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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광주체험의 소설적 수용양상. 신덕룡(문학과 진실의 아름다움, 새미, 1998. 7)

본문

광주체험의 소설적 수용양상



신덕룡



1 . 머리글

  정부는 올해부터 5.18광주 민주화운동을 법정기념일로 제정하고, 정부 주도로 행사를 치르겠다고 한다. 광주항쟁으로부터 17년이 지나서야 광주항쟁의 의의가 제대로 자리매김되고 있다. 이런 일은 벌써 시작되었어야 했다. 지금까지 광주항쟁의 진정한 의미를 왜곡시켰고, 수많은 희생자와 살아남은 자들에게 불명예와 고통을 주었던 과거를 생각할 때 아쉬움은 더 크게 남는다 뒤늦게나마 당연한 사실을 기쁘게 생각한다는 것은 아마도 우리 현대사에서 질곡의 터널이 그만큼 길고 깊었던 까닭이리라.
  광주항쟁의 비극성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것은 장용학의 {요한시집}에 나타난 인간의 잔혹성이요, 많은 사람들의 관심속에 상영되었던 「쉰들러 리스트」에서 유태인 학살 장면이다. 소설과 영화에서 느꼈던 공통점은 인간의 잔인한 속성과 행위가 주는 충격이었고 인간성에 대한 회의였다. 물론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배경으로 나타나 있기는 하다. 그러나 "전쟁은 인간의 가장 나쁜 면을 보이게 한다"는 영화 속의 대사도 '인간의 인간에 대한' 학대와 대량살상을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소설에서건 영화 속에서건 그 끔찍한 학살의 현장을 보면서 필자의 머리에 계속해서 맴돌고 있었던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인간을 저렇듯 악독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이성과 양심이 마비된 집단적인 히스테리의 하나였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념의 이름으로 또는 이민족에 대한 증오로 사람을 벌레처럼 죽일 수 있었으리라 그렇다면 80년 광주에서 저질러진, 전쟁도 아닌 상태에서의 동족살해는? 십수년이 지난 오늘 학살의 주모자와 그 하수인들은 어떠한 삶을 살고 있을까? 권력을 탐하는 짐승들의 광란이었고 거기에 놀아났다면 그들은 인간 이하 짐승의 상태였을 것이고, 다시 인간으로 돌아오기 위해 어떻게 살고 있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또 하나는 이민족 사이에 저질러진 범죄의 기록은 환하게 드러나고 있는 데, 불과 17여 년 전에 일어난 광주항쟁의 진실은 왜 밝혀지지 않는 것인가에 대한 안타까움이었다. 우리의 민족적 역량의 부족함인가, 아니면 너무 끔찍한 형제 살해의 기억이라 애써 잊으려 하는가? 이해할 수 없는 권력자의 광란이고 용서할 수 없는 친족살해의 범죄라면 시간이 가기 전에 좀더 철저하게 밝혀져야 하고, 고해성사를 바탕으로 새로운 삶을 예비해야 할 것이리라.
  이런 점에서 이 글은 광주항쟁의 의의를 다시금 기억하자는 의미에서 쓰여진다. 광주체험의 소설적 수용양상을 밝히는 것이니 진실 규명의 작업은 물론 아니다. 80년 이후 우리 문학에서 다루어 온 광주항쟁의 양상과 그 의미를 밝히고, 우리의 모습이 어떻게 바뀌었나를 통해 현재의 삶을 되돌아보자는 데 목적이 있다.

