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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그러나 다시 가는 길-최근 5월시 동인들에 대한 몇 가지 생각. 강형철(발효의 시학, 살림터, 1997. …

본문

그러나 다시 가는길

최근 '5월시' 동인들에 대한 몇 가지 생각



강형철



  기다리면 안 되는 것일까. 어수선하면 뒤로 물러서서 정관했다가 다시 가면 안되는 것일까. 사람들이 언제는 선을 이루며 서로 어울려 살았던가. 시라쿠스 군대가 쳐들어왔을 때 자신의 통나무 집을 땀 흘리며 굴리던 디오게네스의 여유는 우리에게 정녕 없는 것일까. 왜들 이러는지 모르겠다.
  왜들 이렇게 호들갑을 떨고 있는지 정녕 모르겠다.
  사람됨의 세상, 그래서 서로 웃는 것이 서로에게 힘이 되고 살이 되는 세상. 그것이 천국이라 할지라도 다시 뒤집어 놓고 이것만은 아니라고 부정하는 문학하는 일의 쾌미.
  '5월시', "운명(運命)의 현대적인 이름의 역사이다"라면서 운명이라는 추상명사를 고유명사로 자신의 목숨 앞에 내걸었던 사내들, 그 역사라는 아름다운 소명 앞에서 당당하게 순명하리라 다짐했던 사내들, 그들은 또한 어디 있는가.
  세월은 많이 흘렀다. 81년 광주에서 결성, 81년 7월에 동인지 1집 『이 땅에 태어나서}, 2집 『그 산 그 하늘이 그립거든』(1982), 3집 『땅들아 하늘아 많은 사람아』(1983), 4집 『다시 절망을 노래할 수 없다』(1984), 5집 {5월}(1985)을 간행한 후 이제껏 동인지를 내지 못하고 있으니 (물론 94년에 신작시집 형태로 『그리움이 끝나면 다시 길 떠날 수 있을까』를 냈지만 동인지라는 이름으로는 내지 않았다) 그들 또한 젊어서 내지른 한판의 객기에 약간 당혹해하며 이제는 숨죽이고 있는 것일까.
  물론 세월은 동인 단위로 보면 왜 깊은 자신의 흔적을 남긴 셈이다. 20대 후반에 만나 30대 초반까지 열렬히 움직이다가 이제는 모두 40대라는 개인적 나이도 그러하고, 당시에 출판사 직원, 교사이던 직업들이 신문사 부장, 출판사 사장, 교수, 개업의사 등등으로 변화한 것이 어김없는 현실이다. '맨주먹 붉은 피'의 혈혈단신이다가 아내를, 아이를 자신의 식구로 해서 살아가는 처지로 뒤바꿔 것은 물론 개인의 시적 성과물을 많게는 6권에서 최하 한 권 이상 간행한 중견시인들이 되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그러한 현존적 변화뿐만이던가. 시인의 눈앞에 펼쳐진 현실도 많이 변했다. '5월시' 라는 동인 이름도 기피되던 현실에서 그 참혹한 광주 5월이 광주민주화운동으로 명패를 달리 달고 존재하고 있으며, 외채 때문에 완전히 망해 버린 나라가 될 것이란 흉흉한 풍문 대신 어쨌든 88올림픽을 치르고 월드컵 유치를 성사시키는 쾌거(?)를 선전하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물어본다. 무엇이 달라졌는가고. 그때 젊은 청춘의 눈앞에 이것만은 분명히 해결되어야 한다던 근원적 모순은 어찌 되었는가. 분단시대의 아들이란 말은, 형태를 달리하여 더욱 숨막히게 하는 억압과 착취라는 말은 이제 소용없는 지나간 꿈결 속의 잠꼬대일 뿐인가.
  레닌의 동상이 무너지고 밧줄에 질질 끌려가는 모습을 보면서 덧없는 인생무상만을 되뇌고 있었야만 하는가.
  시인이란 이름 앞에 아름다움이란 없다 그가 혹시라도 아름다움을 새겨놓았을 때 그 마음 저편에는 추함과 비애, 근본적인 비극이 놓여 있다. 그 비극이 출렁거려 아름다움이 있을 뿐 추상적인 아름다움은 없다.
  그들이 역사라는 명패를 실존적 삶으로 뒤바꿔 살아내고자 했을 때부터, 아니 진정한 시인이 되고자 했을 때부터 그들에겐 휴식이 없다. 때로 쉬고 싶은 유혹이 없을 수 없지만 그럴 수 없다. 가장 뒤늦게 합류한 자로서 나는 다시금 이 이름들은 불러본다.
  김진경, 그는 최근 {별빛 속에서 잠자다}를 냈다. 시집 후기에 그는 이런 말을 썼다. "나는 우리를 압살했던 근대화의, 자본의 맹목적이고 무자비한 속도를 일시 정지시키고 이것이 과연 인간다운 것인가 물었던 80년대로부터 거품을 제거하고 작은 불꽃을 가져오려 했다." 80년대라는 열정으로부터 거품을 제거하고 그 속에서 진정으로 의미 있었던 그 무엇을 찾아보려고 하는 그의 노력은 '낙타'를 완성시켜 그 육체를 얻는다. 호들갑 떨지 말고, 또 가야 할 곳을 향해 순정한 마음으로 가자. 그에게서는 둠벙을 가는 소의 큰 눈이 보인다. 그러고 보니 낙타보다는 소가 훨씬 친숙한 것이 아닌가. 그의 시적 사유에서 아직 그 무엇인가가 낯설게 느껴지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의 시가 토종 소가 되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까.
  그러나 그는 그가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전교조 일을 하면서 지금껏 해직교사로 자신을 감당하고 있다.
  윤재철은 현재 실업자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는다. 『생은 아름다울지라도』라는 세번째 시집을 내고 상도 받았다. 대학 졸업하면서부터 불과 얼마 전까지 그를 붙들어맸던 '먹고 사는 일'의 폭폭함으로부터 무단 이탈하여 가끔 난지도도 가고 계룡산에도 간다.

