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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임철의 「봄날」. 정경운(문학포럼, 광주전남민속문화작가회의, 1998. 6)

본문

■서평·1 ■

임철우의 『봄날』



정 경 운/전남대 박사과정



1. 들어가며

  90년대가 서서히 파장을 서두르고 있다. 가히 '위기의 담론'이라 불릴 만큼, 90년대 벽두부터 우리 사회는 소련붕괴 이후 일어난 여러가지 사회적 변화들에 대해 '위기'라는 용어로 대응해 왔다. 변화와 위기를 한데 묶는다면 문학도 예외는 아니다. 몸의 정치학이라 불리는 일상이 90년대 작품텍스트의 주요 테마를 이루자, 문단의 반응은 '역사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지배적이었다. 모든 것이 가벼워지는 세태 속에서도 바로 그 역사찾기에 지속적으로 몰두하고 있었던 이가 임철우이다.
  81년 [개도둑]으로 등단한 이후 '광주항쟁의 작가'로 알려질 만큼 [봄날], [수의], [불임기], [직선과 독가스], [사산하는 여름] 등 상당량의 단편들을 통해 '광주'를 말해왔다. 그러나 이 작품들에서 '광주'는 '불임'이나 '사산'과 같은 알레고리로 덧씌어지거나 독가스나 비명 같은 환취, 환청, 환각이라는 '감각적 상상력'의 방식에 기대어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방식에 대해 사실 작가의 용기나 형상화 능력을 문제 삼을 수는 없다. 헤겔은 일찍이 "형식의 불완전함은 내용의 불완전함에서 말미암는다"고 했거니와, 사회의 폐쇄적 구조가 결국 문학의 형식을 규정하기 때문에, 이 우회성들은 세계가 제압하는 어떤 터부를 넘어서기 위한 문학적 장치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른 바, 정면이 아닌 측면 공략인 셈이다.
  그런데 바로 그 측면성에서 벗어나 비로소 '광주'와 정면대결을 시도한 작품이 이번에 장장 5권이라는 대하소설로 엮어져 나왔다. 이제까지의 '광주'에 대한 작업들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는 『봄날』은 작가로서 그리고 광주체험을 가진 개인으로서도 '광주'에 지고 있는 부채감을 일단락짓고 있는 듯하다.