2. 광주항쟁의 소설적 수용

1) 상처로 인한 삶의 부조화

  80년대 초 군사독재 정권의 철권통치는 작가들로 하여금 우리 삶의 진실에 접근하는 것을 막고 있었다. 누구든 정권이 요구하지 않는 방향에서 움직인다면 그만큼의 위험이 뒤따른다는 협박과 압력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던 시기였다. 어느 누구도 군사정권에게 있어 원죄의식의 근거, 아킬레스건이었던 광주항쟁과 그 진실에 접근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80년대 초는 많은 작가들로 하여금 광주항쟁의 진상과 은폐된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사명감과 그렇지 못함에 따른 죄의식에 시달리게 했던 시기였다.
  이 죄의식은 80년대 중반에 와서야 광주항쟁이 남긴 후유증을 형상화하는, 즉 진실에 대한 우회적 접근의 방법을 통해 소설적 진실을 드러내는 양상으로 구체화된다. 광주항쟁을 다루되 진상규명이 아닌 그 후유증을 통해 광주체험을 유추하는 방식을 택하게 된다.
  이러한 방식에 의해 쓰여진 작품들은 대개 광주항쟁 이후 그 충격과 상처로 인해 정상적인 삶을 영위할 수 없는 주인공들의 모습을 형상화한다. 이러한 계열은 임철우의 「봄날」, 「직선과 독가스」를 비롯한 일련의 작품들에서 시작되어, 광주항쟁의 와중에 행방불명된 아들을 찾아 나서는 40대 부부의 삶을 보여주는 문순태의 「일어서는 땅」, 떠도는 삶을 그린 최윤의 「저기 소리없이 한점 꽃잎이 지고」, 항쟁의 도중에 진실을 알리러 광주를 탈출하는 자의 죄의식을 그린 윤정모의 「밤길」, 90년대에 와서는 자신의 몸을 던져 한 생명을 구하고 그 상처로 귀머거리가 되어서도 인간적 사랑의 참모습을 보여주는 정찬의 「완전한 영혼」, 끔찍한 학살의 장면을 카메라로 포착한 뒤 그 진실이 왜곡되는 현실 앞에 좌절하는 삶을 그린 하창수의 「눈」등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뚜렷한 줄기를 형성한다.
  우선, 80년대 중반에 쓰여진 임철우의 「봄날」을 보자. 이 작품은 악몽 같던 오월이 2년이나 지난 어느 봄날, 몇몇 친구가 정신병원에 입원한 상주라는 친구를 찾아가는 이야기다. 상주란 친구는 오월 그 마지막 새벽의 기억으로 인해 급기야 정신질환 증세를 일으킨다. 누군가 새벽에 자기집 문을 두드리며 살려달라고 하지만 무서워서 밖에 나가 문을 열어주지 못했다는 비겁과 문을 두드렸던 사람이 자신의 친구였다고 생각하는 데서 오는 죄책감으로 인해 생긴 병이었다. 여기서 문을 두드린 사람이 친구였건 아니건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항쟁의 와중에 뛰어들지도 못했고, 살육의 현장에서 목숨을 구하려는 이들을 도와주지도 못했다는 죄의식만이 부각되어 올뿐이다. 학살이 자행되는 공포와 죽음의 상황, 그 속에서 자신만의 안전을 도모했다는 죄의식은 80년대를 살아온 모든 이의 가슴에 응어리진 상처로 확대된다.
  광주의 비극적 현장에서 살아남은 자의 죄의식은 윤정모의 「밤길」에서도 잘 나타난다. 도청 사수와 계엄군의 최후 통첩을 앞에 두고 폭도로 왜곡되는 광주시민의 오명과 사건의 진상을 알리기 위한 광주 탈출의 과정에서 겪는 요섭의 심적 갈등이 그것이다. 광주항쟁의 중심에서 벗어나 이를 세상에 알리는 것 또한 중요한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는 현장에 남아 장렬하게 죽어간 동지에 대한 죄책감을 털어 버릴 만큼 자신을 합리화하기엔 부족하다. 그 어떤 명분도 죽음을 대신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다.
  과거의 진실과 이를 세상에 알리는 것에서 좌절당한 개인의 이야기는 90년대 들어 발표된 하창수의 「눈」에서 잘 드러난다. 화자는 5월 어느 아침, 한 순간에 폭력적인 세계가 지닌 잔혹함의 모습을 본다. 카메라의 눈 속에 포착된 세계의 진실은 너무도 강렬한 것이어서 말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다. 더욱이 진실마저 말할 수 없는 폭압적 상황은 화자의 상처를 더욱 깊게 만든다. 상황이 달라져 그때 찍은 사진을 세상에 알리고자 했지만 오히려 그것이 왜곡되는 경우를 당한다. 언어의 힘을 빌린 진실 드러내기 역시 좌절된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상처와 자신이 간직한 진실을 대신해서 드러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노력은 모두 허망한 몸부림에 그치게 된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진실을 보는 '눈'만 살아 있다면 자신이 바라본 세계의 진실이 전달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간직하는 일 뿐이다. 따라서 그는 과거의 노예가 되어 현재의 삶을 조화롭게 이를 어떠한 방법도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사각의 틀 속에 갇혀진 과거의 상흔, 설명되거나 왜곡되기 이전의 진실 그 자체를 드러내려는 화자의 안타까운 삶이 드러날 뿐이다. 이를 제대로 볼 수 없는 우리들의 삶이란 결국 맹인의 삶과 다름없다. 이해와 화해의 통로를 닫아버린 세계가 개인의 상처에 또 다른 폭력을 가하는 현실, 우리 삶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이 모두는 광주항쟁 그 자체를 다루고 있지 않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광주항쟁의 주역으로서 항쟁의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공포와 그것으로 인해 상처받은 인간들의 삶을 그리고 있다. 이들의 삶을 통해 광주체험의 비극성을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2) 광주항쟁의 주체 탐구