  난지도
  거대한 쓰레기의 산
  쓰레기의 성채를
  푸룻푸릇 기어오르는
  저 풀은
  자본주의일까
  공산주의일까
  -「저 풀은」 중에서

  쓰레기 산을 기어오르며 생명을 뽐내는 풀에게 공산주의냐 자본주의냐 묻는 일은 낯선 일이다. 지나가는 소에게 당신 자본주의야 공산주의야 묻는 일과도 같다. 그러나 그의 그 물음으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깨닫는다. 자본주의의 궁극적 승리를 외치며 환호작약하는 자의 목구멍에서 얼쩡대는 목젖에 침을 놓으면 어떻게 되는가를 깨닫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무렇지 않게 온 몸에 힘을 빼고 시를 쓴다. 그런데 그가 먹고 사는 일로 단련된 사람이므로 그 몸이 이미 시가 되어버렸다. 그것이 상일 것이다. 그나저나 일을 해야하지 않을까? 이렇게 말하면 그는 내게 쓸데없는 소리말고 소주나 받아라며 술을 건넬지 모르겠다.
  곽재구, 그는 어디 있을까. 이 땅 구비구비 아름다운 것들을 찾아 그들에게 이름표를 달아주며 그 어디론가 가고 있는 것일까? 소원처럼 참 맑은 물살에서 그런 말을 했다.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다시 꿈꾸겠다고.
  한없이 덧없어 보인다. 그래서 어쩌겠냐고 묻고도 싶어진다. 그가 아무리 핏대를 세우며 말해도 사람들은 믿지 않는다. 팍큐 팍큐 얘기해도 웃기만 한다. 애초부터 분노와는 어울릴 수 없는 사람. 그래서 사람들을 분노하게 한다. 이렇게 참된 사람을 왜 못살게 구느냐고. 본인이 고등학교 교사를 그만둔 것은 자의에 의한 것이라고 아무리 얘기해도 우리는 믿지 않는다 그는 그로부터 십육 년이 지났어도 영화 한 편을 편하게 못 본다. 그래서 떠도는 것이리라. 하기사 가만히 있어도 그는 시를 쓸 것이다. 이미 졸업한 학생들의 이름으로도 그는 학생들과 살았던 기억과 그 학생의 오늘과 내일을 모두 껴안고 있기 때문이다.
  나해철은 압구정동에서 성형외과 개업중이다. 노량진 육교 옆에서 개업했다가 치료비가 너무 싸 망하고(?) 대치동으로 옮겼다가 이젠 세칭 성형외과 1번지 압구정동에서 개업 중이다. 스스로 아름답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마음을 고치는 일이 성형외과라고 말하는 것으로 봐서 이제 의사로서도 웬만큼 자리를 잡은 것 아닐까. 그런데 간행한 『긴 사랑』에 이런 시가 눈에 띄는 일은 웬일인가.