2. '형제살해'의 원죄의식을 넘어서

  {봄날}을 읽기 전에 우리는 먼저 1988년부터 <<문학과 사회>>에 연재되어 오던 [붉은 산, 흰 새]를 돌아봐야 한다. 80년 5월을 그리기 위해서는 그 전자에 대한 천착이 필요하다는 생각 하에 먼저 씌어진 [붉은 산, 흰 새]는 한원구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6·25 이후 조그마한 섬에서 겪게 되는 한 집안의 비극적인 가족사를 다루고 있다.
  한원구의 아버지 한조합장은 6·25당시 좌익 청년들에 의해 살해되고 한원구의 아내는 그들의 강간으로 큰 아들 무석을 낳고는 미쳐버린다. 그는 과거의 상처를 안은 채 원수의 아들인 무석을 키우지만, 명치를 낳고 아내 귀단이 가출해버린 후 현재 아내와 재혼하여 명기와 딸아이 하나를 낳고 살아온다. 그 사이 전처 귀단의 집은 무석의 외숙이 간첩으로 남파되어 가족들과 접선한 것이 알려져 가족 전체가 간첩죄로 연루되어 징역형을 받는다.
  {봄날}은 이 작품의 연장선상에서 읽혀진다. 1980년 5월16일부터 27일까지의 '광주민중항쟁' 전기간이 한원구의 세 아들 무석, 명치, 명기를 큰 축으로 해서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봄날}은 "단지 소설로서만이 아니라 비교적 사실에 충실한 하나의 기록물로서도 남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썼다고 작가가 고백하고 있듯이 사실 전달에 전념하고 있기 때문에 텍스트의 행간을 읽어내기가 그리 쉽지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광주'를 통해 우리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폭력성의 원리를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서술자의 카메라는 바로 그 폭력성이 폭발하고 있는 진압군의 잔인한 진압 현장에 거의 맞춰져 있다. 5월 18일 계엄령이 떨어진 직후, 광주 시내 곳곳에서 벌어지는 무차별적 곤봉진압부터 시작해 대검에서 총기 발포까지 이어지는 공수부대들의 끔찍한 살육행위 현장들이 작품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 일방적이고도 압도적인 폭력 앞에 무력하기만 한 개인들은 당혹감에서 분노로 다시 공포감으로 휩쓸려 갈 뿐이다. 어린 중학생의 머리가 곤봉에 깨져 뇌수가 흘러나오고, 병원으로 부상자를 싣고 가던 택시 기사가 끌려 나와 등을 대검에 찔리고, 남편의 귀가를 기다리던 임산부가 조준사격되어 그 자리에서 머리통이 반쯤 날아가는 등 그 처참함에 이제 개인들의 심리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넘어 인간 자체에 대한 공포심으로 전이된다.
  두 다리를 대검으로 찔리고 뒷머리를 곤봉으로 맞아 머리가 수박통만큼이나 부풀어 있는 고등학생 아들을 앞에 두고 울부짖는 '천진수'와 차량 시위 도중 진압군에 끌려가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만큼 견뎌내기 힘든 고문을 받던 '철수'가 동시에 내뱉는 말은 '인간으로 태어난 자신을 저주'한다는 것이었다. 폭력이 정작 무서운 것은 살육행위에 대한 것이 아니라, 바로 인간에 대한 환멸이 가져오는 존재 자체의 상실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폭력을 행사한 진압군들은 적이며, 가해자이며, 폭력의 주체인가? 작가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그의 시선은 피해자는 광주 시민이며 가해자는 진압군이라는 원시적인 이분법을 넘어서 있다.
  화순으로 넘어가던 버스에 집중사격을 가한 뒤 살아남은 두 청년조차 직접 사살해 구덩이를 파고 매장한 뒤 정신적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미쳐버린 '유이병'과 최후 진압을 앞둔 상황에서 발생한 '오하사'의 자살은 피해자와 가해자의 구별이 그리 단순치 않음을 보여준다. 작품의 초반부에서 악마의 화신 같은 진압군들의 행위에 모아졌던 작가의 시선이 후반부에 들어서서는 진압군들의 내면으로 옮겨져 그들이 갖는 공포감과 불안감, 급기야는 정신착란과 자살로까지 이어지는 자해적 행위를 통해 작가는 폭력의 논리를 지배하는 힘은 다른 곳에 있을 것이라는 암시를 끊임없이 던지고 있다. 그들 또한 보이지 않는 폭력의 희생자일 수 있다는 것이다.
  폭력의 구조가 진정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개별 인간들의 영혼 깊숙이까지 침범하여 그것을 감염시키는 폭력성 자체에 있다는 것인 작가의 문제의식이다. 시위자들에 대한 진압군들의 이유없는 분노와 공격심은 그 감염성에 다름 아니며, 이미 주체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움직이는 그들은 도구화된 사물일 뿐이다. 무참히 살륙을 당한 자의 인간에 대한 저주나, 도구화된 사물로서의 진압군들의 광기 모두 기실은 인간 영혼의 상처를 동시에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상처가 더욱 비극적인 것은 그 가운데 '형제살해'라는 민족사적 원죄의 고리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다시 한원구의 가족사로 돌아가야 한다.
  이데올로기라는 미명하에 한 마을이 쑥밭이 돼버린 전쟁이라는 비극 속에서, 그리고 30년 후 시위대에게 총을 겨누던 날 그 안에서 친구의 얼굴을 발견하는 '오하사'나 정신없이 시위대를 쫓던 중 그 뒤통수가 자신의 친동생 '명기'라는 사실을 알아채고 서버린 '명치'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그 두 사건을 관통하고 있는 것이 '형제살해'에 놓여 있음을 읽어낼 수 있다. 여기서 두 사건은 일회적 사실을 넘어선 어떤 보편적 의미망을 형성한다. 작가는 한 가족사를 중심으로 6·25와 5·18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병치시킴으로써, '형제살해'를 바탕으로 한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구분이 얼마나 해괴한 괴물이며, 그 괴물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돼버린 한 개인의 가족사의 비극이 결국 우리의 근현대사의 비극에 그 연원이 닿아 있음을 문제 삼고 있는 것이다. 한원구의 가족사가 「붉은 산-」에 끝나버리지 않고 30년 후의 사건인 5·18을 다루는 『봄날』에까지 연결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형제살해'라는 괴물을 만들어 낸 것은 개인이 아닌, 서로에게 낫과 총을 겨누게 하는 보이지 않는 무엇, 바로 폭력의 논리를 지배하는 실체에 다름 아니다. 그 실체가 지배하는 폭력의 논리에 의해 개인의 영혼은 감염되어 있으며, 이 감염은 발성이 아니라 시공간을 넘어선 편재성과 계보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폭력의 계보성 아래 개인은 그 폭력의 논리를 운으로 읽을 수밖에 없으며, 그 과정에서 인간 존재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이 계보성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낸 운명을 거부하기 위해서는 이제 개인들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자기 족쇄를 발견한 자만이 그것을 풀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27일 새벽, 도청 최후 진압을 앞둔 명치가 '도대체 적은 어디에 있는가? 내가 쓰러뜨려야 할 적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혼란에 빠지는 것은 당연한 과정이다. 따라서 그의 질문은 '무엇 때문에, 왜 저들을 죽여야 하지 왜, 어째서? 무엇을 위해서? 도대체 그 누구를 위해서?'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그의 시선과 함께 우리는 '형제살해'의 비극을 넘어서 비로소 폭력성의 '폭력성'의 실체로 향할 수 있다. 명치가 진압 직전 도시의 하늘에서 거대한 환영으로 본, 명치 자신과 사람들을 얽고 있는 '그물'은 바로 그 실체에 대한 인식에 다름 아니다.
  작가는 바로 이 폭력의 진짜 실체와의 싸움을 준비하기 위해 개인들의 화해를 준비한다. 자신의 출생에 대한 상처를 안고 산 '무석'과 어머니의 정신착란과 가출로 이어진 불행한 유년시절 때문에 자기파괴 욕구에 시달려 온 '명치', 그리고 자기 가족사의 비극으로 인해 세상에 대해 증오를 품고 살아온 '한원구'의 서로를 향한 화해는 바로 세계를 향한 몸짓이다. 영혼에 상처입은 개인들이 서로에 대한 증오를
없애야만, 그들의 비극을 운명처럼 만드는 보이지 않는 정체와 전면전을 펼칠 수 있기 때문이다.