  광주항쟁의 현재성과 실체 규명을 위한 움직임은 항쟁으로 인한 피해의 시각에서 벗어나 항쟁의 주역에 대한 역사적 평가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대부분의 소설이 광주체험으로 인한 피해자의 시각에 국한되고 있다면, 이러한 움직임은 항쟁의 주체로서의 역사성 획득으로 나아가게 된다. 홍희담의 「깃발」과 공선옥의 「씨앗불」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우선 홍희담의 「깃발」을 살펴보자. 이 작품은 방직공장에 다니며, 밤에 야학에서 공부하는 노동자들이 겪은 광주항쟁을 그리고 있다. 순분, 영순, 형자 등 노동자인 이들은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야학선생들의 말에 공감하고, 자신의 삶의 의미를 깨닫는다. 광주항쟁이 일어나자 광주를 지키기 위해, 무고한 인명의 살상을 막긴 위해, 시민군을 돕기 위해 싸움의 와중에 뛰어든다. 그러나 백주에 계엄군의 공식적인 총기 발포가 있은 이후 학생 지도부는 패배주의에 빠져든다. 야학선생이었던 윤강일이 '어차피 지는 싸움'이라며 피신해야겠다는 말에 노동자인 형자는 '선생님들이 말하던 시가전, 봉기 등등이 나오고 있는 데' 왜 도망을 하느냐고 항의하지만 학생 지도부는 빠져나간다. 결국 노동자들이 중심이 되어 끝까지 도청을 사수하다 희생된다 항쟁이 끝난 후 나타난 윤강일과의 대화는 항쟁의 주역이 누구이며, 항쟁의 역사는 어떠해야 함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발 붙일 데도 없고 허물어진 기분이야."
"……"
"너희들은 그럴지 않니"
그녀들은 서로 쳐다보았다. 영순이가 말했다.
"선생님, 우린 그렇지 않아요. 할 일이 너무 많은 것 같아서…."

  '허물어진 기분'이라는 지식인과 '할 일이 너무 많은 것'같다는 노동자의 딸은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이는 지식인 중심의 항쟁이 결코 아니었음과 항쟁 이후 노동자의 각성은 새로운 삶을 향한 투쟁의 길로 이어질 것임을 보여준다. 즉 노동자에게 있어 항쟁은 피해자로서의 체험이 아니라 역사의 주체로서의 체험이었고, 앞으로의 삶은 새로운 역사의 주역으로서의 삶이어야 함을 의미한다. 이는 광주체험이 독재권력의 비인간적 살육에 맞선 시민 전체의 저항이었을 뿐 아니라 지식인의 역할이란 거대한 물결의 한 줄기에 불과하다는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한다.
  광주항쟁의 진정한 의의가 그 시작에서 도청사수로 이어지는 마지막까지의 과정, 즉 노동자를 비롯한 시민 전체의 투쟁 속에서 찾아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항쟁의 의미가 다시 지식인 중심으로 왜곡되어 가는 현실은 90년대 초에 발표된 공선옥의 「씨앗불」에서 잘 드러난다. 「씨앗불」에서의 주인공 오위준은 5·18때 기동타격대로 있으면서 항쟁의 주역으로 싸웠던 인물이다. 계엄군에 끌려가 모진 고초를 겪고 나와서는 "더 이상 허망한 부랑의 길을 택하지 않겠다"며 자신의 삶을 일구고 있다. 그러나 진상규명은커녕 살인자가 다시 권력을 잡은 현실에서 5·18의 정신을 왜곡하는 움직임이 곳곳에서 일어난다. 심지어 보상금을 챙겨 달아난 아내때문에 분신자살한 친구 서기정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자는 옛 동지들의 모임에서도 서로의 의견이 갈린다. 5·18문제를 '사리사욕으로 이용하려는 자'나 '또 그런 놈조차 권력의 도구로 이용해 묵고 사는 놈'들의 농간에 옛 동지들조차 분열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권력의 의도와 맞물린 분열된 삶의 모습이 5·18의 순수한 정신마저 퇴색시키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 작품은 항쟁의 주체가 누이며, 그 순수한 정신이 지식인이나 일부 정치인에 의해 어떻게 왜곡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3) 왜곡된 삶의 실상