  말갛게 들여다볼 때
  죄스럽다
  부끄럽다
  못살겠다
  이런 말들이 다 합당하다
  가을은 와서
  힘줄을 빼놓고
  그대로 서 있으라 한다
  그대로 서서 바라보라 한다
  엑스레이 투시기처럼 내장을,
  말갛게 들여다보이는
  이 생을
      -「내장」 전문

  또 그런 말이 눈에 띈다. "붉은 단풍잎처럼 얇아서"(「내 마음의 겨울」), "단풍처럼 얇아진 얼굴을 들고"(「산을 그리며」)
  무엇이 부끄러운 것일까. 무엇이 이 자본주의 세상에 성공한 자를 얼굴 붉게 하는 것일까, 그냥 그렇게 산다고 누가 투덜거리기라도 하는 것일까.
  『무등에 올라』 바라보았던 세상과 그때 거기서 순정하게 앉아 있던 고향집들이 압구정동까지 따라 다니는 것일까. 나는 차라리 그가 뻔뻔해 졌으면 좋겠다. 돈도 많이 벌고 훌륭한 의사도 되고 그랬으면 좋겠다. 그때도 무등에 올라 보았던 풍경은 그대로일 것이며 고향집의 단정한 지붕은 단발머리 학생의 머리처럼 가지런할 것이니 걱정 말라고 말해 주고 싶다.
  이영진은 돈 없는 중소기업체 사장이 제일 슬프다는 것을 매일 실감하며 살고 있다. 외상으로 산 부품값을 제때에 못 갚아 쩔쩔맨다. 자실 사무국장, 신문사 정치부장, 중소기업체 사장… 맥락 닿지 않는 곳을 전전하면서 『숲은 어린 짐승들을 기른다』고 되뇌고 있다. 이 세상의 숲에서 그는 어린 짐승인가 아니면 하이에나쯤 되는 것일까. 최근의 '5월시' 동인들 중 그래도 패기와 열정이 가장 드높은 편이다. 그에게는 첫 시집 때도 그랬지만 항복이나 굴복이 없다. 얼굴보다 큰 안경을 걸치고 늘 세상을 꼬나보고 있다. 도무지 지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이다. 거세되지 않은 황소처럼 저돌적이다. 그러나 풀 옆에서 뛰어다니는 풀여치의 더듬이를 애잔한 모습으로 들여다보기도 한다. 나날의 이 지겹고도 무의미한 일상생활을 되짚어내면서 생활 뒷면에 걸쳐 있는 모순을 능숙한 작살꾼이 작살 끝에 장어를 찍어 올리듯 예리하게 드러낸다. 그 직관의 힘 복잡한 것을 단 한마디로 휘감아 요약하는 힘, 계통 없어 보이는 생업들이 모두 시 쓰는 일임을 실감케 한다. 바라건대 하는 사업이 잘 되기를. 그럴수록 시도 기운찰 것 같으므로.
  이상은 95년도부터 최근까지 시집을 낸 동인들에 대한 몇 가지 생각들이었다. 근면하게 시작업을 계속하는 박몽구, 한편 한편 도장을 새기듯 시를 뿜어내는 최두석, 뜸하지만 뚝심 하나로 세상을 견뎌가는 나종영, 최근에 신문사 부장이 되었지만 두번째 시집 초교지를 품에 안고 상재하지 못하는 고광헌, 모두모두 영락없는 시인들이다.
  세상이 어떠하든 더 낮은 자리에서는 눈을 떼지 않고 자신을 한없이 비판하고, 되돌아보면서 동시에 우리 모두에게 좋은 세상을 꿈꾸는 자가 시인이라면….
  그리고 더듬거리는 말로 세상을 사랑한다며 몇 줄의 글로 목숨이 살아 있다라는 것을 실감하는 자가 시인이라면….
