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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5월 광주' 안고 달려온 '민족미술' '아름다운 세상 아름다운 미술' 그려. 이서영(월간예향,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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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 10주년 맞은 광미공

'5월 광주' 안고 달려온 '민족미술' '아름다운 세상 아름다운 미술' 그려



  그림으로 '오월의 금남로'를 지켜온 광주전남 미술인 공동체(광미공·회장 정희승)가 올해로 창립 10주년을 맞았다. 광미공 10년은 '광주'가 우리사회에 끊임없이 제기해 왔던 문제들을 민족미술로 풀어온 여정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를 새삼 되새기게 한다. 올 오월에도 광미공의 오월 거리미술전이 어김없이 열릴 예정이고 작가들은 21세기를 눈앞에 둔 오늘을, 우리가 이어야 할 '광주정신'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 가를 보여 줄 계획이다. 80년 이 거리에 섰던 '아름다운 사람들'(전시명)통해서.

89년 10월 창립

  89년 광미공의 첫 출발은 미술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고민을 앞세운 것이었다. 창립선언문이 그 출발의 의지를 엿보이게 한다.
  '…우리의 미술은 1980년을 고비로 하여 변화를 거듭해오는 동안 민족미술-그 새로운 형식의 창조, 즉 모국어적 감성과 조형어법을 창출해야 한다는 요구에 직면해 있습니다. 이의 올바른 실천은 예리한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민족의 바른 진로에 맥락을 같이 하는 참된 삶의 정서들을 소상하게 드러내는 일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80년 5월 항쟁을 거치면서 미술이 담아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고민했던 젊은 작가들은 당시 다양한 통로로 반독재변혁운동에 참여해왔는데 그 중심에 있던 시각매체연구소와 광주목판화연구회가 연대하고 여기에 몇몇 작가들이 가세해 광미공이 창립된다. 89년 10월 29일 광주 YWCA에서 창립식을 갖고 출발을 선언한 광미공에는 시각매체연의 홍성담·백은일·이상호·전정호, 광주목판화연구회의 최상호·조진호·김경주·이준석 등의 작가와 평론가 최일 씨등 40여명이 창립멤버로 참여했고 초대 공동의장은 조진호와 홍성담이 맡았다.
  군부독재가 극에 달했던 80년대의 시대상황 때문에 미술인들은 소집단의 전위적인 활동으로 변혁운동에 참여해왔다. 그러던 중 이들이 '민족미술'이라는 큰 깃발 아래 모이면서 강조하고 나선 것은 역사의식과 장기적이고 대중적인 미술운동의 필요성 때문이었다. 물론 역사와 사회의식을 바탕에 둔 그 출발점은 '5월 광주'였다.

출발점은 '5월 광주'

  창립 다음해에 가진 광미공의 창립전은 그래서 당연히 '5월전(展)'이었다. 남봉 갤러리에서 열린 첫 오월전에는 역사속의 오월, 그것의 동력이 된 서민들의 삶을 형상화한 작품들이 선보여 관심을 모았고 91년 '십일간의 항쟁과 10년간의 역사'를 주제로 열린 두 번째 오월전에서는 10일동안 항쟁모습과 그후 10년간의 역사를 사건별로 정리해냈다. 미술평론가 이태호씨는 두 번째 오월전이 열린 전시장에서 "이번에 전시된 작품들은 내용과 형식에 있어 광주민중항쟁 10주기가 되는 지금의 우리 사회와 예술의 현재적 위치를 알려주는 본보기"라고 강연하기도 했다. 당시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던 이 전시는 남봉 갤러리에서 전시를 마치고 조선대학교와 전남대학교에서 초청돼 5월내내 연장전시를 통해 시민들을 만났다.
광미공의 오월전이 담아온 메시지는 반독재 통일운동, 인간해방의 쟁점과 같은 궤를 달려왔다. 91년 '5월에 본 미국전'은 당시 논란을 빚고 있었던 미국의 5·18 개입문제를 모티브로 냉전논리의 실체와 반미 자주의 의지를 담았다. 이후 '더 넓은 민중의 바다로' (92년), '희망을 위하여'(93년) '희망의 무등을 넘어'(94년) 등은 5월 정신속에 이어지고 있는 인권·통일·환경·여성운동과 민중의 표정등을 화폭속에 담아냈다.
  '학살 및 내란음모죄' 공소 시효 완료가 목전에 달했던 95년 5월전의 뜨거운 이야기는 '5월 특별법'이었다. '5월 특별법제정 촉구를 위한 가해자 얼굴전'에는 하갈자 33인의 얼굴이 나붙었고 그 얼굴들을 보면서 시민들은 '5·18 가해자들을 영원한 역사의 법정위에 세워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였다.