  광주항쟁의 진정한 정신을 왜곡시키는 움직임과 그로 인해 파생되는 문제를 다루고 있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채희윤의 「아들과 나무거울」, 이향란의 「마타모로스에서 온 편지」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들 작품은 광주보상법이 제정된 이후의 우리 삶의 한 단면을 그리고 있다. 5.18의 정신을 왜곡시키기 위한 권력의 음모와 인간의 탐욕이 빚어낸 웃지 못할 우리의 현실을 잘 보여준다.
  「아들과 나무거울」은 파출부로 뼈빠지게 일하면서 자식놈들을 가르쳤는데도 5.18 주역이었던 큰 놈이 감옥에 갔다와서 제 밥벌이도 팽개치고 사회 운동하는 것을 한탄하는 어머니의 사설을 들려준다. 남들은 5·18후에 제 갈길로 가서 잘 살고 있는 데 자신의 아들은 그렇지 못해 안달이다. 마침 국가에서는 5·18 희생자에 대해 보상금을 준다고 한다. 이때부터 어머니와 아들의 갈등은 시작된다. "제가 원하는 것은 얼마간의 금전적 보상이나 동정이 아닙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진실을 밝히는 것입니다"라는 아들과 "다른 친구들은 오월동지라서 취직도 잘 하고 돈도 잘 버는데" 당신의 아들은 그런 것에 미동도 않는 건이 답답한 어머니와의 갈등이다. 국가에서 주는 보상금이 어떠한 성격의 것이든 타내야 한다는 어머니의 욕망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이 작품에선 그래도 5·18의 정신을 지켜야 한다는, 즉 진상규명 이외엔 어떠한 보상이나 배상도 의미없다는 아들이 든든하게 버티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러나 이향란의 「마타모로스에서 온 편지」에 와서는 사정이 더 악화된다. 여기에도 폐결핵으로 고통받는 화자와 형의 죽음을 확인해 보상금을 받으려는 어머니가 등장한다. 어머니는 과거 1급 내란죄로 수배되었다가 행방불명된 형을 빌미로 보상금을 타내려한다. 형이 먼 이국에 살아있음에도 행불자로 처리해 보상금을 타내려는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이미 알만한 사람들은 모두 형이 살아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계획은 화자에게로 돌려진다. 고문 후유증으로 폐결핵을 앓고 있는 사람들도 있으니 잘 되었다는 것이다. 폐결핵 환자인 화자에게 담배를 더 피우고, 병원에 가서 사진을 찍어 시청에 서류를 제출하자는 것이다.
  여기서는 살아남은 자에 의해 올바른 역사를 위해 싸웠던 삶의 진정한 의미가 퇴색되고, 죽은 자를 빌미로 돈을 타내려는 세속적인 욕망만이 난무하는 삶의 일면을 보여준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런 삶의 이면이다. 보상금에 눈이 어두워진 어머니, 뚜렷한 삶의 방향을 찾지 못하는 화자, 과장된 투사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형, 그 형에 대한 복수심으로 자신을 파괴하는 형의 애인… 이들 모두 역사의 피해자란 사실이다. 그러나 피해자에 머물러 있으면서 권력의 의도에 말려 진실 자체를 왜곡하는 데 일조하는 것, 과거에 매달려 오늘의 삶을 방기하는 것 역시 부끄러운 우리네 삶의 모습일 것이다.
  「아들과 나무거울」, 이나 「마타모로스에서 온 편지」에서 보여지는 삶은 진실 왜곡을 위해 세속적 욕망을 부추기는 권력의 부도덕성과 이에 부화뇌동하는 세태의 일면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이러한 삶에 대한 자각과 반성이야말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가게 할 새로운 버팀목이 되어준다는 것에 대한 확인이어야 할 것이다.