  이제 이 글을 마칠 때가 된 것 같다. 그런데 빠진 이름이 있다. 동인 박주관이다. '5월시' 동인지 5집까지 계속 참여한 바 있는데 왜 나는 이름을 빠트리고 만 것일까? 시집 {남광주}의 아욱극을 잊은 것도 아니고 누구보다도 시적 열정이 뜨거운 시인을 왜 나는 빠트렸는가? 사연은 이렇다. 85년 '5월시' 동인지가 나오고 필자가 동인으로 합류하기로 결정된 뒤 우리는 시 동인지라는 그릇으로 당대 사회에 의미있는 그 무엇을 감당하기엔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5월문학'이란 이름으로 확대 개편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소설가 임철우, 이창동, 유양선, 평론가 홍정선, 김태현, 송승철, 이현석, 화가 김경주 등을 합류시켜 통합 문예지로 나아가자고 결의를 다졌다. 그때 박주관 시인은 문예진흥원에 있었고 어느 일간지에 88올림픽이 잘 치러졌으면 하는 시를 투고한 바 있는데 그 점을 동인들은 문제삼아 해명을 요구했다. 그런 일이 있은 뒤부터 얼마간 관계가 소원해지고 통합 문예지로 거듭나야 한다는 생각도 재정적 이유 등등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그러면서 세월이 흐른 것인데 공교롭게도 그 이후 동인지라는 이름의 활동도 뜸해지면서 덧없이 관계도 흐려지고 만 것이다.
  공식적으로 얘기될 이야기가 아닌 것 같은데도 이를 끄집어내는 것은 이 글의 결론에 맥이 닿기 때문이다. 80년대 '5월시'는 한쪽에서는 과격한 집단이라고도 했지만 또 한쪽에서는 '문학주의자'들이란 비난도 받은 바 있다. 그러나 실제로 따져본다면 동인지 처음부터 그랬고 지금까지도 그렇지만 그야말로 순정한 문학주의자들이 당장 눈앞에 닥쳐진 민족사적 비극 앞에서 소위 순수문학이라는 틀로 숨지 않고, 그러나 그 문학을 매개로 하여 (매개가 아니라 목숨으로) 세상을 살아낸 것이 '5월시' 가 아닌가 한다. 역사를 당대 현실을 자신의 운명으로 여기되 그 운명을 시라는 목숨으로 감당해 온 과정, 그것이 초기 '5월시'의 모습이 아닐까하는 생각이다.
  그 부끄러움, 그 순정함, 그것이 요즘 생각하면 별것 아닐 일에도 엄결성의 잣대를 서로에게 들이댔던 것 아니었을까? 그러면서 안타깝게 위태롭게 그 상처들을 극복하려고 발버둥쳐 온 것이 아닐까?
  이를 평가하는 것은 동인 이외의 사람들 몫이리라. 다만 어눌한 말로 이것저것 생각해 보는 것은 90년대 '5월시' 는 무엇인가를 가늠해 보기 위함이다.
  동인지가 이제 필요한가? 이제 개인적 능력으로 시를 써나가되 예전의 정신적 에꼴을 잊지 않으면 되는 것인가? 아니면 보다 다른 형태로 서로를 추스리고 엮어서 그 무엇인가를 해야 할 것인가? 그도저도 아니면 친목모임으로 만족하고 그냥 웃고 있으면 될 것인가?
  서로가 의당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할 일들을 지금은 미루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96년이다. 80년대 노력들을 한꺼번에 매도하는 말들이 횡행하고, 집단의 선을 잃어버린 개인만이 개인적 욕망의 세계로 처박혀서 옹알이만 하고 있는 세상에 그래도 그래선 안된다고 말할 수 있는 힘이 '5월시' 에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망발일까? 그래도90년대에 이르기까지 시인됨을 낑낑 앓으면서 80년대가 드리워놓은 상처를 극복해 가는 힘이 시쟁이들한테도 있을 수 있다고 믿고 다시 걸어보자고 얘기하면 이것은 헛된 권유가 될 것인가?
  어쨌든 나는 다시 동인들 가슴 앞에 압핀으로 시인이란 이름을 눌러두면서 글을 맺는다.