 별명을 얻어냈다. 언제나 싼막한 자전거를 나고 캠퍼스를 누볐기 때문이다. 교수생활 20년이 넘은 지금도 희끗희끗한 반백의 이 교수가 자전거에 그 큰 체구를 의지하고 페달을 밟는 모습은 전남대 캠퍼스에서 쉽게 눈에 띈다. 궁핍한 그의 생활이 크게 변한 게 없다는 얘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힘있는 바리톤의 저음으로 스스로 취한 듯한 강의를 하기 위해 오늘도 그는 페달을 밟는다. 그의 부지런한 발놀림을 항상 젊어 있으려는 그의 삶에 대한 뜨거운 열정으로 보여질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