3. 두 개의 강박증에 대하여

  '광주'를 체험한 사람이라면 누가 그 부채감을 갖고 있지 않으랴마는 {봄날}에서 임철우의 작가로서의 부채감은 형식과 내용면에서 동시에 강박증에 가깝게 드러나고 있어 문제적이다.
  {봄날}을 대하는 순간 우리는 사진처럼 생생하고도 방대한 규모에 우선 압도당하지 않을 수 없다. 열흘이라는 시간이 사건이 진행되는 추이에 따라 몇 시간에서 한 시간, 삼십 분, 십 분, 오 분 간격으로 나뉘어져 서술되고 있으며, 나아가 같은 시각에 서로 다른 장면들이 그려지거나 혹은 같은 장면이 서로 다른 인물들의 시각에서 보여지는 등 사건 서술이 입체적으로 조합되어 있다. 그리고 가히 르포르타지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모든 디테일에서 현실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 사실 88년 이후, '광주'에 대한 진실이 서서히 벗겨지면서 심상해지고 사동화되어 가고 있는 우리들의 의식에 작가는 르포르타지소설이라는 형식으로 직격탄을 날리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사실에 충실하겠다'는 작가의 변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문학에서 문제삼는 것은 역사적 사실성이 아니라 바로 문학적 진실성이라는 것이다. 이 진실성이란 것은 세계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과 직결되는 바, 얼마만큼의 디테일이 소설작품의 소재가 되는 사실 그대로의 경험적 현실과 일치되는가 않는가는 별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사실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작가의 독자적인 시선과 목소리를 위축시킬 수 있다. 각주 붙이기라든지 실제 통계자료가 순시로 동원되는 작가의 친절함에 인물들의 개성이 함몰되어 카메라를 대신해 주는 현장확인 기능소 정도로 떨어질 위험을 내포하고 있으며, 급기야는 전반부를 무게있게 시작한 한원구의 가족사가 후반부로 가면서 항쟁 기록들에 밀리기 시작해 그 서사적 고리의 치밀성이 떨어지는 우를 범하고야 만다. 이래서야 작가 임철우의 존재를 텍스트의 행간에서 발견하기란 쉬운 일이 될 수가 없다.
  또 하나의 강박증은 '광주'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에 심리적 폐쇄성이 묻어 난다는 사실과 관련된다. 그에게는 '광주'의 해방적 의미가 가져다 주는 긍정적 의미보다도 '유폐'의 비극성이 보다 더 먼저 읽힌다. 텍스트 곳곳에서 광주는 '버림받은 도시', '잊혀진 도시', '고립된 외로운 섬, 망망대해로 둘러싸인 절해의 고도', '난파선'으로, 광주시민은 '난민들'로 표상된다. 따라서 계엄군이 물러간 후, 맞이하는 일주일 동안의 해방기간에 들리는 시민들의 환호와 함성은 그에게 오히려 애잔하고 불안하게 비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실 이 기간에 대한 동시대 작가들의 대책없는 낙관성과는 구분되는 점에서, 이를 정직한 정신적 고백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그러나 과도할 정도의 반복 때문에 오히려 '광주'와 이외의 도시들을 가르는 분리주의를 조장시키는 동시에 그들 모두를 자폐적으로 몰아 부칠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4. 나가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주'에 대한 작가 임철우의 저력은 대단하다. 광주에 대한 어떠한 형태의 공개적 발언도 금기시되던 당시의 침묵의 분화 속에서, 혹은 몇 번의 시도 끝에 슬그머니 손놓아버린 망각과 가벼운 화해 속에서 그는 그 사태의 비극적 양상에 대해 그야말로 지치지도 않고 끊임없이 발언해 왔다. 그의 발언들은 상황과 체계의 억압, 강요에 대한 강렬한 탄핵이면서 동시에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한 고통스러운 고발장에 다름 아니다. 앞으로의 작업 또한 그러하리란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래서 {봄날}은 완결인 아니라, 그 발언을 확산시키기 위한 토대이다.
  작가는 서문에서 "한 사람의 생애에서 더러는, 저 혼자 힘으로는 결코 건널 수 없는, 운명과도 같은 거대한 강물과 맞닥뜨리기도 하는 법이다"라고 쓰고 있다. 그에게 '광주'는 운명이다. 눈부신 봄날, 그 거대한 강물에 휩쓸리지 않고 거슬러가는 모습이 보기에 단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