4) 집단의 폭력과 개인의 상처

  광주항쟁을 소설속에 그리고 있는 또 하나의 유형은 5·18 당시의 가해자가 오히려 피해자로 남게 된 상황이다. 이런 유형의 작품은 대부분 광주항쟁 당시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폭력조직의 일원이 되고, 명령에 의해 죄의식없이 행했던 폭력과 살인의 기억때문에 고통받는 한 개인을 그리고 있다. 80년대에 발표되어 주목받았던 정도상의 「십오방 이야기」, 박양호의 「고래와 참새」 그리고 이순원의 「얼굴」, 정찬의 「새」와 같은 작품이 그것이다. 여기엔 예외없이 과거의 폭력을 행사했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고통받는 인물이 그려지고 있다. 계엄군으로 소대장과 함께 도청에 잠입하다 시민군이 된 동생이 소대장에 의해 살해당하는 것을 보고, 그 죄책감으로 어머니를 뵐 낯이 없어 떠돌아다니다 살인죄로 감옥에 들어온 「십오방 이야기」의 김만복, 군에서 제대한 이후 극심한 언어장애를 일으키는 「고래와 참새」의 김평후 등이 그들이다. 이 두 작품에서 주인공의 고통은 자기 혼자만의 고통으로 국한되는데 비해, 「얼굴」에서의 김주호나 「새」에서의 김장수의 경우는 가족들의 고통이 뒤따른다는 점에서 차이성을 드러낸다.
  이순원의 「얼굴」을 보자. 이 작품은 광주 청문회가 방영되었던 시기를 배경으로 얌전한 은행원인 김주호란 인물의 고통을 그리고 있다. 그는 광주 현장에서 폭력을 행사했던 계엄군의 일원이었다. 그러나 그가 광주에 가게 된 것이 우연한 일이었듯, 훈련된 군인으로 명령에 따라 데모군중에 대해 적개심을 갖고 죄의식없이 폭력을 행사한 것도 우발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그가 사회로 돌아와 결혼을 생각했던 여자가 광주 출신이고 그녀의 오빠가 당시에 죽었다는 말을 듣고 과거의 기억은 되살아 온다. 그래서 자신의 존재를 감추고자 한다. 광주와 관련된 모든 테이프를 구해서 자신의 얼굴이 나올까봐 밤새도록 테이프를 본다. 직장에서는 과거의 군대 경력 때문에 동료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게 된다. 그가 아무리 과거로부터 도망치려 하지만 되살아나는 폭력의 기억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다. 조직에 의해서 또는 명령에 의해서 강요된 것이라고 자위를 해도, 비디오 테이프에 자신의 얼굴이 나타나지 않는다 해도, 또 어머니의 위로에도 그는 결코 과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정찬의 「새」는 이보다 섬뜩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주인공 김장수 역시 특전사 출신으로 광주에 투입되었다. 데모군중 앞에서 느꼈던 적의와 내부의 열등감을 명령이란 명분 하에 발산했었다. 모든 것이 정당했었다. 그렇기에 아무 죄의식없이 사람을 죽였고, 현재에는 개인 사업을 하면서 아내와 아들을 두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 그러던 어느날, 아내가 장롱을 정리하다 낯선 주민등록증을 발견한다. 과거 계엄군 시절 지하실에서 개머리판으로 내려친 학생(박영일)의 주민등록증이었다. 이때부터 김장수는 과거의 노예가 된다. 주민등록증의 주인공을 찾아 광주로 가고, 그의 소재를 파악하고, 괴로워하고… 이 와중에 그는 점점 광포해진다. 광주의 기억은 더욱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시체 위를 흙으로 덮다가 그는 어떤 시선을 느꼈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새였다. 새는 검은 나뭇가지에 앉아 그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시선을 슬그머니 내렸다.
  이와 같은 광주의 기억이 7년이나 잊고 산 오늘에 되살아오는 것이다. 모두가 박영일의 존재때문이라 생각한다. 잊으려 노력할수록 되살아오는 과거의 기억은 그의 광포성에 불을 붙인다. 급기야 아내에게 손찌검을 하게 되고 가정은 파산 직전에 이른다. 그는 과거로부터의 탈출이 자신의 현재를 망치고 있는 과거의 잔재, 즉 박영일을 없애야 가능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의 광포한 적의는 죄의식의 다른 얼굴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그는 살인으로 자신을 파멸시키고 만다.
  새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진실의 증언자요, 광포함 뒤에 숨었던 자신의 양심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맹목적인 분노로 인한 폭력이나 그 폭력이 명령에 의해 저질러진 것이라 해도 그 당사자인 자신은 죄의식에서 벗어날 수 없다. 양심과 죄의식은 하나의 뿌리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눈앞에서 동료가 동생을 죽이는 것을 본 「십오방 이야기」의 김만복이나, 언어장애를 지니고 살아야 할 「고래와 참새」의 김평후나, 「얼굴」에서의 김주호, 「새」에서의 김장수 어느 누구도 과거의 죄의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새'로 상징된 보이지 않는 진실의 감시자가 나뭇가지에 앉아 죄악의 현장을 내려다보듯 그들은 철저히 과거의 기억과 죄를 안고 살아야한다는 업보를 지니게 된다. 문제는 이것이 개인적 삶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란 점이다. 공수부대 원으로서 광주에 가게 된 것이 개인의 의사와 상관없는 것이듯, 조직적 폭력 역시 개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저질러진 것이다. 그러나 가해자는 없고 폭력의 하수인만 다시 피해자로 드러나는 현실, 이것이 광주의 비극을 안고 있는 우리 시대의 고뇌다. 이는 이 시대 같은 상처와 과거를 가진 어느 누구도 죄의식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3. 남는 문제들