광주항쟁 연작판화 눈길

  금남로에 자리한 전시장에서 시작된 5월전은 91년 망월동 전시를 거쳐 다시 금남로로 나왔다. 망월동에서의 5월전은 당시만 해도 그리 흔치 않았던 외지 방문객들에게 망월동에 대한 깊은 인상을 심어줬다. 미국의 냉전논리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박철우의 '탐욕의 여신상'은 한 외국인이 사겠다는 제의를 해왔고 허달룡의 '람보 차림의 레이건'과 남도어머니의 전형을 담은 이사범의 '무안댁' 등은 많은 관람자들로부터 호응을 얻었다. 당시 전시에서 가장 관심을 끌었던 그림은 광미공 창작단이 공동창작한 걸개그림 '5월 전사'였다. 망월묘역 중앙에 걸린 세로4m 가로 8m 크기의 이 걸개그림은 민주의 열망으로 살아난 5월 영령들을 형상화하고 있어 보는 이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미술평론가 원동석씨는 이 걸개그림을 "박승의 양을 중심구도에 부각시키면서 청년들의 투쟁상을 그린 것으로 정확한 선묘와 색채의 조화가 빈틈없는 역량을 돋보이게 한 것"이라고 평하면서 그 상징성을 새롭게 해석하기도 했다.
  광미공의 공동창작으로 또 눈길을 끌었던 것은 '광주민중항쟁 연작판화'였다. 판화로 제작된 20장면의 항쟁일지는 지금까지 총 2천여장이 판매돼 '여러 사람이 함께 소유할 수 있는 미술'의 의미를 나누는 매개가 되기도 했다.

회원 1백여 명으로 늘어

  한편 금남로로 나온 이후 1백20m에 이르는 거리전시장에서 보다 많은 대중들을 만날 수 있게 된 '오월전'은 역사의 원동력으로서 민중의 힘을 확인하는 이야기들을 담아 왔다. 96년 '우리 땅 우리 하늘'전에 이어 가진 97년 '만인의 얼굴전'은 긴 역사의 줄기를 이뤄온 평범한 민중의 얼굴과 역사 속의 이정표를 세운 이들의 얼굴을 보여줬다. 특히 초 중 고등학생들의 작품이 화가들의 작품과 함께 전시돼 '광주 시민과 함께 하는 그림판 한마당' 등의 행사에 이어 시민이 참여하는 5월전의 인상을 남겼다.
  오월 거리전에는 많은 뒷얘기들이 있다. 전시대를 만들기 위해 5월이 오면 작가들은 붓을 놓고 망치를 들어야 했다. 작품을 제작하고 전시대를 만들고 작품을 관리하고 철수하는 일까지 모든 것을 작가들 스스로 책임지지 않았다면 오월거리전은 지속될 수 없었을 것이다. 40명으로 출발한 광미공회원은 일부 빠져나가기도 했지만 젊은 작가들을 수혈하면서 1백여 명으로 불어났다. 20대부터 30∼40대에 이르는 작가 1백여 명이 참여하고 있지만 교육현장 등 현업이 있는 회원들이 상당수여서 오월전의 '야전작업'은 주로 젊은 전업작가들의 몫이었다. 하지만 "함께 가는 소중한 공동체의 정신을 다들 공감하고 있기 때문에 십년을 이어올 수 있었다"는 것이 사무국장 허달룡씨의 이야기다.
  이런 거리전은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작가들이 직접 시민들과 작품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열린 전시라는 점에서 매력이 있었다고 한다. 때로 맺힌 이야기가 많은 이들이 5월 거리전을 찾아 가슴의 응어리를 풀어놓는 자리가 되기도 했고 그림 속의 얼굴을 보면서 5월 거리에서 잃어버린 아들 딸의 얼굴을 그려보는 어머니도 있었다.