  광주항쟁의 모습을 살피면서 80년대의 작품과 90년대에 발표된 작품의 차이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그 첫째는 80년대와 달리 90년대에 발표된 작품의 대부분에서 가족이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가족은 어머니나 아내, 자식으로 나타난다. 이는 80년 광주항쟁으로부터 십 수년이 지났음과 연결된다. 광주체험의 당사자들이 그 당시엔 혼자였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가족이란 울타리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장이 되었건 가족 구성원의 하나가 되었건 주인공의 고통은 한 개인에 그치지 않고 있다. 이는 고통을 분담한다는 차원이 아니라 깊어 가는 고통의 크기와 범위가 확산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광주의 비극과 그 치유는 진실의 규명과 이를 바탕으로 한 진정한 참회와 용서가 전제되어야 함을 말해준다. 이것이 충족되지 않는 상태에서 과거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는 우리 모두가 져야 할 영원한 멍에가 될 것임을 시사하기도 한다.
  둘째는, 광주체험을 현재화시키기보다는 후일담의 형태로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후일담의 기저에는 광주항쟁을 과거의 것으로 돌리는 체념과 허무의식이 깔려있음을 보게 된다. 이는 지금까지의 광주체험의 문학적 형상화가 감정적, 직정적 태도에서 이루어져 왔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광주항쟁의 모습은 진상규명에의 의지와 함께 부단히 우리 삶의 현재 속에 남아 있어야 한다. 과거의 것으로 돌리기엔 광주체험이 그 비극성에 있어서나 항쟁에서 민중의 역할로 보아 우리에게 다가오는 의미가 너무도 크기 때문이다.
  셋째는 광주항쟁의 폭과 깊이로 보아 그 의미는 우리 삶의 총체적 모습에 대한 이해와 이를 형상화하려는 의욕 속에 우리 문학의 과제로 계속 탐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이미 임철우나 문순태에 의해 진행되고 있다. 그 편린을 임철우의 「어떤 행군」(이 작품은 장편의 일부로 소개되었다)이나 현재 연재중인 문순태의 「오월의 그대」 등에서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 시대의 총체적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분단 상황, 80년대의 시대적 상황, 가해자와 피해자의 서로 다른 시각의 바탕, 계층구조, 상황변화에 따른 인식의 변모 등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전제들은 광주항쟁의 정신과 의의에 대한 현재성을 인식하는데 필요한 조건들이기도 하다. 광주항쟁은 이미 특정지역의 문제만이 아니다. 친외세, 반통일, 반민주의 행태가 벌어지는 시공 어디에서나 진행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인간다운 삶을 저해하는 요소가 우리 사회에 남아있는 한, 광주의 정신은 항시 현실화된다는 의미에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