전시그림 도난사건도

  몇 차례의 도난사건도 빼놓을 수 없는 5월전의 역사다. 95, 96년 당시 김영삼대통령의 얼굴과 33인의 가해자 얼굴이 하룻밤새에 사라졌고 97년에는 전시 마지막날 새벽 '만인의 얼굴'을 몽땅 도난당했다. 주로 정치적으로 민감했던 작품들이 사라져 '정치적 탄압'의 혐의를 두기도 했지만 관계기관의 극구 부인으로 없어진 작품들은 결국 찾지 못한 채 사진으로만 남겨져 있다.
사회적인 문제에 대한 발언과 함께 광미공은 시민들을 향한 미술이야기도 꾸려오고 있다. '아름다운 세상, 아름다운 그림'이라는 주제로 93년부터 이어오고 있는 겨울미술학교(교장 강연균)가 그 이야기의 통로 삶 속의 미술이야기를 나누어온 이 강좌에는 매년 1백∼2백여 명의 시민들이 참여했고 유홍준 고은 문순태 조상현 김정헌 임옥상 황지우 이철수씨등이 강사로 참여해 시민들과 만났다.

통일미술제도 2회 개최

  이 자리에서는 작가 시민 학생들이 모여 오늘 우리미술에 대한 고민들을 허심탄회하게 나눴다. 미술문화의 현실, 왜곡된 미술의 소통구조, 바람직한 우리시대의 작가상, 올바른 수용자의 역할 등등… 광미공 회원들 역시 이 자리는 자신들이 서 있는 자리에 대한 고민과 반성의 자리였다.
  광미공이 95년 광주비엔날레 개최에 문제를 제기했던 것도 그런 고민들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미술역량의 결집과 충분한 논의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정치논리에 의해 급조된 국제미술행사에 대해 '재고'를 요청한 것은 '자생적 토양의 힘'을 믿어온 작가들로서는 당연한 것이었다. 또 서구적 성격이 강한 비엔날레라는 형식에 대한 '민족미술적 반론'이기도 했다. 95년 광미공은 비엔날레가 열리는 동안 망월묘역에서 안티비엔날레의 이름을 단 '통일미술제'를 열었다. 당시 십리길에 이어진 강연균씨의 설치미술 '만장'은 한국적 설치미술의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지난해 2회 광주비엔날레에서의 통일미술제는 비엔날레 특별기념전 형태로 치러졌다. '안티'에서 어떻게 '특별기념전'으로 변할 수 있느냐는 지적들도 있었지만 광미공은 현재의 역량내에서 민족미술의 대안을 보여주기 위한 선택이었다고 설명했다.
  지금까지 광미공은 자체전시 24회, 전국 연대전시 40여회등 많은 전시들을 꾸려왔다. 그 동안의 전시들에서 그들이 고민해온 것은 미술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것이었고 그것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문제의식이다.
  하지만 세상의 변화와 함께 체질변화도 21세기를 목전에 둔 광미공의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지난해 지금까지의 장르별 분과체제를 연구소 중심으로 개편하면서 시대적 변화에 맞는 역할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정희승 회장은 "나보다 우리의 문제가 더욱 긴박했던 시대상황에서 회원들 모두 작가로서 자신의 모습을 냉정하게 뒤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작가는 작품으로 말해야한다는 점을 공감하고 있고 좋은 작품을 만들어 내기 위한 스스로의 분투가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고 절감한다"고 말했다.
  광미공이 지속해온 현실에의 발언이 예술적 완성도로 깊어지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이야기다. *

글·이서영(문화체육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